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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게의 논리학 재건

 

논리학

프레게의 논리학 재건

1-1. 이 문제에 관해 프레게는 밀과 정반대 입장에 섰다. 밀의 경우 모든 명제가 후천적으로 아는 반면, 프레게의 경우 산술학은 논리학처럼 선천적일 뿐만 아니라 분석적이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프레게는 밀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정립하지 못한 논리학을 연구하고 체계화해야 했다. 그는 논리학을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구성했고,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맨 처음 수립된 학문의 두 번째 창시자가 되었다.

1-2. 논리학을 정의하는 한 가지 방법은 좋은 추리를 나쁜 추리로부터 가려내는 학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프레게 직전가지 논리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언 논증의 타당성과 부당성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1) “모든 독일인은 유럽인이다”, “약간의 독일인은 금발이다”, 그러므로 “약간의 유럽인은 금발이다.”

(2) “모든 암소는 포유동물이다“, ”약간의 포유동물은 네발짐승이다“, 그러므로 ”모든 암소는 네발짐승이다.“

이 추리 둘 다 옳은 결론을 가졌음에도 첫 번째 추리만 타당하다. 즉 첫 번째 추리만이 옳은 전제에서 그른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는 형식을 가진 추리이다.

1-3. 정언적 추리는 사실상 타당한 추론 형식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 해당한다. 트롤럽은 『총리』에서 옴니엄 공작 부인은 전통적으로 그 가문의 영지였던 실버브리지 자치구의 하원 의원이 되길 열망한다. 옴니엄 공작은 그녀가 ‘공작이 그 자치구를 다스리고, 공작의 아내가 공작을 다스리므로, 공작의 아내가 그 자치구를 다스린다는 유치한 정언 논증을 생각해냈다’고 말했다. 공작부인의 추론은 완벽히 타당하긴 하지만 정언 논증이 아니라서 하나의 정언 논증으로 형식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언논리는 오직 주어-술어 문장들만 다루도록 고안된 체계여서 관계 지술에 대처할 만큼 포괄적인 체계가 아닌데 반하여 그 추론은 ‘다스린다’가 이행적 관계라는 사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1-4. 정언적 추리의 또 다른 약점은 ‘모든’(all)이나 ‘약간의’(some)와 같은 낱말들이 문법적 술어의 어딘가에 나타나는 추리들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언 논증의 규칙들은 ‘모든 정치인들은 약간의(혹은 모든) 거짓말을 한다’와 같은 전제를 포함하는 추리의 타당성을 확인할 수 없는데, 이 경우 추리는 ‘약간의’ 혹은 ‘모든’이라는 낱말에 좌우된다.

1-5. 프레게는 자신의 『개념표기법』에서 처음에 이런 난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체계를 고안한다. 첫 단계는 주어와 술어라는 문법 개념을 ‘독립 변수’와 ‘함수’라는 새로운 논리적 개념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웰링턴이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라는 문장에서 ‘웰링턴’이 주어ㅣ고 ‘나폴레옹을 물리친 것’이 술어라고 말할 것이다. 프레게의 독립 변수와 함수 개념의 도입은 그 문장을 더 유연하게 분석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1-6. 그 방법은 이렇다. ‘웰링턴이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라는 문장에서 ‘나폴레옹’ 대신 ‘넬슨’을 넣는다 해보자. 그 문장의 내용은 바뀌고 옳은 문장이 그른 문장으로 변한다. 우리는 그 문장이 ‘웰링턴이 ..을 물리쳤다’라는 변하지 않는 성분과 ‘나폴레옹’이라는 대체가능한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프레게는 첫 번째 고정된 성분을 함수, 두 번째 성분을 그 함수의 독립변수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이 문장은 ‘나폴레옹’이라는 독립변수에 대한 ‘웰링턴이 물리쳤다’라는 함수 값이고, ‘웰링턴이 넬슨을 물리쳤다’는 ‘넬슨’이라는 독립변수에 대한 동일한 함수값이다.

1-7. 우리는 그 문장을 또 다르게 분석할 수 있다. ‘웰링턴이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는 ‘웰링턴’이라는 독립 변수에 대한 ‘..이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는 함수의 값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문장이 ‘웰링턴’과 ‘나폴레옹’이라는 독립변수에 대한 ‘..이 ..을 물리쳤다’는 함수의 값이라 말할 수도 있다. 프레게의 용어로 말하면 ‘웰링턴이 ..를 물리쳤다’와 ‘..이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는 단 하나의 독립 변수의 함수이고, ‘..이 ..을 물리쳤다’는 두 개의 독립 변수의 함수이다.

1-8. 주어-술어 구분과 비교해볼 때 함수-독립 변수 이분법은 문장들 사이의 논리적으로 관련 있는 유사성을 나타낼 수 있는 훨씬 더 유연한 방법이다. 주어-술어 부석은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했다’와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물리쳤다’ 사이의 유사성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지만,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했다’와 ‘폼페이우스는 갈리아를 회피했다’ 사이의 유사성은 나타낼 수 없다. 이것은 ‘카이사르’나 ‘갈리아’같은 고유 명사가 아니라 ‘모든 로마인’, ‘약간의 지역’과 같은 양화 표현을 포함한 정언 논증들에 나타나는 문장들을 취급할 때 논리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

1-9. 함수와 독립 변수 개념을 도입한 프레게의 다음 단계는 ‘모든’ 같은 낱말이 문장 속 어디에 나타나든 그에 의해 나타나는 일반성의 유형을 표시하는 새로운 기호 표현을 도입하는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가 옳은 문장이라면 ‘..은 죽는다’라는 함수는 ‘소크라테스’라는 독립변수에 대해 옳게 된다. 일반성을 표시하기 위해서 일정한 함수의 독립 변수가 무엇이든 그 함수가 옳게 된다는 것을 표시하는 기호가 필요하게 된다. 프레게가 도입한 기호 표현을 채택하면, 논리학자는 ‘..은 죽는다’라는 함수에 대한 독립 변수로 무엇이 들어가든 그 함수는 옳게 된다는 것을 이렇게 나타낸다.

(x)(x는 죽는다)

이것은 ‘모든 x에 대하여, x는 죽는다’라고 읽을 수 있으며, 어느 것이든 모두 죽는다는 진술과 동일하다. 일반성을 표시하는 이 기호는 함수와 독립 변수로 분석될 수 있는 문장들에서 완전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x)(신은 x보다 더 위대하다) = ‘신은 모든 것보다 더 위대하다’

이는 부정기호(‘~’)와 결합되서 ‘어떤 ..도 아니다’(no)나 ‘어떤 ..은 아니다’(none)을 포함하는 문장과 동등한 기호 표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x)~(x는 영생한다) = ‘모든 x에 대하여, x가 영생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 ‘어떤 것도 영생하지 않는다.’

프레게는 ‘약간의’와 같은 표현들을 포함하는 문장을 표현하기 위해 동치, ‘약간의 로마인은 겁쟁이다’와 ‘모든 로마인이 겁쟁이인 것은 아니다’ 사이의 동치를 활용했다. 프레게의 후계자들은 ‘약간의’를 표현하기 위해 편의상 ‘~(x)~’과 동등한 것으로 ‘Ex’라는 기호를 사용했다. 프레게의 기호 표현과 축약된 표현은 다른 정류의 사물들의 존재에 관한 진술을 만드는 데 사용될 수 있다.

(Ex)(x는 말이다) = ‘말들이 있다’

1-10. 프레게는 모든 종류의 대상들이 명명될 수 있으며 논리적 기호 표현의 독립 변수 자리는 어느 것이든 모두 그것의 이름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x)(x는 죽는다)’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만 아니라, 어느 것이든 모두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1-11. 사실상 그처럼 무제한의 일반적 진술의 경우는 드물고, 어떤 종류의 모든 것이 어떤 속성을 갖는다거나 일정한 어떤 속성이 다른 어떤 속성을 갖는다고 말하려는 경우가 훨씬 흔하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거나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온다’는 일상 언어로 이루어진 보편적 문장들은 프레게의 체계 안에서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의 술어 계산을 명제 계산과 접목시켜야 한다.

1-12. 프레게의 명제 논리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일상 언어의 ‘만일’과 조건부를 표시하는 기호이다. 고대 논리학자 필론은 ‘만일 p라면 q이다’라는 명제는, p가 옳고 q가 그른 경우에 그르고, 있을 수 있는 나머지 세 경우에 옳은 명제라고 말하며 명제를 정의했다. 프레게 역시 조건부를 나타내는 자신의 기호를, 그 기호가 일상 언어의 ‘만일 .. 라면’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의시켰다. ‘p→q’를 ’만일 p라면 q이다‘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 ’만일 태양이 비치면, 3×7=21’와 같은 명제들은 옳은 것이 된다. ‘만일’은 일상 언어에서 달리 작용한다. 프레게의 기호는 ‘만일’이라는 낱말의 가장 기본적인 것만 남긴 형태, 즉 ‘만일’을 포함하는 엄격한 증명의 형식화에 필요한 바로 그 의미 양상만을 정확히 포착하기 위해 고안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1-13. 프레게의 용어로 말하면, ‘..→..’은 문장을 독립변수로 하는 함수고, 그 값은 문장이다. 함수의 값인 문장이 옳은가 그른가는 오직 그 함수의 독립 변수인 문장이 옳은지 그른지에 달려 있는데, 이런 종류의 함수는 ‘진리 함수’라고 한다. 조건문뿐만 아니라 부정문도 진리 함수인데, 부정문은 부정되는 문장이 그를 경우에 옳고, 부정되는 문장이 옳은 경우에만 그르다.

1-14. 프레게는 이 두 기호의 도움으로 완전한 명제 논리 체계, 즉 (q→p)→(~p→~q)나 ‘~~p→q’와 같은 일정한 원초적 진리/공리 집단으로부터 바로 그 논리학의 모든 진리를 이끌어 내는 체계를 세웠다. ’그리고‘나 ’또는‘처럼 ’만일‘과 다른 연결사들은 조건부와 부정에 의해 정의된다. 프레게가 알아차렸던 것처럼, 연언을 원초적인 것으로 하는 다른 체계가 있을 수 있으며, 조건부는 연언과 부정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논리학에서는 연역이 연언보다 더 중요한데, 그 때문에 ’그리고‘가 아니라 ’만일‘을 더 원초적인 것으로 여긴다.

1-15. 논리학자들은 일찍부터 다수의 추리 규칙들, 한 명제에서 다른 명제로 넘어가기 위한 규칙들을 세웠다. 대표적인 것은 ‘“p”와 “만일p라면 q이다”로부터 “p”를 추리하는’ 전겅 긍ㅈ어 논법이다. 프레게는 자신의 체계에서 단 하나의 추리 규칙으로서 전건 긍정 논법을 이용해 논리학의 모든 법칙들을 증명한다고 주장햇다. 나머지 다른 규칙들은 체계의 공리이거나 공리로부터 증명된 정리이다. (대우)

1-16. 프레게의 명제 계산과 술어 계산을 함께 제시할 때, 우리는 일반성 기호와 조건부 기호 둘 다 이용하여 일상 언어의 보편적 문장들을 기호화할 수 있다.

‘(x)(Fx→Gx)’ = ‘모든 x에 대하여, 만일 Fx라면 Gx다’ = x가 무엇이든 ‘Fx’가 옳다면 ‘Gx’가 옳다.

1-17. ‘F’에 ‘사람이다’를 대입하고, G에 ‘죽는다’를 대입하면, 프레게가 ‘모든 사람은 죽는다’에 번역으로 제시하는 ‘모든 x에 대하여 x가 사람이라면 x는 죽는다’가 된다. 이것과 모순되는 ‘약간의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x)(x가 사람이다 →x는 죽는다)’가 된다. 이같은 번역을 통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언 논리의 모든 정리들이 자신의 체계의 일부분임을 입증할 수 있게 된다.

1-18. 프레게의 논리 계산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언 논리보다 더 체계적이고 또한 포괄적이다. 예를 들어, ‘모든 소년이 어떤 소년을 사랑한다 = (x)(x가 소년이다 → Ey(y는 소녀이다 & x가 y를 사랑한다))라는 문장과, ’어떤 소녀가 모든 소년의 사랑을 받는다 = (Ey(y가 소녀이다 & (x)(x가 소년이다 →x가 y를 사랑한다))라는 문장과의 차이를 표시할 수 있다.

1-19.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논리학자들은 일찍 일상 언어의 애매한 문장들에서 나타나는 의미의 차이를 드러내는 단순하고 명확한 방법을 찾으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이제 프레게 기호 체계의 마지막 통찰을 언급해보자.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소크라테스’를 독립변수로, ‘..는 죽는다’를 함수로 갖는데, 그런데 ‘..는 죽는다’ 자체는 더 높은 수준에서 작용되는 함수의 독립변수로 간주될 수 있다. 이는 이 함수가 한정된 독립 변수가 아니라 ‘(x)(x는 죽는다)’같이 양화사로 끝날 때 나타난다. 따라서 ‘(x)(x는..)’은 ‘..는 죽는다’라는 일차 함수에 대한 이차 함수로 간주될 수 있다. 프레게는 첫 번째 함수가 불완전하다는 점을 늘 강조했는데, 이는 두 방식으로 완전해질 수 있다. 하나는 독립 변수의 자리에 독립 변수를 끼워 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 변수 자체가 2차 함수의 독립 변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는 죽는다’에서 생략 부호 자리가 ‘모든 것’과 같은 양화사로 채워질 때 나타난다.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Ⅰ.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1-1. 최대 행복의 원리를 도입할 때 벤담은 통치자와 입법자에게 공동체의 경영에 관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만큼 개인의 도덕적 선택의 기준을 제공하는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공동체에서 행복의 총량과 행복의 분배까지 고려해야 하는 경우에, 최대 행복의 원리만으로는 신뢰할만한 결정 절차를 제공하지 못한다.

1-2. 행복을 측정하는 척도, 즉 0이 최대 불행이고 10이 최대 행복을 나타내는 0에서 10까지의 척도를 정립했다고 해보자. 어떤 사회에서 정치 제도와 법적 제도를 고안하는 데, 유효한 두 모델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모델 A를 선택하면 시민 60%가 6을, 40%가 4를 득점하게 되고, 모델 B를 채택하면 시민 80%가 10을, 20%가 0을 득점하게 된다. 이와 같은 선택에 직면할 경우, 평등이나 박애를 고려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델 B보단 A를 선택하려할 것이다. 하지만 벤담의 행복 계산법을 그대로 적용하면 모델 B는 총 800점인데 모델 A는 520점에 불과하다.

1-3.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원리는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 혹은 행복한 사람의 수를 극대화하는 것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에 도달한다. 따라서 분배적 정의에 크게 위배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으려면, 그 원리를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불균형을 어느 정도 제한하고, 빈곤층의 최저 생활을 보장함으로써 보완될 필요가 있다.

1-4. 벤담의 야심 찬 원리가 지닌 문제점들이 있음에도 그는 정치철학에 매우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그는 ‘사회 경영 가운데 순전히 사업 부분을 조직하고 조정할 때’ 최상의 능력을 보여준다. 그는 국가의 형사 처분을 다루는 대목에서 그의 재능을 십분 발휘한다.

1-5. 그는 처벌 제도의 목적에 대해 묻는다.

“처벌의 직접적인 주목적은 행위를 통제하는 것이다. 처벌은 범법자의 행위를 통제하거나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통제한다. … 전자의 경우 처벌은 교정(reformation)의 방식으로 작용하고 후자의 경우 처벌은 무력화(無力化, disablement)의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범법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통제는 그들의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 이외에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없는데, 이와 같은 경우의 처벌은 본보기(example)의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일컬어진다.” (P 13.1)

처벌은 고통을 가하는 것인 일종의 악이기에, 그것은 어느 정도 더 큰 악을 배제할 가망이 있을 경우에만 허용되어야 한다. 벤담은 해를 준 사람은 해를 당해야 정의롭다는 응보적(retributive) 처벌 이론을 거부한다. 처벌하는 일이 억제 효과나 치료 효과를 주지 않는 한, 응보는 악을 악으로 되갚는 것일 뿐, 정의의 균형을 되찾기는커녕 세상에 악의 총량을 증가시키기만 한다.

1-6. 비록 범법자에 대한 처벌이 전혀 억제 효과나 교정 효과를 주지 못하더라도 처벌하는 일은 피해자나 법을 준수하는 일반 대중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벤담은 처벌에 의해 산출된 쾌락은 결코 처벌에 의한 고통과 동등할 수 없기기에 어떤 처벌도 징벌적인 목적으로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1-7.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14장에서 벤담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응보 원리가 아니라, 처벌로써 잠재적 범법자에게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효과에 입각해 죄와 벌의 균형을 맞추는 규칙을 세웠다. 그는 장래의 범법자가 위법 행위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경우를 생각해봤고, 손해가 이익을 능가하도록 하는 것을 형사법의 기능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법은 위법 행위를 억제할 만큼 처벌을 해야 하지만, 동시에 필요 이상의 처벌을 해서도 안 된다. 즉 처벌은 절약(frugal)을 필요로 한다.

1-8. 억제가 처벌의 주목적이라지만, 그는 범법자에 대한 교화나 무력화와 같은 부차적인 목적을 인정한다. 교도소의 현실적 상황을 감안하면 교화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벤담은 몇 가지 특수한 교화 제도를 제안한 적 있다. 감금은 범법자에 대한 일시적 무력화의 효과를 지니지만, 가장 효과적인 무력화는 사형이다. 벤담은 ‘그와 동시에 이런 처벌은 너무 과도한 처벌인데, 이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에도 사형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는 많은 반론들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P15.19)고 진술한다.

1-9.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철학은 도덕철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벤담에게 많은 신세를 지긴 했으나, 그는 자기 스승의 엄격한 공리주의를 완화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자연권을 부인하는 벤담의 체계는 경우에 따라 지극히 독재적인 정부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실질적인 침해를 원리상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의 체계는 밀이 젊은 시절에 지껄인 적이 있고,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 체계를 탄생시켰던 초기 형태의 사회주의 또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원숙한 나이에 이른 밀은 사회 제도가 원리상 아무리 호의적이라 할지라도 개인의 독립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제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 여겼다. 그는 콩트의 실증정치학 체계를 ‘정신적인 스승과 통치자들로 이루어진 조직체에 의해 일반 여론을 지배함으로써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의 행위를 통제하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생각을 통제하려는’ 책략이라 했다. 그는 콩트가 ‘지금까지 인간의 머리로 생각해 본 적 없는 가장 완벽한체제의 정신적이고 세속적인 독재’를 제의하는 것에 대해 공공연히 비난했다. 『자유론』(On Liberty)에서 밀은 그 동기가 공리주의나 사회주의나 실증주의에 있건 부당한 권위주의적 침해로부터 개인을 보호할 수 있는 일반적인 자유주의 원리를 세우려고 했다.

1-10. 민주 사회에서는 다수가 소수를 폭압할 수도 있기에, 밀은 전제 군주 정치를 신뢰할 만한 민주 정치로 대체한다고 해서 자유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사회가 더 교묘한 다른 억압 수단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의 권력을 제한한다고 자유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과 감정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말하자면 사회의 관념과 관습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민사처벌 이외의 수단을 동원하여 관념과 관습을 행위 규칙으로 강요하는 사회적 성향으로부터, 그리고 사회의 풍습을 거스르는 개성의 발달을 가로막음과 동시에 되도록 그와 같은 개성이 아예 형성되지 못하게 하려는 사회적 성향으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다.” (L 130)

물리력이나 여론에 의한 강압을 정당하게 제한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제약에 따라야 하는 유일한 행위는 타인과 관련된 행위뿐이라는 것을 근본 원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단순히 자기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행위에서는 행위자의 독립적인 지위가 절대적이어야 한다.

1-11. 이 원리는 사상의 자유, 이를테면 말하기와 글쓰기의 자유에 중요하게 적용된다. 밀에 따르면 독재적 권력이든 민주적 권력이든 어느 권력도 의견의 표현을 억압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 ‘비록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인류가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한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이 부당한 것은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잡았을 때 인류를 침묵시키는 것이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이다.’(L 130) 이것이 부당한 것은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 인류 전체를 유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완전히 그른 의견조차도 반대 의견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진리라는 것이 단순히 어느 한 쪽에 치우친 견해이나 공식적인 선언이 아님을 확인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밀은 의견을 가질 자유와 의견을 표현하는 자유야말로 인류의 정신적 행복을 위한 필수 요소라고 결론짓는다.

1-12. 하지만 의견의 자유가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견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하며, 신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이웃에게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자유가 타인을 해칠 권리까지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해악을 선동하는 것인 상황에는 언론의 자유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인이나 타인의 관심사가 오로지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진정한 의미의 동의와 참여’일 경우에는 다양한 인물과 삶이 폭넓게 허용되어야 한다. 개인의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개인 자신의 인격이어야지 다른 사람의 전통이나 관습이어서는 안 된다. 만일 이 원칙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인간 행복의 주요 요소들 중 하나를 상실하는 것이며, 개인적 진보와 사회적 진보의 중요한 요소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 된다.’ (L 185)

1-13. 개성이 없으면 인간은 외부에서 부과한 모형을 따르는 기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도처에서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고 발육시키는 한 그루 나무이다.’(L 188) 만일 특이한 행동이 배척당한다면, 강압을 받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피해를 입게 된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함으로써 한때 진리였던 것이 이제 더 이상 진리가 아님을 알려주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관행을 시작함으로서 인간의 삶에서 더 계몽된 행위의 모범을 보이고 더 나은 취미와 감각의 모범을 보이는 사람들이 항상 필요한 법이다.’(L 193) 여론이 세상을 지배하고 개인이 군중 속으로 사라져 갈 때야말로 어느 시대 보다 정열적이고 비정통적인 인물이 필요하게 된다.

1-14. 밀이 ‘실험적인 삶’을 권장할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그는 그 행동의 실례를 제시하기보다 일련의 풍부한 은유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해설한다. 밀이 자신의 원칙들을 실제에 적용할 때, 천재성의 계발을 억제하는 법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사람들의 평범한 행동을 방해하는 법률을 비난하는 선에 그친다.

1-15. 밀이 일상적인 관례를 따르지 않도록 장려할 때 깊이 간직한 본보기는 자신이 결혼하기 전 오랫동안 해리엇 테일러과 맺었던 인습에서 벗어난 관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게도 모르몬교의 일부다처제 승인을 실험적인 삶의 본보기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탐탁찮게 생각했다. 그가 인정한 이런 실험적인 삶은 ‘공동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쇠사슬로 옭아매 놓고,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에게는 호혜적 의무를 면제해 주고 있기’(L 224) 때문에, 자유주의의 원리와 정면으로 상충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여성들은 결혼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세상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많은 여성이 아예 결혼을 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여러 아내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밀은 일부다처제를 권유하지 않으면서도, 모르몬교들이 일부다처제를 포기하도록 강압하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1-16. 1851년 결혼에 즈음하여 밀은 계약 당사자의 인격과 재산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한쪽 당사자에게만 일방적으로 부여한 법에 반대하는 항의서를 제출했다. 그는 『여성의 종속에 관하여』라는 소책자에서 영국의 혼인법에 대한 반론을 구체적으로 제기했다. 한 성이 다른 성에 법적으로 종속되는 것은 원칙상 잘못이고, 인간의 진보에 대한 주요 장애물이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고용된 사람이고 평생 그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고 아내가 취득한 재산은 곧바로 남편의 손에 넘어가는, 어떻게 보면 아내는 노예만도 못했다.

1-17.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은 남성의 더 강한 근력에서 비롯되었고, 순전히 남성의 이기심으로 인해 문명의 시대에 계속 이어졌다. 현재의 남성 우월체제가 어떤 대안보다 더 낫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어떤 대안도 시도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은 긴 세월 훈련을 통해 남성 우월 체제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양육되었다.

“첫째, 이성은 서로 자연스럽게 매력을 느낀다는 것, 둘째, 아내는 전적으로 남편에 달려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인간적인 추구와 고려 대상 및 사회적인 야망의 대상은 오직 남편을 통해서만 추구되거나 획득될 수 있다는 것, 이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볼 때,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대상을 여성 교육과 인격 형성의 길잡이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을 것이다.”(L 487)

여성들이 굴레를 벗어나려 하지만 주인에게 반항하는 것은 폭군에게 반항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남성들의 포학함이 다른 온갖 형태의 권위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키르케고르의 도덕적 상승과 니체의 가치전도

Ⅰ. 키르케고르의 도덕적 상승

 

1-1. 키르케고르의 도덕 체계는 쇼펜하우어의 도덕 체계와 많이 비슷하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의 도덕적 조건에 대해 철저히 염세주의적이고, 단념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발전 과정을 나타낸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체계는 무신론적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하는 반면, 키르케고르의 체계는 개신교 신앙을 배경으로 전개되고, 그에게 도덕적 인생의 최고점인 단념은 결국 신앙으로의 도약을 위한 준비 단계일 뿐이다. 쇼펜하우어의 프로그램은 개체성(individuality)을 없애는 쪽으로 나아가는 데 입안된 반면, 키르케고르의 목적은 유일무이한 신의 피조물인 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완전히 소유하는 데에 있다.

1-2. 키르케고르의 현재 관심사는 심미적 단계와 종교적 단계 사이에 있는 도덕적 단계다. 그가 말하는 심미적인 사람은 자신의 느낌에 좌우되고 정신적 가치에 무감각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심미적인 사람을 힘 좋은 시골뜨기 혹은 성도착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사람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두 주인공 중 한 사람으로, 세련되고 법을 잘 지키고 사회에서 인기 있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 사람이 진지한 도덕적 행위자와 다른 점은, 직접 매력을 느끼는 것이면 곧바로 추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선택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관공서나 개인 사무소에서 일을 하지 않으려 하고, 깊은 우정을 맺는 것이나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한다.

1-3. 키르케고르는 사실 자유는 지극히 제한적이라서, 심미적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을 지하실과 1층 2층으로 이루어진 집으로 설명한다면, 인간의 영혼은 정신적 존재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심미적 인간은 지하실, 심미적인 것의 범주 안에 거주하길 좋아하고 자신의 지하실만 사랑한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그와 같은 인간은 절망 상태에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말하는 ‘절망’은 침울하거나 낙담한 상태가 아니다. 심미적인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다. 키르케고르의 어법에 따르면, 절망한 사람은 현재의 삶보다 더 높은 무언가를 성취할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절망하는 것은 더 높은 정신적 자아를 성취할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이러한 절망은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세상의 볼모가 된다’고 말한다.

1-4. 구원을 향한 첫 번째 단계는 세상 사람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심미적 사람의 행복 깊숙한 곳에 이미 불안한 공포가 깃들여 있고, 그 자신의 방탕으로 인해 자신이 해체된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른다. 그는 절망하는 자신을 포기할 건지, 아니면 자신을 도덕적 인생으로 넘겨 상승의 길을 갈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1-5. 도덕적 인생의 본성 그리고 도덕적 인생을 살아야 할 필요성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제 2부 가명 저자 빌헬름 판사의 편지에서 상세히 설명된다. 빌헬름 자신은 도덕적 사회의 완전히 헌신적인 구성원이다. 유감스럽게 독자가 보기에 그는 답답하고 반복하는 방식의 문체를 사용하는데, 이 문체는 이제 교화시키는 편지의 수령인이 된 『이것이냐 저것이냐』 제 1부의 심미적 저자에게 키르케고르가 부여한 익살맞은 통속 소설같은 문체와 완전히 구별된다.

1-6. 빌헬름은 심미적 인격과 도덕적 인격 사이의 큰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모든 심미적 인생관이 절망이라고 말하는데, 이 인생관이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기반으로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적 인생관은 존재에 속하는 것을 그 인생관의 본질적 속성으로 삼아 인생을 설립한다. 심미적인 것은 어떤 사람이 현상태의 바로 그 사람이도록 하고, 도덕적인 것은 어떤 사람이 앞으로 다른 어떤 사람이 되도록 한다.”

키르케고르는 자아(self) 개념을 매우 중요시 했다.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의 재능이나 덕을 갖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자아를 갖기를 결코 진지하케 원할 수 없다. 심미적 단계의 자아는 성숙하지 못했고 개별화되지 않았다. 도덕적 단계에 들어가는 진정한 자아 형성을 하는데, 여기서 ‘자아’는 자유롭게 선택도니 인격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 단계의 자아는 자신의 재능을 개발하기만 하지 않고, 자신의 소명 의식을 따른다. 도덕적 인생은 의무의 인생으로, 이때의 의무는 외부에서 가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에서 깨달은 의무이다. 개인의 진정한 발전은 보편 법칙의 내면화를 포함한다.

“개인 자신이 보편적인 것일 때야 비로소 도덕적인 것이 실현될 수 있고, 이것이 양심의 비밀이다. … 그는 자신을 보편적인 사람으로 만드는데, 자신의 구체성을 스스로 벗어 버림으로써가 아니라, 스스로 구체성의 옷을 입은 채 그것에 보편적인 것을 침투시킴으로써 보편적인 사람으로 만든다.”(E/O 547)

외국어 문법을 보면 어떤 특정한 낱말이 명사의 어형 변화와 동사의 형태 변화를 예증하는 모범 사례로 선택되는데, 그 낱말은 개개의 명사와 동사 모두에 관해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이처럼 빌헬름이 따라야 할 모범 사례는 개인적인 덕의 습득 통해서, 시민의 덕을 통해서 인도하고, 최종적으로 종교적인 덕으로 마무리한다. 키르케고르가 도덕적 사람의 모범 사례로 제일 많이 선택한 사람은 소크라테스로, 그의 삶은 도덕적 단계가 개인에게 엄격한 요구를 할 수 있고, 영웅적인 자기 희생을 요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증했다.

1-7. 빌헬름 판사는 그의 체계에서 도덕적인 것이 최고 범주가 아니기 때문에, 도덕성에 관한 키르케고르의 최종 발언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 자신이 도덕적 인생의 두 가지 특징인 직업도 갖지 않았고, 자신과 가족의 기구한 운명으로 행복한 결혼의 필수 요소를 실행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이 도덕적 인생의 요구 사항들에 직면할 때 인간의 나약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고, 강인한 의지로 나약함을 극복하려 하지만 역부족임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덕 법칙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이것을 그는 죄책감과 죄의식으로 끌고 간다. 이 상태를 벗어나고 싶다면, 도덕적 영역으로부터 ‘신앙의 영역’인 종교적 영역으로 도약, 상승해야만 한다.

 

 

Ⅱ. 니체와 가치 전도

2-1. 니체는 기독교적인 삶을 살도록 요구하는 것이 근거에 입각해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라는 키르케고르의 견해에 동의했으나, 그는 ‘단순한 근거라도 그만큼 더 나쁘다’고 한 반면 니체는 ‘기독교 신앙을 요구하면 그만큼 더 나쁘다’고 단언했다. 니체는 기독교 신앙이 인간을 비겁하게 만들고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것이 주된 불만이었다. 『도덕의 계보』와 같은 저작들에서 그는 기독교 도덕의 주장들에 관한 논박이 아닌 비천한 혈통을 추적한다.

2-2. 니체는 역사에 두 가지 종류의 도덕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고대의 강력한 특권 귀족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계급에 속한다고 느끼고, 자시의 자질들을 ‘좋은 것’으로 묘사했고, 평민의 특성을 ‘나쁜 것’으로 간주했는데, 이것이 바로 주인도덕(master morality)이다. 귀족들의 능력과 재산을 불쾌히 여기고 가난하고 약한 자는 이 체제를 완전히 뒤엎어서, 하층민을 위한 대조적인 가치 체계를 세웠다. 그들은 귀족형의 사람을 나쁜 사람 그리고 흉악무도한 사람으로 보았다. 니체는 이 새로운 체제의 설립을 ‘가치 전도’라고 불렀고, 이를 유대인 탓으로 돌렸다.

“귀족의 등식을 뒤바꿔 정반대 등식을 놀라울 만큼 일관된 논리로 과감하게 제시하고 뿌리 깊은 증오의 힘으로 그 등식을 끝끝내 고수한 것은 유대인들이었다.”(GM 19)

유대인에 의해 시작된 노예의 반란은 기독교의 상승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귀족적 덕의 고국이었던 로마에서도 네 명의 유대인 예수, 마리아, 베드로, 바울에게 머리 숙여 경배한다.

2-3. 기독교 자체가 사랑의 종교를 표방하지만, 니체에 따르면 사실 나약함과 공포와 악의의 종교다. 기독교의 주된 동기는 원한, 즉 약자가 강자에게 복수하려는 욕구로, 이 욕구는 죄인을 벌하려는 욕구로 가장되어 있다고 니체는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신 명령의 집행자인 양 행세하지만, 사실 그들의 떳떳하지 못한 마음을 숨기는 것일 뿐이다. 기독교인들은 동정심을 덕으로 떠받들지만, 그들이 고통 받는 자를 돕는 것은 그들을 대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연민은 온정적인 사람에게 타인의 고통을 감염시키는 독약이다.

2-4. 기독교의 성공은 인류의 퇴보를 가져왔다. 나약한 자에 대한 제도적인 배려는 인류의 건강과 강인함을 해치게 되었고, 현대인은 진정한 인간이 되려는 의지를 상실한 난쟁이에 불과했다. 인류가 타락에서 구원받으려면, 첫 번째 단계는 제 2의 가치 전도를 단행하여 기독교의 가치를 뒤엎는 것이어야 한다. 니체는 『반기독교』에서 ‘나약한 자와 실패한 자는 멸망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인류를 사랑하는 첫 번째 원칙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인간 진화의 상향선을 그리는 ‘상승하는’ 사람들과 하향선을 그리는 ‘하강하는’ 사람들, 두 유형으로 나뉜다.

2-5. 그러나 우리가 뒤엎어야 할 것이 기독교 도덕만이 아니라, 노예 도덕의 특징인 선과 악의 대립도 넘어서야 한다. 진리를 근본적인 가치로 간주하는 것은 기독교인만이 아니다. 하지만 니체는 판단이 잘못이라는 이유만으로 판단에 반대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문제는 판단이 어느 정도까지 생명을 활성화하고 생명을 보존하며, 어느 정도까지 종을 보존하고 경우에 따라 종을 향상시키기도 하느냐는 것이다. … 허위를 삶의 조건으로 인정하고 전통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이런 일을 감행하는 철학은 이미 그 자체가 선과 악을 넘어 저편에 있다.”(BGE 7)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없이는 특정한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과오다. 생명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고의 가치다. 인간의 생명은 지금까지 발생한 최고 형태의 생명이지만, 현대 세계에서 인간의 생명은 그에 앞서 발생한 일부 형태의 생명 수준으로 퇴보했다. 우리는 생명을 확인해 그것을 새로운 수준, 즉 주인과 노예에 대한 정립과 반정립을 초월하는 종합의 상태인 초인(超人, Ubermensch)의 수준으로 이끌어야 한다.

2-6. 초인의 선은 니체의 신탁과 같은 대변인 차라투스트라의 예언적 메시지다. 초인은 삶의 최고 형태, 삶에 대한 의지에 대한 최종 확인이다. 우리의 삶에 대한 의지는 모든 생명의 비밀인 힘에 대한 의지(will to power)여야만 한다. 쾌라은 힘의 발휘에 대한 자각에 불과하고 지식은 힘의 도구에 불과하다. 인간 능력의 최고의 실현은 초인의 창조일 것이다.

2-7. 인간성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초인에 이르는 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다. 즉 인간은 건너야 할 다리지 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초인은 진화의 힘이 아니라 오로지 의지를 발휘함으로써 나타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의지로 하여금 “초인이 세상을 의미있게한다”라고 말하게 하자.’

2-8.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그대들은 반드시 초인을 창조할 수 있다. 그대들 자신은 혹시 초인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대들은 자신을 초인의 조상이자 선구자로 변형시킬 수 있다.’ 초인이 등장함으로써 세상이 완벽해지고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역사는 영구히 순환하기 때문에 초인의 등장은 역사의 종말이 아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초인과 같이 무수한 초인이 등장할 것이다.

2-9. 초인은 어떤 존재인가? 만약 초인의 특성이 인간의 선과 악을 판단하는 어떤 기준이 된다면 우리는 초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 필요가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도, 후기의 니체도 더 이상 초인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더 높은 수준의 인간’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는데, 우리는 저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다양한 재능을 최대한 개발한 괴테와 나폴레옹의 조합이 니체의 이상인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이 조합은 ‘그리스도의 영혼과 카이사르’의 조합보다 더 그럴 듯하다.

2-10. 니체의 저작은 대개 종잡을 수 없고, 학자들마다 해석과 평가가 천차만별이라 니체의 윤리학을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니체가 잔임함의 도덕성과 같은 그런 문제에 어떤 입장인지 알기 쉽지 않다. 그는 노예 도덕에서 죄책감이 하는 역할을 집요한 광신자가 가하는 고문을 격렬하게 묘사하는 반면, 귀족적인 ‘금발의 야수’의 난폭함에 대해서는 온정적인 묘사를 한다.

2-11. 확실히 니체는 전쟁에 관한 열렬한 지지자로, ‘전쟁을 단념하는 것은 위대한 삶을 단념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전쟁은 자유를 교육시키고 자유는 승리를 즐기는 남성적 본능이 행복에 대한 욕구를 비롯해 다른 본능들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2-12. 자살 역시 어떤 상황에서는 니체의 칭찬 대상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자랑스럽게 살 수 없다면 자랑스럽게 죽어야 한다. 자유롭게 선택된 죽음, 아이들과 입회인들에 둘러싸여 기꺼이 즐겁게 맞이한 적절한 시기의 죽음 – 작별을 고하는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 진정한 작별이 여전히 가능하도록 하는 죽음 – 이 모든 것은 기독교가 죽음을 맞이하여 행하는 섬뜩하고 가련한 희극과 대조를 이룬다.”(TI 61)

당신이 자살을 한다면, 매우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생존권은 대부분 당신에게 달려 있다.

2-13. 그래도 어쨌든 니체는 윤리학자인가? 그는 선과 악에 대해 좀처럼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진정한 도덕가인가, 아니면 옳고 그름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철저한 무도덕한(amoral) 사람인가? 니체는 과거의 몇몇 훌륭한 도덕가들과 동일한 분야에 속해 있다. 반면 니체 자신은 선과 악은 기발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과 악의 범주를 완전히 초월해 있다고 공언한다. 그는 대부분의 도덕 체계에 포함되어 있는 정의와 죄책감 이 핵심 개념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2-14. 내가 생각하기에 해결책은 니체가 인간의 번영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전통 도덕과 나누어 갖는 것이다. 그가 여러 관습적 덕을 비난하는 이유는 관습적 덕이 가치있는 삶을 성취하도록 돕지 않고 훼방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선함보다 위대함을, 신사보다 귀족을 선호하며, 근본적으로 자신은 좋은 삶의 도덕적 기준보다 미적 기준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상적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뿐더러 아예 이웃을 갖지 않는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자크 데리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자크 데리다

 

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1-1. 하이데거에게 잠시 배운 적이 있는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는 우파 실존주의인 하이데거와 다르게 정치적 좌파로의 실존주의 형태를 전개했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1924~1928년에 고등사범학교에 수학했고, 몇 년간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는 1933~1935년에 베를리 대학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는데, 그의 철학은 1936년에 「자아의 초월성」과 「상상력 : 심리학적 비판」이라는 두 논문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 논문들은 소설 『구토』(1939)와 『감정 이론 개요』(1939)로 이어졌다.

1-2. 사르트르의 전쟁 이전 에세이들은 현상학적 틀 안에서 심리철학을 연구한 것들이다.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그는 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을 충분히 해내지 못했다고 불만스러워했다. 후설은 데카르트의 자아인 사고 주체를 의식의 자료로 인정했으나, 사실 데카르트의 자아는 의식의 자료가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던 것에 몰두할 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자아를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오직 반성적 사고를 할 때뿐이므로, 철저한 현상학자가 되려면 전-반성적(pre-reflective) 의식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아, 즉 사고 주체는 의식의 외부에 있고, 따라서 타인의 정신처럼 의식을 초월한 세계에 속한다.

 

1-3. 사르트르는 「상상력」에서 널리 알려져 있고 특히 흄이 말한 관념, 즉 내적인 정신세계의 내용을 상상 속에서 관찰한다는 관념을 공격했다. 사르트르는 지각과 상상 모두 심상이나 환영의 정신적 현전(現前, presence)에 있다고 생각하고, 지각된 이미지가 상상의 이미지보다 더 강렬하고 생생하다는 것이 그 둘의 유일한 차이점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임을 보였다. 그에 의하면 상상은 내적 이미지가 아니라 지각과 마찬가지로 정신 외적 대상과 관련을 맺지만, 관련을 맺는 양상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이 실제로 현존하지 않을 경우, 우리가 하는 일은 어떤 대상을 세계에 창조하는 것이다.

1-4. 그에 의하면, 감정을 수동적 내적 감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감정은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우리 환경에 대한 불편부당한 인식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마주치는 상황에 대한 ‘마술적 변형’을 감정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울할 때 우리는 세상을 향해 마술을 건 나머지, 온갖 노력이 허망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1-5. 1939년에 전쟁이 일어나자 사르트르는 징집되어서 1년 후 독일군의 포로가 될 때 까지 싸웠다. 휴전 후 풀려난 그는 파리에 철학 선생으로 돌아왔으나, 나치 점령군에 맞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기도 했다. 1943년에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받은 그의 대표작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가 출간되었다. 『존재와 무』의 일부분은 『존재와 시간』에 못지않게 난해하다. 그러나 소설가와 극작가이기도 한 그는 철학의 핵심들을 상세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예시하는 재능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그는 『실존주의와 휴머니즘』에서 저작의 주요 주제들을 더 간략하고 더 대중적인 방식으로 다뤘다.

1-6. 사르트르의 경우, 존재는 우리가 의식 속에서 마주치는 서로 다른 모든 종류의 사물들과 모든 양상의 사물들에 선행하고 기초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과 목적에 따라 우리는 사물을 종류와 집합으로 구별한다. 의식이 만들어 낸 모든 구별의 옷이 사라지면, 우리는 불투명하고, 단일하고, 우연적인 순수 존재, 존재 자체, 즉자존재(卽自存在)로 남는다. 그것은 ‘이유도 없고, 원인도 없고, 필연성도 없다(BN 619).’ 원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그 자체의 원인, 즉 자체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그렇게 거기에 있을 뿐이다. 사르트르는 그것을 ‘무상(無償, gratuitous)’, 때로는 ‘잉여(剩餘)’라고 말했다.

1-7. 즉자존재는 『존재와 무』의 두 가지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다른 하나는 대자존재(對自存在), 자존적 존재, 즉 인간의 의식이다. 이것이 제목의 무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사르트르는 무를 통해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한다. 존재에 대한 부정은 대자와 즉자를 구별해주는 요소이다.

1-8. 사르트르는 여기서 하이데거의 기본 주장을 부연하여 설명한다. 영어권 철학자들은 ‘무가 무화한다(nothing noths)’를 하이데거의 언명을 불합리한 극치로 간주하지만, 사르트르는 무의 객관화이고 무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인다. 의식이 세계를 명확히 표현할 때 의식은 부정을 수단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내가 빨강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면, 나는 세계를 빨강과 빨강-아닌-것으로 나눈다. 내가 의식과 존재를 구별하고자 한다면, 나는 의식이 존재-아닌-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세계에 무를 나타나게 하는 존재는 그 존재 자신의 무가 아니면 안된다.’ (BN 23)

1-9. 역사가가 보면, 그것은 마치 파르메니데스가 생각해 냈고 오래전에 플라톤이 해결했던 수수께끼를 사르트르가 재도입한 것처럼 보인다. 1945년에 에이어(A. J. Ayer)가 사르트르가 무를 다루는 방식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길을 보니 아무도 없다(she sees nobody on the road)라고 말할 때 나타낸 왕의 반응과 비교했다. ‘정말이지 내가 저런 눈을 가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니! 그것도 저 정도 거리에서 말이야!’ 『존재와 무』에는 제목이 사르트르의 ‘무화(無化)’에 대한 설명과 무관하게 중요한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대부분의 대상들은 본질이 실존에 앞서지만, ‘실존이 본질에 앞서게 되는 어떤 한 존재, 그 어떤 개념으로도 정의되기 이전에 실존하는 어떤 한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존재가 인간이다.’ (EH 66)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질에 앞서며,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한다. 인간은 어떤 종류에 속해있지 않고 각자 어떤 종류의 것이 될 것인지 결정한다. 인간의 자유는 대상들의 세계를 갈라놓는다.

1-10.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 개개인의 삶은 창조자나, 필연적인 원인이나, 절대적 도덕 법칙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내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필연성은 선택의 필연성이다. 인간의 자유는 절대적이지만 그 또한 불안한 것이기에 외면하려 하고, 도덕이나 사회가 미리 정해 준 역할을 따르려 한다. 그러나 자유를 은폐하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자기 자신을 단순한 대상으로 격하시키면서도 암암리에 자유를 느끼는 이중적인 마음을 갖게 되는데, 이것을 그는 ‘자기 기만(bad faith)’이라 일컬었다.

1-11. 바람직한 태도는 자신의 자유를 인정하고 긍정하며 자신의 행위와 삶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전통적 도덕적 명령이나 우연적 환경에 구속받아서는 안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는 물리적 한계가 있긴 하지만, 자신의 욕구와 계획을 조정하며 내가 직면한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나다. ‘나를 나이게끔 하는 유일무이한 최초의 기투(企投, project)에 직면하여 홀로 두려워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자유를 의식함으로써 모든 장벽과 철책은 무너지고 무효화된다. 존재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나라는 사실에 반하는 어떤 가치에도 나는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의지할 수도 없다.’ (EH 66).

1-12.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동안 그는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와 함께 파리 좌안(left bank)의 문화적이고 지성적인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아방가르드의 월간지 『현대』를 창간하고 편집했고, 성공적인 희곡들을 썼다.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즉자와 대자 이외에도 타자를-위한-존재(being-for-others)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것은 본래 내가 타자에게 나타나는 방식이고 타자에 의해 관찰되는 방식으로, 나는 타자에게 하나의 대상에 지나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질투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는 타자를-위한-존재의 고유 의미를 대립이라 했다. 그는 후기 저작에서 이 주제를 개진하고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1-13. 실존주의의 기본 방침이었던 절대적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자의 결정론이 쉽게 양립할 수 없었음에도 그는 공산당에 가까운 사회 정치적 입장을 취했다. 이와 같은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1960년에 『변증적 이성 비판』을 썼다. 그는 1964년에 노벨 평화상을 정중히 거절했고, 1980년에 죽었다.

 

Ⅱ. 자크 데리다

2-1. 1960년대에 접어들자 대륙철학과 영어권 철학 사이의 관계가 잠시 회복되는 듯 했다. 알제리의 유대인 집안 출신인 서른 두 살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1962년에 후설과 기하학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출간했다. 같은 해 옥스퍼드의 철학자 오스틴(J. L. Austin,1911-1960)의 강의록 『말과 행위』이 유작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책은 서로 다른 종류의 발화 행위들(speech acts)에 관한 이론을 주장하였다. 1967년에 데리다는 오스틴의 영향을 받은 독창적인 저작 『글쓰기와 차이』,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언어와 현상』을 내놓았다.

2-2. 그런데 두 철학자는 동일한 논제를 매우 다른 방식으로 다루었다. 오스틴은 1946년에 두 종류의 언어, 즉 사실 확인(constative) 언어와 수행적(performative) 언어를 구별했다. 사실 확인 문장은 ‘비가 내린다’처럼 사실의 문제로 상황이 어떠한가를 진술하는 데 사용된다. 수행적 발언은 사실을 보고하는 진술이 아니라 상황을 변화시키는 발화 행위를 일컬었다. 예컨대 ‘나는 이 배를 퀸 엘리자베스라고 명명한다’, ‘내 시계를 동생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2-3. 오스틴은 다른 많은 종류의 수행적 발언들, 즉 내기, 임명, 저주와 같은 발언을 분류하면서 외관상 간단한 진술 속에 숨어 있는 수행적 요소들을 확인해 나갔다. 일정한 발전 단계에 도달하자 그의 이론은 발화 행위의 세 요소인 발화(locutionary), 발화 수단(illocutionary), 발화 효과(perlocutionary)의 작용을 논의하는 방향으로 갔다. 누군가 ‘그녀를 쏴!’라고 말한다면, 발화 행위는 ‘쏴’의 의미와 ‘그녀’가 지칭하는 것을 구체화함으로써 명확해진다. 발화 수반 행위는 명령하거나 재촉하는 등의 행위이다. (발화 수반 행위가 목적을 달성한 경우에만) 발화 효과 행위는 ‘그는 나로 하여금 그녀를 쏘게 했다’라는 형태로 쓰여질 수 있다.

2-4. 오스틴은 서로 다른 종류의 발화 행위들과 발화 행위의 요소들을 구별하기 위해 여러 새로운 전문 용어들을 도입했는데, 그 용어들은 알기 쉬운 용어로 정의되고 실례를 통해 선명히 밝혀졌다. 전반적인 효과는 방대하고 중요한 언어철학 분야를 미시적인 수준에서 명료화하는 것이다.

2-5. 데리다의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그도 역시 전문 용어를 아주 많이 도입한다. 예를 들어 ‘gram’, ‘reserve’, ‘spacing’, ‘pharmakon’ 등의 용어들을 도입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전문 용어를 스스로 정의할 용의는 없었고, 만약 용어를 정의해달라는 요구를 받으면 어떻게 정의해도 마땅치 않다고 거절했다. 그가 제시하는 예증 실례들이 용어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잘 알아차리기 어려운 나머지, 평범한 형태의 용어는 오묘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2-6. 오스틴은 발화행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말로 하는 것과 글로 쓰는 것을 구별하는 데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철학적 논의 사항을 두 종류의 언어 사용에 적용했다. 다른 한편 데리다는 그가 말한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 즉 서양문화에서 지나치게 말하기를 강조하는 태도를 공격하면서 그 구별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현대 사회에 시민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을 감안하면, 데리다의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비난은 플라톤읜 『파이드로스』에 나오는 다수의 기이한 텍스트들에 입각해 있음이 분명했다.

2-7. 수행적 발화 행위들 가운데 약속하는 행위는 오스틴과 데리다 둘 다 관심을 가졌다. 오스틴은 약속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적절치 못한 상황을 교훈적인 방식으로 목록을 만들었다. 데리다는 모든 수행적 발화 행위에는 늘 죽음이 따라다닌다(‘누구든 약속을 완수하기 전에 죽을 수 있다’)는 말로 표현되는 상황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는 모두 어김없이 죽기 때문에 죽음의 가능성은 수행적 발화 행위와 아무 관련도 없다. 약속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자전거를 타는 일도 죽으면 그만이다.

2-8. 데리다의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적개심은 그가 말하는 ‘현전 형이상학’, 즉 의미와 진리에 대한 주장의 기반은, 의식 안에 주어진 익숙한 어떤 것이라는 생각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는 일차적으로 후설을 공격하려 했지만, 경험주의자의 감각 자료 개념 역시 유사한 비판에 열려 있었다. 그에 의하면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의미대상인 사고가 가장 이상적인데, 말하기가 글쓰기보다 사고와 더 가깝기 때문에 서양 전통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와 글쓰기 사이의 대립을 ‘해체하고’(deconstruct), 저자의 통제에서 벗어나 가지각색의 또 다른 해석을 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으로 글로 쓴 텍스트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했다. 어떤 사람들은 현전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공격이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개념의 해체와 기조는 다르나 기획 자체는 유사하다고 보았다.

2-9. 데리다는 초기 저작에서 대단한 철학적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나, 1967년 이후 그의 사상과 저작은 오스틴이나 비트겐슈타인, 현대 분석철학,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후설에 이르는 철학자들에 의해 이해된 철학과 현저하게 달라졌다. 데리다는 서로 혼동될 수 있는 개념들을 구별하고, 필요하다면 이 구별을 뚜렷히 나타내는 용어들을 창작하거나 개작하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새로운 용어를 도입하여서 완전히 다른 관념들을 오히려 혼동하게 만들었다.

2-10. 데리다가 대단히 자랑하는 ‘차연’(deferrence) 개념을 살펴보면, 차연은 연기(deferring)의 개념과 차이(difference)의 개념을 결합한 것으로, 그는 ‘차연은 지연으로서의 연기와 차이의 실제 작용으로서 다름(differing)이 서로 분리되기 전에 생각해 낸 것이다’고 말한다. 이처럼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을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는 그의 해설과 부연을 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가를 이해해보면, ‘그것은 대상의 이름이 아니며, 나타날 수 있는 어떤 “존재”의 이름이 아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은 어떤 개념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데리다의 텍스트에서 ‘차연’을 여러 가지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바로 그 자체가 차연의 한 실례일 수도 있다. 즉 차용증서들(IOUs)이라는 말은 정의(正義)와 완전 다르게 사용되고 실제적인 의미 부여를 미래로 연기한다.

2-11. 데리다는 저자들을 상대하는 방법, 즉 꽃다발 방법(nosegay method)이라 약칭하는 기술을 고안한다. 우리는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 동일한 낱말이 포함된 다수의 텍스트를 수집해서 문맥과 날짜, 텍스트의 발언자의 목소리를 알 수 없게 잘라내서 자연적 의미를 변형시킨다. 우리는 인상적이거나 자극적인 일부 주장을 한데 모아 묶어서 꽃다발로 선물한다. 이 기술은 전통적인 문학 비평에서 조금만 노력해도 되기 때문에 일부에서 유행하게 된다.

2-12. 후기의 데리다는 기발한 수사적 기교로 독자의 지속적 관심을 받는데, 특히 성공적인 수사 기술은 ‘논박할 수 없는 역설’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한다. 『그리마톨로지에서』에서 자주 인용된 문장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이다. 아주 매력적이고 충격적이고 주목할만하다. 흑사병과 유대인 대학살은 존슨의 비평집 『시인들의 삶』을 말하는 텍스트 사건과는 다르다. 그러나 후기 데리다는 텍스트가 글쓰기의 집합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한계, 실재의 한계, 역사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글쎄, 우리의 이야기는 우주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뿐이라면, 그것을 반박하는 것은 성급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을 맥락 속에서 보려고 노력하라는 권고는 분명히 건전한 충고이다.

2-13. 데리다는 자기가 실제로 노련한 수사학자인 듯 성과 죽음을 끌어들여 독자들을 일깨운다. 혼잣말은 자위가 성교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큰 소리로 말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독자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간질이지는 못했다. 요한 계시록에 ‘그리고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신다, 오라! 그리고 듣는 자에게 말씀하신다, 오라!’라는 구절을 그는 영어와 프랑스어의 ‘오라’(come) 낱말에 붙어 있는 텍스트에 관해 장광설을 늘어 놓는다.

2-14. 방금 예시한 그런 방식으로 데리다를 비판하는 것이 꼴사나워 보일 수 도 있으나, 그렇게 비판한 이유는 올바른 비평에 대한 그와 같은 흉내 내기가 바로 데리다가 후기 저작에서 채택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적 무기가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말장난, 외설, 키득거림이다. 후기의 데리다에는 어떤 신조도 찾아볼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데리다에게 냉담한 독자가 그의 신조를 이해 못 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자신의 저작이 명제들로 요약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실제로 그는 철학자가 되려는 야망을 때로 포기하기도 했다.

2-15. 그렇다면 비난이던 칭찬이던 철학의 역사 속에 데리다를 포함시키는 것이 부당하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말하든 그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진지한 철학자로 인정받았으니 그만큼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진짜 철학과 사이비 철학을 식별하는 일에 소홀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론⟫과 논리실증주의

Ⅰ.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론⟫

1-1.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비엔나에서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유대인 출신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명한 철강 재벌인 아버지와 가톨릭교도 부인과 아홉 자녀가 있는 대가족이었고, 자녀 모두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브람스가 손님으로 자주 왔고, 그의 형 파울은 1차 세계대전으로 한 팔을 잃었음에도 명성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비트겐슈타인은 14살까지는 가정교육을 받고, 그 후 3년간 린쯔에 있는 실업학교에 다녔는데, 그곳의 동기생 중 한 명이 히틀러였다.

1-2. 비트겐슈타인은 학교를 다닐 때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신앙생활을 그만두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공학을 공부해 맨체스터 대학에 갔는데 거기서 비행기의 제트추진 엔진을 설계했다. 그는 러셀의 ⟪수학의 원리⟫와 프레게의 저작을 읽고, 1911년에 예나 대학의 프레게를 찾아갔다. 프레게의 권고로 그는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가서 다섯 학기를 러셀의 지도하에 있었다. 러셀은 그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보고 그가 능력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었다.

1-3. 비트겐슈타인은 1913년 케임브리지를 떠나 자신이 만든 노르웨이의 오두막에 은둔했는데, 그 시기에 그는 일생 동안 유지할 그의 철학관을 보여 주는 비망록과 편지를 썼다. 그는 철학은 연역적 학문이 아니고 또한 자연과학과 똑같은 위치에 놓일 수 없다고 기록했다.

‘철학은 실재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지 못하며, 과학적 탐구를 확증할 수 도 없다.(NB 93)’

1-4. 1914년에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오스트리아 포병대에 자원입대했고, 1918년 11월 이탈리아 군인에게 붙잡혀 몬테카시노 근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 철학적인 생각들을 일기에 썼고, 수용소에 있을 때 그 철학적 생각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판된 철학책 ⟪논리철학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으로 빛을 보게 된다. 그는 수용소에서 책 원고를 러셀에게 보내, 후에 네덜란드에서 만나 토론을 한다. 책은 1921년에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얼마 후 오그던의 영어 번역과 러셀의 머리말을 덧붙여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1-5. ⟪논리철학론⟫은 간결하고, 우아하고, 수수께끼 같다. 일련번호가 붙은 문단들로 구성되어 있는 그 책은 ‘세계는 성립할 수 있는 경우들 전체다’로 시작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로 끝난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의미에 관한 그림이론(picture theory)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명제들로 이루어진다. 명제(proposition)은 사고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이고, 사고(thought)는 사실들에 대한 논리적 그림이고, 그리고 세계(world)는 사실들 전체이다.

1-6. ‘런던 기차는 11.15에서 출발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와 같은 문장은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와 사고는 문자 그대로 그림이라 믿었다. 만약 명제와 사고가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언어가 사고를 심하게 왜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일상 언어에서도 묘사적 요소가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나의 포크가 나의 나이프 왼쪽에 있다’는 문장은 똑같은 낱말들로 이루어진 다른 문장, 즉 ‘나의 나이프가 나의 포크 왼쪽에 있다’와 전혀 다른 말이다. 첫 번째 문장이 그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은 ‘나의 포크’라는 낱말들이 ‘나의 나이프’라는 낱말들 왼쪽에 나타난다는 사실이다(그러나 두 번째 문장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낱말들의 공간적 관계는 사물들의 공간적 관계를 묘사한다(TLP 4.102).

1-7. 이렇게 단순한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문장을 글이 아닌 말로 한다면 그것은 식탁 위에 있는 것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공간적 관계라기보다는 소리들의 시간적 관계이다. 이것은 말하는 순서와 공간적 배열이 일정한 추상적 구조를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철학론⟫에 따르면, 그림이라면 어느 것이 그것이 묘사하는 것과 공통된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 그는 이 최소한의 공통점을 그것들의 논리적 형식(logical form)이라 말했다. 대부분의 명제들은 앞에서 본 경우와는 다르게 명제가 묘사하는 상황과 공통된 공간 형태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명제라면 어느 것이나 그것이 묘사하는 것과 공통된 논리적 형식을 가져야 한다.

1-8. 비트겐슈타인은 왜곡된 일상 언어 뒤에 숨어있는 사고의 묘사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러셀이 제시한 것처럼 논리적 분석을 해 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우리가 이 분석을 하다보면 결국 전혀 복합적이지 않은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들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완전히 분석된 명제는 원자 명제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데, 각각의 원자 명제는 단순 대상의 이름들, 즉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옳거나 그르게 묘사하는 방식에서 서로 관련된 이름들을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완전한 분석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지만, 명제가 표현하는 사고는 완전히 분석된 명제의 복합체를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 우리는 복잡한 규칙들을 부지불식간에 가동해서 명제가 표현하는 사고를 일상의 언어로 표현한다. 언어와 세계의 연결은 마음속에 있는 사고의 궁극적 요소들과 세계의 본질을 구성하는 원자 대상들(atomic objects) 사이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런 상호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말할 수 없다. 그건 우리 각자가 사적 언어를 만들어 혼자서 확인할 수밖에 없는 신비한 과정이다.

1-9. 명제와 그 명제가 나타내는 세계 구조에 대한 그림 이론을 해설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양한 종류의 명제들이 어떻게 원자 그림들의 결합으로 분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과학은 명제들로 이루어지는데, 그 명제들의 진리치는 그 명제들을 구성하는 원자 명제들의 진리치로 결정된다. 논리학은 항진 명제들(tautologies), 즉 그 요소 명제의 진리치가 뭐든 상관없이 옳은 복합 명제들(complex propositions)로 이루어진다. 어떤 명제들은 그 자체가 사이비 명제(pseudo-proposition)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명제들 중 윤리학과 신학의 명제도 있다. 그리고 ⟪논리철학론⟫자체의 명제들을 포함한 철학 명제들 역시 사이비 명제에 속하게 된다.

1-10. ⟪논리철학론⟫은 다른 형이상학 논문들처럼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기술하고자 했으나,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림은 그것이 그리는 대상과 독립적일 수밖에 없으며, 올바른 그림이 있는 것처럼 잘못된 그림 또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명제라면 어느 것이나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포함해야 하므로, 명제는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그릴 수 없다. 형이상학자가 말하려는 것은 그저 보일 수 있을 뿐이다. ⟪논리철학론⟫의 문단들을 딛고 올라가 세계를 정확히 보게 되면 걷어차야 하는 사다리와 같다.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비철학적 명제들을 명료화하는 활동(activity)이다. 일단 비철학적인 명제들이 명료해지면 그 명제들은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비출 것이고, 그럼 철학자가 말하려는 것이 보이겠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1-11. 과학도 철학도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보여주지는 못하나, 이것이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심이 물음(question)이 있을 때에만 의심일 수 있고, 물음은 답이 있을 때만 물음일 수 있으며, 답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을 때에만 답일 수 있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과학적 물음의 답을 모조리 알게 되었을 때조차도 삶의 문제(problem)는 완전히 그대로 남는다고 느낀다. 물론 답을 모조리 알게 되면 더 이상 남은 물음이 없을 텐데, 이 자체가 삶의 문제에 대한 답이다. 삶의 문제는 문제가 사라지는 순간 해결된다(TLP 6.5-6.521).”

사람이 불멸을 믿는다고 삶의 의미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원히 산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영생 그 자체가 하나의 난문제인 셈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신은 세계 속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신비한 것은 사물들이 세계 속에 어떻게 있느냐가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다(TLP 6.432, 6.44).’

1-12. 철학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나, ⟪논리철학론⟫만은 철학이 해 줄 수 있는 일을 했다 – 비트겐슈타인도 그렇게 믿었다. 완벽한 책을 내놓았기 때문에 그는 철학을 그만두고 평범한 일들을 했다. 아버지 칼 비트겐슈타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와 형제자매들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나,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자기 몫을 포기하고 수도원에서 정원사 일을 하거나 시골 학교에서 교사를 하며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1926년 한 학생이 가학성 벌을 받았다고 고소하며 기소되었고,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교사를 그만두었다.

Ⅱ. 논리실증주의

2-1. 비트겐슈타인은 비엔나로 돌아왔고, 자기 누나를 위해 새로 지을 집을 설계하는 걸 도왔다. 그는 1922년에 누나에게서 비엔나 대학의 과학철학 교수로 있는 슐리크(Moritz Schlick)를 소개받아, 그와 함께 철학적 탐구를 다시 시작했다. 두 사람은 1927-8년 월요일 저녁마다 만났고, 카르납(Rudolf Carnap)과 바이스만(Friedrich Waismann) 등 다른 사람들도 만났다. 1929년 그는 (사후 ⟪철학적 논평⟫으로 출판된) 철학 원고를 쓰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갔다. 그가 없는 동안 토론 그룹은 의식적인 철학 운동을 전개했고, ‘비엔나 학단의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선언문을 발행했다. 그 선언문은 과학적 세계관에 마땅히 내놓아야 하는 예전 그대로의 형이상학 체계에 반대하는 캠페인의 시작이었다.

2-2. 반형이상학 프로그램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의 일부 발상들을 활용했고, 필연적 진리가 필연적인 것은 오로지 그것이 항진 명제이기 때문이라 선언했다. 이는 수학적 진리가 세계에 관해 무언가를 알려준다는 것을 부정함과 동시에 그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승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세계에 관한 지식은 오직 경험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고, 명제는 경험에 의해 검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명제의 의미는 명제가 검증되는 방식이라는 검증원리는 형이상학을 공격하는 강력한 무기였다. 두 형이상학자가 절대자의 본성이나 우주의 목적을 놓고 논쟁을 벌일 경우, ‘그 논쟁이 가능한 어떤 경험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2-3. 곧바로 검증 원리의 위상과 공식에 관해 여러 논쟁이 벌어졌다. 검증 원리 자체는 항진명제인가? 검증 원리는 경험에 의해 검증 가능한가? 어느 답도 만족스러울 것 같지 않다. 게다가 형이상학적 신조들 못지않게 과학의 일반 법칙들도 결정적인 검증을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과학의 일반 법칙들은 여전히 반증될 수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검증 원리를 반증 원리로 대체해야 할까? 그럴 경우, 존재 주장들이 어떻게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존재 주장들은 우주를 남김없이 돌아다녔을 경우에만 결정적으로 반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 기준을 좀 더 약한 형태로 표현하여, 명제는 명제의 옳고 그름과 관련 있는 약간의 관찰들이 있을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중해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검증 원리에 대해 조건부로 동의했지만, 당시 그는 수학적 명제 의미는 명제의 증명 방법이라는 선천적으로 유사한 주장을 옹호했다.

2-4. 실증주의자들은 철학의 진정한 과제가 보편적인 명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닌, 비철학적인 진술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이 점으로 비트겐슈타인과 하나가 됐다. 그들이 선택한 명료화의 방법은 경험적 진술들이 경험의 직접 기록인 요소 진술들 혹은 ‘원초’(protocol) 진술들로부터 어떻게 진리 함수적으로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원초 진술에 나오는 낱말의 의미는 그 낱말이 나타내는 경험의 특징을 가리키는 예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에서 비롯된다.

2-5. 이 프로그램은 큰 장애물에 부딪쳤다. 원초 진술로 기록된 경험들은 각 개인에게 사적으로(private) 나타난다. 만약 의미가 검증에 좌우되고, 우리 각자가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어떤 과정에 의해 검증을 수행한다면,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의미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슐리크는 이 물음에 형식(form)과 내용(content)을 구별하면 된다고 답했다. 나의 경험 내용은 내가 붉은 어떤 것을 보거나 푸른 어떤 것을 볼 때와 같이, 내가 가지고 있거나 내가 겪는 것이다. 이것은 사적이고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경험의 형식이나 구조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공통일 수 있다. 내가 나무를 보거나 석양을 볼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보는 것과 동일한 경험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 나무가 푸르다고 하고 석양이 붉다고 하는 한, 우리는 서로 소통할 수 있고 과학의 언어를 구성할 수 있다.

2-6. 비트겐슈타인은 이 해결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유아주의(solipsism)의 위협을 받지 않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비엔나 학단을 멀리하고 케임브리지로 완전히 돌아와서, 《논리철학론》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고 트리니티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비엔나 학단은 슐리크와 베를린의 라이엔바흐가 공동 편집한 《인식》이라는 학술지에서 반형이상학 프로그램을 계속했다. 비엔나 학단의 기본적인 생각들은 1936년 에이어(A. J. Ayer)의 《언어, 진리, 논리》가 출판되면서 영국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 해 슐리크는 한 학생이 총을 쏴 살해되었고, 비엔나 학단은 탁월한 일부 회원들이 정부의 탄압으로 망명을 떠나면서 1939년 막을 내렸다. 비엔나 학단이 후세를 위해 남긴 아주 뛰어난 유산은 1935년 포퍼(Karl Popper)의 《과학적 발견의 논리》 출판이었다.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그리고 마르크스

Ⅰ.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

1-1. 생애와 시대적 배경

1-1-1. 벤담은 공리성의 원리를 제시할 때, 그것을 행복을 줄이려 한 경우에 한해 행위의 가치가 인정된다는 금욕주의 원리와 비교했다. 벤담의 주요 비교대상은 기독교 도덕이었으나, 정작 기독교인들에게 금욕주의의 원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든 철학자들 가운데 금욕주의의 원리를 제일 용의주도하게 주장한 사람은 무신론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였다.

1-1-2. 쇼펜하우어는 단치히 상인의 아들로 1803년까지 아버지의 사업을 익히며 성장했다. 그는 의대생의 공부를 하다가 방향을 바꿔 1810년 괴팅겐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플라톤과 칸트를 좋아했지만, 칸트의 제자인 피히테는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1811년 베를린에서 피히테의 강의를 듣고 그의 민족주의를 혐오했다. 쇼펜하우어는 박사학위 논문이었던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을 쓰기 위해 나폴레옹에 대한 프로이센의 투쟁에 가담하지 않고 빠져나왔다.

1-2. 사상

1-2-1. 쇼펜하우어는 1814~1818년에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The World as Will and Idea)》를 썼다. 그는 네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에서는 관념(Idea)으로서의 세계에, 두 번째와 네 번째는 의지(Will)로서의 세계에 관해 썼다. 그가 말하는 ‘관념’(혹은 ‘표상(representation)’으로도 번역된다)은 개념이 아니라, 로크와 버클리가 지칭한 구체적인 경험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세계는 오로지 관념, 의식과 관련해서만 존재한다(‘세계는 나의 관념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몸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지각을 하고, 다른 대상들은 그것들의 상호 영향을 통해 알려진다.

1-2-2. 관념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설명은 칸트와 별반 다른 것이 없지만, 세계를 ‘의지’로 표현한 부분은 매우 독창적이다. 그는 관성 법칙이나 중력 법칙으로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이지만, 과학은 관성이나 중력과 같은 힘의 내적 본성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은 인식주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나의 신체는 스스로 의식하는 능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데, 오로지 이것만이 사물들의 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준다. 즉 쇼펜하우어는 ‘수수께끼의 답은 개인으로 여겨지는 인식 주체에게 주어져 있는 의지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인식 주체 자신의 실존에 대한 실마리를 주며, 인식 주체의 존재와 행위와 운동의 내적 구조를 보여준다(WWI 100)’고 말했다. 모든 대상의 내적 본성은 의지이다. 이 의지는 중력에서 자력에 이르기까지 많은 등급이 있는데, 중력과 자력보다 더 높은 등급만이 지식과 자기 결정력을 동반한다. 칸트도 의지를 추구하긴 했으나, 이는 쓸모가 없었던 물자체(thing-in-itself)의 참모습이다.

1-2-3. 쇼펜하우어는 무생물이 동기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으면서도, 왜 무생물의 자연적 경향성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욕망(appetite)’이나 뉴턴이 말한 ‘힘’이라 하지 않고 ‘의지’라고 했을까? 그는 힘을 의지로 설명할 경우, 그것은 조금 알려진 것을 많이 알려진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는 세계의 내적 본성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를 의식함으로써 주어진다고 보았다.

1-2-4. 그러나 의지 자체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에 따르면, 모든 의지는 욕구를 일으키고, 욕구는 결핍을 만들고, 결핍은 고통을 유발한다. 즉, 어떤 욕구가 충족되면 그 후에 또 다른 욕구가 생긴다. 우리의 의식이 의지로 가득 차게 되면, 우리는 결코 행복하거나 평화로울 수 없다. 최선의 바람은 고통과 권태가 번갈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1-2-5. 쇼펜하우어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책에서 의지의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두 가지 방식을 제시했다. 첫 번째 방식은 예술, 즉 미에 대한 순수하고 사심 없는 관조(contemplation)를 통한 탈출이고, 두 번째 방식은 단념(renunciation)을 통한 탈출이다. 삶에 대한 의지를 단념해야만 의지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삶에 대한 의지는 자살이 아닌 금욕주의에 의해 단념된다. 진정한 도덕적 진보를 위해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악함과, 우리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교활함을 버려야 한다. 또한 타인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정의로움과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선량함마저도 버려야한다. 즉 우리는 미덕을 넘어 금욕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궁극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는 순결, 결핍, 절제를 받아들여야 하며, 죽음이 악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1-2-6. 쇼펜하우어는 기독교와 힌두교, 불교의 성인들을 자기희생의 모범으로 여겼으나, 그 자신의 금욕주의에 대한 입장은 어떠한 종교적 전제에 의거해있지 않고, 대부분의 성인의 일대기가 미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개개의 주체와 대상은 단순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인도철학의 마야사상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다.

1-2-7.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는 직접적인 영향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1820년에 헤겔이 있는 베를린 대학으로 가서 강의를 했는데, 그는 헤겔을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강의를 일부러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개설했으나 그의 학생을 빼앗아오지 못했다. 그는 헤겔을 ‘아무 사상도 없는 지루한 이야기의 수면효과’나 ‘정말 따분하고 형편없는 허풍선’이라고 하며 조롱했다.

 

1-2-8. 쇼펜하우어는 1839년에 논문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로 ‘노르웨이 인 상’을 받기 전까지 그의 천재성을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이 논문과 윤리학의 기초를 다룬 다른 논문을 묶어 1841년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1844년에는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 증보판을, 1851년에는 《수필과 이삭줍기》라는 수필집을 냈다. 그의 저작들은 일반 사람들이 그의 부적절한 의견/정치적으로 잘못된 의견을 유쾌 또는 불쾌하게 음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치 있고 명료한 문체의 진가를 맛볼 수 있었다.

 

1-2-9.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을 비롯한 대륙의 실패한 혁명이 쇼펜하우어의 60번째 생일 직후에 일어났는데, 그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정치적 시도에 환멸을 느끼던 세대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비난한 독일 대학 기관의 환심을 샀고, 비열한 망상이라 맹비난했던 그 세상의 안락함을 누렸다. 그 자신의 삶이 그가 찬양했던 금욕주의적 이상과 완전히 달랐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이 실제로 지니고 있는 덕목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윤리학자에 대한 희한한 요구이다’라고 대답할 것 같다.

 

Ⅱ. 키르케고르의 도덕과 종교

2-1. 생애와 시대배경

2-1-1. 쇼펜하우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의 증보판을 준비하던 때,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철학자는 전혀 다른 형이상학적 기초 위의 금욕주의와 비슷한 요구 사항을 제시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는 1813년 비극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였다. 그의 어머니와 여섯 남매 중 다섯이 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양치기 소년일 때 신을 모독하는 말을 해서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다. 키르케고르는 1830년에 코펜하겐 대학에 신학을 공부하러 갔고, 쇼펜하우어처럼 헤겔 철학에 익숙해지면서 헤겔 철학을 혐오하게 됐다. 그는 신학은 싫어했지만,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신비로운 경험을 동반한 종교적 변환을 겪었다. 그는 1840년 올센과 약혼했으나, 자기 가족의 이력 때문에 결혼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일 년 뒤 파혼한다. 그 후 그는 자신을 철학자로서의 소명을 가진 사람으로 여겼다.

2-2. 사상

2-2-1. 키르케고르는 1841년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에 관한 학위 논문을 완성한 후 베를린으로 가 셸링의 강의를 들었다. 독일 관념주의에 대한 반감이 커졌는데, 그 이유는 쇼펜하우어와 달리 독일 관념주의는 구체적인 개인을 과소평가한 데 있었다. 그는 쇼펜하우어처럼 단념으로 종결되는 정신적 이력을 단계별로 묘사했으나, 정신적 이력의 단계가 고차적일수록 개체성은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독특한 개성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고 보았다.

2-2-2. 키르케고르의 학설은 1843~1846년에 여러 필명으로 출간된 일련의 저작들에서 설명이 나온다. 1843년의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는 두 가지 인생관, 즉 심미적 인생관과 도덕적 인생관을 제시한다. 군중의 일원이 개인이라는 출발점에서 보면, 심미적 인생은 자기실현을 향한 첫 번째 단계이다. 심미적인 사람은 맛과 멋(taste and elegance)이 있는 쾌락을 추구한다. 심미적인 사람은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이든 즉각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잡으려는 선택을 제한하는 것에 대해 결코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본질적 특성이 있다. 이런 사람은 시간이 지난 후 이러한 자유에 대한 자신의 요구가 현실적으로 자기 능력을 제한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즉 그는 자신을 사회제도 안에 포함하여 그 제도가 부과하는 의무를 수용해야하는 도덕적 단계로 옮아간다. 그러나 아무리 도덕 법칙을 완수하려 해도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2-2-3. 심미적 인생의 방식과 도덕적 인생의 방식 둘 다 종교적인 영역으로 상승하여 그 한계를 넘어야 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그가 다른 필명으로 쓴 다른 저작들 – ⟪공포와 전율⟫(1834년), ⟪분노의 개념⟫(1844년), ⟪삶의 방식의 단계⟫(1845년)에서 다양하게 전달된다. 이러한 글들은 1846년의 ⟪철학적 단편에 대한 비학문적 후기⟫를 출간하며 최고조에 달했다. 이 책의 메시지는 헤겔 신봉자가 말했듯 신앙은 객관적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2-2-4. 도덕적 영역에서 종교적 영역으로 옮아가는 과정은 ⟪공포와 전율⟫에서 신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명령한 성경 이야기를 통해 생생히 묘사되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도덕적 영웅은 보편적 도덕률을 위해 자기 인생을 바쳤으나, 아브라함은 특수 신의 명령 때문에 도덕률을 위반했다. 키르케고르는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도덕적 명령을 위반한 아브라함의 행위를 ‘도덕에 대한 목적론적 유예’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개인이 도덕률을 위반하는 것을 신의 소명으로 여긴다면, 이것이 그냥 유혹인지 진짜 신의 명령인지 분간할 수 없다. 혼자만으로는 그것을 알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2-2-5. 키르케고르는 1848년 두 번째 신비로운 경험 후, 글을 좀 더 쉽게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순수한 마음은 한 가지만 바라는 것이다⟫, ⟪사랑의 행위⟫와 같은 다수의 기독교 담론과 책들을 자기 이름으로 펴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는 다시 필명을 사용하며 절망의 유일한 대안으로, 진정한 실존을 실현하기 위해 신앙을 필요조건으로 제시했다.

2-2-6. 키르케고르의 후반부 인생은 이름만 기독교라 여긴 덴마크 국교회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그는 민스터(J.P.Mynster) 대주교를 아주 비판했고, 1854년 그가 죽은 후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책을 냈다. 키르케고르는 교권에 반대하는 소책자 ⟪순간⟫을 창간하고 지원하고, 9호까지 발간한 후, 거리에서 쓰러져 몇 주 동안 병을 앓다가 1855년 11월에 숨을 거둔다. 그 자신이 원하지 않았고 조카도 반대했는데도 그의 장례는 교회에서 치러졌다.

Ⅲ. 변증적 물질주의(마르크스)

3-1. 생애와 시대배경

3-1-1.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 모두 헤겔의 학설에 대한 반작용에서 철학적 추진력을 얻었다. 그러나 헤겔주의를 가장 격렬하고 강력하게 반대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Karl Marx)였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임무를 ‘헤겔을 뒤짚어 엎는 것’이라 했다. 헤겔의 변증적 관념주의(dialectical idealism)는 변증적 물질주의(dialectical materialism)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3-1-2.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1818년 아들이 태어나기 전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한 진보적인 유대교인이었다. 마르크스는 청소년 시절 트리어에서 학교를 다녔고, 본 대학에서 1년간 법학을 공부하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그 후 5년 동안 베를린 대학을 다니며 진지하게 살았는데, 시 쓰기를 좋아했으며 법학 대신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가 베를린에 갔을 때 헤겔은 이미 죽었지만,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가 활동하고 바우어(Bruno Bauer)가 이끌던 청년헤겔학파라는 좌파단체와 헤겔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는 헤겔과 바우어에게 역사를 변증적 과정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 역사의 각 단계는 기하학적 증명 과정과 아주 비슷한 과정으로 기초적인 논리적 원리나 형이상학적 원리에 따라 앞선 단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3-2. 사상

3-2-1. 청년헤겔학파는 사람들이 자기 존재의 진정한 본질적 요소인데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보는 상태인, 헤겔의 소외 개념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헤겔 자신이 강조한 소외의 형태는 어떤 단일한 정신의 발현인 개인들이 서로를 통일체의 구성요소로 보지 않고 적대적인 경쟁관계로 보는 것이다. 바우어와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자신의 삶과 의식을 비실재적인 신에게 맡기는 종교를 최고의 소외 형태로 간주했다. 포이어바흐는 ‘종교가 인간을 그 자신과 분리시킨다’면서 ‘신은 인간이 자신과 적대자로 맞서게 한다(W vi 41)고 말했다.

3-2-2. 헤겔과 포이어바흐에게 종교는 허위의식이었다. 헤겔은 이 허위의식이 종교적 신화를 관념주의 형이상학으로 변형함으로써 치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이어바흐에게는 헤겔주의 자체가 소외의 한 형태였다. 즉 종교는 제거되어야할 것이지 변형될 것이 아니며, 사회적 인간의 생활에 대한 실증적인 이해로 대체되어야 했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일종의 허위의식인 점은 동의했지만, 헤겔과 포이어바흐가 소외에 대해 터무니없는 처방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헤겔의 형이상학에서 인간은 자신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관망하기만 하는 존재였다. 반면 포이어바흐는 인간의 숭배 대상 가운데 인간을 소외시킨 실체가 오로지 신만이 아닌 점을 깨닫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사유 재산이 국가의 기반이 되는 한 국가 역시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소외시킨다고 보았다. 소외는 철학적 반성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철학자는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TF 11)’고 말하며, 사회의 대변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3-2-3.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에 관한 논문으로 1842년 예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청년헤겔학파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쾰른에서 급진파 신문 <라인신문>을 편집하면서 정치 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지낸 남작의 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1843년에 결혼하여 그녀가 죽을 때까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다. 마르크스가 결혼한 직후 러시아 황제의 압력으로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라인신문>은 폐간된다.

3-2-4. 마르크스는 파리로 이사해 정치경제학에 관한 영국 고전들을 통해 자신이 갈 길을 확인하였고, 많은 급진파 친구들을 만나며 신문 기자로써 추구해야 할 다른 일거리를 발견한다. 이 친구들 중 엥겔스(Friedrich Engels)와 만나 함께 ‘공산주의’ 이론, 즉 공동 소유를 위한 사유 재산의 폐지 이론을 세우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같이 연구한 ⟪독일의 이데올로기⟫은 마르크스가 반체제적 신문기자라는 이유로 파리에서 쫓겨난 뒤 이주한 브뤼셀에서 완성된다.

3-2-5. 이 책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물질주의적 역사 개념을 제시한다. 삶이 의식을 결정하지 의식이 삶을 결정하지 않는다. 역사의 근본적인 본성은 경제적 생산 과정이고, 그 과정을 이해하려면 경제적 생산의 물질적 조건을 이해해야 한다. 다양한 생산 방식은 사회 계급의 형성과 계급들 사이의 투쟁, 그리고 여러 형태의 정치 생활과 법률과 윤리를 초래한다. 예를 들면 맷돌은 봉건 영주가 다스리는 사회를 낳고, 증기 방앗간은 산업 자본가가 지배하는 사회를 가져온다. 변증적 과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공산주의의 등장을 위해 여러 단계를 거치며 세계를 끌어간다.

3-2-6. ⟪독일의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가 죽은 후에도 한참 출판되지 않았으나, 그 책의 아이디어는 1847년의 ⟪철학의 빈곤⟫에 집약되어 있다. 물질주의적 역사개념을 더 널리 알린 것은 엥겔스의 초안을 바탕으로 1848년에 발행한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이었다. 이것은 새로 설립된 ‘공산주의 동맹’의 원리와 이상을 개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언⟫의 메시지는 엥겔스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인류의 전 역사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의 투쟁과 경쟁의 역사였다. 온갖 착취와 억압, 계급 차별과 계급 투쟁으로부터 사회 전체를 동시에 완전히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이제 피착취 계급과 피지배 계급(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착취 계급과 지배 계급(부르주아 계급)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쟁취할 수 없는 그런 단계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계급 투쟁의 역사는 일련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CM 48)”

⟪선언⟫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마지막 문장이다. ‘공산주의 혁명에서 지배 계급들이 벌벌 떨게 하자.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사슬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지배할 세상이 온다. 온 나라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3-2-7. ⟪선언⟫이 발간된 해에, 파리, 베를린, 로마 등 여러 도시에서 무장 폭동이 일어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가 무상 교육 제도를 수립하고 운수업과 은행업을 국유화하며, 누진 소득세를 부과하도록 혁명가들을 촉구하기 위해 독일로 잠깐 돌아왔다. 마르크스는 혁명 실패한 후 쾰른에서 두 번 재판을 받고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프로이센 영토에서 추방당한다. 파리로 돌아와서도 추방당한 그는 남은 생애 런던에서 빈곤에 허덕였는데, 그의 아이 여섯 중 셋이 굶어 죽었다.

3-2-8. 마르크스는 런던에 살며 하루에 열 시간씩 연구하며 변증적 물질주의 이론을 전개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1857~1858년에 지난 10년간의 경제적 견해를 정리해 일련의 비망록을 작성했는데, 이 비망록을 기초로 하여 1859년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집필했다. 그 저작의 서문은 물질주의적 역사 이론에 대한 간결하고도 권위적인 진술을 담고 있다.

3-2-9.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이론과 실제를 결합시키려 평생 노력했다. 그는 1864년에 ‘국제 노동자협회의 창립을 도왔으나, 그 단체는 내부 분쟁을 겪고 파리의 야만적인 폭동을 지지한 탓에 평판이 나빠져 1876년에 해산된다.

3-2-10. 마르크스의 저술활동은 역사 과정이 어떻게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좌우됐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 ⟪자본론(Capital)⟫에서 최고조를 달한다. 이 책의 첫 번째 권은 18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되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권은 1883년 마르크스가 죽었을 때 출판되지 않은 채로 있다가 엥겔스에 의해 사후 유작으로 출판된다. 그는 하이게이트 묘지의 아내 곁에 묻혔다.

3-2-11. 마르크스의 거대한 저작의 기본 주장은, 자본주의 제도가 최종 위기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본성상 노동 계급의 착취를 필요로 한다. 모든 생산품의 가치는 생산품에 투여된 노동의 총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생산품의 실제 값보다 더 적게 지불해서 가치의 일부를 착취한다. 기술이 발달하면 동시에 노동자의 생산성이 향상됨에 따라 노동에 의해 산출된 부가 갈수록 자본가에게 쌓여간다. 이 착취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느끼는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그 때 자본주의 제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로 대체될 것이다. 그 독재 체제는 사유 재산을 폐지하고 생산 수단이 중앙 정부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사회주의 국가를 도입하게 된다. 그 후 사회주의 국가는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되는 공산주의 사회로 대체될 것이다.

3-2-12.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이어 보편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그가 죽은 후 역사에서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의 이론들은 본질상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고 정치적이었다. 바로 그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이론들은 성공과 실패 두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사건들이 경제적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잘못을 범한다. 마르크스주의 유형의 사회주의를 겪은 나라들을 보면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과 같은 개인들이 권력을 휘둘렀는데, 이는 오로지 비인격적 힘만이 역사를 구현할 수 있다는 이론이 거짓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적 요인들이 정치와 문화에 미치는 여향을 부인하는 역사가나 역사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3-2-13. ⟪공산당 선언⟫의 제안들을 150년쯤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면 폭정에 의해서만 집행되는 성급하고 가혹한 방법들 – 예를 들어 상속의 폐지와 강제적인 농업 노동, 선진국들이 현재 당연시 여기는 누진 소득세법, 보통 교육과 같은 제도들, 그리고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채택해 성공을 거둔 철도와 은행의 국유화같은 실험들이 뒤섞여 있음을 알게된다. 마르크스는 예언자로서는 신뢰를 얻지 못했지만, 그의 철학은 의식이 삶을 결정짓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 가장 설득력있게 논박했다. 그가 죽고 난 후,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는 과학적 이론이 아닌 정치적 행동주의(activism)에 대한 영감과 정치 체제에 대한 지침으로 여겨지는 그의 관념체계에게서 좋든 나쁘든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로크의 관념

홉스의 경험론보다 일반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로크의 경험론을 보자. 경험론을 대표하는 로크와 합리론을 대표하는 데카르트는 공통적인 전제들을 공유하는데, 이 둘 모두 직접적인 의식에 호소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한다.

로크의 ‘관념’이라는 용어가 대상을 의미하는지 활동을 의미하는지 구별하기가 어렵다. 로크는 관념이 ‘사고 과정에서 정신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정신에 등장하는 것’이라는 문구는 정신이 사고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정신이 참여하는 바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애매하다.

로크는 자주 데카르트에 반대하는 견해를 드러내지만 많은 철학적 주제들을 데카르트에서 빌려와 질문을 던진다. 동물은 일종의 기계인가? 영혼은 항상 사고하는가? 물질이 없는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 본유 관념이 존재하는가? 이들 중 마지막 질문은 결정적인 질문으로 어떤 대답을 하는지에 따라 합리론자 또는 경험론자로 분류된다. 또한 여기서 관념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서로 다른 의미 사이의 차이를 극복한다면 로크와 데카르트의 관점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위 질문은 사고 활동이 아니라 단지 사고 능력에 관한 것으로 데카르트와 로크에 따르면 인간만이 고유하게 타고나는 지성이라는 일반적인 능력이 존재한다. 로크의 《인간지성론》은 인간을 감각 능력을 지닌 나머지 존재들보다 우위에 서게 만드는 것이 바로 지성이라는 언급과 더불어 시작된다. (E, 43)

데카르트는 진리란 인간이 본유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본유 관념 중 일부는 심사숙고 후에 동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로크 또한 진리가 경험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개념을 얻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본다.

로크는 본유 관념에 관한 논의가 대부분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간에 우리가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어떤 원리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데 할애한다. 로크에 따르면 설령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진리가 있다 할지라도 보편성만으로는 그것이 본유적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설명이 공통적으로 학습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도 보편적 동의가 본유적임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만 본유적인 것도 보편적 동의를 함축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본유 관념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데카르트는 본유적 요소가 없이는 경험이 과학적 지식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로크는 경험이 없이는 본유 관념이 세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두 주장은 모두 얼마든지 옳을 수 있다.

로크는 합리론자들의 논변이 ‘색, 소리, 맛, 형태 등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념을 본유적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이성 및 경험과 반대되는 것은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고 주장(E, 58)하지만 데카르트는 어떤 특정한 사과의 색, 맛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본유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붉음이나 달콤함이라는 일반적 관념이 본유적이라는 생각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고 본다. 여기서 합리론과 경험론 사이의 논쟁이 근본적으로는 일치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색, 맛과 같은 성질들이 주관적이라는 주장에 대한 로크의 논변은 ‘오직 하나의 감각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에 형성되는’ 관념과 ‘하나 이상의 감각을 통해서 정신에 전달되는’ 관념을 구별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구별에 대응하여 물체에서 발견되는 성질들 사이의 구별도 이루어진다. 우리는 정신의 지각으로서의 관념을 구별하는 동시에 이런 지각을 일으키는 물체가 변형된 것으로서의 관념도 구별해야 한다. 또한 관념이 관념을 일으키는 물체 안의 무언가에 대한 정확한 상이라고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로크는 우리 안에 관념을 낳는 능력을 ‘성질들’이라고 말하며 하나 이상의 감각을 통해서 지각되는 성질을 ‘제일성질’, 오직 하나의 감각을 통해서 지각되는 성질을 ‘제이성질’이라고 말한다. 이런 구별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공통적 감각’ (=제일성질)과 ‘적절한 감각’ (=제이성질) 사시의 구별은 이미 하나의 관행이었다(E, 134~5). 로크는 적절한 감각의 객관성을 부정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와 결별한다. 이는 데카르트가 예견했던 바이기도 한데 이를 지지하기 위하여 로크와 데카르트는 더욱 설득력 높은 형태의 논변을 제시한다.

 로크는 오직 제일성질만이 그런 성질을 지닌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냄새, 맛이 전혀 없는 물체는 존재할 수 있지만 형태, 크기가 없는 물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연장성, 형태, 운동 가능성 등은 그대로 유지된다. 데카르트는 오직 연장성만이 물체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논변을 펼쳤다.

 어떤 돌의 관념에 집중하여 돌의 진정한 본성에 속하지 않는 돌의 단단함을 제거한다. 돌이 액체가 되거나 가루로 변하면 단단함이라는 성질은 사라지지지만 돌은 여전히 물체 상태를 유지한다. 이런 논변을 통하여 물체는 반드시 형태를 지녀야 하지만 어떤 특정한 형태를 얼마든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일성질의 영구성에 관한 논변은 이런 성질들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에 의존하는 듯이 보인다. 반면 제이성질의 비영구성에 관한 논변은 이런 성질들에 대한 개별적인 관점에 의존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성질들이 물체의 본질에 속하는 성질이 아니라고 해서 이들이 물체의 진정한 성질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

 로크는 제이성질이 우리 안에 감각을 산출하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나 홉스에서도 그랬듯이 여기서 다시 한 번 상대성과 주관성을 혼동하는 일이 일어난다. 어떤 속성은 상대적이면서도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로크의 언급에 따르면 ‘불 또는 눈의 일부에 해당하는 특정한 크기, 수, 형태, 운동은 누군가가 이들을 감각적으로 지각하든 그렇지 않든 실제로 이런 대상에 속한다.’ 반면에 밝음, 뜨거움, 흰 색깔, 차가움 등은 진정으로 이런 물체에 속하는 것이 아닌데 이는 질병, 고통이 복통을 일으키는 음식물 자체에 속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런 논변은 로크가 언급한 제이성질은 우리 안에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지닌 능력이라는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능력은 당연히 감각 기관이 있을 경우에만 발휘되지만 능력 자체는 설령 발휘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계속 존재해야 한다. 로크는 우리 안에 제이성질의 관념을 낳는 것이 오직 그런 능력을 지닌 대상의 제일성질일 뿐이라고 말한다. 

로크가 마지막으로 제시하는 논변은 지각과 느낌 사이의 유비이다. (논변) 하지만 이 유비는 잘못 적용된 것인데 로크의 이런 논변은 그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되고 만다.

로크는 친근한 예들을 통해서 동일한 대상에 의해서 생겨난 감각들이 주변 환경에 따라 서로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예로부터 제이성질이 객과적이 아니라는 점이 아니다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법에 관한 몽테스키외의 견해

 

1-1. 미국 헌법은 몽테스키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몽테스키외는 신뢰성과 상관없이 자료를 수집한 후 국가의 본질에 관한 이론을 구성한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인간은 다양한 요소의 지배를 받는다. 이런 요소로는 기후, 종교, 법률, 정부의 명령, 과거의 사건들, 관습, 태도 등을 들 수 있다.’ 그 사회에 적합한 법을 통해서 일반 정신이 표현되고 일반 정신은 법의 정신을 낳는다. 몽테스키외는 인간이 제정한 실정법보다 신이 확립한 정의로운 기본법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1-2. 아리스토텔레스가 국가의 형태를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의 세 종류의 형태로 분류했던 것처럼 몽테스키외 역시 세 가지의 국가 형태를 제시한다, 공화정, 군주정, 폭군에 의한 전제정으로 나누는데, 이 세 유형은 각각 덕과 명예 그리고 공포라는 대표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1-3. 이 세 특성은 각각의 정부가 지닌 원리다. 하지만 공화정이 덕을 원리로 삼는다 해서 공화정에 사는 모든 사람이 덕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덕을 갖추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각각의 특성을 해당 정부 아래에 사는 사람이 지니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특성을 지여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특성들이 없으면 정부는 불완전해진다.

1-4. 몽테스키외가 칭찬한 영국 헌법의 특징은 삼권 분립의 원칙이었다. 몽테스키외는 당시 하노버 공국의 정치체제를 무척 높이 평가함으로써 전 세계 다른 많은 나라의 헌법 제정에 계속 큰 영향을 미쳤다,

1-5. 몽테스키외가 삼권분립을 중요하게 여긴 까닭은 이것이 폭군을 막는 최선의 방파제인 동시에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에게서 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권리’이다. 몽테스키외는 독립적인 입법부가 제정한 것만을 법률로 여겼다. 또한 당시 많은 나라들에서 시민들은 자주 완벽하게 합법적이지만 권력자에게 반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행위 때문에 임의로 체포될 위험 아래 놓여있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폭군아래서 시민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1-6. 몽테스키외는 자유에 대한 더욱 본질적인 정의를 제시한다. 자유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해야 하는 바를 행하고, 원해서는 안 되는 바를 행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 능력이다.’ 자유로운 사회적 제도와 이상적인 형태의 개인적인 의지 사이의 이런 연결은 루소의<<사회계약론>>에서 더욱 중요한 정치 이론으로 발전된다.

라이프니츠의 인식론, 성질과 관념에 관한 버클리의 견해

라이프니츠의 인식론

1-1. 스피노자의 인식론에서 그는 자신의 형이상학적 주장, 즉 우리가 지식과 경험에 관하여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의 관념과 신체의 운동이 신인 동시에 자연이기도 한 유일 실체가 드러내는 개별적인 요소의 두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를 적절히 조화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등장시킨다. 라이프니츠의 인식론에도 또한 일상적인 말과 사고를 형이상학적 체계와 일치시키려는 시도가 나온다. 하지만 그의 체계에서는 관념과 운동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고, 둘 사이에는 아무 상호작용이 없는 완전히 독립적인 일련의 사건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스피노자의 체계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 둘은 신의 정신 안에 들어 있는 예정 조화에 따라 서로 연결된다.

1-2. 라이프니츠의 표준적인 모나드론에 따르면, 일반적인 어떤 형태의 인식론이 성립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정신과 외부 세계 사이의 어떤 관련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감각적 지각을 설명해야 하는가? 그리고 모든 단순 관념이 오직 정신 내부의 산물이라고 하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은 우리의 본유 관념과 획득 관념을 둘러싼 논쟁에서 무슨 관심을 보일 수 있는가? 라이프니츠의 가장 중요한 저술 <<신인간지성론>>은 인식론에 관한 저술로, 그는 이 저술에서 로크의 경험론적 지식 이론을 상세하게 비판한다. <<신인간지성론>>은 로크의 견해를 대변하는 필랄레테스(Philalethes)와 라이프니츠의 견해를 표명하는 테오필루스(Theophilus)가 등장해 벌이는 논쟁으로, 이 저술의 각각의 장은 로크의 <<인간지성론>>의 장들과 정확히 대응하며 로크의 주장을 반박한다.

1-3. <<신인간지성론>>에서 라이프니츠가 옹호하는 수많은 견해와 논변들은 훨씬 더 상식적인 형이상학을 지닌 철학자도 얼마든지 채택할 수 있는 것들이다. 라이프니츠도 이 점을 인지하고, 이는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는 철학자도 해가 뜨고 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며 스스로를 옹호했다. 모나드론보다 인식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이 저술은 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1-4. 경험론자들은 감각 안에 없는 것은 지성 안에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지성 자체를 제외하고’ 그렇다 답한다. 우리의 영혼은 존재이고 실체이고 단일체이며, 그 자신과 동일하고 원인이며 관념과 추론이 위치하는 장소이다. 존재와 실체 등의 관념은 오직 영혼이 자신에 대해 반성할 때만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들은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본유적이다. 정신은 앞으로 그려 나갈 그림의 밑그림이 수(number)에 의해서 이미 연필로 표시된 캔버스이다.

1-5. 이런 의미에서 본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념의 예로, 라이프니츠는 논리학과 산술, 기하학의 원리를 예로 든다. 라이프니츠는 ‘사각형은 원이 아니다’는 본유적인 반면 ‘단맛은 쓴맛이 아니다’는, 달거나 쓴 느낌은 감각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여 본유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외부 세계는 정신에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하고 영혼의 모든 사고와 행위는 내부에서 발생한다는 주장과 조화시킬 수 있을까?

1-6. 이에 답하려면 라이프니츠가 인간 영혼을 모나드들의 위계질서에서 가장 상위의 모나드로, 즉 인간 신체의 서로 다른 부분과 기관에 대응하는 살아 있는 실재로 여겼음을 알아야 한다. 모나드의 관점에서 보면, 감각으로부터 정신에 어떤 느낌이 생겼다는 말은 곧 상위의 모나드가 지닌 관념 중 일부가 하위의 모나드로부터 발생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하위 모나드들의 지각은 통각(상위 모나드의 자기의식)에 의해 명확해진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는 창이 없어서 외부 세계로부터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한다. 모나드들은 그 대신 일종의 텔레파시 같은 것으로 서로 연결 되는 듯하다.

1-7. 라이프니츠는 이런 생각을 의식의 단계에 관한 탐구로 전환한다. ‘우리 안에 끊임없이 수많은 지각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도록 이끄는 요소들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이런 지각은 통각과 반성이 없이 이루어진다.(G V.46)’ 우리의 의식이 지니는 경험 중 대부분은 수많은 매우 작은 지각들로 구성되는데, 우리는 이 지각에 대해 판명한 관념을 갖지 못한다. 하위 모나드가 지니는 지각의 특징은 혼란스러운 관념이다. 상위 모나드의 통각은 우리의 관념에 명석, 판명함을 부여한다. 혼란스럽기 때문에 감각적 지각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듯 보인다.

1-8. 그는 의식의 단계 사이의 구별을 본유 관념에 대한 우리가 논리학의 기본 법칙을 인식하기 훨씬 이전에 개별적 진리로부터 배우기 시작한다는 전형적인 반박에 답하는 데 사용한다. ‘일반 원리들은 우리의 사고 안으로 들어와 영혼의 각 부분을 형성하고 이들을 서로 연결한다. … 마치 걷기 위해서 근육과 힘줄이 필요하듯이 이들은 항상 필요하다.’ 정신은 항상 논리에 의지하지만, 논리 법칙을 확인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1-9. 로크는 지식을 형성하는 기본 요소가 감각을 통해서 얻는 단순 관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단순 관념이라는 개념 자체를 일종의 환상으로 보았다. “나는 누군가가 어떤 감각적 관념을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관념은 자신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여지를 정신에 제공하지 않는다. … 예를 들면 녹색이 파란색과 노란색을 한데 섞은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므로, 따라서 녹색의 관념이 이 두 색의 관념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녹색의 관념은 파란색이나 따듯함의 관념과 마찬가지로 단지 외견상 단순하게 보일 뿐이다.(G V.109)” 라이프니츠는 색과 같은 제이성질은 주관적이고 형태와 같은 제일 성질은 객관적이라 하는 로크의 구별을 거부한다. 그는 제일성질과 제이성질 모두 현상일 뿐이라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이후 버클리에 의해 더욱 완전한 형태로 발전된다.

 

성질과 관념에 관한 버클리의 견해

2-1. <<하일라스와 필로누스 사이의 대화>>에서 버클리는 우선 제이성질이 주관적이라는 로크의 주장에 동조하여 이를 논증한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논증을 통해 제일성질 또한 주관적이라고 주장하며 로크에게 등을 돌린다. 그는 어떤 관념도, 제일성질의 관념조차도 대상과 유사하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2-2. 대화가 전개되면서 유물론자인 하일라스는, 우리가 물질적 대상 자체가 아닌 오직 대상의 감각 가능한 성질들만을 지각한다는 로크의 전제를 의심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물체의 존재를 옹호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감각 가능한 것이라는 말을 통해 나는 오직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바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실상 감각은 자신이 직접 지각하는 바가 아닌 그 무엇도 지각하지 않는데, 감각은 추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BPW, 138)’ 물질적 대상은 추론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각되지는 않는다. 감각 가능한 대상은 사실상 감각 가능한 수많은 성질들에 지나지 않는데, 이런 성질들은 정신과 무관하다.

2-3. 대화에서 관념론자로 등장하는 필로누스는, 감각 가능한 성질들이 객관적이라는 하일라스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뜨거움이 주관적임을 보이는 로크의 논증으로 그를 반박한다. 뜨거움의 모든 정도는 감각을 통해 지각된다(그 정도가 높을수록 더 선명히 지각된다). 하지만 매우 높은 정도의 뜨거움은 동시에 큰 고통이다. 물질적 실체는 고통을 느낄 수 없으므로 매우 높은 정도의 뜨거움은 물질적 실체 안에 존재할 수 없다.

2-4. 이 논변은 오류로 가득 차 있는데 버클리는 이를 교묘히 숨긴다. 여러 논변에서 잘못된 진행은 하일라스의 말에 내재하는데, 필로누스는 단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만 한다. 필로누스가 “감각 가능한 것이 실재한다는 점은 지각을 통해 알게 되는지, 아니면 그것은 지각된다는 사실과 구별되는 무언가로서 정신과 아무 관련이 없는지”에 관해 묻자 하일라스는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과 지각된다는 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라고 답한다.

이제 뜨거움을 물리적 관점(힘의 한 형태로서의)이 아니라 지각 가능한 성질로 보고 이에 관해 논의한다고 가정해보자. 존재한다는 것과 지각된다는 것은 서로 별개라는 하일라스의 말은 옳다. 하지만 하일라스는 ‘지각된다는 사실과 구별된다는 점’과 ‘정신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을 동일시하는 필로누스의 등식을 받아들이면 안된다. 실제로 존재하는 성질이 현실적으로 지각되는 바와는 분명히 구별된다는 점을 강력히 밀고 나가야 한다.

2-5. (1) 필로누스가 “가장 격렬하고 강력한 정도의 뜨거움은 매우 큰 고통이 아닌가”라는 물음에 대해 하일라스는 그렇다고 답한다. (2) 이어서 필로누스는 “지각 능력이 없는 것에게는 쾌락이나 고통의 능력이 있을 수 있는가”를 묻자 하일라스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답한다. (3) 필로누스는 “자네(하일라스)가 말하는 물질적 실체는 감각 능력이 없는 존재라면 그 실체는 고통의 주체가 될 수 없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하일라스는 절대로 될 수 없다고 답한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 하일라스는 일종의 구별을 제시하며 대답해야만 했다. 즉 가장 강한 정도의 뜨거움이 큰 고통을 일으킨다는 점은 동의하지만, 뜨거움이 그 자체로 큰 고통이라는 점은 부정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서 또한 구별을 해야 한다. 즉 고통을 느낄 능력은 없지만 고통을 일으킬 능력은 있다 답해야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에서 그는 물질적 실체가 감각 능력이 없다는 점에 결코 동의하면 안된다. 바위는 감각 능력이 없지만 고양이는 그런 능력을 지닌다. 여기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바는 물질적 실체가 감각을 지닐 수 없다 주장하는 로크의 논변이다. 왜냐하면 물질적 실체도 감각을 지니기 때문이다.

2-6. 대화가 반쯤 진행되면 하일라스는 제이성질들이 정신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제일성질들은 물체 안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로크의 견해를 옹호하려 한다. 이에 필로누스는 로크가 제이성질의 객관성을 부정하면서 사용한 논변들이 제일성질의 객관성에 반대하는 주장을 펴는 것에 똑같이 사용될 수 있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2-7. 로크는 인간에게는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대상이 동물에게는 달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을 들어 냄새는 실재하는 속성이 아니라 주장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의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대상이, 이보다 더 작은 어떤 동물에게는 거대한 산처럼 보인다는 점을 들어 크기 또한 실재하는 속성이 아니라 주장할 수 있다. 어떤 동일한 대상이 가까이 있는 사람의 눈에는 크고 각진 것으로 보이지만 멀리 있는 사람의 눈에는 작고 둥글게 보인다는 점을 들어, 이 세계에 어떤 크기나 형태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2-8. 하일라스는 물질적 대상 자체를 지각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이 대상이 관념을 통해 지각된다고 하는 주장을 필로누스는 비웃었다. 실재하는 대상 자체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색을 띨 수 있는가? 따라서 그는 관념이 정신 외부의 그 어떤 것에 관한 그 어떤 정보라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주장을 옹호할 수 없게 된다.

2-9. 감각적 관념에 관해 언급한 바와 전통적으로 지성의 영역으로 여겨져 온 보편 관념에 관해 언급하는 버클리의 인식론은 반드시 검토해야 한다. 로크는 일반 관념을 형성하는 능력이 인간과 동물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동물들과 달리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관념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니는데, 주어를 분류하는 술어와 같은 일반적 단어들은 추상적 일반 관념에 대응된다. <<인간 지식 원리론>>에서 버클리는 로크의 추상화 이론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퍼붓는다. 버클리는 로크가 추상 관념을 “어떤 특정한 인간이 각각 특유하게 지닌 바를 나타내는 복합 관념은 제쳐두고, 오직 모두에게 공통되는 바만을 유지하여 인간에 대한 추상 관념을 형성한 후 모든 개별적 인간들이 이에 포함된다”고 생각했다고 보았다.

2-10. 버클리는 이를 불합리한 생각으로 일축한다. ‘나 자신이 형성하는 인간의 관념에는 백색 또는 황갈색 등의 피부색 등이 똑바르거나 아니면 크거나 작거나 등이 반드시 포함된다. 나는 그 어떤 노력을 기울여 생각을 해 보아도 추상 관념을 떠올릴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명백한 오류를 저지른다. ‘관념’이라는 용어가 개념을 의미한다면, ‘인간’의 개념이 피부색이나 신장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 개념을 소유한 사람은 누구나 이 사실을 안다. 이 대목에서 버클리는 관념을 일종의 심상으로 여기는 듯한데, 설령 그렇다 해도 여전히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정신적 심상은 심상의 대상이 지닌 모든 속성을 포함할 필요는 없다.

2-11. 한 대목에서 로크는 삼각형에 대한 일반 관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순전히 허튼소리라는 버클리의 지적은 옳다. 하지만 그는 어떤 종류의 심상을 지니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개념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는 식으로 로크를 공격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로크의 언어 이론에서 잘못된 바는 바로 이 점이며, 그가 잘못된 심상을 선택했거나 심상을 자기모순적인 용어로 서술한 점이 결코 아니다.

2-12. X를 반영하는 심상이나 형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X의 개념을 미리 지녀야 한다. 심상은 자신이 반영하는 바를 규정하는 그 무엇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참나무 잎에 대한 심상은 참나무 잎을 그린 그림과 마찬가지로 잎이나 참나무, 나무 일반, 보이 스카우트 활동, 군대 계급을 비롯한 많은 것들을 반영할 수 있다. 그리고 개념은 단지 심상에서 구체적 특성들을 제거한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또한 결코 심상으로부터 명확하게 도출될 수 없는 다른 개념들도 있는데, 수학적 개념이 그런 예이다.

2-13. 로크에 반대하여 언어에 숙달하는 일과 추상적 일반 관념을 지니는 일을 분리한 버클리의 생각은 옳았다. 하지만 정신적 심상이 언어의 핵심 요소라는 생각은 유지했다. 그는 일반 명사가 하나의 추상적인 심상이 아니라 ‘수많은 특수한 심상들을 서로 구별 없이’ 지시한다고 여겼다. 심상이 사고의 핵심이 아님은 삽화가 책의 핵심이 아님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심상이 개념을 지닌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개념이 심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피히테와 셸링, 그리고 헤겔

피히테와 셸링, 그리고 헤겔

Ⅰ. 피히테

1-1. 생애와 시대적 배경

1-1-1. 칸트는 만년에 이르러서까지 자신의 철학적 체계를 구축하는 시도를 했는데, 그 내용은 그가 죽은 후 ⟪유고(Opus Postumum)⟫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에 칸트 자신이 ⟪순수이성비판⟫에서 제시한 몇몇 요소에 대해 불만을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불만은 칸트의 열렬한 지지자들과 제자들에게 그를 비판할 계기를 제공했다. 이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은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로, 그는 칸트가 사망했을 때 철학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중에 있었다.

1-1-2. 피히테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거위 돌보는 일을 했었는데, 그의 뛰어난 지적 재능을 알아본 자선 사업가인 남작에게 후원을 받아 예나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는 대학에서 레싱과 스피노자, 칸트를 숭배하게 된다. 그는 괴테의 추천으로 1794년 예나 대학 교수로 임명되고, 이곳에서 시인이자 극작가인 실러와 동료로 지낸다. 피히테는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인정받지 못해 1799년 예나 대학을 떠나게 되고, 한동안 직장을 찾지 못하다가 1810년에 새로 생긴 베를린 대학의 철학부 학장이 된다. 그는 1812년 프랑스에 맞서 저항군에 지원 입대 하였으나, 1814년 발진 티푸스에 전염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1-2. 사상

1-2-1. 피히테의 철학적 명성은 1804년에 발표한 ⟪지식학⟫으로 얻게 되는데, 이 책에서 그는 철학의 임무를 경험의 기능성에 대한 선험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라 보며 칸트의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순수한 객관(물자체)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독단론의 길을, 자유로운 주관(자아)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관념론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 말했다. 그는 의식 전체를 사고하는 주체의 자유로운 경험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그 자신을 독일 관념론의 창시자로 만들었다.

1-2-2. 모든 것을 자신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자아’란 무엇인가? 피히테는 행위를 하면서 자신의 자기의식에 대한 지적인 직관이 없다면, 인간은 행위할 수 없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의 이론은 개인적 자아가 물질세계 전체를 창조할 수 있다는 유아론(solipsism)에 빠지는 듯 보이지만, 그 자신은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현상적인 자아를 포함한 모든 현상을 창조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직접적이고 정신적인 생명’이라고 주장했다.

1-2-3. 이는 마치 신에 관해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피히테는 모든 철학의 기초를 제공하는 것은 현존하는 유한한 자아가 아니라 신적인 이념이라고 말했다. 존재가 아닌 생명이 없으며, 신이 아닌 존재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신적인 존재를 믿는 것은 미신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유신론자라기보다 범신론자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Ⅱ. 셸링

2-1. 피히테 이론을 가장 열렬히 지지했던 셸링(F. W. J. Schelling)은, 피히테의 종교철학은 스피노자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1798년 23세의 나이로 예나 대학 교수로 임명된 피히테의 동료였다. 그는 피히테의 철학이 스피노자가 독단적인 형태로 제시했던 이론을 비판적인 형태로 바꾼것이라 보았다. 셸링은 비교적 덜 강경한 형태의 관념론인 자신의 철학 체계인 ‘자연 철학’을 제시했다. 그는 최초의 절대적인 것이 서로 나란히 존재하고 서로 동등한 두 세계, 즉 정신적인 의식이고 물리적인 자연을 만들어 낸다고 보았다. 그는 최초의 절대적인 것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자연이고, 물질적 자연의 체계는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로서의 자연이라고 여겼다.

2-2. 셸링의 체계는 풍부하지만 동시에 난해하다. 현재 영어권에 속하는 나라들에서 그의 저술은 거의 읽히지 않는다. 대부분의 철학사에서 셸링은 피히테와 헤겔의 관념론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셸링과 헤겔은 1802~3년에 예나에서 함께 철학 저널 편집자로 일했다.

Ⅲ. 헤겔

생애와 시대배경

3-1. 헤겔이 쓴 최초의 저술은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을 비교한 것이었다. 1770년에 태어난 헤겔은 신학을 공부하고 1801년에 예나 대학에서 두 철학자와 함께 지냈다. 그는 1806년 프로이센 군대가 나폴레옹에게 대패하여 예나 대학이 폐쇄될 때 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대학이 문을 닫고 곤궁한 상태에서 그는 유명한 《정신현상학》을 출판한다. 헤겔은 1816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가 된다. 그는 《논리학》을 출판하고 그 다음 해 철학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철학강요》를 출판했다. 그는 1818년 베를린 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1831년 콜레라로 사망하기 전까지 교수직을 유지했다. 그가 베를린 대학 교수로 있는 동안 그가 했던 강의록이 사후에 편집되어 출판된다. 그의 강의록은 철학사를 비롯해 미학, 역사철학 등이 있는데, 이는 그가 매우 독창적이고 폭넓은 지성을 소유했던 학자였음을 보여준다.

3-2. 헤겔이 사상사에 가장 크게 기여한 바는 철학에 역사적 요소를 도입한 것이다. 그가 역사철학을 다룰 당시 고전적인 저술 두 권이 이미 출판되어있었는데, 그 책은 비코의 《새로운 과학》과 헤르더의 《인류사의 철학에 대한 이념》이었다. 이 두 권은 역사 탐구 방법을 검토하고 인류의 진화론적 발전을 강조했다. 하지만 철학 안에서 역사에 특별한 지위를, 그리고 역사 서술에서 철학자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 인물은 헤겔이다.

사상

3-3. 헤겔은 철학자가 역사에 대해 일반 역사학자들이 지닐 수 없는 특별한 통찰이 있다고 보았다. 오직 철학자만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이성이고, 세계사는 이성의 전개 과정이라는 점을 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해에 도달하는 방법은 형이상학적 체계를 탐구하는 방법과 역사 자체를 귀납적으로 탐구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역사가 이성의 전개라는 믿음은 신의 섭리에 대한 종교적 신앙과 대응하는데, 헤겔은 형이상학적 이해를 하는 철학자가 신학보다 더 세계의 궁극적 운명과 궁극적인 운명 그리고 그 실현 방법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3-4. 헤겔에 따르면 세계사는 정신(Geist)이 전개되는 이야기로 구성된다. 정신의 내적 발전은 구체적인 실재로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헤겔은 태초로부터 하늘과 땅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오직 자신을 인식하고 발견하려는 정신의 투쟁일 뿐이라고 보았다. 정신은 사전에 완벽하게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는 무언가가 아니라,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나아가고 잠재성을 실현하려는 정신의 충동을 동인으로 갖는 것이다. 보편사는 ‘정신이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바에 관해 인식을 점차 드러내고 현실화하는 과정이다’.

3-5. 헤겔은 정신의 존재를 논리학과 관련되는 주제라고 말하며 ‘논리학’을 자신만의 특별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는 역사를 논리의 현시로 여기고 동시에 논리학을 역사적인, 대립 및 투쟁과 관련되는 용어로 여긴다. 두 명제가 서로 모순을 이룰 경우 그는 이를 두 명제 사이의 대립으로 표현한다. 두 명제가 서로 싸워 승패가 나뉘는 이것을 ‘변증법’이라 한다. 이는 한 명제(정립)가 다른 명제(반정립)와 싸움을 벌이고 결국 이들 모두를 극복한 제 3의 명제(종합)이 등장하는 과정이다. 정신에 이르기 위해서는 두 단계의 변증법을 거쳐야 한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최초의 정립은 절대적인 것이 순수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어떤 성질도 지니지 않는 순수한 존재는 무와 같으므로 ‘절대적인 것은 무’라는 반정립에 이르게 된다. 종합은 정립과 반정립을 극복하며, 존재와 무의 결합은 생성이므로 ‘절대적인 것은 생성’이라는 종합에 이른다.

3-6. 생성과 생명 그리고 절대적인 것은 다시 두 번째 단계의 변증법을 제공한다. 헤겔은 절대적인 것을 사고의 주체, 즉 보편적인 사고의 주체로 여기며 이를 ‘개념’이라 불렀다. 이는 지성이 사고를 통하여 산출하는 모든 개념의 총체를 의미한다. 또한 그는 절대적인 것을 사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을 ‘자연’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지성이 탐구할 수 있는 대상의 총체라는 의미한다. 이렇게 자기의식이라는 종합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정신이다.

3-7. 헤겔이 생각한 정신의 개념은 처음 접하면 몹시 당황스럽다. 헤겔이 말하는 정신이 신 – 스피노자의 경우처럼 자연과 동일시되는 – 이라고 생각할 수도, 혹은 개인으로서 인간이 지닌 정신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 중 어떤 것도 완전히 옳지는 않다. 이들보다 인류에 관해 언급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나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헤겔은 ‘정신’이라는 용어에 두 가지 형이상학적 요소를 더한다. 첫째, 그는 인간의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역사에 관해 언급한다. 둘째, 그는 세계를 세밀하게 나타나는 나름대로의 생활 주기를 지니는 유기적 전체로 여긴다.

3-8. 헤겔은 우리가 자연의 구체적인 유기체를 볼 때처럼 세계도 그렇게 보기를 요청한다. 그는 식물은 자신의 이념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어린아이는 육체가 발달하고 지적인 기법을 습득하면서 점차 자신의 본성과 이념을 의식하게 되는 예를 들며, 정신이 진보함으로써 이런 발달 과정은 세계를 포괄하는 규모로 재현된다고 보았다. “정신은 개인적이고 유한한 의식으로 여겨져서는 안되며 그 자체로 보편적이고 구체적인 정신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진보는 가장 풍부한 형태로 세계사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보편적 정신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따라서 세계사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정신의 자기의식이 전개되는 역사이다. 정신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에 대한 의식이 성장하는 것에 맞춰 자유의 의식을 통해 진보한다.

3-9. 정신의 자유는 정신을 물체와 구별하는 근거가 되는데, 물체는 만유인력과 같은 필연적인 법칙의 제한을 받는다. 세계의 전개는 정신이 자신의 자유를 확장하고 의식해 나가는 과정이다. 국가는 ‘자유의 실현, 즉 절대적인 최종 목표의 실현이며 따라서 오직 그 자체를 위하여 존재한다’. 국가는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은 오직 국가의 구성원이 됨으로써만 가치를 소유하게 된다.

3-10. 어떤 국가를 구성하는 민족의 정신이 어떤가에 따라 서로 다른 국가들이 서로 다른 특징을 드러낸다. 각 민족에게 한번의, 오직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헤겔은 이 기회가 자기가 살았던 당시 독일 민족의 프로이센 왕국에게 주어졌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정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치 제도가 아니라 철학 자체에서 드러난다. 헤겔은 철학이 진보한다고 굳게 믿었다. 절대적 존재의 자기의식은 인간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통해 현존하고, 철학사를 통해 절대적 존재는 자기 자신을 직접 마주보게 된다. 그는 철학사 강의에서 이전의 다양한 철학들을 차례대로 독일 관념론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적인 발전에 굴복하는 것으로 묘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