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철학과 13 추선식, 경영학전공10 정동철, 철학과 10 이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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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수민
우리 정신의 내용은 사고들이다. 데카르트는 ‘사고’라는 용어를 매우 폭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그는 지적인 성찰 뿐 아니라 의지, 지성, 상상력, 감각능력의 모든 작용을 비롯한 의식의 대상들을 사고에 포함시킨다. 감각능력과 상상력의 대상이 외부에 현존하지 않더라도 데카르트에 따르면 감각과 상상이라고 부르며 이들이 오직 사고의 양태인 한에서 확실히 우리의 안에 존재한다.
데카르트에게 이해된 감각은 오직 사고 작용뿐인데 육체가 없어도 가능한 이런 명백한 감각은 이후 철학자들이 ‘감각적 자료들’이라고 불렀다. 데카르트 체계의 유지 여부는 이 개념에 일관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결정된다.
‘제삼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사고의 여러 유형 중 하나를 추려 이를 ‘관념’이라고 부른다. 데카르트의 관념은 단어에 대응하는 정신적 요소로 말할 수 있다. 그는 어떤 단어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관념이 내 안에 있다는 점을 확신하지 못한 채 그 말을 이해하려 한다면 아무것도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데카르트는 관념을 본유관념, 외부에서 획득한 관념, 내가 만들어낸 관념으로 분류한다. 본유관념에는 사물, 진리 그리고 사고의 관념을 둔다. 외부에서 획득한 관념은 주로 우리가 감각적으로 획득한 관념들을 말하고 우리가 상상과 같은 관념을 내가 만들어낸 관념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자신의 정신 안에 형성된 이런 관념들의 근원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획득’ 관념들이 외부의 대상으로부터 생겨난 것인지 전혀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신의 관념은 데카르트의 정신 외부에서 생겨난 듯이 보이는 관념이다. 신의관념과 결합된 완전성은 다른 어떤 것에 비해서 우월하기 때문에 신의 관념은 결코 자신이 만들어 낸 허구일 수 없다. 그런데 어떤 관념의 원인은 반드시 그 관념 자체보다 더욱 실재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세계 안에 오직 그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관념에 대응하는 신이 실재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신은 데카르트가 자신의 정신 외부에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최초의 실재로 데카르트의 인식론체계가 구성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신은 결함이 없기에 우리를 속이지 않고, 이 원리는 데카트르를 회의주의의 미로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실마리역할을 한다.
신이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했으므로 우리가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모든 것은 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직관과 같은 순각적인 직관뿐 아니라 경험과 무관한 학문 전체를 확신 할 수 있게 된다.
데카르트는 ‘제육성찰’에 이르러야 물질적 사물들이 존재하며 자신이 육체를 지닌다는 점을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확립한다. 그러면서 지성과 상상력에 차이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하는데 상상력은 지성에 추가되는 여분의 능력이며 지성만이 정신의 본질적 능력이라고 여긴다. ‘지성은 작용할 때 정신을 자기 자신에게 향하여 자신 안에 포함된 어떤 관념을 고찰하는데 비해 정신은 물체로 향하여 자신이 이해한 관념과 유사한 물체 안에서 바라본다.’(AT VII.73 ; CSMK II.50)
현대의 철학자들은 데카르트가 정당화해야 하는 평범한 과학적 진리보다 신의 존재를 훨씬 더 의문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전혀 설득력 없는 것으로 여긴다.
만일 신이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면 내가 끊임없이 오류에 빠지는 일을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에 대한 반박에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우리의 능력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결코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는다. 나는 지성이라는 능력을 지니는데 이를 통해서 어떤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며 내가 지성이 제공하는 명석, 판명한 지각의 경우에 대해서만 의지의 판단을 적용하면 결코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을 것이며, 내가 명석, 판명한 지각에 이르기 전에 성급한 판단을 내릴 경우에만 오류가 발생한다.
또 아르노는 데카르트가 신에게 호소하여 명석, 판명한 지각을 보증하는 과정에 명백한 순환논증이 포함된다며,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앞서 우리가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모든 것은 참이라는 점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고 반박하였다.
이 반박에 대하여 데카르트는 특수한 명석, 판명한 지각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모든 것은 참이라는 일반 원리 사이의 구별에 의존한다며, 개별적인 지각이 참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데는 신의 성실성에 호소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다. 또 내가 지금 여기에 무언가로 존재한다는 점이 명석, 판명하게 지각된다는 사실을 회의할 수 없다 할지라도, 신의 존재를 확립하기 이전이라도 내가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모든 것은 참이라는 일반명제는 회의할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이 단순한 직관들을 지니는 동안에는 이들을 회의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을 확립하기 위한 어떤 논증도 필요하지 않다. 신의 성실성에 호소하는 일이 필요한 경우는 오직 일반 원리와 관련되는 경우와 개별적인 지각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회의하는 경우뿐이므로 데카르트의 주장은 순환 논증에 빠지지 않는다.
1-1. 16세기에 접어들면서 회의주의를 새로 유행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등장했다. 유럽에서 서로 다른 기독교 교파가 충돌하고,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지닌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 또한 이 사실을 인지한 몇몇 사상가들은 진리를 주장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신념 체계가 존재하는 지 의문을 품었다. 또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를 비롯한 고대 회의주의자들의 저술이 발견 되면서 인간 인식 능력의 신뢰 가능성에 대한 논증이 주목되었다. 몽테뉴의 <<레몽 세봉을 위한 변명>>은 회의주의를 가장 세련된 형태로 드러낸 저술 중 하나다.
1-2. 몽테뉴는 극단적 회의주의를 선호했다. 아무 것도 인식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편 회의주의의 창시자 피론의 이름을 딴 ‘피론주의적 회의주의’를 선호했다. 몽테뉴는 감각과 지성의 오류 가능성을 보이기 위해 많은 예를 들었다. 주로 섹스투스의 저술을 인용했고, 논증을 진행하면서는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이용했다. 몽테뉴는 섹스투스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오류 가능성을 보이는 데 스토아학파의 논증을 사용하고, 경험과 무관한 지식의 불가능성을 보이는데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논증을 사용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두 학파 모두의 논증을 부정하고, 진정한 지식 따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3. 몽테뉴는 “귀가 눈에게 판결을 내릴 수 있는가? 촉감이 귀에게, 맛이 촉감에게 거짓말했다는 판결을 내릴 수 있는가?” 라는 루크레티우스의 유명한 대목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몽테뉴는 루크레티우스와 달리 감각들이 오류에 빠져 있다는 결론에 까지 나아가진 않는다. 그는 감각이 참을 전한다는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도 똑같이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 ME2. 253)감각과 이성은 서로 협력해 지식을 산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각각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한편 우리의 의지에 속하는 정념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지각하는 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어떤 기준이란 것이 필요한데, 그런 기준은 성립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몽테뉴는 고대의 회의주의가 축적한 업적에 몇몇 새로운 자료를 더한 것이다.
2-1.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철학을 16세기에 전개된 회의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다. 그는 우선 ‘제일성찰’에서 몽테뉴보다 정돈된 형태의 논증을 제시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내가 지금까지 진정으로 참이라고… 중략… 불 옆에 앉아 있다고 굳게 믿은 것이 어디 한 두번이던가! (AT 7.19; CSMK 2.13) “내가 지금 꿈꾸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래서 내가 눈을 뜨고 있다는 점, 머리를 움직여 본다는 점… 중략… 따라서 최소한 일반적인 종류의 사물들, 눈, 머리, 손, 신체 등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대상이어야만 한다. (AT 7.20; CSMK 2.14) 그는 꿈을 꾸는 대상들도 결국 상상이 만들어 낸 복합체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는 이런 물체를 구성하는 더욱 단순한 구성요소들 – 즉 연장성, 형태, 크기, 수, 장소, 시간 등- 은 반드시 실재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만일 그렇다면 이런 대상들을 다루는 산술학과 기하학은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며, ‘내가 잠자든 깨어있든 간에 둘에 셋을 더하면 다섯이며, 사각형에는 네 변이 있다. 이런 명백한 진리를 거짓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한 듯이 보인다.’ 는 논증을 펼쳤다.
2-2 그러나 수학도 데카르트의 회의 대상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이는 수학도 일종의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진리의 근원이 되는 최고로 선한 신이 아니라 최고로 강력하고 교활한 악령이 존재하며 … 중략… 단지 이런 것들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존재로 여기려 한다. (AT 7.23; CSMK 2.15) 데카르트는 ‘제이성찰’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논증, 즉 그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명한 논증에 도달함으로써 이런 회의를 끝낸다. 설령 아무리 전능한 악령일지라도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고 생각하도록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떠받치는 확고한 기초다. 언뜻 타당한 듯 보이는 논증이다. 그렇다면 이 논증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이에 대해 회의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생각하는 것이므로 ‘나는 생각한다’는 회의 할 수 없는 전제라고 답했다.
2-3 심각한 문제는 ‘나는 생각한다’에서 등장하는 ‘나’에 관련된 것이다. 일인칭 대명사는 그 대명사를 발언하는 사람의 육체와 연결되어 그 의미를 얻게 된다. 자신에게 육체가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회의하는 사람이 독백을 하면서 ‘나’ 라는 개념을 사용할 자격을 지니는가? 에 대한 문제다. 어쩌면 데카르트는 ‘사고가 계속된다.’ 라고 말할 자격 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이와 유사한 의문으로는 ‘나’와 관련된 ‘존재가 계속된다’이다. 비판자들은 회의 중인 데카르트에게는 지속적인 실체로서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이는 데카르트 자신의 표현을 빌리더라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라는 인간 전체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점. 그 자체로 그것은 오직 그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점을 증명할 뿐이라는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1-1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은 16세기 전반과 그 이후까지 계속되면서 여러 학자들이 자유의지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통해 다양한 새로운 문제들을 낳았다. 이 논쟁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루터다. 루터는 중세 말 스콜라 철학에서 강하게 등장했던 성향을 이어받아 스콜라주의를 비롯한 철학 자체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은총에 맞서는 최악의 적’ 으로 규정하며 은총을 받지 못한 이성능력을 경멸했다.
1-2 루터의 종교개혁은 오직 이성으로 신의 본질적인 속성 혹은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확실히 파악할 수 없다는 기존의 회의주의 흐름에 새로운 자극을 제공했다. 루터 역시 성서를 인정하고 그것이 지닌 결정적인 권위를 특히 강조했다. 루터는 성서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기독교도는 회의적으로 생각할 자유를 전혀 지니지 못하며 모든 기독교도들이 신의 은총을 통해 신앙의 문제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구별하고 판단할 능력을 지닌다고 말했다. 훈련받은 지성인들도 은총의 도움이 없다면 도덕적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비관적 생각은 동시에 훈련받지 못한 사람들도 신앙을 통해서 계몽되면 지적인 능력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는 낙관적 생각을 동반하게 되었다. 이 두 생각 틈에서 신교도들에게 철학의 역할이 크게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1-3 루터가 지녔던 문제, 즉 보편적 권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개인의 양심 문제 등을 통해서 기독교는 다양한 교파로 나뉘기 시작했다. 칼뱅이나 츠빙글리를 비롯한 프랑스와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들은 교황의 권위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루터에 동의했지만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나 구원할 사람을 선택하는 신의 섭리 등에 관해서는 루터와 의견을 달리했다.
1-4 신교도들은 교회의 주장이 성서에 의존하므로 교회가 궁극적인 권위를 지닐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가톨릭교도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여 성서를 받아들일 유일한 근거는 성서가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종교 개혁 시대 유럽에서 이성적인 논증이나 내부적인 계몽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나라별로 서로 정반대되는 해결책을 마련한 후 이를 무력이나 처벌 위주의 법을 통하여 강조했다.
1-5 16세기 중반에 이르며 여러 교파의 교리가 어느 정도 정리되어 정형화한 모습을 보이며 이후 400여 년 동안 계속 유지 되었다. 1530년 루터의 부관이었던 멜란히톤은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정통을 가리기 위한 신앙 고백의 형식을 마련했고 1555년 같은 곳에서 ‘통치자의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라는 협정이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각 나라들 사이에서 맺어졌다. 칼뱅의 저술 <기독교 강요>는 스위스, 프랑스. 스코틀랜드의 신교도들에게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졌다. 로마에서는 교황 바오로 3세가 종교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창설하고, 교회 개혁을 위하여 트렌토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서 루터와 칼뱅의 교리가 정죄되었고 자유 의지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사라지지 않았다는 교리를 채택하였고 전통적인 일곱 가지 성사의 교리를 재확인 했다. 하지만 공의회가 1563년 임무를 마치고 폐회되었을 때 루터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칼뱅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1-6 기독교가 이렇게 갈라진 것은 불필요한 비극이었다. 루터와 칼뱅을 가톨릭에서 갈라서게 만든 신학적 문제들은 중세에 이미 여러 차례 논쟁의 대상이었지만 교파들 사이의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기독교의 통합은 로마 교황의 지위를 기독교 총회 아래에 두는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일찍이 오컴도 이런 제도를 제안한 바 있으며 15세기에 실제로 이런 제도가 잠시 시행되기도 했고 심지어 모어 는 생애 대부분에 걸쳐 이런 제도가 기독교를 위한 신의 계획에 속한 다고 굳게 믿으며 이를 주장했다.
1-1.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결합은 16세기 전반에 걸쳐 대부분의 철학 영역의 쇠퇴를 초래했다. 이 중 논리학 영역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학에서 논리학을 계속 가르치기는 했지만 인문주의 학자들은 논리학의 용어들이 야만적이고 비열한 협잡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논리학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라블레는 <팡타그뤼엘>에서 논리학자들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이들은 진공 안에서 신음하는 카메라가 제일 지향성을 반성하는 의식으로서의 제이 지향성에 몰두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따위를 문제랍시고 탐구하는 사람들이라고 조롱했다. 스토아학파와 중세 논리학자들이 이루었던 논리학의 성과들 대부분은 네 세기 동안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삭제되고 축약된 형태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만이 통속적인 교과서를 통해 초급 수준으로 가르쳐졌다.
1-2.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라틴어가 아닌 각 지역의 언어로 쓴 책들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영어로 쓴 최초의 철학 저술은 윌슨의 <이성의 규칙>이었다. 그는 현대 논리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용어, 예를 들면 ‘명제’와 같은 용어를 영어로 표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다른 학자들도 라틴어 사용을 거부하고, 순수한 영어 단어를 개발하려 노력했다. 그 중 논리학을 ‘지성의 기법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던 레버는 자신이 쓴 논리학 교재에서 모순 명제란 서로 동일한 주어와 술어, 동사를 지녔지만 하나는 긍정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인 두 개의 진술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1-3. 영어로 쓰인 이런 논리학 저술들은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프랑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라무스는 논리학자로서 남긴 업적으로 상당한 명성을 누렸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친 것 모두가 거짓이라는 주장을 옹호하며,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하는 논물들을 출판하고, 왕립 대학 교수로 임하며 20권으로 구성된 아리스토텔레스 비판서를 발표했다.
그의 저술 <변증론>은 1555년 프랑스어로, 1556년 라틴어로, 1574년 영어로 출판되었는데 이전의 모든 논리학 교재들을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이 최초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사고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논리학이 논쟁을 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논리학은 발명과 판단의 두 부분으로 나뉘므로 그가 쓴 저술도 이 둘을 각각 나누어 다룬다. ‘발명’을 다루면서 그는 우리가 옹호하려는 결론을 지지하는 논증을 발견하려 할 때 고려하는 요소 또는 논점으로 아홉 가지를 드는데 이들은 원인, 결과, 주어, 부가, 반대, 비교, 명명, 분할 그리고 정의이다. 그는 이런 요소들 각각을 고전 학자들로부터 인용한 방대한 내용과 더불어 예시하는데 이렇게 인용한 부분이 그의 저술 전반부의 거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예를 들면 라무스는 ‘부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떤 주어에 덧붙여지는 바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덕과 악덕은 육체와 정신에 부가되는 속성이다. 간단히 말하면 주어의 본질 외에 주어에 변화를 일으키는 모든 것을 부가라고 부른다.’ 뒤이어 그는 키케로의 연설문 중 일부를 길게 인용하여 이를 예시하는데 인용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누군가가 머리와 눈썹을 모두 깨끗하게 밀어 깎았다면
이는 그가 심술궂고 지독한 악당이라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그를 보고 교활한 여우가 나타났다고 외치지 않겠는가?
라무스는 겉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난했지만 그가 논증을 위하여 제시한 주제들은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곳곳에서 인용한 것이며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한 방식으로 정의된다. 그의 논의 중 유일하게 새로운 점은, 그가 ‘인위적이지 않은 논증’ 이라고 부른 것인데 그는 이에 속하는 예로 신탁의 선언과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증언을 든다.
그의 저술 후반부에서는 논리학의 전통 주제와 더욱 가까운 내용들이 등장한다. 라무스는 다시 한 번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존하여 서로 다른 종류의 언명들을 분류하고 서로 다른 형식의 삼단논법을 분석한다. 여기서는 그가 고유 명사를 포함하는 논증에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더 큰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을 혁신적인 요소로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카이사르는 조국을 억압했다. 툴리우스는 조국을 억압하지 않았다. 따라서 툴리우스는 카이사르가 아니다’와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1-4. 논리학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은 라무스의 저술에서 그리 큰 공적이나 독창성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하지만 라무스 사후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와 라무스주의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이들 사이의 타협을 시도한 중간적인 라무스주의자들 집단까지도 등장했다. 1561년 라무스는 칼뱅주의자가 되었는데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벌어진 신교도 대학살 때 희생되었다. 그가 순교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저술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누릴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영향력은 그 후 수 세기 동안이나 이어졌다. 예를 들면 밀턴은 <실낙원>을 완성한 5년 후에 라무스의 논리학을 다룬 책이 출판하기도 했다. 라무스의 저술이 인기를 누리면서 논리학은 오랜 침체기로 빠져 들었다. 중세 논리학자들을 사로잡았던 양상 논리와 반사실적 조건문의 영역 등에서 어떠한 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중세 학자들의 저술은 대부분 잊혀지고 말았다.
1-1 이른 바 1511년부터 1520년에 이르는 10년 동안은 가히 르네상스의 정점으로 여길 만하다. 바티칸에선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가 있었고, 피렌체에선 메디치가가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또한 피렌체의 관리였던 마키아벨리는 정치철학의 고전이 된 ≪군주론≫을 써냈다. 이러한 르네상스의 예술과 사상은 북쪽으로 점차 전파되어 독일과 영국에도 이르렀다.
1-2 당대 최고의 학자중 한명인 에라스무스는 헨리8세를 가르쳤고, 영국에서 국왕 다음으로 큰 권력을 차지한 토마스 모어와 같은 집에 머무는 사이였다. 에라스무스와 모어를 중심으로 15세기 이탈리아에 뿌리를 둔 인문주의 사상이 북유럽으로 전파됐다. 하지만 당시 ‘인문주의’라는 것은 종교적 가치를 세속적인 것 인간 중심의 가치로 대체하려는 욕구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에라스무스는 널리 읽힌 종교적 서술들을 쓴 성직자였으며, 모어는 훗날 종교적 믿음 때문에 순교를 하기도 했다. 당시 인문주의들은 오히려 그리스어와 라틴어 고전들은 탐구하는 ‘인문학’이 지닌 가치를 높이 평가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고전 작가들의 문체를 탐구하고 많은 작품을 재발견 했으며, 이러한 작업들은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인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탐구가 예술과 과학을 부흥시키고 기독교의 진리를 정통적으로 파악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 믿었다.
1-3 인문주의자들은 전문적 철학 탐구보다는 문법, 문헌학, 수사학 등을 더 높이 평가했다. 에라스무스와 토마스 모어 둘 모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한 중세철학자들과 달리 플라톤으로 돌아가려 했다. 모어의 경우 플라톤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저술인 ≪유토피아≫에서 재산은 공동으로 소유되며 여성도 남성과 함께 군대에 복무한다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그는 저서에서 플라톤처럼 정치철학 이론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노력했으며,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수단으로 가공의 국가를 예로 들며 이에 관해 상세히 서술했다. 반면 에라스무스는 플라톤을 정치의 인도자로 채택하는 데 회의적이었다. 모어에게 헌정한 그의 저서 ≪우신예찬≫에서 과거 역사를 보면 ‘권력이 취미 삼아 철학을 애호한다고 자처하는 통치자의 손에 들어갔을 경우 국가가 가장 큰 곤경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M, 100). 그러나 그의 다른 저서인 ≪기독교 군주를 위한 가르침≫의 내용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미 발견된 것을 반복한 것과 다른 내용이 없었다. 때문에 그의 저술은 마키아벨리나 모어의 명성을 누리진 못했다.
2-1 에라스무스의 경우 철학보단 신학에 더 관심을 보였고 사변 신학보단 성서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1516년 새 라틴어 성서를 자신의 주석과 더불어 출판하면서 부록의 형태로 그리스어 성서를 덧붙였다. 그는 그리스어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서슴지 않는 수정도 행했다. ‘말(the Word)이 있었다’에서 ‘말씀(the Saying)이 계셨다’로 바꾼것이 그 예다. 이는 성서를 그리스어로 출판한 첫 사례임과 동시에 16세기에 성서가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는 계기를 제공했는데 1522년 루터(Martin Luther)가 기념비적인 독일어 번역 성서를 출판하는 게 그 시작이었다.
2-2 에라스무스는 한 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이기도 했다. 교황의 특별 허가로 수도원 생활을 그만 두었는데 루터 또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였다. 에라스무스와 마찬가지로 루터도 성서 중 로마인들에게 보낸 바울로의 편지를 깊이 연구했는데, 이를 통해 르네상스 시대 접어들어 카톨릭이 보인 정신과 윤리적 태도를 의문시 하게 된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새로 번역한 성서를 출판한 다음 해인 1517년 루터가 교황을 비난하는 글을 비텐베르크 대학에 내걸었다. 이는 유명한 면죄부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었다.
2-3 에라스무스와 모어도 고위 성직자의 부패에 대해 루터와 생각을 같이 했고 타락과 부패를 비난하는 문서도 출판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경우는, 루터가 가톨릭의 성직과 성레 체계 전반을 비난하고 구원에 필요한 오직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행적에 대한 신앙 또는 믿음이라 주장하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교황의 논쟁을 잠재우려고도 했지만 헛된 시도로 끝났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거부했고 결국 신성 로마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지가 되었다. 교황 레오10세가 죽은 뒤 하드리아노 6세가 즉위했는데 그는 에라스무스의 친구이기도 했다. 하드리아노 6세의 압박에 의해 에라스무스는 루터에 반대하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막상 하드리아노 6세가 세상을 떠난 뒤 였다.
1-1 오컴은 스코투스가 떠난 직후 옥스퍼드에 도착했다. 그의 성은 잉글랜드 작은 마을 오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280년대 후반 출생했으며 프란체스코 교단이다. 런던 회색 수도원에서 철학적 훈련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310년 전후 신학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옥스퍼드에 갔으나 스코투스주의자들과 대립했다. 수많은 논쟁을 이끌었고 논리학과 자연학 저술 및 운명예정설과 미개의 우연에 관해 상당한 영향을 끼친 저술도 썼다. 유명하게 알려진 ‘오컴의 면도날’ , 즉 실재들은 필요 이상으로 늘어나면 안된다는 주장으로 잘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가 이런 말을 하진 않았다고 한다.
1-2 그는 논리학과 형이상학과 관련해 스코투스의 것을 더 발전시킨다. 혹은 정반대 되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스코투스의 것에 비해 사유 자체도 덜 복잡하며 언어도 더 명료한 장점이 있다. 그는 존재를 한 가지 의미를 지닌 용어로 신과 피조물 모두에 적용하는 것으로 여겼다. 또한 창조된 존재 수를 줄이며, 실체와 속성을 축소했다.
1-3 스코투스와 다른점은 보편의 본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많은 개체 사이에 공통적 본성이 있다는 것을 거부했다. 보편은 오직 우리 정신 안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보편은 사물이 아니라 기호이며 단지 많은 것을 나타내는 기호란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기호는 자연적 기호와 관습적 기호가 있다. 전자는 우리 마음의 생각이며 후자는 이런 생각을 표현 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 낸 단어다.
2-1 그를 유명론 ( nominalism)자 라고 부르는 것 보단, 개념 실재론자 (conceptualist)라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또한 그의 초기 이론에선, 정신이 실재하는 사물을 닮은 정신적인 상 또는 ‘허구’를 만든다고 보았다. 실재하는 것에 대응하는 것으로 정신적 명제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제공 한다는 것이다. 훗날 이 견해에 대해 비판을 받았고 이러한 주장을 포기했다. 또한 오컴은 객관적 지식과 추상적 지식을 구별한 스코투스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오컴의 이런 주장은 스코투스의 것을 더 명확한 것으로 만들었다. 스코투스가 제시한 인식론적 가능성은, 동시에 회의주의에 이르는 길을 크게 넓혔다.
2-2-1컴은 프란체스코 수도사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그의 철학적 전환점은 교황과의 대립 문제에서 발생했다. 오컴은 교황의 포교와 명령들이 부도덕하며 이단적이라며 공개적으로 이를 비난했다. 결국 교황에게 이단으로 낙인 찍힌 후 루트비히의 아래로 도망치게 된다. 그곳에 있던 것은 루트비히의 또 다른 철학적 후원자 였던 ‘마르실리오’ 였다. 그 역시 요한네스22세를 비난했다. 또한 교황 제도 자체에 반대했다.
2-2-2 마르실리오의 책 《평화의 옹호자》(Defensor pacis , 1324) 는 정치철학의 고전적 문헌이다. 이 책은 세련된 철학적 수준을 갖췄고 당시 교황 편에서는 쉽게 반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후에는 정통파 카톨릭 학자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계기 또한 제공하게 된다.
2-3 오컴의 견해 중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연권 이론이다.( OND6. 268~71). 마르실리오의 정부 개념은 당시 이탈리아를 근거로 형성된 반면, 오컴은 신성로마제국을 바탕으로 했다. 그는 자신의 통치자를 선택할 권리는 인간의 자연권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2-4 오컴은 흑사병이 유행하던 1394년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당한 상태로 뮌헨에서 세상을 떠난다.
1-1 중세 전성기 파리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은 가장 규모가 큰 대학이었다. 그 중 파리의 수많은 사상가들이 오컴 저술의 특정한 주제들을 추적해 발전시켰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의 그레고리오는 오컴의 자연철학을 받아들였다. 소르본의 학장이었던 뷔리당은 오컴의 유명론에 공감하며 세계를 과학저긍로 탐구함으로써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오컴보다 훨씬 더 신뢰했다.
1-2-1오컴의 인식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두 프랑스 학자로 시토 수도회 소속인 미르쿠르의 장과 세속의 수사 신부였던 오트르쿠르의 티콜라가 있다. 장의 인식론은 오컴의 개념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또한 장은 후에 데카르트가 ‘두 번째 성찰’의 첫머리에서 도달한 관점과 매우 유사한 태도를 보이며 데카르트의 관점을 예견한 듯도 하다.
1-2-2 장과 달리 니콜라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회의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기 위한 통로로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여기 지금 지성적인 사고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지성이 현존한다’는 주장조차도 확실한 논증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2 -1 옳든 그르든 간에 니콜라의 회의주의는 이후 오컴의 가르침이 낳을 수 있는 극단적이고 과도한 경우를 드러내는 예로 자주 인용되었다. 마찬가지로 20세기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니콜라를 자신들의 탁월한 선구자로 여겼다.
1-1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는 서양 사상사에서 하나의 새로운 기원이다. 그는 생애 초반에 다양한 철학적 전통들을 몇 가지 경로를 통하여 받아들였다. 그중 특히 플라톤적인 전통을, 아카데메이아학파의 회의적 관점에서든 아니면 신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관점에서든 간에, 받아들였다. 이는 유대교와 그리스 그리고 기독교 사상을 종합한 것인데 서양의 철학적 사고라는 관점에서 다음 천년을 위한 준비였다.
1-2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중 황금기는 그가 기독교도로 세례를 받은 387년 부활절 직전과 직후다. 많은 저술중 ≪아카데메이아학파에 반대하여≫(Contra Academicos)가 유명한 데 이를 통해 그는 회의주의에서 참인 바와 거짓인 바를 구별하려 한다.
1-3-1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글을 썼는데 이를 ‘독백’이라 한다. 여기서 그는 이성은 태양이 우리 눈에 분명히 보이듯이 신이 그의 마음에 분명히 드러나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를 위하여 영혼의 눈은 유한한 것들에 대한 모든 욕구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화 중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부와 명예, 성적인 쾌락의 추구를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이성은 신을 드러내보이겠다는 약속을아직 지키지 않았지만 그 대신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혼의 불멸에 대한 증명을 제시한다. 진리의 개념을 생각해보라. 참인 것들도 사라져 버릴 수 있지만 진리 자체는 영원하다.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여전히 참이다. 그런데 진리의 안식처는 영혼이므로 진리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불멸해야 한다. (S 1. 15 . 28 . 2. 15 .28)
1-3-2 397년 그는 ≪고백론≫ (Confessions) 라는 제목의 저술을 썼는데 이는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개종에 이르는 과정을 마치 기도를 하면서 신과 대화하듯이 서술한 책이다. 이는 일반적인 종류의 자서전은 아니지만 자서전이라는 형식의 기초를 제공한 대표적 저술로 평가된다. 이는 또한 개종 이전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 관하여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부수적으로 수많은 철학적 성찰을 포함하며 특히 시간의 본성이라는 독립적인 주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더불어 마무리 된다.
2-1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 중 그가 가장 공을 들인 작품은 ≪신국론≫(The City of God)이다. 이 저술을 그리스 고전 사상과 기독교 사상 사이의 종합을 최초로 드러낸다. ≪신국론≫은 십자가에 못 박힌 유대인들의 왕 예수를 이교도의 철학이 이상화한 도시국가의 정상에 놓으려 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그랬듯 아우구스티누스도 지금 자신이 제시하려는 진리를 철학자들이 오래전부터 다뤘지만 이에 제대로 이르지 못한 것을 보이기 위해 탈레스 시대부터 당시의 철학사를 요약한다. 또한 ≪신국론≫ 전반에 걸쳐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핵심적인 주장과 함께 나란히 제시하는데 특히 그가 가장 좋아하였으며 거의 기독교도로 여기기까지 했던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자주 언급된다. (DCD Ⅷ. 8~9)
2-2=1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이나 키케로와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이 오랫동안 숭배한 신화와 신들을 불경스러운 것이라 비난한다. 그는 이런 사소한 신들을 숭배하는 것이 많은 철학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위대함이 어떤 참된 유일신이 시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들이 지닌 덕에 대한 보상으로 부여된 것이라 본 것이다.
2-2-2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이교도 신화에 등장하는 신을 허구로만 본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러한 신들이 참된 신에게 향해야 할 마땅한 숭배를 가로채는 사악한 악령이라 보았다. ( DCD Ⅷ. 14, ⅸ,8,Ⅹ.9).또한 정령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는데 그는 정령들을 타락한 천사와 동일시 했다. 정령들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고 천상이라는 감옥에 내던졌다고 본 것이다.
2-2-3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에는 최초 천사들의 창조에 관한 내용이 그리 많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천사가 진정 신의 피조물이란 사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천사들이 서로 대조되고 상방되는 두 사회를 형성했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빛”과 “어둠”이라는 개념으로 선과 악을 표현했다.
2-2-4 천사들이 구성한 두 사회가 ≪신국론≫ 전체의 외형적인 주제인 두 국가의 기원에 해당한다. 그는 선한 천사가 있듯 악한 천사가 있고 사람 역시 이와 같다고 보았다. 또한 천사와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결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2-5 그는 또한 인간을 천사와 말 못하는 동물 그 중간쯤으로 보았다. 창조를 설명할 때도 플라톤의≪티마이오스≫ 에선 최고의 존재가 아닌 그 하위의 신이 대리인의 역할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과는 달리, 그는 하위의 신은 존재하지만 무에서 유를 만드는 일을 오직 유일신만의 특권이라고 규정하였다. (DCD ⅩⅢ. 6). 인간의 창조에 대해 플라톤과 성서가 가장 대비되는 부분은 “혼과 육체의 분리인 죽음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대한 물음에서 극명하게 갈리기도 한다.
2-3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적 욕구와 정념이 영혼의 발전을 방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는 오직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육체에만 해당하는 얘기다. 낙원에서 인간의 육체는 감정이나 욕구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3-1 그는 인류의 역사를 두 나라 이야기에 맞추어 추적한다. 많은 위대한 국가들 중 인간 사회를 오직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성서의 표현에 따하 이를 두 나라로 부를 수 있다 한다. (DCD ⅩⅣ.1). 그는 전자는 육체에 살고 자기애에 의해 창조 됐고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며 사탄과 함세해 멸망하도록 운명 지워졌다고 보았다. 후자의 경우엔 신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며, 영원한 신이 다스리도록 결정되어 있다고 했다. (DCD ⅩⅤ. 1과 4). 또한 이러한 두 나라의 분리는 아담과 이브의 자식들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했다. 첫째아들 카인이 인간의 나라이고 그의 동생인 아벨이 신의 나라에 속했다는 것이다 (DCD. ⅩⅤ.2). 또한 예루살렘은 신의 나라를 상징하고 바빌로니아는 지상의 나라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3-1-2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 ≫ 15권 .16권에서 신의 나라가 전개된 초기 역사를 추적한다. 17권에서는 선지자와 시편 작가들을 인용해 신의 나라를 설명하려 한다. 18권에서는 다시 세속의 역사로 돌아와 아시리아 , 이집트 등 여러 이교도 제국의 흥망을 다룬다. 여기서 철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논쟁 부분은 궁극적인 선과 악에 대한 것이다. 철학자들은 현세에서 궁극적 선을 발견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나라는 영원한 삶이 최고선이고 영원한 죽음을 최고의 악으로 보았다. 오직 신앙과 은총을 통해서 이러한 최고 선에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안다고 주장했다. (DCD ⅩⅠⅩ. 1~4).
3-2-1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예언자와 그리스도교의 설교 그리고 사도들 및 계시록 내용을 종합해 세계의 미래에 대한 내용을 우리에게 전한다. 그는 부활과 역사의 종말 사이엔 천 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이는 계시록의 내용과 같은 것이다. 또한 천년이 흐른 후 벌어질 마지막 일들을 언급하기도 한다. 천상의 예루살렘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아래 있는 지옥은 이러한 두 나라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3-2-2 주목할 점은 사악한 자들이 육체적 처벌을 받기 보다는 그들의 육체가 완전히 불 타 없어져 버려 금새 죽어버릴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그의 반박이다. 그는 영혼이 불멸한다는 사례를 들어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영원히 사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DCD ⅩⅩⅠ. 3~7). 또한 그는 영원한 처벌이 가능하며 정당할 뿐 아니라 이를 피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는 것을 각각의 단계를 밟아가며 설명한다. 이에 더불어 참된 신앙이 없는 이교들의 덕은 화려한 악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도 했다.
3-3 마침내 그의 ≪신국론≫ 22권에 이르러 예루살렘의 영원한 축복을 받은 성자들의 내용을 살펴볼 수있다. 그는 기독교도라면 인간의 육체가 천상에서 존재할 가능성을 부정하면 안된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축복받은 자들의 약속된 영원한 삶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이러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믿을 만한 것으로 보이기 위해 신의 전능함으로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육체의 부활이라는 개념 전반에 관해 철학적 비판자들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반드시 답할 필요를 느끼기도 했다.
3-4 ≪신국론≫의 거의 모든 내용은 성서에 의존하지만 철학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적 전통과는 별개로 자신의 종교관을 세우려 노력했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고, 훗 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를 넘어서까지도 철학적 논의의 체계를 제공한 성서적이며 고전적인 요소를 처음 생각해 낸 것이 두 번째 이유다. 그는 철학사를 통틀어 흥미로운 인물 중 하나였다. 그의 글은 뛰어났으며 중세의 다른 철학자와는 달리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일화와 풍자나 역설등 또한 자세히 드는 정성을 들였다. 또한 철학적 문제들을 끝까지 추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사학적 표현을 지나치게 사용했다는 점과 만년에 이르러 진정한 논리 분석과 언어상의 기교 사이의 차이점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에게 수사학과 논리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