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의 도덕적 상승과 니체의 가치전도

Ⅰ. 키르케고르의 도덕적 상승

 

1-1. 키르케고르의 도덕 체계는 쇼펜하우어의 도덕 체계와 많이 비슷하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의 도덕적 조건에 대해 철저히 염세주의적이고, 단념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발전 과정을 나타낸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체계는 무신론적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하는 반면, 키르케고르의 체계는 개신교 신앙을 배경으로 전개되고, 그에게 도덕적 인생의 최고점인 단념은 결국 신앙으로의 도약을 위한 준비 단계일 뿐이다. 쇼펜하우어의 프로그램은 개체성(individuality)을 없애는 쪽으로 나아가는 데 입안된 반면, 키르케고르의 목적은 유일무이한 신의 피조물인 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완전히 소유하는 데에 있다.

1-2. 키르케고르의 현재 관심사는 심미적 단계와 종교적 단계 사이에 있는 도덕적 단계다. 그가 말하는 심미적인 사람은 자신의 느낌에 좌우되고 정신적 가치에 무감각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심미적인 사람을 힘 좋은 시골뜨기 혹은 성도착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사람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두 주인공 중 한 사람으로, 세련되고 법을 잘 지키고 사회에서 인기 있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 사람이 진지한 도덕적 행위자와 다른 점은, 직접 매력을 느끼는 것이면 곧바로 추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선택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관공서나 개인 사무소에서 일을 하지 않으려 하고, 깊은 우정을 맺는 것이나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한다.

1-3. 키르케고르는 사실 자유는 지극히 제한적이라서, 심미적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을 지하실과 1층 2층으로 이루어진 집으로 설명한다면, 인간의 영혼은 정신적 존재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심미적 인간은 지하실, 심미적인 것의 범주 안에 거주하길 좋아하고 자신의 지하실만 사랑한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그와 같은 인간은 절망 상태에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말하는 ‘절망’은 침울하거나 낙담한 상태가 아니다. 심미적인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다. 키르케고르의 어법에 따르면, 절망한 사람은 현재의 삶보다 더 높은 무언가를 성취할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절망하는 것은 더 높은 정신적 자아를 성취할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이러한 절망은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세상의 볼모가 된다’고 말한다.

1-4. 구원을 향한 첫 번째 단계는 세상 사람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심미적 사람의 행복 깊숙한 곳에 이미 불안한 공포가 깃들여 있고, 그 자신의 방탕으로 인해 자신이 해체된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른다. 그는 절망하는 자신을 포기할 건지, 아니면 자신을 도덕적 인생으로 넘겨 상승의 길을 갈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1-5. 도덕적 인생의 본성 그리고 도덕적 인생을 살아야 할 필요성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제 2부 가명 저자 빌헬름 판사의 편지에서 상세히 설명된다. 빌헬름 자신은 도덕적 사회의 완전히 헌신적인 구성원이다. 유감스럽게 독자가 보기에 그는 답답하고 반복하는 방식의 문체를 사용하는데, 이 문체는 이제 교화시키는 편지의 수령인이 된 『이것이냐 저것이냐』 제 1부의 심미적 저자에게 키르케고르가 부여한 익살맞은 통속 소설같은 문체와 완전히 구별된다.

1-6. 빌헬름은 심미적 인격과 도덕적 인격 사이의 큰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모든 심미적 인생관이 절망이라고 말하는데, 이 인생관이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기반으로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적 인생관은 존재에 속하는 것을 그 인생관의 본질적 속성으로 삼아 인생을 설립한다. 심미적인 것은 어떤 사람이 현상태의 바로 그 사람이도록 하고, 도덕적인 것은 어떤 사람이 앞으로 다른 어떤 사람이 되도록 한다.”

키르케고르는 자아(self) 개념을 매우 중요시 했다.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의 재능이나 덕을 갖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자아를 갖기를 결코 진지하케 원할 수 없다. 심미적 단계의 자아는 성숙하지 못했고 개별화되지 않았다. 도덕적 단계에 들어가는 진정한 자아 형성을 하는데, 여기서 ‘자아’는 자유롭게 선택도니 인격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 단계의 자아는 자신의 재능을 개발하기만 하지 않고, 자신의 소명 의식을 따른다. 도덕적 인생은 의무의 인생으로, 이때의 의무는 외부에서 가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에서 깨달은 의무이다. 개인의 진정한 발전은 보편 법칙의 내면화를 포함한다.

“개인 자신이 보편적인 것일 때야 비로소 도덕적인 것이 실현될 수 있고, 이것이 양심의 비밀이다. … 그는 자신을 보편적인 사람으로 만드는데, 자신의 구체성을 스스로 벗어 버림으로써가 아니라, 스스로 구체성의 옷을 입은 채 그것에 보편적인 것을 침투시킴으로써 보편적인 사람으로 만든다.”(E/O 547)

외국어 문법을 보면 어떤 특정한 낱말이 명사의 어형 변화와 동사의 형태 변화를 예증하는 모범 사례로 선택되는데, 그 낱말은 개개의 명사와 동사 모두에 관해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이처럼 빌헬름이 따라야 할 모범 사례는 개인적인 덕의 습득 통해서, 시민의 덕을 통해서 인도하고, 최종적으로 종교적인 덕으로 마무리한다. 키르케고르가 도덕적 사람의 모범 사례로 제일 많이 선택한 사람은 소크라테스로, 그의 삶은 도덕적 단계가 개인에게 엄격한 요구를 할 수 있고, 영웅적인 자기 희생을 요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증했다.

1-7. 빌헬름 판사는 그의 체계에서 도덕적인 것이 최고 범주가 아니기 때문에, 도덕성에 관한 키르케고르의 최종 발언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 자신이 도덕적 인생의 두 가지 특징인 직업도 갖지 않았고, 자신과 가족의 기구한 운명으로 행복한 결혼의 필수 요소를 실행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이 도덕적 인생의 요구 사항들에 직면할 때 인간의 나약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고, 강인한 의지로 나약함을 극복하려 하지만 역부족임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덕 법칙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이것을 그는 죄책감과 죄의식으로 끌고 간다. 이 상태를 벗어나고 싶다면, 도덕적 영역으로부터 ‘신앙의 영역’인 종교적 영역으로 도약, 상승해야만 한다.

 

 

Ⅱ. 니체와 가치 전도

2-1. 니체는 기독교적인 삶을 살도록 요구하는 것이 근거에 입각해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라는 키르케고르의 견해에 동의했으나, 그는 ‘단순한 근거라도 그만큼 더 나쁘다’고 한 반면 니체는 ‘기독교 신앙을 요구하면 그만큼 더 나쁘다’고 단언했다. 니체는 기독교 신앙이 인간을 비겁하게 만들고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것이 주된 불만이었다. 『도덕의 계보』와 같은 저작들에서 그는 기독교 도덕의 주장들에 관한 논박이 아닌 비천한 혈통을 추적한다.

2-2. 니체는 역사에 두 가지 종류의 도덕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고대의 강력한 특권 귀족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계급에 속한다고 느끼고, 자시의 자질들을 ‘좋은 것’으로 묘사했고, 평민의 특성을 ‘나쁜 것’으로 간주했는데, 이것이 바로 주인도덕(master morality)이다. 귀족들의 능력과 재산을 불쾌히 여기고 가난하고 약한 자는 이 체제를 완전히 뒤엎어서, 하층민을 위한 대조적인 가치 체계를 세웠다. 그들은 귀족형의 사람을 나쁜 사람 그리고 흉악무도한 사람으로 보았다. 니체는 이 새로운 체제의 설립을 ‘가치 전도’라고 불렀고, 이를 유대인 탓으로 돌렸다.

“귀족의 등식을 뒤바꿔 정반대 등식을 놀라울 만큼 일관된 논리로 과감하게 제시하고 뿌리 깊은 증오의 힘으로 그 등식을 끝끝내 고수한 것은 유대인들이었다.”(GM 19)

유대인에 의해 시작된 노예의 반란은 기독교의 상승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귀족적 덕의 고국이었던 로마에서도 네 명의 유대인 예수, 마리아, 베드로, 바울에게 머리 숙여 경배한다.

2-3. 기독교 자체가 사랑의 종교를 표방하지만, 니체에 따르면 사실 나약함과 공포와 악의의 종교다. 기독교의 주된 동기는 원한, 즉 약자가 강자에게 복수하려는 욕구로, 이 욕구는 죄인을 벌하려는 욕구로 가장되어 있다고 니체는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신 명령의 집행자인 양 행세하지만, 사실 그들의 떳떳하지 못한 마음을 숨기는 것일 뿐이다. 기독교인들은 동정심을 덕으로 떠받들지만, 그들이 고통 받는 자를 돕는 것은 그들을 대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연민은 온정적인 사람에게 타인의 고통을 감염시키는 독약이다.

2-4. 기독교의 성공은 인류의 퇴보를 가져왔다. 나약한 자에 대한 제도적인 배려는 인류의 건강과 강인함을 해치게 되었고, 현대인은 진정한 인간이 되려는 의지를 상실한 난쟁이에 불과했다. 인류가 타락에서 구원받으려면, 첫 번째 단계는 제 2의 가치 전도를 단행하여 기독교의 가치를 뒤엎는 것이어야 한다. 니체는 『반기독교』에서 ‘나약한 자와 실패한 자는 멸망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인류를 사랑하는 첫 번째 원칙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인간 진화의 상향선을 그리는 ‘상승하는’ 사람들과 하향선을 그리는 ‘하강하는’ 사람들, 두 유형으로 나뉜다.

2-5. 그러나 우리가 뒤엎어야 할 것이 기독교 도덕만이 아니라, 노예 도덕의 특징인 선과 악의 대립도 넘어서야 한다. 진리를 근본적인 가치로 간주하는 것은 기독교인만이 아니다. 하지만 니체는 판단이 잘못이라는 이유만으로 판단에 반대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문제는 판단이 어느 정도까지 생명을 활성화하고 생명을 보존하며, 어느 정도까지 종을 보존하고 경우에 따라 종을 향상시키기도 하느냐는 것이다. … 허위를 삶의 조건으로 인정하고 전통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이런 일을 감행하는 철학은 이미 그 자체가 선과 악을 넘어 저편에 있다.”(BGE 7)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없이는 특정한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과오다. 생명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고의 가치다. 인간의 생명은 지금까지 발생한 최고 형태의 생명이지만, 현대 세계에서 인간의 생명은 그에 앞서 발생한 일부 형태의 생명 수준으로 퇴보했다. 우리는 생명을 확인해 그것을 새로운 수준, 즉 주인과 노예에 대한 정립과 반정립을 초월하는 종합의 상태인 초인(超人, Ubermensch)의 수준으로 이끌어야 한다.

2-6. 초인의 선은 니체의 신탁과 같은 대변인 차라투스트라의 예언적 메시지다. 초인은 삶의 최고 형태, 삶에 대한 의지에 대한 최종 확인이다. 우리의 삶에 대한 의지는 모든 생명의 비밀인 힘에 대한 의지(will to power)여야만 한다. 쾌라은 힘의 발휘에 대한 자각에 불과하고 지식은 힘의 도구에 불과하다. 인간 능력의 최고의 실현은 초인의 창조일 것이다.

2-7. 인간성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초인에 이르는 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다. 즉 인간은 건너야 할 다리지 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초인은 진화의 힘이 아니라 오로지 의지를 발휘함으로써 나타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의지로 하여금 “초인이 세상을 의미있게한다”라고 말하게 하자.’

2-8.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그대들은 반드시 초인을 창조할 수 있다. 그대들 자신은 혹시 초인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대들은 자신을 초인의 조상이자 선구자로 변형시킬 수 있다.’ 초인이 등장함으로써 세상이 완벽해지고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역사는 영구히 순환하기 때문에 초인의 등장은 역사의 종말이 아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초인과 같이 무수한 초인이 등장할 것이다.

2-9. 초인은 어떤 존재인가? 만약 초인의 특성이 인간의 선과 악을 판단하는 어떤 기준이 된다면 우리는 초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 필요가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도, 후기의 니체도 더 이상 초인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더 높은 수준의 인간’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는데, 우리는 저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다양한 재능을 최대한 개발한 괴테와 나폴레옹의 조합이 니체의 이상인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이 조합은 ‘그리스도의 영혼과 카이사르’의 조합보다 더 그럴 듯하다.

2-10. 니체의 저작은 대개 종잡을 수 없고, 학자들마다 해석과 평가가 천차만별이라 니체의 윤리학을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니체가 잔임함의 도덕성과 같은 그런 문제에 어떤 입장인지 알기 쉽지 않다. 그는 노예 도덕에서 죄책감이 하는 역할을 집요한 광신자가 가하는 고문을 격렬하게 묘사하는 반면, 귀족적인 ‘금발의 야수’의 난폭함에 대해서는 온정적인 묘사를 한다.

2-11. 확실히 니체는 전쟁에 관한 열렬한 지지자로, ‘전쟁을 단념하는 것은 위대한 삶을 단념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전쟁은 자유를 교육시키고 자유는 승리를 즐기는 남성적 본능이 행복에 대한 욕구를 비롯해 다른 본능들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2-12. 자살 역시 어떤 상황에서는 니체의 칭찬 대상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자랑스럽게 살 수 없다면 자랑스럽게 죽어야 한다. 자유롭게 선택된 죽음, 아이들과 입회인들에 둘러싸여 기꺼이 즐겁게 맞이한 적절한 시기의 죽음 – 작별을 고하는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 진정한 작별이 여전히 가능하도록 하는 죽음 – 이 모든 것은 기독교가 죽음을 맞이하여 행하는 섬뜩하고 가련한 희극과 대조를 이룬다.”(TI 61)

당신이 자살을 한다면, 매우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생존권은 대부분 당신에게 달려 있다.

2-13. 그래도 어쨌든 니체는 윤리학자인가? 그는 선과 악에 대해 좀처럼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진정한 도덕가인가, 아니면 옳고 그름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철저한 무도덕한(amoral) 사람인가? 니체는 과거의 몇몇 훌륭한 도덕가들과 동일한 분야에 속해 있다. 반면 니체 자신은 선과 악은 기발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과 악의 범주를 완전히 초월해 있다고 공언한다. 그는 대부분의 도덕 체계에 포함되어 있는 정의와 죄책감 이 핵심 개념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2-14. 내가 생각하기에 해결책은 니체가 인간의 번영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전통 도덕과 나누어 갖는 것이다. 그가 여러 관습적 덕을 비난하는 이유는 관습적 덕이 가치있는 삶을 성취하도록 돕지 않고 훼방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선함보다 위대함을, 신사보다 귀족을 선호하며, 근본적으로 자신은 좋은 삶의 도덕적 기준보다 미적 기준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상적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뿐더러 아예 이웃을 갖지 않는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1.1대부분의 도덕 체계에서 행복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도덕철학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오랜 세월동안 행복을 최고선으로 간주했으며 심지어 인간이 모든 선택 상황에서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벤담이 모든 행위가 행복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향성에 따라 평가되어야한다고 했을 때 그 의견은 오랜시간동안 지속된 대다수의 의견을 재천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벤담의 최대 행복의 원리는 전통적인 행복주의(eudaimonism)와는 매우 다르다.

우선, 벤담은 행복과 쾌락을 동일시했다. 행위의 최고 원동력은 쾌락으로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pain)과 쾌락(pleasure)이라는 두 군주의 지배를 받게 했다. 고통과 쾌락만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도록 하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알려 준다. 두 군주는 한 손에는 옳고 그름의 깃발을, 다른 손에는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붙잡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가 복종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일수록 그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될 따름이다.

따라서 벤담의 경우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은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플라톤이 덕을 쾌락과 고통의 올바른 선택이라고 보기 때문에 공리주의자들은 플라톤을 선조로 삼기도 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과 쾌락을 구별하고 특히 행복을 감각적 쾌락과 동일시했다. 하지만 벤담은 행복을 쾌락과 동등한 것으로 보고 쾌락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감각으로 간주했다.

1.2벤담은 괘락이 먹고 마시고 성행위를 함으로써 일으켜질 수 있는 감각일 뿐만 아니라, 부를 얻는 것, 동물을 돌보는 것, 신이 좋아서 믿는 것처럼 다양한 수많은 다른 것들에 의해서도 일으켜질 수 있는 감각이라는 점을 주의 깊게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벤담의 쾌락주의(hedonism)는 관능적 충동과 다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쾌락은 즐거운 활동인 반면 벤담의 경우 즐거운 활동과 그에 따른 쾌락은 인과관계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쾌락의 가치는 즐기는 활동의 가치와 동일한 반면 벤담에게 개개인의 모든 쾌락의 가치는 그것이 어떻게 일으켜지든 간에 동일한 것이다. 벤담은 ‘쾌락의 양이 같다면, 압정놀이나 시나 매한가지다.’라고 했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고통의 양은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고통의 부정적 가치를 측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리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쾌락과 고통의 정량화이다. 벤담은 이 일이 결코 사소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쾌락과 고통의 측정법을 내놓았다. 만일 쾌락 A가 더 강하고, 더 오래 지속되고, 더 확실하고, 더 가까이 있다면 쾌락 B보다 양이 더 많은 것으로 계산된다. 이 같은 요인들은 ‘행복계산법(felicific calculus)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하고 서로 비교 검토되어야한다. 우리는 여기서 생산성과 순수성도 고려해야하는데, 생산성은 유쾌한 행위가 계속 연달아 쾌락을 산출하는 것을 말하고 순수성은 그렇게 계속 지속하지 않을 경우를 말한다. 또 만일 공공정책을 고려중이라면 우리는 더 나아가 고통과 쾌락이 그 집단을 가로질러 얼마나 널리 퍼져 나가는 지에 대한 확장성을 고려해야한다.

2.1.그러나 이러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인상적인 슬로건을 면밀히 조사한다면 애매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첫 번째 제기되는 의문은 ‘무엇이 최대 다수인가?’이다. ‘유권자’, ‘시민’, ‘남성’, ‘인간’, ‘의식 있는 존재’ 등 무엇이 최대 다수에 해당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공리주의에 열성적인 추종자들은 대부분 ‘인간’이라고 답했을 것 가고 이것이 벤담이 제시했을 법한 대답으로 여겨진다.

최근에 많은 공리주의자들은 동물들도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면서 행복 원리를 인류를 넘어 그 밖의 의식 있는 존재들에까지 확장하였다. 벤담이 고양이 애호가였다해도 그는 자연법 권리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까지 동물들에게 권리를 확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감각의 문제를 최고의 도덕적 기준으로 설정함으로써, 동물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동물들을 우리 자신과 동일한 도덕 공동체로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벤담이 고전적이고 기독교적인 도덕전통을 깨뜨린 것으로 가장 의미심장한 귀결들 중 하나가 되었다.

2.2공리성 원리에 관한 두 번째 의문은 이렇다. 개인이나 정치가는 최대 행복의 원리를 따를 때 행복의 대상자 수를 통제하려고 해야만 하는가? 행복을 더 많은 수의 행복으로 확장한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또는 동물들)이 생겨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더 까다로운 의문, 어떤 집단의 행복을 측정할 때 오로지 전체의 행복만 고려하는가, 아니면 평균적인 행복도 고려해야하는가? 행복의 양뿐만 아니라 행복의 분배도 고려 대상으로 삼아야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의 양과 사람 수 간의 조화 문제에 직면한다.

이 쟁점은 도덕철학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철학의 문제다. 그러나 우리의 고려 대상을 개인적인 도덕의 문제로 제한한다고 할지라도, 심리적 쾌락주의(쾌락이 우리 모든 행위를 결정한다)와 윤리적 쾌락주의(쾌락은 옳고 그름의 표준이다) 간의 이중적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그러나 심리적 쾌락주의에서 언급된 쾌락은 개인의 쾌락이고 윤리적 쾌락주의에서의 쾌락은 도덕 공동체 전체의 쾌락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내가 모든 행동에서 자신의 쾌락을 극대화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내가 공익을 극대화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벤담은 공리주의를 다른 윤리 체계와 대조함으로써 공리주의의 장점을 내세웠다.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두 번째 장의 제목이 ‘공리성의 원리에 반대되는 원리들에 대하여’이다. 이 원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금욕주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공감과 반감의 원리이다. 금욕주의 원리는 행복의 양을 감소시키는 정도에 따라 행위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공리성 원리의 반대원리이다. 반면 공감과 반감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행위를 좋거나 나쁜 것으로 판단한다.

벤담은 금욕주의 원리를 하나의 허수아비로 여긴다. 종교적 전통은 실제로 극기와 육체의 금욕을 높이 평가했으나, 정작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자기 자신을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것을 모든 행위의 지밸 원리로 삼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종교적인 사람이건 세속적인 사람이건 최대 다시의 최대 불행을 추구하는 정책을 제안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벤담 자신은 ‘어떤 생물체도 금욕주의 원리를 일관성 있게 추구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공감과 반감의 원리는 매우 다른 종류의 도덕체계들이 들어있는 잡동사니 보관함이다. 벤담은 공감과 반감에 대해 도덕감, 상식, 이해력, 자연법, 올바른 이성 등 그럴듯한 명칭들을 가지고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철저히 옹호하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도덕 체계들은 모두 어떤 외적 표준에 호소하는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갖가지 계략들, 그리고 저자의 정서나 의견을 도덕 체계 자체에 대한 근거로 받아들이도록 독자를 설득하기 위한 갖가지 계략들로 이루어져있다.’ 또 ‘신의 기쁨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어떤 것을 신의 기쁨이라고 믿는다거나 신의 기쁨으로 여긴다고 공표하는 사람이 누구이건 간에 그 사람의 선량한 기쁨과 똑같고, (계시를 제외하면) 반드시 똑같을 수밖에 없다.’

2.3벤담은 공리주의와 그 밖의 도덕 체계 사이의 진짜 중요한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도덕철학자들을 절대주의자와 결과주의자로 나눌 수 있다. 절대주의자는 본래 그 자체가 그르고, 결코 행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행위가 있는 다고 믿는 반면 결과주의자는 행위의 도덕성이 행위 결과에 의해 판단되어야한다고 믿는다. 결과주의자들은 특수 상황에 이르면 행위 결과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부류의 행위는 없다고 믿는다. 벤담 이전 철학자들은 대부분 자연법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절대주의자였다. 만일 자연권과 자연법이 있다면 자연권을 침해하거나 자연법과 상충되는 그런 종류의 행위는 행위 결과와 관계없이 잘못으로 판명된다.

벤담은 그 어떤 두 사람도 자연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법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권리가 실정법에 의해서만 부여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연권이 무시될 수 없다는 생각을 엄청난 조롱거리로 삼았다. ‘자연권은 전혀 말도 안 되는 허튼소리이고, 자연적인 불가침의 권리는 수사적으로 과장된-죽마(竹馬) 타고 호언장담하는-허튼소리이다’

벤담과 이전 윤리학자들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은 대단히 중요한데, 그것은 아주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그리고 거의 모든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간통이 언제나 잘못이라고 믿었지만 벤담의 경우 그렇지 않다. 도덕 판단을 내리기 전에 간통을 범한 특정인이 예견한 결과들을 고려해야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분석철학

4.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분석철학

 

 

1) 옥스퍼드의 형이상학 교수 라일은 1949년 <정신 개념>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라일은 능력지(knowing how)와 명제지(knowing that)의 구별을 강조했다. 2)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가 1953년에 유작으로 세상에 나오자, 생생하기는 했으나 투박하게 전개되었던 라일의 생각이 이제야 훨씬 더 치밀하고 심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5) 비트겐슈타인이 죽은 뒤 많은 사람들은 콰인을 영어권 철학의 일인자로 간주했다. 6) 철학에서 콰인의 목적은 고학 특히 물리 과학의 용어를 이용한 자연주의적 세계 설명의 기본 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경험주의자이면서 행동주의자인 그는 언어 분석에 의해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세계를 설명하는 모든 이론은 우리 감각에 입력된 것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7)콰인은 철저하게 경험주의적인 프로그램을 추구했으면서도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독단’으로 철학에 첫 번째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공격의 두 표적을 다음과 같은 말로 진술했다. ‘하나는 분석적 진리와 종합적 진리, 즉 사실의 문제와 무관하게 의미에 근거하는 진리와 사실에 근거하는 진리 사이에 근본적인 어떤 틈이 있다는 신념이다. 또 하나의 독단은 환원주의이다. 즉 개개의 의미 있는 진술은 직접 경험을 지칭하는 용어들로 이루어진 어떤 논리적 구성체와 동치라는 신념이다.’ 8) 콰인에 따르면, 검증되거나 반증되는 것은 단일 문장들이 아니라 체계 전체라는 것이다. ‘외부 세계에 관한 우리의 진술들은 개인이 아니라 오로지 법인의 신분으로만 감각 경험의 심판을 받는다.’ 9) 콰인은 신념이나 이해와 같은 내포적 개념의 도움을 받아 해석되어야 하는 그런 의미란 없다고 단언했다. 의미는 언어 행동에 영향을 주는 감각적 자극들을 사상(mapping)함으로써 순전히 외연적인 용어들로 설명되어야 한다.

 

10) 콰인의 사고 실험 결과는 세 수준의 불확정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첫째, 개별적인 지칭 대상의 불확정성이 있다. 둘째, 언어 전체의 수준에 불확정성이 있다. 11) 우리는 세계에 대한 어떤 고정된 지식이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콰인의 초기 논문 ‘있는 것에 관하여’에서 ‘있는 것은 경계 변수’의 값이 있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12) 비트겐슈타인과 콰인은 유럽 대륙에서 유난히 분석철학의 지도적인 대표자 두 사람으로 간주되곤 했다. 사실 그들의 철학은 매우 다르다. 특히 두 사람은 철학의 본성에 관해 의견이 달랐다. 콰인은 분석-종합 구분에 대한 불신 때문에 철학과 경험 과학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가르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은은 과학주의, 즉 철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보려는 시도를 몹시 싫어했다. 13) 그러나 미국에서는 콰인에 의해 도입된 과학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데, 가장 설득력 있는 대표자 한 사람이 콰인의 하버드 제자인 데이비슨이었다. 14) 데이비슨의 의미 이론은 진리 이론을 기반으로 한다. 진리 이론은 유한한 용어 목록과 유한한 구문론적 규칙들을 포함할 텐데, 그로부터 도출된 주장들로서 ‘ “S”는 p인 경우 오직 그 경우에서만 L에서 옳다’는 형식을 지닌 잠재적으로 무한한 수의 진리 문장들을 수반할 것이다.

 

15) 콰인과 마찬가지로, 데이비슨은 완전히 낯선 언어를 가진 공동체와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를 고려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예증한다. 그 언어를 해석하려면 우리는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문장에 동의하는가를 관찰함으로써 그들의 언어에 대한 진리 이론을 세워야 한다. 16) 사람들의 실제적인 행동은 그들의 이유, 말하자면 데이비슨이 정신적 사건이라고 말하는 욕구와 신념에 의해 결정된다. 이와 같은 정신적 사건과 정신적 사건에 의해 ‘합리화되는’ 행위의 관계는 인과적 관계이다. 그러나 데이비슨의 경우에는 그 인과 관계가 느슨하다.

 

16) 데이비슨은 물리적 사건이 아닌 사건은 결코 없다는 점에서 물질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는 ‘정신적인 것의 변칙성’이라는 것을 역설함으로써 이런 식의 자극적인 물질주의를 완화시키려고 한다. 어느 정신적 사건이든 물리적 사건과 동일하지만, 정신적인 것으로서의 사건과 물리적인 것으로서의 사건은 서로 다르게 기술된다.

 

17) 영국에는 줄곧 과학과 철학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믿는 철학자들과 그 경계가 정말 모호하다고 믿는 철학자들이 있었다. 라일이나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들은 철학의 목표가 정보가 아니라 이해라고 주장했다. 스트로슨은 자신의 개인 교수인 그라이스와 함께 ‘독단에 대한 옹호’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분석-종합 구문에 관한 콰인의 공격을 논박했다.

 

18) 기술형이상학은 세계에 관한 우리 사고의 구조를 개선하려는 야심을 갖지 않고 그 사고의 실제 구조를 기술하고자 한다. 19) 스트로슨은 물질적 신체와 개인이 우리의 개념 지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 즉 이 두 종류의 개별자가 기본적인 개별자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다. 20) 스트로슨의 경우, 물질적 신체 못지않게 개인 역시 기본적인 논리적 범주이다. 그러므로 원초적인 것은 정신 개념이 아니라 개인 개념이다. 그런데도 스트로슨은 신체가 죽은 뒤 자기 개체의 생존을 생각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었다. 21) 스트로슨은 2006년 초 자신의 죽음으로 영국철학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자크 데리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자크 데리다

 

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1-1. 하이데거에게 잠시 배운 적이 있는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는 우파 실존주의인 하이데거와 다르게 정치적 좌파로의 실존주의 형태를 전개했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1924~1928년에 고등사범학교에 수학했고, 몇 년간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는 1933~1935년에 베를리 대학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는데, 그의 철학은 1936년에 「자아의 초월성」과 「상상력 : 심리학적 비판」이라는 두 논문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 논문들은 소설 『구토』(1939)와 『감정 이론 개요』(1939)로 이어졌다.

1-2. 사르트르의 전쟁 이전 에세이들은 현상학적 틀 안에서 심리철학을 연구한 것들이다.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그는 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을 충분히 해내지 못했다고 불만스러워했다. 후설은 데카르트의 자아인 사고 주체를 의식의 자료로 인정했으나, 사실 데카르트의 자아는 의식의 자료가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던 것에 몰두할 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자아를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오직 반성적 사고를 할 때뿐이므로, 철저한 현상학자가 되려면 전-반성적(pre-reflective) 의식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아, 즉 사고 주체는 의식의 외부에 있고, 따라서 타인의 정신처럼 의식을 초월한 세계에 속한다.

 

1-3. 사르트르는 「상상력」에서 널리 알려져 있고 특히 흄이 말한 관념, 즉 내적인 정신세계의 내용을 상상 속에서 관찰한다는 관념을 공격했다. 사르트르는 지각과 상상 모두 심상이나 환영의 정신적 현전(現前, presence)에 있다고 생각하고, 지각된 이미지가 상상의 이미지보다 더 강렬하고 생생하다는 것이 그 둘의 유일한 차이점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임을 보였다. 그에 의하면 상상은 내적 이미지가 아니라 지각과 마찬가지로 정신 외적 대상과 관련을 맺지만, 관련을 맺는 양상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이 실제로 현존하지 않을 경우, 우리가 하는 일은 어떤 대상을 세계에 창조하는 것이다.

1-4. 그에 의하면, 감정을 수동적 내적 감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감정은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우리 환경에 대한 불편부당한 인식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마주치는 상황에 대한 ‘마술적 변형’을 감정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울할 때 우리는 세상을 향해 마술을 건 나머지, 온갖 노력이 허망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1-5. 1939년에 전쟁이 일어나자 사르트르는 징집되어서 1년 후 독일군의 포로가 될 때 까지 싸웠다. 휴전 후 풀려난 그는 파리에 철학 선생으로 돌아왔으나, 나치 점령군에 맞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기도 했다. 1943년에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받은 그의 대표작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가 출간되었다. 『존재와 무』의 일부분은 『존재와 시간』에 못지않게 난해하다. 그러나 소설가와 극작가이기도 한 그는 철학의 핵심들을 상세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예시하는 재능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그는 『실존주의와 휴머니즘』에서 저작의 주요 주제들을 더 간략하고 더 대중적인 방식으로 다뤘다.

1-6. 사르트르의 경우, 존재는 우리가 의식 속에서 마주치는 서로 다른 모든 종류의 사물들과 모든 양상의 사물들에 선행하고 기초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과 목적에 따라 우리는 사물을 종류와 집합으로 구별한다. 의식이 만들어 낸 모든 구별의 옷이 사라지면, 우리는 불투명하고, 단일하고, 우연적인 순수 존재, 존재 자체, 즉자존재(卽自存在)로 남는다. 그것은 ‘이유도 없고, 원인도 없고, 필연성도 없다(BN 619).’ 원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그 자체의 원인, 즉 자체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그렇게 거기에 있을 뿐이다. 사르트르는 그것을 ‘무상(無償, gratuitous)’, 때로는 ‘잉여(剩餘)’라고 말했다.

1-7. 즉자존재는 『존재와 무』의 두 가지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다른 하나는 대자존재(對自存在), 자존적 존재, 즉 인간의 의식이다. 이것이 제목의 무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사르트르는 무를 통해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한다. 존재에 대한 부정은 대자와 즉자를 구별해주는 요소이다.

1-8. 사르트르는 여기서 하이데거의 기본 주장을 부연하여 설명한다. 영어권 철학자들은 ‘무가 무화한다(nothing noths)’를 하이데거의 언명을 불합리한 극치로 간주하지만, 사르트르는 무의 객관화이고 무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인다. 의식이 세계를 명확히 표현할 때 의식은 부정을 수단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내가 빨강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면, 나는 세계를 빨강과 빨강-아닌-것으로 나눈다. 내가 의식과 존재를 구별하고자 한다면, 나는 의식이 존재-아닌-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세계에 무를 나타나게 하는 존재는 그 존재 자신의 무가 아니면 안된다.’ (BN 23)

1-9. 역사가가 보면, 그것은 마치 파르메니데스가 생각해 냈고 오래전에 플라톤이 해결했던 수수께끼를 사르트르가 재도입한 것처럼 보인다. 1945년에 에이어(A. J. Ayer)가 사르트르가 무를 다루는 방식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길을 보니 아무도 없다(she sees nobody on the road)라고 말할 때 나타낸 왕의 반응과 비교했다. ‘정말이지 내가 저런 눈을 가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니! 그것도 저 정도 거리에서 말이야!’ 『존재와 무』에는 제목이 사르트르의 ‘무화(無化)’에 대한 설명과 무관하게 중요한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대부분의 대상들은 본질이 실존에 앞서지만, ‘실존이 본질에 앞서게 되는 어떤 한 존재, 그 어떤 개념으로도 정의되기 이전에 실존하는 어떤 한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존재가 인간이다.’ (EH 66)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질에 앞서며,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한다. 인간은 어떤 종류에 속해있지 않고 각자 어떤 종류의 것이 될 것인지 결정한다. 인간의 자유는 대상들의 세계를 갈라놓는다.

1-10.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 개개인의 삶은 창조자나, 필연적인 원인이나, 절대적 도덕 법칙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내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필연성은 선택의 필연성이다. 인간의 자유는 절대적이지만 그 또한 불안한 것이기에 외면하려 하고, 도덕이나 사회가 미리 정해 준 역할을 따르려 한다. 그러나 자유를 은폐하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자기 자신을 단순한 대상으로 격하시키면서도 암암리에 자유를 느끼는 이중적인 마음을 갖게 되는데, 이것을 그는 ‘자기 기만(bad faith)’이라 일컬었다.

1-11. 바람직한 태도는 자신의 자유를 인정하고 긍정하며 자신의 행위와 삶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전통적 도덕적 명령이나 우연적 환경에 구속받아서는 안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는 물리적 한계가 있긴 하지만, 자신의 욕구와 계획을 조정하며 내가 직면한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나다. ‘나를 나이게끔 하는 유일무이한 최초의 기투(企投, project)에 직면하여 홀로 두려워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자유를 의식함으로써 모든 장벽과 철책은 무너지고 무효화된다. 존재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나라는 사실에 반하는 어떤 가치에도 나는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의지할 수도 없다.’ (EH 66).

1-12.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동안 그는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와 함께 파리 좌안(left bank)의 문화적이고 지성적인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아방가르드의 월간지 『현대』를 창간하고 편집했고, 성공적인 희곡들을 썼다.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즉자와 대자 이외에도 타자를-위한-존재(being-for-others)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것은 본래 내가 타자에게 나타나는 방식이고 타자에 의해 관찰되는 방식으로, 나는 타자에게 하나의 대상에 지나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질투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는 타자를-위한-존재의 고유 의미를 대립이라 했다. 그는 후기 저작에서 이 주제를 개진하고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1-13. 실존주의의 기본 방침이었던 절대적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자의 결정론이 쉽게 양립할 수 없었음에도 그는 공산당에 가까운 사회 정치적 입장을 취했다. 이와 같은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1960년에 『변증적 이성 비판』을 썼다. 그는 1964년에 노벨 평화상을 정중히 거절했고, 1980년에 죽었다.

 

Ⅱ. 자크 데리다

2-1. 1960년대에 접어들자 대륙철학과 영어권 철학 사이의 관계가 잠시 회복되는 듯 했다. 알제리의 유대인 집안 출신인 서른 두 살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1962년에 후설과 기하학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출간했다. 같은 해 옥스퍼드의 철학자 오스틴(J. L. Austin,1911-1960)의 강의록 『말과 행위』이 유작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책은 서로 다른 종류의 발화 행위들(speech acts)에 관한 이론을 주장하였다. 1967년에 데리다는 오스틴의 영향을 받은 독창적인 저작 『글쓰기와 차이』,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언어와 현상』을 내놓았다.

2-2. 그런데 두 철학자는 동일한 논제를 매우 다른 방식으로 다루었다. 오스틴은 1946년에 두 종류의 언어, 즉 사실 확인(constative) 언어와 수행적(performative) 언어를 구별했다. 사실 확인 문장은 ‘비가 내린다’처럼 사실의 문제로 상황이 어떠한가를 진술하는 데 사용된다. 수행적 발언은 사실을 보고하는 진술이 아니라 상황을 변화시키는 발화 행위를 일컬었다. 예컨대 ‘나는 이 배를 퀸 엘리자베스라고 명명한다’, ‘내 시계를 동생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2-3. 오스틴은 다른 많은 종류의 수행적 발언들, 즉 내기, 임명, 저주와 같은 발언을 분류하면서 외관상 간단한 진술 속에 숨어 있는 수행적 요소들을 확인해 나갔다. 일정한 발전 단계에 도달하자 그의 이론은 발화 행위의 세 요소인 발화(locutionary), 발화 수단(illocutionary), 발화 효과(perlocutionary)의 작용을 논의하는 방향으로 갔다. 누군가 ‘그녀를 쏴!’라고 말한다면, 발화 행위는 ‘쏴’의 의미와 ‘그녀’가 지칭하는 것을 구체화함으로써 명확해진다. 발화 수반 행위는 명령하거나 재촉하는 등의 행위이다. (발화 수반 행위가 목적을 달성한 경우에만) 발화 효과 행위는 ‘그는 나로 하여금 그녀를 쏘게 했다’라는 형태로 쓰여질 수 있다.

2-4. 오스틴은 서로 다른 종류의 발화 행위들과 발화 행위의 요소들을 구별하기 위해 여러 새로운 전문 용어들을 도입했는데, 그 용어들은 알기 쉬운 용어로 정의되고 실례를 통해 선명히 밝혀졌다. 전반적인 효과는 방대하고 중요한 언어철학 분야를 미시적인 수준에서 명료화하는 것이다.

2-5. 데리다의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그도 역시 전문 용어를 아주 많이 도입한다. 예를 들어 ‘gram’, ‘reserve’, ‘spacing’, ‘pharmakon’ 등의 용어들을 도입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전문 용어를 스스로 정의할 용의는 없었고, 만약 용어를 정의해달라는 요구를 받으면 어떻게 정의해도 마땅치 않다고 거절했다. 그가 제시하는 예증 실례들이 용어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잘 알아차리기 어려운 나머지, 평범한 형태의 용어는 오묘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2-6. 오스틴은 발화행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말로 하는 것과 글로 쓰는 것을 구별하는 데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철학적 논의 사항을 두 종류의 언어 사용에 적용했다. 다른 한편 데리다는 그가 말한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 즉 서양문화에서 지나치게 말하기를 강조하는 태도를 공격하면서 그 구별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현대 사회에 시민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을 감안하면, 데리다의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비난은 플라톤읜 『파이드로스』에 나오는 다수의 기이한 텍스트들에 입각해 있음이 분명했다.

2-7. 수행적 발화 행위들 가운데 약속하는 행위는 오스틴과 데리다 둘 다 관심을 가졌다. 오스틴은 약속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적절치 못한 상황을 교훈적인 방식으로 목록을 만들었다. 데리다는 모든 수행적 발화 행위에는 늘 죽음이 따라다닌다(‘누구든 약속을 완수하기 전에 죽을 수 있다’)는 말로 표현되는 상황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는 모두 어김없이 죽기 때문에 죽음의 가능성은 수행적 발화 행위와 아무 관련도 없다. 약속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자전거를 타는 일도 죽으면 그만이다.

2-8. 데리다의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적개심은 그가 말하는 ‘현전 형이상학’, 즉 의미와 진리에 대한 주장의 기반은, 의식 안에 주어진 익숙한 어떤 것이라는 생각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는 일차적으로 후설을 공격하려 했지만, 경험주의자의 감각 자료 개념 역시 유사한 비판에 열려 있었다. 그에 의하면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의미대상인 사고가 가장 이상적인데, 말하기가 글쓰기보다 사고와 더 가깝기 때문에 서양 전통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와 글쓰기 사이의 대립을 ‘해체하고’(deconstruct), 저자의 통제에서 벗어나 가지각색의 또 다른 해석을 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으로 글로 쓴 텍스트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했다. 어떤 사람들은 현전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공격이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개념의 해체와 기조는 다르나 기획 자체는 유사하다고 보았다.

2-9. 데리다는 초기 저작에서 대단한 철학적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나, 1967년 이후 그의 사상과 저작은 오스틴이나 비트겐슈타인, 현대 분석철학,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후설에 이르는 철학자들에 의해 이해된 철학과 현저하게 달라졌다. 데리다는 서로 혼동될 수 있는 개념들을 구별하고, 필요하다면 이 구별을 뚜렷히 나타내는 용어들을 창작하거나 개작하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새로운 용어를 도입하여서 완전히 다른 관념들을 오히려 혼동하게 만들었다.

2-10. 데리다가 대단히 자랑하는 ‘차연’(deferrence) 개념을 살펴보면, 차연은 연기(deferring)의 개념과 차이(difference)의 개념을 결합한 것으로, 그는 ‘차연은 지연으로서의 연기와 차이의 실제 작용으로서 다름(differing)이 서로 분리되기 전에 생각해 낸 것이다’고 말한다. 이처럼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을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는 그의 해설과 부연을 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가를 이해해보면, ‘그것은 대상의 이름이 아니며, 나타날 수 있는 어떤 “존재”의 이름이 아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은 어떤 개념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데리다의 텍스트에서 ‘차연’을 여러 가지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바로 그 자체가 차연의 한 실례일 수도 있다. 즉 차용증서들(IOUs)이라는 말은 정의(正義)와 완전 다르게 사용되고 실제적인 의미 부여를 미래로 연기한다.

2-11. 데리다는 저자들을 상대하는 방법, 즉 꽃다발 방법(nosegay method)이라 약칭하는 기술을 고안한다. 우리는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 동일한 낱말이 포함된 다수의 텍스트를 수집해서 문맥과 날짜, 텍스트의 발언자의 목소리를 알 수 없게 잘라내서 자연적 의미를 변형시킨다. 우리는 인상적이거나 자극적인 일부 주장을 한데 모아 묶어서 꽃다발로 선물한다. 이 기술은 전통적인 문학 비평에서 조금만 노력해도 되기 때문에 일부에서 유행하게 된다.

2-12. 후기의 데리다는 기발한 수사적 기교로 독자의 지속적 관심을 받는데, 특히 성공적인 수사 기술은 ‘논박할 수 없는 역설’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한다. 『그리마톨로지에서』에서 자주 인용된 문장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이다. 아주 매력적이고 충격적이고 주목할만하다. 흑사병과 유대인 대학살은 존슨의 비평집 『시인들의 삶』을 말하는 텍스트 사건과는 다르다. 그러나 후기 데리다는 텍스트가 글쓰기의 집합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한계, 실재의 한계, 역사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글쎄, 우리의 이야기는 우주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뿐이라면, 그것을 반박하는 것은 성급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을 맥락 속에서 보려고 노력하라는 권고는 분명히 건전한 충고이다.

2-13. 데리다는 자기가 실제로 노련한 수사학자인 듯 성과 죽음을 끌어들여 독자들을 일깨운다. 혼잣말은 자위가 성교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큰 소리로 말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독자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간질이지는 못했다. 요한 계시록에 ‘그리고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신다, 오라! 그리고 듣는 자에게 말씀하신다, 오라!’라는 구절을 그는 영어와 프랑스어의 ‘오라’(come) 낱말에 붙어 있는 텍스트에 관해 장광설을 늘어 놓는다.

2-14. 방금 예시한 그런 방식으로 데리다를 비판하는 것이 꼴사나워 보일 수 도 있으나, 그렇게 비판한 이유는 올바른 비평에 대한 그와 같은 흉내 내기가 바로 데리다가 후기 저작에서 채택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적 무기가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말장난, 외설, 키득거림이다. 후기의 데리다에는 어떤 신조도 찾아볼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데리다에게 냉담한 독자가 그의 신조를 이해 못 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자신의 저작이 명제들로 요약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실제로 그는 철학자가 되려는 야망을 때로 포기하기도 했다.

2-15. 그렇다면 비난이던 칭찬이던 철학의 역사 속에 데리다를 포함시키는 것이 부당하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말하든 그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진지한 철학자로 인정받았으니 그만큼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진짜 철학과 사이비 철학을 식별하는 일에 소홀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프로이트와 심리분석

 19세기 유럽 대륙과 영어권 나라들은 철학사상을 서로 지속적으로 교환했다. 프랑스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고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윌리엄 제임스는 미국에 근거지를 둔 상태로 독일에서 공부했고 영국에서 자주 강의했다. 젊은 시절의 러셀은 수학철학을 공부하는 동안 독일의 프레게나 이탈리아의 페아노와 정기적으로 교신했다. 이처럼 당시 철학은 범세계적이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자 대륙의 철학자들과 영어권 철학자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제 갈 길을 갔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러셀의 도움으로 세워진 분석적 전통의 철학이 학계를 지배했으며 유럽대륙에서는 장 폴 사르트르가 프랑스에서, 마르틴 하이데거가 주도한실존주의가 유행했다.

1. 프로이트와 심리분석

1-1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새로운 과학의 창안자로 인정받은 사람으로, 철학자는 아니었지만 20세기 영미철학적 사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자신이 프로이트주의자라고 말하는 철학자는 거의 없지만 그의 이론은 심리철학, 윤리학, 종교철학 분야의 사람들에게 참신하고 자극적이었다.

1-2

프로이트는 1856년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지방의 비율법주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860년 가족이 비엔나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의사교육을 받았으며 종합병원에서 두뇌해부전문의로 종사했다. 그는 신경학자 브로이어와 함께 히스테리 환자를 최면상태에서 치료하는 연구를 했고 3년 뒤 샤르코 밑에서 공부한 뒤 다시 돌아와 개업의사로 활동했다. 그해에 베르나이스와 결혼했고 여섯 아이가 태어났다.

1-3

프로이트는 정신질환을 색다르게 분석한 히스테리 관련 저작을 브로이어와 공동으로 출판했다. 이는 치료법으로 최면술이 아닌 정신분석을 이용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환자와 의사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치료법의 기초가 되는 전제는 환자의 심리적 외상(trauma)에 대한 기억의 결과가 히스테리 증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기억나는 모든 것을 맘놓고 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장기간 환자들을 지켜본 결과 정신적외상의 원인은 유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성적인 내용을 갖는다고 확신했고, 유아기의 성적취향의 대한 이론은 브로이어와의 불화를 불러왔다.

의학동료들에게 따돌림 당한 프로이트는 비엔나에서 시술을 계속했다. 1900년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인 <<꿈의해석>>을 출판했고 이 책에서 그는 꿈 또한 억눌린 성적 욕구의 간접적 표현이라고 주장했으며 제시된 이론이 정상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단언했다. 1년뒤 그의 정신분석 이론을 수정하고 개선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첫 번째 연속출판물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을 내놓았다.

1902년 비엔나 대학의 신경병리학 특별교수로 임명되어 제자와 동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중 아들러와 융이 뛰어났지만 결국 그와 결별하고 자신들의 학파를 만들었다.

1923년 프로이트는 <<에고와 이드>>를 출간하여 새롭고 정교한 잠재의식 분석을 제시했다. 그는 논쟁에 전혀 개의치 않고 <<환상의 미래>>에서 종교의 기원을 평가 절하하는 설명을 했다. 프로이트는 무신론자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문화에 동화하지 못하거나 반유대주의의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나치스가 정신분석을 금지시키고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그는 영국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저작들은 블룸즈버리 그룹의 구성원들에 의해 번역되고 출판되었다. 그후 16년동안 턱암으로 고생하다가 본인의 뜻으로 치사량의 모르핀주사를 맞고 1939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정신분석 연구는 막내딸 안나가 이어받았다.

1-4

프로이트는 초보자를 위한 강의에서 정신분석 이론을 두가지 기본적인 주장으로 요약했다.  첫째, 감정, 사고, 의지 중 어느 것이든 우리 정신생활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무의식이다. 둘째, 넓은 의미의 성적 충동은 정신질환의 잠재적 원인으로 뿐만 아니라 예술적, 문화적 창조의 원동력으로도 지극히 중요하다. 만일 예술작품과 문화에서 성적요소가 무의식적인 것이 된다면 이것은 사회화 과정중에 기본적인 본능이 희생되어 그것이 승화된것, 다시 말해 본능의 목적을 바꾸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불안정한 상태이며 억누를 수 없는 충족되지 못한 본능은 정신질환과 장애로 돌아올 수 있다.

그는 무의식이 일상생활의 사소한 실수, 꿈의 보고, 신경증 증상을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무의식의 구성요소로 간주한 신념, 욕구 감정은 신경증 증상이나 환자의 자의적 해석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자유연상을 활용해 분석가의 해석처럼 잠재의식의 근원적 형태가 드러난다고 믿었다.

이 근원적 형태의 핵심은 성의 발달이다. 유아기의 성적 관심은 쾌락이 입에 집중된 구강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한 살에서 세 살 사이의 항문기, 어린이가 자신의 음경이나 음핵에 초점을 맞추는 음경기이다. 이때 남자아이는 감정발달의 결정적 단계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맞이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남자아이가 성적으로 어머니에게 이끌려 아버지가 어머니를 차지한다는 분노에 적개심이 생기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거세해 보복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따라서 그 아이는 성적의도를 단념하고 아버지에게 동화된다. 신경증적인 사람들은 초기단계에 고착된 사람들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 소망의 회복과 억압의 역사는 모든 분석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는 또한 이 콤플렉스에 해당하는 여성이 있다고 확신했지만 설득력 있게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1-5

말년으로 가면서 프로이트는 초기의 의식과 무의식의 이분법을 정신의 삼중구조로 재정의 했다. 그의 저서인 <<에고와 이드>>에서 ‘정신 기관은 본능적 충동의 저장소인 이드(id), 이드의 가장 표면부위에 있어서 외부세계의 영향에 의해 수정되는 자아(ego), 그리고 이드에서 발생하여 에고를 지배하고 인간 특유의 본능 억제를 나타내는 초자아(superego)로 이루어져 있다’ 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자아는 영혼의 세부분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아가 이드나 초자아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이에 실패하면 정신이상이 나타난다. 자아와 이드의 충돌은 신경증으로, 이드와 초자아의 충돌은 우울증으로, 자아와 외부세계와의 충돌은 정신병으로 이어진다.

1-6

프로이트는 자신을 결정론을 발견하는 데에 헌신한 과학자로 여겼지만, 사실 그의 정밀한 이론들 대부분은 실험적 입장에서 엄밀히 검토되었을 때 기초가 약한 것으로 입증된 바 있다. 그의 정신분석 기법에 대한 의료전문가들의 의견은 효과와 효능에 따라 저마다 다르다. 정신분석이 성공할 경우 그것은 결정론적 작용 과정을 밝힘으로써가 아니라 개인의 자기 인식과 선택의 자유를 확장함으로써 성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에 대한 사회적 관습, 정신질환에 대한 우리의 이해,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인식과 관련한 그의 연구들과 관련한 온갖 이론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들은 사회와 인간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7

성적 충동이 인간의 정신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고 주장한 사상가는 프로이트 이전에도 존재했다. 이전의 신학자들은 그 기원과 전달 과정 및 결과가 성과 관련 있는 아담의 죄에서 인간의 현 상태가 비롯된 것으로 간주했다. 19세기에는 숙녀인 척하며 성욕을 감추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지곤 했다. 남자의 주요 관심사인 성관계가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일생의 우스갯소리였다는 쇼펜하우어의 격언을 프로이트는 즐겨 인용했다. 쇼펜하우어는 성욕은 그것을 묶어 놓으려는 온갖 각오를 비웃는 이 세상의 진정한 세습 군주라고 말했다.

프로이트가 유아기의 성적관심을 강조한 것은 당시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어린이에 대한 감상적인 태도는 빅토리아 시대에 생겨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순진한 것은 유아의 마음이 아니라 손발의 연약함이다. 나는 시샘하는 갓난아이를 지켜보며 연구했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젖을 나눠 먹는 자기 형을 노려보면서 아직 말을 하지는 못하고 질투와 괴로움으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누가 이 경험적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겠는가?’ 라고 말했다.

현대사회가 성에 관대해진 것은 피임약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프로이트가 불러 일으킨 전체적인 사고 풍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성적 방종을 권장한 것이 아니라, 성적 욕구를 이런저런 수로로 통하는 배수구를 찾아야만 하는 심적 유동체로 보는것과 같은 은유를 통용시켰다. 그 은유에 따르면 금욕은 정신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 결국 그를 억제하는 장애물을 뚫고 나갈 수 밖에 없는 힘을 위태롭게 막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8

현대의 정신적 건강 개념은 프로이트, 브로이어, 샤르코가 히스테리 환자를 꾀병이 아닌 진짜 환자로 취급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의학적발견이라기 보다는 도덕적 결정이라고 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대부분이 그것을 올바른 도덕적 결정으로 여길 것이다. 프로이트가 도덕과 의학의 경계선을 다시 그은 것이다. 임상적 판단과 도적적 평가를 구분하는 태도변화의 대표적인 예로 동성애를 들 수 있다. 오랫동안 범죄로 간주되어오다가 한세기 가까이 정신병리적 장애의 증상으로 여겨졌으며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합리적으로 선택된 대안적 생활 양식의 핵심요소로 간주되고 있다.

1-9

프로이트는 예술적 창조를 신경증과 유사한 것으로 여기는 등 호의적이지 않은 견해를 보였지만 그는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소설가는 정신분석가의 시술 침상에서 이루어지는것과 비슷한 연상 기법을 이용하고, 비평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용어들로 문학 작품을 해석하기를 좋아한다. 역사가는 정신분석적 전기를 쓰고, 어린 시절의 실제 또는 상상의 에피소드를 기초로 하여 성숙한 유명 인사들의 행위를 분석하기를 즐겨한다. 화가와 조각가는 꿈의 세계에서 프로이트의 상징들을 찾아내어 그것들에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했다.

1-10

우리는 정신분석 이론을 직간접적으로 많이 흡수했다.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전혀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그들 자신의 프로이트 실책과 타인의 실책을 동일시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어느 철학자도 심리학과 도덕의 일상적 어휘에 이보다 더 큰 공헌을 하지는 못했다. 오든은 스물여덟에 난해한 사행시로 프로이트의 죽음을 애도했다.

가끔 그가 틀렸더라면, 때로 불합리했더라면,

우리에게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닌데

이제 완전히 여론을 지배하네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1.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1-1.후설이 퇴직하기 2년 전 제자 중 한 사람이 특히 철학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한 권을 냈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은 현상학이 현 상태로는 주도면밀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현상학은 의식의 자료들을 음미하려 했으나 이전의 철학에서 물려받은 항목들은 ‘주관’ ‘대상’, ‘행위’, ‘내용’과 같은 개념들을 사용했다. 후설이 상관 관계가 있는 의식과 실재의 두 영역이 있다는 데카르트의 기본 틀을 받아들인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후설이 현상학에서 채택한 소재는 의식과 실재 중 의식이었으나 하이데거는 현상학의 첫 번째 과제가 의식과 실제의 구분에 선행하는 존재(Sein)개념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식과 실재를 정반대로 대비하게끔 하는 그 경험이 곧 우리가 음미해야할 원초적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철학의 본성을 분명히 하고 의식이 아니라 존재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하기 위해 데카르트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위적 범주로 돌아가는 것은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전의 철학이야말로 철두철미한 현상학자가 본받아야 할 최상의 실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온갖 전제 가정들이 달라붙은 전문적인 철학적 어휘가 형성되기 이전에 생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이데거는 우리가 순수한 자연 상태에서 철학을 할 수 있도록 청결한 어휘를 고안하는 과업을 수행하고자 했다.

1-2. 하이데거의 가장 중요한 신조어는 현존재(Dasein)이다. 현존재는 철학적인 물음을 물을 수 있는 존재 유형인데, 하이데거의 현존재에 대한 설명을 보면 처음에는 데카르트의 자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지만 데카르트의 자아는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인 반면 하이데거에서 생각은 본질적이 아니다. 그에게 생각은 현존재가 존재하게 되는 여러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다. 현존재의 원초적 요소는 ‘세계-내-존재’이며, 현존재는 생각과 의지의 구별이나 이론과 실천의 구별에 선행한다. 현존재는 관심을 갖는 존재로서 걱정하는 존재다. 내가 세계에 관해 무언가 걱정하거나 관심을 보이는 경우에 한해서, 나는 세계에 관해 물음을 던지게 되고 그와 같은 물음에 대해 지식 주장의 형태로 답을 하게 된다,

개념과 판단은 세계에 대처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한층 더 원초적인 그와 같은 도구들, 즉 문자 그대로 도구인 것들이 있다. 목수는 망치를 사용함으로써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능숙하게 그것을 잘 다룰 경우에는 망치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망치에 대한 의식은 목수가 실재와 충실하게 마주치려는 자신의 계획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이렇게 뻔 한 방식으로 대처하는 실재들을 ‘손 안에 있음’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손안에 있는 것과 손안에 있지 않은 것의 구별은 우리가 세계의 공간성을 구성하는 기본 바탕이 된다.

1-3.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기본적 본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현존재를 하나의 실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인생을 펼쳐가는 존재라고 생각해야한다. 우리의 인생은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개발하는 것이다. 애당초 우리는 물리적이고 문화적인 역사적 상황에 내던져져있다. 하이데거는 이 ‘던져져있음’이 현존재의 ‘사실성’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직 겪어본 적 없는 그 사람일 수 있고 나의 잠재력은 나의 성취와 마찬가지로 나의 존재에 본질적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실제로 내가 누구인지 규정지을 때 미래는 과거와 현재에 우선한다. 현존재는 ‘될 능력’이며, 내 인생에서 내가 무엇을 목표로 삼고 있는가에 따라 나의 현재 상황과 능력의 중요성이 결정된다. 하지만 그 성취와 잠재력이 무엇이든 간에 모두 끝은 죽음이다. 내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내가 무엇이 될 것인지와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의 차이를 고려해야하는데 여기서 죄의식과 분노가 나온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활동은 세 가지 근본적인 양상을 갖는다. 첫째, 그가 ‘조율’이라고 일컫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내던져진 상황 자체를 매력적이라거나 불안하다거나 따분하다는 식으로 나타내고, 그 상황에 다양한 종류의 기분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둘째, 현존재는 담론 적이다. 현존재는 담화의 세계 안에서 즉 우리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언어와 문화에 의해 명확히 표현되고 해석된 것들 사이에서 작용한다. 셋째. 현존재는 특별한 의미의 ‘이해’다. 현존재의 활동은 어떤 목표, 현존재의 문화적 맥락 안에서 인생 전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어떤 ‘위하여’를 지향한다. 현존재의 이 세 가지 양상은 각각 시간 과거, 현재, 미래에 해당한다.

비록 현존재가 생물학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작용한다고 할지라도 개인의 활동을 일으키는 인간의 본성과 같은 그런 것은 없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본질은 그것의 실존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실존주의’, 즉 개인의 종의 구성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면 보편 법칙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철학 학파의 아버지가 되었다. 내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하여 나 자신을 무엇이 되게 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냥 순응ㅇ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것은 현존재의 진정한 결정이 아니며 나의 현존재에 대한 배신이다. 진정한 결정을 위해서는 나는 선택의 이유가 인간의 본성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신의 명령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과 어떤 선택도 나의 삶에 선험적 의미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자각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야한다.

1-4. 《존재와 시간》은 읽기 어려운 책이라서 하이데거 특유의 어휘와 난해한 구문이 그의 프로젝트에 필수적이었는지 자의적이었는지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신랄한 반대자인 길버트 라일도 그의 책 논평에서 ‘인간 영혼의 근원적인 작용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에 감탄할 따름이라고 인정했다.

현상학의 저작으로서 《존재와 시간》은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의 어느 저작들보다 더 큰 갈채를 받았으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불행했다, 하이데거는 1929년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의 철학 교수직을 이어받았다. 1933년 그 대학의 총장이 되어 5월 취임연설에서 나치주의야말로 독일 국민이 마침내 역사사의 정신적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매개체라고 환영했다. 그는 총장으로서 명예 교수인 후설을 비롯하여 정년이 아직 5년이나 남은 다섯 명의 유대인 교수들을 모두 대학 도서관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전쟁이 끝난 뒤 하이데거는 히틀러에 대한 지지를 속죄해야 했고, 1945년에서 1950년까지 스스로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중단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1976년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은 뒤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후설의 현상학

1.후설의 현상학

1.1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인생은 결정적인 대목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닮았다. 후설은 프로이트보다 세 살 아래였는데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모라비아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비엔나 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두 사람은 최초로 인간의 정신에 관한 진정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려는 개인적인 프로젝트에 대부분의 인생을 바쳤다. 그들은 인생 말년에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걸려들었고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에서 쫓겨나 망명 생활을 하다 죽고 후설의 책들은 1939년 프라하에 진군한 독일 군대에 의해 불탔다,

그러나 전문가로서의 후설의 인생은 프로이트와 매우 달랐다. 그는 철학으로 정통 학문 경력을 쌓아 대학에서 연달아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는 비엔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는 했지만 교수 자격 청구 논문을 위해 할레 대학으로가 오스트리아가 아닌 독일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후설은 1884년에서 1886년 사이 비엔나 대학에서 브렌타노(Franz Brentano,1838-1917)의 강의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브렌타노는 전직사제로서 영향력이 널리 입증된 《경험적 관점의 심리학》이라는 저작의 현대적인 실험적 탐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철학을 연결하려고 했던 박식한 학자였다. 그 책은 의식의 자료가 두 종류, 즉 물리 현상과 정신 현상으로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물리 현상은 색깔이나 냄새와 같은 것이고 생각과 같은 정신 현상은 어떤 내용을 가짐으로써 혹은 내재적 대상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 특징은 정신적인 행위와 정신적인 삶을 이해하는 실마리인데 브렌타노는 이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는 스콜라 철학의 용어를 재도입했다.

후설은 심리학에 대한 브렌타노의 연구 방법에 영향을 받으면서 초기에는 줄곧 수학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할레 대학에 제출한 교수 자격 청구 논문 주제는 수 개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수 개념의 심리적 기원인 활동을 확인함으로써 수 개념을 설명하려고 했다. 수학의 기초를 경험적 심리학에서 찾으려는 욕구 때문에 후설은 다소 따분한 결론을 낳기도 했다. 예컨대 영과 하나가 수라는 것을 부정했고, 소수의 산술학과 다수의 산술학을 명확하게 구분해야한다. 우리 마음의 눈으로는 오직 작은 집단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산술학의 소수 부분만 직관적 기초에 의존할 수 있다. 일단 다수를 다루게 되면 우리는 직관을 벗어나 순전히 기호들만 있는 영역으로 들어간다.

1-2.후설의 저서에 대한 논평자들, 특히 프레게는 그것이 상상과 사고를 혼동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심라학의 소재인 정신적 사건은 개인에게 사적이기 때문에 산술학과 같은 공적 학문의 기초가 될 수 없다. 후설은 그 논평을 받아들여 자신의 초기 심리주의를 단념했다. 그 후 후설은 프레게처럼 논리학과 심리학 사이의 명확한 구별을 유지했다. 그러나 분석적 전통을 이은 프레게는 논리학에 더 초점을 맞춘 반면 대륙적 전통을 이은 후설은 심리학적 측면에 더 초점을 맞추어 철학의 정통 본거지로 보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프레게와 후설은 플라톤의 소박한 실재론을 철학의 토대로 인정하는 점에서 하나가 되었다.

후설이 브렌타노한테서 넘겨받은 것은 지향성 개념, 즉 물리 현상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정신 현상의 특징은 그것이 대상을 향해 주의를 돌린다는 관념이었다. “나는 경우에 따라 트로이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고 나의 투자에 관해 걱정하기도 한다.”라는 문장에서 ‘대해(of)’와 ‘관해(about)’가 지향성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가리킨다.

생각의 본질은 두 가지이다. 생각의 ‘내용(content)’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생각의 ‘소유자(possessor)’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용을 생각한다고 해볼 때 이것을 생각이게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내가 독수리나 말에 대한 생각이 아닌 용에 대한 생각을 한다는 것고 다른 하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후설은 생각이란 특정한 물질(생각이 지향하는 대상)에 대한 나의 행위(act)라고 말함으로써 생각의 특징들을 명시하고자 했다. 다른 사람들도 용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후설에 의하면 바로 그때 우리는 동일한 종(species)에 속하는 여러 가지 개인적인 행위를 한다. 용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그와 같은 모든 행위가 속하는 종에 지나지 않는다.

개념(concept)은 《논리 연구》에서 이와 같이 심리학적 요소를 기반으로 정의되었다. 그렇다면 논리학과 개념의 관계는 어떤가? 후설은 이제 기하학의 정리들이 경험적인 삼차원의 물체와 관계를 맺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논리학이 개념과 관계를 맺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초기 심리주의를 단념할 수 있었고 심리학과 논리학을 선명하게 구분했다. 더 나아가 그는 심리학을 ‘현상학(phenomen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다시 고안해냄으로써 심리학과 인식론을 구별하였다.

1-3.현상학은 20세기 초 10년 사이에 개발되었다. 뮌헨의 철학자 집단에서 열성적인 ‘현상학’ 운동이 일어났는데 1913년 현상학적 연구 연보를 출간하고 이 연보의 창간호에는 단행본 분량의 후설의 글이 실렸다.

현상학의 목적은 의식이 우리에게 말하거나 말하려고 하는 어느 것도 언급함이 없이, 심리=외적(extra-mental) 세계에 관한 의식의 직접적 자료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내가 불사조를 생각할 때 내 생각의 지향성은 불사조가 실제로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정확히 동일하다. 후설은 이미 1901년 이렇게 썼다. “어떤 대상이 실존하는가. 허구하는가, 아니면 완전히 부조리한가의 문제는 대상이 의식에 나타나고 주어지는 일에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를 가져오지 못한다. 나는 쾰른 대성당을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벨탑을 생각한다. 나는 정천면체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천각형을 생각한다. 즉 내 경험의 지향성은 진짜 탁자가 그것에 있건 내가 환각 상태에 있건 정확히 동일하다. 현상학자는 심리 현상을 면밀히 연구해야 하며, 심리-외적 대상들의 세계를 괄호 안에 넣어야한다.; 현상학자는 심리- 외적 세계의 실존에 대하여 후설이 그리스 어로 에포케(epoche)라고 했던 판단 중지의 태도를 가져야한다. 이것을 일컫어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매우 신중한 소극적인 철학(philosophy drawing in its horns)이었다.

현상학은 현상주의(phenomenalism)와 같지 않다. 현상주의자는 현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으며, 물질적 대상과 같은 것들에 관한 진술은 현상에 관한 진술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버클리와 밀은 현상주의 견해를 유지했다. 반면에, 후설은 《이념들》에서 현상들 이외에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비현상적 대상들의 세계가 존재할 가능성을 신중하게 열어두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대상들은 후설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거나 적어도 본래의 관심사가 아니다.

후설에 따르면, 우리는 외부 세계에 관해서는 오로지 추리나 추정에 의한 정보만을 갖는 반면, 우리 자신의 의식 대상에 대해서는 오류 불가능한 직접지를 갖기 때문이다. 후설은 자명한 내재적(immanent)지각과 오류 가능한 초월적(transcendent)지각을 구별했다. 내재적 지각은 나 자신의 현재의 정신 활동이나 상태에 대한 나의 직접적인 익숙지이다. 초월적 지각은 물리적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나 자신의 과거활동이나 상태에 대한 나의 지각이며, 다른 사람들의 정신 내용에 대한 나의 지각이다.

내재적 지각은 현상학의 소재를 제공한다. 내재적 지각은 초월적 지각보다 더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초월적 지각이 오류 가능한 반면 내재적 지각은 자명하기 때문뿐만 아니라 초월적 지각을 성립시키는 추리와 추정이 내재적 지각의 평결에 근거하고, 또한 근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의식만이 ‘절대적 존재’다. 이를테면 다른 모든 형태의 존재는 그 실존 여부가 의식에 달려있다. 따라서 현상학은 모든 학문들 가운데 가장 기초적이다. 현상학의 소재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다른 모든 분야의 철학과 과학에 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1-4.후설은 《이념들》을 세 권의 책으로 계획했으나 마지막 두 권은 사후에야 출판되었다. 그는 1916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고 1923년 베를린 대학의 초빙을 거절하고 1928년에 퇴직할 때까지 그 대학의 정교수로 남았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는 하이데거나 스타인처럼 대단히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된 사람들도 있다. 몇 년 동안 후설은 책에 제시된 체계를 여러 방면으로 발전시켰다. 한 편으로는 데카르트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남겨 놓은 몇몇 가정들을 약화시킴으로써 자신의 판단 중지가 데카르트의 의심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되도록 현상학적 방법을 확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의 정신의 실존을 입증할 수 있는 상호 주관성(intersubjective) 문제의 해결책과 자신의 방법론적 유아주의를 결합하려고 애썼다. 그의 최종적인 입장은 그가 현상학의 불가피한 결론이라고 주장했던 선험적 관념주의(transcendental idealism)였다. 그의 후기 사상의 일부 결과물들은 퇴직한 그 다음 해에 발표되었으며 《데카르트의 성찰》과 《형식 논리와 선험논리》로 출판되었다,

Frege’s

The most important step in Frege’s logicist programme was to define arithmetical notions, such as that of number, in terms of purely logical notions, such as that of class. Frege achieves this by treating the cardinal numbers as classes of equivalent classes, that is to say, of classes with the same number of members. Thus the number two is the class of pairs, and the number three the class of trios. Such a definition at first sight appears circular, but in fact it is not since the notion of equivalence between classes can be defined without making use of the notion of number. Two classes are equivalent to each other if they can be mapped onto each other without residue. Thus, to take an example of Frege’s, a waiter may know that there are as many knives as there are plates on a table without knowing how many of each there are. All he needs to do is to observe that there is a knife to the right of every plate and a plate to the left of every knife.

Thus, we could define four as the class of all classes equivalent to the class of gospel-makers. But such a definition would be useless for the logicist’s purpose since the fact that there were four gospel-makers is no part of logic. Frege has to find, for each number, not only a class of the right size, but one whose size is guaranteed by logic. He does this by beginning with zero as the first of the number series. This can be defined in purely logical terms as the class of all classes equivalent to the class of objects that are not identical with themselves: a class that obviously has no members (‘the null class’). We can then go on to define the number one as the class of all classes equivalent to the class whose only member is zero. In order to pass from these definitions to definitions of the other natural numbers Frege needs to define the notion of ‘succeeding’ in the sense in which three succeeds two, and four succeeds three, in the number series. He defines ‘n immediately succeeds m’ as ‘There exists a concept F, and an object falling under it x, such that the number of Fs is n and the number of Fs not identical with x is m’. With the aid of this definition the other numbers can be defined without using any notions other than logical ones such as identity, class, and class-equivalence.

퍼스와 실용주의부터 프레게의 논리주의까지

1. 퍼스와 실용주의

1-1.

오늘날에는 아메리카 대륙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다수 철학자들의 본고장이 되었지만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철학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불모지에서 찰스 샌더스 퍼스의 저작은 진정한 미국철학의 시대를 열었다.

1-2.

퍼스는 하버드의 뛰어난 수학교수의 아들로 1863면 하버드에서 최우등으로 화학학위를 받았다. 그 후 30년간 미국해안측량작업, 하버드 천문대에서의 연구를 진행하며 천문학책을 저술하고 <형이상학클럽> 이라는 토론모임에 참여했다. 그는 하버드에서 역사와 과학의 논리를,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논리학강의를 열었고 까다로운 동료로 대학의 관습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종신교수직에 임명되지 못했고 다시는 정규직업을 갖지 못했다. 퍼스의 첫 번 째 아내는 남녀평등주의자인 페이였고 1883년에 헤어졌고 생에 후반부를 헌신적인 두 번 째 아내 줄리엣과 가난하게 보냈다.

1-3.

퍼스는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19세기의 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또한 칸트철학을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형식논리학에 대한 칸트의 이해가 아마추어같다고 여겨 그의 부족한부분을 보충하기위해 범주이론을 재편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동료들 가운데 스콜라철학자들이 자만심이 없다고 칭찬했고, 논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라이프니츠를 최고의 동료로 여기며 스스로의 업적 또한 높이 평가했다. 그의 연구는 논리학, 언어이론, 인식론, 심리철학 등 폭넓게 이루어졌으며 실용주의(pragmatism)의 창시자였다.

1-4.

퍼스의 철학은 학회지논문으로만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1868년 그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어떤 능력에 관한 물음들’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에서 우리는 내적 관찰능력을 가질 수 없고 기호(sign)를 벗어나선 사고할 수 없으며 직관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부정적 결론의 초기인식론에 대해 얘기했다. 결론은 모든 인지는 선행하는 인지에 의해 논리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더 유력한 논문으로 1877년 ‘과학의 논리의 실례들’ 에서 인간의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는 오류가능주의의 원리를 발표했다. 절대적 진리는 과학적 탐구의 목표이지만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최선은 끊임없이 개선함으로써 절대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다. 1878년의 한 논문은 대상에 대해 명료하게 생각하기 위해선 그 대상이 인지할 수 있는 실제적 유형의 효과를 가져 오는지 고려해 보면 된다는 실용주의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

퍼스는 1884년 논문집 《존스 홉킨스의 논리학연구》를 편집하고 관계논리학에 관한 논문을 썼다. 또 그의 학생이 발표한 그의 양화논리학 체계에서 문장의 구조를 표현하기 위한 독창적인 기호법으로 합성기호를 사용했는데, 예를 들어 Lij는 isaac이 jessica를 Love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퍼스가 이름붙인 ‘일반대수논리’의 구문론은 퍼스가 알지 못했던 프레게에 의해 이미 개발된 논리체계의 구문론과 대등한 것이었다. 1891년 《일원론자》에 실린 ‘수수께끼 추측’에서 진화론적 우주론 전반의 배경에 반대하는 형이상학과 심리철학을 소개했고 1905년 《일원론자》에 실린 논문에서는 자신의 실용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진술을 담았다.

퍼스는 생애의 마지막 해에 기호에 대한 일반 이론을 사고와 언어에 관한 철학을 위한 기본 틀로 발전시키려고 분투했다. 이 아이디어는 철학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대부분은 1903년에서 1912년 사이 영국여성 웰비와 교신하며 생각해낸 것이었다.

1-5.

퍼스의 철학은 완전한 철학을 완성하지는 못했으며 그가 남긴 원고는 20세기에 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다른 철학자들에 대한 영향력은 그의 천재성에 비하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퍼스의 논리학 연구는 엄밀하게 형식을 갖추어 발표된적이 없었으며 퍼스와 프레게 두 사람이 독자적으로 생각해 낸 논리 체계가 러셀을 거쳐 세상에 알려지게 한 사람은 프레게였다.

2.프레게의 논리주의

2-1.

고틀로프 프레게는 생후에 철학의 역사 속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탁월한 수학자로 현대의 수학적 논리학을 만들었고, 영어권 대학들 내에서 유력한 지위를 차지했던 분석철학의 창시자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의 영향으로 철학에서 20세기를 특징짓는 언어적 전회가 이루어졌다.

프레게는 독일 발트연안의 비스마르에서 루터교회에 다니는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으며 1869년 예나대학에 입학해 네 학기를 마친 후 괴팅겐 대학으로 옮겨 1873년에 기하학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74년 객원강사로 예나대학에 돌아왔고 1879년에 교수가 되어 44년간 수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평범하게 조용히 살았고 그의 중요한 저작은 대부분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2-2.

프레게의 풍요로운 저작경력은 1879년 《개념표기법》이라는 소책자를 출판하며 시작되었다. 개념표기법은 일상 언어의 불명료한 논리적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기호 체계로 프레게는 명제 계산 체계(propositional calculus)를 개발하기 위해 이 표기법을 사용했다. 이는 문장 전체가 부정, 연언, 선언의 의미에 의존하는 추리들을 다루는 논리학 분야로서, 기본원리는 ‘그리고’, ‘만일’, ‘또는’과 같은 연결어를 포함하는 문장의 진리치가 오로지 그 연결어로 이어진 요소문장들의 진리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눈은 희고, 잔디는 푸르다’와 같은 중문은 그 문장의 요소인 ‘눈은 희다’와 ‘잔디는 푸르다’와 같은 단순명제들의 진리함수(truth-functions)로 간주된다.

명제논리학은 이전에도 연구되어져 왔지만 제일처음으로 체계화 한 것은 프레게였다. 앞에서 말한 《개념표기법》은 공리적인 방식으로 명제계산체계를 제시하는데, 이를 위해 그가 고안했던 기호체계는 인쇄가 어렵고 명제계산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그 체계의 표현방법은 여전히 수학적 논리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레게가 논리학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술어계산(predicate calculus)이었다. 이것은 명제의 내적구조를 다루는 논리학의 분야이다. 그는 추리의 타당성이 ‘all’이나 ’some’, ‘no’나 ‘none’과 같은 표현에 의존하는 양화표기법을 사용해 지금까지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언논리를 대폭 개선한 술어 계산 체계를 제시했다. 이는 복합 양화사를 포함하는 문장(’모든 소년이 어떤 소녀를 사랑한다‘)에 대처할 수 있게 해주었다.

2-3.

《개념표기법》이 논리학사에서 전형적인 교과서가 되었으나 그 책을 쓸 때 그의 목적은 수학과 더 큰 관련이 있었다. 그는 논리학과 산술학의 형식체계를 제시함과 동시에 두 체계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산술학의 모든 진리가 어떤 보조수단도 필요 없이 논리학의 진리들로부터 도출됨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논리주의’로 알려지게 된다.

프레게의 논리주의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수(number)와 같은 산술학의 개념을 집합(class)과 같은 논리적인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의를 위해 그는 기수를 원소의 수가 동일한 집합(동등집합)으로 간주했다. 예를 들어 수 둘은 쌍으로 이루어진 것들의 집합이고, 수 셋은 삼인조로 이루어진 것들의 집합이다. 이는 순환적인 정의인 것 같지만 사실 집합들 사이의 동등 개념이 수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정의될 수 있기 때문에 순환적이지 않고 두 집합은 원소들 사이에 나머지 없이 1:1 대응 할 수 있을 때 서로 동등하다. 웨이터는 접시와 칼의 개수를 알지 못해도 탁자위에 접시가 있는 만큼 칼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웨이터에게 필요한 것은 접시의 오른쪽에는 칼이, 칼의 왼쪽에는 접시가 있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넷은 복음서 저자들의 집합과 동등한 모든 집합들의 집합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논리학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논리주의자의 목적을 고려했을 때 쓸모없는 것일 수도 있다. 프레게는 개개의 수에 대해 정확한 크기의 집합뿐만 아니라, 그 크기가 논리학에 의해 보증되는 집합을 찾아야 했기에 이를 위해 수 계열의 맨 처음을 영(zero)으로 시작한다. 영은 분명히 어떤 원소도 갖지 않은 집합이라고 논리적인 용어로 정의될 수 있다. 그 다음 수 하나는 그 유일한 원소가 영인 집합과 동등한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이 정의들로부터 나머지 자연수에 대한 정의들로 넘어가기 위해 그는 수 계열에서 ‘n은 m바로 다음에 온다’를 ‘F에 속하는 원소의 수가 n이고 F에 속하는 원소이기는 하나 x와 동일하지 않은 수가 m인, 그런 어떤 개년 F가 있고 F에 속하는 대상 x가 있다’ 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의 도움으로 나머지 수들도 동일성, 집합, 동등 집합과 같은 논리적 개념 이외의 다른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정의될 수 있다.

2-4.

《개념표기법》은 매우 엄격하고 형식적이지만 《산술학의 기초》는 논리주의 프로그램을 더 자세히 제시할 뿐만 아니라 더 비형식적으로 설명한다. 기호들이 드물게 나오고 자신의 책을 다른 철학자들 것과 관련짓느라 노심초사한다. 칸트는 산술학적 지식과 기하학적 지식은 둘다 직관에 의존한다고 주장하고《순수이성비판》에서 수학적 진리가 종합적이면서 선천적인 것이라 정의했으며 존 스튜어트 밀은 수학적 명제가 폭넓게 적용될 수 있고 폭넓게 확증될 수 있는데도 후천적인 명제라고 주장했다.

프레게는 수학이 선천적으로 알려진다는 점에서 밀에 반대하고, 기하학이 직관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칸트에게 찬성했다. 그러나 산술학이 분석적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종합적이라고 생각한 칸트와 차이가 있다. 만일 프레게가 옳다면, 산술학은 모든 지식영역에서 유효하고 경험적 사실들에 의해 입증될 필요가 없는 일반 법칙들만을 기반으로 한다.

2-5.

《산술학의 기초》에서 프레게가 중요하게 여긴 두 주장은 각각의 수는 독립적인 대상이라는 것과 수를 지정하는 진술의 내용은 개념에 관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한 ‘개념’과 ‘대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두 명제는 상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가 대상이라고 말할 때 그는 만져서 알 수 있는 것임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두가지를 부인하는데, 수가 어떤 것의 속성이라는 것과 수가 주관적인 것, 즉 어떤 심적 상태의 심상이거나 관념이거나 속성이라는 것이다.

프레게가 말하는 개념은 정신과 무관하기에 위에서 언급한 두 주장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없다. 그는 이 두 번째 주장은 ‘지구에 하나의 달이 있다’와 같은 진술은 지구의 달이라는 개념에 수 하나를 지정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금성에는 달이 없다’는 금성의 달이라는 개념에 수 영을 지정한다. 후자의 경우, 어떤 수를 속성으로 갖는 달이 없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수는 개념의 외연이라고 프레게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개념 F에 속하는 수는 ‘개념 F에 지정한 수와 동일한 수’라는 개념의 외연이다. 이는 F에 속하는 원소의 집합과 동일한 수의 원소를 갖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수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수가 대상이라는 그의 이론은 집합을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2-6.

1844년에서 1893년 사이에 프레게는 논리학에 근거하여 산술학을 구성하려는 논리주의를 완전하고 형식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산술학의 기본법칙》을 완성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과제는 자명한 논리학의 진리일 수 있는 일련의 공리들을 명확하게 진술하는 것이었고,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일련의 추리 규칙들을 제시하는 것 이었으며 산술학의 표준적 진리들을 그와 같은 공리들로부터 그와 같은 추리 규칙들에 의해 차례로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세권에 달하는 것이었지만 두 번째 권 까지만 완성되고 중단되었다. 1893년 그는 두 번째 권을 출판하는 사이에 영국철학자 러셀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최초의 공리들 가운데 다섯 번째 것이 체계 전체를 부정합하게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이 공리는 개개의 모든 F가 G이고, 개개의 모든 G가 F라면, F에 속하는 원소들의 집합은 G에 속하는 원소들의 집합과 같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 즉 개념으로부터 집합으로 이행하는 것을 인정하는 공리이고 수가 논리적 대상임을 입증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러셀이 지적한 문제는 이 공리를 포함하는 체계가 제한 없는 집합형성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집합은 그 자체로서 별개로 분류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제 자신의 원소인 집합과 제 자신의 원소가 아닌 집합이 존재 하는 것 같은데 이는 역설이 된다. 이 체계는 논리적으로 타당할 수 없다.

《산술학의 기본법칙》의 두 번째 권은 러셀의 편지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인쇄에 들어간 뒤였으므로 풀이 죽은 프레게는 그 역설을 부록에 넣어 문제의 그 공리를 약화시킴으로써 산술학 체계를 메꾸려 했으나 개정한 이 체계가 부정합한 것으로 판명났다. 1918년 예나대학에서 은퇴한 뒤 그는 산술학이 논리학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신념을 포기하고 산술학도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종합적이며 선천적이라는 칸트의 견해로 돌아갔던 것 같다.

2-7.

오늘날 우리는 논리주의 프로그램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두가지 이유로 프레게의 논리적 토대의 일부였던 소박한 집합론이 본래 정합성이 없었다는 것과 ‘산술학의 공리’라는 개념은 후에 오스트리아의 수학자 괴델에 의해 산술학을 완전하고 정합하는 공리 체계로 만드는 일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그 자체가 의문스럽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게의 철학적 유산은 엄청났다.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길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신대륙을 유럽에 알린 것처럼, 프레게는 산술학을 논리학에서 이끌어 내지는 못했지만 궁극적으로 산술학과 논리학의 전체 지도를 바꿀 만큼 논리학을 혁신했고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도 콜럼버스와 마찬가지로 우울과 좌절을 겪었지만 자신의 연구가 가치 있을 것이라는 기대만은 버리지 않았다. 그는 1925년 죽기직전 아들에게 원고를 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쓴 글들을 멸시하지 마라. 모두 금은 아닐지언정 그 안에 금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부터 이후의 분석철학까지

201500072 강종원

1.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 

1-1.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출신 가문으로 1889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는데, 대가족이었고 부유했다. 2) 그는 맨체스터 대학에 갔고, 그곳에서 비행기의 제트추진 엔진을 설계했다. 그는 러셀의 <수학의 원리>를 읽고 그 책을 통해 프레게의 저작에 친숙해졌으며, 1911년에 예나 대학의 프레게를 찾아갔다. 그는 프레게의 권고로 케임브리지로 갔고,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러셀의 지도 아래 다섯 학기를 보냈다. 러셀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도록 적극 도와주었다. 3) 비트겐슈타인은 1913년 케임브리지를 떠나 자신이 만든 노르웨이의 어느 오두막에 은둔했다. 이 시기에 썼던 비망록과 편지는 그가 일생 동안 줄곧 유지할 수 있었던 철학관의 싹을 보여주었다. ‘철학은 실재에 대한 그림을 보여 주지 못하며, 과학적 탐구를 확증할 수도 논박할 수도 없다'(는 그의 유명한 말도 이 때 나온 것이다.)
1-2. 1914년에 전쟁이 일어나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포병대에 자원입대했고, 동부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서 용맹을 떨쳤다. 그는 1918년 11월 티롤 남부의 이탈리아 군인들에게 붙잡혀 몬테카시노 근방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 철학적인 생각들을 일기장에 썼고, 수용소에 있는 동안 그 철학적인 생각들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판된 철학책 <논리철학론>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 책의 원고를 수용소에서 러셀에게 보냈고, 그것은 1921년에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얼마 뒤 영어 번역과 러셀의 머리말을 덧붙여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1-3. <논리철학론>은 간결하고, 우아하고, 수수께끼 같다. 그 책은 ‘세계는 성립할 수 있는 경우들 전체다’로 시작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로 끝난다. 핵심 주제는 의미에 관한 그림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명제들로 이루어진다. 명 제는 사고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이고, 사고는 사실들에 대한 논리적 그림이며, 세계는 사실들 전체이다. 6)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와 사고는 문자 그대로 그림이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낱말들의 공간적 관계는 사물들의 공간적 관계를 묘사한다. 7) <논리철학론>에 따르면, 그림(혹은 명제)이라면 어느 것이나 그것이 묘사하는 것과 공통된무언가를 가져야 한다. 이 최소한의 공통점을 비트겐슈타인은 그것들의 논리적 형식이라고 말한다. 8) 비트겐슈타인은 왜곡된 일상 언어 뒤에 숨어 있는 사고의 묘사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러셀이 제시한 노선에 따라 논리적 분석을 해 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우리가 이 분석을 하다 보면 결국은 전혀 복합적이지 않은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들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했다. 언어와 세계의 연결은 마음속 깊이 있는 이런 사고의 궁극적 요소들과 세계의 본질을 구성하는 원자 대상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9) 명제와 그 명제가 나타내는 세계 구조에 대한 그림 이론을 해설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양한 종류의 명제들이 어떻게 원자 그림들의 결합으로 분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1-4.<논리철학론>은 그 밖의 다른 형이상학 논문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형이상학자가 말하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일 수 있을 뿐이다. <논리철학론>의 문단들은 딛고 올라가서 세계를 정확히 보게 되면 걷어차야 하는 사다리와 같다. 철학은 비철학적인 명제들을 명료화하는 활동이다. 명료해진 명제들은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비출 것이고, 그에 따라 그 철학자가 말하려는 것이 보이겠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1-5. 과학도 철학도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보여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6.철학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논리철학론>, 이것만은 철학이 해줄 수 있는 일을 했다.

2. 논리 실증주의

2-1. 비트겐슈타인은 비엔나로 돌아왔고, 자기 누나를 위해 새로 지을 집을 설계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1922년부터 비엔나 대학의 과학철학 교수로 있는 슐리크를 누나에게서 소개받았고, 그 와 함께 철학적 탐구를 다시 시작했다. 2) 반형이상학 프로그램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의 일부 발상들을 활용했고, 필연적 진리가 필연적인 것은 오로지 그것이 항진 명제이기 때문이라고 선언했다. 3) 곧바로 검증 원리의 위상과 공식에 관해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2-2.실증주의자들은 철학의 진정한 과제가 보편적인 철학적 명제를 내세운다기보다는 오히려 비철학적인 진술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 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은 비트겐슈타인과 하나가 됐다. 그들이 선택한 명료화의 방법은 경험적 진술들이 경험의 직접 기록인 요소 진술들 혹은 ‘원초’ 진술들로부터 어떻게 진리 함수적으로 형성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5)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대규모 장애물에 부딪혔다. 원초 진술들로 기록된 경험들은 각 개인에게 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만일 의미가 검증에 좌우되고, 우리 각자 다른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어떤 과정에 의해 검증을 수행한다면, 누구든 다른 누군가의 의미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슐리크는 형식과 내용을 구별함으로써 이 물음에 답하려고 했다.) 6) 비트겐슈타인은 이 해결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유아주의(solipsism_자신만이 존재하고, 타인이나 그 밖의 다른 존재물은 자신의 의식 속에 있다고 하는 생각)의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려고 분투했다.

3.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

3-1. 비트겐슈타인은 1930년대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 선생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인식론과 심리철학을 뒤집어엎었다. 데카르트에서 슐리크에 이르기까지 이전 철학자들은 외부의 공적 세계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직관이나 경험이라는 궁극적이고 직접적이고 사적인 자료들을 근거로 성립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려고 애썼다. 비트겐슈타인이 그 시절 제시한 바에 따르면, 결코 지식과 신념의 설립 기반이 아닌 사적 경험은 그 자체가 공통의 공적 세계를 전제로 하는 어떤 것이었다. 아주 은밀하고 내적인 우리의 생각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낱말들조차도 그것들이 바로 그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의 공통된 외적 담화 안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철학의 문제는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부터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을 사회적인 배경 속에서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3-2.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으로 다시 돌아온 뒤 <논리철학론>의 많은 주장들을 단념했다. 그는 논리적 원자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았고, 일상적인 말에 숨어 있는 논리적으로 명확한 언어를 찾아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실증주의자들의 원초 진술에는 분명히 맞지 않는 말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요소 명제와 요소 명제가 아닌 명제의 구별을 의심하게 되었고, 언어의 궁극 요소가 단순 대상을 지시하는 이름이라는 생각을 단념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