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hor Archives: 종원 강

#소피스트

#소피스트

4-1. 데모크리스토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미 그와 고향이 같은, 압데라 출신의 젊은 철학자 프로타고라스가 등장하였는데 프로타고라스는 새로운 철학자 계층인 소피스트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소피스트는 원래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면서 다양한 주제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말하자면 순회 교사들이었다. 설령 이들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철학을 넘어서 더욱 폭넓고 다양한 영역의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기관이나 시설을 세우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이들은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쳐 주면서 대가를 받았으므로 이들을 최초의 직업적인 철학자라고 불러도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소피스트 중에 가장 다재다능한 인물이엇던 엘리스 출신의 히피아스는 수학, 천문, 음악, 역사, 문학, 신화 등에 모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옷과 신발을 만드는 실용적인 기술까지도 겸비하였다고 전한다. 또 다른 소피스트들은 수학과 역사, 지리 등을 충분히 가르칠 수 있었다. 또한 이들 모두는 뛰어난 수사학자였다. 소피스트들은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주로 아테네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는데 당시 아테네에는 법정에서 변론을 펴거나 정치에 진출하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이 많았고, 이들은 교육과 지도를 받는 대가로 소피스트에게 상당한 액수의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였다.

4-2. 소피스트들은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웅변을 통한 설득의 방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들은 다양한 주제에 관한 글을 썼다. 이들은 기본 문법으로부터 출발하엿다. 프로타고라스는 명사의 성 및 동사의 시제와 법을 처음으로 구별하였다. 이들은 계속해서 논증의 기법을 열거하고 자기 옹호를 위한 요령을 개발하였다. 애매한 문헌들을 해석하고 상대방의 연설을 평가하면서 이들은 최초의 문학비평가로도 활동하엿다. 또한 이들은 대중을 상대로 한 강의와 공연을 하기도 하고 논쟁을 주고받는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교육을 다른 한편으로는 여흥을 위한 것이었다. 종합해 보면 이들은 현대사회의 교사, 상담역, 변호사, 홍보 전문가, 대중매체의 유명인사 등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4-3. 프로타고라스는 압데라의 대사 자격으로 아테네를 처음 방문하였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환영받았다고 전해지며 그 후 몇 차례 더 아테네를 방문하였다. 그는 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큰 소리로 읽었는데 그 첫머리는 오래토록 기억되어 오늘날까지 전한다. ‘신들에 관하여, 나는 그들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또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에 관한 지식에 이른느 길에는 많은 방해물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해물로는 주제 자체가 모호하다는 점 그리고 인간의 삶이 너무 짧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상대주의적인 인식론을 요약하여 표현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후에 상세히 살펴볼 예정이다.

4-4. 프로타고라스는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어떤 측면에 대해서도 논증을 펼칠 준비를 갖추었던 듯이 보인다. 사실 그는 자신은 항상 나쁜 논증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엿다. 어쩌면 이는 그저 그가 논증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잘 가르쳐 소송 등에 대비한 최선의 준비를 갖추어 줄 수 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비판자들은 이와는 전혀 달리 그가 나쁜 논증을 좋게 보이도록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하였다고 해석한다. 프로타고라스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그가 교육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에우알토스를 고소한 이야기를 즐겨 언급한다. 에우알토스는 프로타고라스의 가르침을 받은 후 재판에 나가 자신이 이기면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그는 아직 자신이 단 한번도 재판에서 이기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대가의 지불을 거절하였다. 프로타고라스는 대가를 지불하라고 그를 고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말을 잘 듣게. 만일 이 소송에서 내가 이기면 자네는 재판의 판결에 따라 나에게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네. 만일 자네가 이기더라도 여전히 자네는 나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하네. 왜냐하면 자네는 재판에서 이긴 셈이 되기 때문이지’.

4-5. 또 다른 소피스트 포르디코스는 에게 해의 섬 케오스 출신인데 프로타고라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속한 도시국가의 공적인 임무를 맡아 아테네로 왔다. 그는 언어학자였는데 문법보다는 단어의 의미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아마도 그를 최초의 사전 편찬자로 여길 수 있을 듯하다. 그가 시도한 몇몇 구별은 후에 큰 철학적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4-6. 프로디코스는 덕과 악덕을 두 여성으로 의인화한 후 이 둘 중 누구를 선택할지를 놓고 고민하는 젊은 헤라클레스를 다룬 낭만적이고 도덕적인 우화의 저자로 여겨진다. 또한 그는 종교의 근원에 관한 이론도 제시하였다.

4-7. 시칠레아의 레온타니 출신인 고르기아스는 프로타고라스에 뒤이은 대사 출신의 소피스트이다. 그는 설득력 잇는 웅변가엿을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수사학자로서 연설에서 사용되는 서로 다른 수사법, 예를 들면 대조법이나 수사를 위한 질문법 등을 분류하기도 하엿다. 그의 문체와 연설법은 그의 생전에는 크게 칭찬받았지만 후에는 지나치게 미사여구를 즐긴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저술들 중 철학적 관심을 그는 두 편의 짧은 글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4-8. 첫 번째 글은 트로이아의 헬레네를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항하여 그녀를 옹호하는 수사학적 훈련을 다룬 것인데, 여기서 고르기아스는 헬레네가 파리스와 함께 달아남으로써 트로이아 전쟁의 불씨를 제공하였다는 점을 들어 그녀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단지 자신이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바를 행했을 뿐이다. 그녀가 그렇게 한 까닭은 변덕스러운 운명에, 즉 신들의 결정이나 필연적인 섭리에 따랐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폭력에 의하여 유괴되었거나, 감언이설에 설득되었거나 또는 사랑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말은 실재하거나 지각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무척 부담스러운 존재이다. 하지만 말은 신과 같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만일 헬레네가 사랑에 빠졌다면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사랑은 우리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신과 같은 것 또는 우리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일종의 정신적 질병이기 때문이다. 이 짧고 재치 있는 언급이 바로 자유와 결정론, 불가항력, 외부의 자극, 억누를 수 없는 충동 등을 둘러싼 다양한 철학적 논의의 출발점을 이룬다.

4-9. 고르기아스의 저술 에는 세 가지 회의적인 결론에 이른느 논증이 등장한다. 이 세가지 결론은 첫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둘째 무언가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으며, 셋째 무언가를 인식하더라도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포함된 일련의 논증은 두 경로를 통해서 후세에 전해지는데 이 중 하나는 위 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저술인 이며 다른 하나는 섹스토스이다.

4-10. 첫 번째 논증은 ‘존재한다’는 그리스어 동사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는 특징을 다소 악용한 듯하다. 여기서 이 논증을 상세히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후에 6장에서 이 논증에는 결정적인 모호함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이려 한다. 두 번째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만일 사고의 대상들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오직 존재하는 것만이 사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사고의 대상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사고의 대상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사고하는 모든 것이 존재해야만 한다. 세 논증 중 가장 그럴듯한 세 번째 논증은 개인들 각각의 감각이 자신만이 갖는 사적인 것인데, 우리가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바는 경험이 아니라 단지 말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4-11. 이 유명한 소피스트가 자신의 궁색한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도입한 논증들은 사실 궤변에 가까우며, 이를 처음 접한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궤변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진단하기보다 이를 바로 거부하는 일이 손쉬울지 모르지만, 궤변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을 발견하기란 여전히 무척 어렵다. 첫 번째 궤변은 플라톤이 적절하게도 라고 이름 붙인 대화편에서 본질적으로 해소된다. 두 변째 궤변은 가끔 플라톤에서도 발견되는 논증적 오류를 포함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모든 A가 B는 아니다’가 ‘어떤 B도 A가 아니다’를 함축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후의 학자들에게 명확히 제시하였다. 세 번째 논증에서 등장한느 경험의 개인성 문제는 20세기에 이르러 비트겐슈타인의 저술이 등장한 후에야 비로소 결정적으로 해명되었다.

4-12. 프로타고라스와 히피아스, 프로디코스, 고르기아스 외에도 이름과 명성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또 다른 소피스트들이 있다. 힘이 곧 옳음이라는 주장의 강력한 옹호자인 칼리클레스, 정의란 권력을 쥔 자들의 자기이익이라고 폭로하였던 트라시마코스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상대방에게 당신의 아버지는 개라는 점을 증명해 보이려했던 한 쌍의 궤변가 에우티데모스와 디오니시도로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을 비롯하여 앞에서 살펴보앗던 더욱 유명한 소피스트들 모두가 주로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대화를 나누는 등장인물로 우리에게 알려진다.

4-13. 어쨌든 이제 소피스트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소크라테스를 살펴보려 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견해에 따르면 가장 위대한 소피스트이기도 하고, 다른 견해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궤변도 단호히 거부하고 그 반대편에 섬으로써 참된 철학자의 전형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원자론자들

#원자론자들

3-1.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가장 두드러지게 현대 과학을 예견하게 한 인물로 밀레토스 출신의 레우키포스와 압데라 출신의 데모크리토스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이름은 마치 무척 닮은 두 사람을 지칭하는 듯이 항상 함께 언급되므로 둘이 함께 원자론을 처음 제시하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레우키포스에 대해서는 데모크리토스의 스승이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현재 우리가 원자론에 대하여 아는 지식은 거의 모두 데모크리토스가 남긴 저술에 의존한다.

3-2. 데모크리토스는 초기의 중요 철학자들 중 그리스 본토에서 태어난 최초의 인물이다.

3-3. 데모크리토스의 기본 입장은 물체를 무한히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른 논증 과정을 현재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마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어떤 종류의 물체라도 한 조각 잘라내어 다시 그것을 현재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마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어떤 종류의 물체라도 한 조각을 잘라 내어 다시 그것을 가능한 한 작게 잘라 나누어 보자. 그것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작은 조각이 되면 이 일을 멈출 수밖에 없다. 물체를 무한히 나눌 수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럴 수 있다고 가정하려면 이렇게 끝까지 나눈 후에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자. 만일 무한한 수의 부분들 각각이 어떤 크기도 지닌다면 부분들은 다시 나뉠 수 있어야만 하는데, 이는 이미 끝까지 나누었다는 가정과 모순을 일으킨다. 반면에 만일 각각의 부분들이 어떤 크기도 지니지 않는다면 이들을 아무리 더한다 할지라도 어떤 분량에도 도달할 수 없다. 영은 무한히 더하더라도 여전히 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물체를 이렇게 나누는 일에는 어떤 한계가 있으며, 가능한 한 작게 나뉜 부분들도 반드시 크기와 형태를 지님에 틀림없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데모크리토스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이 작은 물체를 바로 ‘원자’라고 불렀다.

3-4.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은 너무 작아서 감각을 통해서는 인식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원자들의 수는 무한하며, 무한하게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지만 원자들 자체는 영원히 존재한다. 엘레아학파와는 달리 데모크리토스는 진공을 허용하더라도 아무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진공은 존재하며, 이 무한한 텅 빈 공간에서 원자들은 마치 어두운 방에 빛줄기가 비칠 때 보이는 먼지처럼 끊임없이 운동한다. 원자들은 서로 다른 형태를 보인다. 원자들은 형태가 서로 다를 수도 있고, 결합의 순서가 또는 위치가 다를 수도 있다. 원자들은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결합하기도 한다.

3-5. 아낙사고라스와 마찬가지로 데모크리토스도 다수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크기가 다른 무수히 많은 세계들이 존재한다.’
데모크리토스는 오직 원자와 빈 공간, 둘만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물이나 불, 식물이나 인간으로 인식하는 대상들 모두는 빈 공간에서 서로 결합된 원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파악하는 성질들은 실재하지 않으며, 이들은 단지 관습의 결과일 뿐이다.

3-6. 데모크리토스는 우리가 지각하는 성질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종류의 원자와 그 배열로부터 생겨나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예를 들면 매운 맛은 작고, 날카롭고, 모나고, 표면에 굴곡이 있는 원자들로부터, 단 맛은 크고, 둥글고, 부드러운 원자들로부터 생긴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얻는 지식은 원자론에 의해서 밝혀지는 지식에 비하면 단지 어둠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여러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데모크리토스는 체계적인 인식론을 발전시켰다.

3-7. 데모크리토스는 자연학뿐만 아니라 윤리학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썼다. 많은 내용이 격언의 형태로 오늘날까지 전하는데 이 중 몇몇은 일상에서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아래의 8장에서 살펴보겠지만, 그가 남긴 언급들을 주의 깊게 검토해 보면 그가 체계적인 도덕 이론을 전개한 최초의 사상가 중 한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

#아낙사고라스

2-1. 엠페도클레스가 다윈의 선구자로서 그 이름을 오늘날까지 전한다면 그와 같은 시대 인물은 아낙사고라스는 자주 최근에 유행하는 우주 대폭발 이론의 지적인 선구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2-2. 우주의 기원에 관한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함께 있었고, 수적으로 무한히 많은 동시에 무한히 작았다. 왜냐하면 작다는 것은 또한 한정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함께 있었으므로 그들 중 어떤 것도 작음으로 인하여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무한한 공기와 에테르의 아래에 놓여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런 원시 상태의 무한정한 것들이 그들을 둘러싼 에테르와 공기에서 벗어나 회전하기 시작하는데 이로부터 별들과 해, 달이 형성된다. 이 회전을 통하여 희박한 것으로부터 농후한 것이, 차가운 것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젖은 것으로부터 마른 것이, 어두운 것으로부터 밝은 것이 떨어져 나온다.

2-3. 아낙사고라스는 우주의 팽창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으며 미래에도 계속되리라고 주장한다. 어쩌면 우주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른 어떤 세계를 이미 만들어 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다른 세계에 관하여 아낙사고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혼이 부여된 다른 동물들도 형성되었다. 이런 일이 오직 우리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디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들이 모두 분리의 과정이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아낙사고라스는 한참 후에 브루노가 내세웠으며, 오늘날 상당히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주장, 즉 우리가 사는 우주는 단지 수많은 우주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우리의 우주와 마찬가지로 다른 우주들에도 얼마든지 지적인 존재들이 살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최초로 제시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4. 아낙사고라스에 따르면 우주의 전개를 이끄는 운동은 지성의 작용이다. ‘모든 것이 함께 있었는데, 지성이 등장하여 여기에 질서를 부여하였다’. 지성이 물체를 확고하게 지배한다는 이런 주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 때문에 그들은 아낙사고라스를 지성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2-5. 플라톤의 대화편 에서 소크라테스는 죽기 전 마지막 날 감옥에서 초기 철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자연과학의 영역에 적용되는 기계론적 설명에 대하여 자신이 점차 환멸감을 느끼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는 아낙사고라스가 모든 것을 지성 또는 정신을 통해서 설명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만족스러웠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낙사고라스의 저술에 가치에 관한 언급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점을 알고 실망하였음을 밝힌다. 즉 아낙사고라스는 소크라테스의 모든 행위가 오직 행위가 오직 지성에 따라 수행되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목적론적 설명이 기계론적 설명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누군가가 왜 각각의 것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또 계속 유지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면 그가 발견해야만 하는 바는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네. 즉 그것이 어떻게 존재해야 최선인지 도는 어떻게 다른 것들에 작용하고 또 작용을 받아야 최선인지를 밝혀야만 하네’.

2-6. 망명지 람프사코스에서 아낙사고라스는 처음으로 학교에 방학을 도입함으로써 마지막까지 인류에게 큰 기여를 하엿다. 도시의 관리들이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하여 무엇을 했으면 좋겠는가라고 묻자 그는 자신이 죽는 그 달에는 어린이들이 학교에 오지 않고 놀도록 매년 허락하라고 답하였다. 그는 쉬운 설명을 위하여 저술에 도표를 포함시킨 최초의 인물로서 이미 많은 과학도들이 그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다.

#엠페도클레스

고대철학 스터디

#엠페도클레스

1-1.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초기 철학자들 중 갖아 눈부신 활약을 펼친 인물은 엠페도클레스인데 그는 주로 기원전 5세기 중반에 활동하였다.

1-2. 엠페도클레스는 말 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은 종마를 위한 사육장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 그는 민족주의자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도시국가에 독재를 실시하려는 음모를 좌절시켰다고 한다. 이에 감사한 시민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그는 이 직위를 거부하고 자연학자와 조언자로서 검소한 삶을 사는 편을 택했다.

1-3. 시인으로서 엠페도클레스는 파르메니데스보다 원숙한 모습을 보이며 더욱 다재다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는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침공한 사건에 대해 서사시도 썼다고 하며,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몇 변의 비극도 썼다고 전한다.

1-4. 엠페도클레스의 자연철학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오니아철학자들의 사상을 종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물, 공기, 흙, 불 이 네 실체 모두를 우주의 근본적인 구성요소 또는,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뿌리’라는 동일한 용어로 부른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뿌리들은 항상 존재해 왔는데 다양한 비율로 서로 혼합됨으로써 우리에게 친숙한 세계의 여러 동식물들을 만들어 낸다.

1-5. (시_)
엠페도클레스가 뿌리라고 불렀던 바를 플라톤을 비롯한 이후 그리스철학자들은 요소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는데 이 용어는 원래 단어의 음절을 의미하였다. 이 용어의 라틴어 번역은 elementum이며 이로부터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요소’라는 용어가 유래하엿다. 17세기 보일(Boyle)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엠페도클레스가 제시한 네 요소를 물리학과 화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여겼다.

사실 이 네 요소는 다소 변형된 형태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의 요소들을 서로 다른 네 종류의 물체로 생각하였다. 현재 우리는 고체, 액체, 기체를 물체의 세 가지 상태로 여긴다. 엠페도클레스라면 얼음과 물, 수증기를 각각 흙과 물, 공기의 특별한 경우로 간주하겠지만 우리는 이를 물이라는 동일한 물질의 상태라고 생각한다. 불을, 특히 해가 내뿜는 불을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네 번째의 요소로 생각하는 일은 그리 불합리하지 않다. 어쩌면 20세기에 해와 같이 높은 온도 상태의 물체가 지니는 속성들을 연구하는 플라즈마 물리학이 등장한 사실은 엠페도클레스의 네번째 요소에 다른 세 요소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1-6. 아리스토텔레스는 엠페도클레스가 우주론이 우주에 존재하는 요소들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되는 어떤 원인, 즉 현실 세계의 생물과 무생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전개되고 혼합되는 데 필요한 원인을 지적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칭찬한다. 엠페도클레스는 사랑과 불화가 바로 이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요소들을 결합하며, 불화는 이들을 분리시킨다. 네 가지 뿌리는 어떤 때는 다수가 결합하여 하나를 이루기도 하고, 다른 대는 불화의 증오가 작용하여 서로 분리되기도 하는, 이런 계속되는 상호관계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고 엠페도클레스는 말한다.

1-7. 사랑과 불화는 그 후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자연에 관한 이론에서 자주 등장하였던 인력과 척력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내는 독창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엠페도클레스는 역사가 때로는 사랑이, 때로는 불화가 지배하는 일종의 순환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영향을 받을 때는 여러 요소들이 결합하여 안정되고 조화로운, 빛나는 세계를 이루는데, 이는 파르메니데스의 우주를 떠올리게 한다. 불화의 영향을 받을 때는 요소들이 서로 분리되지만 사랑이 회복되면서 잃었던 영역을 되찾을 때 서로 다른 모든 생물체의 종이 등장한다. 네발짐승과 새, 물고기 등의 모든 복합적 존재는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피조물일 뿐이다. 오직 네 가지 요소만이 영원히 지속되며, 오직 우주적 순환만이 영원히 이어진다.

1-8. 생물 종들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엠페도클레스는 적자생존이라는 주목할 만한 진화론을 제시한다. 맨 처음 살과 뼈는 네 요소의 화학적 혼합에 의해 생겨났는데 살은 불과 공기, 물이 각각 같은 분량으로 섞여 만들어졌고, 뼈는 둘만큼의 물과 둘만큼의 흙 그리고 넷만큼의 불이 섞여 만들어졋다. 이런 복합물로부터 아직 세분되지 않은 팔다리와 기관들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서로 결합할 만한 상대방을 찾을 때까지 여기저기를 방황한다. 이들이 우연히 만난 상대방과 결합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나느데 이렇게 미숙한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결합은 지극히 부적절하다. 이렇게 우연히 만들어진 유기체 대부분은 허약하고 제대로 대를 잇지 못한다. 오직 가장 적합한 구조를 갖춘 존재들만이 살아남아 현재 우리가 아는 인간과 동물 종이 된다. 이들이 생식에 적합하여 계속 살아남는지 여부는 의도나 계획이 아니라 우연의 문제이다.

1-9. 아리스토텔레스는 엠페도클레스가 서로 다른 생명체가 지닌 서로 다른 기관이 동일한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는 중요한 생물학의 원리를 처음 발견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목적론을 우연으로 축소 해석하려는 엠페도클레스의 시도는 비난하는데, 그 후 수세기 동안 생물학자들은 엠페도클레스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랐다. 하지만 다윈이 '그리 엄밀하지는 않지만 자연 선택의 원리를 예견하였다는 점'을 들어 엠페도클레스에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최후에 미소를 지은 사람은 엠페도클레스라 할 수 있다.

1-10.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의 네 요소를 활용하여 감각적 지각에 대한 설명도 제시하는데 이는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을 통해서 알려진다는 원리에 기초한다. 이라는 종교시에서 그는 자신의 자연학 이론을 피타고라스의 윤회설과 연결한다.

1-11. 엠페도클레스는 엄격한 기계론적 태도와 신비적인 종교적 태도 사이를 계속 오가는 모습을 보인다. 때로 그는 자신의 네 요소를 각각 신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1-12. 그의 죽음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의사들이 이미 죽었다고 단념한 판테이아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엠페도클레스가 그녀의 생명을 기적적으로 소생시켰다.
(시)

1-1. 레닌은 제국주의자가 잉여 자본의 배출구이자 값싼 노동과 원자재의 공급원으로 식민지를 착취함으로써 자본주의 통치자들의 경제가 붕괴하게 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이 틀렸음을 설명해주었다. 그는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독점 단계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레닌의 후계자인 스탈린은 사회주의를 하나의 국가에 보존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받아들였으며, 공산주의 엘리트 권력은 나치 독일에 대한 민족투쟁의 애국적인 열정 덕분에 1941년에서 1945년까지 지속되고 보존되었다.
1-2. ‘파시즘’이라는 제목 아래 두 이데올로기를 나란히 놓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상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둘 다 전체주의 국가를 믿었던 국가주의 독재자였지만, 나치주의의 지도적인 개념이 민족우월주의였음에 반해 이탈리아 파시즘의 핵심 신조였던 국가조합주의는 민족과 무관했다. 국가조합주의는 개인이 그들의 사회적 직능에 따라 대표자를 내세우기 위해 집단을 이룬 직업상의 사회 체제로 의도되었다. 조합국가는 자본가, 노동자, 전문직 사이의 관계를 통제하고, 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급들 사이의 충돌을 피하는 그런 방식으로 교회 조직을 규제하고자 했다. 이것은 하나의 민족이 그 밖의 모든 민족보다 우월하므로 그 민족들을 지배하거나 제거해야 한다는 발상에서 나온 다른 종류의 정치적 신조였다.(?)
1-3.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은 하나의 고전적 정치철학을 탄생시켰는데, 그것은 오스트리아 망명자 칼 포퍼가 내놓은 이었다. 이 책에서 포퍼는 정치 조직이 번성하려면 조직의 제도들이 최대한 자체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두 가지가 중요하다. 하나는 지배자가 제시한 정책들을 논의하고 비판할 수 있는 충분한 자유를 피지배자가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배자가 국민의 복지를 증진시키지 못할 경우 폭력이나 유혈 사태 없이 지배자를 바꾸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열린 사회의 주요 특징이며, 단순히 다수가 정부를 선택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중요한 민주주의의 요소들이다.
1-4. 하지만 포퍼가 모든 형태의 정부 간섭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무한한 관용은 편협성으로 이어질 수 있고, 제약 없는 자본주의는 용납할 수 없는 빈곤의 수준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편협성을 선동하는 것은 범죄로 간주되어야 하고, 국가는 경제적 강자로부터 경제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이것은 물론 제약 없는 경제 체제에 대한 불간섭의 원리가 단념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제약 없는 자본주의가 경제적 간섭주의로 바뀌도록 요구해야 한다.
1-5. 그의 책 2권에서 포퍼는 열린사회의 적으로 보았던 두 철학자, 플라톤과 마르크스를 공격했다. 포퍼의 주요 표적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과학 법칙, 즉 피할 수 없는 결과를 향해 확고한 필연성을 가지고 작용하는 경향이 마르크스 특유의 과학적 예언이라고 내세우는 대부분의 것들을 실제로 어떻게 반증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1-6. ‘내가 말하는 역사주의는 역사적 예언을 주목적으로 삼고, 역사 발전의 기초가 되는 흐름이나 형태나 법칙이나 경향을 발견함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사회과학 접근법이다.’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무엇보다도 과학적 진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사회의 미래를 예언하려면, 우리는 과학의 미래를 예언해야만 한다. 그러나 과학적 발견의 본성을 예언하는 것은 반드시 과학적 발견이 실제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역사주의는 불가능하며, 우리가 과거나 미래의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의미는 역사가 자유롭고, 우연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선택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뿐이다.
1-7. 존 롤스는 에서 대부분의 서양 국가들이 열망한 자유민주주의의 형태에 대해 조직적인 이론 체계를 제시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롤스는 공리주의가 정의보다 복지를 앞세우기 때문에, 말하자면 ‘권리가 이익에 우선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주의 국가의 토대로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롤스는 양도할 수 없는 자유를 확정하기 위한 기초로서 공리주의 대신 새로운 종류의 사회 계약, 즉 사고 실험과 같은 사고 계약을 제안했다.
1-8. 아직 아무런 사회 제도도 없지만 우리 모두가 처음에 평등하다고 상상해 보자. 이와 같은 ‘원초적 위치’에서는 우리가 의도하는 사회에서 어떤 사실들이 우리의 위치를 결정해 주는지 알지 못한다. 이처럼 ‘무지의 장막’에 갇힌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게 하는 요소들을 모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운명에 대해 공평한 관심을 갖게 된다.
1-9. 롤스는 이와 같은 단체 설립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을 따르기를 바랄 것이라고 주장한다. 첫 번째 원칙은 각자는 모든 사람에게 비슷하게 주어진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하고 기본적인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공정한 경쟁에서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어 있는 직책과 지위에 부여되어야 하며, 이런 불평등은 그것이 최소 수혜자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조정되었을 경우에만 정당화된다. 만일 두 원칙이 상충하게 된다면,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 평등한 기회의 원칙에 우선한다.
1-10. (…) 그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도덕에 대한 완벽한 만장일치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롤스는 우리의 도덕 판단에 대해 논의하고, 반성을 가하고, 수정을 가함으로써 도덕적 문제에 관한 ‘중첩적 합의’라는 것이 이뤄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1-11. 롤스가 끝까지 겨냥하는 목표는 ‘반성적 평형’의 상태이다. 다양한 여러 시민들의 최초의 직감들은 서로 충돌하기 마련이며, 한 개인의 직감들은 서로 맞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직감들에 대해 반성적으로 생각하고, 그것들을 옹호할 수 있는 원칙으로 명확히 표현하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는 일관성과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우리가 공식화한 규칙들에 거슬리는 직감들을 처리하고자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에 훨씬 더 조화로운 도덕적 원칙들의 확립을 기대할 수 있다.

공리주의의 수정~단념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견해

공리주의의 수정

1-1. 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과 마찬가지로 결과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아주 공격적으로 여겨졌던 벤담의 학설을 다른 방식으로 완화시켰다. 우리는 쾌락을 양적으로 구별할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구별하게 된다.

1-2. 그렇다면 쾌락의 서로 다른 종류를 어떻게 등급으로 나눌 것인가? 밀에 따르면, ‘두 가지 쾌락이 있는데, 둘 다 경험해 본 사람 모두 또는 거의 모두가 어떤 도덕적 의무감과도 관계없이 그 중 어느 하나를 선호한다면, 바로 그것이 더 바람직한 쾌락이다.’

또한 지성적이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온갖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무식한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만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족스러워 하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1-3. 밀에 따르면, 행복은 만족뿐만 아니라 자존감을 필요로 한다. 저급한 쾌락이 제아무리 많다고 한들 자존감이 없으면 행복이 아니다. 따라서 최대 행복의 원리는 다시 진술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자의식과 자기 관찰의 습관을 갖게 된 사람들은 질의 시금석 및 질을 양과 대비해서 측정하는 척도를 선호함으로써 최선의 비교 수단을 갖추게 된다. “

1-4. 어느 비판자가 공리주의는 돼지처럼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는 밀의 말을 시인한다고 해보자. 그럼에도 그 비판자는 공리주의가 최상의 인간성에 호소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덕은 행복보다 중요하고, 절제와 자기희생의 행위는 가장 훌륭한 인간 행위이다. 밀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행복을 단념하는 것이 숭고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홀로 고행을 감수하는 금욕주의자를 감탄스럽게 바라보는 것과 그런 식의 감탄은 받을 만하다.’

1-5. 공리주의에 대한 반대는 두 가지 다른 형식으로 나타난다. 도덕률로서의 공리주의는 너무 엄격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고, 너무 느슨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공리주의가 너무 엄격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거의 성인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이타주의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공리주의가 너무 느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떤 종류의 행위에 대한 절대적 금지를 융통성 있게 폐지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용문 무슨 연관,,?)

1-6. 에서 밀은 두 전선을 모두 방어하려고 한다.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주장에 대적하여 그는 도덕적 표준과 행위 동기를 구별하라고 강조한다. 말하자면 공리주의가 모든 사람의 행복을 궁극적인 도덕적 표준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행복이 모든 행동의 목적일 필요는 없다.

1-7. 밀 자신이 가장 진지하게 취급하는 공리주의의 난점은 공리주의가 정의보다 편의를 더 선호하는 수단이라는 주장이다. 밀은 정의의 명령이 사실은 일반적인 편의 영역의 일부에 해당하지만, 그럼에도 편리한 것, 도덕적인 것, 공정한 것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고 응수한다. 어떤 것이 편리하다면, 공리주의적 근거에 따라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전혀 의무의 문제를 관련시킬 필요가 없다. 어떤 것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기도 하다면 의무가 발생하며, 의무를 완수하도록 정당하게 강제될 수 있다는 것은 의무 관념의 중요 요소이다. 즉 밀의 경우, 정의와 도덕적 권리 사이의 관계를 특징짓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불공정한 법적 권리가 있을 수 있고, 법과 상충되는 공정한 요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1-8. 밀은 정의와 관련 있는 여러 관념들이 공리주의적 편의의 원리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최대 행복의 원리에 내재하는 문제, 즉 공동체에서 행복의 전체 총합을 늘리다 보니 도외시된 개인의 불행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는다.

1-9. 그뿐 아니라, 에서 밀은 분배적 정의의 형식이 체제마다 서로 다르게 제공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 말고는 분배적 정의에 관해 거의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2- 단념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견해

2-1. 쇼펜하우어의 윤리적 가르침은 그의 형이상학, 특히 경험 세계는 환상에 불과하고 진정한 실재인 물자체는 보편적 의지라는 주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개체들이 무에서 생겨나 선물로 생명을 얻은 다음 죽을 때 이 선물을 놓고 다시 무로 되돌아가는 것을 본다. 그러나 생명을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모든 현상 속의 물자체인 의지는 결코 생사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2. 죽음은 개체성이 망각된 수면일 뿐이다. 하나의 개체가 또 하나의 개체와 구분되는 것은 현상에 불과하다. ‘물자체로서의 개체는 모든 것에 나타나는 의지이며, 죽음은 한 개체의 의식이 나머지 개체의 의식과 다르다는 착각을 없애 버린다. 이것이 내세 혹은 불멸이다.’

2-3. 도덕은 인격 수양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말인지는 우리가 칸트의 자유와 필연성의 조화를 받아들일 경우 쇼펜하우어에 따라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물자체인 의지는 영원토록 자유롭지만, 인간의 본성을 포함하여 자연의 모든 것은 필연성에 의해 결정된다. 물자체인 의지는 영원토록 자유롭지만, 인간의 본성을 포함하여 자연의 모든 것은 필연성에 의해 결정된다.

2-4. 우리의 모든 윤리적 행위가 인격에 의해 결정된다면,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쓸데없는 고생이므로, 행위로 나타나는 온갖 성향을 그 자체로서 만족스러운 것으로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거부하면서 인격을 여러 종류로 구별한다. 예지적 인격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근원적인 실재이고, 시간 바깥에 있으며,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상황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결정하는 것이다. 또한 경험적 인격이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경험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예지적 인격의 본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획득된 인격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인격의 본성과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이 갖게 되는 인격이다. 이런 사람들은 가장 좋은 의미의 인격을 가진 사람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있고, 그에 맞게 자신의 계획가 야망을 마름질하는 사람들이다.

2-5. 우리의 의지는 결코 변할 수 없지만, 우리의 의지를 인식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추상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충하는 동기들을 방치하지 않고 그 상충을 알아차리는데, 이것이 바로 선택을 가능하게 해 준다. ‘우리 자신의 정신과 온갖 종류의 정신 능력에 대한 인식, 그리고 변경할 수 없는 정신 능력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우리 자신에 대해 최고로 만족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2-6. 쇼펜하우어는 최상의 인간에 대해서조차도 만족스러워할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의지의 피조물이고, 그 본성을 향한 의지는 만족을 모른다. 모든 의지의 기초는 결핍과 고통인데, 우리는 결핍이 충족될 때까지 줄곧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일단 충족되어 의지가 욕구할 대상이 없어지면, 인생은 권태라는 무거운 짐이 된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진자처럼 흔들린다’.

2-7. 의지의 포학을 피하는 아주 확실한 방법은 완전한 단념에 있다. 의지는 언제나 삶을 의욕한다. 그러므로 의지와 관계를 끊으려면, 삶에 대한 의지를 끊어야만 한다.

2-8. 단념은 자기 자신을 단념하는 것이며, 도덕적 진보는 이기주의, 다시 말해서 개인이 그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서 그 자신의 삶과 행복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키려는 경향성을 감소시키는 데 있다.

2-9. 일상적인 평범한 나쁜 사람은 자신의 의지는 모든 것에 작용하는 단 하나의 삶에 대한 의지의 현상적인 겉모습일 뿐임을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후회를 할 때 고통이 나타나게 된다. 나쁜 사람의 후회는 좋은 사람의 징표인 단념의 반대 개념이다.

2-10.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 사이에 중간 인격, 즉 공정한 사람이 있다. 나쁜 사람과 달리 공정한 사람은 개체성을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는 절대적인 장벽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자신과 똑 같은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 만큼 타인의 삶에 대한 의지가 자기 자신의 의지와 동일한 수준에 있는 것으로 기꺼이 인정한다.

2-11. 정말 좋은 사람의 경우에는 개체성의 관문에 들어가기가 훨씬 더 용이하며, 개별화의 원리는 더 이상 절대적인 장벽이 아니다. 나쁜 사람은 자신과 타인이 현격하게 다르다고 보는 반면, 좋은 사람은 그 구별이 무상하고 공허한 현상에 속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2-12. 그러나 선행과 자비가 최고의 윤리적 상태는 아니므로 좋은 사람은 곧바로 그것을 뛰어넘고자 한다. “모든 존재 속에서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진실한 자아를 깨닫는 그런 사람은 또한 고통을 겪는 모든 존재의 무한한 고통을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간주하고, 온 세상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명확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좋은 사람은 덕행을 뛰어넘어 금욕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남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현상적인 삶에 나타나는 온갖 것에 혐오감을 갖게 될 것이며, 비참한 이 세계의 씨앗인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려고 할 것이다.

2-13. 쇼펜하우어는 종교적 진리를 적나라한 형태로 제시할 경우 교육받지 못한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기 어렵기 때문에 그 진리에 신화적인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 종교 체계들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는 ‘철학자가 성인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성인도 철학자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2-14. 쇼펜하우어의 산문의 효력과 은유의 매력은 그의 윤리 체계가 숭고하다는 인생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의 윤리 체계는 그릇된 형이상학에 기초해 있고, 자기 자신을 무능력하게 한다. 세계가 환상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믿거나 만족할 줄 모르는 의지가 궁극적 실재라고 인정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2-15. 쇼펜하우어는 왜 최종적으로 금욕주의 프로그램을 채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염세주의에 치우친 생각 말고는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자비로운 사람일수록 확실히 자신의 살을 타인의 살과 더 많이 동일시하려고 한다지만, 왜 자신의 삶을 기쁨과는 관련짓지 않고 고통하고만 관련짓는 것일까?

2-16.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의 완전한 단념은 용어상의 모순인 것 같다. 왜냐하면 단념이 자발적인 것이라면 그 자체가 의지의 작용이며, 단념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진정한 단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분석철학

4.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분석철학

 

 

1) 옥스퍼드의 형이상학 교수 라일은 1949년 <정신 개념>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라일은 능력지(knowing how)와 명제지(knowing that)의 구별을 강조했다. 2)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가 1953년에 유작으로 세상에 나오자, 생생하기는 했으나 투박하게 전개되었던 라일의 생각이 이제야 훨씬 더 치밀하고 심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5) 비트겐슈타인이 죽은 뒤 많은 사람들은 콰인을 영어권 철학의 일인자로 간주했다. 6) 철학에서 콰인의 목적은 고학 특히 물리 과학의 용어를 이용한 자연주의적 세계 설명의 기본 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경험주의자이면서 행동주의자인 그는 언어 분석에 의해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세계를 설명하는 모든 이론은 우리 감각에 입력된 것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7)콰인은 철저하게 경험주의적인 프로그램을 추구했으면서도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독단’으로 철학에 첫 번째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공격의 두 표적을 다음과 같은 말로 진술했다. ‘하나는 분석적 진리와 종합적 진리, 즉 사실의 문제와 무관하게 의미에 근거하는 진리와 사실에 근거하는 진리 사이에 근본적인 어떤 틈이 있다는 신념이다. 또 하나의 독단은 환원주의이다. 즉 개개의 의미 있는 진술은 직접 경험을 지칭하는 용어들로 이루어진 어떤 논리적 구성체와 동치라는 신념이다.’ 8) 콰인에 따르면, 검증되거나 반증되는 것은 단일 문장들이 아니라 체계 전체라는 것이다. ‘외부 세계에 관한 우리의 진술들은 개인이 아니라 오로지 법인의 신분으로만 감각 경험의 심판을 받는다.’ 9) 콰인은 신념이나 이해와 같은 내포적 개념의 도움을 받아 해석되어야 하는 그런 의미란 없다고 단언했다. 의미는 언어 행동에 영향을 주는 감각적 자극들을 사상(mapping)함으로써 순전히 외연적인 용어들로 설명되어야 한다.

 

10) 콰인의 사고 실험 결과는 세 수준의 불확정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첫째, 개별적인 지칭 대상의 불확정성이 있다. 둘째, 언어 전체의 수준에 불확정성이 있다. 11) 우리는 세계에 대한 어떤 고정된 지식이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콰인의 초기 논문 ‘있는 것에 관하여’에서 ‘있는 것은 경계 변수’의 값이 있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12) 비트겐슈타인과 콰인은 유럽 대륙에서 유난히 분석철학의 지도적인 대표자 두 사람으로 간주되곤 했다. 사실 그들의 철학은 매우 다르다. 특히 두 사람은 철학의 본성에 관해 의견이 달랐다. 콰인은 분석-종합 구분에 대한 불신 때문에 철학과 경험 과학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가르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은은 과학주의, 즉 철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보려는 시도를 몹시 싫어했다. 13) 그러나 미국에서는 콰인에 의해 도입된 과학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데, 가장 설득력 있는 대표자 한 사람이 콰인의 하버드 제자인 데이비슨이었다. 14) 데이비슨의 의미 이론은 진리 이론을 기반으로 한다. 진리 이론은 유한한 용어 목록과 유한한 구문론적 규칙들을 포함할 텐데, 그로부터 도출된 주장들로서 ‘ “S”는 p인 경우 오직 그 경우에서만 L에서 옳다’는 형식을 지닌 잠재적으로 무한한 수의 진리 문장들을 수반할 것이다.

 

15) 콰인과 마찬가지로, 데이비슨은 완전히 낯선 언어를 가진 공동체와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를 고려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예증한다. 그 언어를 해석하려면 우리는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문장에 동의하는가를 관찰함으로써 그들의 언어에 대한 진리 이론을 세워야 한다. 16) 사람들의 실제적인 행동은 그들의 이유, 말하자면 데이비슨이 정신적 사건이라고 말하는 욕구와 신념에 의해 결정된다. 이와 같은 정신적 사건과 정신적 사건에 의해 ‘합리화되는’ 행위의 관계는 인과적 관계이다. 그러나 데이비슨의 경우에는 그 인과 관계가 느슨하다.

 

16) 데이비슨은 물리적 사건이 아닌 사건은 결코 없다는 점에서 물질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는 ‘정신적인 것의 변칙성’이라는 것을 역설함으로써 이런 식의 자극적인 물질주의를 완화시키려고 한다. 어느 정신적 사건이든 물리적 사건과 동일하지만, 정신적인 것으로서의 사건과 물리적인 것으로서의 사건은 서로 다르게 기술된다.

 

17) 영국에는 줄곧 과학과 철학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믿는 철학자들과 그 경계가 정말 모호하다고 믿는 철학자들이 있었다. 라일이나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들은 철학의 목표가 정보가 아니라 이해라고 주장했다. 스트로슨은 자신의 개인 교수인 그라이스와 함께 ‘독단에 대한 옹호’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분석-종합 구문에 관한 콰인의 공격을 논박했다.

 

18) 기술형이상학은 세계에 관한 우리 사고의 구조를 개선하려는 야심을 갖지 않고 그 사고의 실제 구조를 기술하고자 한다. 19) 스트로슨은 물질적 신체와 개인이 우리의 개념 지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 즉 이 두 종류의 개별자가 기본적인 개별자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다. 20) 스트로슨의 경우, 물질적 신체 못지않게 개인 역시 기본적인 논리적 범주이다. 그러므로 원초적인 것은 정신 개념이 아니라 개인 개념이다. 그런데도 스트로슨은 신체가 죽은 뒤 자기 개체의 생존을 생각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었다. 21) 스트로슨은 2006년 초 자신의 죽음으로 영국철학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