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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로 나이브 베이즈 규칙을 사용하여 트위터 분류 모델 만들기

안녕하세요~ LOPES의 배서연 입니다. 저번에 올린 글이 반응이 나쁘지 않아 용기 내어 올려 봅니다. LOPES 스터디 그룹에서도 각자 R을 이용하여 정리한 내용을 공유 차원에서 올릴 예정입니다. 어설프더라도 예쁘게 봐 주세요~^^

이번에는 『DATA SMART』 3장에 나오는 나이브 베이즈(Naive Bayes)를 이용한 트윗 분류하기를 R로 구현해봤습니다. 저희 팀에서는 R로 구현하는 방법을 독자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다가 다음과 같은 곳을 발견하여 R로 쉽게 구현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나오는 설명과 코드 또한 아래 링크에서 많은 부분 빚졌음을 밝혀둡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링크는 동일한 내용을 다르게 해결하는 곳이 있어 추가합니다.

Tweet Bayes Classification: Excel and R : Salem Marafi

Data Smart, Ch3, Classifying Tweets using Naive Bayes – Working Analytics

R로 풀어볼 나이브 베이즈(Naïve Bayes) 모델은 소위 ‘지도 학습법(supervised learning)’에 속합니다. 주로 스팸 메일을 구분할 때 사용합니다. 스팸 메일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의 확률 값을 통해 다른 메일이 스팸 메일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DATA SMART』 3장에서는 나이브 베이즈(Naïve Bayes) 모델을 이용해 트위터에서 맨드릴(Mandrill)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경우, 새로 출시한 앱(app)인 맨드릴Mandrill에 대한 트윗인지 아니면 관련없는 것들을 언급하는 것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새로 출시한 ‘맨드릴(Mandrill)’이라는 서비스를 이야기하는 트윗은 (App)이라고 표기하고 다른 것들은 이야기하는 트윗은 (Other)으로 표기하겠습니다. ‘맨드릴(Mandrill)’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트윗을 조사했더니, 예를 들어 그 트윗에는 단어1, 단어2, 단어3 등등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때 맨드릴 서비스를 이야기하고 있는 150개의 트윗들을 가지고 있는 문장 안의 단어들을 다 조사할 수 있습니다. 이때 각각의 맨드릴 서비스를 이야기하고 있는 각각의 트윗이 단어1, 단어2, 단어3 등등을 가지고 있는 확률과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트윗이 단어 2, 단어 4, 단어 6 등등을 가질 확률은 다음과 같습니다.

P(App | 단어 1, 단어 3, 단어 5, …)

P(Other | 단어 2, 단어 4, 단어 6, …)

이 확률 조건표를 가지고 후에 테스트할 트윗이 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테스트 할 트윗 단어들이 앱에 관련될 확률과 아니면 다른 것에 관련될 확률을 비교해 가장 확률이 높은 클래스로 분류시키는 것이 바로 최대 후험 규칙(MAP rule, Maxium A Posteriori rule)입니다. 이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베이즈 규칙을 적용하되 바보같이 각 단어들이 문맥과 상관없이 독립적인 사건이라고 가정하여 확률을 구합니다. 이를 나이브 베이즈 규칙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감기와 콧물이 문맥 상 전혀 관계없는 단어가 아니더라도 일단 둘 다 독립적인 사건으로 가정하면 다음과 같이 규칙을 쓸 수 있습니다.

P(스팸메일|감기, 콧물 ) = P(감기|스팸메일) * P(콧물|스팸메일)

이를 활용하여 새로 테스트할 트윗의 각 단어들(단어1′, 단어2′, 단어3’…)이 앱에 관련된 것인지 아닌 지에 대해 비교할 확률은 다음과 같이 구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개의 값 중 더 큰 값에 따라 클래스를 분류할 수 있습니다.

P(App | 단어1′ , 단어2′, 단어3′ …)
= P(App) * (단어1’|App) * P(단어2’|App) * P(단어3’|App)…

P(Other |단어1′ , 단어2′, 단어3′ …)
=P(Other) * 단어1’|Other) * P(단어2’|Other) * P(단어3’|Other)…

재밌게도 나이브 베이즈 모델은 대충 부정확한 가정을 세워도 후에 어느 것이 더 큰 확률이냐를 비교하기 때문에 이상하지만 비교적 정확한 모델이라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럼 앞의 과정에 따라 R 로 예제 트윗을 분류해봅시다.

1) 첫 번째 단계: 데이터를 가져와 깨끗하게 정리하기

『DATA SMART』 3장에서는 엑셀로 작업하고 있지만, 우리는 R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엑셀 파일에 들어 있는 자료를 CSV 형식 파일로 바꿔서 가져오겠습니다. 이 자료는 맨드릴(Mandrill) 앱(App)에 관련된 트윗과 관련되지 않은(Other) 트윗, 각각 150개로 되어 있습니다. 사용환경에 따라 아래 링크에서 다운 받으시면 됩니다. Mandrill.csv, Other.csv, Test.csv 이렇게 파일 3개가 있을겁니다.
윈도우 사용자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www.dropbox.com/sh/1k3df26mbwwbtcn/AACnrKwvjg6GGtriRAWXWZ-6a?dl=0

맥 사용자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0B7Ov50qkZFF5NnJHNzZLalYtcVU/view

혹여 파일에 깨져서 실행이 안되는 분들은 책 홈페이지인 Wiley: Data Smart: Using Data Science to Transform Information into Insight – John W. Foreman에서 Chapter 3 파일을 다운 받으시면 됩니다. 아니면 아래 여기, ch03.zip을 눌러서 다운 받으시면 됩니다. 받으신 파일을 압축을 푼 다음 엑셀에서 열어서 csv 파일로 바꿔주세요. 위의 파일을 다운 받으시면 그 안에 AboutMandrillApp / AboutOther / AppTokens 시트에 A열 만 떼내 각각 Mandrill.csv / Other.csv / Test.csv 파일로 저장한 뒤 진행하면 됩니다 ^^

2) 가져온 파일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도록 처리하기

가져온 파일은 단순하게 각각 150열로 되어 있는, 즉 각각 150개 트윗으로 되어 있는 자료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각각의 트윗이 가지고 있는 단어를 가지고 분석할 예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트윗에서 단어를 다 분리해야 합니다. 『DATA SMART』에서는 엑셀을 이용하여 조금은 복잡하게 단어로 분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R에서는 ‘tm’이라는 패키지를 이용해서 엑셀에서 하는 것보다는 쉽게 분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단어로 쪼개기 전에 트윗이 가지고 있는 모든 단어를 소문자로 바꾸고 문장 부호를 빈칸으로 교체합니다. 아래 코드에서는 replacePunctuation()이라는 함수를 만들어서 대문자를 소문자로 만들고, 문장 부호, “.”, “: ”, “?”, “!”, “;”, “,”을 모두 빈칸으로 바꿉니다. 이 함수 안에서는 tolower()는 대문자를 소문자로, gsub()는 문장 부호를 빈칸으로 바꿔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 그 다음 빈칸을 기준으로 단어들을 분류 시켜 하나의 matrix로 만들어줍니다.

토큰화 된 단어의 길이를 구해 의미 없는 단어들은 Cut-off 하기

컷 오프하는 방식은 데이터를 다룰 때 언제나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 같습니다 ^^. 여기서는 글자 수 3개 이하의 토큰들을 다 컷오프시킵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영어 단어 중 3글자 아래는 모두 지웁니다. 영어 단어 중 3글자보다 작은 단어는 통상적으로 의미가 없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이런 작업에서는 몇 개 이하의 짧은 단어를 제거하는 대신 because, instead와 같이 멈춤 단어(stop words)라고 불리는 단어들을 컷오프 하기도 합니다.

3) 나이브 베이즈 모델을 이용하여 분류 모델 만들기 – 각 단어의 App/Other에서 조건부 확률 구하기

본격적으로 앱에 관련된 단어들과 아닌 단어들의 빈도를 확률로 계산하기 전에 크게 두 가지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첫 번째로 트윗에 거의 나오지 않은 드문 단어들을 처리 해야 하고, 두 번째로 이런 드문 단어들의 아주 작은 확률 값이 컴퓨터가 잘 처리할 수 있도록 처리해야 합니다.

가산 평활

앱에 관련된 트윗과 아닌 트윗에서 나오지 않은 단어가 후에 나왔다면 이 단어는 어느 쪽에 속해야할까요? 이런 단어는 나이브 베이즈 확률값을 계산할 때 전체 확률 값을 0으로 만들기 때문에 일단 이런 드문 단어는 한 번 나온 것으로 가정합니다. 그러면 정말 한 번 나타난 단어들의 확률이 불공정해지기 때문에 모든 단어들의 빈도 수에 1씩 더해줍니다. 이렇게 쭉 1씩 더해주는 방식을 가산 평활법(addictive smoothing)이라고 합니다. (다른 책에서는 라플라스 추정기라고 하기도 하더군요^^)

자연 로그 값으로 변환

예컨대 확률이 0.001인 단어들이 여러 개 있다면 후에 단어들의 확률을 곱해서 클래스를 비교할 때 소숫점 수 백 개 이하의 0이 나오게 됩니다. 이 경우 컴퓨터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더 플로라고 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0과 1 사이의 값에 대해서 자연 로그를 취합니다, 그러면 소수점 몇 백 개 이하의 수가 아니라 비교적 잘 와 닿는 음수가 되게 됩니다. 그 다음 최대 후험 비교를 수행하면 컴퓨터가 무리가 가지 않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 2 가지 문제를 해결했으면 이제 R에서 트윗의 각 단어들이 App에 들어갈 확률과 그 외에 들어갈 확률을 구해줍니다.

4) 앞에서 만든 모델을 가지고 새로운 트윗들이 어디에 속하는지 예측해보기

앞에서 나이브 베이즈 모델을 이용하여 만든 분류 모델은 사실상 두 개의 조건부 확률 표를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 이 확률표라는 증거들을 가지고 새로운 트윗이 App에 관련된 트윗인지 아닌지 분류해봅시다. 테스트할 20의 트윗은 반은 App에 관련된 트윗이고 반은 상관 없는 트윗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에서 한 토큰화, 가산 평활, 자연 로그 과정을 거친 뒤 이미 만들어 놓은 조건부 확률을 통해 그 단어들이 app에 관련될 확률과 그 외에 관련된 확률을 구해 비교합니다. 비교했을 때 확률 값이 더 큰 쪽으로 클래스를 분류합니다. 이제 정말 이 모델이 정확한 지 확인해 봅시다. 20개 중에 하나 빼고는 다 맞혔네요^^ R로 구현하는 코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윈도우 사용자 분들은 R코드 마지막 줄에 View(cbind(classified,tweets.test$Tweet))으로 하시면 더 멋진 결과를 보실 수 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와인 구매 데이터를 R로 분석하여 Gephi로 군집화, 시각화 하기

#와인 구매 데이터를 R로 분석하여 Gephi로 군집화, 시각화 하기

안녕하세요. 외대 철학과 스터디 그룹, LOPES의 배서연 입니다. 저희는 겨울방학에 『DATA SMART』를 교재로 세미나를 했습니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세미나였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1장부터 9장까지는 엑셀을 가지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으며, 나머지 10장에서는 앞에서 엑셀를 가지고 분석한 것을 다시 R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저희 팀은 이 책에 있는 분석들을 모두 R로 해보자는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 10장에서는 2장과 5장에 나와있는 와인 구매자 목록을 이용한 군집화 중 K-평균(정확하게 말하자면, 구형 k-평균(spherical K-means)을 이용한 군집화를 R로 구현하는 방법은 소개했지만, 5장 말미에 나오는 모듈성 극대화(maximize graph modularity)를 통한 군집화를 R로 구현하는 방법은 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모듈성 극대화를 통한 와인 구매자 군집화를 R과 Gephi를 가지고 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사실 『DATA SMART』 2장에서는 엑셀을 이용한 방법을 소개하고 있지만, 절대 참조를 고려하면서 수식을 짜고 구매자 수만큼 가로로 드래그를 해야 하는 등 약간의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R를 이용하고 최종적으로 이 작업 결과는 가지고 Gephi를 이용하는 편이 더 간편합니다. 참고로 아래 R코드는 처리 방법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자료 확인하는 경우에는 그 결과가 길어서 일부러 삭제했습니다.

준비작업

예제 파일이 없으신 분은 Wiley: Data Smart: Using Data Science to Transform Information into Insight – John W. Foreman에서 chapter2를 다운받고, WineKMC 파일 안의 Matrix시트를 R에서 지정한 디렉토리 폴더에 csv형식으로 내보내 사용하거나 혹은 chapter10안의 WineKMC파일을 사용하셔도 됩니다.

R로 작업하기 ( 코사인 유사도 구하기, Cut-off 시키기)

코사인 유사도 구하기

나와 비슷한 친구들을 ‘가깝다’고 표현하듯이, 수 많은 데이터의 정보를 유사한 것끼리 군집화 시키기 위해서는 그들 간의 가까운 ‘거리’를 구해야 합니다. 여기서 거리는 코사인 유사도를 사용하기 때문에 데이터를 행렬로 정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코사인 유사도란 유클리드, 맨하튼 거리법과 같이 대표적인 거리 측정 방법입니다. 이를 통해 각 구매자간의 유사함의 정도를 거리의 개념으로 변환시킬 수 있습니다. 코사인 유사도를 통한 두 구매자간의 거리의 공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cos (45°) =(1 matched purchase)/(√1purchase√2purchase)
= (공통으로 구매한 개수)/(√첫번째 사람의 구매 개수 √두번째 사 람의 구매 개수)

코사인 유사도 값은 0과 1사이의 값을 가집니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1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자기와 자기 자신과의 거리는 모두 1이 나타나게 됩니다. 구해진 코사인 유사도 행렬의 대각선 값을 보면 모두 1인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자신과의 거리는 무의미 하기 때문에 대각선의 1을 모두 0으로 바꿔줍니다. 아래 cos.sim 함수는 다음 링크를 참고했습니다.
clustering – Is there an R function that will compute the cosine dissimilarity matrix? – Cross Validated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관계는 지우고 강한 관계 들만 남기기 (Cut-off)
데이터가 커질수록 데이터들간의 관계는 복잡해지기 때문에 무의미한 관계들은 정리하는 것이 데이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앞에서 계산한 코사인 유사도는 에지 가중치가 0에서 1 사이의 값을 갖는 유사도 행렬(Affinity matrix)이기 때문에 특정 강도의 에지 이하를 모두 버리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여기서는 상위 20%만을 남길 Cut-off값을 구하고 그 값 이상은 1, 이하는 0인 행렬을 만들어줍니다. 이제 R로 직접 실행해봅시다.

Gephi를 이용해 군집화 시키기

군집화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일단 인위적으로 군집화할 개수를 정하는 ‘분리형 군집화’ 방법이 있습니다. 예컨대, R의 clusters() 함수에서 군집을 5개로 옵션으로 정해주는 것이 이 군집화 방법을 사용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결합 형 군집화(aggolomerative)’입니다. ‘결합형 군집화’는 원래 객체가 속해진 그룹에서 시작해 가장 가까운 그룹을 서로 합쳐 나가는 일을 반복하여 modularity의 변화를 계산한 뒤 최적의 군집화를 찾는 방법입니다. 제가 사용하는 ‘Gephi’라는 프로그램은 바로 이 군집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Gephi가 받아들이는 실행 형식은 csv에서 쉼표(,)보다는 세미콜론(;)을 이용하기 때문에 텍스트 에디터를 사용하여 쉼표를 모두 세미콜론으로 바꿔주는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저는 Atom이라는 에디터를 사용했습니다.

Atom으로 형식 바꿔주기

Atom 에서 Atom을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저장했던 winedataneighborhood.csv파일을 Atom으로 열어줍니다. 위 Find 탭에서 Replace in Buffer를 눌러 이름에 붙어있는 쌍따옴표(“)를 없애고 쉼표(,)를 세미콜론(;)으로 모두 바꿔줍니다.

Gephi로 군집화한 것을 시각화하기

Gephi – The Open Graph Viz Platform에서 Gephi를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Atom으로 바꿔준 winedataneighborhood.csv파일을 Gephi로 열어줍니다.이 파일은 방향성이 없기 때문에 undirected로 graph type을 설정합니다. Node 와 Edge 가 각각 100, 858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오른쪽 창의 Statistics창에서 Modularity를 눌러줍니다.이미 우리가 가중치(Weight)를 인접도 행렬에서 1인 값으로 바꾸어 주었기 때문에 체크되어 있는 use weight를 해제하고 눌러줍니다.Number of Communities: 6에서 군집이 6개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왼쪽 appearance창에서 nodes – attribute를 눌러 modularity별로 색깔을 입혀줍니다. Lay out창을 통해 보기 좋은 형식을 선택해줍니다.밑에 검은 색 T버튼을 누르면 노드의 각 이름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같은 색상 끼리 묶어져 있는 군집들이 보이시나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Gephi로 군집화한 것을 시각화하기

밀의 경험주의 논리학

밀의 경험주의 논리학

 

1.1 존 스튜어트 밀의 《논리학 체계》는 주요 부분이 둘로 나뉜다. 처음 두 권은 형식 논리학의 체계를 제시하고 나머지 네 권은 자연과학,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다룬다. 그는 첫 번째 부분을 언어분석, 특히 명명 이론(theory of naming)으로 시작한다.

밀은 형식논리학을 진지하게 여긴 최초의 영국 경험주의자였으며, 그는 홉스 시절 이후 경험주의를 결부시킨 유명론과 자신이 관련이 없음을 분명하게 하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유명론은 명제에 대한 두 이름이 주어와 술어가 동일한 대상의 이름 일 때만 옳다는 이론이다. 밀은 홉스의 설명이 ‘툴리우스의 키케로이다’처럼 술어와 주어가 둘 다 고유 명사인 명제들에게만 적합하기에 다른 모든 명제들에 대해서는 부적합한 이론일 수밖에 없다.

밀은 ‘이름(name)’이라는 낱말을 아주 넓게 사용한다. 그는 고유명사나 대명사뿐만 아니라 ’정복자 윌리엄을 계승한 왕‘과 같은 한정 기술도 이름으로 여긴다. 그리고 ’인간‘이나 ’현명한‘과 같은 한정 기술도 이름으로 여긴다. 그리고 일반명사, 추상명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이건, 추상적이건, 구체적이건 모든 이름은 대상을 지시한다. 고유명사는 지명하는 대상을 지시하고 일반 명사는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을 지시한다.’소크라테스‘라는 고유명사만 소크라테스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명사 ’인간‘ ,’현명한‘ 역시 소크라테스를 지시한다. 일반명사는 이런 방식으로 외연뿐만 아니라 그것이 내포하는 항목들도 있다. 일반 명사가 내포하는 것은 그것이 나타내는 속성들, 즉 일반명사에 대한 사전적 정의에 명시될 수 있다.’인류가 현명하다는 말을 고정시킬 때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생각하지 않았다. ‘와 같이 논리학에서 내포는 외연에 앞선다.

‘이름’이 그처럼 다수의 명사들을 망라하기 때문에, 밀은 모든 명제가 이름들의 결합이라는 유명론자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도 밀은 홉스의 견해와 관련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홉스와 달리 명제의 진리 조건을 제시할 때 내포에 의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죽는다’와 같이 두 개의 내포적 용어를 연결하는 문장은 어떤 속성들, 동물성과 합리성을 지닌 것들은 언제나 죽음의 속성을 수반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1.2두 번째 책에서 밀은 추리를 실질적 추리와 언어적 추리 두 종류로 구별하여 논한다. 언어적 추리는 세계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가져오지 않는다. 언어에 관한 지식만 있으면 전제에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어떤 위대한 장군도 무모한 사람이 아니다’로부터 ‘어떤 무모한 사람도 위대한 장군이 아니다/에 이르는 추리를 언어적 추리의 실례로 제시한다. 이 두 문제는 전제와 결론 둘 다 동일한 것을 주장한다고 말한다. 반면 실질적 추리는 전제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어떤 진리를 결론으로 추리한다.

밀은 새로운 진리들이 어떻게 일반적인 추론에 의해 발견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가 매우 까다롭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추론이 정언적이라고 믿었으며, 모든 정언 논증에서 결론은 실제로 전제에 포함되어 있고 함의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같은 논증을 예로 들어 보자. 만약 이 논증이 연역적으로 타당하다면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명제는 좀 더 일반적인 가정인 모든 ‘사람은 죽는다’를 전제해야한다. 다른 한편, 만약 소크라테스를 아직 죽지 않은 누군가의 이름으로 대체한다면,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긴 해도 그 결론은 증거를 요약한 첫 번째 전제에 의해 정당화되지 못한다. 고로 연역 추리는 진정한 추리가 아니다.

 

모든 추리는 특수 사례로부터 특수 사례로 나아간다. 일반 명제는 이미 만들어진 그와 같은 추리의 목록일 따름이고 이상의 추리를 위한 축약된 형식 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연역 추리의 주요 전제는 축약된 형식 문이며, 결론은 형식 문으로부터 도출된 추리가 아니라 형식 문에 따라서 도출된 추리이다. 실질적인 논리적 선행 조건이나 전제는 귀납에 의해 특수 사실들로부터 만들어진 일반 명제이다.

 

2.1.‘귀납’은 논리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특수 사례들로부터 일반적 진리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지칭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귀납이 한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피터는 유대인이다. 제임스는 유대인이다. 존은 유대인이다…….’라고 진술하고 계속 사도를 열거한다고 해보자. 나는 ‘모든 사도는 유대인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지만 밀은 그렇게 할 경우 실제로 특수에서 일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결론은 전제에 나타난 특수 사실들에 대한 압축적 표현일 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일반화되는 항목들을 빠짐없이 완전히 조사한 것도 아니면서 그것들을 근거로 일반화할 때이다.

밀의 연역 논증에 대한 비판은 논리학과 인식론의 혼동에 연루되어 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추리는 정보를 전달하지 않고서도 연역적으로 타당할 수 있다. 타당성은 논증이 옳은 정보를 산출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정언 논증만이 추리의 유일한 형식은 아니며 실제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정언적이지 않은 타당한 논증들도 많이 있다. 예컨대, A=B, B=C, A=C와 같은 형식의 논증들. 정언 논증의 경우에도 ‘모든 사람은 죽는다’를 ’죽는 것‘이 사람의 집합에 속하는 모든 원소의 이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죽는 것‘이 내포하는 속성들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해석한다면, 연역추리가 실질적 추리가 되도록 설명을 할 수 있다.

2.2밀은 귀납이 아니고서야 그런 연관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으면서 자신의 논리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귀납적 발견의 규칙들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원인과 결과의 귀납적 발견에서 탐구자를 안내하는 실험적 조사와 다섯 가지 규칙 혹은 규범을 제시한다. 그 실례로서 처음 두 가지 규범을 검토해보자.

첫 번째는 일치법이다. 만일 현상 F가 상황 A, B, C와 관련하여 나타나고, 또 상황 C, D, E와 관련하여 나타난다면, 우리는 유일한 공통 특징인 C가 F와 인과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두 번째는 불일치법이다. 만일 F가 A, B, C가 있을 때는 나타나지만 A, B, D가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두 경우를 구별하는 유일한 특징인 C가 F와 인과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결론 내릴 것이다.

반드시 의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런 규범들이 일상생활, 법정에서 늘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불일치법을 예증하기 위하여 ‘어떤 남자의 심장이 관통되었을 때, 그를 죽인 것은 발사도니 탄환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불일치법에 의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는 직전까지 충만한 삶을 살았고, 부상을 제외하면 모든 상황이 동일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밀의 일치법과 불일치법은 베이컨의 존재와 부재의 표를 세련되게 만드는 것이다. 베이컨과 마찬가지로 밀의 방법은 일반 법칙의 불변성을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밀은 ‘자연의 과정이 한결같다는 명제는 귀남의 기본 원리 혹은 일반 공리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하지만 이 일반 공리는 밀에 의하면 인과법칙과 멀리 떨어진 별에서도 적용되는 것은 무리라고 말하면서 일반 공리 자체를 경험으로부터 일반화되는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 일반 원리가 귀납의 기반이라면, 일반 원리 자체가 어떻게 귀납에 의해 입증될 수 있는지 난감해진다. 그렇지만 밀은 물리학의 기본 법칙들뿐만 아니라, 무모순의 원리 자체를 포함하여 산술학과 논리학의 기본 법칙들까지도 아주 완벽하게 확증된 경험적 일반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고자 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1.1대부분의 도덕 체계에서 행복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도덕철학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오랜 세월동안 행복을 최고선으로 간주했으며 심지어 인간이 모든 선택 상황에서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벤담이 모든 행위가 행복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향성에 따라 평가되어야한다고 했을 때 그 의견은 오랜시간동안 지속된 대다수의 의견을 재천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벤담의 최대 행복의 원리는 전통적인 행복주의(eudaimonism)와는 매우 다르다.

우선, 벤담은 행복과 쾌락을 동일시했다. 행위의 최고 원동력은 쾌락으로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pain)과 쾌락(pleasure)이라는 두 군주의 지배를 받게 했다. 고통과 쾌락만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도록 하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알려 준다. 두 군주는 한 손에는 옳고 그름의 깃발을, 다른 손에는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붙잡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가 복종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일수록 그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될 따름이다.

따라서 벤담의 경우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은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플라톤이 덕을 쾌락과 고통의 올바른 선택이라고 보기 때문에 공리주의자들은 플라톤을 선조로 삼기도 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과 쾌락을 구별하고 특히 행복을 감각적 쾌락과 동일시했다. 하지만 벤담은 행복을 쾌락과 동등한 것으로 보고 쾌락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감각으로 간주했다.

1.2벤담은 괘락이 먹고 마시고 성행위를 함으로써 일으켜질 수 있는 감각일 뿐만 아니라, 부를 얻는 것, 동물을 돌보는 것, 신이 좋아서 믿는 것처럼 다양한 수많은 다른 것들에 의해서도 일으켜질 수 있는 감각이라는 점을 주의 깊게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벤담의 쾌락주의(hedonism)는 관능적 충동과 다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쾌락은 즐거운 활동인 반면 벤담의 경우 즐거운 활동과 그에 따른 쾌락은 인과관계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쾌락의 가치는 즐기는 활동의 가치와 동일한 반면 벤담에게 개개인의 모든 쾌락의 가치는 그것이 어떻게 일으켜지든 간에 동일한 것이다. 벤담은 ‘쾌락의 양이 같다면, 압정놀이나 시나 매한가지다.’라고 했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고통의 양은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고통의 부정적 가치를 측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리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쾌락과 고통의 정량화이다. 벤담은 이 일이 결코 사소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쾌락과 고통의 측정법을 내놓았다. 만일 쾌락 A가 더 강하고, 더 오래 지속되고, 더 확실하고, 더 가까이 있다면 쾌락 B보다 양이 더 많은 것으로 계산된다. 이 같은 요인들은 ‘행복계산법(felicific calculus)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하고 서로 비교 검토되어야한다. 우리는 여기서 생산성과 순수성도 고려해야하는데, 생산성은 유쾌한 행위가 계속 연달아 쾌락을 산출하는 것을 말하고 순수성은 그렇게 계속 지속하지 않을 경우를 말한다. 또 만일 공공정책을 고려중이라면 우리는 더 나아가 고통과 쾌락이 그 집단을 가로질러 얼마나 널리 퍼져 나가는 지에 대한 확장성을 고려해야한다.

2.1.그러나 이러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인상적인 슬로건을 면밀히 조사한다면 애매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첫 번째 제기되는 의문은 ‘무엇이 최대 다수인가?’이다. ‘유권자’, ‘시민’, ‘남성’, ‘인간’, ‘의식 있는 존재’ 등 무엇이 최대 다수에 해당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공리주의에 열성적인 추종자들은 대부분 ‘인간’이라고 답했을 것 가고 이것이 벤담이 제시했을 법한 대답으로 여겨진다.

최근에 많은 공리주의자들은 동물들도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면서 행복 원리를 인류를 넘어 그 밖의 의식 있는 존재들에까지 확장하였다. 벤담이 고양이 애호가였다해도 그는 자연법 권리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까지 동물들에게 권리를 확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감각의 문제를 최고의 도덕적 기준으로 설정함으로써, 동물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동물들을 우리 자신과 동일한 도덕 공동체로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벤담이 고전적이고 기독교적인 도덕전통을 깨뜨린 것으로 가장 의미심장한 귀결들 중 하나가 되었다.

2.2공리성 원리에 관한 두 번째 의문은 이렇다. 개인이나 정치가는 최대 행복의 원리를 따를 때 행복의 대상자 수를 통제하려고 해야만 하는가? 행복을 더 많은 수의 행복으로 확장한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또는 동물들)이 생겨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더 까다로운 의문, 어떤 집단의 행복을 측정할 때 오로지 전체의 행복만 고려하는가, 아니면 평균적인 행복도 고려해야하는가? 행복의 양뿐만 아니라 행복의 분배도 고려 대상으로 삼아야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의 양과 사람 수 간의 조화 문제에 직면한다.

이 쟁점은 도덕철학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철학의 문제다. 그러나 우리의 고려 대상을 개인적인 도덕의 문제로 제한한다고 할지라도, 심리적 쾌락주의(쾌락이 우리 모든 행위를 결정한다)와 윤리적 쾌락주의(쾌락은 옳고 그름의 표준이다) 간의 이중적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그러나 심리적 쾌락주의에서 언급된 쾌락은 개인의 쾌락이고 윤리적 쾌락주의에서의 쾌락은 도덕 공동체 전체의 쾌락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내가 모든 행동에서 자신의 쾌락을 극대화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내가 공익을 극대화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벤담은 공리주의를 다른 윤리 체계와 대조함으로써 공리주의의 장점을 내세웠다.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두 번째 장의 제목이 ‘공리성의 원리에 반대되는 원리들에 대하여’이다. 이 원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금욕주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공감과 반감의 원리이다. 금욕주의 원리는 행복의 양을 감소시키는 정도에 따라 행위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공리성 원리의 반대원리이다. 반면 공감과 반감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행위를 좋거나 나쁜 것으로 판단한다.

벤담은 금욕주의 원리를 하나의 허수아비로 여긴다. 종교적 전통은 실제로 극기와 육체의 금욕을 높이 평가했으나, 정작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자기 자신을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것을 모든 행위의 지밸 원리로 삼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종교적인 사람이건 세속적인 사람이건 최대 다시의 최대 불행을 추구하는 정책을 제안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벤담 자신은 ‘어떤 생물체도 금욕주의 원리를 일관성 있게 추구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공감과 반감의 원리는 매우 다른 종류의 도덕체계들이 들어있는 잡동사니 보관함이다. 벤담은 공감과 반감에 대해 도덕감, 상식, 이해력, 자연법, 올바른 이성 등 그럴듯한 명칭들을 가지고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철저히 옹호하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도덕 체계들은 모두 어떤 외적 표준에 호소하는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갖가지 계략들, 그리고 저자의 정서나 의견을 도덕 체계 자체에 대한 근거로 받아들이도록 독자를 설득하기 위한 갖가지 계략들로 이루어져있다.’ 또 ‘신의 기쁨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어떤 것을 신의 기쁨이라고 믿는다거나 신의 기쁨으로 여긴다고 공표하는 사람이 누구이건 간에 그 사람의 선량한 기쁨과 똑같고, (계시를 제외하면) 반드시 똑같을 수밖에 없다.’

2.3벤담은 공리주의와 그 밖의 도덕 체계 사이의 진짜 중요한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도덕철학자들을 절대주의자와 결과주의자로 나눌 수 있다. 절대주의자는 본래 그 자체가 그르고, 결코 행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행위가 있는 다고 믿는 반면 결과주의자는 행위의 도덕성이 행위 결과에 의해 판단되어야한다고 믿는다. 결과주의자들은 특수 상황에 이르면 행위 결과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부류의 행위는 없다고 믿는다. 벤담 이전 철학자들은 대부분 자연법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절대주의자였다. 만일 자연권과 자연법이 있다면 자연권을 침해하거나 자연법과 상충되는 그런 종류의 행위는 행위 결과와 관계없이 잘못으로 판명된다.

벤담은 그 어떤 두 사람도 자연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법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권리가 실정법에 의해서만 부여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연권이 무시될 수 없다는 생각을 엄청난 조롱거리로 삼았다. ‘자연권은 전혀 말도 안 되는 허튼소리이고, 자연적인 불가침의 권리는 수사적으로 과장된-죽마(竹馬) 타고 호언장담하는-허튼소리이다’

벤담과 이전 윤리학자들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은 대단히 중요한데, 그것은 아주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그리고 거의 모든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간통이 언제나 잘못이라고 믿었지만 벤담의 경우 그렇지 않다. 도덕 판단을 내리기 전에 간통을 범한 특정인이 예견한 결과들을 고려해야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1.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1-1.후설이 퇴직하기 2년 전 제자 중 한 사람이 특히 철학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한 권을 냈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은 현상학이 현 상태로는 주도면밀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현상학은 의식의 자료들을 음미하려 했으나 이전의 철학에서 물려받은 항목들은 ‘주관’ ‘대상’, ‘행위’, ‘내용’과 같은 개념들을 사용했다. 후설이 상관 관계가 있는 의식과 실재의 두 영역이 있다는 데카르트의 기본 틀을 받아들인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후설이 현상학에서 채택한 소재는 의식과 실재 중 의식이었으나 하이데거는 현상학의 첫 번째 과제가 의식과 실제의 구분에 선행하는 존재(Sein)개념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식과 실재를 정반대로 대비하게끔 하는 그 경험이 곧 우리가 음미해야할 원초적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철학의 본성을 분명히 하고 의식이 아니라 존재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하기 위해 데카르트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위적 범주로 돌아가는 것은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전의 철학이야말로 철두철미한 현상학자가 본받아야 할 최상의 실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온갖 전제 가정들이 달라붙은 전문적인 철학적 어휘가 형성되기 이전에 생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이데거는 우리가 순수한 자연 상태에서 철학을 할 수 있도록 청결한 어휘를 고안하는 과업을 수행하고자 했다.

1-2. 하이데거의 가장 중요한 신조어는 현존재(Dasein)이다. 현존재는 철학적인 물음을 물을 수 있는 존재 유형인데, 하이데거의 현존재에 대한 설명을 보면 처음에는 데카르트의 자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지만 데카르트의 자아는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인 반면 하이데거에서 생각은 본질적이 아니다. 그에게 생각은 현존재가 존재하게 되는 여러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다. 현존재의 원초적 요소는 ‘세계-내-존재’이며, 현존재는 생각과 의지의 구별이나 이론과 실천의 구별에 선행한다. 현존재는 관심을 갖는 존재로서 걱정하는 존재다. 내가 세계에 관해 무언가 걱정하거나 관심을 보이는 경우에 한해서, 나는 세계에 관해 물음을 던지게 되고 그와 같은 물음에 대해 지식 주장의 형태로 답을 하게 된다,

개념과 판단은 세계에 대처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한층 더 원초적인 그와 같은 도구들, 즉 문자 그대로 도구인 것들이 있다. 목수는 망치를 사용함으로써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능숙하게 그것을 잘 다룰 경우에는 망치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망치에 대한 의식은 목수가 실재와 충실하게 마주치려는 자신의 계획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이렇게 뻔 한 방식으로 대처하는 실재들을 ‘손 안에 있음’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손안에 있는 것과 손안에 있지 않은 것의 구별은 우리가 세계의 공간성을 구성하는 기본 바탕이 된다.

1-3.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기본적 본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현존재를 하나의 실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인생을 펼쳐가는 존재라고 생각해야한다. 우리의 인생은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개발하는 것이다. 애당초 우리는 물리적이고 문화적인 역사적 상황에 내던져져있다. 하이데거는 이 ‘던져져있음’이 현존재의 ‘사실성’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직 겪어본 적 없는 그 사람일 수 있고 나의 잠재력은 나의 성취와 마찬가지로 나의 존재에 본질적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실제로 내가 누구인지 규정지을 때 미래는 과거와 현재에 우선한다. 현존재는 ‘될 능력’이며, 내 인생에서 내가 무엇을 목표로 삼고 있는가에 따라 나의 현재 상황과 능력의 중요성이 결정된다. 하지만 그 성취와 잠재력이 무엇이든 간에 모두 끝은 죽음이다. 내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내가 무엇이 될 것인지와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의 차이를 고려해야하는데 여기서 죄의식과 분노가 나온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활동은 세 가지 근본적인 양상을 갖는다. 첫째, 그가 ‘조율’이라고 일컫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내던져진 상황 자체를 매력적이라거나 불안하다거나 따분하다는 식으로 나타내고, 그 상황에 다양한 종류의 기분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둘째, 현존재는 담론 적이다. 현존재는 담화의 세계 안에서 즉 우리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언어와 문화에 의해 명확히 표현되고 해석된 것들 사이에서 작용한다. 셋째. 현존재는 특별한 의미의 ‘이해’다. 현존재의 활동은 어떤 목표, 현존재의 문화적 맥락 안에서 인생 전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어떤 ‘위하여’를 지향한다. 현존재의 이 세 가지 양상은 각각 시간 과거, 현재, 미래에 해당한다.

비록 현존재가 생물학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작용한다고 할지라도 개인의 활동을 일으키는 인간의 본성과 같은 그런 것은 없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본질은 그것의 실존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실존주의’, 즉 개인의 종의 구성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면 보편 법칙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철학 학파의 아버지가 되었다. 내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하여 나 자신을 무엇이 되게 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냥 순응ㅇ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것은 현존재의 진정한 결정이 아니며 나의 현존재에 대한 배신이다. 진정한 결정을 위해서는 나는 선택의 이유가 인간의 본성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신의 명령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과 어떤 선택도 나의 삶에 선험적 의미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자각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야한다.

1-4. 《존재와 시간》은 읽기 어려운 책이라서 하이데거 특유의 어휘와 난해한 구문이 그의 프로젝트에 필수적이었는지 자의적이었는지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신랄한 반대자인 길버트 라일도 그의 책 논평에서 ‘인간 영혼의 근원적인 작용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에 감탄할 따름이라고 인정했다.

현상학의 저작으로서 《존재와 시간》은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의 어느 저작들보다 더 큰 갈채를 받았으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불행했다, 하이데거는 1929년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의 철학 교수직을 이어받았다. 1933년 그 대학의 총장이 되어 5월 취임연설에서 나치주의야말로 독일 국민이 마침내 역사사의 정신적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매개체라고 환영했다. 그는 총장으로서 명예 교수인 후설을 비롯하여 정년이 아직 5년이나 남은 다섯 명의 유대인 교수들을 모두 대학 도서관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전쟁이 끝난 뒤 하이데거는 히틀러에 대한 지지를 속죄해야 했고, 1945년에서 1950년까지 스스로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중단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1976년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은 뒤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후설의 현상학

1.후설의 현상학

1.1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인생은 결정적인 대목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닮았다. 후설은 프로이트보다 세 살 아래였는데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모라비아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비엔나 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두 사람은 최초로 인간의 정신에 관한 진정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려는 개인적인 프로젝트에 대부분의 인생을 바쳤다. 그들은 인생 말년에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걸려들었고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에서 쫓겨나 망명 생활을 하다 죽고 후설의 책들은 1939년 프라하에 진군한 독일 군대에 의해 불탔다,

그러나 전문가로서의 후설의 인생은 프로이트와 매우 달랐다. 그는 철학으로 정통 학문 경력을 쌓아 대학에서 연달아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는 비엔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는 했지만 교수 자격 청구 논문을 위해 할레 대학으로가 오스트리아가 아닌 독일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후설은 1884년에서 1886년 사이 비엔나 대학에서 브렌타노(Franz Brentano,1838-1917)의 강의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브렌타노는 전직사제로서 영향력이 널리 입증된 《경험적 관점의 심리학》이라는 저작의 현대적인 실험적 탐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철학을 연결하려고 했던 박식한 학자였다. 그 책은 의식의 자료가 두 종류, 즉 물리 현상과 정신 현상으로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물리 현상은 색깔이나 냄새와 같은 것이고 생각과 같은 정신 현상은 어떤 내용을 가짐으로써 혹은 내재적 대상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 특징은 정신적인 행위와 정신적인 삶을 이해하는 실마리인데 브렌타노는 이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는 스콜라 철학의 용어를 재도입했다.

후설은 심리학에 대한 브렌타노의 연구 방법에 영향을 받으면서 초기에는 줄곧 수학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할레 대학에 제출한 교수 자격 청구 논문 주제는 수 개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수 개념의 심리적 기원인 활동을 확인함으로써 수 개념을 설명하려고 했다. 수학의 기초를 경험적 심리학에서 찾으려는 욕구 때문에 후설은 다소 따분한 결론을 낳기도 했다. 예컨대 영과 하나가 수라는 것을 부정했고, 소수의 산술학과 다수의 산술학을 명확하게 구분해야한다. 우리 마음의 눈으로는 오직 작은 집단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산술학의 소수 부분만 직관적 기초에 의존할 수 있다. 일단 다수를 다루게 되면 우리는 직관을 벗어나 순전히 기호들만 있는 영역으로 들어간다.

1-2.후설의 저서에 대한 논평자들, 특히 프레게는 그것이 상상과 사고를 혼동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심라학의 소재인 정신적 사건은 개인에게 사적이기 때문에 산술학과 같은 공적 학문의 기초가 될 수 없다. 후설은 그 논평을 받아들여 자신의 초기 심리주의를 단념했다. 그 후 후설은 프레게처럼 논리학과 심리학 사이의 명확한 구별을 유지했다. 그러나 분석적 전통을 이은 프레게는 논리학에 더 초점을 맞춘 반면 대륙적 전통을 이은 후설은 심리학적 측면에 더 초점을 맞추어 철학의 정통 본거지로 보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프레게와 후설은 플라톤의 소박한 실재론을 철학의 토대로 인정하는 점에서 하나가 되었다.

후설이 브렌타노한테서 넘겨받은 것은 지향성 개념, 즉 물리 현상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정신 현상의 특징은 그것이 대상을 향해 주의를 돌린다는 관념이었다. “나는 경우에 따라 트로이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고 나의 투자에 관해 걱정하기도 한다.”라는 문장에서 ‘대해(of)’와 ‘관해(about)’가 지향성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가리킨다.

생각의 본질은 두 가지이다. 생각의 ‘내용(content)’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생각의 ‘소유자(possessor)’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용을 생각한다고 해볼 때 이것을 생각이게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내가 독수리나 말에 대한 생각이 아닌 용에 대한 생각을 한다는 것고 다른 하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후설은 생각이란 특정한 물질(생각이 지향하는 대상)에 대한 나의 행위(act)라고 말함으로써 생각의 특징들을 명시하고자 했다. 다른 사람들도 용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후설에 의하면 바로 그때 우리는 동일한 종(species)에 속하는 여러 가지 개인적인 행위를 한다. 용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그와 같은 모든 행위가 속하는 종에 지나지 않는다.

개념(concept)은 《논리 연구》에서 이와 같이 심리학적 요소를 기반으로 정의되었다. 그렇다면 논리학과 개념의 관계는 어떤가? 후설은 이제 기하학의 정리들이 경험적인 삼차원의 물체와 관계를 맺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논리학이 개념과 관계를 맺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초기 심리주의를 단념할 수 있었고 심리학과 논리학을 선명하게 구분했다. 더 나아가 그는 심리학을 ‘현상학(phenomen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다시 고안해냄으로써 심리학과 인식론을 구별하였다.

1-3.현상학은 20세기 초 10년 사이에 개발되었다. 뮌헨의 철학자 집단에서 열성적인 ‘현상학’ 운동이 일어났는데 1913년 현상학적 연구 연보를 출간하고 이 연보의 창간호에는 단행본 분량의 후설의 글이 실렸다.

현상학의 목적은 의식이 우리에게 말하거나 말하려고 하는 어느 것도 언급함이 없이, 심리=외적(extra-mental) 세계에 관한 의식의 직접적 자료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내가 불사조를 생각할 때 내 생각의 지향성은 불사조가 실제로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정확히 동일하다. 후설은 이미 1901년 이렇게 썼다. “어떤 대상이 실존하는가. 허구하는가, 아니면 완전히 부조리한가의 문제는 대상이 의식에 나타나고 주어지는 일에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를 가져오지 못한다. 나는 쾰른 대성당을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벨탑을 생각한다. 나는 정천면체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천각형을 생각한다. 즉 내 경험의 지향성은 진짜 탁자가 그것에 있건 내가 환각 상태에 있건 정확히 동일하다. 현상학자는 심리 현상을 면밀히 연구해야 하며, 심리-외적 대상들의 세계를 괄호 안에 넣어야한다.; 현상학자는 심리- 외적 세계의 실존에 대하여 후설이 그리스 어로 에포케(epoche)라고 했던 판단 중지의 태도를 가져야한다. 이것을 일컫어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매우 신중한 소극적인 철학(philosophy drawing in its horns)이었다.

현상학은 현상주의(phenomenalism)와 같지 않다. 현상주의자는 현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으며, 물질적 대상과 같은 것들에 관한 진술은 현상에 관한 진술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버클리와 밀은 현상주의 견해를 유지했다. 반면에, 후설은 《이념들》에서 현상들 이외에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비현상적 대상들의 세계가 존재할 가능성을 신중하게 열어두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대상들은 후설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거나 적어도 본래의 관심사가 아니다.

후설에 따르면, 우리는 외부 세계에 관해서는 오로지 추리나 추정에 의한 정보만을 갖는 반면, 우리 자신의 의식 대상에 대해서는 오류 불가능한 직접지를 갖기 때문이다. 후설은 자명한 내재적(immanent)지각과 오류 가능한 초월적(transcendent)지각을 구별했다. 내재적 지각은 나 자신의 현재의 정신 활동이나 상태에 대한 나의 직접적인 익숙지이다. 초월적 지각은 물리적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나 자신의 과거활동이나 상태에 대한 나의 지각이며, 다른 사람들의 정신 내용에 대한 나의 지각이다.

내재적 지각은 현상학의 소재를 제공한다. 내재적 지각은 초월적 지각보다 더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초월적 지각이 오류 가능한 반면 내재적 지각은 자명하기 때문뿐만 아니라 초월적 지각을 성립시키는 추리와 추정이 내재적 지각의 평결에 근거하고, 또한 근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의식만이 ‘절대적 존재’다. 이를테면 다른 모든 형태의 존재는 그 실존 여부가 의식에 달려있다. 따라서 현상학은 모든 학문들 가운데 가장 기초적이다. 현상학의 소재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다른 모든 분야의 철학과 과학에 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1-4.후설은 《이념들》을 세 권의 책으로 계획했으나 마지막 두 권은 사후에야 출판되었다. 그는 1916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고 1923년 베를린 대학의 초빙을 거절하고 1928년에 퇴직할 때까지 그 대학의 정교수로 남았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는 하이데거나 스타인처럼 대단히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된 사람들도 있다. 몇 년 동안 후설은 책에 제시된 체계를 여러 방면으로 발전시켰다. 한 편으로는 데카르트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남겨 놓은 몇몇 가정들을 약화시킴으로써 자신의 판단 중지가 데카르트의 의심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되도록 현상학적 방법을 확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의 정신의 실존을 입증할 수 있는 상호 주관성(intersubjective) 문제의 해결책과 자신의 방법론적 유아주의를 결합하려고 애썼다. 그의 최종적인 입장은 그가 현상학의 불가피한 결론이라고 주장했던 선험적 관념주의(transcendental idealism)였다. 그의 후기 사상의 일부 결과물들은 퇴직한 그 다음 해에 발표되었으며 《데카르트의 성찰》과 《형식 논리와 선험논리》로 출판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부터 이후의 분석철학까지

201500072 강종원

1.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 

1-1.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출신 가문으로 1889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는데, 대가족이었고 부유했다. 2) 그는 맨체스터 대학에 갔고, 그곳에서 비행기의 제트추진 엔진을 설계했다. 그는 러셀의 <수학의 원리>를 읽고 그 책을 통해 프레게의 저작에 친숙해졌으며, 1911년에 예나 대학의 프레게를 찾아갔다. 그는 프레게의 권고로 케임브리지로 갔고,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러셀의 지도 아래 다섯 학기를 보냈다. 러셀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도록 적극 도와주었다. 3) 비트겐슈타인은 1913년 케임브리지를 떠나 자신이 만든 노르웨이의 어느 오두막에 은둔했다. 이 시기에 썼던 비망록과 편지는 그가 일생 동안 줄곧 유지할 수 있었던 철학관의 싹을 보여주었다. ‘철학은 실재에 대한 그림을 보여 주지 못하며, 과학적 탐구를 확증할 수도 논박할 수도 없다'(는 그의 유명한 말도 이 때 나온 것이다.)
1-2. 1914년에 전쟁이 일어나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포병대에 자원입대했고, 동부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서 용맹을 떨쳤다. 그는 1918년 11월 티롤 남부의 이탈리아 군인들에게 붙잡혀 몬테카시노 근방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 철학적인 생각들을 일기장에 썼고, 수용소에 있는 동안 그 철학적인 생각들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판된 철학책 <논리철학론>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 책의 원고를 수용소에서 러셀에게 보냈고, 그것은 1921년에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얼마 뒤 영어 번역과 러셀의 머리말을 덧붙여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1-3. <논리철학론>은 간결하고, 우아하고, 수수께끼 같다. 그 책은 ‘세계는 성립할 수 있는 경우들 전체다’로 시작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로 끝난다. 핵심 주제는 의미에 관한 그림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명제들로 이루어진다. 명 제는 사고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이고, 사고는 사실들에 대한 논리적 그림이며, 세계는 사실들 전체이다. 6)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와 사고는 문자 그대로 그림이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낱말들의 공간적 관계는 사물들의 공간적 관계를 묘사한다. 7) <논리철학론>에 따르면, 그림(혹은 명제)이라면 어느 것이나 그것이 묘사하는 것과 공통된무언가를 가져야 한다. 이 최소한의 공통점을 비트겐슈타인은 그것들의 논리적 형식이라고 말한다. 8) 비트겐슈타인은 왜곡된 일상 언어 뒤에 숨어 있는 사고의 묘사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러셀이 제시한 노선에 따라 논리적 분석을 해 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우리가 이 분석을 하다 보면 결국은 전혀 복합적이지 않은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들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했다. 언어와 세계의 연결은 마음속 깊이 있는 이런 사고의 궁극적 요소들과 세계의 본질을 구성하는 원자 대상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9) 명제와 그 명제가 나타내는 세계 구조에 대한 그림 이론을 해설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양한 종류의 명제들이 어떻게 원자 그림들의 결합으로 분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1-4.<논리철학론>은 그 밖의 다른 형이상학 논문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형이상학자가 말하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일 수 있을 뿐이다. <논리철학론>의 문단들은 딛고 올라가서 세계를 정확히 보게 되면 걷어차야 하는 사다리와 같다. 철학은 비철학적인 명제들을 명료화하는 활동이다. 명료해진 명제들은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비출 것이고, 그에 따라 그 철학자가 말하려는 것이 보이겠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1-5. 과학도 철학도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보여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6.철학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논리철학론>, 이것만은 철학이 해줄 수 있는 일을 했다.

2. 논리 실증주의

2-1. 비트겐슈타인은 비엔나로 돌아왔고, 자기 누나를 위해 새로 지을 집을 설계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1922년부터 비엔나 대학의 과학철학 교수로 있는 슐리크를 누나에게서 소개받았고, 그 와 함께 철학적 탐구를 다시 시작했다. 2) 반형이상학 프로그램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의 일부 발상들을 활용했고, 필연적 진리가 필연적인 것은 오로지 그것이 항진 명제이기 때문이라고 선언했다. 3) 곧바로 검증 원리의 위상과 공식에 관해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2-2.실증주의자들은 철학의 진정한 과제가 보편적인 철학적 명제를 내세운다기보다는 오히려 비철학적인 진술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 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은 비트겐슈타인과 하나가 됐다. 그들이 선택한 명료화의 방법은 경험적 진술들이 경험의 직접 기록인 요소 진술들 혹은 ‘원초’ 진술들로부터 어떻게 진리 함수적으로 형성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5)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대규모 장애물에 부딪혔다. 원초 진술들로 기록된 경험들은 각 개인에게 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만일 의미가 검증에 좌우되고, 우리 각자 다른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어떤 과정에 의해 검증을 수행한다면, 누구든 다른 누군가의 의미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슐리크는 형식과 내용을 구별함으로써 이 물음에 답하려고 했다.) 6) 비트겐슈타인은 이 해결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유아주의(solipsism_자신만이 존재하고, 타인이나 그 밖의 다른 존재물은 자신의 의식 속에 있다고 하는 생각)의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려고 분투했다.

3.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

3-1. 비트겐슈타인은 1930년대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 선생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인식론과 심리철학을 뒤집어엎었다. 데카르트에서 슐리크에 이르기까지 이전 철학자들은 외부의 공적 세계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직관이나 경험이라는 궁극적이고 직접적이고 사적인 자료들을 근거로 성립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려고 애썼다. 비트겐슈타인이 그 시절 제시한 바에 따르면, 결코 지식과 신념의 설립 기반이 아닌 사적 경험은 그 자체가 공통의 공적 세계를 전제로 하는 어떤 것이었다. 아주 은밀하고 내적인 우리의 생각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낱말들조차도 그것들이 바로 그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의 공통된 외적 담화 안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철학의 문제는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부터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을 사회적인 배경 속에서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3-2.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으로 다시 돌아온 뒤 <논리철학론>의 많은 주장들을 단념했다. 그는 논리적 원자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았고, 일상적인 말에 숨어 있는 논리적으로 명확한 언어를 찾아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실증주의자들의 원초 진술에는 분명히 맞지 않는 말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요소 명제와 요소 명제가 아닌 명제의 구별을 의심하게 되었고, 언어의 궁극 요소가 단순 대상을 지시하는 이름이라는 생각을 단념하기에 이르렀다.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과 실용주의부터 영국관념주의와 그에 대한 비판까지

1.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과 실용주의

 

1-1.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1842-1910)는 프레게보다 여섯 살 더 많았지만, 철학은 훨씬 늦게 시작했다. 그는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를 신봉한 신학자의 아들이자 유명한 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형으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국 교육을 받기도 했고, 프랑스와 독일의 학교에서 유럽교육을 받기도 했다. 화가와 의사의 갈림길에서 망설였지만 1864년 하버드 의과대학에 등록했다. 학위를 취득한 후 건강이 나빴고 조울증을 앓았으나 프랑스 철학자 르누비에(Charles Renouvier)의 저작을 읽고 회복했다. 그의 관심은 점점 경험적 심리학으로 옮겨가 1876년 처음으로 심리학 실험실을 만들었다. 심리학의 과제는 두뇌 상태를 의식의 흐름 현상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그 책이 표준적인 교과서가 되기는 했으나, 그것이 출판될 무렵 제임스는 심리학을 떠나 철학 교수가 되었다. 제임스는 과학적 세계관을 신, 자유,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과 조화시키기를 열망했다. 그는 이론적 증거를 억지로 끌어들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을 논의하면서 진리를 믿어야 할 의무가 과오를 피해야 할 의무와 비중이 같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사람들마다 각자 무엇을 신이라고 생각하든 자신을 그것과 관련 있는 존재로 이해할 때 그 사람들이 갖는 감정, 행위, 경험을 음미하려고 애썼다. 그는 신비주의 현상이나 다른 형태의 종교적 감정의 진정성과 효력이 입증되기를 기대하면서 그것들을 경험적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제임스가 미국철학의 일인자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1907년 《실용주의》 출판 덕분이었다, 그는 저작의 제목과 논지가 퍼스한테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 더할 나위없이 명료하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인지 가능한 실제적인 유형의 효과를 가졌는지를 고려하면 된다. 이와 같은 효과가 즉시 나타나건 나중에 나타나건 그 효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어쨌든 긍정적인 의의를 갖는 한, 그 당시 우리로서 그 대상에 가질 수 있는 모든 생각이다”

1-2. 그러나 퍼스의 실용주의는 의미 이론이자 인간과계에 관련된 객관적 것인 반면 제임스의 실용주의는 진리 이론이자 개인주의적이며 주관주의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퍼스는 자신의 이론이 제임스의 이론과 무관하다고 말하고 자신의 이론을 ‘프래그머티시즘(pragmaticism)’이라고 고쳐 불렀다. 제임스의 실용주의에 따르면, 관념은 그것이 우리 삶에 유익하다고 믿는 한 옳다. ‘옳음은 신념에 유리하게 좋은 것으로 판명된 모든 것을 일컫는다.’ 즉 ‘옳은 것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비평가들은 거짓을 믿는 것이 진리를 믿는 것보다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진리가 장기적인 만족과 동일시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반대했다. ‘신의 wswo에 대한 가정이 가장 넓은 의미로 만족스럽게 이릉 해낸다면, 그것은 옳다’

제임스는 자신의 이론이 객관적 실재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실재와 진리는 서로 다르다. 사물은 실재하는 것이다. 옳은 것은 과념과 신념이다. ‘실재가 옳은 것이 아니라 신념이 옳다. 그리고 신념은 실재에 대해 옳다’. 어떤 신념이 옳고 그른지를 알게 되는 것은 그 신념의 결과가 좋은지 어떤지 발견함으로써가 아니라 신념이 습관적으로 옳다 그르다고 말하는 것들의 차이점에 알기 쉬운 실용적 의미를 부여한 결과다. 관념과 실재의 대응 관계에 대한 확인이나 검증 과정을 통해서 관념을 옳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의 실용주의 체계는 어떤 실재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그 실재가 만족스럽다는 신념의 필요조건인지 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이 없어도 그 대상에 대한 신념이 만족스러울 수 있는지는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있다.

제임스는 《다원적 우주》에서 실용주의를 이용해 종교적 세계관을 옹호하였다. 그는 세상의 수많은 고통으로 인해 무한하고 절대적인 신성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하자면 초인의 인식이 능력이나 지식에 혹은 둘 모두에 한계가 있다고 믿었다. 신 역시 미래를 결정하거나 예언할 수 없으며, 세상이 더 좋아질지 나빠질지는 신의 도움 아래 인간이 행하는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

제임스는 자신의 형이상학 체계를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실용주의 프로그램은 그가 죽은 뒤 다른 사람들, 특히 듀이(John Dewey)가 이어받았다. 듀이는 교수 생활을 하면서 실용주의를 아주 특별하게 미국의 교육 분야에 적용했으며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주제에 관한 저작들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그의 변함없는 목적은 자연과학과 공학에서 그토록 성공적이었던 탐구 방법들이 인간 노력의 다른 분야들 어디까지 연장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2.영국 관념주의와 그에 대한 비판

 

2-1.그토록 굳건하게 유지되던 영국 경험주의 전통은 존 스튜어트 밀이 죽자 반발에 부딪치기 시자했다. 밀이 죽고 1년이 지난 1874년, 밸리올 칼리지의 교수인 그린(T.H.Green,1836-82)은 경험주의의 전제 가정들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상당 분량의 서문을 붙여 흄의 《인간본성론》을 출간했다. 또 머튼 칼리지의 브래들리(F.H.Bradley)는 영국 헤겔주의의 기초 고전인 《윤리학 연구》를 출간했고. 1893년에는 영국 관념주의의 완전 결정판인 《현상과 실재》를 완성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케임브리지에서는 헤겔 논리학의 방법들과 몇몇 신조들이 트리니티 칼리지의 철학자 맥타가트(J.M.E.McTaggart)가 쓴 일련의 논문을 통해 자세히 소개되었다.

제임스의 실용주의와 마찬가지로 그린의 관념주의는 어느 정도 종교적인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자연적이고 자의식적인 유일한 존재가 있으며, 실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의 활동이자 표현이다. 우리 모두는 이 초자연적인 존재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 존재의 표현인 세계의 부분들로서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가 그것을 통해 즉시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자신을 세계와 구별하는 그 자의식에 대한 약간 불완전한 상태의 분담자로서도 관련되어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관계가 도덕과 종교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브래들리와 맥타가트는 다소 간련성이 적은 기독교적인 내용의 관념주의를 배제하고, 결국 유한한 자아들의 공동체 이외의 다른 어떤 절대자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실재가 본질상 완전히 초자연적이라는 것은 영국 관념주의자들의 공통점이었다. 그들은 정신과 물질이 존재의 동등하고 독자적인 두 영역이라는 이원론적 관념을 거부했다. 그러나 브래들리의 ‘일원론’은 또 다른 근본적인 양상을 가졌다. 그는 실재가 전체상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진리성은 개별적인 원자 명제들의 속성이 아니라, 오로지 전체로서의 존재에 관한 판단들의 속성이다. 그는 《현상과 실재》엥서 우즈를 서로 아무 관련 없는 독립적 실제들의 복합체라고 생각하면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우주의 개개의 모든 것은 개개의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있다. 바로 그 본질로 인해 내적으로 관련되어있다.

2-2. 관념주의의 우월함은 20세기 초 케임브리지의 젊은 두 철학자 무어(G. E.Moore,1873-1958)와 러셀(Bertrand Russel)에 의해 결정적으로 의문시되었다. 무어는   ‘판단의 본성(The Nature  of   Judgement      ,1899)’에서 실재가 정신의 창조물이라는 근본적인 주장을 거부하는 대신 플라톤의 실재론, 즉 개념은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실재이며, 세계는 서로 결합하여 옳은 명제가 되는 그런 개념들로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관념주의 논박’(The Refutation of Idealism)에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거부했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과 온전히 다른 어떤 것이며, 우리의 지식 대상은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별개이다. 또한 물질적 대상들은 우리가 직접 지각하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관념주의에 대한 무어의 저항은 러셀에게 충격을 주었고 러셀은 잔디가 실제로 푸르다는 생각에 벅찬 해방감을 느꼈다. 무어와 마찬가지로 러셀은 관념주의를 단념하는 대신 보편자에 대한 플라톤의 신조, 즉 개개의 모든 낱말은 특수한 것이건 일반적인 것이건 객관적 실재를 나타낸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벤담의 공리주의부터 존 스튜어트 밀의 발전

1.벤담의 공리주의

1-1. 영국은 유럽 전반을 뒤흔든 극심한 체계 격변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벗어났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죽은 뒤 오랫동안 도덕적, 정치적 사고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한 권의 책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1789년 잉글랜드에서 발간되었다. 그것은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이었고, 공리주의라고 알려진 학파의 창립현장이 되었다.

벤담은 1748년에 런던의 유력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몸집이 아주 작고 책을 좋아하며 조숙했던 그는 7살에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가고, 15살에 옥스퍼드 퀸스 칼리지를 졸업했다. 21살에 법정 변호사가 되었으나, 그는 당시의 법적 관행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유명한 법학자 블랙스턴(William Blackstone)의 강의를 들을 때 이미 당시의 법률 이론을 역겨워했다. 그는 영국의 법제도가 번거롭고 인위적이고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정당한 법의 원리에 비추어 밑바닥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믿었다.

 

1-2. 벤담은 그런 근본적인 원리를 생각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흄(David Hume) 덕분이라고 했다. 《인간본성론》을 읽고 비로소 진실에 눈을 뜨게 되었고, 공리성이야말로 모든 덕의 시금석이자 정의의 유일한 기원이라고 믿게 되었다. 벤담은 국교 반대파 화하자 프리스틀리의 논문에 근거해 시민들의 최대 행복이 국정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의미로 공리성 원리를 해석했다. 즉 도덕성의 진정한 표준과 법 제정의 참된 목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stes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에 있었다.

벤담은 1770년대 《영국법 논평》에 대한 비판 작업을 하면서 일부로 사회계약 개념을 공격하는 《정부에 관한 소론》을 출간했다. 동시에 그는 이탈리아 형법학자 베카리아의 착상을 바탕으로 처벌의 목적과 한계에 대한 분석해 공리성의 원리와 더불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의 핵심을 이루었다. 벤담은 《정부에 관한 소론》에서 ‘올바름과 그릇됨의 척도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라는 원리를 맨 처음 공표하였다,

 

1-3. 그는 1785년부터 1787년까지 유럽 횡단 여행을 하면서 기발한 형태의 감옥인 팬옵티콘(Panopticon)을 생각해냈다. 팬옵티콘은 교도관이 수감자를 완벽하게 감시할 수 있는 중앙 관측소가 있는 원형 건물이다. 그는 시범 감옥을 세우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정부를 설득했으나 조지 3세의 사적인 개입 때문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법 이론과 법적 관행에 관한 벤담의 관심은 당초 주목 대상이었던 형법을 넘어 크게 확대되었다, 민법의 혼란스러움에 격분한 벤담은 《법 일반에 대하여》라는 긴 논문을 썼다. 빈민 구제법에 대해 벤담은 원형 감옥 체제가 ‘극빈자’를 위한 구제소 역할을 하도록 건립되어야하며 구제소는 입소자가 자신들의 생활 유지비를 벌기 위해 노동할 경우 배당금을 지급하는 국영 합자회사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1-4. 1808년 벤담은 때마침 기념비적인 저서 《인도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스코틀랜드 철학자 제임스 밀(James Mill)과 친구가 됐다. 밀에게는 비범한 아들 존 스튜어트가 있었는데, 벤담이 바로 그 영재의 교육을 도와주었다, 법정에서 몇 년간 증거의 적합성 검사 업무를 보던 그는 일정 부분 밀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법적 절차와 관행을 비판하기보다는 정치를 개혁하고 헌법을 개정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의회 개혁론》을 쓰고 후에 근본적인 의회 개혁 초안이 상정되었다. 벤담은 수년간 헌법 초안 작업에 몰두했으나 죽을 때까지 마치지 못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무렵, 영국의 현행 헌법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부자들의 음모를 감추는 장막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군주제와 상원을 폐지하고, 보통 선거권에 의해 선출되는 연례 의회를 도입하고 영국 국교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벤담의 입헌적이고 진보적인 제안들은 영국을 넘어 다른 곳까지 확산되었다. 1811년에 벤담은 미국의 헌법 초안을 작성해야했던 제임스 메디슨에게 자신의 구상을 제안했으며 한때 자신의 헌법 체계가 콜롬비아 대통령인 시몬 볼리바르에 의해 중남미에서 시행되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1-5. 벤담의 이상을 받아들인 ‘철학적 급진주의자’ 그룹은 공리주의자의 쟁점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1823년 《웨스트민트터 리뷰》를 창간했다. 그들은 열렬한 교육 개혁 지지자였는데 벤담은 그리스 어와 라틴 어보다는 과학과 기술을 강조하는 중등 교육 과정을 고안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1823년에 열게 되었다. 이곳은 영구에서 종교 시험을 치르지 않고 입학할 수 있는 최초의 종합 대학 수준의 대학이었다, 1832년 벤담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유언에 따라 말든 ‘실물 초상’은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벤담의 노고에 더 알맞은 기념비는 의원 선거권을 널리 확대한 ‘대개혁 법안’이었다.

벤담을 잘 아는 사람들, 심지어는 그를 열렬히 추종했던 사람들조차도 이구동성으로 그의 지적능력은 정말 특출하고 대단하지만 감정에는 결함이 있는 편협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밀은 ‘벤담의 지식이 전적으로 경험주의적이기는 하나 경험이 매우 부족한 사람의 경험주의자였다’고 말했다. 밀이 보기에 벤담은 결코 원숙한 어른이 아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어린애였다’

 2.존 스튜어트 밀의 발전

2-1.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에게는 소년 시절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엄격한 가정교육으로 그는 학교에 다니지도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 세 살에 그리스 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열두 살에 플라톤의 원전을 다 읽었다. 밀이 지난날을 되돌아볼 때 그런 특별 교육의 가장 값진 점은 아버지가 내 스스로 생각하도록 놓아두었다는 것이었다. ‘생각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면 어느 것이든 내가 그것을 스스로 이해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지 않는 한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밀은 그런 교육이 자신을 ‘단순한 추론 기계’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신경쇠약에 시달렸고 가장 효율적인 개혁 작업조차 아주 무의미하게 보일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밀은 1828년 가을 워즈워드의 시를 읽으면서 스스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워즈워드의 시는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벤담의 학문체계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던 인생의 다양한 면들을 깨닫게 했다. 그는 위기를 극복한 뒤, 벤담을 다시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으나 벤담의 학문체계가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 모두 수정, 보완될 필요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밀의 사상은 영국 시인들 그중 콜리지(Samuel Tylor Coleridge)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게 되었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생시몽(Saint-Simon,1760-1825)의 초기 사회주의와 콩트(August Comte,1789-1857)의 초기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밀은 사회주의 프로그램에 대해 확신하지는 않았으나, 사유 재산 제도와 자유 시장 제도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생시몽주의자들의 이상주의에 찬사를 보냈고 그들의 많은 원칙들, 특히 완전한 남녀평등에 관한 그들의 주장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밀이 콩트와 생시몽주의자들한테서 얻은 것은 진보(progress)에 관한 견해였다. 밀은 콩트의 유기적 시기와 그 다음 시기에 비판적이고 파괴적인 시기가 있다고 보았으며, 자신이 그와 같은 시기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판적 시기의 최선의 성질과 유기적 시기의 최선의 성절이 결합할 미래이다. 그 미래에는 아무런 구속이 없는 사상의 자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어떤 식의 행위든 개인적인 행위의 무한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 유용한 것과 유해한 것에 관한 확신 역시 어린 시절의 고육과 일반적인 공감대 형성을 통해 마음속 깊이 새겨질 것이다.’

 

2-2. 밀은 젊었을 때부터 글을 많이 쓴 사람이기는 하나 30대 말까지 책을 한권도 출판하지 않았다. 1843년에 처음으로 책을 출판했는데, 곧바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고 지속적인 관ㅅ미의 대상이 되었다. 바로 여섯 권으로 된 《논리학의 체계》다. 밀은 영국의 경험주의 전통을 19세기 현재로 갱신하려는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이 책 안에서 폭넓고 다양한 주제를 통합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정신 자체에 대해서 타인의 정신이 실존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철학자들에게 특히 어려운 문제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경험주의자들과 달리 형식 논리학과 과학의 방법론에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

밀은 추리에 관한 이론을 자세히 제시했는데, 추리를 실질적 추리(real inference)와 언어적 추리(verbal inference)로 나누었다. 정언적 추리(syllogistic inference)는 어떤 새로운 지식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적 추리다. 반면 실질적 추리는 귀납적이기 때문에 특수사례에서 일반 법칙을 도출하지 않는다. 밀은 귀납적인 과학적 연구를 안내하는 다섯 가지 실험 규칙 혹은 규준을 제시했다. 그는 그와 같은 규준들을 사용하게 되면 전혀 선천적 진리에 의존하지 않고 경험적 탐구를 진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밀은 경험주의를 현대적으로 제시하면서 전례 없는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수학의 진리성은 우리 지식의 가장 확실한 대상에 속하는 것 같은데도 경험의 결과라기보다 경험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경험주의자들에게 늘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밀은 산술학, 기하학이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경험적 가설들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후대 철학자들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 주장은 《논리학의 체계》에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목적이란 정신 외적인 진리들은 경험과 상관없이 직관(intuition)에 의해 알려질 수 있다는 그 관념을 논박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두 철학파 사이의 차이, 직관에 대한 차이와 경험 및 연합에 대한 차이는 단순한 추상적 사변의 문제가 아니다. 그 차이는 수많은 실질적 귀결들로 나타나고, 진보의 시대에 가장 커다란 온갖 실질적인 의견 차이의 바탕이 되었다.’

 

2-3. 밀이 이런 지적 전투에서 벌인 최대의 공격적 캠페인은 그의 말기 저작들 가운데 하나인 《윌리엄 해밀턴 경의 철학에 대한 고찰》에서 수행되었다. 해밀턴 경은 애든버러에서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를 역임한 개혁가인데 그는 그의 강의에서 리드의 상식철학(common-sense philosophy)을 새롭고 개선된 형태로 드러내고자 했다. 밀은 그의 책이 발간되자 온갖 형태의 직관주의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퍼부어 댈 이상적인 표적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내용에 비해 과분한 명성을 얻었으나 오늘날에는 그다지 연구되지 않는다.

밀은 1851년 20여 년간 친밀하게 지낸 해리엇과 결혼했는데 그는 그녀가 자신의 소논문 《자유론》과 《여성의 종속》의 공동 저자로 간주되어야한다고 했다, 《자유론》은 정부가 개인의 자유에 대해 간섭할 수 있는 한계를 그으려고 했는데 핵심 원리는 다음과 같다.

 

‘인류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사회 구성원 누군가에 대해 행동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보호가 목적일 경우에만 허용된다. 문명화된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그 목적이 오로지 타인에 대한 피해를 방지하려는 것일 경우에만 정당화 된다. 물질적이든 도덕적이든 자기 자신의 이익은 힘을 행사할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밀에 의하면,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절대군주이다. 《자유론》은 의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아주 명백하게 옹호하기 위해 이 원리를 여러 분야에 적용한다. 《여성의 종속》은 밀이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고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오랫동안 전개한 여성 운동의 정점이었다. 그는 1859년 《의회개혁사상》에서 ‘세금징수원이 전혀 하지 않는 차별을 선거 사무원이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모든 주택 거주자에게 남자든 여자든 투표할 권리를 주어야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남녀평등 문제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사건과 선거 개혁에 관여했다. 영국 정부의 아일랜드 강압정책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토지 소유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소논문을 출간했다. 또 그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의회 선거의 비례 대표제를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861년 《대의정치에 대한 고찰》로 출판되었다.

 

2-4. 밀의 자유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그가 죽은 뒤 체계적인 철학자로서의 명성은 급속하게 시들었다.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영국을 뒤덮은 관념주의 물결은 밀의 경험주의를 집어삼켜 버렸다. 그러나 공리주의 전통은 시지윅(Henry Sidgwick)에 의해 중단 없이 살아남았다.

시지윅은 밀의 중요한 두 원리, 심리적 쾌락주의(모든 사람은 그들 자신의 행복의 추구해야한다)와 윤리적 쾌락주의(모든 사람은 일반적인 행복을 추구해야만 한다) 사이에 부정합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실천 이성의 이중성’을 해결하려 했다. 시지윅은 사고 과정에서 심리적 쾌락주의 원리를 포기하고, 사람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선을 추구할 의무를 갖는다는 합리적 이기주의의 윤리적 원리로 대체했다.

그의 학설은 공리주의를 직관주의와 결함한 형태로 도덕에 대한 상식적 접근으로 원리를 간주했다. 하지만 그는 상식의 전형적인 직관은 아주 명확하고 구체적이지만 공리주의 도덕의 기초가 되는 직관은 다소 추상적이라고 믿었다. 예컨대 미래의 선이 현재의 선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의 관점에서 볼 때 한 사람의 선은 다른 사람의 선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공리주의의 직관을 합리적 이기주의 직관과 일치시키는 것인데 시지윅은 나의 행복과 일반적인 행복 사이의 상충을 일상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대부분 사람들이 개인의 이익과 의무를 신과 연관 짓는데 자신은 신에 호소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합리적 행위의 완벽한 이상을 고안해 내려는 인간 지성의 장기적인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사회적 혼란과 통치권에 관한 홉스의 견해

1. 사회적 혼란과 통치권에 관한 홉스의 견해

1-1.수아레스와 그로티우스는 여러 나라들이 서로 합의한 도덕적 체계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하는 자연적 질서를 유지하려면 때로는 전쟁도 필요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17세기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인 홉스는 정치의 본질에 대하여 이와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견해를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자유로운 개인들이 모인 자연 상태에서는 오직 전쟁이 계속 이어질 뿐이며, 도덕철학자의 임무는 정부에 복종함으로써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려는 개인들 사이의 합의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홉스의 대표적 저술 《리바이어던》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

홉스는 인류의 자연 상태를 매우 비관적인 모습으로 묘사한다. 본성상 인간은 정신적, 육체적 능력이 대체로 평등하지만 목적을 성취하려는 희망도 대체로 평등하기 때문에 서로 적이 된다고 보았다. 각 개인은 경쟁하는 상대방을 불신하며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한다. 개인은 동료들로부터 칭찬받기를 원하면서 그들이 자신을 경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원한을 품는다. ‘인간은 본성 안에서 우리를 서로 다투게 만드는 주요 원인 세 가지가 발견되는데 첫째는 경쟁, 둘째는 불신, 셋째는 공명심이다’

사람들을 위압하는 공통 권력이 없는 한 그리고 그런 권력이 형성되기 이전까지 사람들은 재화와 권력, 명예를 둘러싼 끊임없는 다툼과 통제할 수 없는 경쟁에 휘말린다. 이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벌이는 전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구 표면에 관한 지식, 시간의 측정, 예술이나 학문이 전혀 성립될 수 없으며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이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짧다는 점이다.”

어떤 독자들은 이런 묘사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전 세계가 이런 상황은 아닐지라도 당시의 아메리카는 바로 이런 전쟁 상태에 놓여있었다. 홉스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여행할 때 무장을 하고 여러 사람이 함께 가는 편을 선호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문단속을 한다. 집에 있을 때조차도 금고문을 단단히 잠가둔다. 우리 사회에 엄연히 법률이 있으며 치안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렇게 한다.’

1-2. 홉스는 자연의 전쟁 상태를 묘사하면서 인간이 어떤 사악한 본성 때문에 이런 상태에 빠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옳고 그름 또는 정의와 불의 개념이 설 자리가 없다. ‘공통의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법이 성립할 수 없다. 법이 없는 곳에서는 불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과 기만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두 가지 기본적인 덕이다.’ 마찬가지로 자연상태에서는 재산이나 소유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누구든지 무언가를 얻고 지킬 수 있는 한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여긴다.’

철학자들은 습관적으로 자연법(lex naturalis)와 자연권(ius naturalis)을 함께 언급한다. 하지만 홉스는 권과 권리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권리란 무언가를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자유며 법이란 무언가를 반드시 하거나 하지 말라는 명령이라고 말한다. 엄밀한 자연상태에서는 법도 권리도 존재하지 않으나 ‘자연법’은 존재한다. 이는 합리적인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우너리, 즉 생존의 기회를 최대화하려는 처방이다. 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원하는 자연적 필연성이 존재하는 한 각 개인은 모든 능력을 다하여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보존할 자연권을 지닌다.

인간들이 이런 권리를 유지하는 한 어느 누구도 자연 상태에서의 삶을 안전하게 영위할 수 없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간은 자연권이 부여한 무제한의 자유 중 일부를 포기하고 결국 다른 사람들과 같은 수준의 자유를 누리는 양보를 받아들인다. 이를 통해 자연법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기방어 권리를 제외한 자신의 모든 권리를 중아 권력에게 양도하며 중앙 권력은 처벌이라는 제재를 통하여 자연법의 준수를 강제할 수 있게 된다,

1-3. 다른 여러 자연법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제 삼의 자연법이다. 홉스는 약속(convert)를 특별한 형태의 계약(contract)으로 여기는데 계약이란 상호이익을 고려하여 자신의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홉스는 제 삼의 자연법이 없다면 ‘약속은 헛되고 공허한 말에 그칠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한 모든 사람의 권리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전쟁 상태에 머물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정의와 불의의 개념이 성립하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 또한 이 자연법이다. 왜냐하면 불의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며, 불의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것은 정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처럼 약속의 당사자들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약속은 구속력을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정의의 개념에 앞서 불의의 개념이 먼저 확립되어야하며, 약속을 어김으로써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익보다 훨씬 더 큰 처벌의 공포를 강조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약속을 이행하도록 만드는 어떤 강제적 권력이 존재해야한다.’국가가 확립도기 이전에는 이런 권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권력의 칼이 없다면 약속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할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

공통의 권력을 형성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 또는 하나의 합의체에 양도하는 것인데, 이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의 의지와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의 의지로 환원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중앙의 권력은 다수의 사람들 전체를 대표해 국가라고 불리는 하나의 인격으로 통합된다. ‘이리하여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이 탄생한다. 아니 좀 더 경건하게 말하자면 영원불멸하는 신의 가호 아래 인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지상의 신이 탄생하는 것이다.’

1-4. 하지만 홉스의 이런 설명에는 일종의 악순환이 포함되는 듯하다. 그는 약속을 강제하는 통치자가 없다면 어떤 약속도 구속력을 지닐 수 없다고 말하고 구속력을 지니는 계약을 통하여 권력을 양도받지 않는 한 어떤 통치자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두 주장은 계약과 통치자가 동시에 등장하지 않으면 해결되기 어렵다.

홉스는 자신이 왕정주의자라는 점을 일부러 숨기려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정치이론에서 통치자가 한 개인인지 아니면 집합체인지는 의도적으로 분명히 밝히지 않은 채 남겨둔다. 그는 통치 체제가 군주정이든 귀족정, 민주정이든 통치권은 절대적이어야한다고 주장한다.

홉스에 따르면 통치자는 모든 법률과 재산권의 근원이다. 그는 국가를 방어하는데 어떤 수단이 필요한지를 결정하며,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지 아니면 평화를 유지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그의 고유권한이다. 공직자, 공무원 임명, 처벌뿐만 아니라 통치자는 종교 문제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데 어떤 책을 성서로 받아들일지, 해석할지 결정하는 것은 성직자나 장로가 아닌 통치자라고 주장한다.

1-5. 그렇다면 홉스가 생각한 통치자 아래에서 국민에게는 어떤 자유가 있는가? 자유란 단지 법에 저촉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국민은 통치자가 법을 통하여 규제하지 않은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하지만 국민에게 통치자에게 명령에 따르지 않을 자유가 있는가?이에 대하여 홉스는 ‘결코 없다’고 대답하리라고 예상하지만 실제로 그는 국민들이 통치자에게 불복종할 자유를 상당히 인정한다.

“만일 통치자가 어떤 사람에게 (설령 그가 정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손상하거나, 불구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또는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지 말라거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음식이나 공기, 약품 또는 그 외의 어떤 것이라도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그 사람은 이런 명령에 따르지 않을 자유를 지닌다. ‘

국민은 자신의 유죄를 자백하고 강요당할 수 없으며, 통치자의 명령을 받더라도 군인으로 전쟁에 나가 싸우지 않아도 된다. 홉스는 남성도 여성과 같이 겁이 많다는 이유로 참전을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도망치는 게 비겁할지는 몰라도 부당한 행위는 아니다. 참전이 의무로 부과되는 때는 위급한 상황뿐이다. 마지막으로 ‘통치자에 대한 국민의 의무는 통치자의 권력이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한에서만 유지되며,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어야한다.’ 따라서 만일 통치자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자신의 주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통치자에 대한 의무 또한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1-6. 《리바이어던》에 등장하는 국가에 관한 이론은 무척 독창적이며 강력한 지적 체계를 드러내며 그것이 지닌 구조는 홉스 당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여러 정치철학자의 저술에 크게 반영되었다. 그의 체계는 비록 절대적인 통치권을 강조하지만 전체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오직 국민들을 위해서 존재하며 그 반대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홉스는 통치자의 정당성을 신의 권위에 조금도 호소하지 않고, 더욱이 인간 본성의 궁극적 원인이라는 신의 역할에도 전혀 의존하지 않고 오직 국민들 사이의 계약으로부터 직접 이끌어 낸 최초의 철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