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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소크라테스 자신의 철학(p. 78~96)

기원전 404년, 고대 그리스의 문명국가였던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항복하고 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너무도 달랐는데 스파르타는 엄격한 군국주의를 바탕으로 금욕과 절제를 강조한 반면 아테네는 다수결의 원리를 따르는 민주주의 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한때 그리스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던 아테네였지만 다수결의 폐단으로 인해 갈수록 불안정해져 갔다. 일례로 다수결로 죄의 유무를 가리던 아테네 법정은 법률에 대한 지식 없이 오직 화려한 말솜씨가 죄의 유무를 결정하는 중우정치 그 자체였다. 이 모습을 본 아테네의 일부 엘리트들은 스파르타의 체계적인 교육과 규율 등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 엘리트 중심에는 소크라테스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천민적 민주주의를 비난했고 스파르타 체제에 대한 필요성을 내비쳤다.

전쟁이 끝난 404년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정치체제를 민주주의에서 이른바 ‘30인 참주’에 의한 과두정치(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정치 체제)로 바꾸었는데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떤 역할도 담당하지 않고 어떤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이에 민주주의 정치가 아니토스는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부인하고 다른 새로운 신들을 도입함으로써 범죄를 저질렀다. 또 그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범죄도 저질렀다. 이에 대한 처벌로 사형을 요구한다.’며 소크라테스를 고발하였고 결국 소크라테스는 사형 당한다.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과 플라톤은 비록 실패했지만 소크라테스를 변호하는 글을 썼다. 우리는 이 변론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를 추측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사상을 확실히 알려주는 문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크세노폰과 플라톤에서 쓰인 소크라테스에 대한 묘사가 다르다는 점이다.

 

  1. 크세노폰이 묘사한 소크라테스

크세노폰은 군인 출신의 역사가로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후 변론을 저술로 남겼고 소크라테스 회상록과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 대화편<향연>을 추가적으로 저술하였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경건한 인물로 종교적인 의식에 충실히 따랐으며 신탁을 존중하였다. 탐욕이나 야심없이 예의 바르고 온화한, 욕망을 절제할 줄 알고 어려움을 잘 참는 사람이었다. 그는 교사가 아니었지만 말뿐만 아니라 실행을 통해서 덕을 가르쳤으며, 꾸지람뿐만이 아니라 짓궂게 놀리고 우회적인 비유를 들면서 악덕을 말렸다. 그가 이렇게 모범을 보였지만 몇몇 제자들은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그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비록 아테네 민주주의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그는 사람들의 좋은 친구였으며, 어떤 범죄나 국가에 대한 반역을 전혀 저지르지 않았다.

 

이처럼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를 융통성 없지만 예리한 통찰력을 갖추고 현실적인 윤리적 문제들에 대하여 조언을 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1.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

반면 플라톤이 저술한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그 외의 대화편에서 쓰인 소크라테스는 어떤 일관된 역할이나 특성을 보이지 않는다. 몇몇 대화편에서 그는 문답법(산파술)을 활용하여 스스로 모순을 발견하도록 유도하기도 하며, 또 청중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며 다소 독단적인 형태의 윤리적, 형이상학적 체계를 제시한다. 또 다른 대화편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맡아 철학적 논의의 주도권을 넘기고 떠나기도 한다. 이에 학자들은 대화편이 쓰인 시기를 구별하여 소크라테스에 대한 설명을 구분하고자 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각각에 드러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분류해 볼 수 있다.

먼저 초기의 대화편은 <크리톤>, <카르미데스>, <라케스> 등으로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견해를 잘 반영한다고 여겨진다. 초기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탐구자로 등장하며 이 때에는 중기, 후기와 달리 이데아론이 제시되지 않는다. 그리고 중기의 대화편은 <파이드로스>, <파이돈>, <국가>, <향연> 등으로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탐구자가 아닌 하나의 철학 체계 전반을 꿰뚫고 있는 교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중기부터 소크라테스보다는 플라톤 자신의 철학을 반영한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마지막으로 후기의 대화편은 <크라티아스>, <필레보스>, <소피스테스>, <티마이오스>등으로 이 무리에 속하는 대화편 모두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역할이 극히 미미하다. 이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스승 소크라테스보다는 자신의 사상을 완성한, 성숙한 플라톤의 견해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1. 소크라테스 자신의 철학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 묘사된 모습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소크라테스는 우주론 등의 과학적 탐구에서 벗어나 철학적 문제들에만 집중하였다. 플라톤의 <변론>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아폴론의 이름으로 전한 여사제로부터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사람이 없다는 신탁을 받고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다른 계층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정치가와 시인들은 어떤 전문적 지식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장인들도 단지 특수한 영역에서만 지식을 지녔음에도 보편적 지혜를 지닌 척하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를 통하여 소크라테스는 오직 자신만이 자신의 지혜가 부족함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자신이 현명하며 따라서 신탁은 옳았다고 결론짓는다. (무지의 지)

소크라테스에게 진정한 지식을 추구하고 거짓 지식을 폭로하는 일은 도덕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최선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그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그릇된 행위, 즉 비도덕적 행위는 무지의 결과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정의(定義)와 귀납적 논증을 추구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를 추구한 까닭은 우리가 정의(正義)나 경건함 등 어떤 덕목에 관하여 완벽한 정의(定義)를 내리지 못한다면 그 덕목의 특수한 속성을 유익성, 보편성 등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보편적인 정의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면 개별적인 경우들의 진리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귀납적 논증을 적용하는 것이다.

퍼스의 귀납과 가설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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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게가 논리학에서 새로 고안해낸 것들 가운데 상당수가 완전히 독자적으로 퍼스(C.S.Peirce)에게서도 나타나지만, 퍼스는 자신의 성과들을 엄밀한 체계로 구체화하지 않았으며 완성된 형태로 출판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논리학의 역사에서 과학적 탐구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역논리는 우리의 지식을 조직화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을 넓히는 추론유형은 귀납, 가설, 유비이다. 퍼스에 의하면 이와같은 추리들은 모두 본질상 표본 추출(sampling)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연역적 추리에 대한설명은 수학적 확률 이론과 연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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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가설을 기반으로 예측한 다음, 그 가설을 확증하거나 반박하기 위해 관찰을 한다. 퍼스는 이러한 단계를 가설추리(abduction), 연역(deduction), 귀납(induction)이라고 한다. 각 단계에서 차례대로 탐구자는 고려 대상 이론을 선택하고, 그 이론을 시험하는 방법을 명확히 진술한 뒤, 시험의 결과를 평가한다.

과학자는 어떤 가설이 귀납적 시험을 받을 만한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하는가? 과학자가 조사하고자 하는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들을 수없이 많을 수 있다. 과학자가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그는 어떤 이론을 조사해야 할 거인지에 관해 얼마간의 지침을 필요로 하는데, 추측의 논리 규칙들이 이 지침을 제공한다. 이론은 그것이 옳다면 실제로 설명력이 있어야만 한다. 이론은 경험적으로 시험 가능해야만 한다. 이론은 단순해야 하고, 자연현상에 관한 것이어야 하며, 앞서 일어났을 법한 일에 관한 우리의 주관적 의견과 반드시 정합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현존의 지식과 정합해야만 한다. (P7.220-1)

하지만 가설추리의 규칙들만으로는 과학자가 가설을 성공적으로 선택했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과학자가 자연을 탐구할 때 자연 자체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과학은 우리가 올바르게 ‘추측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인간의 정신이 올바르게 추측하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수많은 가설들에 앞서 시험하려고 했다는 것을 신뢰할 수 없다면, 즉 지적인 추측이 모든 시험을 견뎌 낼 그 하나의 가설로 우리를 이끌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면… 진리를 습득하려는 온갖 시도를 단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P6.530)

이 신뢰는 비록 아무런 증거가 없을지라도 처음부터 전제되어야만 하지만 사실상 과학의 역사는 그와 같은 신뢰에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명석한 천재는 올바른 가설이 발견되기까지 두세 개 이상의 가설을 시험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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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론이 선택되면, 연역이 가설추리의 뒤를 잇는다. 연역의 귀결들은 선택된 가설에서 도출된 것으로서 가설이 정확하다면 옳거나 옳게 될 실험적 예측들이다. 펴스는 연역의 경우 정신이 습관의 지배를 받는다, 즉 일반적인 생각이 특수 사례를 제시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는 특수 예화의 예측을 검증하거나 반증함으로써 시험 대상인 가설을 확증하거나 경우에 따라 반박하기도 한다. 검증과 반증은 시험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귀납이며 이는 본질상 표본 추출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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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에 의하면 우리가 잠정적으로 추리한다는 말은 우리의 경험이 무한히 확장되고 우리의 근사치가 무한히 좁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추리가 결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확률 이론에 좌우되는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귀납은 양적귀납, 즉 표본의 비율로부터 모집단의 비율로 나아가는 추리이다.

과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중요한 또 다른 종류의 귀납은 질적 귀납인데 이는 어떤 개체의 하나 이상의 관찰된 성질로부터 관찰되지 않은 다른 성질을 추리하는 경우이다. 예를 위해 퍼스는 머그웜프(당파를 초월한 자주적 정치인) 개념을 도입한다.

그는 자존심이 강하고, 사회적 명예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이다. 그는 미국의 정치인들이 자기네 유권자를 관리할 때 요란스럽고 세련되지 못한 교제 활도을 대부분 못마땅해 한다…그는 공공 정책의 현안들 가운데 재정적인 고려 사항이 늘 중대 현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문명사회의 최대 동력으로서 개인주의와 자유방임주의의 원리를 존중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런 견해들이야말로 ‘머그웜프’의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기차 안에서 어떤 한 남자를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가 계속 이런 식의 견해를 내세운다. 나는 당연히 그가 ‘머그웜프’라고 가정하기에 이른다. 바로 그것이 가설추리이다. 다시 말하면, 손쉽게 검증할 수 있는 머그웜프의 특징들을 골라냈기 때문에, 나는 이남자가 이런 특징들을 갖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그런 유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게끔 하는 다른 모든 특징들을 그가 갖는다고 추리한다. (EWP 210)

이 실례는 퍼스가 말한 탐구의 세 단계를 예시한다. 나는 대화를 나눈 승객이 국회의원이 하층민의 비속한 행동을 한다고 개탄하는 것을 듣고 그가 머그웜프라는 가설을 세운 뒤 그가 정부의 기업 규제에 반대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에게 자유 경쟁 제한 조치에 관해 묻자 그는 맹렬하게 비난하고 이로서 나의 가설이 확증된다.

프로이트와 심리분석

 19세기 유럽 대륙과 영어권 나라들은 철학사상을 서로 지속적으로 교환했다. 프랑스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고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윌리엄 제임스는 미국에 근거지를 둔 상태로 독일에서 공부했고 영국에서 자주 강의했다. 젊은 시절의 러셀은 수학철학을 공부하는 동안 독일의 프레게나 이탈리아의 페아노와 정기적으로 교신했다. 이처럼 당시 철학은 범세계적이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자 대륙의 철학자들과 영어권 철학자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제 갈 길을 갔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러셀의 도움으로 세워진 분석적 전통의 철학이 학계를 지배했으며 유럽대륙에서는 장 폴 사르트르가 프랑스에서, 마르틴 하이데거가 주도한실존주의가 유행했다.

1. 프로이트와 심리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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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새로운 과학의 창안자로 인정받은 사람으로, 철학자는 아니었지만 20세기 영미철학적 사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자신이 프로이트주의자라고 말하는 철학자는 거의 없지만 그의 이론은 심리철학, 윤리학, 종교철학 분야의 사람들에게 참신하고 자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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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1856년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지방의 비율법주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860년 가족이 비엔나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의사교육을 받았으며 종합병원에서 두뇌해부전문의로 종사했다. 그는 신경학자 브로이어와 함께 히스테리 환자를 최면상태에서 치료하는 연구를 했고 3년 뒤 샤르코 밑에서 공부한 뒤 다시 돌아와 개업의사로 활동했다. 그해에 베르나이스와 결혼했고 여섯 아이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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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정신질환을 색다르게 분석한 히스테리 관련 저작을 브로이어와 공동으로 출판했다. 이는 치료법으로 최면술이 아닌 정신분석을 이용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환자와 의사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치료법의 기초가 되는 전제는 환자의 심리적 외상(trauma)에 대한 기억의 결과가 히스테리 증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기억나는 모든 것을 맘놓고 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장기간 환자들을 지켜본 결과 정신적외상의 원인은 유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성적인 내용을 갖는다고 확신했고, 유아기의 성적취향의 대한 이론은 브로이어와의 불화를 불러왔다.

의학동료들에게 따돌림 당한 프로이트는 비엔나에서 시술을 계속했다. 1900년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인 <<꿈의해석>>을 출판했고 이 책에서 그는 꿈 또한 억눌린 성적 욕구의 간접적 표현이라고 주장했으며 제시된 이론이 정상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단언했다. 1년뒤 그의 정신분석 이론을 수정하고 개선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첫 번째 연속출판물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을 내놓았다.

1902년 비엔나 대학의 신경병리학 특별교수로 임명되어 제자와 동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중 아들러와 융이 뛰어났지만 결국 그와 결별하고 자신들의 학파를 만들었다.

1923년 프로이트는 <<에고와 이드>>를 출간하여 새롭고 정교한 잠재의식 분석을 제시했다. 그는 논쟁에 전혀 개의치 않고 <<환상의 미래>>에서 종교의 기원을 평가 절하하는 설명을 했다. 프로이트는 무신론자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문화에 동화하지 못하거나 반유대주의의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나치스가 정신분석을 금지시키고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그는 영국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저작들은 블룸즈버리 그룹의 구성원들에 의해 번역되고 출판되었다. 그후 16년동안 턱암으로 고생하다가 본인의 뜻으로 치사량의 모르핀주사를 맞고 1939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정신분석 연구는 막내딸 안나가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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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초보자를 위한 강의에서 정신분석 이론을 두가지 기본적인 주장으로 요약했다.  첫째, 감정, 사고, 의지 중 어느 것이든 우리 정신생활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무의식이다. 둘째, 넓은 의미의 성적 충동은 정신질환의 잠재적 원인으로 뿐만 아니라 예술적, 문화적 창조의 원동력으로도 지극히 중요하다. 만일 예술작품과 문화에서 성적요소가 무의식적인 것이 된다면 이것은 사회화 과정중에 기본적인 본능이 희생되어 그것이 승화된것, 다시 말해 본능의 목적을 바꾸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불안정한 상태이며 억누를 수 없는 충족되지 못한 본능은 정신질환과 장애로 돌아올 수 있다.

그는 무의식이 일상생활의 사소한 실수, 꿈의 보고, 신경증 증상을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무의식의 구성요소로 간주한 신념, 욕구 감정은 신경증 증상이나 환자의 자의적 해석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자유연상을 활용해 분석가의 해석처럼 잠재의식의 근원적 형태가 드러난다고 믿었다.

이 근원적 형태의 핵심은 성의 발달이다. 유아기의 성적 관심은 쾌락이 입에 집중된 구강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한 살에서 세 살 사이의 항문기, 어린이가 자신의 음경이나 음핵에 초점을 맞추는 음경기이다. 이때 남자아이는 감정발달의 결정적 단계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맞이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남자아이가 성적으로 어머니에게 이끌려 아버지가 어머니를 차지한다는 분노에 적개심이 생기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거세해 보복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따라서 그 아이는 성적의도를 단념하고 아버지에게 동화된다. 신경증적인 사람들은 초기단계에 고착된 사람들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 소망의 회복과 억압의 역사는 모든 분석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는 또한 이 콤플렉스에 해당하는 여성이 있다고 확신했지만 설득력 있게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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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으로 가면서 프로이트는 초기의 의식과 무의식의 이분법을 정신의 삼중구조로 재정의 했다. 그의 저서인 <<에고와 이드>>에서 ‘정신 기관은 본능적 충동의 저장소인 이드(id), 이드의 가장 표면부위에 있어서 외부세계의 영향에 의해 수정되는 자아(ego), 그리고 이드에서 발생하여 에고를 지배하고 인간 특유의 본능 억제를 나타내는 초자아(superego)로 이루어져 있다’ 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자아는 영혼의 세부분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아가 이드나 초자아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이에 실패하면 정신이상이 나타난다. 자아와 이드의 충돌은 신경증으로, 이드와 초자아의 충돌은 우울증으로, 자아와 외부세계와의 충돌은 정신병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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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자신을 결정론을 발견하는 데에 헌신한 과학자로 여겼지만, 사실 그의 정밀한 이론들 대부분은 실험적 입장에서 엄밀히 검토되었을 때 기초가 약한 것으로 입증된 바 있다. 그의 정신분석 기법에 대한 의료전문가들의 의견은 효과와 효능에 따라 저마다 다르다. 정신분석이 성공할 경우 그것은 결정론적 작용 과정을 밝힘으로써가 아니라 개인의 자기 인식과 선택의 자유를 확장함으로써 성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에 대한 사회적 관습, 정신질환에 대한 우리의 이해,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인식과 관련한 그의 연구들과 관련한 온갖 이론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들은 사회와 인간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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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충동이 인간의 정신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고 주장한 사상가는 프로이트 이전에도 존재했다. 이전의 신학자들은 그 기원과 전달 과정 및 결과가 성과 관련 있는 아담의 죄에서 인간의 현 상태가 비롯된 것으로 간주했다. 19세기에는 숙녀인 척하며 성욕을 감추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지곤 했다. 남자의 주요 관심사인 성관계가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일생의 우스갯소리였다는 쇼펜하우어의 격언을 프로이트는 즐겨 인용했다. 쇼펜하우어는 성욕은 그것을 묶어 놓으려는 온갖 각오를 비웃는 이 세상의 진정한 세습 군주라고 말했다.

프로이트가 유아기의 성적관심을 강조한 것은 당시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어린이에 대한 감상적인 태도는 빅토리아 시대에 생겨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순진한 것은 유아의 마음이 아니라 손발의 연약함이다. 나는 시샘하는 갓난아이를 지켜보며 연구했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젖을 나눠 먹는 자기 형을 노려보면서 아직 말을 하지는 못하고 질투와 괴로움으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누가 이 경험적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겠는가?’ 라고 말했다.

현대사회가 성에 관대해진 것은 피임약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프로이트가 불러 일으킨 전체적인 사고 풍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성적 방종을 권장한 것이 아니라, 성적 욕구를 이런저런 수로로 통하는 배수구를 찾아야만 하는 심적 유동체로 보는것과 같은 은유를 통용시켰다. 그 은유에 따르면 금욕은 정신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 결국 그를 억제하는 장애물을 뚫고 나갈 수 밖에 없는 힘을 위태롭게 막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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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정신적 건강 개념은 프로이트, 브로이어, 샤르코가 히스테리 환자를 꾀병이 아닌 진짜 환자로 취급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의학적발견이라기 보다는 도덕적 결정이라고 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대부분이 그것을 올바른 도덕적 결정으로 여길 것이다. 프로이트가 도덕과 의학의 경계선을 다시 그은 것이다. 임상적 판단과 도적적 평가를 구분하는 태도변화의 대표적인 예로 동성애를 들 수 있다. 오랫동안 범죄로 간주되어오다가 한세기 가까이 정신병리적 장애의 증상으로 여겨졌으며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합리적으로 선택된 대안적 생활 양식의 핵심요소로 간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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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예술적 창조를 신경증과 유사한 것으로 여기는 등 호의적이지 않은 견해를 보였지만 그는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소설가는 정신분석가의 시술 침상에서 이루어지는것과 비슷한 연상 기법을 이용하고, 비평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용어들로 문학 작품을 해석하기를 좋아한다. 역사가는 정신분석적 전기를 쓰고, 어린 시절의 실제 또는 상상의 에피소드를 기초로 하여 성숙한 유명 인사들의 행위를 분석하기를 즐겨한다. 화가와 조각가는 꿈의 세계에서 프로이트의 상징들을 찾아내어 그것들에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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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신분석 이론을 직간접적으로 많이 흡수했다.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전혀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그들 자신의 프로이트 실책과 타인의 실책을 동일시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어느 철학자도 심리학과 도덕의 일상적 어휘에 이보다 더 큰 공헌을 하지는 못했다. 오든은 스물여덟에 난해한 사행시로 프로이트의 죽음을 애도했다.

가끔 그가 틀렸더라면, 때로 불합리했더라면,

우리에게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닌데

이제 완전히 여론을 지배하네

퍼스와 실용주의부터 프레게의 논리주의까지

1. 퍼스와 실용주의

1-1.

오늘날에는 아메리카 대륙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다수 철학자들의 본고장이 되었지만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철학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불모지에서 찰스 샌더스 퍼스의 저작은 진정한 미국철학의 시대를 열었다.

1-2.

퍼스는 하버드의 뛰어난 수학교수의 아들로 1863면 하버드에서 최우등으로 화학학위를 받았다. 그 후 30년간 미국해안측량작업, 하버드 천문대에서의 연구를 진행하며 천문학책을 저술하고 <형이상학클럽> 이라는 토론모임에 참여했다. 그는 하버드에서 역사와 과학의 논리를,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논리학강의를 열었고 까다로운 동료로 대학의 관습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종신교수직에 임명되지 못했고 다시는 정규직업을 갖지 못했다. 퍼스의 첫 번 째 아내는 남녀평등주의자인 페이였고 1883년에 헤어졌고 생에 후반부를 헌신적인 두 번 째 아내 줄리엣과 가난하게 보냈다.

1-3.

퍼스는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19세기의 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또한 칸트철학을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형식논리학에 대한 칸트의 이해가 아마추어같다고 여겨 그의 부족한부분을 보충하기위해 범주이론을 재편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동료들 가운데 스콜라철학자들이 자만심이 없다고 칭찬했고, 논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라이프니츠를 최고의 동료로 여기며 스스로의 업적 또한 높이 평가했다. 그의 연구는 논리학, 언어이론, 인식론, 심리철학 등 폭넓게 이루어졌으며 실용주의(pragmatism)의 창시자였다.

1-4.

퍼스의 철학은 학회지논문으로만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1868년 그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어떤 능력에 관한 물음들’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에서 우리는 내적 관찰능력을 가질 수 없고 기호(sign)를 벗어나선 사고할 수 없으며 직관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부정적 결론의 초기인식론에 대해 얘기했다. 결론은 모든 인지는 선행하는 인지에 의해 논리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더 유력한 논문으로 1877년 ‘과학의 논리의 실례들’ 에서 인간의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는 오류가능주의의 원리를 발표했다. 절대적 진리는 과학적 탐구의 목표이지만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최선은 끊임없이 개선함으로써 절대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다. 1878년의 한 논문은 대상에 대해 명료하게 생각하기 위해선 그 대상이 인지할 수 있는 실제적 유형의 효과를 가져 오는지 고려해 보면 된다는 실용주의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

퍼스는 1884년 논문집 《존스 홉킨스의 논리학연구》를 편집하고 관계논리학에 관한 논문을 썼다. 또 그의 학생이 발표한 그의 양화논리학 체계에서 문장의 구조를 표현하기 위한 독창적인 기호법으로 합성기호를 사용했는데, 예를 들어 Lij는 isaac이 jessica를 Love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퍼스가 이름붙인 ‘일반대수논리’의 구문론은 퍼스가 알지 못했던 프레게에 의해 이미 개발된 논리체계의 구문론과 대등한 것이었다. 1891년 《일원론자》에 실린 ‘수수께끼 추측’에서 진화론적 우주론 전반의 배경에 반대하는 형이상학과 심리철학을 소개했고 1905년 《일원론자》에 실린 논문에서는 자신의 실용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진술을 담았다.

퍼스는 생애의 마지막 해에 기호에 대한 일반 이론을 사고와 언어에 관한 철학을 위한 기본 틀로 발전시키려고 분투했다. 이 아이디어는 철학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대부분은 1903년에서 1912년 사이 영국여성 웰비와 교신하며 생각해낸 것이었다.

1-5.

퍼스의 철학은 완전한 철학을 완성하지는 못했으며 그가 남긴 원고는 20세기에 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다른 철학자들에 대한 영향력은 그의 천재성에 비하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퍼스의 논리학 연구는 엄밀하게 형식을 갖추어 발표된적이 없었으며 퍼스와 프레게 두 사람이 독자적으로 생각해 낸 논리 체계가 러셀을 거쳐 세상에 알려지게 한 사람은 프레게였다.

2.프레게의 논리주의

2-1.

고틀로프 프레게는 생후에 철학의 역사 속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탁월한 수학자로 현대의 수학적 논리학을 만들었고, 영어권 대학들 내에서 유력한 지위를 차지했던 분석철학의 창시자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의 영향으로 철학에서 20세기를 특징짓는 언어적 전회가 이루어졌다.

프레게는 독일 발트연안의 비스마르에서 루터교회에 다니는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으며 1869년 예나대학에 입학해 네 학기를 마친 후 괴팅겐 대학으로 옮겨 1873년에 기하학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74년 객원강사로 예나대학에 돌아왔고 1879년에 교수가 되어 44년간 수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평범하게 조용히 살았고 그의 중요한 저작은 대부분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2-2.

프레게의 풍요로운 저작경력은 1879년 《개념표기법》이라는 소책자를 출판하며 시작되었다. 개념표기법은 일상 언어의 불명료한 논리적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기호 체계로 프레게는 명제 계산 체계(propositional calculus)를 개발하기 위해 이 표기법을 사용했다. 이는 문장 전체가 부정, 연언, 선언의 의미에 의존하는 추리들을 다루는 논리학 분야로서, 기본원리는 ‘그리고’, ‘만일’, ‘또는’과 같은 연결어를 포함하는 문장의 진리치가 오로지 그 연결어로 이어진 요소문장들의 진리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눈은 희고, 잔디는 푸르다’와 같은 중문은 그 문장의 요소인 ‘눈은 희다’와 ‘잔디는 푸르다’와 같은 단순명제들의 진리함수(truth-functions)로 간주된다.

명제논리학은 이전에도 연구되어져 왔지만 제일처음으로 체계화 한 것은 프레게였다. 앞에서 말한 《개념표기법》은 공리적인 방식으로 명제계산체계를 제시하는데, 이를 위해 그가 고안했던 기호체계는 인쇄가 어렵고 명제계산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그 체계의 표현방법은 여전히 수학적 논리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레게가 논리학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술어계산(predicate calculus)이었다. 이것은 명제의 내적구조를 다루는 논리학의 분야이다. 그는 추리의 타당성이 ‘all’이나 ’some’, ‘no’나 ‘none’과 같은 표현에 의존하는 양화표기법을 사용해 지금까지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언논리를 대폭 개선한 술어 계산 체계를 제시했다. 이는 복합 양화사를 포함하는 문장(’모든 소년이 어떤 소녀를 사랑한다‘)에 대처할 수 있게 해주었다.

2-3.

《개념표기법》이 논리학사에서 전형적인 교과서가 되었으나 그 책을 쓸 때 그의 목적은 수학과 더 큰 관련이 있었다. 그는 논리학과 산술학의 형식체계를 제시함과 동시에 두 체계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산술학의 모든 진리가 어떤 보조수단도 필요 없이 논리학의 진리들로부터 도출됨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논리주의’로 알려지게 된다.

프레게의 논리주의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수(number)와 같은 산술학의 개념을 집합(class)과 같은 논리적인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의를 위해 그는 기수를 원소의 수가 동일한 집합(동등집합)으로 간주했다. 예를 들어 수 둘은 쌍으로 이루어진 것들의 집합이고, 수 셋은 삼인조로 이루어진 것들의 집합이다. 이는 순환적인 정의인 것 같지만 사실 집합들 사이의 동등 개념이 수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정의될 수 있기 때문에 순환적이지 않고 두 집합은 원소들 사이에 나머지 없이 1:1 대응 할 수 있을 때 서로 동등하다. 웨이터는 접시와 칼의 개수를 알지 못해도 탁자위에 접시가 있는 만큼 칼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웨이터에게 필요한 것은 접시의 오른쪽에는 칼이, 칼의 왼쪽에는 접시가 있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넷은 복음서 저자들의 집합과 동등한 모든 집합들의 집합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논리학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논리주의자의 목적을 고려했을 때 쓸모없는 것일 수도 있다. 프레게는 개개의 수에 대해 정확한 크기의 집합뿐만 아니라, 그 크기가 논리학에 의해 보증되는 집합을 찾아야 했기에 이를 위해 수 계열의 맨 처음을 영(zero)으로 시작한다. 영은 분명히 어떤 원소도 갖지 않은 집합이라고 논리적인 용어로 정의될 수 있다. 그 다음 수 하나는 그 유일한 원소가 영인 집합과 동등한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이 정의들로부터 나머지 자연수에 대한 정의들로 넘어가기 위해 그는 수 계열에서 ‘n은 m바로 다음에 온다’를 ‘F에 속하는 원소의 수가 n이고 F에 속하는 원소이기는 하나 x와 동일하지 않은 수가 m인, 그런 어떤 개년 F가 있고 F에 속하는 대상 x가 있다’ 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의 도움으로 나머지 수들도 동일성, 집합, 동등 집합과 같은 논리적 개념 이외의 다른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정의될 수 있다.

2-4.

《개념표기법》은 매우 엄격하고 형식적이지만 《산술학의 기초》는 논리주의 프로그램을 더 자세히 제시할 뿐만 아니라 더 비형식적으로 설명한다. 기호들이 드물게 나오고 자신의 책을 다른 철학자들 것과 관련짓느라 노심초사한다. 칸트는 산술학적 지식과 기하학적 지식은 둘다 직관에 의존한다고 주장하고《순수이성비판》에서 수학적 진리가 종합적이면서 선천적인 것이라 정의했으며 존 스튜어트 밀은 수학적 명제가 폭넓게 적용될 수 있고 폭넓게 확증될 수 있는데도 후천적인 명제라고 주장했다.

프레게는 수학이 선천적으로 알려진다는 점에서 밀에 반대하고, 기하학이 직관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칸트에게 찬성했다. 그러나 산술학이 분석적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종합적이라고 생각한 칸트와 차이가 있다. 만일 프레게가 옳다면, 산술학은 모든 지식영역에서 유효하고 경험적 사실들에 의해 입증될 필요가 없는 일반 법칙들만을 기반으로 한다.

2-5.

《산술학의 기초》에서 프레게가 중요하게 여긴 두 주장은 각각의 수는 독립적인 대상이라는 것과 수를 지정하는 진술의 내용은 개념에 관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한 ‘개념’과 ‘대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두 명제는 상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가 대상이라고 말할 때 그는 만져서 알 수 있는 것임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두가지를 부인하는데, 수가 어떤 것의 속성이라는 것과 수가 주관적인 것, 즉 어떤 심적 상태의 심상이거나 관념이거나 속성이라는 것이다.

프레게가 말하는 개념은 정신과 무관하기에 위에서 언급한 두 주장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없다. 그는 이 두 번째 주장은 ‘지구에 하나의 달이 있다’와 같은 진술은 지구의 달이라는 개념에 수 하나를 지정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금성에는 달이 없다’는 금성의 달이라는 개념에 수 영을 지정한다. 후자의 경우, 어떤 수를 속성으로 갖는 달이 없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수는 개념의 외연이라고 프레게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개념 F에 속하는 수는 ‘개념 F에 지정한 수와 동일한 수’라는 개념의 외연이다. 이는 F에 속하는 원소의 집합과 동일한 수의 원소를 갖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수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수가 대상이라는 그의 이론은 집합을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2-6.

1844년에서 1893년 사이에 프레게는 논리학에 근거하여 산술학을 구성하려는 논리주의를 완전하고 형식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산술학의 기본법칙》을 완성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과제는 자명한 논리학의 진리일 수 있는 일련의 공리들을 명확하게 진술하는 것이었고,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일련의 추리 규칙들을 제시하는 것 이었으며 산술학의 표준적 진리들을 그와 같은 공리들로부터 그와 같은 추리 규칙들에 의해 차례로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세권에 달하는 것이었지만 두 번째 권 까지만 완성되고 중단되었다. 1893년 그는 두 번째 권을 출판하는 사이에 영국철학자 러셀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최초의 공리들 가운데 다섯 번째 것이 체계 전체를 부정합하게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이 공리는 개개의 모든 F가 G이고, 개개의 모든 G가 F라면, F에 속하는 원소들의 집합은 G에 속하는 원소들의 집합과 같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 즉 개념으로부터 집합으로 이행하는 것을 인정하는 공리이고 수가 논리적 대상임을 입증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러셀이 지적한 문제는 이 공리를 포함하는 체계가 제한 없는 집합형성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집합은 그 자체로서 별개로 분류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제 자신의 원소인 집합과 제 자신의 원소가 아닌 집합이 존재 하는 것 같은데 이는 역설이 된다. 이 체계는 논리적으로 타당할 수 없다.

《산술학의 기본법칙》의 두 번째 권은 러셀의 편지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인쇄에 들어간 뒤였으므로 풀이 죽은 프레게는 그 역설을 부록에 넣어 문제의 그 공리를 약화시킴으로써 산술학 체계를 메꾸려 했으나 개정한 이 체계가 부정합한 것으로 판명났다. 1918년 예나대학에서 은퇴한 뒤 그는 산술학이 논리학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신념을 포기하고 산술학도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종합적이며 선천적이라는 칸트의 견해로 돌아갔던 것 같다.

2-7.

오늘날 우리는 논리주의 프로그램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두가지 이유로 프레게의 논리적 토대의 일부였던 소박한 집합론이 본래 정합성이 없었다는 것과 ‘산술학의 공리’라는 개념은 후에 오스트리아의 수학자 괴델에 의해 산술학을 완전하고 정합하는 공리 체계로 만드는 일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그 자체가 의문스럽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게의 철학적 유산은 엄청났다.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길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신대륙을 유럽에 알린 것처럼, 프레게는 산술학을 논리학에서 이끌어 내지는 못했지만 궁극적으로 산술학과 논리학의 전체 지도를 바꿀 만큼 논리학을 혁신했고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도 콜럼버스와 마찬가지로 우울과 좌절을 겪었지만 자신의 연구가 가치 있을 것이라는 기대만은 버리지 않았다. 그는 1925년 죽기직전 아들에게 원고를 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쓴 글들을 멸시하지 마라. 모두 금은 아닐지언정 그 안에 금이 있다.’

다윈과 자연선택부터 니체까지

1.다윈과 자연선택

1-1. 찰스 다윈은 1809년 슈루즈베리에서 태어나 ,1825년 에든버러의 의대생으로 입학했지만 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케임브리지의 크라이스트 칼리지로 가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식물학 교수의 추천을 받아 군함의 박물학자로 지명되었다. 5년간의 항해동안 그는 지질학, 식물학 등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발굴했고 이를 통해 해양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비글호항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1-2. 그 후 다윈은 1840-1850년대에 자신의 사유지에서 식물군과 동물군의 연구를 통해 나온 초안을 여러 사람이 돌려보게 함으로써 자연선택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를 1960년대 쯤 책으로 출판할 계획이었으나 다른 동물학자인 월리스가 자연선택과 유사한 적자생존 이론을 학회에 발표해 그는 자연선택이론의 독자성과 우선권을 위해 《종의기원》을 서둘러 출판했다. 이후 그는 여러 논문을 출판하였고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책 《인간의 계보, 선택과 성의 관계》에서 그는 인간이 오랑우탄, 침팬지와 공통된 조상을 갖는다는 주장을 옹호했다.

1-3. 다윈은 진화론을 맨 처음 제안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대 시칠리아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자연선택의 원리를 암시했고 스웨덴의 자연주의자 린네는 식물과 동물의 종을 분류해 다윈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린네와 그 밖의 분류학자들은 식물과 동물의 왕국을 속과 종으로 나누었다. 예를들면 모든 사자는 동일한 종이고, 사자종은 호랑이나 표범과 같은 다른종을 포함하는 고양이 속의 구성원이다. 일정한 종 내에서 개체의 형질은 크게 변할 수 있지만 종의 규정적 특징은 종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종의 자손을 낳기 위해 다른 구성원들과 교배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종의 구성원들 사이의 결합은 일반적으로 자손을 낳지 못한다.

몇몇 자연주의자들은 종교적인부분에서 이유를 찾으려기보다는 하나의 속에 포함되어 서로 다른 종 사이의 유사점이 머나먼 공통조상의 계보에 의해 설명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또한 종의 어느 세대에서 자손에게 넘겨줄 유리한 형질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장 높은 나뭇잎에 도달하려고 몸을 뻗치던 기린은 목이 늘어났고 이는 목이 긴 자손을 낳을 수 있게 해주었다.

다윈은 이러한 고대의 자연선택 관념을 이용해 종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설명했는데, 이러한 이론의 근본 바탕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유기체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정도에 따라 크게 변한다. 둘째, 모든 종은 세대마다 증가시킬 수 있는 만큼 번식할 수 있다. 셋째, 하지만 종이 이렇게 번식하지 않는 것은 각 세대에서 극소수의 자손만이 살아남아 번식하기 때문이다.

1-4. ‘이와 같은 생존 경쟁으로 인해, 모든 변이는 그것이 아무리 경미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어떤 원인으로 진행되든 간에, 만일 다른 유기체나 외부 자연과의 무한히 복잡한 관계 속에서 종의 개체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하다면, 그 변이는 개체를 보존하려는 경향을 가질 것이며, 일반적으로 자손에게 유전될 것이다. 따라서 그 자손 역시 더 잘 살아남을 기회를 갖게 될텐데, 그것은 종의 많은 개체들이 주기적으로 태어나기는 하나 그들 가운데 소수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OS 52)’

다윈은 세 가지 다른 종류의 선택을 구별했다. 목적에 가자 적합한 표본을 위한 인위선택과 목적적이지 않은 자연선택인데 자연선택은 다시 좁은 의미의 자연선택과 성 선택으로 나뉜다. 전자는 개체가 번식하기에 충분할 만큼 오래 살아남을지 여부를, 후자는 그렇게 살아남은 개체가 누구와 짝짓기 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적응변이는 그 변이 자체가 유전된 것이고 특유의 유리한 변이의 기원은 전적으로 우연의 문제일수 있다고 다윈은 믿었다.

자연선택은 단일한 종에 속한 형질들의 경우 쉽게 예증되고 관찰될 수 있다. 그 예로 자작나무에 사는 나방이 새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자작나무에 가까운 색을 띄는 형질로 점차 바뀌어 가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다윈은 자연선택이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되면서 식물과 동물의 완전히 새로운 종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굉장히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었을 것이며 실제로 지질학점 관점에서 화석을 살펴보았을 때 종의 탄생과 소멸을 다윈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1-5. 다윈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철학사가 아니라 과학사에 속한다. 그러나 다윈의 생물학적 연구가 종교철학과 형이상학 전반에 미친 영향 때문에, 어떤 철학사도 다윈에 대한 언급을 빠뜨릴 수 없다.

  1. 존 헨리 뉴먼

2-1. 교회단체가 다윈의 사상을 반대할 때 종교작가인 존 헨리 뉴먼은 이를 받아들였다. 《종의기원》이 발표된 직후 그는 각각의 종마다의 독자적인 창조를 믿는 사람은 화석이 박힌 바위의 창조역시 믿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다윈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했으며 과학과 종교사이의 어느 논쟁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뉴먼은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다녔으며 오리엘대학의 특별 연구원을 역임했다. 또 세인트 메리 성당의 주교 대리였으며 동시에 설교자로서 지속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복음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후에 기독교신앙에 대한 가톨릭의 해석이 옳다는것을 확신하고 로마 카톨릭교로 개종하면서 오리엘대학의 특별 연구원직에서 물러났다.

뉴먼은 더블린에 세워진 가톨릭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그 시절 강의와 연설들을 모아 《대학의 이념》이라는 교육이론의 고전을 출판했다.

2-2. 뉴먼은 신의 존재를 믿는 것 뿐 아니라 구체적인 종교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완전히 이성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세상에 입증해 보이려는 욕구 때문에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종교적인 믿음의 결론에 대한 증거가 신앙의 완전한 헌신에 부적합하게 보인다면 종교적 믿음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해 이성의 뒷받침 없이 신앙을 채택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고, 종교교리를 고수하는 것 자체가 이성적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문제를 다룰 때 그는 비종교적 맥락에서 믿음의 본성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관심을 자주 보였다. 그가 제기한 철학적 물음은 적합한 증거나 논증 없이 명제를 승인하는 것은 언제나 그른가였다. 명제가 확신이 아닌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에 의해 정당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로크에 대응하여 뉴먼은 우리의 대부분의 믿음이 빈약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잘 유지된다고 지적하고, 증거의 힘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 무조건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일도 과학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종교적 믿음은 추측에 근거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합리 하다고 비난받을 수 없다. 유대교의 역사에서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증거가 발견될 수 있지만 이 증거는 신의 존재와 계시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 에게만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왜 신을 믿어야하는지 물으면 그는 양심의 소리에서 발견될 수 있는 신성한 능력에 대한 내적 경험에 호소하라고 말한다.

2-3. 뉴먼의 기독교적 변증론이 포함된 일반적인 인식론적 설명은 신앙에 공감하지 않던 철학자들도 감탄하게 했다. 그것은 흄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의 믿음과 확실성에 관한 논의들 가운데 최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니체

3-1.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작센의 루터교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대학시절 전공은 고전문헌학 이었는데 학위를 받기도 전에 정교수가 될 정도로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니체는 대학교수가 되기 직전에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를 읽은 것과 작곡가 바그너를 만난 것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 두 사람의 영향을 받아 제일 처음 출판해낸 책이 《비극의 탄생》이다.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 정신의 두 측면을 대비했다. 한 측면은 비극에서 표현된 열광하는 비합리적 열정이었고 다른 측면은 서사시나 미술에서 표현된 절제력 있는 조화로운 아름다움 이었다. 그리스 문명의 성취는 그 둘 사이의 종합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3-2. 니체는 1873년에서 1876년 사이에 네편의 평론으로 이루어진 《반시대적 성찰》 출판했다. 4편중 두 편은 예수의 생애 저자로 유명한 슈트라우스와 과학자의 허세에 대한 비판이고

나머지 두 편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878년쯤 그는 염세주의에 숨이 막힐것 같아 바그너와 인연을 끊었고, 쇼펜하우어에 대한 열정 또한 식었다. 이 때문에 그는 후에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긍정의 삶으로 대체하길 희망하는 저작들을 출판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만 그답지 않게 공리주의 도덕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과학을 예술보다 우월한 것으로 평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예술이 일생일대의 과업이라는 끊임없는 근원적 확신을 시적이고 경구적인 저작형식으로 드러냈다. 그는 심리적 문제로 인한 병 때문에 교수직을 조기 은퇴하고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여러 곳에서 지냈다. 이때 그는 여러 작품을 남겼다. 1882년, 니체는 정신해방의 실천적 표현으로 독일의 물질주의자 이, 러시아의 남성평등주의자 살로메와 ‘삼위일체’를 맺고 동거를 시작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이 책에는 니체의 세 가지 신념이 담겨 있었다. 첫째, 현 상태의 인간이 초인에게 추월당한다. 여기서의 초인은 몸과 영혼이 당당하게 생긴 더 고등하고 강하고 의기양양하고 유쾌한 인간을 뜻한다. 둘째, 기독교적인 도덕적 우선권이 완전히 뒤집히는 가치의 재평가가 있을 것이다. 셋째, 언젠가 일어난 적이 있는 모든일이 무하하게 주기적으로 순환하면서 또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념들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니체의 저작에서 예언적인 방식은 줄이고 논증적인 방식을 늘린 형태로 해설되었다.

3-3. 1888년은 니체가 미친듯이 글을 쓴 해였다.《반그리스도》,《바그너사건》,《우상의 황혼》등이 있다. 1990년, 그는 일생을 정신이상으로 마감했다.

니체는 20세기 유럽대륙, 특히 러시아의 문학과 독일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 20세기 후반 분석적전통의 윤리학자들은 전통도덕에 관한 니체의 맹공격에 대해 응답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