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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의 관념

홉스의 경험론보다 일반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로크의 경험론을 보자. 경험론을 대표하는 로크와 합리론을 대표하는 데카르트는 공통적인 전제들을 공유하는데, 이 둘 모두 직접적인 의식에 호소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한다.

로크의 ‘관념’이라는 용어가 대상을 의미하는지 활동을 의미하는지 구별하기가 어렵다. 로크는 관념이 ‘사고 과정에서 정신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정신에 등장하는 것’이라는 문구는 정신이 사고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정신이 참여하는 바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애매하다.

로크는 자주 데카르트에 반대하는 견해를 드러내지만 많은 철학적 주제들을 데카르트에서 빌려와 질문을 던진다. 동물은 일종의 기계인가? 영혼은 항상 사고하는가? 물질이 없는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 본유 관념이 존재하는가? 이들 중 마지막 질문은 결정적인 질문으로 어떤 대답을 하는지에 따라 합리론자 또는 경험론자로 분류된다. 또한 여기서 관념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서로 다른 의미 사이의 차이를 극복한다면 로크와 데카르트의 관점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위 질문은 사고 활동이 아니라 단지 사고 능력에 관한 것으로 데카르트와 로크에 따르면 인간만이 고유하게 타고나는 지성이라는 일반적인 능력이 존재한다. 로크의 《인간지성론》은 인간을 감각 능력을 지닌 나머지 존재들보다 우위에 서게 만드는 것이 바로 지성이라는 언급과 더불어 시작된다. (E, 43)

데카르트는 진리란 인간이 본유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본유 관념 중 일부는 심사숙고 후에 동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로크 또한 진리가 경험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개념을 얻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본다.

로크는 본유 관념에 관한 논의가 대부분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간에 우리가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어떤 원리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데 할애한다. 로크에 따르면 설령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진리가 있다 할지라도 보편성만으로는 그것이 본유적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설명이 공통적으로 학습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도 보편적 동의가 본유적임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만 본유적인 것도 보편적 동의를 함축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본유 관념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데카르트는 본유적 요소가 없이는 경험이 과학적 지식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로크는 경험이 없이는 본유 관념이 세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두 주장은 모두 얼마든지 옳을 수 있다.

로크는 합리론자들의 논변이 ‘색, 소리, 맛, 형태 등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념을 본유적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이성 및 경험과 반대되는 것은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고 주장(E, 58)하지만 데카르트는 어떤 특정한 사과의 색, 맛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본유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붉음이나 달콤함이라는 일반적 관념이 본유적이라는 생각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고 본다. 여기서 합리론과 경험론 사이의 논쟁이 근본적으로는 일치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색, 맛과 같은 성질들이 주관적이라는 주장에 대한 로크의 논변은 ‘오직 하나의 감각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에 형성되는’ 관념과 ‘하나 이상의 감각을 통해서 정신에 전달되는’ 관념을 구별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구별에 대응하여 물체에서 발견되는 성질들 사이의 구별도 이루어진다. 우리는 정신의 지각으로서의 관념을 구별하는 동시에 이런 지각을 일으키는 물체가 변형된 것으로서의 관념도 구별해야 한다. 또한 관념이 관념을 일으키는 물체 안의 무언가에 대한 정확한 상이라고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로크는 우리 안에 관념을 낳는 능력을 ‘성질들’이라고 말하며 하나 이상의 감각을 통해서 지각되는 성질을 ‘제일성질’, 오직 하나의 감각을 통해서 지각되는 성질을 ‘제이성질’이라고 말한다. 이런 구별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공통적 감각’ (=제일성질)과 ‘적절한 감각’ (=제이성질) 사시의 구별은 이미 하나의 관행이었다(E, 134~5). 로크는 적절한 감각의 객관성을 부정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와 결별한다. 이는 데카르트가 예견했던 바이기도 한데 이를 지지하기 위하여 로크와 데카르트는 더욱 설득력 높은 형태의 논변을 제시한다.

 로크는 오직 제일성질만이 그런 성질을 지닌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냄새, 맛이 전혀 없는 물체는 존재할 수 있지만 형태, 크기가 없는 물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연장성, 형태, 운동 가능성 등은 그대로 유지된다. 데카르트는 오직 연장성만이 물체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논변을 펼쳤다.

 어떤 돌의 관념에 집중하여 돌의 진정한 본성에 속하지 않는 돌의 단단함을 제거한다. 돌이 액체가 되거나 가루로 변하면 단단함이라는 성질은 사라지지지만 돌은 여전히 물체 상태를 유지한다. 이런 논변을 통하여 물체는 반드시 형태를 지녀야 하지만 어떤 특정한 형태를 얼마든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일성질의 영구성에 관한 논변은 이런 성질들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에 의존하는 듯이 보인다. 반면 제이성질의 비영구성에 관한 논변은 이런 성질들에 대한 개별적인 관점에 의존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성질들이 물체의 본질에 속하는 성질이 아니라고 해서 이들이 물체의 진정한 성질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

 로크는 제이성질이 우리 안에 감각을 산출하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나 홉스에서도 그랬듯이 여기서 다시 한 번 상대성과 주관성을 혼동하는 일이 일어난다. 어떤 속성은 상대적이면서도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로크의 언급에 따르면 ‘불 또는 눈의 일부에 해당하는 특정한 크기, 수, 형태, 운동은 누군가가 이들을 감각적으로 지각하든 그렇지 않든 실제로 이런 대상에 속한다.’ 반면에 밝음, 뜨거움, 흰 색깔, 차가움 등은 진정으로 이런 물체에 속하는 것이 아닌데 이는 질병, 고통이 복통을 일으키는 음식물 자체에 속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런 논변은 로크가 언급한 제이성질은 우리 안에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지닌 능력이라는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능력은 당연히 감각 기관이 있을 경우에만 발휘되지만 능력 자체는 설령 발휘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계속 존재해야 한다. 로크는 우리 안에 제이성질의 관념을 낳는 것이 오직 그런 능력을 지닌 대상의 제일성질일 뿐이라고 말한다. 

로크가 마지막으로 제시하는 논변은 지각과 느낌 사이의 유비이다. (논변) 하지만 이 유비는 잘못 적용된 것인데 로크의 이런 논변은 그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되고 만다.

로크는 친근한 예들을 통해서 동일한 대상에 의해서 생겨난 감각들이 주변 환경에 따라 서로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예로부터 제이성질이 객과적이 아니라는 점이 아니다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법에 관한 몽테스키외의 견해

 

1-1. 미국 헌법은 몽테스키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몽테스키외는 신뢰성과 상관없이 자료를 수집한 후 국가의 본질에 관한 이론을 구성한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인간은 다양한 요소의 지배를 받는다. 이런 요소로는 기후, 종교, 법률, 정부의 명령, 과거의 사건들, 관습, 태도 등을 들 수 있다.’ 그 사회에 적합한 법을 통해서 일반 정신이 표현되고 일반 정신은 법의 정신을 낳는다. 몽테스키외는 인간이 제정한 실정법보다 신이 확립한 정의로운 기본법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1-2. 아리스토텔레스가 국가의 형태를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의 세 종류의 형태로 분류했던 것처럼 몽테스키외 역시 세 가지의 국가 형태를 제시한다, 공화정, 군주정, 폭군에 의한 전제정으로 나누는데, 이 세 유형은 각각 덕과 명예 그리고 공포라는 대표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1-3. 이 세 특성은 각각의 정부가 지닌 원리다. 하지만 공화정이 덕을 원리로 삼는다 해서 공화정에 사는 모든 사람이 덕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덕을 갖추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각각의 특성을 해당 정부 아래에 사는 사람이 지니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특성을 지여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특성들이 없으면 정부는 불완전해진다.

1-4. 몽테스키외가 칭찬한 영국 헌법의 특징은 삼권 분립의 원칙이었다. 몽테스키외는 당시 하노버 공국의 정치체제를 무척 높이 평가함으로써 전 세계 다른 많은 나라의 헌법 제정에 계속 큰 영향을 미쳤다,

1-5. 몽테스키외가 삼권분립을 중요하게 여긴 까닭은 이것이 폭군을 막는 최선의 방파제인 동시에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에게서 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권리’이다. 몽테스키외는 독립적인 입법부가 제정한 것만을 법률로 여겼다. 또한 당시 많은 나라들에서 시민들은 자주 완벽하게 합법적이지만 권력자에게 반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행위 때문에 임의로 체포될 위험 아래 놓여있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폭군아래서 시민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1-6. 몽테스키외는 자유에 대한 더욱 본질적인 정의를 제시한다. 자유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해야 하는 바를 행하고, 원해서는 안 되는 바를 행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 능력이다.’ 자유로운 사회적 제도와 이상적인 형태의 개인적인 의지 사이의 이런 연결은 루소의<<사회계약론>>에서 더욱 중요한 정치 이론으로 발전된다.

라이프니츠의 인식론, 성질과 관념에 관한 버클리의 견해

라이프니츠의 인식론

1-1. 스피노자의 인식론에서 그는 자신의 형이상학적 주장, 즉 우리가 지식과 경험에 관하여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의 관념과 신체의 운동이 신인 동시에 자연이기도 한 유일 실체가 드러내는 개별적인 요소의 두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를 적절히 조화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등장시킨다. 라이프니츠의 인식론에도 또한 일상적인 말과 사고를 형이상학적 체계와 일치시키려는 시도가 나온다. 하지만 그의 체계에서는 관념과 운동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고, 둘 사이에는 아무 상호작용이 없는 완전히 독립적인 일련의 사건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스피노자의 체계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 둘은 신의 정신 안에 들어 있는 예정 조화에 따라 서로 연결된다.

1-2. 라이프니츠의 표준적인 모나드론에 따르면, 일반적인 어떤 형태의 인식론이 성립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정신과 외부 세계 사이의 어떤 관련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감각적 지각을 설명해야 하는가? 그리고 모든 단순 관념이 오직 정신 내부의 산물이라고 하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은 우리의 본유 관념과 획득 관념을 둘러싼 논쟁에서 무슨 관심을 보일 수 있는가? 라이프니츠의 가장 중요한 저술 <<신인간지성론>>은 인식론에 관한 저술로, 그는 이 저술에서 로크의 경험론적 지식 이론을 상세하게 비판한다. <<신인간지성론>>은 로크의 견해를 대변하는 필랄레테스(Philalethes)와 라이프니츠의 견해를 표명하는 테오필루스(Theophilus)가 등장해 벌이는 논쟁으로, 이 저술의 각각의 장은 로크의 <<인간지성론>>의 장들과 정확히 대응하며 로크의 주장을 반박한다.

1-3. <<신인간지성론>>에서 라이프니츠가 옹호하는 수많은 견해와 논변들은 훨씬 더 상식적인 형이상학을 지닌 철학자도 얼마든지 채택할 수 있는 것들이다. 라이프니츠도 이 점을 인지하고, 이는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는 철학자도 해가 뜨고 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며 스스로를 옹호했다. 모나드론보다 인식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이 저술은 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1-4. 경험론자들은 감각 안에 없는 것은 지성 안에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지성 자체를 제외하고’ 그렇다 답한다. 우리의 영혼은 존재이고 실체이고 단일체이며, 그 자신과 동일하고 원인이며 관념과 추론이 위치하는 장소이다. 존재와 실체 등의 관념은 오직 영혼이 자신에 대해 반성할 때만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들은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본유적이다. 정신은 앞으로 그려 나갈 그림의 밑그림이 수(number)에 의해서 이미 연필로 표시된 캔버스이다.

1-5. 이런 의미에서 본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념의 예로, 라이프니츠는 논리학과 산술, 기하학의 원리를 예로 든다. 라이프니츠는 ‘사각형은 원이 아니다’는 본유적인 반면 ‘단맛은 쓴맛이 아니다’는, 달거나 쓴 느낌은 감각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여 본유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외부 세계는 정신에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하고 영혼의 모든 사고와 행위는 내부에서 발생한다는 주장과 조화시킬 수 있을까?

1-6. 이에 답하려면 라이프니츠가 인간 영혼을 모나드들의 위계질서에서 가장 상위의 모나드로, 즉 인간 신체의 서로 다른 부분과 기관에 대응하는 살아 있는 실재로 여겼음을 알아야 한다. 모나드의 관점에서 보면, 감각으로부터 정신에 어떤 느낌이 생겼다는 말은 곧 상위의 모나드가 지닌 관념 중 일부가 하위의 모나드로부터 발생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하위 모나드들의 지각은 통각(상위 모나드의 자기의식)에 의해 명확해진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는 창이 없어서 외부 세계로부터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한다. 모나드들은 그 대신 일종의 텔레파시 같은 것으로 서로 연결 되는 듯하다.

1-7. 라이프니츠는 이런 생각을 의식의 단계에 관한 탐구로 전환한다. ‘우리 안에 끊임없이 수많은 지각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도록 이끄는 요소들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이런 지각은 통각과 반성이 없이 이루어진다.(G V.46)’ 우리의 의식이 지니는 경험 중 대부분은 수많은 매우 작은 지각들로 구성되는데, 우리는 이 지각에 대해 판명한 관념을 갖지 못한다. 하위 모나드가 지니는 지각의 특징은 혼란스러운 관념이다. 상위 모나드의 통각은 우리의 관념에 명석, 판명함을 부여한다. 혼란스럽기 때문에 감각적 지각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듯 보인다.

1-8. 그는 의식의 단계 사이의 구별을 본유 관념에 대한 우리가 논리학의 기본 법칙을 인식하기 훨씬 이전에 개별적 진리로부터 배우기 시작한다는 전형적인 반박에 답하는 데 사용한다. ‘일반 원리들은 우리의 사고 안으로 들어와 영혼의 각 부분을 형성하고 이들을 서로 연결한다. … 마치 걷기 위해서 근육과 힘줄이 필요하듯이 이들은 항상 필요하다.’ 정신은 항상 논리에 의지하지만, 논리 법칙을 확인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1-9. 로크는 지식을 형성하는 기본 요소가 감각을 통해서 얻는 단순 관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단순 관념이라는 개념 자체를 일종의 환상으로 보았다. “나는 누군가가 어떤 감각적 관념을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관념은 자신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여지를 정신에 제공하지 않는다. … 예를 들면 녹색이 파란색과 노란색을 한데 섞은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므로, 따라서 녹색의 관념이 이 두 색의 관념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녹색의 관념은 파란색이나 따듯함의 관념과 마찬가지로 단지 외견상 단순하게 보일 뿐이다.(G V.109)” 라이프니츠는 색과 같은 제이성질은 주관적이고 형태와 같은 제일 성질은 객관적이라 하는 로크의 구별을 거부한다. 그는 제일성질과 제이성질 모두 현상일 뿐이라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이후 버클리에 의해 더욱 완전한 형태로 발전된다.

 

성질과 관념에 관한 버클리의 견해

2-1. <<하일라스와 필로누스 사이의 대화>>에서 버클리는 우선 제이성질이 주관적이라는 로크의 주장에 동조하여 이를 논증한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논증을 통해 제일성질 또한 주관적이라고 주장하며 로크에게 등을 돌린다. 그는 어떤 관념도, 제일성질의 관념조차도 대상과 유사하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2-2. 대화가 전개되면서 유물론자인 하일라스는, 우리가 물질적 대상 자체가 아닌 오직 대상의 감각 가능한 성질들만을 지각한다는 로크의 전제를 의심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물체의 존재를 옹호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감각 가능한 것이라는 말을 통해 나는 오직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바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실상 감각은 자신이 직접 지각하는 바가 아닌 그 무엇도 지각하지 않는데, 감각은 추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BPW, 138)’ 물질적 대상은 추론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각되지는 않는다. 감각 가능한 대상은 사실상 감각 가능한 수많은 성질들에 지나지 않는데, 이런 성질들은 정신과 무관하다.

2-3. 대화에서 관념론자로 등장하는 필로누스는, 감각 가능한 성질들이 객관적이라는 하일라스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뜨거움이 주관적임을 보이는 로크의 논증으로 그를 반박한다. 뜨거움의 모든 정도는 감각을 통해 지각된다(그 정도가 높을수록 더 선명히 지각된다). 하지만 매우 높은 정도의 뜨거움은 동시에 큰 고통이다. 물질적 실체는 고통을 느낄 수 없으므로 매우 높은 정도의 뜨거움은 물질적 실체 안에 존재할 수 없다.

2-4. 이 논변은 오류로 가득 차 있는데 버클리는 이를 교묘히 숨긴다. 여러 논변에서 잘못된 진행은 하일라스의 말에 내재하는데, 필로누스는 단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만 한다. 필로누스가 “감각 가능한 것이 실재한다는 점은 지각을 통해 알게 되는지, 아니면 그것은 지각된다는 사실과 구별되는 무언가로서 정신과 아무 관련이 없는지”에 관해 묻자 하일라스는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과 지각된다는 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라고 답한다.

이제 뜨거움을 물리적 관점(힘의 한 형태로서의)이 아니라 지각 가능한 성질로 보고 이에 관해 논의한다고 가정해보자. 존재한다는 것과 지각된다는 것은 서로 별개라는 하일라스의 말은 옳다. 하지만 하일라스는 ‘지각된다는 사실과 구별된다는 점’과 ‘정신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을 동일시하는 필로누스의 등식을 받아들이면 안된다. 실제로 존재하는 성질이 현실적으로 지각되는 바와는 분명히 구별된다는 점을 강력히 밀고 나가야 한다.

2-5. (1) 필로누스가 “가장 격렬하고 강력한 정도의 뜨거움은 매우 큰 고통이 아닌가”라는 물음에 대해 하일라스는 그렇다고 답한다. (2) 이어서 필로누스는 “지각 능력이 없는 것에게는 쾌락이나 고통의 능력이 있을 수 있는가”를 묻자 하일라스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답한다. (3) 필로누스는 “자네(하일라스)가 말하는 물질적 실체는 감각 능력이 없는 존재라면 그 실체는 고통의 주체가 될 수 없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하일라스는 절대로 될 수 없다고 답한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 하일라스는 일종의 구별을 제시하며 대답해야만 했다. 즉 가장 강한 정도의 뜨거움이 큰 고통을 일으킨다는 점은 동의하지만, 뜨거움이 그 자체로 큰 고통이라는 점은 부정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서 또한 구별을 해야 한다. 즉 고통을 느낄 능력은 없지만 고통을 일으킬 능력은 있다 답해야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에서 그는 물질적 실체가 감각 능력이 없다는 점에 결코 동의하면 안된다. 바위는 감각 능력이 없지만 고양이는 그런 능력을 지닌다. 여기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바는 물질적 실체가 감각을 지닐 수 없다 주장하는 로크의 논변이다. 왜냐하면 물질적 실체도 감각을 지니기 때문이다.

2-6. 대화가 반쯤 진행되면 하일라스는 제이성질들이 정신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제일성질들은 물체 안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로크의 견해를 옹호하려 한다. 이에 필로누스는 로크가 제이성질의 객관성을 부정하면서 사용한 논변들이 제일성질의 객관성에 반대하는 주장을 펴는 것에 똑같이 사용될 수 있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2-7. 로크는 인간에게는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대상이 동물에게는 달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을 들어 냄새는 실재하는 속성이 아니라 주장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의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대상이, 이보다 더 작은 어떤 동물에게는 거대한 산처럼 보인다는 점을 들어 크기 또한 실재하는 속성이 아니라 주장할 수 있다. 어떤 동일한 대상이 가까이 있는 사람의 눈에는 크고 각진 것으로 보이지만 멀리 있는 사람의 눈에는 작고 둥글게 보인다는 점을 들어, 이 세계에 어떤 크기나 형태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2-8. 하일라스는 물질적 대상 자체를 지각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이 대상이 관념을 통해 지각된다고 하는 주장을 필로누스는 비웃었다. 실재하는 대상 자체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색을 띨 수 있는가? 따라서 그는 관념이 정신 외부의 그 어떤 것에 관한 그 어떤 정보라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주장을 옹호할 수 없게 된다.

2-9. 감각적 관념에 관해 언급한 바와 전통적으로 지성의 영역으로 여겨져 온 보편 관념에 관해 언급하는 버클리의 인식론은 반드시 검토해야 한다. 로크는 일반 관념을 형성하는 능력이 인간과 동물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동물들과 달리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관념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니는데, 주어를 분류하는 술어와 같은 일반적 단어들은 추상적 일반 관념에 대응된다. <<인간 지식 원리론>>에서 버클리는 로크의 추상화 이론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퍼붓는다. 버클리는 로크가 추상 관념을 “어떤 특정한 인간이 각각 특유하게 지닌 바를 나타내는 복합 관념은 제쳐두고, 오직 모두에게 공통되는 바만을 유지하여 인간에 대한 추상 관념을 형성한 후 모든 개별적 인간들이 이에 포함된다”고 생각했다고 보았다.

2-10. 버클리는 이를 불합리한 생각으로 일축한다. ‘나 자신이 형성하는 인간의 관념에는 백색 또는 황갈색 등의 피부색 등이 똑바르거나 아니면 크거나 작거나 등이 반드시 포함된다. 나는 그 어떤 노력을 기울여 생각을 해 보아도 추상 관념을 떠올릴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명백한 오류를 저지른다. ‘관념’이라는 용어가 개념을 의미한다면, ‘인간’의 개념이 피부색이나 신장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 개념을 소유한 사람은 누구나 이 사실을 안다. 이 대목에서 버클리는 관념을 일종의 심상으로 여기는 듯한데, 설령 그렇다 해도 여전히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정신적 심상은 심상의 대상이 지닌 모든 속성을 포함할 필요는 없다.

2-11. 한 대목에서 로크는 삼각형에 대한 일반 관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순전히 허튼소리라는 버클리의 지적은 옳다. 하지만 그는 어떤 종류의 심상을 지니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개념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는 식으로 로크를 공격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로크의 언어 이론에서 잘못된 바는 바로 이 점이며, 그가 잘못된 심상을 선택했거나 심상을 자기모순적인 용어로 서술한 점이 결코 아니다.

2-12. X를 반영하는 심상이나 형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X의 개념을 미리 지녀야 한다. 심상은 자신이 반영하는 바를 규정하는 그 무엇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참나무 잎에 대한 심상은 참나무 잎을 그린 그림과 마찬가지로 잎이나 참나무, 나무 일반, 보이 스카우트 활동, 군대 계급을 비롯한 많은 것들을 반영할 수 있다. 그리고 개념은 단지 심상에서 구체적 특성들을 제거한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또한 결코 심상으로부터 명확하게 도출될 수 없는 다른 개념들도 있는데, 수학적 개념이 그런 예이다.

2-13. 로크에 반대하여 언어에 숙달하는 일과 추상적 일반 관념을 지니는 일을 분리한 버클리의 생각은 옳았다. 하지만 정신적 심상이 언어의 핵심 요소라는 생각은 유지했다. 그는 일반 명사가 하나의 추상적인 심상이 아니라 ‘수많은 특수한 심상들을 서로 구별 없이’ 지시한다고 여겼다. 심상이 사고의 핵심이 아님은 삽화가 책의 핵심이 아님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심상이 개념을 지닌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개념이 심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사회적 혼란과 통치권에 관한 홉스의 견해

1. 사회적 혼란과 통치권에 관한 홉스의 견해

1-1.수아레스와 그로티우스는 여러 나라들이 서로 합의한 도덕적 체계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하는 자연적 질서를 유지하려면 때로는 전쟁도 필요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17세기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인 홉스는 정치의 본질에 대하여 이와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견해를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자유로운 개인들이 모인 자연 상태에서는 오직 전쟁이 계속 이어질 뿐이며, 도덕철학자의 임무는 정부에 복종함으로써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려는 개인들 사이의 합의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홉스의 대표적 저술 《리바이어던》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

홉스는 인류의 자연 상태를 매우 비관적인 모습으로 묘사한다. 본성상 인간은 정신적, 육체적 능력이 대체로 평등하지만 목적을 성취하려는 희망도 대체로 평등하기 때문에 서로 적이 된다고 보았다. 각 개인은 경쟁하는 상대방을 불신하며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한다. 개인은 동료들로부터 칭찬받기를 원하면서 그들이 자신을 경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원한을 품는다. ‘인간은 본성 안에서 우리를 서로 다투게 만드는 주요 원인 세 가지가 발견되는데 첫째는 경쟁, 둘째는 불신, 셋째는 공명심이다’

사람들을 위압하는 공통 권력이 없는 한 그리고 그런 권력이 형성되기 이전까지 사람들은 재화와 권력, 명예를 둘러싼 끊임없는 다툼과 통제할 수 없는 경쟁에 휘말린다. 이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벌이는 전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구 표면에 관한 지식, 시간의 측정, 예술이나 학문이 전혀 성립될 수 없으며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이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짧다는 점이다.”

어떤 독자들은 이런 묘사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전 세계가 이런 상황은 아닐지라도 당시의 아메리카는 바로 이런 전쟁 상태에 놓여있었다. 홉스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여행할 때 무장을 하고 여러 사람이 함께 가는 편을 선호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문단속을 한다. 집에 있을 때조차도 금고문을 단단히 잠가둔다. 우리 사회에 엄연히 법률이 있으며 치안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렇게 한다.’

1-2. 홉스는 자연의 전쟁 상태를 묘사하면서 인간이 어떤 사악한 본성 때문에 이런 상태에 빠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옳고 그름 또는 정의와 불의 개념이 설 자리가 없다. ‘공통의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법이 성립할 수 없다. 법이 없는 곳에서는 불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과 기만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두 가지 기본적인 덕이다.’ 마찬가지로 자연상태에서는 재산이나 소유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누구든지 무언가를 얻고 지킬 수 있는 한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여긴다.’

철학자들은 습관적으로 자연법(lex naturalis)와 자연권(ius naturalis)을 함께 언급한다. 하지만 홉스는 권과 권리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권리란 무언가를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자유며 법이란 무언가를 반드시 하거나 하지 말라는 명령이라고 말한다. 엄밀한 자연상태에서는 법도 권리도 존재하지 않으나 ‘자연법’은 존재한다. 이는 합리적인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우너리, 즉 생존의 기회를 최대화하려는 처방이다. 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원하는 자연적 필연성이 존재하는 한 각 개인은 모든 능력을 다하여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보존할 자연권을 지닌다.

인간들이 이런 권리를 유지하는 한 어느 누구도 자연 상태에서의 삶을 안전하게 영위할 수 없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간은 자연권이 부여한 무제한의 자유 중 일부를 포기하고 결국 다른 사람들과 같은 수준의 자유를 누리는 양보를 받아들인다. 이를 통해 자연법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기방어 권리를 제외한 자신의 모든 권리를 중아 권력에게 양도하며 중앙 권력은 처벌이라는 제재를 통하여 자연법의 준수를 강제할 수 있게 된다,

1-3. 다른 여러 자연법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제 삼의 자연법이다. 홉스는 약속(convert)를 특별한 형태의 계약(contract)으로 여기는데 계약이란 상호이익을 고려하여 자신의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홉스는 제 삼의 자연법이 없다면 ‘약속은 헛되고 공허한 말에 그칠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한 모든 사람의 권리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전쟁 상태에 머물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정의와 불의의 개념이 성립하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 또한 이 자연법이다. 왜냐하면 불의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며, 불의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것은 정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처럼 약속의 당사자들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약속은 구속력을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정의의 개념에 앞서 불의의 개념이 먼저 확립되어야하며, 약속을 어김으로써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익보다 훨씬 더 큰 처벌의 공포를 강조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약속을 이행하도록 만드는 어떤 강제적 권력이 존재해야한다.’국가가 확립도기 이전에는 이런 권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권력의 칼이 없다면 약속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할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

공통의 권력을 형성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 또는 하나의 합의체에 양도하는 것인데, 이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의 의지와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의 의지로 환원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중앙의 권력은 다수의 사람들 전체를 대표해 국가라고 불리는 하나의 인격으로 통합된다. ‘이리하여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이 탄생한다. 아니 좀 더 경건하게 말하자면 영원불멸하는 신의 가호 아래 인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지상의 신이 탄생하는 것이다.’

1-4. 하지만 홉스의 이런 설명에는 일종의 악순환이 포함되는 듯하다. 그는 약속을 강제하는 통치자가 없다면 어떤 약속도 구속력을 지닐 수 없다고 말하고 구속력을 지니는 계약을 통하여 권력을 양도받지 않는 한 어떤 통치자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두 주장은 계약과 통치자가 동시에 등장하지 않으면 해결되기 어렵다.

홉스는 자신이 왕정주의자라는 점을 일부러 숨기려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정치이론에서 통치자가 한 개인인지 아니면 집합체인지는 의도적으로 분명히 밝히지 않은 채 남겨둔다. 그는 통치 체제가 군주정이든 귀족정, 민주정이든 통치권은 절대적이어야한다고 주장한다.

홉스에 따르면 통치자는 모든 법률과 재산권의 근원이다. 그는 국가를 방어하는데 어떤 수단이 필요한지를 결정하며,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지 아니면 평화를 유지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그의 고유권한이다. 공직자, 공무원 임명, 처벌뿐만 아니라 통치자는 종교 문제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데 어떤 책을 성서로 받아들일지, 해석할지 결정하는 것은 성직자나 장로가 아닌 통치자라고 주장한다.

1-5. 그렇다면 홉스가 생각한 통치자 아래에서 국민에게는 어떤 자유가 있는가? 자유란 단지 법에 저촉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국민은 통치자가 법을 통하여 규제하지 않은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하지만 국민에게 통치자에게 명령에 따르지 않을 자유가 있는가?이에 대하여 홉스는 ‘결코 없다’고 대답하리라고 예상하지만 실제로 그는 국민들이 통치자에게 불복종할 자유를 상당히 인정한다.

“만일 통치자가 어떤 사람에게 (설령 그가 정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손상하거나, 불구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또는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지 말라거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음식이나 공기, 약품 또는 그 외의 어떤 것이라도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그 사람은 이런 명령에 따르지 않을 자유를 지닌다. ‘

국민은 자신의 유죄를 자백하고 강요당할 수 없으며, 통치자의 명령을 받더라도 군인으로 전쟁에 나가 싸우지 않아도 된다. 홉스는 남성도 여성과 같이 겁이 많다는 이유로 참전을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도망치는 게 비겁할지는 몰라도 부당한 행위는 아니다. 참전이 의무로 부과되는 때는 위급한 상황뿐이다. 마지막으로 ‘통치자에 대한 국민의 의무는 통치자의 권력이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한에서만 유지되며,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어야한다.’ 따라서 만일 통치자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자신의 주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통치자에 대한 의무 또한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1-6. 《리바이어던》에 등장하는 국가에 관한 이론은 무척 독창적이며 강력한 지적 체계를 드러내며 그것이 지닌 구조는 홉스 당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여러 정치철학자의 저술에 크게 반영되었다. 그의 체계는 비록 절대적인 통치권을 강조하지만 전체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오직 국민들을 위해서 존재하며 그 반대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홉스는 통치자의 정당성을 신의 권위에 조금도 호소하지 않고, 더욱이 인간 본성의 궁극적 원인이라는 신의 역할에도 전혀 의존하지 않고 오직 국민들 사이의 계약으로부터 직접 이끌어 낸 최초의 철학자이다.

정의로운 전쟁과 정의롭지 않은 전쟁

1.정의로운 전쟁과 정의롭지 않은 전쟁

1-1. 전쟁에 대한 유토피아 사람들의 태도에 관하여 논의하면서 모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이 전쟁을 하는 유일한 목적은 오직 사전에 확보했더라면 선전포고를 막을 수 있었을 상황을 얻기 위함이다.‘ 이런 규칙에 따를 경우 무조건 항복이나 전쟁 중 임무를 변경할 가능성 등은 완전히 배제된다. 모어 자신은 헨리 8세가 일으킨 전쟁에 여러 번 참여했지만 정작 정의로운 전쟁과 그렇지 않은 전쟁을 구별할 원리를 체계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이런 원리를 제시한 인물은 16세기 말에 등장한 예수회 소속의 신학자 수아레스(Francisco Suarez)였다.

1-2. 수아레스는 아퀴나스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정의로운 전쟁에 관한 고전적 이론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원리로 요약한다. “첫째, 합법적인 권위를 지닌 당사자에 의해서 선전 포고가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정당한 원인과 명분이 있어야 한다. 셋째, 전쟁의 개시와 진행 및 승리의 과정에서 적절한 수단과 균형이 드러나야 한다”

수아레스가 말한 합법적인 권위를 지닌 당사자라는 조건은 오직 통치권을 지닌 정부만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나라의 개인이나 집단은 불화를 무력으로 해결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교황은 초국가적 권위를 지니므로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 대립을 해소하는데 개입할 권리를 지닌다.

수아레스는 전쟁의 정당한 원인으로 두 가지를 인정한다. 자신의 나라가 공격받을 경우 무력을 사용해 나라를 방어할 권리를 지닌다. 또한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전쟁이 정당한 경우도 있는데 자신의 나라 또는 동맹국이 당하리라 예상되는 중대한 부당행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공격일 때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승리하리라는 충분한 희망이 있어야하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무력에 의지한다면 부당행위를 막을 수 없다.

세 번째 조건은 다시 세 요소로 구성된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통치자는 잠재적인 적국이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악함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어야한다. 그렇게 했음에도 사악한 일이 계속된다면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다. 또 전쟁 중에는 반드시 필요한 폭력만을 이용해야하며 끝난 후에는 적절한 보상과 정당한 처벌이 이루어져야한다.

1-3. 수아레스는 이들 중 두 번째 요소가 전쟁과 무관한 사람들에 대한 의도적인 공격을 금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누가 진정 전쟁과 무관한 사람인가? 자연법은 어린이와 여성들, 무력에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이 무관하다고 말하며 실정법에 따르면 대사와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은 금지된다. 하지만 수아레스는 이들을 제외한 무기를 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전쟁과 관련된다고 보았다.

수아레스는 자신들 규칙들이 기본적으로 통치자들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투 명령을 받는 일반 병사들은 명백한 불의가 드러나지 않는 한 정의롭게 여기기 때문에 통치자만이 스스로 전쟁에 대해 숙고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해 전쟁을 정의롭게 만드는 조건을 충족시킬 의무를 가진다.

1-4. 전쟁의 도덕성에 관한 수아레스의 주장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로티우스(Hu해 Grotius)로 이어지면서 훨씬 폭넓게 전파되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법학자이며 외교관이었던 그로티우스는 1625년 위대한 저술 《전쟁과 평화의 법》을 출판했으며 종교에 기초한 법의 개념으로 벗어나기 위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도덕 이론을 제시한다. 그가 종교적 신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종교전쟁을 통해 특정 종교에 대한 신앙이 안정적인 국제 질서를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관념과 인상에 관한 흄의 견해

1. 관념과 인상에 관한 흄의 견해

1-1. 사고와 심성을 동일시하려는 경험론자의 태도는 흄의 철학에서 가장 극단적인 지점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흄은 모든 지각을 ‘관념’이라고 부르는 대신 인상과 관념이라는 두 종류로 구별함으로써 로크와 버클리의 주장을 개선하려한다. 흄은 모든 사람이 감정과 사고의 차이를 안다고 말한다. 감정은 인상, 즉 감각 및 정서와 관련된다. 반면 사고에는 관념이 포함된다.

여기서 흄이 말하는 관념이 정신적 심상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이 관념은 인상과 유사하지만 덜 강력하고 덜 생생하다. 단순 관념은 인상의 모사에 지나지 않으며 이를 옹호하기 위해 그는 사고 실험을 통한 경험에 호소한다. 예컨대, 파란색만 지각하지 못한 사람은 당연히 특정한 색조가 빠져있는 빈자리를 지각한다. 또한 그 사람은 상상력으로 빠져있는 파란색의 색조를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보충하고 이에 따른 관념을 스스로 떠올린다.

이런 사고 실험을 통하여 그는 모든 관념이 인상으로부터 도출된다는 자신의 원리에 대한 예외를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런 사례는 무척 드물기 때문에’와 같은 말로 제멋대로 반례를 무시한다. 어쨌든 그는 ‘앞선 이상이 없다면 관념 또한 없다’라는 원리를 형이상학을 공격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1-2. 생생함의 정도를 사용하여 관념과 인상을 구별하는 기준은 생생함에 근거하여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관념, 즉 기억에 관한 관념과 상상에 의한 관념을 구별한다. 그는 기억의 관념이 상상에 의한 관념보다 훨씬 생생하고 강렬하다. 또한 기억과 달리 상상에 의한 관념은 인상이 지닌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과 상상에 의한 관념 모두 자신에 선행하고 대응되는 인상을 지녀야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렇다면 기억에 관한 관념과 상상에 관한 관념을 구별하는 두 가지 기준이, 즉 생생함과 질서정연함이 마련된다. 하지만 이런 기준들을 어떻게 활용해야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들을 통해 진정한 기억과 공상적 기억을 구별할 수는 있겠지만 회의의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공상이 기억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를 압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1-3. 흄은 기억이 정신 안에 일련의 과거 사건들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억에는 수 많은 종류의 기억이 존재하며 상상도 마찬가지로 공상을 펼치는 정신의 자유로운 활동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괄한다. 상상은 착각, 가정, 창조적 독창성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는 기억과 상상 안에 다양한 정신적 사건과 능력, 활동을 모두 포함시킬하지만 이들 모두를 오직 경험론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강요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동시에 흄의 설명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듯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새소리를 듣고 그것의 선율을 정신 안에서 재현할 때 우리는 나와 새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니라 새가 내는 듯이 보이는 생생한 소리를 내가 접한 결과인 것이다. 그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지각뿐이라는 경험론의 주장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의 삶 또한 내적 감각의 연속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2-1. 그렇다면 기억과 상상 사이의 차이 또한 내적 감각을 통해 밝혀져야 한다. 누군가는 이들 사이의 차이가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 자신도 우리가 스스로 믿지 않는 것들을 상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신적인 상태를 이런 방식으로 분류한다면 그는 믿음에 적절한 지위를 부여하기 어렵게 된다.

단순히 p를 생각 하는 것과 실제로 p를 믿는 것 사이의 차이가 내용의 차이일 수는 없다. 흄이 표현하듯 믿음은 우리가 믿는 바를 구성하는 관념 또는 관념들에 어떤 특별한 관념을 더함으로써 형성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관념이라도 자유롭게 더할 수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바를 선택해서 믿을 수는 없다. 이를 지지하는 근거는 만약 특별한 관념을 더함으로써 믿음이 형성된다면 누군가는 카이사르가 침대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믿는 것과 카이사르가 침대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서로 전혀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동일한 명제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2.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에서 흄은 믿음이 ‘그저 느슨한 공상이나 몽상과는 다른, 어떤 감정이나 정서를 동반하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일종의 인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흄은 이런 생각이 경험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믿음은 오직 관념들로만 구성되지만 그는 여전히 관념은 감정에 동의한다고 고집하면서 강력함, 생생함, 견고함, 확고함, 견실함 등의 용어로 예를 든다. 결국 그는 ‘이런 감정 또는 태도의 개념을 완벽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고’ 고백하면서 논의를 마친다.

2-3. 믿음의 특징을 생생함으로 설명하려는 흄의 시도는 그의 체계 안에서 난점을 일으킨다. 이와 관련해 흄은 명백한 관념도 아니고 명백한 인상도 아닌 지각에 놀란다. 예컨대, 우리는 침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떠나지 않았다는 카이사르의 예에서 이 둘의 기억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의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두 경우 모두 생생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의 최대 난점은 믿음이 상상을 포함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믿음에 상상이 포함될 경우 강박적인 공상이 실제 믿음보다 생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4. 흄은 뉴턴이 물리학에서 행한 바를 인식론에서 행하기 위하여 관념의 연상을 도입했는데 여기저기 흩어진 매우 적은 언급만으로 이를 해결하려는 그의 착각에는 다소 안쓰러운 면이 있다. 하지만 그의 철학적 심리학이 너무나 빈약하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는 솔직하게 경험론 전통의 허점과 모순을 인정했다. 그의 통찰은 이 전 철학자들의 심리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계속해서 연구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는 인식론에서 새로운 형태의 회의주의를 제시하면서 크게 기여했다

그의 회의주의는 관념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명제와 사실을 표현하는 명제 사이의 구별로부터 출발하는데 그는 어떤 사실이라도 부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더라도 결코 모순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내일 해가 떠오를 것과 떠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명제 중 후자의 명제를 믿는가?

2-5. 흄은 사실의 문제에 관한 우리의 모든 추론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인과 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가장 단순한 자연의 규칙성도 경험 없이는 확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는 서로 전혀 다른 사건이며 전자로부터 후자를 추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자연의 규칙성을 배운다는 것이다. 하지만 흄은 이에 대한 고찰을 계속해 나간다. 그는 설령 우리가 원인과 결과의 작용을 경험한 후라 할지라도 경험으로부터 이런 결론을 이끌어낼 근거가 과연 이성 안에 존재하는지를 묻는다. 우리는 미래의 대상이 과거의 대상과 유사하리라고 단지 현상적으로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다음 번에 내가 주잔자를 다시 난로 위에 올려놓았을 때 물이 끓지 않으리라는 가정은 아무런자기모순도 포함하지 않는다. 경험에 근거한 어떤 논증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연의 전행이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허용한다면 경험을 신뢰할 만한 인도자로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가 과거와 유사할 것이라는 시도는 명백한 순환 논증에 빠진다.

2-6. 그렇다면 엄밀한 논증의 수준에서는 회의주의가 승리를 거두는 듯하다. 하지만 흄은 이런 발견 때문에 낙담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추론보다 더 강력한 원리인 습관을 통해서 자연의 규칙성을 믿게 된다. ‘두 가지 대상이 -예를 들면 뜨거움과 불꽃이, 무게와 단단함이- 서로 항상 연결되는 것을 본 후에 우리는 하나의 현상이 다른 현상으로부터 등장하리라고 오직 습관적으로 기대할 뿐이다.’ 인간의 삶은 주로 추론이 아니라 습관에 의해서 인도된다.

흄

1.흄

1-1. 버클리가 더블린에서 경험론의 형이상학을 세상에 선보인 직후에 경험론의 원칙을 형이상학에 반대하는 극단까지 밀고 나간 철학자가 에든버러(Edinburgh)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흄(David Hume)이다.  그는 1711년 스코틀랜드 작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에든버러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과 사랑에 빠진다. 뒤이어 법률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는데 포기했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철학과 폭넓은 배움을 추구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모든 일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혐오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또한 1734년부터 37년까지 양주의 라 플레슈라는 이전에 데카르트가 예수회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했던 곳에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첫 번째 저술이자 가장 중요한 저술인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썼다.  출판된 당시 책은 많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가 세상에 떠난 후 이 책은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20세기 영국 경험론자들은 이를 영어로 쓴 철학 저술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격찬했다.

2-1. «논고»는 모두 세권으로 구성되는데 ‘지성에 관하여’, ‘정념에 관하여’ 는 1739년에, ‘도덕에 관하여’는 1740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의 목표는 초판의 부제에 언급된 대로 실험적인 추론 방법을 도덕적 주제들에 도입하려는 시도이다.  그는 실험적 방법을 도덕적 주제들에 적용함으로써 뉴턴이 물리학에서 행한 바를 자신은 심리학에서 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관념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고 지금까지 형이상학자들이 잘못 해석하여 혼란스럽게 된 인과성이나 의무 등의 개념을 자신이 처음으로 확실히 해명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학문은 우리에게 이익을 준다. 이제 우리는 지식의 변방에서 작은 요새를 지키는 대신 ‘이런 학문들의 중심 또는 중앙을 향하여, 인간 본성 자체를 향하여 직접 행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2.  «논고»의 1권은 정신의 내용물을 경험론적으로 분류하는 작업과 더불어 시작된다. 여기서 로크 및 버클리 인식론의 근거가 많이 등장하지만 흄은 지각을 오직 인상과 관념으로 나눈다. 인상은 관념보다 강렬하며 생생하고 감각과 감정을 포함한다. 반면 관념은 사고와 추런을 포함한다. 그는 기억과 상상력의 관념 및 관념들 사이의 연상을 상세히 다루면서 로크의 추상관념에 대한 버클리의 비판을 더욱 강화한다.

«논고»의 1권 2부에서 그는 공간과 시간의 관념을 다룬 후 ‘지식과 개연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절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한다. 그는 감각이 직접 전하는 바를 넘어서서 확장된 모든 지식은 원인과 결과의 관념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과거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또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 추측하는 일은 모두 이 두 관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두 관념의 근원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관성의 관념이 본래 대상에 속하는 그 어떤 성질로 부터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서로 전혀 다른 종류의 대상들이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신 이 대상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아야한다. 그러면 우리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근접해서 발생하고 원인이 시간상 결과에 앞선다는 점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원인과 결과를 선언하기에 충분치않다.

그는 몇 페이지에 걸쳐 뛰어난 논증을 펼친 후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의 추론이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연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연결이 우리가 원인으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추론에 의존한다. 즉 원인과 결과 사이에 필연적 연결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믿음은 추론이 아니라 습관의 산물이다.

2-3.  «논고» 2권에서 정념 또는 감정에 관하여 탐구함으로써 흄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행보를 따른다. 하지만 이 주제는 합리론 철학자들보다 흄에게 더 큰 중요성을 지니는데 왜냐하면 흄은 합리론자들이 이성의 활동으로 여겼던 수많은 작용을 정념의 역할로 돌리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정념은 특별한 종류의 인상이다. 지각을 인상과 관념으로 나눈 후에 흄은 다시 인상을 원초적 인상과 이차적 인상으로 분류한다. 감각적 인상과 육체적 쾌락과 고통은 원초적 인상인 반면 정념은 이차적 인상에 해달되는데 이것이 바로 2권의 주제를 형성한다.  그에 따르면 이성 자체는 어떤 행위도 산출할 수 없다. 모든 자발적인 행위는 정념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된다. 이성은 결코 정념을 이길 수 없으며 오직 상반되는 정념만이 정념을 이긴다.  ‘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또한 노예여만 한다. 그리고 이성은 정념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임무도 탐내서는 안된다’

2권 끝부분에서 우리는 흄의 윤리 체계가 다른 전통적인 도덕철학과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예상한다. 이성은 우리를 행위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도덕 판단을 이성의 산물일 수 없다.  도덕판단의 목표는 오직 우리의 행위를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오직 정념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우리의 정념에 원인을 제공하지도 평가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해야만 한다’는 ‘이다’로부터 도출될 수 없으며 우리가 이끌어 내야 하는 결론, 즉 선과 악, 옮고 그름 사이의 구별은 이성이 아니라 도덕감의 산물이다.

2-4. 이를 기초로 삼아  흄은 «논고» 3권 2부에서 정의와 불의에 관해 논의하며, 자비심이나 정신의 위대함 같은 인간 본성의 덕을 다룬다. 그는 도덕적 구별의 주요 원천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sympathy)의 감정이라고 결론 짓는다. 예컨대 정의가 칭찬받는 까닭은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기 때문이지만 만약 공감의 감정을 통해 공공의 이익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  ‘덕은 오직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오직 그 목적이 가치있을 경우에만 수단 또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행복은 오직 공감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스피노자

  1. 생애와 사상적 배경

1-1 다른 한편으로 데카르트의 사상을 대담한 방식으로 발전시킨 유대인 철학자가 네덜란드에 있었다. 1632년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스피노자는 어린 시절부터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알았다. 반 덴 엔덴은 기독교도 의사였는데 스피노자에게 라틴어를 가르쳤고 데카르트의 저술을 소개함으로써 스피노자의 사상 발전에 큰 영항을 미쳤다.

1-2 스피노자는 유대교 신학에 대하여 10대 후반부터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성년이 되면서 유대교의 관습을 대부분 거부했다. 1656년 그는 유대교 공동체에서 파문당했고 렌즈를 깎는 기술을 배워 여러 광학 기구들을 제작했다. 이를 직업으로 삼음으로써 그는 사색과 연구를 할 시간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1-3 이 당시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을 쓰기 시작 했다. 이 책은 지성의 개선을 주제로 지적인 전환을 상세히 설명하고 탐구의 과정을 밝히는 것이 《방법서설》과 유사하다. 그러나 완성되지 못한 채 그가 죽은 후에야 출판되었다.

1-4 1663년 한 학생에게 데카르트의 철학을 가르치고 친구였던 레이덴 대학 메이어 박사의 요청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를 ‘기하학적 형식’으로 진지하게 해설한 저술을 출판했다. 《철학의 원리》 중 처음 두 권을 완벽하게 정리한 후 여기에 자신의 주석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이 저술을 구성했다.

1-5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제시한 일련의 정의와 공리들을 이어받은 후 이를 확장하여 모두 58개의 정리를 증명했다. 데카르트의 정의와 공리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은 대체로 《철학의 원리》에 등장하는 내용을 따른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저술에 대한 서문을 쓴 메이어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견해와 데카르트의 견해가 모든면에서 일치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1-6 1670년 익명으로 《신학정치론》이라는 저술이 출판되었다. 이 저술은 사실 스피노자가 1665년 자신이 유대교를 떠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해명을 쓰기로 결정한 것이, 점점 확대되어 성서 비평과 정치 이론을 포함한 저술이 된 것이다. 스피노자는 성서 원전을 상세히 검토한 후 히브리어 성서는 그 보다 더 오래된 자료를 편집한 것이며, 아무리 올라가도 기원전 5세기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1-7 《신학정치론》은 세심한 논증과 고상한 표현을 통하여 문학의 한 유형으로서의 성서 비평을 주목하게 만든 훌륭한 저술이다. 하지만 이 저술은 구약성서에 대한 개방적인 해석으로 인해 유대교도는 물론 네덜란드의 칼뱅주의자들까지 이에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몇몇 교회 회의에서는 금서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다른 동시대인들은 이 책을 크게 칭찬했으며 스피노자가 이 책의 저자인 것이 알려지면서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67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 교수직을 제안 받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1. 사상

2-1 스피노자는 어떤 학문적인 지위도 맡지 않았고, 결혼하지도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평온한 삶을 살면서 묵묵히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논증된 에티카》를 쓰는 일을 계속했다. 1675년 이를 완성했지만 이 책을 출판하게 되면 무신론자로 몰려 처형당할지도 모른다는 친구들의 경고로 인해 출판하지 않고 다른 책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1677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티카》, 《정치론》등을 비롯한 그의 유작들은 한데 묶여 출판되었지만 채 일 년도 못되어 네덜란드에서 금서가 되었다,

2-2 《에티카》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체계를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바탕으로 설명한 저술이다.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제목은 ‘신에 관하여’, ‘정신의 기원 및 본성에 관하여’, ‘정서의 본성 및 기원에 관하여’, ‘인간의 굴레에 관하여’, ‘인간의 자유에 관하여’ 이다. 각 부는 일련의 정의와 공리로부터 출발해 다양한 정리들에 대한 형식적 증명으로 이어지고, 각각의 정리에는 정의와 공리로부터 도출되지 않은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기하학적인 방법이 스피노자의 체계를 제시하는데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증명들이 자주 결론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2-3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자신의 철학을 투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가정도 숨기지 않으며 오로지 한 정리에서 다음 정리로 나아가는 논리적 연결점만을 보이려 한다. 또한 기초적인 기하학의 개념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세계 전체를 설명하려 한다. 이 설명이 실패하더라도 이는 철학자의 잘못이기 보다는 철학 본질 자체의 잘못 때문이다.

2-4 《에티카》는 윤리학 외에도 많은 주제들을 다룬다. 1부에는 형이상학 뿐 아니라 자연신학도 등장한다. 실체의 본성을 설명하면서 신의 현존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도 제시한다. 데카르트는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 즉 두 종류의 기본적인 실체를 인정했지만 스피노자는 오직 한 종류의 실체만을 인정한다. 이는 사고라는 속성과 연장성이라는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결국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에티카》의 2부에서 설명하듯 정신은 사고라는 속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이며, 육체는 연장성이라는 속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이다. 결국 정신과 육체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를 기초로 스피노자는 세 단계의 지식, 즉 표상지, 이성지, 직관지가 존재한다는 인식론을 형성한다.

2-5 《에티카》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윤리적 논의는 3부에서부터 등장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현존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자신을 파괴하려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저항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런 충동에 대한 의식이 인간에게 욕구로 드러나는데 이 충동이 자유로울 때 쾌락을 느끼고 방해받을 때 고통을 느낀다고 보았다. 인간의 복합적인 정서들은 쾌락과 고통으로부터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도 욕구와 혐오에 의해 규정된다.

2-6 하지만 《에티카》의 마지막 두 부에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극단적인 정념에 의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정념을 지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능동적 정서와 수동적 정서 사이의 구별이다. 두려움, 분노와 같은 수동적 정서는 외부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 반면에 능동적 정서는 정신이 처한 상황을 스스로 파악함으로써 등장한다. 우리가 수동적 정서에 대한 명석, 판명함 관념을 지니면 정서는 능동적으로 바뀌는데, 수동적 정서를 능동적 정서로 대체하는 것이 바로 정서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한다.

2-7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의 필연성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도덕적 해방에 이른다. 다른 사람의 행위가 그의 본성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그들에 대한 증오를 멈추게 된다. 우리는 신과 같은 관점을 택해 모든 것들이 이루는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체계를 ‘영원한 모습에 비추어’ 바라보아야 한다.

2-8 스피노자의 독특한 체계는 철학사의 흐름에 따라 몇몇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로크의 이론과 관련되는 것으로 스피노자의 실체이론을 이해할 수 있다. 로크와 스피노자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실체 개념을 제거하려 했다. 반면에 그를 데카르트와 비교하는 관점을 택하면 데카르트의 가정이 암시하는 바를 명확하게 이끌어 냄으로써 스피노자는 신이 이 세계 안에서 유일한 행위자라는 결론에 이른 말브랑슈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이보다 더 나아가 신이 유일한 실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2-9 철학에서 17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란이 일어난 시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스콜라철학의 특징은 일종의 구별을 도입하고 인간과 물질세계를 설명할 때 이 구별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보이는 개념 쌍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는 이런 모든 규별을 무너뜨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란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 스피노자의 체계는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스피노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점에서 만나기도 한다.

2-10 스피노자의 철학은 자주 합리론을 지나치게 확장한 형태의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가 자신의 체계를 유클리드의 용어를 사용하여 기하학적으로 제시한 까닭은 다양한 주제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서 일뿐 아니라 논리적 연속성이 세계 전체에 작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극단적인 합리론의 체계는 이후 낭만주의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라이프니츠

 

  1. 시대적 배경과 생애

1-1 라이프니츠는 17세기와 18세기의 경계선에 걸쳐 앉은 철학자이다. 그는 체계적인 저술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철학사가들은 단편적인 조각글로부터 일관되고 종합적인 체계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해 왔다. 또한 이후 등장한 수많은 철학자들은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1-2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에서 철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유년기 시절부터 서재의 책들을 읽으며 보냈던 그는 문학, 역사, 법률, 수학, 자연학, 화학, 신학 등의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보였다. 1661년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여 3년 만에 학사학위를, 그리고 1667년 21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교수직 제의를 거부하고 마인츠 대주교 아래로 들어가 외교관으로 일하며 몇몇 학문적 저술들을 대주교에게 헌정했다. 한편 그는 가톨릭이 지배하는 궁정에서 개신교도로 살면서 모든 기독교 교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교리들을 기반으로 기독교의 통합을 주장하는 여러 저술을 쓰기도 했다. 1672년 라이프니츠는 십자군 원정에 나서도록 루이 14세를 설득하는 비밀 임무를 띠고 파리로 갔으나 아무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르노와 말브랑슈를 만났으며, 다음 해에는 런던을 방문하여 보일과 올덴버그 등 왕립학회 회원들에게 학회의 회원으로 초대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1676년 미분법을 발견했는데, 사실 뉴턴이 이보다 먼저 미분법을 발견하였으나 출판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독일로 돌아오며 스피노자를 방문하여 <<에티카>>의 초고를 읽고 논평을 쓰기도 하였다.

1-3 이후 라이프니츠는 그가 이전부터 해왔던 기독교 호교론 전파에 관하여 가명으로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전 유럽의 기독교 국가를 연방으로 통합하여 황제는 세속적인 통치를, 교황은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분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 통합 계획을 후원했던 공작이 사망하자 계획은 무너졌다.

2.사상

2-1 1685년 겨울 라이프니츠는 그의 저술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형이상학 논고>>를 집필했다. 그는 이를 자신의 성숙한 철학 체계를 언급한 최초의 저술로 여겼다. 짧지만 명료한 이 저술은 오늘날에도 라이프니츠 철학체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입문서로 평가되며, 그의 철학이 지닌 많은 특징을 잘 보여준다.

2-2. 이 저술에 맨 처음 등장하는 주장은 우리가 항상 이성에 따라 질서 잡힌 방식으로 작용하는 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세계에 산다는 것이다. 각각의 개체는 자신의 내력을 통해 자신에 대해 참인 많은 술어들을 얻고, 이런 술어들 전체가 그 실체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의한다. 이런 실체들은 자신의 방식에 따라 세계를 표현하며, 특정한 관점에서 세계를 요약하는데, 이 실체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인간의 행위는 우연적이며 자유 의지에 의존한다. 선택 또한 근거는 있지만 그 근거가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체들은 서로 직접 작용할 수 없되, 한 실체에 일어나는 일이 다른 모든 실체에게 대응되도록 신이 배열해 놓았다. 결국 각각의 실체는 분리된 하나의 세계와 같으며, 신 이외의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2-3 인간의 정신은 모든 것들의 관념을 포함하며, 신을 제외한 어떤 외부적 대상도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관념과 의지 작용은 우리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신은 우리를 강제하지 않으면서 이끈다. 정신과 육체는 서로 상호작용을 주고받지는 않지만 사고와 육체적 사건은 서로 대응해서 일어나기 마련인데 그 까닭은 이들이 우리를 사랑하는 신의 섭리에 의해서 연결되기 때문이다(라고 적혀있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형이상학 논고>>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전통적인 기독교가 배경에 깔려 있으며, 이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주의 깊게 변형하려는 당시 대륙 철학자들의 시도가 드러남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체계가 지닌 특징을 데카르트, 말브랑슈, 스피노자의 체계와 대비하여 명확히 제시하면서 자신이 이들을 종합했다고 주장했다.

2-4.기독교 호교론 전파에 실패한 라이프니츠는 다른 방향으로 칼뱅주의 개신교도와 루터주의 개신교도 사이의 화해를 모색했다. 또한 그는 유럽 기독교 국가들을 하나의 연방으로 통합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두 가지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기독교 통합을 포기하지 않고 이후에도 가톨릭과 중국 유교의 신앙과 제사 사이에 조화를 모색하려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격려했다.

2-5. 한편, 로크의 본유관념 부정에 크게 자극받은 라이프니츠는 경험론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를 위하여 쓴 저술은 로크의 사망소식을 알고 출판하기를 단념하였고, 결국 라이프니츠의 사망 후 50년이 지난 뒤에서야 출판되었다. (<<신인간지성론>>)

2-6. 라이프니츠가 프로이센의 샤를로트 왕비에게 헌정한 <<변신론>>은 세계의 현실적인 악에 직면해서도 신은 여전히 정의롭다는 주장을 정당화한다. 이 책에서 그는 악으로 보이는 여러 현상에도 우리가 실제로 여러 가능 세계 중 최선의 세계에 산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낙관주의는 이후 볼테르의 강력한 비판을 받는다. ‘이것이 최선의 세계라면 다른 세계는 도대체 어떻다는 말인가?’

2-7. 1713년 출간된 <<모나드론>>에서 그는 <<형이상학 논고>>에서 암시했던 체계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모든 복합적인 것은 단순한 것들로 구성되며, 모든 단순한 것은 연장성을 지니지 않는다. 단순한 것이 연장성을 지닌다면 또 다시 분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순하고 비물질적인 어떤 요소를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라고 부르는데, 영혼과 유사한 정신적인 속성만을 지니는 무한히 많은 실체라고 생각했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드에게는 창문이 없으므로 그 무엇도 드나들 수 없다’고 말하며 다른 피조물로부터 인과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한다. 또한 신이 미리 모나드가 세계의 변화와 동시에 변화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2-8. 라이프니츠는 1716년 세상을 떠났는데 엄청난 분량의 미출판 원고와 수많은 미완의 계획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계획들은 남겨진 모든 저술을 포함한 전집을 출판하려는 사업과 함께 300여년이 지나도록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

 

홉스

1. 홉스

1-1. 1641년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고 평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인물 중에는 당대 최고의 영국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도 포함되었다. 홉스는 영국 함대가 스페인의 무적함대(Spanish Armada)를 격파한 1588년에 태어났기에 이런 요청을 받을 때는 53세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후 캐번디시 가문의 가정교사와 베이컨의 서기로 일했다. 1629년 투키디데스(Thucydides)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데카르트 친구인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메르센 신부는 그를 ‘철학의 모든 분야에 능통한 탁월한 학자’라고 기록했다. 1640년 홉스는 《자연법과 정치적인 법의 기초》를 영어로 출판하면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이 구성한 사회에 대한 그의 핵심적인 철학 원리들을 잘 드러냈다. 그 해 그는 장기 의회(Long Parliament)의 활동으로 내전을 예상하고 파리로 도피해 10년 이상 그곳에서 후에 왕위에 오르는 찰스 2세의 개인 교사로 지냈다. 그 동안 그는 《시민론》를 출판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상당한 명성을 그에게 안겨다주었다.

1-2.데카르트에 대한 홉스의 평가를 보면 홉스가 《성찰》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음이 드러난다. 이 두 철학자는 전통적으로 서로 정반대되는 철학의 양극단에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사실상 이 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예를 들어, 이 둘은 모두 수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홉스는 데카르트의 해석 기하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에 대해 ‘정합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묘하게도 말년에 홉스는 기하학 연구에 진지하게 몰두하며 옥스퍼드 수학 교수들과 몇 년 동안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외에도 데카르트와 홉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를 경멸했고 당시의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판을 치는 현실을 비난했다. 또한 둘은 한창 때를 망명 생활로 보냈으며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둘 다 스튜어트 왕가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이들은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을 경멸하며 모국어로 글쓰는 능력이 탁월해 전문 학술서뿐만 아니라 대중을 위한 책도 썼다.

이 두 철학자가 서로 일치된 의견을 보인,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논점은 이들이 각각 물질세계는 오직 운동의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확신한 점이다. 홉스는 ‘일반적인 사물의 원인은 저절로 드러나거나 아니면 사물의 본성을 통해 알려진다. 따라서 어떤 방법도 전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물은 모두 오직 하나의 보편적인 원인, 바로 운동이라는 원인을 갖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홉스는 데카르트와 같이 색과 소리 같은 제이성질과 같은 모든 우연적 속성들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점을 부정하며 광학이 감각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데 같은 의견을 보인다.

1-3.홉스는 데카르트의 철학의 절반, 즉 물체에 관한 철학과는 상당히 유사한 견해를 보이지만 나머지 절반, 즉 정신에 관한 철학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사실 홉스는 데카르트가 생각한 의미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홉스는 연장성을 지니지 않고 운동하지 않는 비물질적인 실체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천사든 신이든 비물질적인 정신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홉스의 유물론에 대해 신의 존재를 그가 어떻게 여겼는지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인간이 정신과 물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된다는 이원론을 확실하게 거부했다는 점이다.

데카르와 홉스는 수많은 철학적 태도와 선입견들을 서로 공유했지만 홉스는 유물론을 선택함으로써 데카르트에 반대하는 대표적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유물론과 이원론이라는 형이상학적 차이에 더하여 철학사가들은 이 둘을 인식론에서 반대되는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의 창시자로 여긴다. 사실 이 두 학파의 차이는 표면상 드러나는 것만큼 크지 않다.

1-4. 홉스는 데카르트보다 거의 30년을 더 살았지만 1650년 데카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프랑스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파리에서 신교도로 사는 것과 그를 구교도로 개종시키려는 메르센의 시도에 큰 불편함을 느꼈다. 또한 큰 병을 앓으면서 영국 성공회이ㅡ 의식에 따르겠다고 고집하기도 하면서 파리 마지막 해에 철학사에 영원히 남게 될 《리바이어던 또는 교회 국가 및 시민 국가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권력》을 썼다.

어떤 국가 조직도 없는 자연 상태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이런 자연 상태는 오직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에 지나지 않음을 보임으로써 홉스는 사람들이 합리적인 자기이익의 원리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무제한의 자유를 포기하고 결국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부과되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제한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자기 이익의 원리에 따라 사람들은 자기방어의 권리를 제외한 다른 권리들을 중앙의 권력에게 양도함으로써 이 권력이 처벌을 통하여 법률을 강요할 수 있도록 만든다. 여기서 맺은 사람들이 맺은 계약을 통해 최고 통치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계약에 참가하지 않으므로 위반할 계약 자체가 없다. 이런 통치자는 법률과 재산권의 근원이 되며, 국가를 구성하기 위한 최초의 계약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서로 맺은 개별적인 계약을 지키도록 강제한다.

1-5.《리바이어던》은 1651년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이 저술에는 절대 왕정을 세련되게 지지하고 있지만 당시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찰스 2세는 이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당시 찰스 2세가 궁정에서 추방당하고 홉스의 구교도 친구들도 세상을 떠나자 그는 영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영국은 찰스 1세의 처형 이후 호국경(Protector) 크롬웰(Oliver Cromwell)의 통치 아래 있었다.

크롬웰의 통치 기간 동안 홉스는 조용히 런던에 머물면서 정치철학에 관한 어떠한 저술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홉스는 자연철학에 관한《물체론》을 1655년 라틴어, 1656년 영어로 출판하고 밀턴의 《실낙원》에 등장하는 구절에 대해 브램홀 주교(Bishop Bramhall of Derry)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658년 홉스는 《인간론》을 라틴어로 출판했는데 이 또한 《시민론》과 마찬가지로 《법의 기초》에 등장했던 몇몇 사상들을 영어권 외부의 독자를 위해 다시 쓴 것이었다.

홉스는 1660년 찰스 2세가 영국으로 돌아와 왕위에 복귀하면서 궁정의 환영과 연금을 받게되었지만 다른 신하들로부터는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리바이어던》은 심각한 의혹의 대상이 되어 몇몇 주교들이 그를 이교도의 죄를 물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다.

1660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홉스는 런던과 체츠워스(Chatsworth), 하드윅(Hardwick) 등지의 데번셔(Devonshire) 백작 가문의 저택에 주로 머물렀다. 그는 더 이상 철학에 관한 저술을 쓰지 않고 《일리아스》《오디세이》번역에 몰두하면서 《베헤못》이라는 영국 내전의 역사에 관한 저술을 출판하려했지만 왕의 만류로 포기했다. 그는 1679년 91세의 나이로 하드윅 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말년에 파킨슨병에 걸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기찬 삶을 유지했다고 한다.

1-6. 홉스가 철학사에서 명성이 높은 까닭은 주로 그가 정치철학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언어철학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언어는 우리를 야수와 구별해주며, 학문을 추구할 수 있게 한다고 역설한다. 언어의 목적은 우리의 사고 과정을 연속된 단어로 바꾸는 것인데, 언어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첫째, 과거와 현재 모든 것들의 원인, 결과를 기록하는데 사용한다. 둘째, 얻은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상의하며 가르치는데 사용된다. 셋째, 우리의 의도와 목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 서로 도울 수 있게 사용되며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데 사용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언어의 네 가지 효용과 대비되는 네 가지 악용의 사례도 있는데 이런 악용을 피하려면 대단한 수고가 필요하다. ‘언어는 마치 돈과 같다. 현명한 사람들은 오직 계산을 할 때만 이를 적절히 사용하지만 바보들은 이를 무턱대고 써버린다’

홉스는 철저한 보편명목론자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단어들은 이름뿐인데 이름은 오직 개체들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름이 어떤 형태를 취하던 간에 그것은 하나 또는 다수의 개체 이외의 어떤 것도 결코 지시할 수 없다. ‘인간’과 같은 보편적인 이름은 세계 안의 어떤 보편적인 사물이나 우리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체들을 지시할 뿐이다. ‘이 세계에서 이름을 제외하면 보편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이름은 그것에 속하는 모든 개별적인 개체들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홉스는 이름들이 한데 모여 문장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만일 ‘소크라테스는 정의롭다’라고 말하면 여기서 ‘정의롭다’와 ‘소크라테스’와의 관계는 이 단어의 관계와 동일하다. 또한 문장 안에서 두 이름이 모두 동일한 것을 지시할 경우 그 문장은 참이 되는 반면 두 이름이 동일한 것을 지시하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

홉스의 두 이름 이론은 소박한 형태의 의미론에 해당하지만 이에 대하여 이미 중세부터 등장했고 특히 19세기 프레게(Gottlob Frege)의 저술을 통해서 제기된 심각한 논리적 비판을 견디지 못했다. 홉스식의 이론은 중세의 오컴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미숙했지만 그의 이론은 영국 경험론자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그들 자신이 오컴과 홉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2.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

2-1.  17세기 중반 홉스 및 데카르트와 다른 견해를 보이는 여섯 명의 영국철학자들이 등장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커드워스(Ralph Cudworth, 1617~88)를 비롯한 다섯 명은 케임브리지의 엠마누엘 칼리지를 졸업했으며, 다른 한명인 모어(Henry More, 1614~87)는 크라이스트 칼리지를 졸업했는데 커드워스는 이 칼리지에서 30년 동안 교수생활을 하기도 했다. 추종자들은 이 들을 존경, 찬양하며 이 그룹을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케임브리지 출신이었지만 당시 영국 내전 동안 케임브리지 지역과 대학을 지배했던 청교도주의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이들은 칼뱅의 예정은총설을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이 지닌 장점을 주장했다. 하지만 무신론자에게까지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는데 특히 이들은 홉스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홉스의 유물론이 결국 무신론에 이르리라고 본 것이다. 또한 이들은 찰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 성공회를 중심으로한 계층 질서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했으며 결국 찰스 1세의 퇴위와 처형으로 이어지게 했다. 그들은 ‘주교 없이는 왕도 없다’는 정치 구호를 ‘정신 없이는 신도 없다’고 외치면서 유물론자인 동시에 유신론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데카르트 편에 서서 홉스에 반대하는 특히 정신과 물체의 구별을 강조했다. 모어의《무신론에 대한 해독제》《영혼의 불멸성》, 커드워스의《우주의 진정하한 지적 체계》 등의 저술을 통해 이들이 인간 영혼의 불멸성과 정신적인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데 얼마나 몰두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모어는 인간이 ‘감각과 이성 그리고 지상의 여러 가지를 인간에게 적합하게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정신적인 피조물’이라고 보았고 커드워스는  우리 안에 신의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현존이 증명된다고 주장한다. 신의 관념은 일관성을 지니고 실제적이거나 실재를 필요로하기 때문에 신은 반드시 현존한다는 것이다.

2-2.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본유 관념의 존재를 믿었다. 이들에 따르면 정신은 텅 빈 백지가 아니라 닫혀있는 책과 같다. 감각은 단지 이 책을 여는 역할을 할 뿐이다. 모어는 정신 안에 다양한 본유관념이 들어있다고 보았는데 이 중에는 근본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도덕원리들도 포함되어있다. 커드워스는 정의와 불의가 단지 인간이 맺은 계약의 결과로 등장한다는 홉스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의 삶과 죽음의 권한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를 통치자에게 양도할 법 따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근본적인 도덕 원리들의 근거를 설명하면서 데카르트와 의견을 달리한다. 커드워스는 도덕을 비롯한 다른 영원한 진리들이 신의 전능한 의지에 의존하기에 원리상 변화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덕과 신성함은 신이 이들을 사랑하여 선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선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오직 그 자체로 선하기 때문에 신은 이들을 사랑할 뿐이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물체의 세계에 대한 데카르트의 설명을 접한 후 그와 더욱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과학의 새로운 발전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현상을 기계론적인 운동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부했다. 이들은 데카르트와 달리 동물도 의식과 감각적 영혼을 지닌다고 믿었으며 심지어 낙하 운동을 설명할 때에도 비물질적인 원리의 작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신이 모든 것을 직접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신이 물리적 세계에 일종의 매개체로서 규칙적이고 목적론적으로 작용하는, 세계 영혼과 유사한 ‘균형 잡힌 세계를 형성하는’ 임무를 맡겼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데카르트와 같이 목적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기계론적인 유신론자’에 지나지 않고 홉스같은 유물론자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