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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학파의 인식론부터 피론의 회의주의까지

1.스토아 학파의 인식론

1-1.초기 스토아 학파는 지식의 본성에 관한 많은 가정들을 에피쿠로스학파와 공유하였다. 에피쿠로스학파와 마찬가지로 스토아학파도 지식의 기초를  두 가지, 오류에 빠질 수 없는 감각적 인상과 원초적, 후천적 개념들이라고 믿었다. 또한 스토아 학파는 개념의 근원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한 설명을 하는데 그에 따르면 한 사람이 태어날 때 그의 정신은 텅 빈 백지같지만 그가 이성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개념이 이 백지 위에 쓰여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최초의 개념은 감각들에서 유래하며 이 경험들이 기억에 남는다. 몇몇 개념들은 자연적으로 생기기도 하는데 이를 ‘프롤렙시스’라고 부른다.  이 개념은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것이다.

1-2. 스토아학파는 에피쿠로스학파에 비해 인간의 정신적 상태에 대한 분류를 훨씬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그들은 회의주의에 맞설 수 있을만한 인식론을 제시했는데 플라톤이 대비했던 지식(episteme)과 의견(doxa)이라는 상태에 ‘인상(katalepsis)’을 도입한 것이다.  섹스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이 문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인상을 인식적 현상(phatasia kataleptike)과 관련해서 정의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서로 연결된 세 가지가 있는데 지식과 의견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인상이 바로 그들이다. 지식은 건전하고 확고하며 논증에 의해서 변화될 수 없는 인식이다. 의견은 근거가 약하며 거짓인 동의이다. 이들 사이에 인상이 위치하는데 이는 인식적 현상에 대한 동의라 할 수 있다.”

1-3. 위와 같은 현상이란 폭넓은 용어로서 감각에 드러나는 바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의견을 갖도록 하는 근거까지 포함한다. 인상 또한 마찬가지로 감각에서 유래할 수도, 이성에서 유래할 수 도 있다. 인상은 지식과 의견 사이에 위치하는데 의견은 일종의 특별한 요소인 동의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상은 의견과 달리 거짓일 수 없으며 또한 지식과 달리 결코 우리의 마음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힘을 포함하지 않는다. 고로 인식적 현상이란 ‘존재하는 바로부터 생겨나며, 존재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게 각인된 인상을 주는것’이다.

1-4. 스토아학파는 인식적 인상을 설득력을 기준으로 네 유형으로 분류한다.

(1)설득력이 있는 인상: ‘지금은 낮이다’,  ‘나는 말하는 중이다’

(2)설득력이 없는 인상: ‘만일 어둡다면 지금은 낮이다’

(3)설득력이 있는 동시에 없는 인상: 철학적 역설들

(4)설득력이 있지도 없지도 않는 인상: ‘모든 별들의 수는 홀수이다’

 그러나 설득력이 진리를 보장해주는 기준은 아니다. 현명한 사람은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합리거이기도 한 현상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이 문제가 복잡한 이유는 인상적 인상 뿐만 아니라 합리적 인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르케실라오스는 스토아학파의 인식적 인상인  ‘어떤 것이 존재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게 각인된 무언가’라는 정의를 비판한다. 그는 과연 참인 인상과 구별될 수 없는 거짓 인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제논은 만일 정확하게 일치하는 거짓인상이 존재하면 그런 인상은 인식적 인상알 수 없다고 동의한다. 그래서 그는 인식적 인상에 대한 위의 정의를 수정하여 ‘존재하지 않는 바로부터는 생겨날 수 없는 종류의 인상’이라는 점을 더한다.

2.아카데메이아의 회의주의

2-1.스토아학파의 인식론이 회의주의 진영으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유산을 이어받은 아카데메이아로부터 제기됬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예를 들면 아카데메이아 지도자중 아르케실라오스나 그 후계자 카르네아데스는 플라톤보다 위쪽인 소크라테스에 의지하면서, 그의 문답법이야말로 지식에서 거짓문장을 걸러 내는 탁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소크라테스과 달리 훨씬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일상적 문제에 대해서도 판단을 중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2-2. 회의주의에는 여러단계들이 있다.  어떤 회의지주의자들은 그저 진정한 지식의 성립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이런 회의주의자는 다양한 주제들에 관한 의견을 지니는 것에 단, 의견의 소유자가 의견이 지식의 지위에 도달했다고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또한 그 자신도 지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포함한 일련의 의견을 얼마든지 지닐 수 있다. 이때 그 사실을 인식하였다고 주장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보다 더 극단적인 회의주의자들은 지식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의견의 적절성까지도 의문시한다. 이들은 확실성에 대하여 확고한 동의를 표하는 일뿐만  아니라 어떤 의견에 대하여 잠정적인 동의를 표하는 일도 삼가야한다고 권고할 듯하다.

2-3.이 극단적인 회의주의에  ‘회의주의자가 모든 판단을 유보한다면 어떻게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겠는가’라고 흔히 제기되는 반박에 그들은 충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다.  동의는 의지와 관련해 스스로 자제할 수 있지만 현상은 우리의 통제 밖에 놓여있으며 현상에는 반드시 충동이 뒤따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진리를 발견하고 거짓을 피하려는 정신적인 작용인 동의가 없어도 이런 충동에 따르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3.피론의 회의주의

3-1.기원전 1세기 무렵 철저한 회의주의를 내세우는 새로운 근본주의 학파가 성장하였는데 이 학파의 창시자는 아이네시데모스다.  이 학파의 창시자들은 엘리스 출신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 소속 군인인 피론을 진정한 창시자로 여겼다.

3-2.  기원후 2세기에 활동한 피론주의 회의주의자인 섹스토스는 그가 우리에게 전한 아케데메이아의 회의주의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느 회의주의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동의를 표시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일상적인 지각의 문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견해를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저술이 가치있는 까닭은 회의주의 논의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한 게 아니라 초기에 등장한 더욱 독창적인 회의주의자들의 추론 방식에 관한 많은 귀중한 정보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3-3. 우리는 고대의 인식론을 연구함녀서 지식의 본성과 회의주의의 한계 등에 대하여 많은 것은 배울 수 있다. 특히 다음 몇 지의 통찰은 이후 모든 철학에 전해진 유산이 되었다. 먼저 오직 참인 것만이 지식이 될 수 있다. 지식은 오직 무언가에 의해, 경험이든 추론이든 혹은 다른 근거에 의에 암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지지될 경우에만 지식일 수 있다. 그리고 지식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후에 자신의 지식이 뒤집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한다. 그러나 이 인식론은 두 가지 오류에 빠져있다. 두 오류 모두 무엇이든 간에 지식은 참이어야만 한다는 진리를 오해한 결과로 등장하였다.

3-3-1.첫 번째 오류

‘무엇이든 간에 지식은 참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필연적으로 만일 p가 인식된다면 p는 참이다

(2)만일 p가 인식된다면 p는 필연적으로 참이다

여기서 (1)은 참이지만 (2)는 거짓이다. 이 오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까지 이어지는 고전적인 인식론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거듭해서 (2)를 (1)과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3-3-2.두 번째 오류

무엇이든 간에 참이어야만 한다면 지식은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 능력을 발휘한 결과여야만 하는 듯이 보인다. 이 오류는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제국 시대의 인식론에서 자주 발견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학파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평범하고 우연적인 일도 지식으로 인정하려 한다. 그러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작용하는 능력을 우리가 지닐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오류는 이 전 고전 시대의 오류를 거울에 비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3,6장 분량공지 수정!!!!!

(3장 논리학이 너무 양이 적어서 4장까지 분량으로 잡았습니다.)

라고 저번에 말했지만 스터디때 교수님과 상의한 결과

3장 논리학과 5장 자연학은 빼고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동철선배, 선식, 저 빼구 다영언니랑 묵묵선배만 분량이 수정!

이제부터 분량공지는 여기다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6장 존재하는바:형이상학 부터 플라톤의 이데아와 그 문제점들까지 – 창묵선배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부터 존재와 현존까지 – 다영언니

지식과 그 한계 : 인식론 부터 «테아이테토스»에서 논의되는 지식 – 동철선배

지식과 이데아 부터 에피쿠로스학파의 인식론까지 – 선식

스토아학파의 인식론 부터 피론의 회의주의까지 – 서연

저번에 공지한 건 내일까지 마무리하고 이번껀 다음주까지 해오시면 됩니다. 모두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유산부터 스토아학파까지

1.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유산

    1.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하자 민주적이었던 아테네인들은 알렉산드로스 제국에 반대했던 인물들까지 달갑지 않게 여겼다. 이러한 위험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칼키스(Charcis)로 피신하였다가 그곳에서 바로 그 다음 해 사망하였다.
    2.  콜리지(S.T.Coleridge)가  ‘모든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아니면 플라톤주의자로 태어난다’라고  말할 정도로 르네상스 시대 이래로 아케데메이아와 리케이온을 상반되는 철학의 두축으로 여기는 태도가 일종의 전통이 되었다.
    3. 플라톤은 이상주의자이며,  유토피아를 꿈꾸고,  내세를 중시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적이며, 공리주의자이고, 상식을 중시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특히 플라톤은 그가 제시한 대답이 얼마나 옳은가보다 던진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본다면 비교할 대상이 없는 최고의 탁월한 인물이다.
    4.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세계의 지적인 유산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엥서 위대한 철학자이다. 기여한 바를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 자연 현상을 세부적으로 관찰한 최초의 인물임
      • 과학적 방법을 통하여 관찰과 이론사이의 관계를 건전하게 파악한 최초의 철학자
      • 학문의 여러 분과를 확인, 분류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함
      • 강의를 연속도니 강좌 형태로 구성한 최초의 교육자
      • 그가 설립한 리케이온은 수많은 학자들과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탐구한 최초의 연구기관임
      • 연구를 위해 도서관을 설립한 역사상 최초의 인물

2.아리스토텔레스 학파

    1.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리케이온을 물려받은 테오프라스토스(기원전 372~287)는 재능을 발휘하여 스승의 연구를 이어받았다. 그는 많은 저술 활동을 했는데 대표작으로는  «성격»으로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상세하고 생생하게 개인의 성격을 묘사했다.
    2. 테오프라스토스의 제자 중 한 사람인 팔레론(Pharleron) 출신의 디미트리오스(Demetrius)는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장군인 프톨레마이오스(Ptolemy)의 조언자였다.
    3. 그가 죽은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서들은 스켑시스 출신의 넬레우스(Neleus of Skepsis)에게 넘겨진 듯하다. 장서들은 그 뒤에 행방이 모호하다가 기원전 1세기 중반쯤 로마에게 로도스 출신의 안드로니쿠스(Andronicus of Rhodes)에 의해서 편집,출판되었다.
    4. 하지만 당시 아테네를 지배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아니었다. 그들은 새로운 학파의 창시자들이었다. 한 사람은 정원(The Garden)이라고 알려진 학파를 세운 에피쿠로스였으며, 다른 한 사람은 스토아 학파로 불린 키티움 출신의 제논(Zeno of Citium)이었다.

3.에피쿠로스

  1. 에피쿠로스는 사모스 섬으로 추방된 아테네 출신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원전 306년 아테네에 자신의 집을 지었으며 271년 사망할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정원으로 불린 이 집에서 그는 소박한 음식을 먹으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2. 에피쿠로스 철학의 목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인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제거함으로써 가능한 한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꾸며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얻은 설명이다.
  3. 에피쿠로스에게 쾌락은 행복한 삶의 시작과 끝이다. 하지만 그가 향락주의자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추구하는 쾌락은 개인적인 우정이 주는 것과 같은 조용한 쾌락이다. 음식,술,성행위에 대한 쾌락은 열등한 수준의 쾌락일 뿐이다.

4.스토아학파

  1. 에피쿠로스와 마찬가지로 스토아학파도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였지만 그 방법은 달랐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은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 회상기를 읽고 철학을 공부하려는 열정을 지니게 되었다.제논의 유명한 저술은  «국가»(Republic)이었다. 이는 플라톤의 유토피아주의와 견유학파의 몇가지 요소를 결합한 것이었다.
  2. 제논이 세상을 떠난후 클레안테스(Cleanthes,331~232)이 제논이 세운 학파의 수장자리에 올랐다. 그는 종교적인 성향이 강했는데 ‘제우스에게 바치는 송가’를 쓰기도 했다.
  3. 클레안테스 뒤를 이은 인물은 크리시포스(Chrysippus of Soli)였는데 스승을 그리 존경한 것 같진 않지만 스토아사상을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4.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신을 능동적인 원리이며 신이 설계한 체계를 자연이라 보았다. 그러므로 스토아학파의 삶의 목표는 바로 이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지만 인간은 자유롭고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이다. 만일 의지가 이성에 복종한다면 우리는 자연에 따라 살게 된다.  이렇게 자연의 법칙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일이 덕이며 이 덕은 행복에 이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5. 그들은 모두 사회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조직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표와 자연사이에 조화를 이룰 줄 아는 선한 사람은 사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하며 사회적 덕목을 함양해야한다.

 

소피스트~소크라테스 자신의 철학

소피스트

  1. 소피스트들은 원래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면서 다양한 주제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순회교사를 말한다. 이들은 또한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쳐 주면서 대가를 받았기에 최초의 직업적인 철학자로 불러도 무방하다.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주로 아테네에서 활동하였으며, 당시 아테네에서는 법정에서 변론을 펴거나 정치에 진출하는 젊은이들 많았기에 소피스트는 이들의 교육과 지도를 대가로 상당한 액수의 비용을 받았다.

프로타고라스

  1. 소피스트의 선두주자.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상대주의적인 인식론적 입장을 내세웠다. 이 밖에 그는 명사의 성 및 동사와 시제와 법을 처음으로 구별했을 뿐 아니라 애매한 문헌을 해석하고 상대방의 연설을 평가하면서 최초의 문학 비평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어떤 질문에도 논증을 펼칠 수 있는 준비를 항상 갖췄다. 유명한 예로는 그에게 교육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자자 에우알토스를 고소한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논증에 대해서 단지 나쁜 논증을 좋게 보이게 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2. 히피아스 : 수학, 천문, 음악, 역사, 문학, 신화 등에 모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옷과 신발을 만드는 실용적인 기술까지도 겸비한 엘리스 출신의 소피스트
  3. 프로디코스 : 문법보다는 단어의 의미에 더 큰 관심을 지닌 최초의 사전 편찬가 이자 언어학자. 그가 무엇을 ‘원한다’라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두 그리스어 단어 boulesthai와 epithumein을 구별하는 것은 후에 큰 철학적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고르기아스

  1. 그는 엠페도클레스의 제자로 설득력 있는 웅변가였을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수사학자로서 연설에서 사용되는 서로 다른 수사법을 분류했다. 그의 저술 중에는 지금까지 철학적 관심을 끄는 두 편의 짧은 글이 있다.
  2. 첫 번째 글에서 그는 트로이(troy)의 헬레네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에 따르면 어떠한 인간도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녀가 설득에 굴복 당했더라도 ‘말은 실재하거나 지각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존재’이자 ‘신과 같은 결과’를 낳을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인간이 저항할 수 없’으며 ‘우리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일종의 정신적 질병’인 사랑에 빠졌다면 또한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고르기아스의 언급은 자유, 결정론, 불가항력, 외부의 자극, 충동 등을 둘러싼 다양한 철학적 논의의 출발점을 이룬다.
  3. 그의 저술 《존재하지 않는 바에 관하여》에는 세 가지 회의적인 결론에 이르는 논증이 등장한다. 이 세 가지 결론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무엇인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으며, 무엇인가를 인식하더라도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다’이다.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논증들은 사실상 궤변에 가깝다
  4. 이외에 ‘힘이 곧 옮음‘이라 주장한 칼리클레스,’정의란 권력을 쥔 자들의 자기이익‘이라고 폭로한 트라시마코스, 상대방에게 당신의 아버지는 개라는 점을 증명해 보이려 했던 한 쌍의 궤변가 에우티데모스와 디오니시도로스가 있다.
  1. 소크라테스
    1. 그는 어떤 의미에서 철학 자체의 막을 연 인물로 제시된다. 철학 교과서에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와 이 후의 철학자로 나누어 분류한다. 수많은 철학 학파들이 그를 학파의 창시자라고 주장하였으며 현대에도 많은 철학자들이 독재 치하의 비이성적인 이데올로기에 반발하면서 그의 삶을 철학적 삶의 전형으로 여겨왔다. 그는 기원전 469년 아테네에서 태어나 민주주의가 가장 꽃 필 때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애 중 후반기에서는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함에 따라 민주주의가 과두정치로 변모하였다. 이 과정 중 그는 불법적인 명령은 거부했지만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일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민주주의자와 귀족주의자들 모두의 미움을 받고 ‘신을 믿지 않고, 젊은이를 타락시킨다’는 명목으로 고소당해 독당근즙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2. 크세노폰이 묘사한 소크라테스: 크세노폰은 네 권으로 이루어진 소크라테스 회상록과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 《향연》을 썼다. 그는 플라톤과 달리 소크라테스를 평범한 노동자와 같은 태도로 질문을 던지고 주장을 펴면서 상대방을 타이르는 인물로 그렸다. 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경건한 인물로 종교적인 의식에 충실히 따랐으며 신탁을 존중하였다. 또한 소크라테스를 예의바르고 온화하며 절제심이 높은 사람으로 표현했다. 크세노폰은 그가 대화 중 애매한 점을 해소하고 위선적 표현을 제거하려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논증이나 사변을 펼치려는 시도는 거의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이 유용하다면 그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어떤 계획의 결과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비록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어떤 측면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사람들의 친구였으며 범죄나 국가 반역은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크세노폰의 주된 관심은 소크라테스의 재판과정에서 그의 무고함을 밝히고 존경할 만하다는 것에 집중되었다.
    3.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
      1.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크세노폰과 달리 수준 높은 문학적 장치를 동원하여 깊이 있는 형이상학적 강의를 해나가는 인물로 표현한다. 그러나 논의를 하기에 앞서 어떤 대화가 소크라테스의 실제 모습인지는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화가 일관성이 없으며 이 중에서는 플라톤의 주장을 대변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대화편의 극적인 구성, 철학적 내용, 문체의 특성에 따라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되며 후기로 갈수록 플라톤 자신의 주장을 대변하는 내용이 많다.
      2.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자며 낯선 신들을 도입하였다’는 비판이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의 생각이 아낙사고라스의 세속적인 물리적 우주관과는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한 때 우주론에 관심이 있었으나 델포이 신전에서 여사제가 전한 신탁으로 인해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여사제는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사람은 없다’라고 신탁했으며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듣고 혼란에 빠졌다. 결국 그는 오직 자신만이 자신의 지혜가 무의미함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현명하며 따라서 신탁을 옳았다고 결론 내린다. 그가 진정한 지식을 추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분야는 바로 도덕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덕과 도덕적 지식은 동일한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선이 무엇인지 전정으로 아는 사람은 다른 행위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모든 그릇된 행위는 무지의 결과라는 주장을 내리게 된다. 이에 비추어 그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비난은 전혀 근거가 없음이 밝혀진다.
      3.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은 자신의 철학적 임무를 끝없이 수행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묘사한다. 그는 정의를 추구했는데 왜냐하면 정의가 정의로운 사람에게 유익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어떤 덕목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 덕목이 어떤 특수한 속성을 보편적으로 지니는지 결정할 수 없으며 미묘한 경우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정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논증 중 주로 귀납법을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