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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1-1 칸트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데 삶 전체를 바친 인물로 여행도, 결혼도 하지 않았고 어떤 공직도 하지 않았기에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오로지 그의 사상이야기 뿐이다. 루터주의 경건파 가정에서 자랐지만 자유주의적인 신학적 견해를 보였고 항상 엄격하게 정해진 삶을 살았다.

 1-2 칸트는 1760년대부터 진지하게 철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 후 20년 동안 칸트가 출판한 저술은 신중하게 여러 가능성을 보색하는 것이거나 관례상 반드시 써야 하는 것들이었다. 1763년 베를린 학술원에서 ‘형이상학의 진리가 기하학의 진리와 같은 정도로 확실하게 증명될 수 있는가’를 주제로 현상 논물을 모집했는데 칸트는 이 주제에 대해 수학적 방법과 철학적 방법 사이의 많은 결정적인 차이에 주목했다. 수학자들이 명확한 정의에서 출발하여 개념을 형성하고 이를 발전시킨다면 철학자들은 혼란스러운 개념에서 정의에 이르기 위해 개념을 분석한다. 이에 칸트는 수학자들보다 철학자들이 오히려 뉴턴의 방법에 따라야 하며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경험이라는 현상에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1-3 칸트는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철학에 빠져있을 때 흄이 ‘독단의 잠’에서 깨웠음을 인정한다. 1760년대부터 칸트는 과학적 형이상학의 성립 가능성에 대하여 점점 회의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인과관계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결코 논리적 필연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1-4 교수로 취임한 후 11년 동안 칸트는 자신의 독창적인 체계를 발전시키는데 전념했고 이 결과가 1781년 《순수이성비판》으로 출판되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의 목표는 철학의 과학화였다. 칸트는 지식을 두 종류로 아프리오리한 지식과 아포스테리오리한 지식으로 구별한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어떤 진리를 인식한다면 그것은 아포스테리오리하다. 반면에 어떤 진리를 모든 경험과 무관하게 인식한다면 그것은 아프리오리하다. 칸트는 모든 지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되지만 경험으로부터 등장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프리오리하게 인식하는 진리들은 단지 경험의 일반화를 틍해 얻을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칸트는 아프리오리하게 내리는 판단은 분석적인 것과 종합적인 것으로 나뉜다고 보았다. ‘모든 물체는 연장성을 지닌다.’와 같은 분석판단에서는 이미 주어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바가 술어를 통해 더욱 명확히 드러나는데 비해 종합판단에서는 ‘모든 물체는 무게가 있다’처럼 술어가 주어의 내용에 새로운 무언가를 더한다. 아포스테리오리한 명제는 모두 종합적이며, 분석명제는 아프리오리하다. 칸트는 아프리오리하면서 종합적인 명제가 존재한다고 보았고 형이상학을 진정한 학문으로 만들려면 아프리오리한 동시에 종합적인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1-5 인간이 지닌 정신적 능력의 본성과 한계를 붆명히 밝히는 것을 철학자의 첫 번째 임무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중세철학자들과 합리론자와 같이 칸트는 감성과 지성을 뚜렷하게 구별하고 지성을 오성과 이성으로 나눈다. 오성은 인간의 지식을 형성하기 위하여 감각들을 결합하는 작용을 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이성은 오성이 도달할 수 있는 바를 넘어서려는 지성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은 경험과 분리 될 경우 ‘순수이성’이 되는데 이것이 칸트가 비판하려는 대상이다.

1-6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순수 이성에 관하여 언급하기 전에 감성과 오성을 체계적으로 탐구한다. 감성은 ‘선험적 감성론’에서 오성은 ‘선험적 논리학’에서 탐구가 이뤄진다. 칸트는 선험적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데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지만 현실적 경험이 전하는 바를 넘어선 또는 그 배후의 무언가라는 개념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1-7 선험적 감성론은 대체로 공간과 시간에 대한 탐구이다. 칸트는 감성이 재료와 형식을 지닌다고 말한다. 공간은 외부적 감가의 형식이며, 시간은 내부적 감각의 형식이다. 공간과 시간은 우리의 정신이 발견하는 세계 안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감성이 경험을 형성하면서 부여하는 일종의 틀이다.

1-8 선험적 논리학은 선험적 분석론과 선험적 변증론으로 나뉜다. 분석론에서는 오성을 경험에 타당하게 적용하기 위한 기준들을 제시하고 변증론에서는 이성이 분석론에서 설정된 한계를 넘어서려 할 때 발생하는 환상이 폭로된다. 분석론에서 칸트는 ‘범주들’라고 부르는 일련의 아프리오리한 개념과 ‘원칙들’ 이라고 부르는 일련이 아프리오리한 판단들을 제시한다, 분석론은 핵심적인 두 부분으로 나누어 ‘범주들의 연역’과 ‘원칙들의 체계’로 구성된다.

1-9 분석론 중 첫 번째 절에서 범주들의 연역 또는 정당화가 논의된다. 범주는 특별한 종류의 기본 개념으로 ‘원인’과 ‘실체’의 개념을 범주의 예로 든다. 칸트는 이러한 범주가 없다면 우리는 단편적이고 무질서한 대부분의 경험을 개념화 하거나 파악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우리의 모든 지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경험론자의 주장에 동의 하지만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등장한다는 주장은 거부한다.

1-10 분석론 중 두 번째 절에서 해당하는 원칙들의 체계에서는 경험에 관한 수많은 아프리오리한 종합 명제들이 등장한다. 칸트에 주장에 따르면 경험은 연장, 밀도의 두 종류의 크기를 지녀야 한다, 더욱이 우리의 지각들이 서로 필연적으로 연결된 경우에만 경험이 가능하며 원인과 결과사이의 관계를 먼저 확립하지 않는 한 우리는 객관적인 시간의 연속성을 결코 확보 할 수 없다.

1-11 칸트는 합리론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범주들이 스스로 자신의 적용 가능성을 규정할 수 없으며, 원칙들이 자신의 진리를 스스로 확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아프리오리하게 확립할 수 있는 바는 오직 만일 경험이 가능하려면 이런저런 조건들이 적용되어야 한다. 경험의 가능성은 오직 현실적인 경험 자체에 의해서 드러날 뿐이다.

1-12 칸트는 분석론을 통하여 어떤 범주에도 포섭되지 않고 어떤 규칙에 의해서도 예시되지 않는 순수한 현상이나 감각적 대상의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보인다. 칸트는 ‘선험적 변증론’을 통해 오직 순수 이성을 사용하여 탐구 할 수 있는, 감각을 넘어서는 대상들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살펴본다.

1-13 칸트는 변증론에서 형이상학적, 심리학과 형이상학적 우주론, 형이상학적 신학을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는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이성주의 심리학은 ‘나는 생각한다’는 전제를 출발점으로 삼아 비 물질적이고 파괴되지 않고, 개인적이고 불멸하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칸트는 이런 논증의 전개가 다양한 오류를 범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네가지 오류를 지적하면서 ‘순수 이성의 오류추리’라고 불렀다.

 

1-14 아프리오리한 우주론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칸트는 네 가지 이율배반을 제시한다. 이율배반은 상반되는 결론에 이르는 한 쌍의 서로 대립하는 논증(정립과 반정립)으로 구성된다. 그 중 첫 번째 것의 정립은 ‘세계에는 시간상 출발점이 있으며 공간상 제한된다’이며 반정립은 ‘세계에는 시간상 출발점이 없으며 공간상 제한이 없다’이다. 칸트는 이 두 가지 모두 증명을 제시하지만 모두 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단지 전체로서의 ‘세계’에 관하여 언급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1-15 각각의 이율배반에서 정립은 어떤 연속적인 것이 완전히 멈추게 된다고 주장하며 반정립은 그것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이율배반은 분할 가능성과 관련되고, 세 번째는 인과성, 네 번째는 우연성과 관련된다. 칸트는 각각의 이율배반에서 정립은 독단론의, 반정립은 경험론의 오류에 빠진다고 생각한다. 네 번째 이율배바에서 칸트는 필연적 존재의 현존에 찬성하고 반대하는 논증들을 제시하고 《순수이성비판》의 뒤이은 절에서는 자연신학에서 주장하는 신의 개념을 계속 검토한다. 그는 신 존재 증명을 세 가지의 기본 유형으로 분류하고 각각의 증명이 모두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보인다.

 

1-16 60대에 접어들면서 칸트는 윤리학과 미학으로 관심을 돌려 《도덕 형이상학 기초》,《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의 저술을 출판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론이성의 아프리오리한 종합적 원리들을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실천 이성의 아프리오리한 종합적 원리들을 비판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1-17 칸트 도덕이론의 출발점은 무조건적으로 선한 유일한 것은 오직 선의지뿐이라는 사실이다. 선의지는 무엇을 성취하는가와는 전혀 무관하다. 선의지의 노력이 좌절될지라도 선의지는 오직 그 자체 만으로 선하다. 의지를 선하게 만드는 바는 그것의 동기가 바로 의무라는 사실이다.

 

1-18 의무로부터 행위하는 것은 도덕 법칙을 존중하여 이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며, 도덕적 명령에 복종하여 행위하는 것이다. 명령에는 가언 명령, 정언 명령 두 종류가 있다. 가언 명령은 만일 당신이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원한다면 이런저런 방식으로 행위하라고 말하는데 비해 정언명령은 당신이 성취하려는 목적과 상관없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행위하라고 한다. 인간의 목적이 다양하므로 수 많은 가언 명령이 존재하는데 비해 정언 명령은 오직 하나뿐으로 ‘오직 동시에 보편법칙이 될 것을 원할 수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 하라’ 이다. 이것을 다른 식으로 말하면 ‘당신 자신의 인격이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 안의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 이다.

 

1-19 세 번째 비판서인 《판단력비판》에서 칸트는 자신이 이전 비판서들에서 과학적, 윤리적 개념에 적용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분석을 아름다움이나 숭고함과 같은 미학적 개념에 적용하려 한다. 미적 취미 판단은 감정에 의존하지만 보편성 타당성을 지니지만 이는 잘못 되었다고 주장한다.

스피노자

  1. 생애와 사상적 배경

1-1 다른 한편으로 데카르트의 사상을 대담한 방식으로 발전시킨 유대인 철학자가 네덜란드에 있었다. 1632년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스피노자는 어린 시절부터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알았다. 반 덴 엔덴은 기독교도 의사였는데 스피노자에게 라틴어를 가르쳤고 데카르트의 저술을 소개함으로써 스피노자의 사상 발전에 큰 영항을 미쳤다.

1-2 스피노자는 유대교 신학에 대하여 10대 후반부터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성년이 되면서 유대교의 관습을 대부분 거부했다. 1656년 그는 유대교 공동체에서 파문당했고 렌즈를 깎는 기술을 배워 여러 광학 기구들을 제작했다. 이를 직업으로 삼음으로써 그는 사색과 연구를 할 시간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1-3 이 당시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을 쓰기 시작 했다. 이 책은 지성의 개선을 주제로 지적인 전환을 상세히 설명하고 탐구의 과정을 밝히는 것이 《방법서설》과 유사하다. 그러나 완성되지 못한 채 그가 죽은 후에야 출판되었다.

1-4 1663년 한 학생에게 데카르트의 철학을 가르치고 친구였던 레이덴 대학 메이어 박사의 요청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를 ‘기하학적 형식’으로 진지하게 해설한 저술을 출판했다. 《철학의 원리》 중 처음 두 권을 완벽하게 정리한 후 여기에 자신의 주석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이 저술을 구성했다.

1-5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제시한 일련의 정의와 공리들을 이어받은 후 이를 확장하여 모두 58개의 정리를 증명했다. 데카르트의 정의와 공리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은 대체로 《철학의 원리》에 등장하는 내용을 따른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저술에 대한 서문을 쓴 메이어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견해와 데카르트의 견해가 모든면에서 일치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1-6 1670년 익명으로 《신학정치론》이라는 저술이 출판되었다. 이 저술은 사실 스피노자가 1665년 자신이 유대교를 떠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해명을 쓰기로 결정한 것이, 점점 확대되어 성서 비평과 정치 이론을 포함한 저술이 된 것이다. 스피노자는 성서 원전을 상세히 검토한 후 히브리어 성서는 그 보다 더 오래된 자료를 편집한 것이며, 아무리 올라가도 기원전 5세기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1-7 《신학정치론》은 세심한 논증과 고상한 표현을 통하여 문학의 한 유형으로서의 성서 비평을 주목하게 만든 훌륭한 저술이다. 하지만 이 저술은 구약성서에 대한 개방적인 해석으로 인해 유대교도는 물론 네덜란드의 칼뱅주의자들까지 이에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몇몇 교회 회의에서는 금서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다른 동시대인들은 이 책을 크게 칭찬했으며 스피노자가 이 책의 저자인 것이 알려지면서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67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 교수직을 제안 받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1. 사상

2-1 스피노자는 어떤 학문적인 지위도 맡지 않았고, 결혼하지도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평온한 삶을 살면서 묵묵히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논증된 에티카》를 쓰는 일을 계속했다. 1675년 이를 완성했지만 이 책을 출판하게 되면 무신론자로 몰려 처형당할지도 모른다는 친구들의 경고로 인해 출판하지 않고 다른 책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1677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티카》, 《정치론》등을 비롯한 그의 유작들은 한데 묶여 출판되었지만 채 일 년도 못되어 네덜란드에서 금서가 되었다,

2-2 《에티카》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체계를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바탕으로 설명한 저술이다.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제목은 ‘신에 관하여’, ‘정신의 기원 및 본성에 관하여’, ‘정서의 본성 및 기원에 관하여’, ‘인간의 굴레에 관하여’, ‘인간의 자유에 관하여’ 이다. 각 부는 일련의 정의와 공리로부터 출발해 다양한 정리들에 대한 형식적 증명으로 이어지고, 각각의 정리에는 정의와 공리로부터 도출되지 않은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기하학적인 방법이 스피노자의 체계를 제시하는데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증명들이 자주 결론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2-3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자신의 철학을 투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가정도 숨기지 않으며 오로지 한 정리에서 다음 정리로 나아가는 논리적 연결점만을 보이려 한다. 또한 기초적인 기하학의 개념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세계 전체를 설명하려 한다. 이 설명이 실패하더라도 이는 철학자의 잘못이기 보다는 철학 본질 자체의 잘못 때문이다.

2-4 《에티카》는 윤리학 외에도 많은 주제들을 다룬다. 1부에는 형이상학 뿐 아니라 자연신학도 등장한다. 실체의 본성을 설명하면서 신의 현존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도 제시한다. 데카르트는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 즉 두 종류의 기본적인 실체를 인정했지만 스피노자는 오직 한 종류의 실체만을 인정한다. 이는 사고라는 속성과 연장성이라는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결국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에티카》의 2부에서 설명하듯 정신은 사고라는 속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이며, 육체는 연장성이라는 속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이다. 결국 정신과 육체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를 기초로 스피노자는 세 단계의 지식, 즉 표상지, 이성지, 직관지가 존재한다는 인식론을 형성한다.

2-5 《에티카》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윤리적 논의는 3부에서부터 등장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현존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자신을 파괴하려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저항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런 충동에 대한 의식이 인간에게 욕구로 드러나는데 이 충동이 자유로울 때 쾌락을 느끼고 방해받을 때 고통을 느낀다고 보았다. 인간의 복합적인 정서들은 쾌락과 고통으로부터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도 욕구와 혐오에 의해 규정된다.

2-6 하지만 《에티카》의 마지막 두 부에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극단적인 정념에 의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정념을 지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능동적 정서와 수동적 정서 사이의 구별이다. 두려움, 분노와 같은 수동적 정서는 외부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 반면에 능동적 정서는 정신이 처한 상황을 스스로 파악함으로써 등장한다. 우리가 수동적 정서에 대한 명석, 판명함 관념을 지니면 정서는 능동적으로 바뀌는데, 수동적 정서를 능동적 정서로 대체하는 것이 바로 정서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한다.

2-7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의 필연성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도덕적 해방에 이른다. 다른 사람의 행위가 그의 본성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그들에 대한 증오를 멈추게 된다. 우리는 신과 같은 관점을 택해 모든 것들이 이루는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체계를 ‘영원한 모습에 비추어’ 바라보아야 한다.

2-8 스피노자의 독특한 체계는 철학사의 흐름에 따라 몇몇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로크의 이론과 관련되는 것으로 스피노자의 실체이론을 이해할 수 있다. 로크와 스피노자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실체 개념을 제거하려 했다. 반면에 그를 데카르트와 비교하는 관점을 택하면 데카르트의 가정이 암시하는 바를 명확하게 이끌어 냄으로써 스피노자는 신이 이 세계 안에서 유일한 행위자라는 결론에 이른 말브랑슈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이보다 더 나아가 신이 유일한 실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2-9 철학에서 17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란이 일어난 시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스콜라철학의 특징은 일종의 구별을 도입하고 인간과 물질세계를 설명할 때 이 구별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보이는 개념 쌍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는 이런 모든 규별을 무너뜨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란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 스피노자의 체계는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스피노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점에서 만나기도 한다.

2-10 스피노자의 철학은 자주 합리론을 지나치게 확장한 형태의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가 자신의 체계를 유클리드의 용어를 사용하여 기하학적으로 제시한 까닭은 다양한 주제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서 일뿐 아니라 논리적 연속성이 세계 전체에 작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극단적인 합리론의 체계는 이후 낭만주의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라이프니츠

 

  1. 시대적 배경과 생애

1-1 라이프니츠는 17세기와 18세기의 경계선에 걸쳐 앉은 철학자이다. 그는 체계적인 저술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철학사가들은 단편적인 조각글로부터 일관되고 종합적인 체계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해 왔다. 또한 이후 등장한 수많은 철학자들은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1-2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에서 철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유년기 시절부터 서재의 책들을 읽으며 보냈던 그는 문학, 역사, 법률, 수학, 자연학, 화학, 신학 등의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보였다. 1661년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여 3년 만에 학사학위를, 그리고 1667년 21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교수직 제의를 거부하고 마인츠 대주교 아래로 들어가 외교관으로 일하며 몇몇 학문적 저술들을 대주교에게 헌정했다. 한편 그는 가톨릭이 지배하는 궁정에서 개신교도로 살면서 모든 기독교 교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교리들을 기반으로 기독교의 통합을 주장하는 여러 저술을 쓰기도 했다. 1672년 라이프니츠는 십자군 원정에 나서도록 루이 14세를 설득하는 비밀 임무를 띠고 파리로 갔으나 아무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르노와 말브랑슈를 만났으며, 다음 해에는 런던을 방문하여 보일과 올덴버그 등 왕립학회 회원들에게 학회의 회원으로 초대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1676년 미분법을 발견했는데, 사실 뉴턴이 이보다 먼저 미분법을 발견하였으나 출판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독일로 돌아오며 스피노자를 방문하여 <<에티카>>의 초고를 읽고 논평을 쓰기도 하였다.

1-3 이후 라이프니츠는 그가 이전부터 해왔던 기독교 호교론 전파에 관하여 가명으로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전 유럽의 기독교 국가를 연방으로 통합하여 황제는 세속적인 통치를, 교황은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분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 통합 계획을 후원했던 공작이 사망하자 계획은 무너졌다.

2.사상

2-1 1685년 겨울 라이프니츠는 그의 저술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형이상학 논고>>를 집필했다. 그는 이를 자신의 성숙한 철학 체계를 언급한 최초의 저술로 여겼다. 짧지만 명료한 이 저술은 오늘날에도 라이프니츠 철학체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입문서로 평가되며, 그의 철학이 지닌 많은 특징을 잘 보여준다.

2-2. 이 저술에 맨 처음 등장하는 주장은 우리가 항상 이성에 따라 질서 잡힌 방식으로 작용하는 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세계에 산다는 것이다. 각각의 개체는 자신의 내력을 통해 자신에 대해 참인 많은 술어들을 얻고, 이런 술어들 전체가 그 실체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의한다. 이런 실체들은 자신의 방식에 따라 세계를 표현하며, 특정한 관점에서 세계를 요약하는데, 이 실체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인간의 행위는 우연적이며 자유 의지에 의존한다. 선택 또한 근거는 있지만 그 근거가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체들은 서로 직접 작용할 수 없되, 한 실체에 일어나는 일이 다른 모든 실체에게 대응되도록 신이 배열해 놓았다. 결국 각각의 실체는 분리된 하나의 세계와 같으며, 신 이외의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2-3 인간의 정신은 모든 것들의 관념을 포함하며, 신을 제외한 어떤 외부적 대상도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관념과 의지 작용은 우리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신은 우리를 강제하지 않으면서 이끈다. 정신과 육체는 서로 상호작용을 주고받지는 않지만 사고와 육체적 사건은 서로 대응해서 일어나기 마련인데 그 까닭은 이들이 우리를 사랑하는 신의 섭리에 의해서 연결되기 때문이다(라고 적혀있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형이상학 논고>>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전통적인 기독교가 배경에 깔려 있으며, 이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주의 깊게 변형하려는 당시 대륙 철학자들의 시도가 드러남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체계가 지닌 특징을 데카르트, 말브랑슈, 스피노자의 체계와 대비하여 명확히 제시하면서 자신이 이들을 종합했다고 주장했다.

2-4.기독교 호교론 전파에 실패한 라이프니츠는 다른 방향으로 칼뱅주의 개신교도와 루터주의 개신교도 사이의 화해를 모색했다. 또한 그는 유럽 기독교 국가들을 하나의 연방으로 통합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두 가지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기독교 통합을 포기하지 않고 이후에도 가톨릭과 중국 유교의 신앙과 제사 사이에 조화를 모색하려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격려했다.

2-5. 한편, 로크의 본유관념 부정에 크게 자극받은 라이프니츠는 경험론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를 위하여 쓴 저술은 로크의 사망소식을 알고 출판하기를 단념하였고, 결국 라이프니츠의 사망 후 50년이 지난 뒤에서야 출판되었다. (<<신인간지성론>>)

2-6. 라이프니츠가 프로이센의 샤를로트 왕비에게 헌정한 <<변신론>>은 세계의 현실적인 악에 직면해서도 신은 여전히 정의롭다는 주장을 정당화한다. 이 책에서 그는 악으로 보이는 여러 현상에도 우리가 실제로 여러 가능 세계 중 최선의 세계에 산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낙관주의는 이후 볼테르의 강력한 비판을 받는다. ‘이것이 최선의 세계라면 다른 세계는 도대체 어떻다는 말인가?’

2-7. 1713년 출간된 <<모나드론>>에서 그는 <<형이상학 논고>>에서 암시했던 체계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모든 복합적인 것은 단순한 것들로 구성되며, 모든 단순한 것은 연장성을 지니지 않는다. 단순한 것이 연장성을 지닌다면 또 다시 분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순하고 비물질적인 어떤 요소를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라고 부르는데, 영혼과 유사한 정신적인 속성만을 지니는 무한히 많은 실체라고 생각했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드에게는 창문이 없으므로 그 무엇도 드나들 수 없다’고 말하며 다른 피조물로부터 인과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한다. 또한 신이 미리 모나드가 세계의 변화와 동시에 변화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2-8. 라이프니츠는 1716년 세상을 떠났는데 엄청난 분량의 미출판 원고와 수많은 미완의 계획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계획들은 남겨진 모든 저술을 포함한 전집을 출판하려는 사업과 함께 300여년이 지나도록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

 

로크

  1. 시대적 배경 및 생애

1-1. 홉스는 근대 경험론의 선구자였지만 그의 명성은 그보다 훨씬 탁월한 의사 출신의 철학자 로크(John Locke)의 등장과 더불어 쇠퇴했다. 로크는 기독교도들은 다양한 형태의 신앙적 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내용의 짧은 저술 ≪관용론≫(Essay on Toleration)을 썼다. 로마 가톨릭을 제외한 모든 교파에 대하여 교리상의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톨릭 음모 사건과 배제 법안으로 인한 위기 무렵에 로크는 ≪정부에 관한 두 논고≫(Two Treatises on Government)를 썼다. 첫 번째 논고에서 그는 왕권신수설을 옹호한 필머(Sir Rovert Filmer)의 저술을 통렬하게 공격했으며, 두 번째 논고에서는 홉스가 제시한 것보다는 훨씬 낙관적인 상태로 자연 상태를 설명하고 정부와 국가는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 계약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일 어떤 정부가 전횡을 일삼고 정부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의 역할을 침해한다면 그런 정부는 해체되어야하고 혁명은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1. 사상

2-1. 로크는 네덜란드에 머무르는 동안 자신의 가장 위대한 철학적 저술 ≪인간지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이하 ≪지성론≫으로 약칭)을 쓰는데 몰두했고 1690년에 이르러서 출판되었다. 로크의 생전에 4판까지 출간되었다. ≪지성론≫은 4권으로 구성된다. 분량이 가장 적은 1권의 제목은 ‘본유 관념에 관하여’이다. 여기서 로크는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간에 어떤 본유적 원리도 우리의 정신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모든 관념은 오직 경험으로부터 얻어진다. 기하학과 같은 무관한 학문의 경우조차 우리가 수용하는 관념은 본유적이지 않다. ≪지성론≫의 2권은 모두 33장으로 여기서는 관념이 철저히 탐구된다. 로크는 ‘관념’이라는 용어를 우리의 정신적 능력과 정신이 형성하는 개념을 모두 특징짓는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2-2. 로크는 관념들을 단순 관념과 복합 관념, 명석 판명한 관념과 모호하고 혼동된 관념, 감각적 관념과 반성적 관념등과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한다. 그는 단순 관념을 다루면서 물체에서 드러나는 성질들을 두 범주로 나누는데 제일성질에는 단단함, 운동, 모양 등이 있다. 이들은 ‘우리가 지각하든 지각하지 않든 간에’ 물체에 속하는 성질이다. 제이성질로는 색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대상 자체에는 전혀 없는 것으로서 단지 대상의 제일성질을 통하여 우리 안의 다양한 감각을 생성하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반성적 관념들 중 지각적 관념은 우리의 정신에 관념을 형성하는 최초의 과정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지각은 순전히 수동적인 경험이며, 지각이 무엇인지는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봄으로써 누구나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각이라는 수동적 경험은 로크 철학 전체를 떠받치는 기초의 역할을 한다.

 

2-3. ≪지성론≫의 2권에는 정신과 의지에 대한 경험주의 철학이 제시되지만 이 외에도 시간과 공간, 수에 관한 고찰, 인간의 정념의 목록 등 많은 내용이 등장한다. 또한 인과 관계를 비롯한 다른 관계들도 다루어지며 이후에 큰 영향을 미친 개인의 동일성이 무엇인지에 관한 정교한 논의도 전개된다. 로크는 우리가 단순 관념들을 다른 도움 없이 스스로 충분히 인식할 수 있고,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어떤 단어도 그렇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믿으면서도 관념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통해서 자신들이 말하는 관념을 실제로 확인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는 ‘우리가 지닌 추상적 관념들과 보편적인 단어들 사이에는 서로 확고한 관련이 있으므로 우선 언어의 본성과 용법 그리고 의미를 검토하지 않고서는 모두 명제로 구성되는 우리의 지식을 명석, 판명하게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2-4. 뒤이어 그는 이 주제를 3권에서 다루는데 가장 유명한 부분은 추상 관념과 실체 이론을 논의하는 절들이다. 로크는 우리의 정신이 자연적 대상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관찰한 후 이것을 추상적인 보편 관념으로 분류하고 여기에 보편적인 이름을 붙인다고 말한다. 이런 보편 관념들은 주목할 만한 성질을 지닌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보편 관념은 ‘기울지도 않았고 직각도 아니며 또한 등변, 등각, 부등변도 아니어야 한다. 그것은 이런 성질들을 모두 지녀야 하며 동시에 이들 중 어떤 것도 지녀서는 안 된다.’ 이 세계의 실체들은 다양한 성질과 능력을 지니며 우리는 이를 활용하여 서로 다른 종류의 사물들을 정의한다. 하지만 우리가 내리는 정의는 사물들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며 단지 ‘명목상의 본질을’ 언급할 뿐이다. 실체 일반에 대하여 우리가 지닐 수 있는 유일한 관념은 ‘그것이 어떤 고유한 속성들을 지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라는 관념뿐이다.

 

2-5. ≪지성론≫ 전반에 걸쳐 인식론적인 고찰이 이루어지는데 특히 4권에서 지식이라는 주제가 전면에 부각된다. 우리는 사물들의 진정한 본질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연 세계의 존재들에 관한 진정한 학문을 구성할 수 없다. 단지 그럴 듯한 믿음만을 지니는데 우리 자신의 현존과 신의 현존에 관해서는 진정한 지식에 이를 수 있다. 현실적인 감각의 한계 안에만 머무른다면 다른 사물들의 현존에 관한 지식 역시 얻을 수 있다. 진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증거보다 더 큰 확실성을 주장하는 어떤 명제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영국에서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n)이 일어나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기초로 한 새로운 법체계가 마련되었고 로크는 영국으로 돌아와 이전에 위험한 내용 때문에 출판하지 못한 저술 ≪정부에 관한 두 논고≫, ≪지성론≫의 초판, ≪관용에 관한 편지≫의 영어 번역 출판했고 이후에도 저술을 계속하였다. 시빗거리가 될 만한 저술들은 대부분 익명으로 출판했는데 유일하게 이름을 밝혀 출판한 것이 ≪지성론≫이다.

파스칼

1. 시대적 배경과 생애

1-1. 홉스와 로크는 자신들을 데카르트의 반대하는 사람으로 여겼으나 실패한 인물들이었다. 그 후 데카르트의 비판자로 자처한 인물 중 가장 뛰어난 철학자가 있는데 바로 파스칼(Blaise Pascal)이다. 파스칼은 1632년에 오베르뉴(Auvergne)의 왕실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기 때부터 수학과 자연학에 뛰어난 재능을 드러낸다.

2.사상

2-1. 그러나 그는 1654년부터 수학과 자연학이 아닌, 신학을 주된 관심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포르루아얄 수녀원에서 활동한 금욕주의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 금욕주의자들은 당시 ‘얀센주의자들(Jansenists)’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들은 네덜란드 출신의 주교 얀센(Jansen)을 추종했는데, 얀센은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유명한 저술을 발표하며 비관주의적‧엄숙주의적인 형태의 가톨릭을 옹호했다. 얀센주의는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다는 것을 강조하며 오직 소수만이 구원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주장했다. 그는 인간은 죄를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은총을 저항할 수 없기에 인간의 자유 의지는 설자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2-2. 1653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Innocent X)는 얀센주의자의 가르침을 정죄했지만 그들은 이에 저항했는데, 이는 파스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지닌 능력을 낮게 평가한 이들의 주장에 따라 파스칼은 인간의 철학적 능력, 특히 신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회의했다. 그는 ‘철학의 진정한 길은 철학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라 하고, 데카르트를 ‘쓸모없고 불확실한 인물’이라고 평했다(P, 445, 671).

2-3. 파스칼은 죽으면서 일련의 단상들을 모은 원고를 남겼는데, 이는 『팡세(Pensees)』라는 제목으로 1670년 출간된다. 그는 경구의 대가이고 그의 많은 문구는 자주 인용된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이러하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나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 하지만 설령 우주가 그를 파괴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그 존재보다 고귀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신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많은 언급들은 기독교에 대한 호교론의 일부를 형성하고 신앙이 없고 세속에 물든 신자들을 개혁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는데, 그가 어떤 형태의 개혁을 원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다. 파스칼의 단편들에는 두 가지 주제가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그것은 신이 없는 인간의 비참함과 종교적 삶이 보장하는 행복이다.

2-4. 인간의 본성은 모순 덩어리로, 진리라는 이상을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오직 거짓에만 머문다. 진리의 보고인 동시에 오류의 소굴인 인간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파스칼은 인간을 “절반은 상승하고 절반은 추락하도록 창조된 존재, 진리의 유일한 판단자이지만 끝없는 오류에 내던져진 존재. 세계의 영광, 웃음거리, 수수께끼인 인간이여!”라고도 말한다(PⅡ,13). 이 수수께끼를 풀 열쇠는 인간의 타락에 관한 기독교 교리에서 발견된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죄가 없는 상태로 진리와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인간이 오직 타락하기만 했더라면 인간은 진리와 행복이라는 개념 자체를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2-5. 이성이 타락의 관념에 대항하려 해도 이성 또한 이 관념이 진리라는 점을 확립할 뿐인데, 그 출발점은 인간의 비참함이다. 철학적 저술에서 파스칼은 오직 신앙과 은총만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줄 것이라 주장하지만 이성에 적대적이지는 않다. 그는 마음에는 이성이 전혀 알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가 사용하는 단어인 ‘마음(heart)’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는 감정을 이성 위에 놓으려 한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추론과 연역적인 추론을 대비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 즉, 어떤 수식을 ‘암기해서(by heart)’ 익히라고 말할 때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기하학의 기초를 가르쳐 주는 것이 ‘마음’임이 명백히 드러난다. 즉, 파스칼은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와 전혀 대립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반종교 개혁의 철학

1-1. 이성을 배제하고 계시를 높이 평가한 몽테뉴의 태도가 반종교 개혁주의자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아담이 지은 죄에 의해서 완전히 타락했다는 루터의 주장에 반대하여 가톨릭 진영의 논쟁가들은 기본적인 종교적 진리가 다른 도움을 받지 않은 인간 지성의 영역 안에 속하며, 신앙 자체도 이성의 지지와 옹호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1-2. 반종교 개혁적인 공격의 선봉에 선 것은 새로 형성된 예수회(Society of Jesus)에 속한 수사들이었다. 모든 교단의 구성원들이 서약한 청빈과 정결, 순종에 더하여 예수회 사사들은 교황에 대한 절대 충성을 맹세했고 곧 세계 각지에서 교육과 선교 사업에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예수회는 새롭고, 스스로 더욱 발전된 형태로 여긴 스콜라 철학을 전개했다.

 

1-3.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이나 롬바르드(Peter Lombard)의 ≪신학명제집≫과 같은 표준적인 원전에 기초한 강의를 진행한 반면 예수회 학자들은 대학에서 독자적인 철학과 신학 강의를 시작했다. 17세기 초에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도미니크 수도회 학자들도 이런 강의 방식을 채택했고 이는 철학과 신학이 이전보다 더욱 뚜렷하게 구별되는 결과를 낳았다.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소속 학자 수아레스(Francisco Suarez)는 대학 강의에서 독자적인 교과서를 사용함으로써 철학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의 선구자로 그가 쓴 ≪형이상학 논쟁≫(Disputationes Metaphysicae, 1597)은 스콜라 철학의 형이상학을 체계적으로 다룬 최초의 저술이었다.

 

1-4. 수아레스는 1564년 예수회에 가입했으며, 평생 대학교수로 지냈다. 그는 신앙심 깊은 박학한 인물로서 순전히 지적인 능력으로만 본다면 충분히 16세기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그는 철학사에서 자신의 재능에 걸맞은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그의 저술은 대부분 중세의 주제들을 다시 언급하면서 세련되게 재구성한 수준에 그치며 어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지는 못했다. 둘째, 저술가로서 그는 무려 28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지만 그의 저술은 상당히 지루하고 장황하다.

 

1-5. 하지만 사실상 그는 형이상학과 정치철학의 두 영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아퀴나스를 진심으로 존경했지만 형이상학적 측면에서는 아퀴나스보다 이븐 시나(Avicenna)와 스코투스(Duns Scotus)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17, 18, 19세기에 걸쳐 토마스주의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퀴나스의 저술 ≪반이교도대전≫에 등장하는 내용보다는 수아레스의 형이상학에 더욱 가까웠다. 1621년에 출판된 ≪법에 관하여≫(De Legibus)는 정치철학에 크게 기여한 책이다. 여기에는 그보다 훨씬 널리 알려진 철학자들의 사상으로 전해지는 많은 사상의 원천이 등장하지만 이런 사실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았다.

 

1-6. 16세기에 구교와 신교 진영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철학적 주제는 인간의 자유 의지 문제였다. 이 문제는 트렌토 공의회에서 루터의 결정론과 칼뱅의 예정은총설에 반대한다는 선언이 이루어지면서 심화되었다. 예수회 학자들은 자신들이 인간의 자유를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선봉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수아레스와 그의 예수회 동료인 몰리나(Luis de Molina)는 자유로운 행위를 행위 과정에서 여러 대안들을 활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정의했고 이런 정의는 인간 자신의 선택과 이것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져야 하는 책임을 제대로 인정한다. 하지만 자유를 더욱 제한적인 것으로 보는 다른 설명과 비교해 보면 이런 정의는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미리 아는 신의 예지를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신의 예지는 구교와 신교가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몰리나는 널리 알려진 저술 ≪조화≫(Concordia)에서 이 문제에 대한 독창적이고 정교한 해법을 제시하지만 신교도뿐만 아니라 동료 구교도 사이에서도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학자이자 토마스주의자였던 바네스(Domingo Banez, 1528~1604)는 예수회 신학자들이 인간의 자유를 과대평가함으로써 신의 권능을 훼손한다고 생각했다. 두 교단 사이의 논쟁이 격화되자 1605년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양측 모두 침묵할 것을 명령했다.

신성한 동시에 세속적인 회의주의

1-1 칼뱅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다양한 이유로 이교도 처형이 이루어졌다. 1553년, 폐에서 이루어지는 혈액순환을 발견한 의사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제네바에서 화형당했다. 당시 바젤 대학 교수였던 고전학자 카스텔요는 그의 처형 소식을 듣고 <이교도들은 처형되어야 하는가>라는 원전을 인용하고 그리스도의 예에 호소하는 내용의 책을 썼다. 이후 쓴 저술 <회의의 기술>에서도 카스텔요는 종교적 주제와 관련해서는 어느 누구도 충분히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교도로 몰아 죽이는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음을 인식론적인 논변으로 주장을 펼쳤다. 당시에 이런 주장을 했던 이는 오직 카스텔요 뿐이었지만, 이후 관용을 지지한 사람들은 그를 선구자로 기리게 되었다.

1-2 카스텔요가 종교에 관하여 지나치게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여겼던 동시대인들은 점차 종교와 무관한 영역에서는 회의주의가 상당히 매력적인 이론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잊혀졌던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저술이 16세기 중반 재발견되면서 이 분위기는 크게 강화되었고, 섹스투스의 회의주의 논변들은 프랑스 귀족 출신인 몽테뉴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그가 프랑스어 산문으로 서술한 <레몽 세봉을 위한 변명>은 근대적 회의주의를 드러낸 고전이 되었다.

1-3 이 책은 인간이 자신을 피조물들 중 최고의 존재라고 여기는 성향이 강함을 보여주며, 과연 인간이 지구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한가를 회의한다.

1-4 몽테뉴는 여러 종류의 다른 동물들이 인간보다 훨씬 예민한 감각을 지녀 뛰어난 직관력을 지녔다고 주장하며 충직하고 용기있는 개나 은혜를 갚는 사자의 이야기 등과 인간의 잔인무도함이나 배반을 대조시킨다.

1-5 이외에도 참치가 기하와 산술에서 인간 못지않게 뛰어나며 천문학에서는 오히려 인간을 능가한다고 확신한다. 참치는 완벽한 정육면체를 형성하는 거대한 무리를 이루어 헤엄치며, 동지가 되면 마치 죽은 듯이 이동을 멈추고 한곳에 계속 머물다가 춘분이 되면 다시 이동을 시작함을 보여준다.

1-6 다양한 예시와 함께 몽테뉴는 동물들이 이런 일들을 능숙하게 수행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머리 안에서 인간과 같은 사고 작용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증명해 준다고 굳게 믿는다.

1-7 인간 고유의 산물이라고 특히 자랑하는 두 영역은 종교와 철학이다. 몽테뉴는 오직 인간만이 종교적 숭배의 능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개미의 장례의식이나 코끼리의 태양 숭배의식을 예로 들었다. 인간이 종교적 믿음을 지니고 또 그런 활동을 한다고 해도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교리들이 난무하고 자주 종교적 실천의 본성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비난했다. 또한 철학과 관련해서 그는 지금까지 다양한 비판을 버텨 낸 철학 체계를 제시한 철학자는 아무도 없었음을 제시한다. 다음은 그가 활용한 키케로의 격언이다. “무언가가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아직 이런저런 철학자들 중 아무도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1-8 몽테뉴가 인간의 본성을 낮게 평가한 것은 미란돌라가 1486년에 펴낸 저술 <인간의 존엄성에 관하여>에서 인류를 미화한 것에 대한 반박이다. 고대 고전의 재발견과 르네상스 시대 시각 예술의 결과로 등장한 낙관주의 이후 종교 전쟁으로 인한 반종교 개혁의 분위기가 강했던 프랑스에서는 비관주의에 길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1-9 자신의 회의주의와 자신이 선택한 종교적 정통설을 조화시키기 위해 몽테뉴는 지금까지 자신이 공격한 바가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진리에 도달한 체 하는 인간의 지성이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신앙이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성취가 아니라 신의 자유로운 선물이다.

브루노

1-1. 16세기 후반, 철학자 브루노(Giodano Bruno, 1548~1600)는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나폴리에서 태어난 그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는데(1565년), 이단설의 혐의를 받고 교단에서 추방된다(1576년). 그는 도피 생활 중 제네바에서 칼뱅주의자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는 국왕 앙리 3세가 눈여겨봤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고 툴루즈와 파리에서 연구와 강의를 했다.  브루노의 첫 주요 저술은 「관념의 그림자에 관하여(On the Shadows of Ideas)」로,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 체계를 기억법에 관한 실용적인 충고와 결합시킨다. 그는 인간의 관념이 가장 낮은 단계이며 신의 정신 안에서 통일성을 형성하는 신성한 관념이 가장 높은 단계라고, 즉 관념들 사이에서 위계질서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신성한 관념은 그 자체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자연은 곧 신이 만든 보편적인 결과)을 통해서 표현된다. 지상 세계의 모습보다는 천상 세계의 모습이 신과 가깝다. 브루노는 우리가 천상 세계를 떠올리게끔 우리의 지식을 조직화하기를 원한다면, 황도를 이루는 열두 개의 별자리에 따라 정신적인 사고를 배열해야 한다고 보았다.

1-2. 1583년에 브루노는 잉글랜드로 넘어와 옥스퍼드에서 몇 개의 강의를 맡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그는 폭넓은 철학적 관심과 언변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옥스퍼드의 현학자를 경멸하는 내용을 담은 대화편들을 썼는데, 그 첫 작품 「재의 수요일 성찬」이 1584년에 출판되었다. 사람들이 브루노가 런던과 프랑스, 잉글랜드를 위한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이중간첩 활동을 하면서 이 대화편들을 썼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브루노의 대화편은 읽기가 힘들다. 그의 글은 바그너의 작품에 등장하는 신들이나 톨킨이 만든 전능한 힘을 가진 등장인물과 같은 존재들이 난무한다. 브루노는 그 당시 유행했던 헤르메스 교단의 교리를 반영하기도 했다. 브루노는 헤르메스 교단이 언젠가 기독교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루노의 여러 대화편에서 제시된 체계에 따르면, 우리가 관찰하는 현상은 자연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 자연을 하나의 생명체로 만드는 세계영혼이 낳은 결과이다. 자연계는 무한성을 가지고 있어 어떤 경계, 표면, 한계가 없다. 하지만 이 세계의 무한성은 신의 무한성과 다르다. 왜냐하면 세계는 무한하지 않은 부분들로 구성되는 반면, 신은 전체 세계에서도 완전히 내재하고 그 각각의 부분들에도 완전히 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브루노의 견해를 범신론과 구별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브루노는 신은 자연을 만드는 자연(natura naturans)이고 우주는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natura naturata)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으로는 그 관계를 제대로 해명되지 않는다.

1-3. 역사가와 과학자들은 브루노의 체계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 특징에 주목했다. 첫 째, 브루노가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채택했다는 점이고, 둘 째, 그가 다수의 우주를 요청한다는 점이다. 브루노는 지구가 태양을 둘레를 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는데,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더 극적인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지구나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우리가 보는 태양은 수많은 별들 중 하나일 뿐, 무한한 우주 공간에는 수없이 많은 태양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모든 별들의 위치가 상대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태양도 다른 별도 우주의 중심일 수 없다. 우리의 지구와 태양계는 어떤 고유한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우주 안에는 우리와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태양계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데, 현재 상황은 유일한 무한한 존재가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며, 이 존재의 영혼이 세계영혼이다. 우주 안에 각각의 지적인 존재는 의식적이고 불멸하는 원자로, 그 자체로 창조 과정 전체를 반영한다. 신과 자연을 동일시한 브루노의 생각은 스피노자를 예견하게 하고, 이성적 원자에 관한 그의 설명은 라이프니츠를 예견하게 한다.

1-4. 헤르메스 교단을 지지한 브루노의 태도와 여러 우주가 존재한다는 그의 이론은, 신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육체로 태어났고 명확한 신의 계시라는 정통 교리를 가진 기독교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브루노는 잉글랜드를 떠난 후 잠시 비텐베르크에서 루터교신자로 인정받았고, 1591년에 취리히에서 강의도 했다. 1592년 그는 베네치아 총독의 초대로 그곳에 가 바로 종교 재판소 감옥에 갇혔다. 그 다음 해 로마의 종교 재판소 감옥으로 옮겨진 후 약 7년에 걸친 길고 지루한 재판을 거쳐 1600년 이단의 죄로 로마의 꽃의 광장(Campo dei Fiori)에서 화형을 당한다. 지금 그곳에는 그의 동상이 서있다고 한다. 브루노가 자신의 저술에서 표현한 사상은 기독교의 정통성에 어긋난다. 그의 재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일관되게 자신의 사상을 옹호했고, 이 때문에 이단 심문관이 브루노를 이단자라고 판결하는데 꽤 오랜 기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다수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이론이 오늘날 우주과학자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유행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브루노를 과학의 순교자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브루노의 사상은 관찰과 실험을 통한 것이 아닌, 신비주의 전통 및 경험과 무관한 철학적 사변에 기초하였다. 그리고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이단의 판결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마법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이단의 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