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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전쟁과 정의롭지 않은 전쟁

1.정의로운 전쟁과 정의롭지 않은 전쟁

1-1. 전쟁에 대한 유토피아 사람들의 태도에 관하여 논의하면서 모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이 전쟁을 하는 유일한 목적은 오직 사전에 확보했더라면 선전포고를 막을 수 있었을 상황을 얻기 위함이다.‘ 이런 규칙에 따를 경우 무조건 항복이나 전쟁 중 임무를 변경할 가능성 등은 완전히 배제된다. 모어 자신은 헨리 8세가 일으킨 전쟁에 여러 번 참여했지만 정작 정의로운 전쟁과 그렇지 않은 전쟁을 구별할 원리를 체계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이런 원리를 제시한 인물은 16세기 말에 등장한 예수회 소속의 신학자 수아레스(Francisco Suarez)였다.

1-2. 수아레스는 아퀴나스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정의로운 전쟁에 관한 고전적 이론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원리로 요약한다. “첫째, 합법적인 권위를 지닌 당사자에 의해서 선전 포고가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정당한 원인과 명분이 있어야 한다. 셋째, 전쟁의 개시와 진행 및 승리의 과정에서 적절한 수단과 균형이 드러나야 한다”

수아레스가 말한 합법적인 권위를 지닌 당사자라는 조건은 오직 통치권을 지닌 정부만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나라의 개인이나 집단은 불화를 무력으로 해결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교황은 초국가적 권위를 지니므로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 대립을 해소하는데 개입할 권리를 지닌다.

수아레스는 전쟁의 정당한 원인으로 두 가지를 인정한다. 자신의 나라가 공격받을 경우 무력을 사용해 나라를 방어할 권리를 지닌다. 또한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전쟁이 정당한 경우도 있는데 자신의 나라 또는 동맹국이 당하리라 예상되는 중대한 부당행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공격일 때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승리하리라는 충분한 희망이 있어야하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무력에 의지한다면 부당행위를 막을 수 없다.

세 번째 조건은 다시 세 요소로 구성된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통치자는 잠재적인 적국이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악함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어야한다. 그렇게 했음에도 사악한 일이 계속된다면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다. 또 전쟁 중에는 반드시 필요한 폭력만을 이용해야하며 끝난 후에는 적절한 보상과 정당한 처벌이 이루어져야한다.

1-3. 수아레스는 이들 중 두 번째 요소가 전쟁과 무관한 사람들에 대한 의도적인 공격을 금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누가 진정 전쟁과 무관한 사람인가? 자연법은 어린이와 여성들, 무력에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이 무관하다고 말하며 실정법에 따르면 대사와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은 금지된다. 하지만 수아레스는 이들을 제외한 무기를 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전쟁과 관련된다고 보았다.

수아레스는 자신들 규칙들이 기본적으로 통치자들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투 명령을 받는 일반 병사들은 명백한 불의가 드러나지 않는 한 정의롭게 여기기 때문에 통치자만이 스스로 전쟁에 대해 숙고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해 전쟁을 정의롭게 만드는 조건을 충족시킬 의무를 가진다.

1-4. 전쟁의 도덕성에 관한 수아레스의 주장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로티우스(Hu해 Grotius)로 이어지면서 훨씬 폭넓게 전파되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법학자이며 외교관이었던 그로티우스는 1625년 위대한 저술 《전쟁과 평화의 법》을 출판했으며 종교에 기초한 법의 개념으로 벗어나기 위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도덕 이론을 제시한다. 그가 종교적 신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종교전쟁을 통해 특정 종교에 대한 신앙이 안정적인 국제 질서를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관념과 인상에 관한 흄의 견해

1. 관념과 인상에 관한 흄의 견해

1-1. 사고와 심성을 동일시하려는 경험론자의 태도는 흄의 철학에서 가장 극단적인 지점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흄은 모든 지각을 ‘관념’이라고 부르는 대신 인상과 관념이라는 두 종류로 구별함으로써 로크와 버클리의 주장을 개선하려한다. 흄은 모든 사람이 감정과 사고의 차이를 안다고 말한다. 감정은 인상, 즉 감각 및 정서와 관련된다. 반면 사고에는 관념이 포함된다.

여기서 흄이 말하는 관념이 정신적 심상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이 관념은 인상과 유사하지만 덜 강력하고 덜 생생하다. 단순 관념은 인상의 모사에 지나지 않으며 이를 옹호하기 위해 그는 사고 실험을 통한 경험에 호소한다. 예컨대, 파란색만 지각하지 못한 사람은 당연히 특정한 색조가 빠져있는 빈자리를 지각한다. 또한 그 사람은 상상력으로 빠져있는 파란색의 색조를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보충하고 이에 따른 관념을 스스로 떠올린다.

이런 사고 실험을 통하여 그는 모든 관념이 인상으로부터 도출된다는 자신의 원리에 대한 예외를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런 사례는 무척 드물기 때문에’와 같은 말로 제멋대로 반례를 무시한다. 어쨌든 그는 ‘앞선 이상이 없다면 관념 또한 없다’라는 원리를 형이상학을 공격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1-2. 생생함의 정도를 사용하여 관념과 인상을 구별하는 기준은 생생함에 근거하여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관념, 즉 기억에 관한 관념과 상상에 의한 관념을 구별한다. 그는 기억의 관념이 상상에 의한 관념보다 훨씬 생생하고 강렬하다. 또한 기억과 달리 상상에 의한 관념은 인상이 지닌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과 상상에 의한 관념 모두 자신에 선행하고 대응되는 인상을 지녀야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렇다면 기억에 관한 관념과 상상에 관한 관념을 구별하는 두 가지 기준이, 즉 생생함과 질서정연함이 마련된다. 하지만 이런 기준들을 어떻게 활용해야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들을 통해 진정한 기억과 공상적 기억을 구별할 수는 있겠지만 회의의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공상이 기억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를 압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1-3. 흄은 기억이 정신 안에 일련의 과거 사건들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억에는 수 많은 종류의 기억이 존재하며 상상도 마찬가지로 공상을 펼치는 정신의 자유로운 활동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괄한다. 상상은 착각, 가정, 창조적 독창성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는 기억과 상상 안에 다양한 정신적 사건과 능력, 활동을 모두 포함시킬하지만 이들 모두를 오직 경험론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강요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동시에 흄의 설명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듯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새소리를 듣고 그것의 선율을 정신 안에서 재현할 때 우리는 나와 새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니라 새가 내는 듯이 보이는 생생한 소리를 내가 접한 결과인 것이다. 그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지각뿐이라는 경험론의 주장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의 삶 또한 내적 감각의 연속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2-1. 그렇다면 기억과 상상 사이의 차이 또한 내적 감각을 통해 밝혀져야 한다. 누군가는 이들 사이의 차이가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 자신도 우리가 스스로 믿지 않는 것들을 상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신적인 상태를 이런 방식으로 분류한다면 그는 믿음에 적절한 지위를 부여하기 어렵게 된다.

단순히 p를 생각 하는 것과 실제로 p를 믿는 것 사이의 차이가 내용의 차이일 수는 없다. 흄이 표현하듯 믿음은 우리가 믿는 바를 구성하는 관념 또는 관념들에 어떤 특별한 관념을 더함으로써 형성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관념이라도 자유롭게 더할 수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바를 선택해서 믿을 수는 없다. 이를 지지하는 근거는 만약 특별한 관념을 더함으로써 믿음이 형성된다면 누군가는 카이사르가 침대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믿는 것과 카이사르가 침대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서로 전혀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동일한 명제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2.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에서 흄은 믿음이 ‘그저 느슨한 공상이나 몽상과는 다른, 어떤 감정이나 정서를 동반하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일종의 인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흄은 이런 생각이 경험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믿음은 오직 관념들로만 구성되지만 그는 여전히 관념은 감정에 동의한다고 고집하면서 강력함, 생생함, 견고함, 확고함, 견실함 등의 용어로 예를 든다. 결국 그는 ‘이런 감정 또는 태도의 개념을 완벽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고’ 고백하면서 논의를 마친다.

2-3. 믿음의 특징을 생생함으로 설명하려는 흄의 시도는 그의 체계 안에서 난점을 일으킨다. 이와 관련해 흄은 명백한 관념도 아니고 명백한 인상도 아닌 지각에 놀란다. 예컨대, 우리는 침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떠나지 않았다는 카이사르의 예에서 이 둘의 기억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의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두 경우 모두 생생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의 최대 난점은 믿음이 상상을 포함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믿음에 상상이 포함될 경우 강박적인 공상이 실제 믿음보다 생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4. 흄은 뉴턴이 물리학에서 행한 바를 인식론에서 행하기 위하여 관념의 연상을 도입했는데 여기저기 흩어진 매우 적은 언급만으로 이를 해결하려는 그의 착각에는 다소 안쓰러운 면이 있다. 하지만 그의 철학적 심리학이 너무나 빈약하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는 솔직하게 경험론 전통의 허점과 모순을 인정했다. 그의 통찰은 이 전 철학자들의 심리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계속해서 연구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는 인식론에서 새로운 형태의 회의주의를 제시하면서 크게 기여했다

그의 회의주의는 관념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명제와 사실을 표현하는 명제 사이의 구별로부터 출발하는데 그는 어떤 사실이라도 부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더라도 결코 모순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내일 해가 떠오를 것과 떠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명제 중 후자의 명제를 믿는가?

2-5. 흄은 사실의 문제에 관한 우리의 모든 추론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인과 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가장 단순한 자연의 규칙성도 경험 없이는 확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는 서로 전혀 다른 사건이며 전자로부터 후자를 추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자연의 규칙성을 배운다는 것이다. 하지만 흄은 이에 대한 고찰을 계속해 나간다. 그는 설령 우리가 원인과 결과의 작용을 경험한 후라 할지라도 경험으로부터 이런 결론을 이끌어낼 근거가 과연 이성 안에 존재하는지를 묻는다. 우리는 미래의 대상이 과거의 대상과 유사하리라고 단지 현상적으로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다음 번에 내가 주잔자를 다시 난로 위에 올려놓았을 때 물이 끓지 않으리라는 가정은 아무런자기모순도 포함하지 않는다. 경험에 근거한 어떤 논증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연의 전행이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허용한다면 경험을 신뢰할 만한 인도자로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가 과거와 유사할 것이라는 시도는 명백한 순환 논증에 빠진다.

2-6. 그렇다면 엄밀한 논증의 수준에서는 회의주의가 승리를 거두는 듯하다. 하지만 흄은 이런 발견 때문에 낙담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추론보다 더 강력한 원리인 습관을 통해서 자연의 규칙성을 믿게 된다. ‘두 가지 대상이 -예를 들면 뜨거움과 불꽃이, 무게와 단단함이- 서로 항상 연결되는 것을 본 후에 우리는 하나의 현상이 다른 현상으로부터 등장하리라고 오직 습관적으로 기대할 뿐이다.’ 인간의 삶은 주로 추론이 아니라 습관에 의해서 인도된다.

흄

1.흄

1-1. 버클리가 더블린에서 경험론의 형이상학을 세상에 선보인 직후에 경험론의 원칙을 형이상학에 반대하는 극단까지 밀고 나간 철학자가 에든버러(Edinburgh)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흄(David Hume)이다.  그는 1711년 스코틀랜드 작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에든버러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과 사랑에 빠진다. 뒤이어 법률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는데 포기했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철학과 폭넓은 배움을 추구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모든 일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혐오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또한 1734년부터 37년까지 양주의 라 플레슈라는 이전에 데카르트가 예수회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했던 곳에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첫 번째 저술이자 가장 중요한 저술인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썼다.  출판된 당시 책은 많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가 세상에 떠난 후 이 책은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20세기 영국 경험론자들은 이를 영어로 쓴 철학 저술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격찬했다.

2-1. «논고»는 모두 세권으로 구성되는데 ‘지성에 관하여’, ‘정념에 관하여’ 는 1739년에, ‘도덕에 관하여’는 1740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의 목표는 초판의 부제에 언급된 대로 실험적인 추론 방법을 도덕적 주제들에 도입하려는 시도이다.  그는 실험적 방법을 도덕적 주제들에 적용함으로써 뉴턴이 물리학에서 행한 바를 자신은 심리학에서 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관념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고 지금까지 형이상학자들이 잘못 해석하여 혼란스럽게 된 인과성이나 의무 등의 개념을 자신이 처음으로 확실히 해명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학문은 우리에게 이익을 준다. 이제 우리는 지식의 변방에서 작은 요새를 지키는 대신 ‘이런 학문들의 중심 또는 중앙을 향하여, 인간 본성 자체를 향하여 직접 행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2.  «논고»의 1권은 정신의 내용물을 경험론적으로 분류하는 작업과 더불어 시작된다. 여기서 로크 및 버클리 인식론의 근거가 많이 등장하지만 흄은 지각을 오직 인상과 관념으로 나눈다. 인상은 관념보다 강렬하며 생생하고 감각과 감정을 포함한다. 반면 관념은 사고와 추런을 포함한다. 그는 기억과 상상력의 관념 및 관념들 사이의 연상을 상세히 다루면서 로크의 추상관념에 대한 버클리의 비판을 더욱 강화한다.

«논고»의 1권 2부에서 그는 공간과 시간의 관념을 다룬 후 ‘지식과 개연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절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한다. 그는 감각이 직접 전하는 바를 넘어서서 확장된 모든 지식은 원인과 결과의 관념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과거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또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 추측하는 일은 모두 이 두 관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두 관념의 근원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관성의 관념이 본래 대상에 속하는 그 어떤 성질로 부터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서로 전혀 다른 종류의 대상들이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신 이 대상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아야한다. 그러면 우리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근접해서 발생하고 원인이 시간상 결과에 앞선다는 점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원인과 결과를 선언하기에 충분치않다.

그는 몇 페이지에 걸쳐 뛰어난 논증을 펼친 후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의 추론이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연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연결이 우리가 원인으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추론에 의존한다. 즉 원인과 결과 사이에 필연적 연결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믿음은 추론이 아니라 습관의 산물이다.

2-3.  «논고» 2권에서 정념 또는 감정에 관하여 탐구함으로써 흄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행보를 따른다. 하지만 이 주제는 합리론 철학자들보다 흄에게 더 큰 중요성을 지니는데 왜냐하면 흄은 합리론자들이 이성의 활동으로 여겼던 수많은 작용을 정념의 역할로 돌리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정념은 특별한 종류의 인상이다. 지각을 인상과 관념으로 나눈 후에 흄은 다시 인상을 원초적 인상과 이차적 인상으로 분류한다. 감각적 인상과 육체적 쾌락과 고통은 원초적 인상인 반면 정념은 이차적 인상에 해달되는데 이것이 바로 2권의 주제를 형성한다.  그에 따르면 이성 자체는 어떤 행위도 산출할 수 없다. 모든 자발적인 행위는 정념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된다. 이성은 결코 정념을 이길 수 없으며 오직 상반되는 정념만이 정념을 이긴다.  ‘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또한 노예여만 한다. 그리고 이성은 정념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임무도 탐내서는 안된다’

2권 끝부분에서 우리는 흄의 윤리 체계가 다른 전통적인 도덕철학과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예상한다. 이성은 우리를 행위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도덕 판단을 이성의 산물일 수 없다.  도덕판단의 목표는 오직 우리의 행위를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오직 정념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우리의 정념에 원인을 제공하지도 평가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해야만 한다’는 ‘이다’로부터 도출될 수 없으며 우리가 이끌어 내야 하는 결론, 즉 선과 악, 옮고 그름 사이의 구별은 이성이 아니라 도덕감의 산물이다.

2-4. 이를 기초로 삼아  흄은 «논고» 3권 2부에서 정의와 불의에 관해 논의하며, 자비심이나 정신의 위대함 같은 인간 본성의 덕을 다룬다. 그는 도덕적 구별의 주요 원천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sympathy)의 감정이라고 결론 짓는다. 예컨대 정의가 칭찬받는 까닭은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기 때문이지만 만약 공감의 감정을 통해 공공의 이익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  ‘덕은 오직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오직 그 목적이 가치있을 경우에만 수단 또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행복은 오직 공감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홉스

1. 홉스

1-1. 1641년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고 평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인물 중에는 당대 최고의 영국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도 포함되었다. 홉스는 영국 함대가 스페인의 무적함대(Spanish Armada)를 격파한 1588년에 태어났기에 이런 요청을 받을 때는 53세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후 캐번디시 가문의 가정교사와 베이컨의 서기로 일했다. 1629년 투키디데스(Thucydides)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데카르트 친구인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메르센 신부는 그를 ‘철학의 모든 분야에 능통한 탁월한 학자’라고 기록했다. 1640년 홉스는 《자연법과 정치적인 법의 기초》를 영어로 출판하면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이 구성한 사회에 대한 그의 핵심적인 철학 원리들을 잘 드러냈다. 그 해 그는 장기 의회(Long Parliament)의 활동으로 내전을 예상하고 파리로 도피해 10년 이상 그곳에서 후에 왕위에 오르는 찰스 2세의 개인 교사로 지냈다. 그 동안 그는 《시민론》를 출판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상당한 명성을 그에게 안겨다주었다.

1-2.데카르트에 대한 홉스의 평가를 보면 홉스가 《성찰》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음이 드러난다. 이 두 철학자는 전통적으로 서로 정반대되는 철학의 양극단에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사실상 이 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예를 들어, 이 둘은 모두 수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홉스는 데카르트의 해석 기하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에 대해 ‘정합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묘하게도 말년에 홉스는 기하학 연구에 진지하게 몰두하며 옥스퍼드 수학 교수들과 몇 년 동안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외에도 데카르트와 홉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를 경멸했고 당시의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판을 치는 현실을 비난했다. 또한 둘은 한창 때를 망명 생활로 보냈으며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둘 다 스튜어트 왕가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이들은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을 경멸하며 모국어로 글쓰는 능력이 탁월해 전문 학술서뿐만 아니라 대중을 위한 책도 썼다.

이 두 철학자가 서로 일치된 의견을 보인,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논점은 이들이 각각 물질세계는 오직 운동의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확신한 점이다. 홉스는 ‘일반적인 사물의 원인은 저절로 드러나거나 아니면 사물의 본성을 통해 알려진다. 따라서 어떤 방법도 전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물은 모두 오직 하나의 보편적인 원인, 바로 운동이라는 원인을 갖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홉스는 데카르트와 같이 색과 소리 같은 제이성질과 같은 모든 우연적 속성들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점을 부정하며 광학이 감각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데 같은 의견을 보인다.

1-3.홉스는 데카르트의 철학의 절반, 즉 물체에 관한 철학과는 상당히 유사한 견해를 보이지만 나머지 절반, 즉 정신에 관한 철학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사실 홉스는 데카르트가 생각한 의미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홉스는 연장성을 지니지 않고 운동하지 않는 비물질적인 실체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천사든 신이든 비물질적인 정신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홉스의 유물론에 대해 신의 존재를 그가 어떻게 여겼는지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인간이 정신과 물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된다는 이원론을 확실하게 거부했다는 점이다.

데카르와 홉스는 수많은 철학적 태도와 선입견들을 서로 공유했지만 홉스는 유물론을 선택함으로써 데카르트에 반대하는 대표적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유물론과 이원론이라는 형이상학적 차이에 더하여 철학사가들은 이 둘을 인식론에서 반대되는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의 창시자로 여긴다. 사실 이 두 학파의 차이는 표면상 드러나는 것만큼 크지 않다.

1-4. 홉스는 데카르트보다 거의 30년을 더 살았지만 1650년 데카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프랑스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파리에서 신교도로 사는 것과 그를 구교도로 개종시키려는 메르센의 시도에 큰 불편함을 느꼈다. 또한 큰 병을 앓으면서 영국 성공회이ㅡ 의식에 따르겠다고 고집하기도 하면서 파리 마지막 해에 철학사에 영원히 남게 될 《리바이어던 또는 교회 국가 및 시민 국가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권력》을 썼다.

어떤 국가 조직도 없는 자연 상태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이런 자연 상태는 오직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에 지나지 않음을 보임으로써 홉스는 사람들이 합리적인 자기이익의 원리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무제한의 자유를 포기하고 결국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부과되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제한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자기 이익의 원리에 따라 사람들은 자기방어의 권리를 제외한 다른 권리들을 중앙의 권력에게 양도함으로써 이 권력이 처벌을 통하여 법률을 강요할 수 있도록 만든다. 여기서 맺은 사람들이 맺은 계약을 통해 최고 통치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계약에 참가하지 않으므로 위반할 계약 자체가 없다. 이런 통치자는 법률과 재산권의 근원이 되며, 국가를 구성하기 위한 최초의 계약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서로 맺은 개별적인 계약을 지키도록 강제한다.

1-5.《리바이어던》은 1651년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이 저술에는 절대 왕정을 세련되게 지지하고 있지만 당시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찰스 2세는 이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당시 찰스 2세가 궁정에서 추방당하고 홉스의 구교도 친구들도 세상을 떠나자 그는 영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영국은 찰스 1세의 처형 이후 호국경(Protector) 크롬웰(Oliver Cromwell)의 통치 아래 있었다.

크롬웰의 통치 기간 동안 홉스는 조용히 런던에 머물면서 정치철학에 관한 어떠한 저술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홉스는 자연철학에 관한《물체론》을 1655년 라틴어, 1656년 영어로 출판하고 밀턴의 《실낙원》에 등장하는 구절에 대해 브램홀 주교(Bishop Bramhall of Derry)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658년 홉스는 《인간론》을 라틴어로 출판했는데 이 또한 《시민론》과 마찬가지로 《법의 기초》에 등장했던 몇몇 사상들을 영어권 외부의 독자를 위해 다시 쓴 것이었다.

홉스는 1660년 찰스 2세가 영국으로 돌아와 왕위에 복귀하면서 궁정의 환영과 연금을 받게되었지만 다른 신하들로부터는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리바이어던》은 심각한 의혹의 대상이 되어 몇몇 주교들이 그를 이교도의 죄를 물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다.

1660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홉스는 런던과 체츠워스(Chatsworth), 하드윅(Hardwick) 등지의 데번셔(Devonshire) 백작 가문의 저택에 주로 머물렀다. 그는 더 이상 철학에 관한 저술을 쓰지 않고 《일리아스》《오디세이》번역에 몰두하면서 《베헤못》이라는 영국 내전의 역사에 관한 저술을 출판하려했지만 왕의 만류로 포기했다. 그는 1679년 91세의 나이로 하드윅 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말년에 파킨슨병에 걸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기찬 삶을 유지했다고 한다.

1-6. 홉스가 철학사에서 명성이 높은 까닭은 주로 그가 정치철학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언어철학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언어는 우리를 야수와 구별해주며, 학문을 추구할 수 있게 한다고 역설한다. 언어의 목적은 우리의 사고 과정을 연속된 단어로 바꾸는 것인데, 언어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첫째, 과거와 현재 모든 것들의 원인, 결과를 기록하는데 사용한다. 둘째, 얻은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상의하며 가르치는데 사용된다. 셋째, 우리의 의도와 목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 서로 도울 수 있게 사용되며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데 사용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언어의 네 가지 효용과 대비되는 네 가지 악용의 사례도 있는데 이런 악용을 피하려면 대단한 수고가 필요하다. ‘언어는 마치 돈과 같다. 현명한 사람들은 오직 계산을 할 때만 이를 적절히 사용하지만 바보들은 이를 무턱대고 써버린다’

홉스는 철저한 보편명목론자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단어들은 이름뿐인데 이름은 오직 개체들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름이 어떤 형태를 취하던 간에 그것은 하나 또는 다수의 개체 이외의 어떤 것도 결코 지시할 수 없다. ‘인간’과 같은 보편적인 이름은 세계 안의 어떤 보편적인 사물이나 우리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체들을 지시할 뿐이다. ‘이 세계에서 이름을 제외하면 보편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이름은 그것에 속하는 모든 개별적인 개체들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홉스는 이름들이 한데 모여 문장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만일 ‘소크라테스는 정의롭다’라고 말하면 여기서 ‘정의롭다’와 ‘소크라테스’와의 관계는 이 단어의 관계와 동일하다. 또한 문장 안에서 두 이름이 모두 동일한 것을 지시할 경우 그 문장은 참이 되는 반면 두 이름이 동일한 것을 지시하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

홉스의 두 이름 이론은 소박한 형태의 의미론에 해당하지만 이에 대하여 이미 중세부터 등장했고 특히 19세기 프레게(Gottlob Frege)의 저술을 통해서 제기된 심각한 논리적 비판을 견디지 못했다. 홉스식의 이론은 중세의 오컴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미숙했지만 그의 이론은 영국 경험론자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그들 자신이 오컴과 홉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2.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

2-1.  17세기 중반 홉스 및 데카르트와 다른 견해를 보이는 여섯 명의 영국철학자들이 등장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커드워스(Ralph Cudworth, 1617~88)를 비롯한 다섯 명은 케임브리지의 엠마누엘 칼리지를 졸업했으며, 다른 한명인 모어(Henry More, 1614~87)는 크라이스트 칼리지를 졸업했는데 커드워스는 이 칼리지에서 30년 동안 교수생활을 하기도 했다. 추종자들은 이 들을 존경, 찬양하며 이 그룹을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케임브리지 출신이었지만 당시 영국 내전 동안 케임브리지 지역과 대학을 지배했던 청교도주의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이들은 칼뱅의 예정은총설을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이 지닌 장점을 주장했다. 하지만 무신론자에게까지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는데 특히 이들은 홉스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홉스의 유물론이 결국 무신론에 이르리라고 본 것이다. 또한 이들은 찰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 성공회를 중심으로한 계층 질서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했으며 결국 찰스 1세의 퇴위와 처형으로 이어지게 했다. 그들은 ‘주교 없이는 왕도 없다’는 정치 구호를 ‘정신 없이는 신도 없다’고 외치면서 유물론자인 동시에 유신론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데카르트 편에 서서 홉스에 반대하는 특히 정신과 물체의 구별을 강조했다. 모어의《무신론에 대한 해독제》《영혼의 불멸성》, 커드워스의《우주의 진정하한 지적 체계》 등의 저술을 통해 이들이 인간 영혼의 불멸성과 정신적인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데 얼마나 몰두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모어는 인간이 ‘감각과 이성 그리고 지상의 여러 가지를 인간에게 적합하게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정신적인 피조물’이라고 보았고 커드워스는  우리 안에 신의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현존이 증명된다고 주장한다. 신의 관념은 일관성을 지니고 실제적이거나 실재를 필요로하기 때문에 신은 반드시 현존한다는 것이다.

2-2.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본유 관념의 존재를 믿었다. 이들에 따르면 정신은 텅 빈 백지가 아니라 닫혀있는 책과 같다. 감각은 단지 이 책을 여는 역할을 할 뿐이다. 모어는 정신 안에 다양한 본유관념이 들어있다고 보았는데 이 중에는 근본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도덕원리들도 포함되어있다. 커드워스는 정의와 불의가 단지 인간이 맺은 계약의 결과로 등장한다는 홉스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의 삶과 죽음의 권한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를 통치자에게 양도할 법 따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근본적인 도덕 원리들의 근거를 설명하면서 데카르트와 의견을 달리한다. 커드워스는 도덕을 비롯한 다른 영원한 진리들이 신의 전능한 의지에 의존하기에 원리상 변화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덕과 신성함은 신이 이들을 사랑하여 선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선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오직 그 자체로 선하기 때문에 신은 이들을 사랑할 뿐이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물체의 세계에 대한 데카르트의 설명을 접한 후 그와 더욱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과학의 새로운 발전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현상을 기계론적인 운동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부했다. 이들은 데카르트와 달리 동물도 의식과 감각적 영혼을 지닌다고 믿었으며 심지어 낙하 운동을 설명할 때에도 비물질적인 원리의 작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신이 모든 것을 직접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신이 물리적 세계에 일종의 매개체로서 규칙적이고 목적론적으로 작용하는, 세계 영혼과 유사한 ‘균형 잡힌 세계를 형성하는’ 임무를 맡겼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데카르트와 같이 목적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기계론적인 유신론자’에 지나지 않고 홉스같은 유물론자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보았다.

갈릴레오부터 베이컨까지

1.갈릴레오

1-1. 종교 재판에 넘겨져 고통받은 또 한 사람의 이탈리아 철학자 갈릴레오(Galileo Galilei)에게로 눈을 돌리면 브루노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발견한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동시대를 살고 피사(Pisa)에서 태어난 그는 1589년그 곳 대학의 수학교수가 된 뒤 1592년 파도바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18년동안 교수생활을 했다.

갈릴레오는 이미 젊은 시절에 여전히 당대를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브루노처럼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실험과 관찰 결과에 기초하여 비판했다.  그는 성당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등의 운동을 관찰한 후 추가 한번 진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오직 추가 맫라린 줄의 길이에 좌우될 뿐 무게나 진동의 크기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피사의 사탑에서 서로 무게가 다른 쇠공을 떨어뜨려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낙하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잘못임을 증명했다고 전해지는데 실제로 이 실험은 행하지 않았음이 거의 확실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기초한 ‘외부의 원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어떤 물체도 운동하지 않는다’는 원리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저항이 없을 경우 서로 다른 무게의 물체가 주어진 거리를 낙하하는 데 동일한 시간이 걸리고, 두 물체에 작용하는 가속도가 일정하다는 사실을 실제로 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또한 그는 정반대로 운동하는 물체가 마찰과 같은 정반대로 작용하는 힘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 계속 운동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후에 데카르트와 뉴턴이 주장한 관성의 원리들을 예건했다.

1-2. 역학을 다룬 저술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그는 위대한 과학자의 반열에 오르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는 또한 유체 정역학의 분야에서도 중요한 사실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에게 명성과 시련을 안겨 준 것은 천문학 연구였다. 그는 새로 발명한 망원경을 통해 목성을 네 위성을 발견하고 이 위성들을 토스카나의 코시모 2세 대공을 기리는 의미에서 ‘메디치 가문의 별들’이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그는 태양의 흑점,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천체가 투명한 5원소가 아닌 지구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을 묶어 그는 1610년 «별들의 소식»이라는 책을 출판해 코시모 대공에게 헌정한 뒤 토스카나 궁정의 종신 철학자 겸 수학자로 임명되었다.

이런 일 후 그는 금성이 가로지른 행성이 달의 위상과 유사한 위상을 보인다는 사실을 관찰한 후 금성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할 때만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의 행성으로서 자신의 궤도에 따라 운동하는 목성의 주위를 도는 위성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지지하는 강력한 근거로 제공했다.

처음에 그는 이러한 자산의 천문학적 발견을 통해 얻은 결론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데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로마 교무 위원회가 그의 관찰에 대해 공식적인 지적을 한 뒤 부터 그는 태양 중심설에 기초한 여려 견해를 폭넓게 전파했다. 마침내 1613년 그는 태양의 흑점을 다루는 책의 부록에서 자신이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한 성직자는 이를 태양 중심설을 성서에 어긋나는 것으로 비난했다. 이에 갈릴레오는 로마로 가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해명하기로 결정했다.

로마로 떠나기 전 그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예수회 출신의 추기경 벨라르미노(St. Robert Bellarmine)에게 편지를 써서 태양이 운동한다고 말한 성서 저자들의 언급은 단지 관용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벨라르미노는 이 문제를 종교 재판소에서 논의 한 후 태양 중심설이 이단이며 지동성은 오류를 범한 것이라는 의견을 내렸다. 당시 교황 바오로 5세의 훈령에 따라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그에게 어떠한 주장도 옹호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했다.

이렇게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벨라르미노는 당시 가장 위대한 과학자보다도 더욱 건전하게 과학철학을 파악했으며, 갈릴레오는 당시 가장 유명한 신학자보다도 더욱 건전하게 성서를 해석했음을 드러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둘의 대립은 수긍할만하지만 논쟁 과정에서 양측 주장이 서로에게 진정 공정하게 반영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실제로 갈릴레오가 자신의 저술이 정죄 받지 않은 그 후 몇년 동안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다.

1624년 갈릴레오는 다시 한 번 로마로 갔다. 당시 바오로 5세 와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이미 세상을 떠나씅며 우르바누스 8세가 새로 교황의 자리를 오른 뒤였다.  새 교황은 갈릴레오의 천문학적 발견을 열렬히 옹호했으며 갈릴레오는 태양 중심설을 선호하지 않고 두 우주관을 공정하게 다룬다는 조건으로 프롤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을 다룬 체계적인 저술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632년 갈릴레오는 교황청 검열관의 승인을 얻은 후 «두 가지 중요한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를 출판했다. 그러나 책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 중 전통적인 지구 중심설을 옹호하는 심플리키우스의 이름이 ‘바보'(simpleton)라고 해석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갈릴레오는 교황의 분노를 샀다. 결국 1633년 갈릴레오는 로마의 종교재판소에 회부되어 태양 중심설을 취소하지 않으면 고문을 당하리라는 위협을 받았다. 그는 종신형 판결을 받았지만 실제로 감옥에 갇히지 않고 가택 연금 상태로 지냈다.

가택 연금 상태였지만 그 동안 그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당시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 새로 세워진 하버드 대학교에서 초빙교수직을 제안받기도 했다. 그는 점점 눈이 멀어갔지만 저술 활동을 멈추지 않고 필생의 대작인 «새로운 두 과학에 관한 논의와 수학적 증명»을 완성했다. 이 책은 1638년 레이덴에서 출판되었으며 그의 저술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갈릴레오는 브루노를 비롯한 다른 많은 종교 재판소의 죄인들에 비해 훨씬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그에 대한 유죄 판결은 전 유럽에 걸쳐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우선 이탈리아에서 과학적 탐구가 쇠퇴하고 심지어 개신교가 지배한 네덜란드에서조차 데카르트가 자신의 과학적 우주론을 출판하는 것을 몇년씩 미루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교가 갈릴레오에게 잘못을 저질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으나 이미 350년이나 지난 후였다.

2. 베이컨

2-1. 갈릴레오와 같은 시대에 영국에서 활동했던 베이컨(Francis Bacon)은 갈릴레오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반감을 품었지만 과학적 방법의 실천보다는 그것에 대한 이론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1561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후 그레이스 인(Gray’s Inn)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584년 의회에 진출했으며 뒤이어 당시 영국 여황 엘리자베스의 총애를 받던 에섹스 백작(the Earl of Essex) 변호인이 되었다. 하지만 백작이 반역을 일으키자 베이컨은 그를 반역죄로 기소하는데 앞정섰으며 그후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베이컨은 법무 차관이 되었다. 그는 1606년 철학적 저술 중 최초의 것인 «학문의 진보»를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과학의 여러 분야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생애 중 전성기는 1618년 베룰람 경(Lord Verulam)이라는 호칭과 함께 대법관에 임명된 때였다. 동시에 그는 «위대한 부활»이라는 제목의 방대한 저술을 계획했는데 책의 목표는 모든 지식을 각자의 적절한 영역에 배정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직 두 부분만 완성되었는데 하나는 위의 «학문의 진보», 다른 하나는 바로 과학적 방법을 다룬것으로 유명한 «새로운 오르가논»(Novum Organum)이다.  그는 1612년 뇌물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지만 과학과 역사에 관한 저술을 멈추지 않았다. 1626년 런던 북쪽 하이게이트에서 냉동실험을 하다가 심한 감기에 걸려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과학의 순교자라는 이야기까지 듣고 있다.

2-2.베이컨은 «과학의 진보» 2권에서 인간의 학문을 세가지로  나눈다. 이 세 분야는 각각 인간의 지성의 세 부분과 관련되는데, 인간의 기억력은 역사학, 상상력은 시가, 이성은 철학과 관련된다. 그는 시가를 건성으로 다루면서 가장칭찬하는 시가는 바로 이솝 우화와 같은 도덕적 교훈을 전하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반면 역사학과 철학에 대해서는 상당히 길게 언급한다.

먼저 역사학은 자연사와 시만사로 나뉘는데 시민사는(Civil history)는 현재 우리가 역사학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자연사는 더욱 넓은 분야로 다시 세부분으로 나뉜다. ‘정상 경로에 따르는 자연을 다루는 역사학’, ‘정상 경로를 벗어난 다양한 자연을 다루는 역사학’, ‘변화하거나 변형된 자연을 다루는 역사학’으로 나뉜다. 그는 세번째 분과인 ‘만들어진 또는 가공된’ 자연의 역사를 가장 중요하고 유용한 것으로 보면서 이것의 가치가 특히 실용적인 적용과 효용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2-3. 철학을 분류하면서 베이컨은 우선 ‘신에 관한 철학’ 또는 자연 신학을 한쪽으로 제쳐 두면서 이는 무신론을 반박하기에는 충분할 지 몰라도 종교에 관한여 알려주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후에 그는 철학을 자연에 관한 철학과 인간에 관한 철학으로 나눈다. 자연에 관한 철학은 사변적이고 실용적인 영역이 있는데 사변적 영역에는 자연학과 형이상학이 포함되며 , 실천적 영역에는 역학과 마법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역학은 자연학을 현실에 적용한 것이고 마법은 형이상학을 현실에 적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철학을 이렇게 과감하고 도발적인 방법으로 분류한 시도는 겉보기 만큼 명확하지 않으며, 베이컨이 서로 다른 다양한 분야에 붙인 명치은 매우 기묘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그가 분류한 자연적 마법은 연금술이나 점성술 같은 미신적인 억지 주장과는 명백히 분류되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무슨 생각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한 물음은 자연학이 사물의 동력인과 질료인을 다루는 반면 형이상학은 목적인과 형상인을 다룬다는 대목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그는 나침반을 역학이 아니라 마법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배를 운동하게 하는 항해는 자연학이지만 배의 방향을 인도하는 나침반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형이상학’이라는 용어를 다른 학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른 학자들이 말하는 형이상학을 그는 ‘제일철학’, ‘개괄철학’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그는 이 철학이 어떤 분과에서도 배제되지 않는 보편적 원리들을 다루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설을 기초로 자연학과 형이상학을 구별한 시도는 그 자체로 이미 잘못된 것이다. 그의 도식 중 자연적 마법의 영역에서는 목적론이 차지할 공간이 전혀없다.  또한 그는 형상에 대해서 이런 것들이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하여 발견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들을 탐구하는 대신에 글자를 결합하는 형상과 같이 단순한 형상에에 주목해야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기본적 형상들은 갈릴레오가 쓴 수학적 도형이나 기호와 같은 알파벳과 비교할 때 상당히 모호하다.

철학의 또 다른 즁요 분과인 인간에 관한 철학도 자연에 관한 철학과 마찬가지로 두 영역으로 나뉜다. 베이컨은 그 중 하나는 ‘인간을 분리하여’ 고찰하는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통합하여’ 고찰하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후자는 오늘나 사회과학으로 불리는 학문들이다. 다시 이 아래에 속하는 세부분과들을 지정하면서 베이컨은 제멋대로 혼란스럽게 여러 학문들을 나열한다.

그리고 베이컨이 인간의 능력을 분류하면서 처음에 매우 중요한 지위를 부여한 상상력에 대해 그는 단지 다른 능력들의 시중을 드는 하인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상상력이 간혹 이성에 승리를 거두기도 하는데 종교적 믿음의 경우에 이런일이 일어난다,

2-4.베이컨이 인간의 정신을 마치 권력이 분리되어 각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처럼 서로 다른 능력들이 적절하게 배열된 일종의 내적인 사회로 여겼다는 점은 명백하다. 사화과학 자체를 다루면서 그는 이를 다시 우정, 사업, 정부와 관련하는 영역으로 나눈다. 정치의 경우 시민에 관한 철학의 일부인데 인간이 사회생활을 함으로써 얻는 이익을 다루는 영역이다.

베이컨은 분류 작업을 마친 후 스스로 자랑하지만 그가 제시한 방대한 목록에 포함도니 다양한 학문들이 같은 수준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어떤 학문은 완벽한 수준에 도달한 반면 다른 학문은 상당히 부족한 수준이라고 보았다. 그 중 논리학이 가장 수준이 떨어지는 학문이라고 보았는데 논리학의 문제를 과학적 발견에 관한 이론이 없다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논리학의 공백을 메우려는 작업에 착수하여 과학적 탐구를 인도하기 위한 나침반을 제공하려 한다.

탐구 방법에 관해 베이컨은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 모두를 포함한다. 탐구자의 첫번째 임무는 소극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관찰에 선입견을 도입하는 요소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다. 베이컨은 이런 선입견으로 네 가지를 지적하면서 이들을 ‘우상’이라고 불렀다. 이 우상에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있는데 종족의 우상은 경우는 사물을 표면적인 현상으로 판단하려는 성향을 말한다. 동굴의 우상은 객관성을 저해하는 개인의 기질적 특성을 의미하며 시장의 우상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숨어있는 언어의 함정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가식적인 무대 연기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그릇된 철학 체계를 의미한다.

탐구자의 적극적인 임무는 바로 귀납이다. 특수한 경우들을 체계적으로 검토함을써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귀납이 자연의 부적절한 사례에 기초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주의 깊게 체계화된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절차에 관한 규칙을 소개하면서 그는 귀납의 진정한 역할은 현상 X의 형상을 설명하는 후보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시작할 때 드러난다고 보았다. 귀납의 성공적인 후보가 되려면 X가  발생할때 나타나는 성질을 나타내야하며 동시에 X가 발생할 때 나타나지 않는 성질을 나타내지 않아야한다.

그러나 그는 목표로 삼았던 일련의 지침을 결코 완성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의 체계가 ‘귀납 논리’에 이르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연법칙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사례보다 소극적인 사례가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논점을 지적했다. 20세기 철학자들은 자연법칙이 결정적으로 검증될 수는 없지만 결정적으로 반증될 수는 있다는 점을 지적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영예를 그에게 서슴지 않고 부여한다.

아퀴나스 사후부터 둔스 스코투스까지

1.아퀴나스 사후

1-1. 아퀴나스가 13세기에 사망한 후 몇 해 안되서 그의 견해 중 일부는 파리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가르칠 수 없는 등 그에 대한 평판은 매우 다양하고 변화무쌍했다.   하지만 1316년 교황 요한네스 22세가 아퀴나스를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작업을 시작으로 겨우 50여 년전에 그의 저술 전반이 신학적으로 건전하다고 판정 받았다. 트렌토 공의회의 심의를 통하여 «신학대전»이 성서에 필적하는 저술이라는 영예로운 지위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1879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한 아버지’가 발표된 이후에야 비로소 아퀴나스는 이른바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의 공식 신학자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그를 추대하는 과정에는 많은 부작용도 낳았는데 우선 가톨릭교도가 아닌 철학자들이 아퀴나스를 철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길이 막혔고 철학자들이 단지 특정한 교회 조직의 대변인 정도로 생각한 인물들이 이들의 연구를 제한하고 억압한 결과를 초래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아퀴나스에게 존경을 표하지만 동시에 그의 복잡하고 세련된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그를 추종하고 미숙하게 그의 사상과 논증을 설명했다.

1-2. 현재 아퀴나스 연구는 새로운 관심 속에 놓여져있다.  이러한 관심은 그의 저술을 해석하고 받아들였던 이전의 태도에 비해 훨씬 다양한고 비판적으로 이루어져있으며 그의 저서의 라틴어를 번역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또한 그의 저서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예를 드는데 매우 인색하다. 설령 예를 든다 할 지라도 간접적이거나 진부한 수준에 그친다.  그리고 그의 천재성을 찬미하며 그의 저술을 잘 해명된 상태로 소개하고 싶어하는 학자는 그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일종의 불명료함을 지닌다는 것을 알아야한다.이는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철학적 불일치를 일으키는 근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는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조화시킨 인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저술에서는 플라톤주의적 요소도 상당 부분 발견된다. 현대 그의 많은 학자들은 그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더 많은 비중을 두려고 하지만 이에 반대하면서 플라톤적인 아퀴나스에 동조하는 학자들도 있다. 사실 아퀴나스 자신은 지상에 관련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지만 천상과 관련해서는 플라톤주의자였다.

2.브라방의 시제와 로저 베이컨

2-1. 만년에 아퀴나스는 파리대학에서 극단적 형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와 논쟁을 벌어는데 많은 정력을 소모했다. 이들 중에는 세계가 항상 존재하고 모든 인간에게 오직 하나의 지성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서 하나의 지성에 관한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권위있는 주석가인 이른 루슈드가 선호했다. 이러 학자들은 자주 ‘라틴 세계의 이븐 루슈드주의자들’이라고 불렸는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브랑방의 시제(Siger of Brabant, 1235~82)였다.

2-1-2. 이러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가르침은 시간상의 어떤 지점에서 이루어진 창조와 개별적인 인간 영혼에게 내세가 있다는 기독교 교리와 조화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1270년 파리 대주교는 ‘모든 사람의 지성은 동일하며 수적으로 하나이다’, ‘최초의 인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명제로 시작되는 13개의 교리를 정죄했다. 이 정죄는 부분적으로 아퀴나스가 시제의 특징적인 교리를 반대하기 위해 쓴 글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시 젊은 학자들은 이 둘이 같은 유형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정죄된 명제들에서는 시제와 아퀴나스로부터 도출된 주장이 함께 포함되있었고 단테가 이둘을 나란히 천국에 올리고 아퀴나스로 하여금 시제를 통해 영원한 빛을 던진 인물로 칭찬하게 만들었가 때문이다. 단테는 전문적 철학적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그의 «신곡»을 통해 스콜라철학의 이론을 절묘한 시구로 표현했으며 «제정론»을 통해 인간의 지적인 발전이 오직 평화인 상태에서 이루어지며 평화는 어떤 초자연적인 권위,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아래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직접 철학에 기여하였다.

2-2. 단테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아 바로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인데 그는 시제보다 십여 년 정도 오래살았다. 그는 1210년 경 일치스터에서 태어나고 1247년 옥스퍼드 대학 하굽에서 배우고 가르쳤다. 이 후 그는 파리로 거처를 옮기고 십년 후쯤 프란체스코 교단에 가입했다. 그는 파리를 싫어했지만 그에게 과학적 탐구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가르쳤던 마리쿠르의 피에르(Peter of Maricourt)만은 유일하게 높이 평가했다.  피에르는 철학에서 확실성에 이르는 문과 열쇠가 바로 ‘수학’이라고 믿도록 인도한 인물이다. 하지만 1257년 그가 속한 프렌체스코 교단 지도자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강의를 금지했지만 저술은 계속 허락되었다. 심지어 교황 클레멘스 4세는 그의 저술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2-2-1.그는 철학에서 실험의 역할을 강조한 17세기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등장을 예견한 선구적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대저작»에서 권위에의 복종, 맹목적인 습관, 대중의 섭입견, 우월한 지식을 지녔다는 가식적 태도 등이 오류의 근원으로 지적했으며 고대의 언어에 대한 탐구와  진정한 수학의 획득이  학문적 탐구의 필수적인 두 가지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그는 경험과 무관한 추론은 우리를 올바른 결론으로 이끌지만 오직 경험만이 우리에게 확실성을 제공한다고 말하면서 실험 과학(scientia experimentails)을 명백히 제시하였다.

3. 둔스 스코투스

3-1.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에 대한 생애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거의 추측에 의존하낟. 그에 대한 모든 설명은 문서 기록이 전하는 확실한 다음의 네 날짜에 기초한다. 먼저 1291년 3월 17일 노샘프턴(Northampton)에서 사제로 임명되었고 1300년 7월 26일 프란체스코 교단 소속의 탁발 수도사로 옥스퍼드에 머물렀는데 고해성사를 들을 자격을 얻으려 하였지만 실패했다. 1304년 2월 30일 그는 쾰른에서 신학을 강의하는 자리에 있었고 그가 사망한 날짜는 정확하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1308년 11월 8일로 알려져 있다.

3-2. 그의 저술은 많은 필사본이 전해지지만 이들의 진위와 쓰인 시기는 생애의 상세한 내용만큼이나 지극히 모호하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이들 대부분은 미완성인 단편의 형태로 남았는데 그 후 수세기를 걸쳐 여러 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편집되고 저술로 완성되었다. 20세기에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그가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에 대한 주석 대부분이 후대의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판명되었다. 여전히 그의 작품으로 인정된 것은 «범주론»,«명제론», «소피스트 식 논박»에 대한 주석과 포르피리오스에 대한 주석뿐이다. 그리고 «신학명제집»은 상당한 논란이 되었지만 저술 중 처음 두 권에 대한 강의록은 그가 직접 단 주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두 권은 «강의록»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정리집»이라고 스코투스 자신이 직접 최종적으로 손실하여 완성하지는 않았지만 비판적으로 검토한 끝에 출판되었다. 이 «강의록», «정리집»은 현재 스코투스를 연구하는 철학자와 신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헌의 역할을 하고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그의 성숙한 사상을 엿볼 수 있다.

3-3. 그의 저술을 읽기란 결코 쉽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의 언어는 이해하기 어려울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전문적이고 독자들에게 불친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철학을 탐구한 모든 학자를 통들어 가장 날카롭고 예민한 정신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많은 주제들에게 아퀴나스와 정반대되는 태도를 취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조금 앞서 활동한 강의 앙리와 다른 의견을 보인다는데 스스로 큰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앙리는 1276년부터  1292년까지 파리 대학에서 당시 인문학부의 일부 학자들이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택하는데 반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식의 신플라톤주의가 내세웠던 많은 주장들을 옹호했던 인물이다.

3-3-1. 그는 존재를 비롯하여 ‘좋음’과 같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다른 술어들을 서로 유사한 많은 것들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의미만을 지니며 피조물에 대하여 사용될 때와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로 신에게도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통과 결별하였다.  또한 그는 형이상학을 존재자체로서 존재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면서 존재 안에 기독교적인 무한한 신을 포함시킴으로써 존재의 범위를 매우 크게 넓혔다. 또한 그는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비판하면서 신의 현존을 확립하기 위한 자기 자신의 매우 정교한 형이상학적 증명을 제시한다. 그는 아퀴나스와 달리 신의 속성을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보았다.

3-3-2.  그는 ‘질료,형상,실체, 우연’등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질료형상론의 구성 요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 그러나 이런 용어들 대부분은 근본적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공간에 대해서 근느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단지 물체의 가능성만으로도 진공을 둘러싼 벽을 유지하고 공간을 확보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또한 시간에 대해서 그는 시간은 단지 운동을 위한 잠재성만을 측정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운동없이도 시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으로 그는 가능 세계에 관한 철학의 창시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3-3-3. 그는 또한 아퀴나스와 비교하여 인간 지성의 영역을 두 방향으로 확정했다. 아퀴나스와 달리 그는 각각의 존재가 자신의 내부에 개체화의 원리를 지니고 이를 파악할 수 있기에 지성은 각 개체의 단일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우리가 현세와 내세를 고려한다면 지성의 적절한 대상은 존재만큼이나 넓다고 말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지성이 보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신으로부터 특별한 조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앙리의 주장을 거부하지만 그의 인식론에서 신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모순과 함께 존재할 수 없기에 우리를 속이는 방식으로 절대적 능력을 발휘하지 않기 때문이다.

3-3-4. 그는 심리철학과 관련해서 지성과 의지 사이의 관계를 언급한다. 그는 아퀴나스가 의지를 본질적으로 실천적 추론의 유연한 본성에 기인해 자유를 얻게된 이성적 욕망으로 본 것과 달리 의지를 일종의 통제력이라고 보았다.  의지는 이성적 능력으로 다양하게 발휘될수 있지만 이 말이 의지의 발휘가 이성의 아래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인간과 신의 의지를 어떤 철학자보다도 훨씬 넓은 능력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의지는 서로 정반대의 것들도 원할 수 잇는 능력이며 신의 의지 또한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넓은 의미로써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신은 많은 사람들이 자연법이라고 믿는 것들까지도 마음대로 면제하거나 폐기할 수 있다.

[중세철학] 2장 분량 공지!

중세 철학 2장 분량 공지입니다

스콜라철학자들부터 토마스 아퀴나스까지 – 선식

아퀴나스 사후부터 둔스 스코투스까지 – 서연

윌리엄 오컴 부터 오컴에 대한 반응 – 동철선배

옥스퍼드의 계산기들 부터 파리와 옥스퍼드를 넘어서 – 다영언니

르세상스의 플라톤 주의부터 르네상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까지 – 창묵선배

이제 이번 학기 한달 밖에 안남았네요ㅎㅎ 한달만 바짝하고 방학을 맞이합시당!!

보이티우스의 위안부터 고대말기의 그리스 철학까지

1.보이티우스의 위안

1-1. 5세기에 이르러 로마제국은 주로 서쪽에서 외부의 침입을, 동쪽에서는 주로 신학적 논쟁을 함께 겪었다. 5세기를 거치면서 고트족과 반달족의 뒤를 이은 훈족의 아틸라 왕은 고트족의 왕과 연합한 로마장군인 갈리아에게 패할때까지 중국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또한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인간의 육체를 얻었다는 이른바 성육신(incarnation)의 교리에 대해 하나의 위격(person)인 그리스도가 서로 구별되는 두 본성을 가지느냐 혹은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을 모두다 가지느냐에 따라 공의회와 교황간의 논쟁이 있었다.   사상사의 측면에서 5세기 공의회 ‘위격’과 같은 전문 용어의 의미를 고심 끝에 통일함으로써 그 다음 세기에 전개된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1-2. 훈고족의 아틸라의 침략을 물리치긴 했지만 서로마제국은 그후 25년밖에 유지되지 못하고 이탈리아의 권력 대대분을 용병 지휘관에게 주고 말았다. 이 중 오도아케르(Odoacer)는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아우구스툴루스를 나폴리 근처로 추방했으며 그 후 50년 동안 이탈리아는 고트족의 지배를 받았다. 고트족의 왕은 기독교였지만 교리적 논쟁에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기독교 파들 중 아리우스파를 받아들였는데 이 교파는 오래전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이미 이단으로 판정받은 교파였다. 이 교파는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신인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 혹은 실체를 공유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고트족 왕중 테오도리쿠스는 아리우스파, 유대인, 정통 기독교 등 모두 평온을 유지하면서 관용을 베푸는 통치를 했으며 이를 통해 예술과 문화의 번영을 이루었디.

1-3. 이 테오도리쿠스의 장관 중 한 사람이 바로 보이티우스(Manlius Severinus Boethius)였는데 그는 상당한 권력을 지닌 로마 원로원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성실함과 탁월한 능력으로 행정의 최고직위인 ‘국무장관’이 되었지만 가톨릭교의 콘스탄티노플 황제 유스티누스 1세와의 편지를 주고받는 도중 반역을 의심받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유명한 저술 «철학의 위안»을 썼다.

1-3-1. 그는 이 책 첫 머리에서 철학을 위엄있고 다소 나이는 많지만 살결이 희고 금발이며, 더없이 정교하게 짜긴 했지만 무척 낡은 옷을 입은 여성을 철학으로 비유했다. 1권에서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비판에 맞서 스스로 옹호하려 한다. 그가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 까닭은 철학자라면 정치적인 일에도 적극적이어야한다는 플라톤의 명령에 따라 공직에 들어섰기 때문이라 한다.

1-3-2.  2권에서는 스토아학파적인 주제가 전개되는데 행운에 따라 좌우되는 것들이 우리 자신 안에 가치와 비교할 때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3권에서는 진정한 행복이 겉보기 좋은 것들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위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활용한다. 또한 4권에서는 ‘왜 사악한 자들이 번영을 누리는가?’라는 질문에 플라톤의 «고르기아스»를 통해 사악한 자들의 번영은 단지 외관상의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인다. 마지막 5권에서는 ‘신의 섭리가 지배하는 세계에 행운이나 우연같은 것들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신은 시간을 벗어난 존재이므로 섭리가 예지를, 즉 미리 아느 행위를 포함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방식을 취한다.

1-3-3. 그는 단지 이 저술을 통해 위안을 찾았기를 바랄뿐이었으나 극심한 고문을 당해 결국 곤봉으로 맞아 처형당했다. 그 후 많은 기독교들이 그를 순교자로 여겼으며 그를 성 세베리누스(St Severinus)라고 불렀다. 15세기 인문주의자였던 발라는 그를 ‘최후의 로마인인 동시에 최초의 스콜라철학자’라고 불렀으며 카토나 키케로가 진정한 동료라고 인정할만한 마지막 로마인이라고 말했다. 또한 «철학적 위안»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그가 높이 평가한 모든 요소를 모아놓은 일종의 자료집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 안의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와의 관계에 대한 그의 논의는 중세 기독교 시대동안 큰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스토아학파의 논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2. 고대 말기의 그리스 철학

2-1. 기독교의 관점에서 이교도 철학인 그리스철학은 보이티우스가 죽음을 맞아할 당시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의 철학 학교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 중이었다. 5세기 아테네 학교의 수장은 프로클로스(Proclus)였는데 그는 몇몇 플라톤 대화편에 주석을 쓰고 플로티누스의 «엔네아데스»에 관한 백과사전적 저술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적절한 개론서 역할을 하는 «신학원리»를 쓰는등 활발한 저술활동을 했다.

2-1-1. 그의 체계는 일자와 정신, 영혼이라는 세 요소로 이루어진 플로티노스의 사상에 기초한다. 이 세 요소의 내부에는 각각 일종의 발전 과정이 진행되는데 이는 원래의 요소가 지녔던 본성을 공유하면서도 원래의 요소와는 다르다.  자신의 근원 안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 나아가 다시 근원으로 돌아온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영혼,정신, 일 자의 세계 모두에 걸쳐있다. 인간의 영혼은 동물적 육체와 결헙해 에로스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며 인간 영혼 안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 진리에 대한 탐구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있다. 또한 영혼은 사고 능력보다 높은 능력도 지니는데 이를 사용해서 신비적이고 무아적인 경제에 도달해 일 자와의 합일을 추구하기도 한다. 이 이론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설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사실 그는 기독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다.

2-2.  5세기 알렉산드리아에는 막강한 권력을 쥔 기독교 대주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교도 철학이 아테네에 비해 번성하기 힘들었지만 신플라톤주의자이자 수학자, 천문학자 그리고 당대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철학에 우뚝 선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Hypatia)가 있었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쓰고 있을 때 광신적인 기독교 폭도들에 의해 사지가 찢겨 죽었다.그리고 플로클로스의 알렉산드리아 철학학교의 마지막 철학자인 암모니오스(Ammonius)도 있었다. 이 두 철학자는  로마법 대전을 편찬한 입법자이자 정복자인 유스티아누스 1세의 치하에서 활동했다.

2-3. 아테네 철학학교는 프로클로스의 반기독교적인 신플라톤주의를 게승했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에서 탐탁찮게 여겨졌다.  이 학교의 마지막 학자인 심플리키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의 저술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소크라테스 이전까지의 철학자의 말을 폭넓게 인용하여 이 후 철학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529년 아테네 철학 학교는 반기독교적인 경향을 이유로 유스티나아누스 황제에게 폐쇄당했다.

2-4. 플로포노스와 심플리키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박해받았지만 그 이유는 각각 달랐다. 필로포노스는 심플리키우스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를 잘 알면서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기독교도로서 세계가 영원하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세계에는 시초가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프로콜르스 주장을 뒤집으려 했다.  또한 그는 많은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들들처럼 성육신의 과정에서 그리스도가 오직 하나의 본성만을 지닌다는 단성론자였다. 이에 대해 황제는 그를 소환해 성육신에 대한 견해를 옹호하라고 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황제보다 몇 해 더 살았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이단적인 가르침을 이유로 파문당했다.

2-5. 필로포노스가 죽은 후 두 세기 동안 철학은 동면에 빠져들었으며 600년에서 800년 사이에 로마제국은 그리스나 발칸 반도의 여러나라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수준으로 떨어졌고 지적인 재능이 주로 신학적 논쟁에 소비되었다. 필로포노스가 속한 단성주의 교회는 이에 반대하는 정통교회에 의해 축출되었다.  하지만 본성이 두 가지여도 의지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하나의 현실태로 결합할 수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그는 기독교 교단을 재결합하려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흔히 고백자라고 알려진 막시무스는 ‘그리스도 단일 의지론’에 대항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의지와 현실태 개념을 상세히 분석하면서 그의 독창적인 연구를 남겼다.

 

 

[중세 철학] 1장 분량 공지

중세철학 1장 분량 공지입니다

철학과 신앙 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나라까지 – 동철선배

보이티우스의 위안 부터 고대 말기의 그리스 철학까지 – 서연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철학 부터 이슬람과 유대철학자들 까지- 선식

이븐 시나와 그 후계자들 부터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까지- 다영언니

아벨라르  부터 마이모니덷스까지 – 창묵선배

짧게 짧게 요약해서 담주 화욜날 봅시당!

8장.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윤리학 부터 행복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까지

1.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윤리학

1.1.초기 그리스철학자들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 중에는 도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 많다. 예컨대, 탈레스는 ‘네가 대우받기를 바라는 대로 너도 행하라’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며, 어떻게 해야 최선의 삶을 살수 있는냐는 질문을 받고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했을 때 비난받을 만한 일을 우리 자신이 하지 않으면 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신비적이고 애매한 언급을 하곤 했는데 예컨대 ‘인간이 원하는 바를 모두 얻는다해도 이는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 ‘어떤 사람의 성격은 그의 운명이다’고 말했다.  그 외 다른 철학자들도 특정한 도덕적 문제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드러냈지만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름대로 도덕적 체계를 갖춘 철학자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2.도덕철학자 데모크리토스

2.1. 데모크리토스는 윤리적 주제에 대한 많은 언급을 남겼다. 그의 단편들 중 60여 쪽이 도덕적 충고인데 대부분은 일상의 삶에 관한 소박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자산의 능력을 넘어서는 임무를 맡지 말라, 부와 명성을 부러워하지 말라, 자신보다 처지가 나쁜 모든 사람을 생각하라 등 충고가 등장한다. 그의 조언은 자주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는데 ‘아이를 낫지 않는 편이 낫다’라는 말과 함께 그는 스스로 아이를 낳기 보다는 친구의 양자를 들이는게 낫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다른 말 ‘일상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아이를 낳는다면 어떤 아이가 태어나든 만족해야만 한다’라는 말과 상충한다.

2.2. 플라톤 이래로 많은 도덕철학자들이 육체를 영혼을 타락시키는 존재로 보는 반면 그는 정반대의 견해를 보였다. 만약 영혼이 육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영혼에 있는 것이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육체가 영혼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해도 도구가 나쁜 상태를 보이는 것은 도구 자체가 아니라 그 소유자에게 비난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2.3. 데모크리토스의 도덕적 견해는 일련의 경구나 격언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지만 그가 체계적인 윤리학을 전개하였다는 몇몇 증거들도 있다. 하지만 그의 도덕적 견해가 그의 원자론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호하다.  그는 삶의 목적에 관한 저술을 쓰면서 행복(eudaimonia)의 본성을 탐구하였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부유함이 아니라 영혼의 선함에서 발견되며. 우리는 유한한 것들에서 쾌락을 찾아서는 안된다.  또한 그는 교육받은 자들의 희망이 무지한 자들의 부유함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러나 행복안에서 발견되는 영혼의 선함은 고귀하고 신비한 종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이상은 오히려 즐거운 삶과 조용한 만족에 가까웠으며 이런 이유로 그는 후대에 웃는 철학자로 알려졌다.

2.4. 그는 뒤이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일종의 모범을 제공했다. 예컨대 ‘죄의 원인은 더 선한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조언은 소크라테스의 도덕 사상의 핵심을 이미 드러낸 것을 보여준다. 또한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보다 나쁜 일을 당학는 편이 훨씬 낫다’라는 말에서 후에 소크라테스가 일종의 원리로 발전시킨 생각을 이미 제시했다. 하지만 이 원리는 행위를 결과로 판단해야하고  행위자가 누구인지 확인해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공리주의와 같은 도덕체계와는 양립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2.5. 하지만 데모크리토스는 고대 그리스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아르테(arete) 또는 덕에 관하여 탐구하지 않앗다. 이 단어는 영어의 어떤 단어와도 일치하는게 없기 때문에 최근에는 이 덕을 ‘virtue’ 대신에 탁월성이라는 뜻의 ‘excellence’를 자주 사용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말이나 칼에 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치게 고풍스러워 어색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들 둘이 지닌 개념적 구조상 차이는 고대의 도덕철학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난점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3.덕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견해

3.1. 덕의 본성에 관한 체계적인 탐구를 시작한 인물은 소크라테스인데 그는 덕을 도덕철학의 핵심에, 더 나아가 철학 전체의 핵심에 놓았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는 특히 여러 덕목들이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에우티프론»에서는 경건함(hosiotes)이,  «카르미데스»에서는 절제(sophrosyne),  «라케스»에서는 용기(andreia),   «국가» 1권에서는 정의가 논의된다.

3.2이들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문답(elenchus)을 통하여 그 안의 인물들이 만족스러운 정의를 제시할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각 대화편은 결론 없이 끝난다. 하지만 위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무지를 고백한다고해서 소크라테스가 도덕적 덕들에 대한 어떤 확신도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무언가를 지식으로 간주하는데는 무척 높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3.3. 소크라테스는 덕의 본성을 탐구하면서 거듭하여 덕을 목수일,항해술, 의술 등 전문적 기술이나 기예 또는 산술학과 기하학 같은 학문과 비교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고대에서 부터 현대까지 이어졍왔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로 지적될 수 잇다.

하나는 만일 우리가 지성과 의지를 뚜렷하게 구별하는 것은 수 많은 세대를 거쳐 철학적 반성의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며 이 최초의 반성에 원동력을 부여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덕들과 여려 형태의 전문적 기술에는 중요한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 둘은 모두 타고나기보다는 태어난 후에 획득되며 둘 다 가치있는 특성에 속한다.그는 둘 모두 이를 지닌 사람에게 이익을 주장한다.

3.3.1 그는 이 둘의 사이의 유비를 계속 제시하면서 비교하며 대조하려하며 이 둘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검토하려 한다.  차이점 중 하나느 예술과 학문이 전문가의 가르침을 통해서 전수 될 수 있는 반면 덕을 가르칠 수 잇는 어떤 전문가도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또한 기술의 의도적인 실수가 저지른 사람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는 반면 덕을 갖추는데 의도적인 실패를 한 경우에는 이 행위가 무의식적인 실패보다 덜 나쁘다고 말하기에 매우 이상하게 들린다.

3.3.2. 그는 기술과 덕의 차이에 대해 논하면서 이 둘이 결국 동일시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앞에 말한 고의적인 문제에 대해 고의적으로 덕과 반대되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악행은 무지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한 지식 즉, 지혜(phronesis)없기 때문이다.

3.3.3. 또한 덕을 가르치는 교사가 없는 이유는 덕이 일종의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히 습득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지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식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전제를 제시한다. «프로타고라스»라는 제목의 대화편에서는 그는 선은 쾌락과, 악은 고통과 동일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만약 쾌락과 선이 동일한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사람들은 선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악을 저지른 셈이 되는 것이고 이는 불합리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3.3.4. 하지만 위의 전제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어떤 행위가 악하다는 지식은 그 행위의 결과를 고려했을 때 쾌락보다 큰 고통을 낳는다는 지식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른 행위를 하는 사람은 이런 지식이 부족함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쾌락과 고통, 현재와 미래의 크기를 비교하고 측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식이며 이런 선택이 바로 정의,절제,용기라는 덕들 각각의 서로 동일한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4. 정의와 쾌락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

4.1. ‘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진정으로 쾌락의 계산에 대 생각했는지는 학자들간에 일치하지 않는다.그러나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정의란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조화라고 주장한다. 우리 영혼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경우에만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는 정의로운 역할이라는 것이다.  즉 절제를 가진 일반시민, 용기를 가진 수호자, 지혜를 가진 통치자들이 각 계층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정의인 것이다.

4.2. 쾌락과 덕 간의 관계에 대해 대화 초기편에서는 쾌락은 덕의 목적이 아니라 영혼의 하위 부분이 동반하는 바로 드러나며 정의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이익을 준다는 결론은 보인다.  그러나 이는 잠정적인 결론이다. 왜냐하면중반부에 이데아의 역할이 해명된 후에는 정의로운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설명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영혼을 지혜로 가득 채우는 일은 그저 정욕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보다 훨씬 더 기쁨을 준다. 그는 정욕,기개,이성 중 어떤 요소가 그의 영혼을 지배하는가에 따라 탐욕스러운 인물, 야망을 가진 인물, 학문적인 인물로 분류되는데 이들 중 학문적인 사람인 철학자의 판단을 가장 선호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경험과 통찰, 추론 등에서 다른사람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4.3.하지만 플라톤은 아직 쾌락의 계산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 군주가 사악한 참주보다 729배나 행복한 삶을 산다는 논거를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대화편 «펠레보스»에서 쾌락이 최고 선이라고 주장하는 프로타르코스와 지혜가 쾌락보다 우월하며 우리를 행복으로 더욱 잘 인도한다고 보는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쾌락도 지혜도 행복한 삶의 본질이 아니라 두 요소가 적절하고 혼합된 삶만이 진정으로 선택할 가치가 있다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최고선은 쾌락과 지혜가 적절한 비율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5.행복에 관한 아리스토테레스의 견해

5.1. «필레보스»에서 제시된 좋은 삶의 기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좋음은 다른 목적들과 비교해 볼 때 더욱 완전하여야만 한다-즉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항상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되어야한다. 또한 그것은 자기 충족적인 것, 즉 오직 그 자체만으로 삶을 가치있게 만들며 더 이상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것이어야한다. “라고 하며 이것이 바로 행복의 속성이라고 말한다.

5.2. 그에게 좋은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지혜,덕,쾌락,명예,평판, 부,교양’이라는 7가지 후보로 내세운다. 또한 어떻게 이에 도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본성을 통해서, 배움을 통해서, 훈련을 통해서, 신의 호의를 통해서, 행운을 통해서’이라는 5가지 후보를 등장시킨다. 그러나 두번째 대답에 그는 몇가지를 배제한다. 왜냐하면 본성,행운,신의 은총으로 행복이 실현된다면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5.3.그러므로 그는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으려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무언가가 존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목적 중 하나는 쾌락이며 술,음식,성행위와 같은 동물수준의 쾌락이 아닌 미학적,지적 쾌락을 추구해야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좋은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지혜와 덕,쾌락으로 압축하여 제시한다. 이들은 각각 철학적,정치적,향락적 삶으로 드러나는데 이들이 행복과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보았다. 이 세 요소가 지니는 매력을 적절하게 결합함으로써 행복이 전통적인 삶의 형태에서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5.4. 그는 행복에 이르는 결정적인 단계를 설명하면서 윤리적인 영역에 잠재성과 현실성이라는 형이상학적 분석을 도입한다. 그는 어떤 상태(hexis), 활용(chresis), 발휘(energeia)를 구별하면서 덕과 지혜는 모두 상태인 반면 행복은 일종의 활동이므로 덕이나 지혜를 바로 행복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행복을 구성하는 활동은 덕의 활용 또는 발휘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