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피노자의 체계에서 인식론은 로크의 체계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미묘한 특성을 드러낸다. 초기 저술인 <<지성개선론>>에서 스피노자는 지식 또는 지각을 네 단계로 분류한다. 그 단계는 소문에 의한 지식, 엄밀하지 않은 경험으로부터의 지식, 다른 사물의 본질로부터 추론된, 어떤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지식이지만 그리 적절하지 않은 종류의 지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물의 본질에 의해서 인식되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네 번째 종류의 지식이 사물을 적절하고 오류가 없이 파악하도록 이끄는 유일한 지식이다. 비록 스피노자가 이런 형태의 지식을 모두 지각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순수한 감각적 지각 자체는 지식의 종류 중 하나로 포함되지 않는다.
- 후기 저술인 <<에티카>>에서 스피노자는 소문에 의한 지식을 제외한 세 종류로 지식을 분류한다. 이 세 종류의 지식은 이른바 상상적 지식, 이성적 지식 그리고 직관적 지식이다.
- 데카르트나 로크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지식을 우리 정신 안의 관념과 관련해서 설명하며, 또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관념’이라는 용어 안에 개념과 명제를 모두 포함시킨다. 그는 이런 종류의 개념과 명제를 서로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스피노자가 ‘X의 관념’이라고 말할 때 자주 일종의 모호함이 발견된다. X의 관념은 X가 지니는 관념인가 아니면 그 내용이 X인 관념인가? 스피노자가 신의 관념이 신의 본질과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말할 때 그는 분명히 신이 소유한 관념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이처럼 명확하지는 않다.
- 스피노자의 주장에 따르면 만일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우리가 그것을 인식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사실도 인식한다. 그는 철학자들이 지식을 단순한 믿음과 구별해 주는 확실성을 갖는 기준을 찾으려 하는 것이 잘못된 철학적 목표라고 말한다. 우리가 인식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식해야만 한다. 참된 관념을 지닌 사람은 이 자체만으로 자신이 참된 관념을 지녔다는 사실 또한 인식하며, 관념이 참임을 의심할 수 없다. ‘우리의 인식은 오직 실제로 대상에 대응하는 관념을 지닌다는 사실로부터 생긴다. 바꾸어 말하면 진리에는 그 자체의 기준이 있다’라고 철학자들의 확신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 지식의 서로 다른 단계는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니는 관념들에 대응한다. 어떤 관념이 적합하지 않으면서도 참일 수 있고, 또한 명석, 판명하지 않으면서도 적합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일반 관념의 근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인용”
- 모든 사람들은 사물의 속성을 적합하게 반영하는, 연장성과 운동의 관념과 같은 관념들을 공통적으로 지닌다. 스피노자는 적합한 관념을 ‘대상과의 관련이 없이 오직 그 자체만으로 고려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속성 또는 본질적 특징을 지니는 관념’이라고 정의한다. 이 적합한 관념들은 서로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필연적 진리의 체계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성적 지식이며 두 번째 종류의 지식을 형성한다. 이로써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지식은 모두 참되고 적합한 관념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 세 번째 종류인 직관적 지식은 가장 높은 수준의 지식이라는 점은 명백하지만 이것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성이 단계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분명한 반면 직관은 사물의 보편적 특징과 그것이 세계 전체의 인과적 질서에서 차지하는 위치까지 단번에 파악한다. ‘이런 종류의 지식은 신의 어떤 속성이 지닌 형식적 본질에 대한 적합한 관념으로부터 사물의 본질에 관한 적합한 지식으로 나아간다’.
- 스피노자의 인식론이 답해야 할 마지막 질문이 하나 남아 있다. 그는 그 어떤 관념의 내용에도 그것이 참이라는 점 이외에 다른 어떤 적극적인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떤 관념이 거짓이 될 수 있는 어떤 적극적인 요소도 그 관념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류는 도대체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의지와 지성을 서로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데카르트와 같은 방식의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는 오류란 전혀 적극적인 것이 아니며, 반드시 존재해야 할 어떤 관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대답한다. 판단의 유보와 관련하여 스피노자는 그것이 가능하기는 하나 의지의 어떤 자유로운 작용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꿈을 꿀 경우 심지어 꿈에서조차도 판단을 유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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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혼란과 통치권에 관한 홉스의 견해
1. 사회적 혼란과 통치권에 관한 홉스의 견해
1-1.수아레스와 그로티우스는 여러 나라들이 서로 합의한 도덕적 체계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하는 자연적 질서를 유지하려면 때로는 전쟁도 필요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17세기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인 홉스는 정치의 본질에 대하여 이와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견해를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자유로운 개인들이 모인 자연 상태에서는 오직 전쟁이 계속 이어질 뿐이며, 도덕철학자의 임무는 정부에 복종함으로써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려는 개인들 사이의 합의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홉스의 대표적 저술 《리바이어던》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
홉스는 인류의 자연 상태를 매우 비관적인 모습으로 묘사한다. 본성상 인간은 정신적, 육체적 능력이 대체로 평등하지만 목적을 성취하려는 희망도 대체로 평등하기 때문에 서로 적이 된다고 보았다. 각 개인은 경쟁하는 상대방을 불신하며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한다. 개인은 동료들로부터 칭찬받기를 원하면서 그들이 자신을 경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원한을 품는다. ‘인간은 본성 안에서 우리를 서로 다투게 만드는 주요 원인 세 가지가 발견되는데 첫째는 경쟁, 둘째는 불신, 셋째는 공명심이다’
사람들을 위압하는 공통 권력이 없는 한 그리고 그런 권력이 형성되기 이전까지 사람들은 재화와 권력, 명예를 둘러싼 끊임없는 다툼과 통제할 수 없는 경쟁에 휘말린다. 이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벌이는 전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구 표면에 관한 지식, 시간의 측정, 예술이나 학문이 전혀 성립될 수 없으며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이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짧다는 점이다.”
어떤 독자들은 이런 묘사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전 세계가 이런 상황은 아닐지라도 당시의 아메리카는 바로 이런 전쟁 상태에 놓여있었다. 홉스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여행할 때 무장을 하고 여러 사람이 함께 가는 편을 선호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문단속을 한다. 집에 있을 때조차도 금고문을 단단히 잠가둔다. 우리 사회에 엄연히 법률이 있으며 치안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렇게 한다.’
1-2. 홉스는 자연의 전쟁 상태를 묘사하면서 인간이 어떤 사악한 본성 때문에 이런 상태에 빠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옳고 그름 또는 정의와 불의 개념이 설 자리가 없다. ‘공통의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법이 성립할 수 없다. 법이 없는 곳에서는 불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과 기만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두 가지 기본적인 덕이다.’ 마찬가지로 자연상태에서는 재산이나 소유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누구든지 무언가를 얻고 지킬 수 있는 한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여긴다.’
철학자들은 습관적으로 자연법(lex naturalis)와 자연권(ius naturalis)을 함께 언급한다. 하지만 홉스는 권과 권리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권리란 무언가를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자유며 법이란 무언가를 반드시 하거나 하지 말라는 명령이라고 말한다. 엄밀한 자연상태에서는 법도 권리도 존재하지 않으나 ‘자연법’은 존재한다. 이는 합리적인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우너리, 즉 생존의 기회를 최대화하려는 처방이다. 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원하는 자연적 필연성이 존재하는 한 각 개인은 모든 능력을 다하여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보존할 자연권을 지닌다.
인간들이 이런 권리를 유지하는 한 어느 누구도 자연 상태에서의 삶을 안전하게 영위할 수 없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간은 자연권이 부여한 무제한의 자유 중 일부를 포기하고 결국 다른 사람들과 같은 수준의 자유를 누리는 양보를 받아들인다. 이를 통해 자연법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기방어 권리를 제외한 자신의 모든 권리를 중아 권력에게 양도하며 중앙 권력은 처벌이라는 제재를 통하여 자연법의 준수를 강제할 수 있게 된다,
1-3. 다른 여러 자연법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제 삼의 자연법이다. 홉스는 약속(convert)를 특별한 형태의 계약(contract)으로 여기는데 계약이란 상호이익을 고려하여 자신의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홉스는 제 삼의 자연법이 없다면 ‘약속은 헛되고 공허한 말에 그칠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한 모든 사람의 권리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전쟁 상태에 머물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정의와 불의의 개념이 성립하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 또한 이 자연법이다. 왜냐하면 불의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며, 불의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것은 정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처럼 약속의 당사자들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약속은 구속력을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정의의 개념에 앞서 불의의 개념이 먼저 확립되어야하며, 약속을 어김으로써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익보다 훨씬 더 큰 처벌의 공포를 강조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약속을 이행하도록 만드는 어떤 강제적 권력이 존재해야한다.’국가가 확립도기 이전에는 이런 권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권력의 칼이 없다면 약속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할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
공통의 권력을 형성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 또는 하나의 합의체에 양도하는 것인데, 이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의 의지와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의 의지로 환원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중앙의 권력은 다수의 사람들 전체를 대표해 국가라고 불리는 하나의 인격으로 통합된다. ‘이리하여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이 탄생한다. 아니 좀 더 경건하게 말하자면 영원불멸하는 신의 가호 아래 인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지상의 신이 탄생하는 것이다.’
1-4. 하지만 홉스의 이런 설명에는 일종의 악순환이 포함되는 듯하다. 그는 약속을 강제하는 통치자가 없다면 어떤 약속도 구속력을 지닐 수 없다고 말하고 구속력을 지니는 계약을 통하여 권력을 양도받지 않는 한 어떤 통치자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두 주장은 계약과 통치자가 동시에 등장하지 않으면 해결되기 어렵다.
홉스는 자신이 왕정주의자라는 점을 일부러 숨기려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정치이론에서 통치자가 한 개인인지 아니면 집합체인지는 의도적으로 분명히 밝히지 않은 채 남겨둔다. 그는 통치 체제가 군주정이든 귀족정, 민주정이든 통치권은 절대적이어야한다고 주장한다.
홉스에 따르면 통치자는 모든 법률과 재산권의 근원이다. 그는 국가를 방어하는데 어떤 수단이 필요한지를 결정하며,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지 아니면 평화를 유지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그의 고유권한이다. 공직자, 공무원 임명, 처벌뿐만 아니라 통치자는 종교 문제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데 어떤 책을 성서로 받아들일지, 해석할지 결정하는 것은 성직자나 장로가 아닌 통치자라고 주장한다.
1-5. 그렇다면 홉스가 생각한 통치자 아래에서 국민에게는 어떤 자유가 있는가? 자유란 단지 법에 저촉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국민은 통치자가 법을 통하여 규제하지 않은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하지만 국민에게 통치자에게 명령에 따르지 않을 자유가 있는가?이에 대하여 홉스는 ‘결코 없다’고 대답하리라고 예상하지만 실제로 그는 국민들이 통치자에게 불복종할 자유를 상당히 인정한다.
“만일 통치자가 어떤 사람에게 (설령 그가 정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손상하거나, 불구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또는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지 말라거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음식이나 공기, 약품 또는 그 외의 어떤 것이라도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그 사람은 이런 명령에 따르지 않을 자유를 지닌다. ‘
국민은 자신의 유죄를 자백하고 강요당할 수 없으며, 통치자의 명령을 받더라도 군인으로 전쟁에 나가 싸우지 않아도 된다. 홉스는 남성도 여성과 같이 겁이 많다는 이유로 참전을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도망치는 게 비겁할지는 몰라도 부당한 행위는 아니다. 참전이 의무로 부과되는 때는 위급한 상황뿐이다. 마지막으로 ‘통치자에 대한 국민의 의무는 통치자의 권력이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한에서만 유지되며,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어야한다.’ 따라서 만일 통치자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자신의 주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통치자에 대한 의무 또한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1-6. 《리바이어던》에 등장하는 국가에 관한 이론은 무척 독창적이며 강력한 지적 체계를 드러내며 그것이 지닌 구조는 홉스 당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여러 정치철학자의 저술에 크게 반영되었다. 그의 체계는 비록 절대적인 통치권을 강조하지만 전체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오직 국민들을 위해서 존재하며 그 반대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홉스는 통치자의 정당성을 신의 권위에 조금도 호소하지 않고, 더욱이 인간 본성의 궁극적 원인이라는 신의 역할에도 전혀 의존하지 않고 오직 국민들 사이의 계약으로부터 직접 이끌어 낸 최초의 철학자이다.
흄
1.흄
1-1. 버클리가 더블린에서 경험론의 형이상학을 세상에 선보인 직후에 경험론의 원칙을 형이상학에 반대하는 극단까지 밀고 나간 철학자가 에든버러(Edinburgh)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흄(David Hume)이다. 그는 1711년 스코틀랜드 작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에든버러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과 사랑에 빠진다. 뒤이어 법률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는데 포기했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철학과 폭넓은 배움을 추구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모든 일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혐오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또한 1734년부터 37년까지 양주의 라 플레슈라는 이전에 데카르트가 예수회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했던 곳에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첫 번째 저술이자 가장 중요한 저술인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썼다. 출판된 당시 책은 많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가 세상에 떠난 후 이 책은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20세기 영국 경험론자들은 이를 영어로 쓴 철학 저술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격찬했다.
2-1. «논고»는 모두 세권으로 구성되는데 ‘지성에 관하여’, ‘정념에 관하여’ 는 1739년에, ‘도덕에 관하여’는 1740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의 목표는 초판의 부제에 언급된 대로 실험적인 추론 방법을 도덕적 주제들에 도입하려는 시도이다. 그는 실험적 방법을 도덕적 주제들에 적용함으로써 뉴턴이 물리학에서 행한 바를 자신은 심리학에서 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관념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고 지금까지 형이상학자들이 잘못 해석하여 혼란스럽게 된 인과성이나 의무 등의 개념을 자신이 처음으로 확실히 해명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학문은 우리에게 이익을 준다. 이제 우리는 지식의 변방에서 작은 요새를 지키는 대신 ‘이런 학문들의 중심 또는 중앙을 향하여, 인간 본성 자체를 향하여 직접 행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2. «논고»의 1권은 정신의 내용물을 경험론적으로 분류하는 작업과 더불어 시작된다. 여기서 로크 및 버클리 인식론의 근거가 많이 등장하지만 흄은 지각을 오직 인상과 관념으로 나눈다. 인상은 관념보다 강렬하며 생생하고 감각과 감정을 포함한다. 반면 관념은 사고와 추런을 포함한다. 그는 기억과 상상력의 관념 및 관념들 사이의 연상을 상세히 다루면서 로크의 추상관념에 대한 버클리의 비판을 더욱 강화한다.
«논고»의 1권 2부에서 그는 공간과 시간의 관념을 다룬 후 ‘지식과 개연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절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한다. 그는 감각이 직접 전하는 바를 넘어서서 확장된 모든 지식은 원인과 결과의 관념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과거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또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 추측하는 일은 모두 이 두 관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두 관념의 근원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관성의 관념이 본래 대상에 속하는 그 어떤 성질로 부터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서로 전혀 다른 종류의 대상들이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신 이 대상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아야한다. 그러면 우리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근접해서 발생하고 원인이 시간상 결과에 앞선다는 점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원인과 결과를 선언하기에 충분치않다.
그는 몇 페이지에 걸쳐 뛰어난 논증을 펼친 후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의 추론이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연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연결이 우리가 원인으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추론에 의존한다. 즉 원인과 결과 사이에 필연적 연결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믿음은 추론이 아니라 습관의 산물이다.
2-3. «논고» 2권에서 정념 또는 감정에 관하여 탐구함으로써 흄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행보를 따른다. 하지만 이 주제는 합리론 철학자들보다 흄에게 더 큰 중요성을 지니는데 왜냐하면 흄은 합리론자들이 이성의 활동으로 여겼던 수많은 작용을 정념의 역할로 돌리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정념은 특별한 종류의 인상이다. 지각을 인상과 관념으로 나눈 후에 흄은 다시 인상을 원초적 인상과 이차적 인상으로 분류한다. 감각적 인상과 육체적 쾌락과 고통은 원초적 인상인 반면 정념은 이차적 인상에 해달되는데 이것이 바로 2권의 주제를 형성한다. 그에 따르면 이성 자체는 어떤 행위도 산출할 수 없다. 모든 자발적인 행위는 정념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된다. 이성은 결코 정념을 이길 수 없으며 오직 상반되는 정념만이 정념을 이긴다. ‘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또한 노예여만 한다. 그리고 이성은 정념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임무도 탐내서는 안된다’
2권 끝부분에서 우리는 흄의 윤리 체계가 다른 전통적인 도덕철학과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예상한다. 이성은 우리를 행위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도덕 판단을 이성의 산물일 수 없다. 도덕판단의 목표는 오직 우리의 행위를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오직 정념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우리의 정념에 원인을 제공하지도 평가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해야만 한다’는 ‘이다’로부터 도출될 수 없으며 우리가 이끌어 내야 하는 결론, 즉 선과 악, 옮고 그름 사이의 구별은 이성이 아니라 도덕감의 산물이다.
2-4. 이를 기초로 삼아 흄은 «논고» 3권 2부에서 정의와 불의에 관해 논의하며, 자비심이나 정신의 위대함 같은 인간 본성의 덕을 다룬다. 그는 도덕적 구별의 주요 원천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sympathy)의 감정이라고 결론 짓는다. 예컨대 정의가 칭찬받는 까닭은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기 때문이지만 만약 공감의 감정을 통해 공공의 이익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 ‘덕은 오직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오직 그 목적이 가치있을 경우에만 수단 또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행복은 오직 공감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홉스
1. 홉스
1-1. 1641년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고 평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인물 중에는 당대 최고의 영국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도 포함되었다. 홉스는 영국 함대가 스페인의 무적함대(Spanish Armada)를 격파한 1588년에 태어났기에 이런 요청을 받을 때는 53세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후 캐번디시 가문의 가정교사와 베이컨의 서기로 일했다. 1629년 투키디데스(Thucydides)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데카르트 친구인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메르센 신부는 그를 ‘철학의 모든 분야에 능통한 탁월한 학자’라고 기록했다. 1640년 홉스는 《자연법과 정치적인 법의 기초》를 영어로 출판하면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이 구성한 사회에 대한 그의 핵심적인 철학 원리들을 잘 드러냈다. 그 해 그는 장기 의회(Long Parliament)의 활동으로 내전을 예상하고 파리로 도피해 10년 이상 그곳에서 후에 왕위에 오르는 찰스 2세의 개인 교사로 지냈다. 그 동안 그는 《시민론》를 출판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상당한 명성을 그에게 안겨다주었다.
1-2.데카르트에 대한 홉스의 평가를 보면 홉스가 《성찰》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음이 드러난다. 이 두 철학자는 전통적으로 서로 정반대되는 철학의 양극단에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사실상 이 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예를 들어, 이 둘은 모두 수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홉스는 데카르트의 해석 기하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에 대해 ‘정합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묘하게도 말년에 홉스는 기하학 연구에 진지하게 몰두하며 옥스퍼드 수학 교수들과 몇 년 동안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외에도 데카르트와 홉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를 경멸했고 당시의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판을 치는 현실을 비난했다. 또한 둘은 한창 때를 망명 생활로 보냈으며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둘 다 스튜어트 왕가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이들은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을 경멸하며 모국어로 글쓰는 능력이 탁월해 전문 학술서뿐만 아니라 대중을 위한 책도 썼다.
이 두 철학자가 서로 일치된 의견을 보인,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논점은 이들이 각각 물질세계는 오직 운동의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확신한 점이다. 홉스는 ‘일반적인 사물의 원인은 저절로 드러나거나 아니면 사물의 본성을 통해 알려진다. 따라서 어떤 방법도 전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물은 모두 오직 하나의 보편적인 원인, 바로 운동이라는 원인을 갖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홉스는 데카르트와 같이 색과 소리 같은 제이성질과 같은 모든 우연적 속성들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점을 부정하며 광학이 감각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데 같은 의견을 보인다.
1-3.홉스는 데카르트의 철학의 절반, 즉 물체에 관한 철학과는 상당히 유사한 견해를 보이지만 나머지 절반, 즉 정신에 관한 철학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사실 홉스는 데카르트가 생각한 의미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홉스는 연장성을 지니지 않고 운동하지 않는 비물질적인 실체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천사든 신이든 비물질적인 정신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홉스의 유물론에 대해 신의 존재를 그가 어떻게 여겼는지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인간이 정신과 물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된다는 이원론을 확실하게 거부했다는 점이다.
데카르와 홉스는 수많은 철학적 태도와 선입견들을 서로 공유했지만 홉스는 유물론을 선택함으로써 데카르트에 반대하는 대표적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유물론과 이원론이라는 형이상학적 차이에 더하여 철학사가들은 이 둘을 인식론에서 반대되는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의 창시자로 여긴다. 사실 이 두 학파의 차이는 표면상 드러나는 것만큼 크지 않다.
1-4. 홉스는 데카르트보다 거의 30년을 더 살았지만 1650년 데카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프랑스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파리에서 신교도로 사는 것과 그를 구교도로 개종시키려는 메르센의 시도에 큰 불편함을 느꼈다. 또한 큰 병을 앓으면서 영국 성공회이ㅡ 의식에 따르겠다고 고집하기도 하면서 파리 마지막 해에 철학사에 영원히 남게 될 《리바이어던 또는 교회 국가 및 시민 국가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권력》을 썼다.
어떤 국가 조직도 없는 자연 상태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이런 자연 상태는 오직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에 지나지 않음을 보임으로써 홉스는 사람들이 합리적인 자기이익의 원리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무제한의 자유를 포기하고 결국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부과되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제한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자기 이익의 원리에 따라 사람들은 자기방어의 권리를 제외한 다른 권리들을 중앙의 권력에게 양도함으로써 이 권력이 처벌을 통하여 법률을 강요할 수 있도록 만든다. 여기서 맺은 사람들이 맺은 계약을 통해 최고 통치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계약에 참가하지 않으므로 위반할 계약 자체가 없다. 이런 통치자는 법률과 재산권의 근원이 되며, 국가를 구성하기 위한 최초의 계약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서로 맺은 개별적인 계약을 지키도록 강제한다.
1-5.《리바이어던》은 1651년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이 저술에는 절대 왕정을 세련되게 지지하고 있지만 당시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찰스 2세는 이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당시 찰스 2세가 궁정에서 추방당하고 홉스의 구교도 친구들도 세상을 떠나자 그는 영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영국은 찰스 1세의 처형 이후 호국경(Protector) 크롬웰(Oliver Cromwell)의 통치 아래 있었다.
크롬웰의 통치 기간 동안 홉스는 조용히 런던에 머물면서 정치철학에 관한 어떠한 저술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홉스는 자연철학에 관한《물체론》을 1655년 라틴어, 1656년 영어로 출판하고 밀턴의 《실낙원》에 등장하는 구절에 대해 브램홀 주교(Bishop Bramhall of Derry)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658년 홉스는 《인간론》을 라틴어로 출판했는데 이 또한 《시민론》과 마찬가지로 《법의 기초》에 등장했던 몇몇 사상들을 영어권 외부의 독자를 위해 다시 쓴 것이었다.
홉스는 1660년 찰스 2세가 영국으로 돌아와 왕위에 복귀하면서 궁정의 환영과 연금을 받게되었지만 다른 신하들로부터는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리바이어던》은 심각한 의혹의 대상이 되어 몇몇 주교들이 그를 이교도의 죄를 물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다.
1660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홉스는 런던과 체츠워스(Chatsworth), 하드윅(Hardwick) 등지의 데번셔(Devonshire) 백작 가문의 저택에 주로 머물렀다. 그는 더 이상 철학에 관한 저술을 쓰지 않고 《일리아스》《오디세이》번역에 몰두하면서 《베헤못》이라는 영국 내전의 역사에 관한 저술을 출판하려했지만 왕의 만류로 포기했다. 그는 1679년 91세의 나이로 하드윅 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말년에 파킨슨병에 걸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기찬 삶을 유지했다고 한다.
1-6. 홉스가 철학사에서 명성이 높은 까닭은 주로 그가 정치철학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언어철학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언어는 우리를 야수와 구별해주며, 학문을 추구할 수 있게 한다고 역설한다. 언어의 목적은 우리의 사고 과정을 연속된 단어로 바꾸는 것인데, 언어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첫째, 과거와 현재 모든 것들의 원인, 결과를 기록하는데 사용한다. 둘째, 얻은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상의하며 가르치는데 사용된다. 셋째, 우리의 의도와 목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 서로 도울 수 있게 사용되며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데 사용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언어의 네 가지 효용과 대비되는 네 가지 악용의 사례도 있는데 이런 악용을 피하려면 대단한 수고가 필요하다. ‘언어는 마치 돈과 같다. 현명한 사람들은 오직 계산을 할 때만 이를 적절히 사용하지만 바보들은 이를 무턱대고 써버린다’
홉스는 철저한 보편명목론자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단어들은 이름뿐인데 이름은 오직 개체들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름이 어떤 형태를 취하던 간에 그것은 하나 또는 다수의 개체 이외의 어떤 것도 결코 지시할 수 없다. ‘인간’과 같은 보편적인 이름은 세계 안의 어떤 보편적인 사물이나 우리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체들을 지시할 뿐이다. ‘이 세계에서 이름을 제외하면 보편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이름은 그것에 속하는 모든 개별적인 개체들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홉스는 이름들이 한데 모여 문장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만일 ‘소크라테스는 정의롭다’라고 말하면 여기서 ‘정의롭다’와 ‘소크라테스’와의 관계는 이 단어의 관계와 동일하다. 또한 문장 안에서 두 이름이 모두 동일한 것을 지시할 경우 그 문장은 참이 되는 반면 두 이름이 동일한 것을 지시하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
홉스의 두 이름 이론은 소박한 형태의 의미론에 해당하지만 이에 대하여 이미 중세부터 등장했고 특히 19세기 프레게(Gottlob Frege)의 저술을 통해서 제기된 심각한 논리적 비판을 견디지 못했다. 홉스식의 이론은 중세의 오컴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미숙했지만 그의 이론은 영국 경험론자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그들 자신이 오컴과 홉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2.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
2-1. 17세기 중반 홉스 및 데카르트와 다른 견해를 보이는 여섯 명의 영국철학자들이 등장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커드워스(Ralph Cudworth, 1617~88)를 비롯한 다섯 명은 케임브리지의 엠마누엘 칼리지를 졸업했으며, 다른 한명인 모어(Henry More, 1614~87)는 크라이스트 칼리지를 졸업했는데 커드워스는 이 칼리지에서 30년 동안 교수생활을 하기도 했다. 추종자들은 이 들을 존경, 찬양하며 이 그룹을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케임브리지 출신이었지만 당시 영국 내전 동안 케임브리지 지역과 대학을 지배했던 청교도주의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이들은 칼뱅의 예정은총설을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이 지닌 장점을 주장했다. 하지만 무신론자에게까지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는데 특히 이들은 홉스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홉스의 유물론이 결국 무신론에 이르리라고 본 것이다. 또한 이들은 찰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 성공회를 중심으로한 계층 질서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했으며 결국 찰스 1세의 퇴위와 처형으로 이어지게 했다. 그들은 ‘주교 없이는 왕도 없다’는 정치 구호를 ‘정신 없이는 신도 없다’고 외치면서 유물론자인 동시에 유신론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데카르트 편에 서서 홉스에 반대하는 특히 정신과 물체의 구별을 강조했다. 모어의《무신론에 대한 해독제》《영혼의 불멸성》, 커드워스의《우주의 진정하한 지적 체계》 등의 저술을 통해 이들이 인간 영혼의 불멸성과 정신적인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데 얼마나 몰두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모어는 인간이 ‘감각과 이성 그리고 지상의 여러 가지를 인간에게 적합하게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정신적인 피조물’이라고 보았고 커드워스는 우리 안에 신의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현존이 증명된다고 주장한다. 신의 관념은 일관성을 지니고 실제적이거나 실재를 필요로하기 때문에 신은 반드시 현존한다는 것이다.
2-2.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본유 관념의 존재를 믿었다. 이들에 따르면 정신은 텅 빈 백지가 아니라 닫혀있는 책과 같다. 감각은 단지 이 책을 여는 역할을 할 뿐이다. 모어는 정신 안에 다양한 본유관념이 들어있다고 보았는데 이 중에는 근본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도덕원리들도 포함되어있다. 커드워스는 정의와 불의가 단지 인간이 맺은 계약의 결과로 등장한다는 홉스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의 삶과 죽음의 권한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를 통치자에게 양도할 법 따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근본적인 도덕 원리들의 근거를 설명하면서 데카르트와 의견을 달리한다. 커드워스는 도덕을 비롯한 다른 영원한 진리들이 신의 전능한 의지에 의존하기에 원리상 변화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덕과 신성함은 신이 이들을 사랑하여 선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선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오직 그 자체로 선하기 때문에 신은 이들을 사랑할 뿐이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물체의 세계에 대한 데카르트의 설명을 접한 후 그와 더욱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과학의 새로운 발전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현상을 기계론적인 운동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부했다. 이들은 데카르트와 달리 동물도 의식과 감각적 영혼을 지닌다고 믿었으며 심지어 낙하 운동을 설명할 때에도 비물질적인 원리의 작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신이 모든 것을 직접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신이 물리적 세계에 일종의 매개체로서 규칙적이고 목적론적으로 작용하는, 세계 영혼과 유사한 ‘균형 잡힌 세계를 형성하는’ 임무를 맡겼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데카르트와 같이 목적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기계론적인 유신론자’에 지나지 않고 홉스같은 유물론자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보았다.
브루노
1-1. 16세기 후반, 철학자 브루노(Giodano Bruno, 1548~1600)는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나폴리에서 태어난 그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는데(1565년), 이단설의 혐의를 받고 교단에서 추방된다(1576년). 그는 도피 생활 중 제네바에서 칼뱅주의자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는 국왕 앙리 3세가 눈여겨봤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고 툴루즈와 파리에서 연구와 강의를 했다. 브루노의 첫 주요 저술은 「관념의 그림자에 관하여(On the Shadows of Ideas)」로,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 체계를 기억법에 관한 실용적인 충고와 결합시킨다. 그는 인간의 관념이 가장 낮은 단계이며 신의 정신 안에서 통일성을 형성하는 신성한 관념이 가장 높은 단계라고, 즉 관념들 사이에서 위계질서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신성한 관념은 그 자체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자연은 곧 신이 만든 보편적인 결과)을 통해서 표현된다. 지상 세계의 모습보다는 천상 세계의 모습이 신과 가깝다. 브루노는 우리가 천상 세계를 떠올리게끔 우리의 지식을 조직화하기를 원한다면, 황도를 이루는 열두 개의 별자리에 따라 정신적인 사고를 배열해야 한다고 보았다.
1-2. 1583년에 브루노는 잉글랜드로 넘어와 옥스퍼드에서 몇 개의 강의를 맡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그는 폭넓은 철학적 관심과 언변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옥스퍼드의 현학자를 경멸하는 내용을 담은 대화편들을 썼는데, 그 첫 작품 「재의 수요일 성찬」이 1584년에 출판되었다. 사람들이 브루노가 런던과 프랑스, 잉글랜드를 위한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이중간첩 활동을 하면서 이 대화편들을 썼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브루노의 대화편은 읽기가 힘들다. 그의 글은 바그너의 작품에 등장하는 신들이나 톨킨이 만든 전능한 힘을 가진 등장인물과 같은 존재들이 난무한다. 브루노는 그 당시 유행했던 헤르메스 교단의 교리를 반영하기도 했다. 브루노는 헤르메스 교단이 언젠가 기독교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루노의 여러 대화편에서 제시된 체계에 따르면, 우리가 관찰하는 현상은 자연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 자연을 하나의 생명체로 만드는 세계영혼이 낳은 결과이다. 자연계는 무한성을 가지고 있어 어떤 경계, 표면, 한계가 없다. 하지만 이 세계의 무한성은 신의 무한성과 다르다. 왜냐하면 세계는 무한하지 않은 부분들로 구성되는 반면, 신은 전체 세계에서도 완전히 내재하고 그 각각의 부분들에도 완전히 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브루노의 견해를 범신론과 구별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브루노는 신은 자연을 만드는 자연(natura naturans)이고 우주는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natura naturata)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으로는 그 관계를 제대로 해명되지 않는다.
1-3. 역사가와 과학자들은 브루노의 체계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 특징에 주목했다. 첫 째, 브루노가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채택했다는 점이고, 둘 째, 그가 다수의 우주를 요청한다는 점이다. 브루노는 지구가 태양을 둘레를 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는데,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더 극적인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지구나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우리가 보는 태양은 수많은 별들 중 하나일 뿐, 무한한 우주 공간에는 수없이 많은 태양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모든 별들의 위치가 상대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태양도 다른 별도 우주의 중심일 수 없다. 우리의 지구와 태양계는 어떤 고유한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우주 안에는 우리와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태양계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데, 현재 상황은 유일한 무한한 존재가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며, 이 존재의 영혼이 세계영혼이다. 우주 안에 각각의 지적인 존재는 의식적이고 불멸하는 원자로, 그 자체로 창조 과정 전체를 반영한다. 신과 자연을 동일시한 브루노의 생각은 스피노자를 예견하게 하고, 이성적 원자에 관한 그의 설명은 라이프니츠를 예견하게 한다.
1-4. 헤르메스 교단을 지지한 브루노의 태도와 여러 우주가 존재한다는 그의 이론은, 신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육체로 태어났고 명확한 신의 계시라는 정통 교리를 가진 기독교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브루노는 잉글랜드를 떠난 후 잠시 비텐베르크에서 루터교신자로 인정받았고, 1591년에 취리히에서 강의도 했다. 1592년 그는 베네치아 총독의 초대로 그곳에 가 바로 종교 재판소 감옥에 갇혔다. 그 다음 해 로마의 종교 재판소 감옥으로 옮겨진 후 약 7년에 걸친 길고 지루한 재판을 거쳐 1600년 이단의 죄로 로마의 꽃의 광장(Campo dei Fiori)에서 화형을 당한다. 지금 그곳에는 그의 동상이 서있다고 한다. 브루노가 자신의 저술에서 표현한 사상은 기독교의 정통성에 어긋난다. 그의 재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일관되게 자신의 사상을 옹호했고, 이 때문에 이단 심문관이 브루노를 이단자라고 판결하는데 꽤 오랜 기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다수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이론이 오늘날 우주과학자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유행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브루노를 과학의 순교자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브루노의 사상은 관찰과 실험을 통한 것이 아닌, 신비주의 전통 및 경험과 무관한 철학적 사변에 기초하였다. 그리고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이단의 판결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마법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이단의 판결을 받았다.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
1. 인문주의
1-1 이른 바 1511년부터 1520년에 이르는 10년 동안은 가히 르네상스의 정점으로 여길 만하다. 바티칸에선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가 있었고, 피렌체에선 메디치가가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또한 피렌체의 관리였던 마키아벨리는 정치철학의 고전이 된 ≪군주론≫을 써냈다. 이러한 르네상스의 예술과 사상은 북쪽으로 점차 전파되어 독일과 영국에도 이르렀다.
1-2 당대 최고의 학자중 한명인 에라스무스는 헨리8세를 가르쳤고, 영국에서 국왕 다음으로 큰 권력을 차지한 토마스 모어와 같은 집에 머무는 사이였다. 에라스무스와 모어를 중심으로 15세기 이탈리아에 뿌리를 둔 인문주의 사상이 북유럽으로 전파됐다. 하지만 당시 ‘인문주의’라는 것은 종교적 가치를 세속적인 것 인간 중심의 가치로 대체하려는 욕구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에라스무스는 널리 읽힌 종교적 서술들을 쓴 성직자였으며, 모어는 훗날 종교적 믿음 때문에 순교를 하기도 했다. 당시 인문주의들은 오히려 그리스어와 라틴어 고전들은 탐구하는 ‘인문학’이 지닌 가치를 높이 평가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고전 작가들의 문체를 탐구하고 많은 작품을 재발견 했으며, 이러한 작업들은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인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탐구가 예술과 과학을 부흥시키고 기독교의 진리를 정통적으로 파악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 믿었다.
1-3 인문주의자들은 전문적 철학 탐구보다는 문법, 문헌학, 수사학 등을 더 높이 평가했다. 에라스무스와 토마스 모어 둘 모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한 중세철학자들과 달리 플라톤으로 돌아가려 했다. 모어의 경우 플라톤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저술인 ≪유토피아≫에서 재산은 공동으로 소유되며 여성도 남성과 함께 군대에 복무한다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그는 저서에서 플라톤처럼 정치철학 이론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노력했으며,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수단으로 가공의 국가를 예로 들며 이에 관해 상세히 서술했다. 반면 에라스무스는 플라톤을 정치의 인도자로 채택하는 데 회의적이었다. 모어에게 헌정한 그의 저서 ≪우신예찬≫에서 과거 역사를 보면 ‘권력이 취미 삼아 철학을 애호한다고 자처하는 통치자의 손에 들어갔을 경우 국가가 가장 큰 곤경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M, 100). 그러나 그의 다른 저서인 ≪기독교 군주를 위한 가르침≫의 내용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미 발견된 것을 반복한 것과 다른 내용이 없었다. 때문에 그의 저술은 마키아벨리나 모어의 명성을 누리진 못했다.
2. 종교 개혁
2-1 에라스무스의 경우 철학보단 신학에 더 관심을 보였고 사변 신학보단 성서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1516년 새 라틴어 성서를 자신의 주석과 더불어 출판하면서 부록의 형태로 그리스어 성서를 덧붙였다. 그는 그리스어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서슴지 않는 수정도 행했다. ‘말(the Word)이 있었다’에서 ‘말씀(the Saying)이 계셨다’로 바꾼것이 그 예다. 이는 성서를 그리스어로 출판한 첫 사례임과 동시에 16세기에 성서가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는 계기를 제공했는데 1522년 루터(Martin Luther)가 기념비적인 독일어 번역 성서를 출판하는 게 그 시작이었다.
2-2 에라스무스는 한 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이기도 했다. 교황의 특별 허가로 수도원 생활을 그만 두었는데 루터 또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였다. 에라스무스와 마찬가지로 루터도 성서 중 로마인들에게 보낸 바울로의 편지를 깊이 연구했는데, 이를 통해 르네상스 시대 접어들어 카톨릭이 보인 정신과 윤리적 태도를 의문시 하게 된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새로 번역한 성서를 출판한 다음 해인 1517년 루터가 교황을 비난하는 글을 비텐베르크 대학에 내걸었다. 이는 유명한 면죄부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었다.
2-3 에라스무스와 모어도 고위 성직자의 부패에 대해 루터와 생각을 같이 했고 타락과 부패를 비난하는 문서도 출판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경우는, 루터가 가톨릭의 성직과 성레 체계 전반을 비난하고 구원에 필요한 오직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행적에 대한 신앙 또는 믿음이라 주장하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교황의 논쟁을 잠재우려고도 했지만 헛된 시도로 끝났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거부했고 결국 신성 로마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지가 되었다. 교황 레오10세가 죽은 뒤 하드리아노 6세가 즉위했는데 그는 에라스무스의 친구이기도 했다. 하드리아노 6세의 압박에 의해 에라스무스는 루터에 반대하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막상 하드리아노 6세가 세상을 떠난 뒤 였다.
갈릴레오부터 베이컨까지
1.갈릴레오
1-1. 종교 재판에 넘겨져 고통받은 또 한 사람의 이탈리아 철학자 갈릴레오(Galileo Galilei)에게로 눈을 돌리면 브루노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발견한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동시대를 살고 피사(Pisa)에서 태어난 그는 1589년그 곳 대학의 수학교수가 된 뒤 1592년 파도바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18년동안 교수생활을 했다.
갈릴레오는 이미 젊은 시절에 여전히 당대를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브루노처럼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실험과 관찰 결과에 기초하여 비판했다. 그는 성당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등의 운동을 관찰한 후 추가 한번 진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오직 추가 맫라린 줄의 길이에 좌우될 뿐 무게나 진동의 크기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피사의 사탑에서 서로 무게가 다른 쇠공을 떨어뜨려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낙하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잘못임을 증명했다고 전해지는데 실제로 이 실험은 행하지 않았음이 거의 확실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기초한 ‘외부의 원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어떤 물체도 운동하지 않는다’는 원리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저항이 없을 경우 서로 다른 무게의 물체가 주어진 거리를 낙하하는 데 동일한 시간이 걸리고, 두 물체에 작용하는 가속도가 일정하다는 사실을 실제로 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또한 그는 정반대로 운동하는 물체가 마찰과 같은 정반대로 작용하는 힘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 계속 운동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후에 데카르트와 뉴턴이 주장한 관성의 원리들을 예건했다.
1-2. 역학을 다룬 저술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그는 위대한 과학자의 반열에 오르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는 또한 유체 정역학의 분야에서도 중요한 사실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에게 명성과 시련을 안겨 준 것은 천문학 연구였다. 그는 새로 발명한 망원경을 통해 목성을 네 위성을 발견하고 이 위성들을 토스카나의 코시모 2세 대공을 기리는 의미에서 ‘메디치 가문의 별들’이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그는 태양의 흑점,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천체가 투명한 5원소가 아닌 지구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을 묶어 그는 1610년 «별들의 소식»이라는 책을 출판해 코시모 대공에게 헌정한 뒤 토스카나 궁정의 종신 철학자 겸 수학자로 임명되었다.
이런 일 후 그는 금성이 가로지른 행성이 달의 위상과 유사한 위상을 보인다는 사실을 관찰한 후 금성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할 때만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의 행성으로서 자신의 궤도에 따라 운동하는 목성의 주위를 도는 위성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지지하는 강력한 근거로 제공했다.
처음에 그는 이러한 자산의 천문학적 발견을 통해 얻은 결론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데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로마 교무 위원회가 그의 관찰에 대해 공식적인 지적을 한 뒤 부터 그는 태양 중심설에 기초한 여려 견해를 폭넓게 전파했다. 마침내 1613년 그는 태양의 흑점을 다루는 책의 부록에서 자신이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한 성직자는 이를 태양 중심설을 성서에 어긋나는 것으로 비난했다. 이에 갈릴레오는 로마로 가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해명하기로 결정했다.
로마로 떠나기 전 그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예수회 출신의 추기경 벨라르미노(St. Robert Bellarmine)에게 편지를 써서 태양이 운동한다고 말한 성서 저자들의 언급은 단지 관용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벨라르미노는 이 문제를 종교 재판소에서 논의 한 후 태양 중심설이 이단이며 지동성은 오류를 범한 것이라는 의견을 내렸다. 당시 교황 바오로 5세의 훈령에 따라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그에게 어떠한 주장도 옹호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했다.
이렇게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벨라르미노는 당시 가장 위대한 과학자보다도 더욱 건전하게 과학철학을 파악했으며, 갈릴레오는 당시 가장 유명한 신학자보다도 더욱 건전하게 성서를 해석했음을 드러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둘의 대립은 수긍할만하지만 논쟁 과정에서 양측 주장이 서로에게 진정 공정하게 반영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실제로 갈릴레오가 자신의 저술이 정죄 받지 않은 그 후 몇년 동안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다.
1624년 갈릴레오는 다시 한 번 로마로 갔다. 당시 바오로 5세 와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이미 세상을 떠나씅며 우르바누스 8세가 새로 교황의 자리를 오른 뒤였다. 새 교황은 갈릴레오의 천문학적 발견을 열렬히 옹호했으며 갈릴레오는 태양 중심설을 선호하지 않고 두 우주관을 공정하게 다룬다는 조건으로 프롤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을 다룬 체계적인 저술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632년 갈릴레오는 교황청 검열관의 승인을 얻은 후 «두 가지 중요한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를 출판했다. 그러나 책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 중 전통적인 지구 중심설을 옹호하는 심플리키우스의 이름이 ‘바보'(simpleton)라고 해석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갈릴레오는 교황의 분노를 샀다. 결국 1633년 갈릴레오는 로마의 종교재판소에 회부되어 태양 중심설을 취소하지 않으면 고문을 당하리라는 위협을 받았다. 그는 종신형 판결을 받았지만 실제로 감옥에 갇히지 않고 가택 연금 상태로 지냈다.
가택 연금 상태였지만 그 동안 그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당시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 새로 세워진 하버드 대학교에서 초빙교수직을 제안받기도 했다. 그는 점점 눈이 멀어갔지만 저술 활동을 멈추지 않고 필생의 대작인 «새로운 두 과학에 관한 논의와 수학적 증명»을 완성했다. 이 책은 1638년 레이덴에서 출판되었으며 그의 저술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갈릴레오는 브루노를 비롯한 다른 많은 종교 재판소의 죄인들에 비해 훨씬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그에 대한 유죄 판결은 전 유럽에 걸쳐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우선 이탈리아에서 과학적 탐구가 쇠퇴하고 심지어 개신교가 지배한 네덜란드에서조차 데카르트가 자신의 과학적 우주론을 출판하는 것을 몇년씩 미루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교가 갈릴레오에게 잘못을 저질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으나 이미 350년이나 지난 후였다.
2. 베이컨
2-1. 갈릴레오와 같은 시대에 영국에서 활동했던 베이컨(Francis Bacon)은 갈릴레오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반감을 품었지만 과학적 방법의 실천보다는 그것에 대한 이론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1561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후 그레이스 인(Gray’s Inn)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584년 의회에 진출했으며 뒤이어 당시 영국 여황 엘리자베스의 총애를 받던 에섹스 백작(the Earl of Essex) 변호인이 되었다. 하지만 백작이 반역을 일으키자 베이컨은 그를 반역죄로 기소하는데 앞정섰으며 그후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베이컨은 법무 차관이 되었다. 그는 1606년 철학적 저술 중 최초의 것인 «학문의 진보»를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과학의 여러 분야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생애 중 전성기는 1618년 베룰람 경(Lord Verulam)이라는 호칭과 함께 대법관에 임명된 때였다. 동시에 그는 «위대한 부활»이라는 제목의 방대한 저술을 계획했는데 책의 목표는 모든 지식을 각자의 적절한 영역에 배정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직 두 부분만 완성되었는데 하나는 위의 «학문의 진보», 다른 하나는 바로 과학적 방법을 다룬것으로 유명한 «새로운 오르가논»(Novum Organum)이다. 그는 1612년 뇌물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지만 과학과 역사에 관한 저술을 멈추지 않았다. 1626년 런던 북쪽 하이게이트에서 냉동실험을 하다가 심한 감기에 걸려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과학의 순교자라는 이야기까지 듣고 있다.
2-2.베이컨은 «과학의 진보» 2권에서 인간의 학문을 세가지로 나눈다. 이 세 분야는 각각 인간의 지성의 세 부분과 관련되는데, 인간의 기억력은 역사학, 상상력은 시가, 이성은 철학과 관련된다. 그는 시가를 건성으로 다루면서 가장칭찬하는 시가는 바로 이솝 우화와 같은 도덕적 교훈을 전하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반면 역사학과 철학에 대해서는 상당히 길게 언급한다.
먼저 역사학은 자연사와 시만사로 나뉘는데 시민사는(Civil history)는 현재 우리가 역사학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자연사는 더욱 넓은 분야로 다시 세부분으로 나뉜다. ‘정상 경로에 따르는 자연을 다루는 역사학’, ‘정상 경로를 벗어난 다양한 자연을 다루는 역사학’, ‘변화하거나 변형된 자연을 다루는 역사학’으로 나뉜다. 그는 세번째 분과인 ‘만들어진 또는 가공된’ 자연의 역사를 가장 중요하고 유용한 것으로 보면서 이것의 가치가 특히 실용적인 적용과 효용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2-3. 철학을 분류하면서 베이컨은 우선 ‘신에 관한 철학’ 또는 자연 신학을 한쪽으로 제쳐 두면서 이는 무신론을 반박하기에는 충분할 지 몰라도 종교에 관한여 알려주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후에 그는 철학을 자연에 관한 철학과 인간에 관한 철학으로 나눈다. 자연에 관한 철학은 사변적이고 실용적인 영역이 있는데 사변적 영역에는 자연학과 형이상학이 포함되며 , 실천적 영역에는 역학과 마법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역학은 자연학을 현실에 적용한 것이고 마법은 형이상학을 현실에 적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철학을 이렇게 과감하고 도발적인 방법으로 분류한 시도는 겉보기 만큼 명확하지 않으며, 베이컨이 서로 다른 다양한 분야에 붙인 명치은 매우 기묘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그가 분류한 자연적 마법은 연금술이나 점성술 같은 미신적인 억지 주장과는 명백히 분류되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무슨 생각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한 물음은 자연학이 사물의 동력인과 질료인을 다루는 반면 형이상학은 목적인과 형상인을 다룬다는 대목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그는 나침반을 역학이 아니라 마법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배를 운동하게 하는 항해는 자연학이지만 배의 방향을 인도하는 나침반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형이상학’이라는 용어를 다른 학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른 학자들이 말하는 형이상학을 그는 ‘제일철학’, ‘개괄철학’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그는 이 철학이 어떤 분과에서도 배제되지 않는 보편적 원리들을 다루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설을 기초로 자연학과 형이상학을 구별한 시도는 그 자체로 이미 잘못된 것이다. 그의 도식 중 자연적 마법의 영역에서는 목적론이 차지할 공간이 전혀없다. 또한 그는 형상에 대해서 이런 것들이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하여 발견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들을 탐구하는 대신에 글자를 결합하는 형상과 같이 단순한 형상에에 주목해야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기본적 형상들은 갈릴레오가 쓴 수학적 도형이나 기호와 같은 알파벳과 비교할 때 상당히 모호하다.
철학의 또 다른 즁요 분과인 인간에 관한 철학도 자연에 관한 철학과 마찬가지로 두 영역으로 나뉜다. 베이컨은 그 중 하나는 ‘인간을 분리하여’ 고찰하는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통합하여’ 고찰하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후자는 오늘나 사회과학으로 불리는 학문들이다. 다시 이 아래에 속하는 세부분과들을 지정하면서 베이컨은 제멋대로 혼란스럽게 여러 학문들을 나열한다.
그리고 베이컨이 인간의 능력을 분류하면서 처음에 매우 중요한 지위를 부여한 상상력에 대해 그는 단지 다른 능력들의 시중을 드는 하인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상상력이 간혹 이성에 승리를 거두기도 하는데 종교적 믿음의 경우에 이런일이 일어난다,
2-4.베이컨이 인간의 정신을 마치 권력이 분리되어 각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처럼 서로 다른 능력들이 적절하게 배열된 일종의 내적인 사회로 여겼다는 점은 명백하다. 사화과학 자체를 다루면서 그는 이를 다시 우정, 사업, 정부와 관련하는 영역으로 나눈다. 정치의 경우 시민에 관한 철학의 일부인데 인간이 사회생활을 함으로써 얻는 이익을 다루는 영역이다.
베이컨은 분류 작업을 마친 후 스스로 자랑하지만 그가 제시한 방대한 목록에 포함도니 다양한 학문들이 같은 수준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어떤 학문은 완벽한 수준에 도달한 반면 다른 학문은 상당히 부족한 수준이라고 보았다. 그 중 논리학이 가장 수준이 떨어지는 학문이라고 보았는데 논리학의 문제를 과학적 발견에 관한 이론이 없다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논리학의 공백을 메우려는 작업에 착수하여 과학적 탐구를 인도하기 위한 나침반을 제공하려 한다.
탐구 방법에 관해 베이컨은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 모두를 포함한다. 탐구자의 첫번째 임무는 소극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관찰에 선입견을 도입하는 요소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다. 베이컨은 이런 선입견으로 네 가지를 지적하면서 이들을 ‘우상’이라고 불렀다. 이 우상에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있는데 종족의 우상은 경우는 사물을 표면적인 현상으로 판단하려는 성향을 말한다. 동굴의 우상은 객관성을 저해하는 개인의 기질적 특성을 의미하며 시장의 우상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숨어있는 언어의 함정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가식적인 무대 연기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그릇된 철학 체계를 의미한다.
탐구자의 적극적인 임무는 바로 귀납이다. 특수한 경우들을 체계적으로 검토함을써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귀납이 자연의 부적절한 사례에 기초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주의 깊게 체계화된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절차에 관한 규칙을 소개하면서 그는 귀납의 진정한 역할은 현상 X의 형상을 설명하는 후보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시작할 때 드러난다고 보았다. 귀납의 성공적인 후보가 되려면 X가 발생할때 나타나는 성질을 나타내야하며 동시에 X가 발생할 때 나타나지 않는 성질을 나타내지 않아야한다.
그러나 그는 목표로 삼았던 일련의 지침을 결코 완성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의 체계가 ‘귀납 논리’에 이르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연법칙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사례보다 소극적인 사례가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논점을 지적했다. 20세기 철학자들은 자연법칙이 결정적으로 검증될 수는 없지만 결정적으로 반증될 수는 있다는 점을 지적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영예를 그에게 서슴지 않고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