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론⟫과 논리실증주의

Ⅰ.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론⟫

1-1.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비엔나에서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유대인 출신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명한 철강 재벌인 아버지와 가톨릭교도 부인과 아홉 자녀가 있는 대가족이었고, 자녀 모두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브람스가 손님으로 자주 왔고, 그의 형 파울은 1차 세계대전으로 한 팔을 잃었음에도 명성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비트겐슈타인은 14살까지는 가정교육을 받고, 그 후 3년간 린쯔에 있는 실업학교에 다녔는데, 그곳의 동기생 중 한 명이 히틀러였다.

1-2. 비트겐슈타인은 학교를 다닐 때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신앙생활을 그만두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공학을 공부해 맨체스터 대학에 갔는데 거기서 비행기의 제트추진 엔진을 설계했다. 그는 러셀의 ⟪수학의 원리⟫와 프레게의 저작을 읽고, 1911년에 예나 대학의 프레게를 찾아갔다. 프레게의 권고로 그는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가서 다섯 학기를 러셀의 지도하에 있었다. 러셀은 그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보고 그가 능력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었다.

1-3. 비트겐슈타인은 1913년 케임브리지를 떠나 자신이 만든 노르웨이의 오두막에 은둔했는데, 그 시기에 그는 일생 동안 유지할 그의 철학관을 보여 주는 비망록과 편지를 썼다. 그는 철학은 연역적 학문이 아니고 또한 자연과학과 똑같은 위치에 놓일 수 없다고 기록했다.

‘철학은 실재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지 못하며, 과학적 탐구를 확증할 수 도 없다.(NB 93)’

1-4. 1914년에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오스트리아 포병대에 자원입대했고, 1918년 11월 이탈리아 군인에게 붙잡혀 몬테카시노 근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 철학적인 생각들을 일기에 썼고, 수용소에 있을 때 그 철학적 생각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판된 철학책 ⟪논리철학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으로 빛을 보게 된다. 그는 수용소에서 책 원고를 러셀에게 보내, 후에 네덜란드에서 만나 토론을 한다. 책은 1921년에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얼마 후 오그던의 영어 번역과 러셀의 머리말을 덧붙여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1-5. ⟪논리철학론⟫은 간결하고, 우아하고, 수수께끼 같다. 일련번호가 붙은 문단들로 구성되어 있는 그 책은 ‘세계는 성립할 수 있는 경우들 전체다’로 시작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로 끝난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의미에 관한 그림이론(picture theory)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명제들로 이루어진다. 명제(proposition)은 사고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이고, 사고(thought)는 사실들에 대한 논리적 그림이고, 그리고 세계(world)는 사실들 전체이다.

1-6. ‘런던 기차는 11.15에서 출발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와 같은 문장은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와 사고는 문자 그대로 그림이라 믿었다. 만약 명제와 사고가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언어가 사고를 심하게 왜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일상 언어에서도 묘사적 요소가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나의 포크가 나의 나이프 왼쪽에 있다’는 문장은 똑같은 낱말들로 이루어진 다른 문장, 즉 ‘나의 나이프가 나의 포크 왼쪽에 있다’와 전혀 다른 말이다. 첫 번째 문장이 그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은 ‘나의 포크’라는 낱말들이 ‘나의 나이프’라는 낱말들 왼쪽에 나타난다는 사실이다(그러나 두 번째 문장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낱말들의 공간적 관계는 사물들의 공간적 관계를 묘사한다(TLP 4.102).

1-7. 이렇게 단순한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문장을 글이 아닌 말로 한다면 그것은 식탁 위에 있는 것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공간적 관계라기보다는 소리들의 시간적 관계이다. 이것은 말하는 순서와 공간적 배열이 일정한 추상적 구조를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철학론⟫에 따르면, 그림이라면 어느 것이 그것이 묘사하는 것과 공통된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 그는 이 최소한의 공통점을 그것들의 논리적 형식(logical form)이라 말했다. 대부분의 명제들은 앞에서 본 경우와는 다르게 명제가 묘사하는 상황과 공통된 공간 형태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명제라면 어느 것이나 그것이 묘사하는 것과 공통된 논리적 형식을 가져야 한다.

1-8. 비트겐슈타인은 왜곡된 일상 언어 뒤에 숨어있는 사고의 묘사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러셀이 제시한 것처럼 논리적 분석을 해 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우리가 이 분석을 하다보면 결국 전혀 복합적이지 않은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들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완전히 분석된 명제는 원자 명제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데, 각각의 원자 명제는 단순 대상의 이름들, 즉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옳거나 그르게 묘사하는 방식에서 서로 관련된 이름들을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완전한 분석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지만, 명제가 표현하는 사고는 완전히 분석된 명제의 복합체를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 우리는 복잡한 규칙들을 부지불식간에 가동해서 명제가 표현하는 사고를 일상의 언어로 표현한다. 언어와 세계의 연결은 마음속에 있는 사고의 궁극적 요소들과 세계의 본질을 구성하는 원자 대상들(atomic objects) 사이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런 상호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말할 수 없다. 그건 우리 각자가 사적 언어를 만들어 혼자서 확인할 수밖에 없는 신비한 과정이다.

1-9. 명제와 그 명제가 나타내는 세계 구조에 대한 그림 이론을 해설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양한 종류의 명제들이 어떻게 원자 그림들의 결합으로 분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과학은 명제들로 이루어지는데, 그 명제들의 진리치는 그 명제들을 구성하는 원자 명제들의 진리치로 결정된다. 논리학은 항진 명제들(tautologies), 즉 그 요소 명제의 진리치가 뭐든 상관없이 옳은 복합 명제들(complex propositions)로 이루어진다. 어떤 명제들은 그 자체가 사이비 명제(pseudo-proposition)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명제들 중 윤리학과 신학의 명제도 있다. 그리고 ⟪논리철학론⟫자체의 명제들을 포함한 철학 명제들 역시 사이비 명제에 속하게 된다.

1-10. ⟪논리철학론⟫은 다른 형이상학 논문들처럼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기술하고자 했으나,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림은 그것이 그리는 대상과 독립적일 수밖에 없으며, 올바른 그림이 있는 것처럼 잘못된 그림 또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명제라면 어느 것이나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포함해야 하므로, 명제는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그릴 수 없다. 형이상학자가 말하려는 것은 그저 보일 수 있을 뿐이다. ⟪논리철학론⟫의 문단들을 딛고 올라가 세계를 정확히 보게 되면 걷어차야 하는 사다리와 같다.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비철학적 명제들을 명료화하는 활동(activity)이다. 일단 비철학적인 명제들이 명료해지면 그 명제들은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비출 것이고, 그럼 철학자가 말하려는 것이 보이겠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1-11. 과학도 철학도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보여주지는 못하나, 이것이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심이 물음(question)이 있을 때에만 의심일 수 있고, 물음은 답이 있을 때만 물음일 수 있으며, 답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을 때에만 답일 수 있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과학적 물음의 답을 모조리 알게 되었을 때조차도 삶의 문제(problem)는 완전히 그대로 남는다고 느낀다. 물론 답을 모조리 알게 되면 더 이상 남은 물음이 없을 텐데, 이 자체가 삶의 문제에 대한 답이다. 삶의 문제는 문제가 사라지는 순간 해결된다(TLP 6.5-6.521).”

사람이 불멸을 믿는다고 삶의 의미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원히 산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영생 그 자체가 하나의 난문제인 셈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신은 세계 속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신비한 것은 사물들이 세계 속에 어떻게 있느냐가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다(TLP 6.432, 6.44).’

1-12. 철학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나, ⟪논리철학론⟫만은 철학이 해 줄 수 있는 일을 했다 – 비트겐슈타인도 그렇게 믿었다. 완벽한 책을 내놓았기 때문에 그는 철학을 그만두고 평범한 일들을 했다. 아버지 칼 비트겐슈타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와 형제자매들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나,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자기 몫을 포기하고 수도원에서 정원사 일을 하거나 시골 학교에서 교사를 하며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1926년 한 학생이 가학성 벌을 받았다고 고소하며 기소되었고,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교사를 그만두었다.

Ⅱ. 논리실증주의

2-1. 비트겐슈타인은 비엔나로 돌아왔고, 자기 누나를 위해 새로 지을 집을 설계하는 걸 도왔다. 그는 1922년에 누나에게서 비엔나 대학의 과학철학 교수로 있는 슐리크(Moritz Schlick)를 소개받아, 그와 함께 철학적 탐구를 다시 시작했다. 두 사람은 1927-8년 월요일 저녁마다 만났고, 카르납(Rudolf Carnap)과 바이스만(Friedrich Waismann) 등 다른 사람들도 만났다. 1929년 그는 (사후 ⟪철학적 논평⟫으로 출판된) 철학 원고를 쓰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갔다. 그가 없는 동안 토론 그룹은 의식적인 철학 운동을 전개했고, ‘비엔나 학단의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선언문을 발행했다. 그 선언문은 과학적 세계관에 마땅히 내놓아야 하는 예전 그대로의 형이상학 체계에 반대하는 캠페인의 시작이었다.

2-2. 반형이상학 프로그램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의 일부 발상들을 활용했고, 필연적 진리가 필연적인 것은 오로지 그것이 항진 명제이기 때문이라 선언했다. 이는 수학적 진리가 세계에 관해 무언가를 알려준다는 것을 부정함과 동시에 그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승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세계에 관한 지식은 오직 경험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고, 명제는 경험에 의해 검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명제의 의미는 명제가 검증되는 방식이라는 검증원리는 형이상학을 공격하는 강력한 무기였다. 두 형이상학자가 절대자의 본성이나 우주의 목적을 놓고 논쟁을 벌일 경우, ‘그 논쟁이 가능한 어떤 경험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2-3. 곧바로 검증 원리의 위상과 공식에 관해 여러 논쟁이 벌어졌다. 검증 원리 자체는 항진명제인가? 검증 원리는 경험에 의해 검증 가능한가? 어느 답도 만족스러울 것 같지 않다. 게다가 형이상학적 신조들 못지않게 과학의 일반 법칙들도 결정적인 검증을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과학의 일반 법칙들은 여전히 반증될 수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검증 원리를 반증 원리로 대체해야 할까? 그럴 경우, 존재 주장들이 어떻게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존재 주장들은 우주를 남김없이 돌아다녔을 경우에만 결정적으로 반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 기준을 좀 더 약한 형태로 표현하여, 명제는 명제의 옳고 그름과 관련 있는 약간의 관찰들이 있을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중해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검증 원리에 대해 조건부로 동의했지만, 당시 그는 수학적 명제 의미는 명제의 증명 방법이라는 선천적으로 유사한 주장을 옹호했다.

2-4. 실증주의자들은 철학의 진정한 과제가 보편적인 명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닌, 비철학적인 진술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이 점으로 비트겐슈타인과 하나가 됐다. 그들이 선택한 명료화의 방법은 경험적 진술들이 경험의 직접 기록인 요소 진술들 혹은 ‘원초’(protocol) 진술들로부터 어떻게 진리 함수적으로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원초 진술에 나오는 낱말의 의미는 그 낱말이 나타내는 경험의 특징을 가리키는 예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에서 비롯된다.

2-5. 이 프로그램은 큰 장애물에 부딪쳤다. 원초 진술로 기록된 경험들은 각 개인에게 사적으로(private) 나타난다. 만약 의미가 검증에 좌우되고, 우리 각자가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어떤 과정에 의해 검증을 수행한다면,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의미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슐리크는 이 물음에 형식(form)과 내용(content)을 구별하면 된다고 답했다. 나의 경험 내용은 내가 붉은 어떤 것을 보거나 푸른 어떤 것을 볼 때와 같이, 내가 가지고 있거나 내가 겪는 것이다. 이것은 사적이고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경험의 형식이나 구조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공통일 수 있다. 내가 나무를 보거나 석양을 볼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보는 것과 동일한 경험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 나무가 푸르다고 하고 석양이 붉다고 하는 한, 우리는 서로 소통할 수 있고 과학의 언어를 구성할 수 있다.

2-6. 비트겐슈타인은 이 해결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유아주의(solipsism)의 위협을 받지 않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비엔나 학단을 멀리하고 케임브리지로 완전히 돌아와서, 《논리철학론》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고 트리니티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비엔나 학단은 슐리크와 베를린의 라이엔바흐가 공동 편집한 《인식》이라는 학술지에서 반형이상학 프로그램을 계속했다. 비엔나 학단의 기본적인 생각들은 1936년 에이어(A. J. Ayer)의 《언어, 진리, 논리》가 출판되면서 영국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 해 슐리크는 한 학생이 총을 쏴 살해되었고, 비엔나 학단은 탁월한 일부 회원들이 정부의 탄압으로 망명을 떠나면서 1939년 막을 내렸다. 비엔나 학단이 후세를 위해 남긴 아주 뛰어난 유산은 1935년 포퍼(Karl Popper)의 《과학적 발견의 논리》 출판이었다.

다윈과 자연선택부터 니체까지

1.다윈과 자연선택

1-1. 찰스 다윈은 1809년 슈루즈베리에서 태어나 ,1825년 에든버러의 의대생으로 입학했지만 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케임브리지의 크라이스트 칼리지로 가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식물학 교수의 추천을 받아 군함의 박물학자로 지명되었다. 5년간의 항해동안 그는 지질학, 식물학 등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발굴했고 이를 통해 해양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비글호항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1-2. 그 후 다윈은 1840-1850년대에 자신의 사유지에서 식물군과 동물군의 연구를 통해 나온 초안을 여러 사람이 돌려보게 함으로써 자연선택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를 1960년대 쯤 책으로 출판할 계획이었으나 다른 동물학자인 월리스가 자연선택과 유사한 적자생존 이론을 학회에 발표해 그는 자연선택이론의 독자성과 우선권을 위해 《종의기원》을 서둘러 출판했다. 이후 그는 여러 논문을 출판하였고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책 《인간의 계보, 선택과 성의 관계》에서 그는 인간이 오랑우탄, 침팬지와 공통된 조상을 갖는다는 주장을 옹호했다.

1-3. 다윈은 진화론을 맨 처음 제안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대 시칠리아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자연선택의 원리를 암시했고 스웨덴의 자연주의자 린네는 식물과 동물의 종을 분류해 다윈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린네와 그 밖의 분류학자들은 식물과 동물의 왕국을 속과 종으로 나누었다. 예를들면 모든 사자는 동일한 종이고, 사자종은 호랑이나 표범과 같은 다른종을 포함하는 고양이 속의 구성원이다. 일정한 종 내에서 개체의 형질은 크게 변할 수 있지만 종의 규정적 특징은 종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종의 자손을 낳기 위해 다른 구성원들과 교배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종의 구성원들 사이의 결합은 일반적으로 자손을 낳지 못한다.

몇몇 자연주의자들은 종교적인부분에서 이유를 찾으려기보다는 하나의 속에 포함되어 서로 다른 종 사이의 유사점이 머나먼 공통조상의 계보에 의해 설명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또한 종의 어느 세대에서 자손에게 넘겨줄 유리한 형질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장 높은 나뭇잎에 도달하려고 몸을 뻗치던 기린은 목이 늘어났고 이는 목이 긴 자손을 낳을 수 있게 해주었다.

다윈은 이러한 고대의 자연선택 관념을 이용해 종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설명했는데, 이러한 이론의 근본 바탕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유기체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정도에 따라 크게 변한다. 둘째, 모든 종은 세대마다 증가시킬 수 있는 만큼 번식할 수 있다. 셋째, 하지만 종이 이렇게 번식하지 않는 것은 각 세대에서 극소수의 자손만이 살아남아 번식하기 때문이다.

1-4. ‘이와 같은 생존 경쟁으로 인해, 모든 변이는 그것이 아무리 경미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어떤 원인으로 진행되든 간에, 만일 다른 유기체나 외부 자연과의 무한히 복잡한 관계 속에서 종의 개체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하다면, 그 변이는 개체를 보존하려는 경향을 가질 것이며, 일반적으로 자손에게 유전될 것이다. 따라서 그 자손 역시 더 잘 살아남을 기회를 갖게 될텐데, 그것은 종의 많은 개체들이 주기적으로 태어나기는 하나 그들 가운데 소수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OS 52)’

다윈은 세 가지 다른 종류의 선택을 구별했다. 목적에 가자 적합한 표본을 위한 인위선택과 목적적이지 않은 자연선택인데 자연선택은 다시 좁은 의미의 자연선택과 성 선택으로 나뉜다. 전자는 개체가 번식하기에 충분할 만큼 오래 살아남을지 여부를, 후자는 그렇게 살아남은 개체가 누구와 짝짓기 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적응변이는 그 변이 자체가 유전된 것이고 특유의 유리한 변이의 기원은 전적으로 우연의 문제일수 있다고 다윈은 믿었다.

자연선택은 단일한 종에 속한 형질들의 경우 쉽게 예증되고 관찰될 수 있다. 그 예로 자작나무에 사는 나방이 새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자작나무에 가까운 색을 띄는 형질로 점차 바뀌어 가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다윈은 자연선택이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되면서 식물과 동물의 완전히 새로운 종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굉장히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었을 것이며 실제로 지질학점 관점에서 화석을 살펴보았을 때 종의 탄생과 소멸을 다윈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1-5. 다윈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철학사가 아니라 과학사에 속한다. 그러나 다윈의 생물학적 연구가 종교철학과 형이상학 전반에 미친 영향 때문에, 어떤 철학사도 다윈에 대한 언급을 빠뜨릴 수 없다.

  1. 존 헨리 뉴먼

2-1. 교회단체가 다윈의 사상을 반대할 때 종교작가인 존 헨리 뉴먼은 이를 받아들였다. 《종의기원》이 발표된 직후 그는 각각의 종마다의 독자적인 창조를 믿는 사람은 화석이 박힌 바위의 창조역시 믿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다윈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했으며 과학과 종교사이의 어느 논쟁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뉴먼은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다녔으며 오리엘대학의 특별 연구원을 역임했다. 또 세인트 메리 성당의 주교 대리였으며 동시에 설교자로서 지속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복음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후에 기독교신앙에 대한 가톨릭의 해석이 옳다는것을 확신하고 로마 카톨릭교로 개종하면서 오리엘대학의 특별 연구원직에서 물러났다.

뉴먼은 더블린에 세워진 가톨릭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그 시절 강의와 연설들을 모아 《대학의 이념》이라는 교육이론의 고전을 출판했다.

2-2. 뉴먼은 신의 존재를 믿는 것 뿐 아니라 구체적인 종교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완전히 이성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세상에 입증해 보이려는 욕구 때문에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종교적인 믿음의 결론에 대한 증거가 신앙의 완전한 헌신에 부적합하게 보인다면 종교적 믿음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해 이성의 뒷받침 없이 신앙을 채택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고, 종교교리를 고수하는 것 자체가 이성적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문제를 다룰 때 그는 비종교적 맥락에서 믿음의 본성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관심을 자주 보였다. 그가 제기한 철학적 물음은 적합한 증거나 논증 없이 명제를 승인하는 것은 언제나 그른가였다. 명제가 확신이 아닌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에 의해 정당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로크에 대응하여 뉴먼은 우리의 대부분의 믿음이 빈약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잘 유지된다고 지적하고, 증거의 힘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 무조건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일도 과학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종교적 믿음은 추측에 근거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합리 하다고 비난받을 수 없다. 유대교의 역사에서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증거가 발견될 수 있지만 이 증거는 신의 존재와 계시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 에게만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왜 신을 믿어야하는지 물으면 그는 양심의 소리에서 발견될 수 있는 신성한 능력에 대한 내적 경험에 호소하라고 말한다.

2-3. 뉴먼의 기독교적 변증론이 포함된 일반적인 인식론적 설명은 신앙에 공감하지 않던 철학자들도 감탄하게 했다. 그것은 흄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의 믿음과 확실성에 관한 논의들 가운데 최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니체

3-1.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작센의 루터교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대학시절 전공은 고전문헌학 이었는데 학위를 받기도 전에 정교수가 될 정도로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니체는 대학교수가 되기 직전에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를 읽은 것과 작곡가 바그너를 만난 것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 두 사람의 영향을 받아 제일 처음 출판해낸 책이 《비극의 탄생》이다.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 정신의 두 측면을 대비했다. 한 측면은 비극에서 표현된 열광하는 비합리적 열정이었고 다른 측면은 서사시나 미술에서 표현된 절제력 있는 조화로운 아름다움 이었다. 그리스 문명의 성취는 그 둘 사이의 종합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3-2. 니체는 1873년에서 1876년 사이에 네편의 평론으로 이루어진 《반시대적 성찰》 출판했다. 4편중 두 편은 예수의 생애 저자로 유명한 슈트라우스와 과학자의 허세에 대한 비판이고

나머지 두 편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878년쯤 그는 염세주의에 숨이 막힐것 같아 바그너와 인연을 끊었고, 쇼펜하우어에 대한 열정 또한 식었다. 이 때문에 그는 후에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긍정의 삶으로 대체하길 희망하는 저작들을 출판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만 그답지 않게 공리주의 도덕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과학을 예술보다 우월한 것으로 평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예술이 일생일대의 과업이라는 끊임없는 근원적 확신을 시적이고 경구적인 저작형식으로 드러냈다. 그는 심리적 문제로 인한 병 때문에 교수직을 조기 은퇴하고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여러 곳에서 지냈다. 이때 그는 여러 작품을 남겼다. 1882년, 니체는 정신해방의 실천적 표현으로 독일의 물질주의자 이, 러시아의 남성평등주의자 살로메와 ‘삼위일체’를 맺고 동거를 시작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이 책에는 니체의 세 가지 신념이 담겨 있었다. 첫째, 현 상태의 인간이 초인에게 추월당한다. 여기서의 초인은 몸과 영혼이 당당하게 생긴 더 고등하고 강하고 의기양양하고 유쾌한 인간을 뜻한다. 둘째, 기독교적인 도덕적 우선권이 완전히 뒤집히는 가치의 재평가가 있을 것이다. 셋째, 언젠가 일어난 적이 있는 모든일이 무하하게 주기적으로 순환하면서 또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념들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니체의 저작에서 예언적인 방식은 줄이고 논증적인 방식을 늘린 형태로 해설되었다.

3-3. 1888년은 니체가 미친듯이 글을 쓴 해였다.《반그리스도》,《바그너사건》,《우상의 황혼》등이 있다. 1990년, 그는 일생을 정신이상으로 마감했다.

니체는 20세기 유럽대륙, 특히 러시아의 문학과 독일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 20세기 후반 분석적전통의 윤리학자들은 전통도덕에 관한 니체의 맹공격에 대해 응답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과 실용주의부터 영국관념주의와 그에 대한 비판까지

1.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과 실용주의

 

1-1.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1842-1910)는 프레게보다 여섯 살 더 많았지만, 철학은 훨씬 늦게 시작했다. 그는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를 신봉한 신학자의 아들이자 유명한 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형으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국 교육을 받기도 했고, 프랑스와 독일의 학교에서 유럽교육을 받기도 했다. 화가와 의사의 갈림길에서 망설였지만 1864년 하버드 의과대학에 등록했다. 학위를 취득한 후 건강이 나빴고 조울증을 앓았으나 프랑스 철학자 르누비에(Charles Renouvier)의 저작을 읽고 회복했다. 그의 관심은 점점 경험적 심리학으로 옮겨가 1876년 처음으로 심리학 실험실을 만들었다. 심리학의 과제는 두뇌 상태를 의식의 흐름 현상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그 책이 표준적인 교과서가 되기는 했으나, 그것이 출판될 무렵 제임스는 심리학을 떠나 철학 교수가 되었다. 제임스는 과학적 세계관을 신, 자유,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과 조화시키기를 열망했다. 그는 이론적 증거를 억지로 끌어들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을 논의하면서 진리를 믿어야 할 의무가 과오를 피해야 할 의무와 비중이 같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사람들마다 각자 무엇을 신이라고 생각하든 자신을 그것과 관련 있는 존재로 이해할 때 그 사람들이 갖는 감정, 행위, 경험을 음미하려고 애썼다. 그는 신비주의 현상이나 다른 형태의 종교적 감정의 진정성과 효력이 입증되기를 기대하면서 그것들을 경험적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제임스가 미국철학의 일인자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1907년 《실용주의》 출판 덕분이었다, 그는 저작의 제목과 논지가 퍼스한테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 더할 나위없이 명료하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인지 가능한 실제적인 유형의 효과를 가졌는지를 고려하면 된다. 이와 같은 효과가 즉시 나타나건 나중에 나타나건 그 효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어쨌든 긍정적인 의의를 갖는 한, 그 당시 우리로서 그 대상에 가질 수 있는 모든 생각이다”

1-2. 그러나 퍼스의 실용주의는 의미 이론이자 인간과계에 관련된 객관적 것인 반면 제임스의 실용주의는 진리 이론이자 개인주의적이며 주관주의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퍼스는 자신의 이론이 제임스의 이론과 무관하다고 말하고 자신의 이론을 ‘프래그머티시즘(pragmaticism)’이라고 고쳐 불렀다. 제임스의 실용주의에 따르면, 관념은 그것이 우리 삶에 유익하다고 믿는 한 옳다. ‘옳음은 신념에 유리하게 좋은 것으로 판명된 모든 것을 일컫는다.’ 즉 ‘옳은 것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비평가들은 거짓을 믿는 것이 진리를 믿는 것보다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진리가 장기적인 만족과 동일시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반대했다. ‘신의 wswo에 대한 가정이 가장 넓은 의미로 만족스럽게 이릉 해낸다면, 그것은 옳다’

제임스는 자신의 이론이 객관적 실재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실재와 진리는 서로 다르다. 사물은 실재하는 것이다. 옳은 것은 과념과 신념이다. ‘실재가 옳은 것이 아니라 신념이 옳다. 그리고 신념은 실재에 대해 옳다’. 어떤 신념이 옳고 그른지를 알게 되는 것은 그 신념의 결과가 좋은지 어떤지 발견함으로써가 아니라 신념이 습관적으로 옳다 그르다고 말하는 것들의 차이점에 알기 쉬운 실용적 의미를 부여한 결과다. 관념과 실재의 대응 관계에 대한 확인이나 검증 과정을 통해서 관념을 옳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의 실용주의 체계는 어떤 실재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그 실재가 만족스럽다는 신념의 필요조건인지 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이 없어도 그 대상에 대한 신념이 만족스러울 수 있는지는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있다.

제임스는 《다원적 우주》에서 실용주의를 이용해 종교적 세계관을 옹호하였다. 그는 세상의 수많은 고통으로 인해 무한하고 절대적인 신성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하자면 초인의 인식이 능력이나 지식에 혹은 둘 모두에 한계가 있다고 믿었다. 신 역시 미래를 결정하거나 예언할 수 없으며, 세상이 더 좋아질지 나빠질지는 신의 도움 아래 인간이 행하는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

제임스는 자신의 형이상학 체계를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실용주의 프로그램은 그가 죽은 뒤 다른 사람들, 특히 듀이(John Dewey)가 이어받았다. 듀이는 교수 생활을 하면서 실용주의를 아주 특별하게 미국의 교육 분야에 적용했으며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주제에 관한 저작들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그의 변함없는 목적은 자연과학과 공학에서 그토록 성공적이었던 탐구 방법들이 인간 노력의 다른 분야들 어디까지 연장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2.영국 관념주의와 그에 대한 비판

 

2-1.그토록 굳건하게 유지되던 영국 경험주의 전통은 존 스튜어트 밀이 죽자 반발에 부딪치기 시자했다. 밀이 죽고 1년이 지난 1874년, 밸리올 칼리지의 교수인 그린(T.H.Green,1836-82)은 경험주의의 전제 가정들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상당 분량의 서문을 붙여 흄의 《인간본성론》을 출간했다. 또 머튼 칼리지의 브래들리(F.H.Bradley)는 영국 헤겔주의의 기초 고전인 《윤리학 연구》를 출간했고. 1893년에는 영국 관념주의의 완전 결정판인 《현상과 실재》를 완성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케임브리지에서는 헤겔 논리학의 방법들과 몇몇 신조들이 트리니티 칼리지의 철학자 맥타가트(J.M.E.McTaggart)가 쓴 일련의 논문을 통해 자세히 소개되었다.

제임스의 실용주의와 마찬가지로 그린의 관념주의는 어느 정도 종교적인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자연적이고 자의식적인 유일한 존재가 있으며, 실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의 활동이자 표현이다. 우리 모두는 이 초자연적인 존재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 존재의 표현인 세계의 부분들로서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가 그것을 통해 즉시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자신을 세계와 구별하는 그 자의식에 대한 약간 불완전한 상태의 분담자로서도 관련되어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관계가 도덕과 종교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브래들리와 맥타가트는 다소 간련성이 적은 기독교적인 내용의 관념주의를 배제하고, 결국 유한한 자아들의 공동체 이외의 다른 어떤 절대자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실재가 본질상 완전히 초자연적이라는 것은 영국 관념주의자들의 공통점이었다. 그들은 정신과 물질이 존재의 동등하고 독자적인 두 영역이라는 이원론적 관념을 거부했다. 그러나 브래들리의 ‘일원론’은 또 다른 근본적인 양상을 가졌다. 그는 실재가 전체상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진리성은 개별적인 원자 명제들의 속성이 아니라, 오로지 전체로서의 존재에 관한 판단들의 속성이다. 그는 《현상과 실재》엥서 우즈를 서로 아무 관련 없는 독립적 실제들의 복합체라고 생각하면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우주의 개개의 모든 것은 개개의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있다. 바로 그 본질로 인해 내적으로 관련되어있다.

2-2. 관념주의의 우월함은 20세기 초 케임브리지의 젊은 두 철학자 무어(G. E.Moore,1873-1958)와 러셀(Bertrand Russel)에 의해 결정적으로 의문시되었다. 무어는   ‘판단의 본성(The Nature  of   Judgement      ,1899)’에서 실재가 정신의 창조물이라는 근본적인 주장을 거부하는 대신 플라톤의 실재론, 즉 개념은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실재이며, 세계는 서로 결합하여 옳은 명제가 되는 그런 개념들로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관념주의 논박’(The Refutation of Idealism)에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거부했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과 온전히 다른 어떤 것이며, 우리의 지식 대상은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별개이다. 또한 물질적 대상들은 우리가 직접 지각하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관념주의에 대한 무어의 저항은 러셀에게 충격을 주었고 러셀은 잔디가 실제로 푸르다는 생각에 벅찬 해방감을 느꼈다. 무어와 마찬가지로 러셀은 관념주의를 단념하는 대신 보편자에 대한 플라톤의 신조, 즉 개개의 모든 낱말은 특수한 것이건 일반적인 것이건 객관적 실재를 나타낸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벤담의 공리주의부터 존 스튜어트 밀의 발전

1.벤담의 공리주의

1-1. 영국은 유럽 전반을 뒤흔든 극심한 체계 격변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벗어났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죽은 뒤 오랫동안 도덕적, 정치적 사고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한 권의 책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1789년 잉글랜드에서 발간되었다. 그것은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이었고, 공리주의라고 알려진 학파의 창립현장이 되었다.

벤담은 1748년에 런던의 유력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몸집이 아주 작고 책을 좋아하며 조숙했던 그는 7살에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가고, 15살에 옥스퍼드 퀸스 칼리지를 졸업했다. 21살에 법정 변호사가 되었으나, 그는 당시의 법적 관행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유명한 법학자 블랙스턴(William Blackstone)의 강의를 들을 때 이미 당시의 법률 이론을 역겨워했다. 그는 영국의 법제도가 번거롭고 인위적이고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정당한 법의 원리에 비추어 밑바닥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믿었다.

 

1-2. 벤담은 그런 근본적인 원리를 생각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흄(David Hume) 덕분이라고 했다. 《인간본성론》을 읽고 비로소 진실에 눈을 뜨게 되었고, 공리성이야말로 모든 덕의 시금석이자 정의의 유일한 기원이라고 믿게 되었다. 벤담은 국교 반대파 화하자 프리스틀리의 논문에 근거해 시민들의 최대 행복이 국정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의미로 공리성 원리를 해석했다. 즉 도덕성의 진정한 표준과 법 제정의 참된 목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stes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에 있었다.

벤담은 1770년대 《영국법 논평》에 대한 비판 작업을 하면서 일부로 사회계약 개념을 공격하는 《정부에 관한 소론》을 출간했다. 동시에 그는 이탈리아 형법학자 베카리아의 착상을 바탕으로 처벌의 목적과 한계에 대한 분석해 공리성의 원리와 더불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의 핵심을 이루었다. 벤담은 《정부에 관한 소론》에서 ‘올바름과 그릇됨의 척도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라는 원리를 맨 처음 공표하였다,

 

1-3. 그는 1785년부터 1787년까지 유럽 횡단 여행을 하면서 기발한 형태의 감옥인 팬옵티콘(Panopticon)을 생각해냈다. 팬옵티콘은 교도관이 수감자를 완벽하게 감시할 수 있는 중앙 관측소가 있는 원형 건물이다. 그는 시범 감옥을 세우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정부를 설득했으나 조지 3세의 사적인 개입 때문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법 이론과 법적 관행에 관한 벤담의 관심은 당초 주목 대상이었던 형법을 넘어 크게 확대되었다, 민법의 혼란스러움에 격분한 벤담은 《법 일반에 대하여》라는 긴 논문을 썼다. 빈민 구제법에 대해 벤담은 원형 감옥 체제가 ‘극빈자’를 위한 구제소 역할을 하도록 건립되어야하며 구제소는 입소자가 자신들의 생활 유지비를 벌기 위해 노동할 경우 배당금을 지급하는 국영 합자회사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1-4. 1808년 벤담은 때마침 기념비적인 저서 《인도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스코틀랜드 철학자 제임스 밀(James Mill)과 친구가 됐다. 밀에게는 비범한 아들 존 스튜어트가 있었는데, 벤담이 바로 그 영재의 교육을 도와주었다, 법정에서 몇 년간 증거의 적합성 검사 업무를 보던 그는 일정 부분 밀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법적 절차와 관행을 비판하기보다는 정치를 개혁하고 헌법을 개정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의회 개혁론》을 쓰고 후에 근본적인 의회 개혁 초안이 상정되었다. 벤담은 수년간 헌법 초안 작업에 몰두했으나 죽을 때까지 마치지 못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무렵, 영국의 현행 헌법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부자들의 음모를 감추는 장막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군주제와 상원을 폐지하고, 보통 선거권에 의해 선출되는 연례 의회를 도입하고 영국 국교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벤담의 입헌적이고 진보적인 제안들은 영국을 넘어 다른 곳까지 확산되었다. 1811년에 벤담은 미국의 헌법 초안을 작성해야했던 제임스 메디슨에게 자신의 구상을 제안했으며 한때 자신의 헌법 체계가 콜롬비아 대통령인 시몬 볼리바르에 의해 중남미에서 시행되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1-5. 벤담의 이상을 받아들인 ‘철학적 급진주의자’ 그룹은 공리주의자의 쟁점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1823년 《웨스트민트터 리뷰》를 창간했다. 그들은 열렬한 교육 개혁 지지자였는데 벤담은 그리스 어와 라틴 어보다는 과학과 기술을 강조하는 중등 교육 과정을 고안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1823년에 열게 되었다. 이곳은 영구에서 종교 시험을 치르지 않고 입학할 수 있는 최초의 종합 대학 수준의 대학이었다, 1832년 벤담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유언에 따라 말든 ‘실물 초상’은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벤담의 노고에 더 알맞은 기념비는 의원 선거권을 널리 확대한 ‘대개혁 법안’이었다.

벤담을 잘 아는 사람들, 심지어는 그를 열렬히 추종했던 사람들조차도 이구동성으로 그의 지적능력은 정말 특출하고 대단하지만 감정에는 결함이 있는 편협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밀은 ‘벤담의 지식이 전적으로 경험주의적이기는 하나 경험이 매우 부족한 사람의 경험주의자였다’고 말했다. 밀이 보기에 벤담은 결코 원숙한 어른이 아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어린애였다’

 2.존 스튜어트 밀의 발전

2-1.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에게는 소년 시절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엄격한 가정교육으로 그는 학교에 다니지도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 세 살에 그리스 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열두 살에 플라톤의 원전을 다 읽었다. 밀이 지난날을 되돌아볼 때 그런 특별 교육의 가장 값진 점은 아버지가 내 스스로 생각하도록 놓아두었다는 것이었다. ‘생각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면 어느 것이든 내가 그것을 스스로 이해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지 않는 한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밀은 그런 교육이 자신을 ‘단순한 추론 기계’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신경쇠약에 시달렸고 가장 효율적인 개혁 작업조차 아주 무의미하게 보일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밀은 1828년 가을 워즈워드의 시를 읽으면서 스스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워즈워드의 시는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벤담의 학문체계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던 인생의 다양한 면들을 깨닫게 했다. 그는 위기를 극복한 뒤, 벤담을 다시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으나 벤담의 학문체계가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 모두 수정, 보완될 필요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밀의 사상은 영국 시인들 그중 콜리지(Samuel Tylor Coleridge)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게 되었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생시몽(Saint-Simon,1760-1825)의 초기 사회주의와 콩트(August Comte,1789-1857)의 초기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밀은 사회주의 프로그램에 대해 확신하지는 않았으나, 사유 재산 제도와 자유 시장 제도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생시몽주의자들의 이상주의에 찬사를 보냈고 그들의 많은 원칙들, 특히 완전한 남녀평등에 관한 그들의 주장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밀이 콩트와 생시몽주의자들한테서 얻은 것은 진보(progress)에 관한 견해였다. 밀은 콩트의 유기적 시기와 그 다음 시기에 비판적이고 파괴적인 시기가 있다고 보았으며, 자신이 그와 같은 시기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판적 시기의 최선의 성질과 유기적 시기의 최선의 성절이 결합할 미래이다. 그 미래에는 아무런 구속이 없는 사상의 자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어떤 식의 행위든 개인적인 행위의 무한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 유용한 것과 유해한 것에 관한 확신 역시 어린 시절의 고육과 일반적인 공감대 형성을 통해 마음속 깊이 새겨질 것이다.’

 

2-2. 밀은 젊었을 때부터 글을 많이 쓴 사람이기는 하나 30대 말까지 책을 한권도 출판하지 않았다. 1843년에 처음으로 책을 출판했는데, 곧바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고 지속적인 관ㅅ미의 대상이 되었다. 바로 여섯 권으로 된 《논리학의 체계》다. 밀은 영국의 경험주의 전통을 19세기 현재로 갱신하려는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이 책 안에서 폭넓고 다양한 주제를 통합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정신 자체에 대해서 타인의 정신이 실존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철학자들에게 특히 어려운 문제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경험주의자들과 달리 형식 논리학과 과학의 방법론에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

밀은 추리에 관한 이론을 자세히 제시했는데, 추리를 실질적 추리(real inference)와 언어적 추리(verbal inference)로 나누었다. 정언적 추리(syllogistic inference)는 어떤 새로운 지식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적 추리다. 반면 실질적 추리는 귀납적이기 때문에 특수사례에서 일반 법칙을 도출하지 않는다. 밀은 귀납적인 과학적 연구를 안내하는 다섯 가지 실험 규칙 혹은 규준을 제시했다. 그는 그와 같은 규준들을 사용하게 되면 전혀 선천적 진리에 의존하지 않고 경험적 탐구를 진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밀은 경험주의를 현대적으로 제시하면서 전례 없는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수학의 진리성은 우리 지식의 가장 확실한 대상에 속하는 것 같은데도 경험의 결과라기보다 경험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경험주의자들에게 늘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밀은 산술학, 기하학이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경험적 가설들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후대 철학자들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 주장은 《논리학의 체계》에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목적이란 정신 외적인 진리들은 경험과 상관없이 직관(intuition)에 의해 알려질 수 있다는 그 관념을 논박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두 철학파 사이의 차이, 직관에 대한 차이와 경험 및 연합에 대한 차이는 단순한 추상적 사변의 문제가 아니다. 그 차이는 수많은 실질적 귀결들로 나타나고, 진보의 시대에 가장 커다란 온갖 실질적인 의견 차이의 바탕이 되었다.’

 

2-3. 밀이 이런 지적 전투에서 벌인 최대의 공격적 캠페인은 그의 말기 저작들 가운데 하나인 《윌리엄 해밀턴 경의 철학에 대한 고찰》에서 수행되었다. 해밀턴 경은 애든버러에서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를 역임한 개혁가인데 그는 그의 강의에서 리드의 상식철학(common-sense philosophy)을 새롭고 개선된 형태로 드러내고자 했다. 밀은 그의 책이 발간되자 온갖 형태의 직관주의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퍼부어 댈 이상적인 표적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내용에 비해 과분한 명성을 얻었으나 오늘날에는 그다지 연구되지 않는다.

밀은 1851년 20여 년간 친밀하게 지낸 해리엇과 결혼했는데 그는 그녀가 자신의 소논문 《자유론》과 《여성의 종속》의 공동 저자로 간주되어야한다고 했다, 《자유론》은 정부가 개인의 자유에 대해 간섭할 수 있는 한계를 그으려고 했는데 핵심 원리는 다음과 같다.

 

‘인류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사회 구성원 누군가에 대해 행동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보호가 목적일 경우에만 허용된다. 문명화된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그 목적이 오로지 타인에 대한 피해를 방지하려는 것일 경우에만 정당화 된다. 물질적이든 도덕적이든 자기 자신의 이익은 힘을 행사할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밀에 의하면,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절대군주이다. 《자유론》은 의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아주 명백하게 옹호하기 위해 이 원리를 여러 분야에 적용한다. 《여성의 종속》은 밀이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고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오랫동안 전개한 여성 운동의 정점이었다. 그는 1859년 《의회개혁사상》에서 ‘세금징수원이 전혀 하지 않는 차별을 선거 사무원이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모든 주택 거주자에게 남자든 여자든 투표할 권리를 주어야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남녀평등 문제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사건과 선거 개혁에 관여했다. 영국 정부의 아일랜드 강압정책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토지 소유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소논문을 출간했다. 또 그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의회 선거의 비례 대표제를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861년 《대의정치에 대한 고찰》로 출판되었다.

 

2-4. 밀의 자유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그가 죽은 뒤 체계적인 철학자로서의 명성은 급속하게 시들었다.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영국을 뒤덮은 관념주의 물결은 밀의 경험주의를 집어삼켜 버렸다. 그러나 공리주의 전통은 시지윅(Henry Sidgwick)에 의해 중단 없이 살아남았다.

시지윅은 밀의 중요한 두 원리, 심리적 쾌락주의(모든 사람은 그들 자신의 행복의 추구해야한다)와 윤리적 쾌락주의(모든 사람은 일반적인 행복을 추구해야만 한다) 사이에 부정합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실천 이성의 이중성’을 해결하려 했다. 시지윅은 사고 과정에서 심리적 쾌락주의 원리를 포기하고, 사람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선을 추구할 의무를 갖는다는 합리적 이기주의의 윤리적 원리로 대체했다.

그의 학설은 공리주의를 직관주의와 결함한 형태로 도덕에 대한 상식적 접근으로 원리를 간주했다. 하지만 그는 상식의 전형적인 직관은 아주 명확하고 구체적이지만 공리주의 도덕의 기초가 되는 직관은 다소 추상적이라고 믿었다. 예컨대 미래의 선이 현재의 선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의 관점에서 볼 때 한 사람의 선은 다른 사람의 선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공리주의의 직관을 합리적 이기주의 직관과 일치시키는 것인데 시지윅은 나의 행복과 일반적인 행복 사이의 상충을 일상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대부분 사람들이 개인의 이익과 의무를 신과 연관 짓는데 자신은 신에 호소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합리적 행위의 완벽한 이상을 고안해 내려는 인간 지성의 장기적인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그리고 마르크스

Ⅰ.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

1-1. 생애와 시대적 배경

1-1-1. 벤담은 공리성의 원리를 제시할 때, 그것을 행복을 줄이려 한 경우에 한해 행위의 가치가 인정된다는 금욕주의 원리와 비교했다. 벤담의 주요 비교대상은 기독교 도덕이었으나, 정작 기독교인들에게 금욕주의의 원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든 철학자들 가운데 금욕주의의 원리를 제일 용의주도하게 주장한 사람은 무신론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였다.

1-1-2. 쇼펜하우어는 단치히 상인의 아들로 1803년까지 아버지의 사업을 익히며 성장했다. 그는 의대생의 공부를 하다가 방향을 바꿔 1810년 괴팅겐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플라톤과 칸트를 좋아했지만, 칸트의 제자인 피히테는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1811년 베를린에서 피히테의 강의를 듣고 그의 민족주의를 혐오했다. 쇼펜하우어는 박사학위 논문이었던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을 쓰기 위해 나폴레옹에 대한 프로이센의 투쟁에 가담하지 않고 빠져나왔다.

1-2. 사상

1-2-1. 쇼펜하우어는 1814~1818년에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The World as Will and Idea)》를 썼다. 그는 네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에서는 관념(Idea)으로서의 세계에, 두 번째와 네 번째는 의지(Will)로서의 세계에 관해 썼다. 그가 말하는 ‘관념’(혹은 ‘표상(representation)’으로도 번역된다)은 개념이 아니라, 로크와 버클리가 지칭한 구체적인 경험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세계는 오로지 관념, 의식과 관련해서만 존재한다(‘세계는 나의 관념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몸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지각을 하고, 다른 대상들은 그것들의 상호 영향을 통해 알려진다.

1-2-2. 관념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설명은 칸트와 별반 다른 것이 없지만, 세계를 ‘의지’로 표현한 부분은 매우 독창적이다. 그는 관성 법칙이나 중력 법칙으로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이지만, 과학은 관성이나 중력과 같은 힘의 내적 본성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은 인식주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나의 신체는 스스로 의식하는 능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데, 오로지 이것만이 사물들의 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준다. 즉 쇼펜하우어는 ‘수수께끼의 답은 개인으로 여겨지는 인식 주체에게 주어져 있는 의지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인식 주체 자신의 실존에 대한 실마리를 주며, 인식 주체의 존재와 행위와 운동의 내적 구조를 보여준다(WWI 100)’고 말했다. 모든 대상의 내적 본성은 의지이다. 이 의지는 중력에서 자력에 이르기까지 많은 등급이 있는데, 중력과 자력보다 더 높은 등급만이 지식과 자기 결정력을 동반한다. 칸트도 의지를 추구하긴 했으나, 이는 쓸모가 없었던 물자체(thing-in-itself)의 참모습이다.

1-2-3. 쇼펜하우어는 무생물이 동기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으면서도, 왜 무생물의 자연적 경향성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욕망(appetite)’이나 뉴턴이 말한 ‘힘’이라 하지 않고 ‘의지’라고 했을까? 그는 힘을 의지로 설명할 경우, 그것은 조금 알려진 것을 많이 알려진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는 세계의 내적 본성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를 의식함으로써 주어진다고 보았다.

1-2-4. 그러나 의지 자체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에 따르면, 모든 의지는 욕구를 일으키고, 욕구는 결핍을 만들고, 결핍은 고통을 유발한다. 즉, 어떤 욕구가 충족되면 그 후에 또 다른 욕구가 생긴다. 우리의 의식이 의지로 가득 차게 되면, 우리는 결코 행복하거나 평화로울 수 없다. 최선의 바람은 고통과 권태가 번갈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1-2-5. 쇼펜하우어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책에서 의지의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두 가지 방식을 제시했다. 첫 번째 방식은 예술, 즉 미에 대한 순수하고 사심 없는 관조(contemplation)를 통한 탈출이고, 두 번째 방식은 단념(renunciation)을 통한 탈출이다. 삶에 대한 의지를 단념해야만 의지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삶에 대한 의지는 자살이 아닌 금욕주의에 의해 단념된다. 진정한 도덕적 진보를 위해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악함과, 우리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교활함을 버려야 한다. 또한 타인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정의로움과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선량함마저도 버려야한다. 즉 우리는 미덕을 넘어 금욕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궁극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는 순결, 결핍, 절제를 받아들여야 하며, 죽음이 악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1-2-6. 쇼펜하우어는 기독교와 힌두교, 불교의 성인들을 자기희생의 모범으로 여겼으나, 그 자신의 금욕주의에 대한 입장은 어떠한 종교적 전제에 의거해있지 않고, 대부분의 성인의 일대기가 미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개개의 주체와 대상은 단순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인도철학의 마야사상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다.

1-2-7.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는 직접적인 영향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1820년에 헤겔이 있는 베를린 대학으로 가서 강의를 했는데, 그는 헤겔을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강의를 일부러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개설했으나 그의 학생을 빼앗아오지 못했다. 그는 헤겔을 ‘아무 사상도 없는 지루한 이야기의 수면효과’나 ‘정말 따분하고 형편없는 허풍선’이라고 하며 조롱했다.

 

1-2-8. 쇼펜하우어는 1839년에 논문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로 ‘노르웨이 인 상’을 받기 전까지 그의 천재성을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이 논문과 윤리학의 기초를 다룬 다른 논문을 묶어 1841년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1844년에는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 증보판을, 1851년에는 《수필과 이삭줍기》라는 수필집을 냈다. 그의 저작들은 일반 사람들이 그의 부적절한 의견/정치적으로 잘못된 의견을 유쾌 또는 불쾌하게 음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치 있고 명료한 문체의 진가를 맛볼 수 있었다.

 

1-2-9.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을 비롯한 대륙의 실패한 혁명이 쇼펜하우어의 60번째 생일 직후에 일어났는데, 그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정치적 시도에 환멸을 느끼던 세대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비난한 독일 대학 기관의 환심을 샀고, 비열한 망상이라 맹비난했던 그 세상의 안락함을 누렸다. 그 자신의 삶이 그가 찬양했던 금욕주의적 이상과 완전히 달랐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이 실제로 지니고 있는 덕목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윤리학자에 대한 희한한 요구이다’라고 대답할 것 같다.

 

Ⅱ. 키르케고르의 도덕과 종교

2-1. 생애와 시대배경

2-1-1. 쇼펜하우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의 증보판을 준비하던 때,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철학자는 전혀 다른 형이상학적 기초 위의 금욕주의와 비슷한 요구 사항을 제시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는 1813년 비극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였다. 그의 어머니와 여섯 남매 중 다섯이 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양치기 소년일 때 신을 모독하는 말을 해서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다. 키르케고르는 1830년에 코펜하겐 대학에 신학을 공부하러 갔고, 쇼펜하우어처럼 헤겔 철학에 익숙해지면서 헤겔 철학을 혐오하게 됐다. 그는 신학은 싫어했지만,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신비로운 경험을 동반한 종교적 변환을 겪었다. 그는 1840년 올센과 약혼했으나, 자기 가족의 이력 때문에 결혼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일 년 뒤 파혼한다. 그 후 그는 자신을 철학자로서의 소명을 가진 사람으로 여겼다.

2-2. 사상

2-2-1. 키르케고르는 1841년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에 관한 학위 논문을 완성한 후 베를린으로 가 셸링의 강의를 들었다. 독일 관념주의에 대한 반감이 커졌는데, 그 이유는 쇼펜하우어와 달리 독일 관념주의는 구체적인 개인을 과소평가한 데 있었다. 그는 쇼펜하우어처럼 단념으로 종결되는 정신적 이력을 단계별로 묘사했으나, 정신적 이력의 단계가 고차적일수록 개체성은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독특한 개성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고 보았다.

2-2-2. 키르케고르의 학설은 1843~1846년에 여러 필명으로 출간된 일련의 저작들에서 설명이 나온다. 1843년의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는 두 가지 인생관, 즉 심미적 인생관과 도덕적 인생관을 제시한다. 군중의 일원이 개인이라는 출발점에서 보면, 심미적 인생은 자기실현을 향한 첫 번째 단계이다. 심미적인 사람은 맛과 멋(taste and elegance)이 있는 쾌락을 추구한다. 심미적인 사람은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이든 즉각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잡으려는 선택을 제한하는 것에 대해 결코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본질적 특성이 있다. 이런 사람은 시간이 지난 후 이러한 자유에 대한 자신의 요구가 현실적으로 자기 능력을 제한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즉 그는 자신을 사회제도 안에 포함하여 그 제도가 부과하는 의무를 수용해야하는 도덕적 단계로 옮아간다. 그러나 아무리 도덕 법칙을 완수하려 해도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2-2-3. 심미적 인생의 방식과 도덕적 인생의 방식 둘 다 종교적인 영역으로 상승하여 그 한계를 넘어야 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그가 다른 필명으로 쓴 다른 저작들 – ⟪공포와 전율⟫(1834년), ⟪분노의 개념⟫(1844년), ⟪삶의 방식의 단계⟫(1845년)에서 다양하게 전달된다. 이러한 글들은 1846년의 ⟪철학적 단편에 대한 비학문적 후기⟫를 출간하며 최고조에 달했다. 이 책의 메시지는 헤겔 신봉자가 말했듯 신앙은 객관적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2-2-4. 도덕적 영역에서 종교적 영역으로 옮아가는 과정은 ⟪공포와 전율⟫에서 신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명령한 성경 이야기를 통해 생생히 묘사되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도덕적 영웅은 보편적 도덕률을 위해 자기 인생을 바쳤으나, 아브라함은 특수 신의 명령 때문에 도덕률을 위반했다. 키르케고르는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도덕적 명령을 위반한 아브라함의 행위를 ‘도덕에 대한 목적론적 유예’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개인이 도덕률을 위반하는 것을 신의 소명으로 여긴다면, 이것이 그냥 유혹인지 진짜 신의 명령인지 분간할 수 없다. 혼자만으로는 그것을 알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2-2-5. 키르케고르는 1848년 두 번째 신비로운 경험 후, 글을 좀 더 쉽게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순수한 마음은 한 가지만 바라는 것이다⟫, ⟪사랑의 행위⟫와 같은 다수의 기독교 담론과 책들을 자기 이름으로 펴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는 다시 필명을 사용하며 절망의 유일한 대안으로, 진정한 실존을 실현하기 위해 신앙을 필요조건으로 제시했다.

2-2-6. 키르케고르의 후반부 인생은 이름만 기독교라 여긴 덴마크 국교회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그는 민스터(J.P.Mynster) 대주교를 아주 비판했고, 1854년 그가 죽은 후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책을 냈다. 키르케고르는 교권에 반대하는 소책자 ⟪순간⟫을 창간하고 지원하고, 9호까지 발간한 후, 거리에서 쓰러져 몇 주 동안 병을 앓다가 1855년 11월에 숨을 거둔다. 그 자신이 원하지 않았고 조카도 반대했는데도 그의 장례는 교회에서 치러졌다.

Ⅲ. 변증적 물질주의(마르크스)

3-1. 생애와 시대배경

3-1-1.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 모두 헤겔의 학설에 대한 반작용에서 철학적 추진력을 얻었다. 그러나 헤겔주의를 가장 격렬하고 강력하게 반대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Karl Marx)였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임무를 ‘헤겔을 뒤짚어 엎는 것’이라 했다. 헤겔의 변증적 관념주의(dialectical idealism)는 변증적 물질주의(dialectical materialism)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3-1-2.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1818년 아들이 태어나기 전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한 진보적인 유대교인이었다. 마르크스는 청소년 시절 트리어에서 학교를 다녔고, 본 대학에서 1년간 법학을 공부하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그 후 5년 동안 베를린 대학을 다니며 진지하게 살았는데, 시 쓰기를 좋아했으며 법학 대신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가 베를린에 갔을 때 헤겔은 이미 죽었지만,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가 활동하고 바우어(Bruno Bauer)가 이끌던 청년헤겔학파라는 좌파단체와 헤겔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는 헤겔과 바우어에게 역사를 변증적 과정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 역사의 각 단계는 기하학적 증명 과정과 아주 비슷한 과정으로 기초적인 논리적 원리나 형이상학적 원리에 따라 앞선 단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3-2. 사상

3-2-1. 청년헤겔학파는 사람들이 자기 존재의 진정한 본질적 요소인데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보는 상태인, 헤겔의 소외 개념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헤겔 자신이 강조한 소외의 형태는 어떤 단일한 정신의 발현인 개인들이 서로를 통일체의 구성요소로 보지 않고 적대적인 경쟁관계로 보는 것이다. 바우어와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자신의 삶과 의식을 비실재적인 신에게 맡기는 종교를 최고의 소외 형태로 간주했다. 포이어바흐는 ‘종교가 인간을 그 자신과 분리시킨다’면서 ‘신은 인간이 자신과 적대자로 맞서게 한다(W vi 41)고 말했다.

3-2-2. 헤겔과 포이어바흐에게 종교는 허위의식이었다. 헤겔은 이 허위의식이 종교적 신화를 관념주의 형이상학으로 변형함으로써 치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이어바흐에게는 헤겔주의 자체가 소외의 한 형태였다. 즉 종교는 제거되어야할 것이지 변형될 것이 아니며, 사회적 인간의 생활에 대한 실증적인 이해로 대체되어야 했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일종의 허위의식인 점은 동의했지만, 헤겔과 포이어바흐가 소외에 대해 터무니없는 처방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헤겔의 형이상학에서 인간은 자신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관망하기만 하는 존재였다. 반면 포이어바흐는 인간의 숭배 대상 가운데 인간을 소외시킨 실체가 오로지 신만이 아닌 점을 깨닫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사유 재산이 국가의 기반이 되는 한 국가 역시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소외시킨다고 보았다. 소외는 철학적 반성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철학자는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TF 11)’고 말하며, 사회의 대변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3-2-3.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에 관한 논문으로 1842년 예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청년헤겔학파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쾰른에서 급진파 신문 <라인신문>을 편집하면서 정치 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지낸 남작의 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1843년에 결혼하여 그녀가 죽을 때까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다. 마르크스가 결혼한 직후 러시아 황제의 압력으로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라인신문>은 폐간된다.

3-2-4. 마르크스는 파리로 이사해 정치경제학에 관한 영국 고전들을 통해 자신이 갈 길을 확인하였고, 많은 급진파 친구들을 만나며 신문 기자로써 추구해야 할 다른 일거리를 발견한다. 이 친구들 중 엥겔스(Friedrich Engels)와 만나 함께 ‘공산주의’ 이론, 즉 공동 소유를 위한 사유 재산의 폐지 이론을 세우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같이 연구한 ⟪독일의 이데올로기⟫은 마르크스가 반체제적 신문기자라는 이유로 파리에서 쫓겨난 뒤 이주한 브뤼셀에서 완성된다.

3-2-5. 이 책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물질주의적 역사 개념을 제시한다. 삶이 의식을 결정하지 의식이 삶을 결정하지 않는다. 역사의 근본적인 본성은 경제적 생산 과정이고, 그 과정을 이해하려면 경제적 생산의 물질적 조건을 이해해야 한다. 다양한 생산 방식은 사회 계급의 형성과 계급들 사이의 투쟁, 그리고 여러 형태의 정치 생활과 법률과 윤리를 초래한다. 예를 들면 맷돌은 봉건 영주가 다스리는 사회를 낳고, 증기 방앗간은 산업 자본가가 지배하는 사회를 가져온다. 변증적 과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공산주의의 등장을 위해 여러 단계를 거치며 세계를 끌어간다.

3-2-6. ⟪독일의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가 죽은 후에도 한참 출판되지 않았으나, 그 책의 아이디어는 1847년의 ⟪철학의 빈곤⟫에 집약되어 있다. 물질주의적 역사개념을 더 널리 알린 것은 엥겔스의 초안을 바탕으로 1848년에 발행한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이었다. 이것은 새로 설립된 ‘공산주의 동맹’의 원리와 이상을 개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언⟫의 메시지는 엥겔스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인류의 전 역사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의 투쟁과 경쟁의 역사였다. 온갖 착취와 억압, 계급 차별과 계급 투쟁으로부터 사회 전체를 동시에 완전히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이제 피착취 계급과 피지배 계급(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착취 계급과 지배 계급(부르주아 계급)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쟁취할 수 없는 그런 단계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계급 투쟁의 역사는 일련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CM 48)”

⟪선언⟫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마지막 문장이다. ‘공산주의 혁명에서 지배 계급들이 벌벌 떨게 하자.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사슬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지배할 세상이 온다. 온 나라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3-2-7. ⟪선언⟫이 발간된 해에, 파리, 베를린, 로마 등 여러 도시에서 무장 폭동이 일어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가 무상 교육 제도를 수립하고 운수업과 은행업을 국유화하며, 누진 소득세를 부과하도록 혁명가들을 촉구하기 위해 독일로 잠깐 돌아왔다. 마르크스는 혁명 실패한 후 쾰른에서 두 번 재판을 받고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프로이센 영토에서 추방당한다. 파리로 돌아와서도 추방당한 그는 남은 생애 런던에서 빈곤에 허덕였는데, 그의 아이 여섯 중 셋이 굶어 죽었다.

3-2-8. 마르크스는 런던에 살며 하루에 열 시간씩 연구하며 변증적 물질주의 이론을 전개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1857~1858년에 지난 10년간의 경제적 견해를 정리해 일련의 비망록을 작성했는데, 이 비망록을 기초로 하여 1859년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집필했다. 그 저작의 서문은 물질주의적 역사 이론에 대한 간결하고도 권위적인 진술을 담고 있다.

3-2-9.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이론과 실제를 결합시키려 평생 노력했다. 그는 1864년에 ‘국제 노동자협회의 창립을 도왔으나, 그 단체는 내부 분쟁을 겪고 파리의 야만적인 폭동을 지지한 탓에 평판이 나빠져 1876년에 해산된다.

3-2-10. 마르크스의 저술활동은 역사 과정이 어떻게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좌우됐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 ⟪자본론(Capital)⟫에서 최고조를 달한다. 이 책의 첫 번째 권은 18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되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권은 1883년 마르크스가 죽었을 때 출판되지 않은 채로 있다가 엥겔스에 의해 사후 유작으로 출판된다. 그는 하이게이트 묘지의 아내 곁에 묻혔다.

3-2-11. 마르크스의 거대한 저작의 기본 주장은, 자본주의 제도가 최종 위기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본성상 노동 계급의 착취를 필요로 한다. 모든 생산품의 가치는 생산품에 투여된 노동의 총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생산품의 실제 값보다 더 적게 지불해서 가치의 일부를 착취한다. 기술이 발달하면 동시에 노동자의 생산성이 향상됨에 따라 노동에 의해 산출된 부가 갈수록 자본가에게 쌓여간다. 이 착취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느끼는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그 때 자본주의 제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로 대체될 것이다. 그 독재 체제는 사유 재산을 폐지하고 생산 수단이 중앙 정부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사회주의 국가를 도입하게 된다. 그 후 사회주의 국가는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되는 공산주의 사회로 대체될 것이다.

3-2-12.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이어 보편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그가 죽은 후 역사에서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의 이론들은 본질상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고 정치적이었다. 바로 그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이론들은 성공과 실패 두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사건들이 경제적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잘못을 범한다. 마르크스주의 유형의 사회주의를 겪은 나라들을 보면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과 같은 개인들이 권력을 휘둘렀는데, 이는 오로지 비인격적 힘만이 역사를 구현할 수 있다는 이론이 거짓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적 요인들이 정치와 문화에 미치는 여향을 부인하는 역사가나 역사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3-2-13. ⟪공산당 선언⟫의 제안들을 150년쯤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면 폭정에 의해서만 집행되는 성급하고 가혹한 방법들 – 예를 들어 상속의 폐지와 강제적인 농업 노동, 선진국들이 현재 당연시 여기는 누진 소득세법, 보통 교육과 같은 제도들, 그리고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채택해 성공을 거둔 철도와 은행의 국유화같은 실험들이 뒤섞여 있음을 알게된다. 마르크스는 예언자로서는 신뢰를 얻지 못했지만, 그의 철학은 의식이 삶을 결정짓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 가장 설득력있게 논박했다. 그가 죽고 난 후,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는 과학적 이론이 아닌 정치적 행동주의(activism)에 대한 영감과 정치 체제에 대한 지침으로 여겨지는 그의 관념체계에게서 좋든 나쁘든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로크의 관념

홉스의 경험론보다 일반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로크의 경험론을 보자. 경험론을 대표하는 로크와 합리론을 대표하는 데카르트는 공통적인 전제들을 공유하는데, 이 둘 모두 직접적인 의식에 호소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한다.

로크의 ‘관념’이라는 용어가 대상을 의미하는지 활동을 의미하는지 구별하기가 어렵다. 로크는 관념이 ‘사고 과정에서 정신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정신에 등장하는 것’이라는 문구는 정신이 사고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정신이 참여하는 바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애매하다.

로크는 자주 데카르트에 반대하는 견해를 드러내지만 많은 철학적 주제들을 데카르트에서 빌려와 질문을 던진다. 동물은 일종의 기계인가? 영혼은 항상 사고하는가? 물질이 없는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 본유 관념이 존재하는가? 이들 중 마지막 질문은 결정적인 질문으로 어떤 대답을 하는지에 따라 합리론자 또는 경험론자로 분류된다. 또한 여기서 관념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서로 다른 의미 사이의 차이를 극복한다면 로크와 데카르트의 관점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위 질문은 사고 활동이 아니라 단지 사고 능력에 관한 것으로 데카르트와 로크에 따르면 인간만이 고유하게 타고나는 지성이라는 일반적인 능력이 존재한다. 로크의 《인간지성론》은 인간을 감각 능력을 지닌 나머지 존재들보다 우위에 서게 만드는 것이 바로 지성이라는 언급과 더불어 시작된다. (E, 43)

데카르트는 진리란 인간이 본유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본유 관념 중 일부는 심사숙고 후에 동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로크 또한 진리가 경험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개념을 얻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본다.

로크는 본유 관념에 관한 논의가 대부분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간에 우리가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어떤 원리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데 할애한다. 로크에 따르면 설령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진리가 있다 할지라도 보편성만으로는 그것이 본유적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설명이 공통적으로 학습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도 보편적 동의가 본유적임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만 본유적인 것도 보편적 동의를 함축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본유 관념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데카르트는 본유적 요소가 없이는 경험이 과학적 지식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로크는 경험이 없이는 본유 관념이 세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두 주장은 모두 얼마든지 옳을 수 있다.

로크는 합리론자들의 논변이 ‘색, 소리, 맛, 형태 등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념을 본유적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이성 및 경험과 반대되는 것은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고 주장(E, 58)하지만 데카르트는 어떤 특정한 사과의 색, 맛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본유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붉음이나 달콤함이라는 일반적 관념이 본유적이라는 생각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고 본다. 여기서 합리론과 경험론 사이의 논쟁이 근본적으로는 일치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색, 맛과 같은 성질들이 주관적이라는 주장에 대한 로크의 논변은 ‘오직 하나의 감각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에 형성되는’ 관념과 ‘하나 이상의 감각을 통해서 정신에 전달되는’ 관념을 구별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구별에 대응하여 물체에서 발견되는 성질들 사이의 구별도 이루어진다. 우리는 정신의 지각으로서의 관념을 구별하는 동시에 이런 지각을 일으키는 물체가 변형된 것으로서의 관념도 구별해야 한다. 또한 관념이 관념을 일으키는 물체 안의 무언가에 대한 정확한 상이라고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로크는 우리 안에 관념을 낳는 능력을 ‘성질들’이라고 말하며 하나 이상의 감각을 통해서 지각되는 성질을 ‘제일성질’, 오직 하나의 감각을 통해서 지각되는 성질을 ‘제이성질’이라고 말한다. 이런 구별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공통적 감각’ (=제일성질)과 ‘적절한 감각’ (=제이성질) 사시의 구별은 이미 하나의 관행이었다(E, 134~5). 로크는 적절한 감각의 객관성을 부정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와 결별한다. 이는 데카르트가 예견했던 바이기도 한데 이를 지지하기 위하여 로크와 데카르트는 더욱 설득력 높은 형태의 논변을 제시한다.

 로크는 오직 제일성질만이 그런 성질을 지닌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냄새, 맛이 전혀 없는 물체는 존재할 수 있지만 형태, 크기가 없는 물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연장성, 형태, 운동 가능성 등은 그대로 유지된다. 데카르트는 오직 연장성만이 물체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논변을 펼쳤다.

 어떤 돌의 관념에 집중하여 돌의 진정한 본성에 속하지 않는 돌의 단단함을 제거한다. 돌이 액체가 되거나 가루로 변하면 단단함이라는 성질은 사라지지지만 돌은 여전히 물체 상태를 유지한다. 이런 논변을 통하여 물체는 반드시 형태를 지녀야 하지만 어떤 특정한 형태를 얼마든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일성질의 영구성에 관한 논변은 이런 성질들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에 의존하는 듯이 보인다. 반면 제이성질의 비영구성에 관한 논변은 이런 성질들에 대한 개별적인 관점에 의존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성질들이 물체의 본질에 속하는 성질이 아니라고 해서 이들이 물체의 진정한 성질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

 로크는 제이성질이 우리 안에 감각을 산출하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나 홉스에서도 그랬듯이 여기서 다시 한 번 상대성과 주관성을 혼동하는 일이 일어난다. 어떤 속성은 상대적이면서도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로크의 언급에 따르면 ‘불 또는 눈의 일부에 해당하는 특정한 크기, 수, 형태, 운동은 누군가가 이들을 감각적으로 지각하든 그렇지 않든 실제로 이런 대상에 속한다.’ 반면에 밝음, 뜨거움, 흰 색깔, 차가움 등은 진정으로 이런 물체에 속하는 것이 아닌데 이는 질병, 고통이 복통을 일으키는 음식물 자체에 속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런 논변은 로크가 언급한 제이성질은 우리 안에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지닌 능력이라는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능력은 당연히 감각 기관이 있을 경우에만 발휘되지만 능력 자체는 설령 발휘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계속 존재해야 한다. 로크는 우리 안에 제이성질의 관념을 낳는 것이 오직 그런 능력을 지닌 대상의 제일성질일 뿐이라고 말한다. 

로크가 마지막으로 제시하는 논변은 지각과 느낌 사이의 유비이다. (논변) 하지만 이 유비는 잘못 적용된 것인데 로크의 이런 논변은 그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되고 만다.

로크는 친근한 예들을 통해서 동일한 대상에 의해서 생겨난 감각들이 주변 환경에 따라 서로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예로부터 제이성질이 객과적이 아니라는 점이 아니다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법에 관한 몽테스키외의 견해

 

1-1. 미국 헌법은 몽테스키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몽테스키외는 신뢰성과 상관없이 자료를 수집한 후 국가의 본질에 관한 이론을 구성한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인간은 다양한 요소의 지배를 받는다. 이런 요소로는 기후, 종교, 법률, 정부의 명령, 과거의 사건들, 관습, 태도 등을 들 수 있다.’ 그 사회에 적합한 법을 통해서 일반 정신이 표현되고 일반 정신은 법의 정신을 낳는다. 몽테스키외는 인간이 제정한 실정법보다 신이 확립한 정의로운 기본법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1-2. 아리스토텔레스가 국가의 형태를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의 세 종류의 형태로 분류했던 것처럼 몽테스키외 역시 세 가지의 국가 형태를 제시한다, 공화정, 군주정, 폭군에 의한 전제정으로 나누는데, 이 세 유형은 각각 덕과 명예 그리고 공포라는 대표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1-3. 이 세 특성은 각각의 정부가 지닌 원리다. 하지만 공화정이 덕을 원리로 삼는다 해서 공화정에 사는 모든 사람이 덕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덕을 갖추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각각의 특성을 해당 정부 아래에 사는 사람이 지니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특성을 지여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특성들이 없으면 정부는 불완전해진다.

1-4. 몽테스키외가 칭찬한 영국 헌법의 특징은 삼권 분립의 원칙이었다. 몽테스키외는 당시 하노버 공국의 정치체제를 무척 높이 평가함으로써 전 세계 다른 많은 나라의 헌법 제정에 계속 큰 영향을 미쳤다,

1-5. 몽테스키외가 삼권분립을 중요하게 여긴 까닭은 이것이 폭군을 막는 최선의 방파제인 동시에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에게서 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권리’이다. 몽테스키외는 독립적인 입법부가 제정한 것만을 법률로 여겼다. 또한 당시 많은 나라들에서 시민들은 자주 완벽하게 합법적이지만 권력자에게 반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행위 때문에 임의로 체포될 위험 아래 놓여있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폭군아래서 시민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1-6. 몽테스키외는 자유에 대한 더욱 본질적인 정의를 제시한다. 자유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해야 하는 바를 행하고, 원해서는 안 되는 바를 행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 능력이다.’ 자유로운 사회적 제도와 이상적인 형태의 개인적인 의지 사이의 이런 연결은 루소의<<사회계약론>>에서 더욱 중요한 정치 이론으로 발전된다.

지식의 단계에 관한 스피노자의 견해

  • 스피노자의 체계에서 인식론은 로크의 체계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미묘한 특성을 드러낸다. 초기 저술인 <<지성개선론>>에서 스피노자는 지식 또는 지각을 네 단계로 분류한다. 그 단계는 소문에 의한 지식, 엄밀하지 않은 경험으로부터의 지식, 다른 사물의 본질로부터 추론된, 어떤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지식이지만 그리 적절하지 않은 종류의 지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물의 본질에 의해서 인식되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네 번째 종류의 지식이 사물을 적절하고 오류가 없이 파악하도록 이끄는 유일한 지식이다. 비록 스피노자가 이런 형태의 지식을 모두 지각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순수한 감각적 지각 자체는 지식의 종류 중 하나로 포함되지 않는다.
  • 후기 저술인 <<에티카>>에서 스피노자는 소문에 의한 지식을 제외한 세 종류로 지식을 분류한다. 이 세 종류의 지식은 이른바 상상적 지식, 이성적 지식 그리고 직관적 지식이다.
  • 데카르트나 로크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지식을 우리 정신 안의 관념과 관련해서 설명하며, 또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관념’이라는 용어 안에 개념과 명제를 모두 포함시킨다. 그는 이런 종류의 개념과 명제를 서로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스피노자가 ‘X의 관념’이라고 말할 때 자주 일종의 모호함이 발견된다. X의 관념은 X가 지니는 관념인가 아니면 그 내용이 X인 관념인가? 스피노자가 신의 관념이 신의 본질과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말할 때 그는 분명히 신이 소유한 관념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이처럼 명확하지는 않다.
  • 스피노자의 주장에 따르면 만일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우리가 그것을 인식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사실도 인식한다. 그는 철학자들이 지식을 단순한 믿음과 구별해 주는 확실성을 갖는 기준을 찾으려 하는 것이 잘못된 철학적 목표라고 말한다. 우리가 인식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식해야만 한다. 참된 관념을 지닌 사람은 이 자체만으로 자신이 참된 관념을 지녔다는 사실 또한 인식하며, 관념이 참임을 의심할 수 없다. ‘우리의 인식은 오직 실제로 대상에 대응하는 관념을 지닌다는 사실로부터 생긴다. 바꾸어 말하면 진리에는 그 자체의 기준이 있다’라고 철학자들의 확신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 지식의 서로 다른 단계는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니는 관념들에 대응한다. 어떤 관념이 적합하지 않으면서도 참일 수 있고, 또한 명석, 판명하지 않으면서도 적합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일반 관념의 근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인용”
  • 모든 사람들은 사물의 속성을 적합하게 반영하는, 연장성과 운동의 관념과 같은 관념들을 공통적으로 지닌다. 스피노자는 적합한 관념을 ‘대상과의 관련이 없이 오직 그 자체만으로 고려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속성 또는 본질적 특징을 지니는 관념’이라고 정의한다. 이 적합한 관념들은 서로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필연적 진리의 체계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성적 지식이며 두 번째 종류의 지식을 형성한다. 이로써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지식은 모두 참되고 적합한 관념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 세 번째 종류인 직관적 지식은 가장 높은 수준의 지식이라는 점은 명백하지만 이것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성이 단계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분명한 반면 직관은 사물의 보편적 특징과 그것이 세계 전체의 인과적 질서에서 차지하는 위치까지 단번에 파악한다. ‘이런 종류의 지식은 신의 어떤 속성이 지닌 형식적 본질에 대한 적합한 관념으로부터 사물의 본질에 관한 적합한 지식으로 나아간다’.
  • 스피노자의 인식론이 답해야 할 마지막 질문이 하나 남아 있다. 그는 그 어떤 관념의 내용에도 그것이 참이라는 점 이외에 다른 어떤 적극적인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떤 관념이 거짓이 될 수 있는 어떤 적극적인 요소도 그 관념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류는 도대체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의지와 지성을 서로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데카르트와 같은 방식의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는 오류란 전혀 적극적인 것이 아니며, 반드시 존재해야 할 어떤 관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대답한다. 판단의 유보와 관련하여 스피노자는 그것이 가능하기는 하나 의지의 어떤 자유로운 작용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꿈을 꿀 경우 심지어 꿈에서조차도 판단을 유보할 수 있다.

시민 정부에 관한 로크의 견해

1. 시대적 배경

스피노자가 자신의 저술을 쓴 시기는 영국의 찰스 2세의 재위 기간이었는데 이 시기에 영국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왕권신수설이 화두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정주의자인 필머의 저술인 <<가부장제 또는 왕의 자연적 권력>>가 출판 되었다. 물론 저자인 필머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저술은 로크의 손쉬운 비판 대상이 되었다.

2. 로크의 정치사상

2-1. 자연 상태와 재산권에 대한 견해

로크의 정치적 사상이 담긴 저술은 <<시민 정부에 관한 두 논고>>가 있는데 그는 여기서 홉스와 같이 자연 상태에 대한 고찰을 논의의 시작으로 삼는다. 로크는 필머가 인간 본성에 대하여 잘못 파악하였다는 점을 지적하며 비판한다. 그러면서 로크는 자연 상태에 사람들은 우열이 없고 모두 정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합의를 이루어 평온하게 살아간다고 주장한다. 로크는 홉스와 같이 자연 상태에 대한 고찰로 정치적 사상을 시작하지만 자연 상태에 대한 견해는 차이가 존재한다. 로크는 자연 상태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독립적이며 자연법을 알고 있고 이 자연법이 자연권을 부여하여서 상호 간의 전쟁 상태가 아니라 주장한다.

로크의 독창적인 부분은 자연 상태의 재산권에 대한 것으로 그는 자연 상태에서 재산이라는 것을 성립시키지 위한 조건으로 노동을 제시한다. 즉 자신의 노동은 명백히 자신의 것이라는 점에서 착안한 발상으로 노동과 자연적 재화를 결합하며 노동의 대가와 결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권리는 무제한적이지는 않는데 자신의 소비 한도 내에서만 자신의 권리를 지니게 된다. 즉 자연적 재화에 대한 무자비한 손실을 막기 위해서이다. 자신의 권리로서 얻은 재화는 자신의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데 이는 상속권으로 자연적이며 어떤 성문법보다 앞선다.

이러한 재산권에 대한 로크의 견해는 국가의 형성이유로 이어진다. 로크는 재산권이 어떠한 계약보다 앞서며 존재하지만 자연 상태에서는 소유가 불안정함(자연법을 알지만 중앙 권력의 부재로 재산 침해에 대한 방책이 없음)을 파악한다. 이에 따라 재산의 소유 안정화와 재산권 침해에 대한 공적인 처벌권을 위하여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즉 국가는 사람들이 자연적 자유를 일부 국가에 양도하기로 합의하며 상호 간의 안정을 도모하여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그 역할을 한다.

2-2. 국가의 역할과 명시적 동의와 암묵적 동의의 구분

국가의 역할에는 개인의 재산권 침해에 대한 방지와 자연법 준수에 대한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 외에도 두 가지가 더 있다. 그 두 가지는 토지의 경계를 결정하는 것과 화폐를 도입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역할을 국가가 함으로써 개인의 재산은 필요이상으로 축적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사회 전체의 이익 증가로 이루어질 수 있다.

로크는 법의 제정 권리와 법의 집행 권리를 시민들의 공공선을 위한 입법부와 행정부로 양도한다고 보았다. 물론 양도함에 따라 각각의 형태는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며 서로 분리되어야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행정부가 사형권이 있다면 문제가 발생하는데 어느 누구도 자살할 권리가 없는데 타인을 죽일 권리 또한 없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필머는 타인에 대한 처형권이 신에게서 온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로크는 그러한 사회 계약이 이루어진 전례가 없다는 것으로 반박을 한다.

로크의 주요한 점은 명시적 동의와 암묵적 동의를 구별했다는 점이다. 그는 어떤 정부라도 각 세대의 시민들의 지속적 동의하에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고 이런 동의는 명시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우며 사회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모두가 암묵적 동의를 한다고 구분한다. 물론 야인의 경우 사회적 이익을 얻을 필요가 없기에 이러한 암묵적 동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2-3. 로크와 홉스의 견해차이 및 로크의 정치론 평가

로크의 정치론과 홉스의 사회계약설과의 차이점은 통치자의 계약 참여 여부이다. 로크의 경우 통치자 또한 사회계약에 참여함으로서 공동체의 신뢰를 받는 관리자 역할을 한다. 이러한 신뢰를 저버리게 될 경우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변경이나 제거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부가 제정한 법률은 3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법률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해야한다. 둘째 법률은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제정되어야 한다. 셋째 법률은 국민들의 동의가 없이는 어떤 세금도 부과해서는 안 된다.

로크의 정체 체계는 독창적이지도 않고 일관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로크는 자연법 이론과 국가들 사이의 자발적 연합 이론을 원활하진 않지만 연결하였고 이후 큰 영향을 주었다.

스피노자의 정치적 결정론

스피노자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낸 저술은 <<신학정치론>>이 있는데 이는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을 지닌다. 유사한 내용을 지니게 된 이유는 두 철학자 모두 결정론자이며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같은 견해를 가지고 정치적 논의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자연법 혹은 자연권에 대해 “각 개인이 다른 어떤 것과도 무관하게 오직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연의 지배적인 법칙이며 권리” 라 설명하면서 이러한 자연법 혹은 자연권은 모든 것에 대하여 해당한다고 말하였다.

스피노자는 개인의 자연권이 이성이 아닌 욕구와 능력에 의하여 규정되지만 인간은 이성을 따라서 사는 것이 낫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증오나 원한 같은 감정은 자연 상태이지만 이것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쉽게 병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하고 타인과 합의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사람 간의 합의는 그 합의의 유용성에 한정되어서만 효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유용성에 따라 언제든 합의가 깨질 가능성이 있기에 각 개인이 자연권을 양도한 정치 체제에서 계약위반 했을 때 더 큰 불이익이 있을 것을 뒷받침 해주어야한다.

시민사회에서 통치자의 권리는 개인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권력이 미치는 한도 내에서만 효력이 있다. 이로 인하여 개인의 권리가 국가로의 완전한 양도가 불가능 해지는데 이점에서 홉스와 차이를 보인다. 즉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 의하여 내적 정서를 강요받을 수 없고 자유로운 추론이나 판달 할 자연권을 자진하여 양도하지 않으며 강요당할 수 없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민주정부 아래에서는 모두가(통치자조차도) 개인의 자연권을 사회에 양도하기에 평등하다. 또한 스피노자는 국가에 복종해야하는 이유를 홉스의 견해에서 나아가 국가가 자신의 완전한 자기실현의 삶을 도와준다는 측면에서도 설명하였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국가 이론을 히브리인들의 역사와 연관하여 고찰하였다. 그 결과 그는 몇 가지 구체적 결론을 도출한다. 첫째 성직자가 정치적 권력을 쥐면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 둘째 훌륭한 정부는 종교적 신앙과 철학 사상의 자유를 허용한다. 셋째 모든 사람은 자신의 종교나 신념의 자유가 있다. 넷째 군주정이 확립되고 난 이후 그것에서 벗어나는 일은 매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