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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종교 개혁의 철학

1-1. 이성을 배제하고 계시를 높이 평가한 몽테뉴의 태도가 반종교 개혁주의자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아담이 지은 죄에 의해서 완전히 타락했다는 루터의 주장에 반대하여 가톨릭 진영의 논쟁가들은 기본적인 종교적 진리가 다른 도움을 받지 않은 인간 지성의 영역 안에 속하며, 신앙 자체도 이성의 지지와 옹호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1-2. 반종교 개혁적인 공격의 선봉에 선 것은 새로 형성된 예수회(Society of Jesus)에 속한 수사들이었다. 모든 교단의 구성원들이 서약한 청빈과 정결, 순종에 더하여 예수회 사사들은 교황에 대한 절대 충성을 맹세했고 곧 세계 각지에서 교육과 선교 사업에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예수회는 새롭고, 스스로 더욱 발전된 형태로 여긴 스콜라 철학을 전개했다.

 

1-3.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이나 롬바르드(Peter Lombard)의 ≪신학명제집≫과 같은 표준적인 원전에 기초한 강의를 진행한 반면 예수회 학자들은 대학에서 독자적인 철학과 신학 강의를 시작했다. 17세기 초에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도미니크 수도회 학자들도 이런 강의 방식을 채택했고 이는 철학과 신학이 이전보다 더욱 뚜렷하게 구별되는 결과를 낳았다.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소속 학자 수아레스(Francisco Suarez)는 대학 강의에서 독자적인 교과서를 사용함으로써 철학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의 선구자로 그가 쓴 ≪형이상학 논쟁≫(Disputationes Metaphysicae, 1597)은 스콜라 철학의 형이상학을 체계적으로 다룬 최초의 저술이었다.

 

1-4. 수아레스는 1564년 예수회에 가입했으며, 평생 대학교수로 지냈다. 그는 신앙심 깊은 박학한 인물로서 순전히 지적인 능력으로만 본다면 충분히 16세기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그는 철학사에서 자신의 재능에 걸맞은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그의 저술은 대부분 중세의 주제들을 다시 언급하면서 세련되게 재구성한 수준에 그치며 어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지는 못했다. 둘째, 저술가로서 그는 무려 28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지만 그의 저술은 상당히 지루하고 장황하다.

 

1-5. 하지만 사실상 그는 형이상학과 정치철학의 두 영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아퀴나스를 진심으로 존경했지만 형이상학적 측면에서는 아퀴나스보다 이븐 시나(Avicenna)와 스코투스(Duns Scotus)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17, 18, 19세기에 걸쳐 토마스주의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퀴나스의 저술 ≪반이교도대전≫에 등장하는 내용보다는 수아레스의 형이상학에 더욱 가까웠다. 1621년에 출판된 ≪법에 관하여≫(De Legibus)는 정치철학에 크게 기여한 책이다. 여기에는 그보다 훨씬 널리 알려진 철학자들의 사상으로 전해지는 많은 사상의 원천이 등장하지만 이런 사실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았다.

 

1-6. 16세기에 구교와 신교 진영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철학적 주제는 인간의 자유 의지 문제였다. 이 문제는 트렌토 공의회에서 루터의 결정론과 칼뱅의 예정은총설에 반대한다는 선언이 이루어지면서 심화되었다. 예수회 학자들은 자신들이 인간의 자유를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선봉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수아레스와 그의 예수회 동료인 몰리나(Luis de Molina)는 자유로운 행위를 행위 과정에서 여러 대안들을 활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정의했고 이런 정의는 인간 자신의 선택과 이것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져야 하는 책임을 제대로 인정한다. 하지만 자유를 더욱 제한적인 것으로 보는 다른 설명과 비교해 보면 이런 정의는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미리 아는 신의 예지를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신의 예지는 구교와 신교가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몰리나는 널리 알려진 저술 ≪조화≫(Concordia)에서 이 문제에 대한 독창적이고 정교한 해법을 제시하지만 신교도뿐만 아니라 동료 구교도 사이에서도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학자이자 토마스주의자였던 바네스(Domingo Banez, 1528~1604)는 예수회 신학자들이 인간의 자유를 과대평가함으로써 신의 권능을 훼손한다고 생각했다. 두 교단 사이의 논쟁이 격화되자 1605년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양측 모두 침묵할 것을 명령했다.

신성한 동시에 세속적인 회의주의

1-1 칼뱅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다양한 이유로 이교도 처형이 이루어졌다. 1553년, 폐에서 이루어지는 혈액순환을 발견한 의사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제네바에서 화형당했다. 당시 바젤 대학 교수였던 고전학자 카스텔요는 그의 처형 소식을 듣고 <이교도들은 처형되어야 하는가>라는 원전을 인용하고 그리스도의 예에 호소하는 내용의 책을 썼다. 이후 쓴 저술 <회의의 기술>에서도 카스텔요는 종교적 주제와 관련해서는 어느 누구도 충분히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교도로 몰아 죽이는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음을 인식론적인 논변으로 주장을 펼쳤다. 당시에 이런 주장을 했던 이는 오직 카스텔요 뿐이었지만, 이후 관용을 지지한 사람들은 그를 선구자로 기리게 되었다.

1-2 카스텔요가 종교에 관하여 지나치게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여겼던 동시대인들은 점차 종교와 무관한 영역에서는 회의주의가 상당히 매력적인 이론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잊혀졌던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저술이 16세기 중반 재발견되면서 이 분위기는 크게 강화되었고, 섹스투스의 회의주의 논변들은 프랑스 귀족 출신인 몽테뉴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그가 프랑스어 산문으로 서술한 <레몽 세봉을 위한 변명>은 근대적 회의주의를 드러낸 고전이 되었다.

1-3 이 책은 인간이 자신을 피조물들 중 최고의 존재라고 여기는 성향이 강함을 보여주며, 과연 인간이 지구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한가를 회의한다.

1-4 몽테뉴는 여러 종류의 다른 동물들이 인간보다 훨씬 예민한 감각을 지녀 뛰어난 직관력을 지녔다고 주장하며 충직하고 용기있는 개나 은혜를 갚는 사자의 이야기 등과 인간의 잔인무도함이나 배반을 대조시킨다.

1-5 이외에도 참치가 기하와 산술에서 인간 못지않게 뛰어나며 천문학에서는 오히려 인간을 능가한다고 확신한다. 참치는 완벽한 정육면체를 형성하는 거대한 무리를 이루어 헤엄치며, 동지가 되면 마치 죽은 듯이 이동을 멈추고 한곳에 계속 머물다가 춘분이 되면 다시 이동을 시작함을 보여준다.

1-6 다양한 예시와 함께 몽테뉴는 동물들이 이런 일들을 능숙하게 수행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머리 안에서 인간과 같은 사고 작용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증명해 준다고 굳게 믿는다.

1-7 인간 고유의 산물이라고 특히 자랑하는 두 영역은 종교와 철학이다. 몽테뉴는 오직 인간만이 종교적 숭배의 능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개미의 장례의식이나 코끼리의 태양 숭배의식을 예로 들었다. 인간이 종교적 믿음을 지니고 또 그런 활동을 한다고 해도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교리들이 난무하고 자주 종교적 실천의 본성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비난했다. 또한 철학과 관련해서 그는 지금까지 다양한 비판을 버텨 낸 철학 체계를 제시한 철학자는 아무도 없었음을 제시한다. 다음은 그가 활용한 키케로의 격언이다. “무언가가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아직 이런저런 철학자들 중 아무도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1-8 몽테뉴가 인간의 본성을 낮게 평가한 것은 미란돌라가 1486년에 펴낸 저술 <인간의 존엄성에 관하여>에서 인류를 미화한 것에 대한 반박이다. 고대 고전의 재발견과 르네상스 시대 시각 예술의 결과로 등장한 낙관주의 이후 종교 전쟁으로 인한 반종교 개혁의 분위기가 강했던 프랑스에서는 비관주의에 길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1-9 자신의 회의주의와 자신이 선택한 종교적 정통설을 조화시키기 위해 몽테뉴는 지금까지 자신이 공격한 바가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진리에 도달한 체 하는 인간의 지성이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신앙이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성취가 아니라 신의 자유로운 선물이다.

권위와 양심

 

1-1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은 16세기 전반과 그 이후까지 계속되면서 여러 학자들이 자유의지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통해 다양한 새로운 문제들을 낳았다. 이 논쟁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루터다. 루터는 중세 말 스콜라 철학에서 강하게 등장했던 성향을 이어받아 스콜라주의를 비롯한 철학 자체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은총에 맞서는 최악의 적’ 으로 규정하며 은총을 받지 못한 이성능력을 경멸했다.

 

1-2 루터의 종교개혁은 오직 이성으로 신의 본질적인 속성 혹은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확실히 파악할 수 없다는 기존의 회의주의 흐름에 새로운 자극을 제공했다. 루터 역시 성서를 인정하고 그것이 지닌 결정적인 권위를 특히 강조했다. 루터는 성서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기독교도는 회의적으로 생각할 자유를 전혀 지니지 못하며 모든 기독교도들이 신의 은총을 통해 신앙의 문제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구별하고 판단할 능력을 지닌다고 말했다. 훈련받은 지성인들도 은총의 도움이 없다면 도덕적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비관적 생각은 동시에 훈련받지 못한 사람들도 신앙을 통해서 계몽되면 지적인 능력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는 낙관적 생각을 동반하게 되었다. 이 두 생각 틈에서 신교도들에게 철학의 역할이 크게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1-3 루터가 지녔던 문제, 즉 보편적 권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개인의 양심 문제 등을 통해서 기독교는 다양한 교파로 나뉘기 시작했다. 칼뱅이나 츠빙글리를 비롯한 프랑스와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들은 교황의 권위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루터에 동의했지만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나 구원할 사람을 선택하는 신의 섭리 등에 관해서는 루터와 의견을 달리했다.

 

1-4 신교도들은 교회의 주장이 성서에 의존하므로 교회가 궁극적인 권위를 지닐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가톨릭교도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여 성서를 받아들일 유일한 근거는 성서가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종교 개혁 시대 유럽에서 이성적인 논증이나 내부적인 계몽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나라별로 서로 정반대되는 해결책을 마련한 후 이를 무력이나 처벌 위주의 법을 통하여 강조했다.

 

1-5 16세기 중반에 이르며 여러 교파의 교리가 어느 정도 정리되어 정형화한 모습을 보이며 이후 400여 년 동안 계속 유지 되었다. 1530년 루터의 부관이었던 멜란히톤은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정통을 가리기 위한 신앙 고백의 형식을 마련했고 1555년 같은 곳에서 ‘통치자의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라는 협정이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각 나라들 사이에서 맺어졌다. 칼뱅의 저술 <기독교 강요>는 스위스, 프랑스. 스코틀랜드의 신교도들에게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졌다. 로마에서는 교황 바오로 3세가 종교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창설하고, 교회 개혁을 위하여 트렌토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서 루터와 칼뱅의 교리가 정죄되었고 자유 의지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사라지지 않았다는 교리를 채택하였고 전통적인 일곱 가지 성사의 교리를 재확인 했다. 하지만 공의회가 1563년 임무를 마치고 폐회되었을 때 루터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칼뱅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1-6 기독교가 이렇게 갈라진 것은 불필요한 비극이었다. 루터와 칼뱅을 가톨릭에서 갈라서게 만든 신학적 문제들은 중세에 이미 여러 차례 논쟁의 대상이었지만 교파들 사이의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기독교의 통합은 로마 교황의 지위를 기독교 총회 아래에 두는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일찍이 오컴도 이런 제도를 제안한 바 있으며 15세기에 실제로 이런 제도가 잠시 시행되기도 했고 심지어 모어   는 생애 대부분에 걸쳐 이런 제도가 기독교를 위한 신의 계획에 속한 다고 굳게 믿으며 이를 주장했다.

 

브루노

1-1. 16세기 후반, 철학자 브루노(Giodano Bruno, 1548~1600)는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나폴리에서 태어난 그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는데(1565년), 이단설의 혐의를 받고 교단에서 추방된다(1576년). 그는 도피 생활 중 제네바에서 칼뱅주의자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는 국왕 앙리 3세가 눈여겨봤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고 툴루즈와 파리에서 연구와 강의를 했다.  브루노의 첫 주요 저술은 「관념의 그림자에 관하여(On the Shadows of Ideas)」로,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 체계를 기억법에 관한 실용적인 충고와 결합시킨다. 그는 인간의 관념이 가장 낮은 단계이며 신의 정신 안에서 통일성을 형성하는 신성한 관념이 가장 높은 단계라고, 즉 관념들 사이에서 위계질서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신성한 관념은 그 자체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자연은 곧 신이 만든 보편적인 결과)을 통해서 표현된다. 지상 세계의 모습보다는 천상 세계의 모습이 신과 가깝다. 브루노는 우리가 천상 세계를 떠올리게끔 우리의 지식을 조직화하기를 원한다면, 황도를 이루는 열두 개의 별자리에 따라 정신적인 사고를 배열해야 한다고 보았다.

1-2. 1583년에 브루노는 잉글랜드로 넘어와 옥스퍼드에서 몇 개의 강의를 맡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그는 폭넓은 철학적 관심과 언변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옥스퍼드의 현학자를 경멸하는 내용을 담은 대화편들을 썼는데, 그 첫 작품 「재의 수요일 성찬」이 1584년에 출판되었다. 사람들이 브루노가 런던과 프랑스, 잉글랜드를 위한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이중간첩 활동을 하면서 이 대화편들을 썼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브루노의 대화편은 읽기가 힘들다. 그의 글은 바그너의 작품에 등장하는 신들이나 톨킨이 만든 전능한 힘을 가진 등장인물과 같은 존재들이 난무한다. 브루노는 그 당시 유행했던 헤르메스 교단의 교리를 반영하기도 했다. 브루노는 헤르메스 교단이 언젠가 기독교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루노의 여러 대화편에서 제시된 체계에 따르면, 우리가 관찰하는 현상은 자연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 자연을 하나의 생명체로 만드는 세계영혼이 낳은 결과이다. 자연계는 무한성을 가지고 있어 어떤 경계, 표면, 한계가 없다. 하지만 이 세계의 무한성은 신의 무한성과 다르다. 왜냐하면 세계는 무한하지 않은 부분들로 구성되는 반면, 신은 전체 세계에서도 완전히 내재하고 그 각각의 부분들에도 완전히 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브루노의 견해를 범신론과 구별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브루노는 신은 자연을 만드는 자연(natura naturans)이고 우주는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natura naturata)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으로는 그 관계를 제대로 해명되지 않는다.

1-3. 역사가와 과학자들은 브루노의 체계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 특징에 주목했다. 첫 째, 브루노가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채택했다는 점이고, 둘 째, 그가 다수의 우주를 요청한다는 점이다. 브루노는 지구가 태양을 둘레를 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는데,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더 극적인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지구나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우리가 보는 태양은 수많은 별들 중 하나일 뿐, 무한한 우주 공간에는 수없이 많은 태양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모든 별들의 위치가 상대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태양도 다른 별도 우주의 중심일 수 없다. 우리의 지구와 태양계는 어떤 고유한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우주 안에는 우리와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태양계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데, 현재 상황은 유일한 무한한 존재가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며, 이 존재의 영혼이 세계영혼이다. 우주 안에 각각의 지적인 존재는 의식적이고 불멸하는 원자로, 그 자체로 창조 과정 전체를 반영한다. 신과 자연을 동일시한 브루노의 생각은 스피노자를 예견하게 하고, 이성적 원자에 관한 그의 설명은 라이프니츠를 예견하게 한다.

1-4. 헤르메스 교단을 지지한 브루노의 태도와 여러 우주가 존재한다는 그의 이론은, 신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육체로 태어났고 명확한 신의 계시라는 정통 교리를 가진 기독교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브루노는 잉글랜드를 떠난 후 잠시 비텐베르크에서 루터교신자로 인정받았고, 1591년에 취리히에서 강의도 했다. 1592년 그는 베네치아 총독의 초대로 그곳에 가 바로 종교 재판소 감옥에 갇혔다. 그 다음 해 로마의 종교 재판소 감옥으로 옮겨진 후 약 7년에 걸친 길고 지루한 재판을 거쳐 1600년 이단의 죄로 로마의 꽃의 광장(Campo dei Fiori)에서 화형을 당한다. 지금 그곳에는 그의 동상이 서있다고 한다. 브루노가 자신의 저술에서 표현한 사상은 기독교의 정통성에 어긋난다. 그의 재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일관되게 자신의 사상을 옹호했고, 이 때문에 이단 심문관이 브루노를 이단자라고 판결하는데 꽤 오랜 기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다수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이론이 오늘날 우주과학자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유행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브루노를 과학의 순교자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브루노의 사상은 관찰과 실험을 통한 것이 아닌, 신비주의 전통 및 경험과 무관한 철학적 사변에 기초하였다. 그리고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이단의 판결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마법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이단의 판결을 받았다.

논리학의 쇠퇴

1-1.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결합은 16세기 전반에 걸쳐 대부분의 철학 영역의 쇠퇴를 초래했다. 이 중 논리학 영역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학에서 논리학을 계속 가르치기는 했지만 인문주의 학자들은 논리학의 용어들이 야만적이고 비열한 협잡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논리학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라블레는 <팡타그뤼엘>에서 논리학자들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이들은 진공 안에서 신음하는 카메라가 제일 지향성을 반성하는 의식으로서의 제이 지향성에 몰두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따위를 문제랍시고 탐구하는 사람들이라고 조롱했다. 스토아학파와 중세 논리학자들이 이루었던 논리학의 성과들 대부분은 네 세기 동안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삭제되고 축약된 형태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만이 통속적인 교과서를 통해 초급 수준으로 가르쳐졌다.

1-2.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라틴어가 아닌 각 지역의 언어로 쓴 책들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영어로 쓴 최초의 철학 저술은 윌슨의 <이성의 규칙>이었다. 그는 현대 논리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용어, 예를 들면 ‘명제’와 같은 용어를 영어로 표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다른 학자들도 라틴어 사용을 거부하고, 순수한 영어 단어를 개발하려 노력했다. 그 중 논리학을 ‘지성의 기법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던 레버는 자신이 쓴 논리학 교재에서 모순 명제란 서로 동일한 주어와 술어, 동사를 지녔지만 하나는 긍정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인 두 개의 진술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1-3. 영어로 쓰인 이런 논리학 저술들은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프랑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라무스는 논리학자로서 남긴 업적으로 상당한 명성을 누렸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친 것 모두가 거짓이라는 주장을 옹호하며,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하는 논물들을 출판하고, 왕립 대학 교수로 임하며 20권으로 구성된 아리스토텔레스 비판서를 발표했다.

 그의 저술 <변증론>은 1555년 프랑스어로, 1556년 라틴어로, 1574년 영어로 출판되었는데 이전의 모든 논리학 교재들을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이 최초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사고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논리학이 논쟁을 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논리학은 발명과 판단의 두 부분으로 나뉘므로 그가 쓴 저술도 이 둘을 각각 나누어 다룬다. ‘발명’을 다루면서 그는 우리가 옹호하려는 결론을 지지하는 논증을 발견하려 할 때 고려하는 요소 또는 논점으로 아홉 가지를 드는데 이들은 원인, 결과, 주어, 부가, 반대, 비교, 명명, 분할 그리고 정의이다. 그는 이런 요소들 각각을 고전 학자들로부터 인용한 방대한 내용과 더불어 예시하는데 이렇게 인용한 부분이 그의 저술 전반부의 거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예를 들면 라무스는 ‘부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떤 주어에 덧붙여지는 바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덕과 악덕은 육체와 정신에 부가되는 속성이다. 간단히 말하면 주어의 본질 외에 주어에 변화를 일으키는 모든 것을 부가라고 부른다.’ 뒤이어 그는 키케로의 연설문 중 일부를 길게 인용하여 이를 예시하는데 인용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누군가가 머리와 눈썹을 모두 깨끗하게 밀어 깎았다면

이는 그가 심술궂고 지독한 악당이라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그를 보고 교활한 여우가 나타났다고 외치지 않겠는가?

 

라무스는 겉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난했지만 그가 논증을 위하여 제시한 주제들은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곳곳에서 인용한 것이며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한 방식으로 정의된다. 그의 논의 중 유일하게 새로운 점은, 그가 ‘인위적이지 않은 논증’ 이라고 부른 것인데 그는 이에 속하는 예로 신탁의 선언과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증언을 든다.

그의 저술 후반부에서는 논리학의 전통 주제와 더욱 가까운 내용들이 등장한다. 라무스는 다시 한 번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존하여 서로 다른 종류의 언명들을 분류하고 서로 다른 형식의 삼단논법을 분석한다. 여기서는 그가 고유 명사를 포함하는 논증에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더 큰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을 혁신적인 요소로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카이사르는 조국을 억압했다. 툴리우스는 조국을 억압하지 않았다. 따라서 툴리우스는 카이사르가 아니다’와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1-4. 논리학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은 라무스의 저술에서 그리 큰 공적이나 독창성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하지만 라무스 사후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와 라무스주의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이들 사이의 타협을 시도한 중간적인 라무스주의자들 집단까지도 등장했다. 1561년 라무스는 칼뱅주의자가 되었는데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벌어진 신교도 대학살 때 희생되었다. 그가 순교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저술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누릴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영향력은 그 후 수 세기 동안이나 이어졌다. 예를 들면 밀턴은 <실낙원>을 완성한 5년 후에 라무스의 논리학을 다룬 책이 출판하기도 했다. 라무스의 저술이 인기를 누리면서 논리학은 오랜 침체기로 빠져 들었다. 중세 논리학자들을 사로잡았던 양상 논리와 반사실적 조건문의 영역 등에서 어떠한 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중세 학자들의 저술은 대부분 잊혀지고 말았다.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

1. 인문주의

1-1  이른 바 1511년부터 1520년에 이르는 10년 동안은 가히 르네상스의 정점으로 여길 만하다. 바티칸에선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가 있었고, 피렌체에선 메디치가가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또한 피렌체의 관리였던 마키아벨리는 정치철학의 고전이 된 ≪군주론≫을 써냈다.  이러한 르네상스의 예술과 사상은 북쪽으로 점차 전파되어 독일과 영국에도 이르렀다.

1-2 당대 최고의 학자중 한명인 에라스무스는 헨리8세를 가르쳤고, 영국에서 국왕 다음으로 큰 권력을 차지한 토마스 모어와 같은 집에 머무는 사이였다.  에라스무스와 모어를 중심으로 15세기 이탈리아에 뿌리를 둔 인문주의 사상이 북유럽으로 전파됐다. 하지만 당시 ‘인문주의’라는 것은 종교적 가치를 세속적인 것 인간 중심의 가치로 대체하려는 욕구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에라스무스는 널리 읽힌 종교적 서술들을 쓴 성직자였으며, 모어는 훗날 종교적 믿음 때문에 순교를 하기도 했다. 당시 인문주의들은 오히려 그리스어와 라틴어 고전들은 탐구하는 ‘인문학’이 지닌 가치를 높이 평가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고전 작가들의 문체를 탐구하고 많은 작품을 재발견 했으며, 이러한 작업들은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인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탐구가 예술과 과학을 부흥시키고 기독교의 진리를 정통적으로 파악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 믿었다.

1-3  인문주의자들은 전문적 철학 탐구보다는 문법, 문헌학, 수사학 등을 더 높이 평가했다. 에라스무스와 토마스 모어 둘 모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한 중세철학자들과 달리 플라톤으로 돌아가려 했다. 모어의 경우 플라톤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저술인 ≪유토피아≫에서 재산은 공동으로 소유되며 여성도 남성과 함께 군대에 복무한다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그는 저서에서 플라톤처럼 정치철학 이론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노력했으며,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수단으로 가공의 국가를 예로 들며 이에 관해 상세히 서술했다. 반면 에라스무스는 플라톤을 정치의 인도자로 채택하는 데 회의적이었다. 모어에게 헌정한 그의 저서 ≪우신예찬≫에서 과거 역사를 보면 ‘권력이 취미 삼아 철학을 애호한다고 자처하는 통치자의 손에 들어갔을 경우 국가가 가장 큰 곤경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M, 100). 그러나 그의 다른 저서인 ≪기독교 군주를 위한 가르침≫의 내용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미 발견된 것을 반복한 것과 다른 내용이 없었다. 때문에 그의 저술은 마키아벨리나 모어의 명성을 누리진 못했다.

2. 종교 개혁

2-1 에라스무스의 경우 철학보단 신학에 더 관심을 보였고 사변 신학보단 성서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1516년 새 라틴어 성서를 자신의 주석과 더불어 출판하면서 부록의 형태로 그리스어 성서를 덧붙였다. 그는 그리스어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서슴지 않는 수정도 행했다. ‘말(the Word)이 있었다’에서 ‘말씀(the Saying)이 계셨다’로 바꾼것이 그 예다.  이는 성서를 그리스어로 출판한 첫 사례임과 동시에 16세기에 성서가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는 계기를 제공했는데 1522년 루터(Martin Luther)가 기념비적인 독일어 번역 성서를 출판하는 게 그 시작이었다.

2-2 에라스무스는 한 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이기도 했다. 교황의 특별 허가로 수도원 생활을 그만 두었는데 루터 또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였다. 에라스무스와 마찬가지로 루터도 성서 중 로마인들에게 보낸 바울로의 편지를 깊이 연구했는데, 이를 통해 르네상스 시대 접어들어 카톨릭이 보인 정신과 윤리적 태도를 의문시 하게 된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새로 번역한 성서를 출판한 다음 해인 1517년 루터가 교황을 비난하는 글을 비텐베르크 대학에 내걸었다. 이는 유명한 면죄부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었다.

2-3 에라스무스와 모어도 고위 성직자의 부패에 대해 루터와 생각을 같이 했고 타락과 부패를 비난하는 문서도 출판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경우는, 루터가 가톨릭의 성직과 성레 체계 전반을 비난하고 구원에 필요한 오직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행적에 대한 신앙 또는 믿음이라 주장하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교황의 논쟁을 잠재우려고도 했지만 헛된 시도로 끝났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거부했고 결국 신성 로마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지가 되었다. 교황 레오10세가 죽은 뒤 하드리아노 6세가 즉위했는데 그는 에라스무스의 친구이기도 했다. 하드리아노 6세의 압박에 의해 에라스무스는 루터에 반대하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막상 하드리아노 6세가 세상을 떠난 뒤 였다.

죄 은총 그리고 자유

 

1.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는 16세기 철학자로 루터와 대립적 관계에 있었다. 그 대립의 주된 이유는 루터 의 자유 의지에 대한 견해에서 비롯하였다. 루터는 자유 의지가 실재가 없는 것이며 허구의 것이라 주장하였고 그에 대한 근거로 인간이 선악의 계획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능력인 것을 들었다.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론>>이라는 저술에서 구약과 신약 성서와 다양한 문헌을 인용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를 지님을 증명해보이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선악을 자유 의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성서의 모든 유의미한 내용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고 주장 하였다. 하지만 철학적 관점에서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스콜라 철학 시대의 거의 상식으로 통했던 견해만 반복할 뿐 더 진전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스콜라 철학자들처럼 신의 예지가 우연인지 필연적인지 탐구하는 것이 종교와 무관한 호기심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콜라 철학이 보이는 미묘함과 난해함을 혐오하는 태도를 보였었다.

2.루터, 모어

루터는 에라스무스, 모어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자유 의지에 관하여 에라스무스와 반대되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앞서 언급했듯이 자유 의지를 허구로 보고 신의 예지가 필연적이기에 완전하고 불변하는 신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을 계획하고 행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사건에 대한 필연성을 인정하지만 필연성의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는데 영원불변의 필연성과 강제적 필연성이다. 이 두 가지의 필연성이 뜻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는 은총과 같은 영원불변의 필연성에 지배되지만 강제성에 의하여 지배되지 않는데 이는 신이나 사탄이 인간에게 강제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의지는 영원불변의 필연성에 의해 신 혹은 사탄에 의하여 조종될 뿐 신이나 사탄에 대한 선택을 자발적으로 하진 못한다. 나아가 그는 자유 의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고 의지의 자발성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유 의지라는 용어의 의미를 보인다는 점에 동의한다. 루터의 주된 관심은 저주와 구원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문제에서의 자유 의지의 부정에 있다. 모어는 루터의 추종자이자 성서번역가인 틴들과의 논쟁에서 비롯해 자유 의지 논쟁에 끼어들게 된다. 그는 루터의 결정론에 반대하면서 운명에 관한 스토아학파의 논의를 사용한다. 이러한 모어와 루터의 논쟁과 같은 자유와 결정론에 관한 논쟁은 고, 중세철학의 상식에 가까운 논증을 반복하는 수준에 그치며 인문주의 교육에 부정적 측면을 보여주었다. 또한 서로를 모국어로 거칠게 공격했던 모어와 루터의 논쟁에서 인문주의자들의 논쟁에서 드러나는 호전적인 관행이 종교 개혁자들의 분리를 강화한 요인들 중 하나가 되는 역할을 하였다.

 

 

아퀴나스 사후부터 둔스 스코투스까지

1.아퀴나스 사후

1-1. 아퀴나스가 13세기에 사망한 후 몇 해 안되서 그의 견해 중 일부는 파리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가르칠 수 없는 등 그에 대한 평판은 매우 다양하고 변화무쌍했다.   하지만 1316년 교황 요한네스 22세가 아퀴나스를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작업을 시작으로 겨우 50여 년전에 그의 저술 전반이 신학적으로 건전하다고 판정 받았다. 트렌토 공의회의 심의를 통하여 «신학대전»이 성서에 필적하는 저술이라는 영예로운 지위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1879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한 아버지’가 발표된 이후에야 비로소 아퀴나스는 이른바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의 공식 신학자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그를 추대하는 과정에는 많은 부작용도 낳았는데 우선 가톨릭교도가 아닌 철학자들이 아퀴나스를 철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길이 막혔고 철학자들이 단지 특정한 교회 조직의 대변인 정도로 생각한 인물들이 이들의 연구를 제한하고 억압한 결과를 초래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아퀴나스에게 존경을 표하지만 동시에 그의 복잡하고 세련된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그를 추종하고 미숙하게 그의 사상과 논증을 설명했다.

1-2. 현재 아퀴나스 연구는 새로운 관심 속에 놓여져있다.  이러한 관심은 그의 저술을 해석하고 받아들였던 이전의 태도에 비해 훨씬 다양한고 비판적으로 이루어져있으며 그의 저서의 라틴어를 번역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또한 그의 저서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예를 드는데 매우 인색하다. 설령 예를 든다 할 지라도 간접적이거나 진부한 수준에 그친다.  그리고 그의 천재성을 찬미하며 그의 저술을 잘 해명된 상태로 소개하고 싶어하는 학자는 그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일종의 불명료함을 지닌다는 것을 알아야한다.이는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철학적 불일치를 일으키는 근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는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조화시킨 인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저술에서는 플라톤주의적 요소도 상당 부분 발견된다. 현대 그의 많은 학자들은 그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더 많은 비중을 두려고 하지만 이에 반대하면서 플라톤적인 아퀴나스에 동조하는 학자들도 있다. 사실 아퀴나스 자신은 지상에 관련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지만 천상과 관련해서는 플라톤주의자였다.

2.브라방의 시제와 로저 베이컨

2-1. 만년에 아퀴나스는 파리대학에서 극단적 형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와 논쟁을 벌어는데 많은 정력을 소모했다. 이들 중에는 세계가 항상 존재하고 모든 인간에게 오직 하나의 지성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서 하나의 지성에 관한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권위있는 주석가인 이른 루슈드가 선호했다. 이러 학자들은 자주 ‘라틴 세계의 이븐 루슈드주의자들’이라고 불렸는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브랑방의 시제(Siger of Brabant, 1235~82)였다.

2-1-2. 이러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가르침은 시간상의 어떤 지점에서 이루어진 창조와 개별적인 인간 영혼에게 내세가 있다는 기독교 교리와 조화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1270년 파리 대주교는 ‘모든 사람의 지성은 동일하며 수적으로 하나이다’, ‘최초의 인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명제로 시작되는 13개의 교리를 정죄했다. 이 정죄는 부분적으로 아퀴나스가 시제의 특징적인 교리를 반대하기 위해 쓴 글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시 젊은 학자들은 이 둘이 같은 유형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정죄된 명제들에서는 시제와 아퀴나스로부터 도출된 주장이 함께 포함되있었고 단테가 이둘을 나란히 천국에 올리고 아퀴나스로 하여금 시제를 통해 영원한 빛을 던진 인물로 칭찬하게 만들었가 때문이다. 단테는 전문적 철학적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그의 «신곡»을 통해 스콜라철학의 이론을 절묘한 시구로 표현했으며 «제정론»을 통해 인간의 지적인 발전이 오직 평화인 상태에서 이루어지며 평화는 어떤 초자연적인 권위,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아래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직접 철학에 기여하였다.

2-2. 단테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아 바로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인데 그는 시제보다 십여 년 정도 오래살았다. 그는 1210년 경 일치스터에서 태어나고 1247년 옥스퍼드 대학 하굽에서 배우고 가르쳤다. 이 후 그는 파리로 거처를 옮기고 십년 후쯤 프란체스코 교단에 가입했다. 그는 파리를 싫어했지만 그에게 과학적 탐구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가르쳤던 마리쿠르의 피에르(Peter of Maricourt)만은 유일하게 높이 평가했다.  피에르는 철학에서 확실성에 이르는 문과 열쇠가 바로 ‘수학’이라고 믿도록 인도한 인물이다. 하지만 1257년 그가 속한 프렌체스코 교단 지도자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강의를 금지했지만 저술은 계속 허락되었다. 심지어 교황 클레멘스 4세는 그의 저술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2-2-1.그는 철학에서 실험의 역할을 강조한 17세기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등장을 예견한 선구적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대저작»에서 권위에의 복종, 맹목적인 습관, 대중의 섭입견, 우월한 지식을 지녔다는 가식적 태도 등이 오류의 근원으로 지적했으며 고대의 언어에 대한 탐구와  진정한 수학의 획득이  학문적 탐구의 필수적인 두 가지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그는 경험과 무관한 추론은 우리를 올바른 결론으로 이끌지만 오직 경험만이 우리에게 확실성을 제공한다고 말하면서 실험 과학(scientia experimentails)을 명백히 제시하였다.

3. 둔스 스코투스

3-1.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에 대한 생애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거의 추측에 의존하낟. 그에 대한 모든 설명은 문서 기록이 전하는 확실한 다음의 네 날짜에 기초한다. 먼저 1291년 3월 17일 노샘프턴(Northampton)에서 사제로 임명되었고 1300년 7월 26일 프란체스코 교단 소속의 탁발 수도사로 옥스퍼드에 머물렀는데 고해성사를 들을 자격을 얻으려 하였지만 실패했다. 1304년 2월 30일 그는 쾰른에서 신학을 강의하는 자리에 있었고 그가 사망한 날짜는 정확하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1308년 11월 8일로 알려져 있다.

3-2. 그의 저술은 많은 필사본이 전해지지만 이들의 진위와 쓰인 시기는 생애의 상세한 내용만큼이나 지극히 모호하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이들 대부분은 미완성인 단편의 형태로 남았는데 그 후 수세기를 걸쳐 여러 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편집되고 저술로 완성되었다. 20세기에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그가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에 대한 주석 대부분이 후대의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판명되었다. 여전히 그의 작품으로 인정된 것은 «범주론»,«명제론», «소피스트 식 논박»에 대한 주석과 포르피리오스에 대한 주석뿐이다. 그리고 «신학명제집»은 상당한 논란이 되었지만 저술 중 처음 두 권에 대한 강의록은 그가 직접 단 주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두 권은 «강의록»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정리집»이라고 스코투스 자신이 직접 최종적으로 손실하여 완성하지는 않았지만 비판적으로 검토한 끝에 출판되었다. 이 «강의록», «정리집»은 현재 스코투스를 연구하는 철학자와 신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헌의 역할을 하고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그의 성숙한 사상을 엿볼 수 있다.

3-3. 그의 저술을 읽기란 결코 쉽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의 언어는 이해하기 어려울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전문적이고 독자들에게 불친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철학을 탐구한 모든 학자를 통들어 가장 날카롭고 예민한 정신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많은 주제들에게 아퀴나스와 정반대되는 태도를 취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조금 앞서 활동한 강의 앙리와 다른 의견을 보인다는데 스스로 큰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앙리는 1276년부터  1292년까지 파리 대학에서 당시 인문학부의 일부 학자들이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택하는데 반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식의 신플라톤주의가 내세웠던 많은 주장들을 옹호했던 인물이다.

3-3-1. 그는 존재를 비롯하여 ‘좋음’과 같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다른 술어들을 서로 유사한 많은 것들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의미만을 지니며 피조물에 대하여 사용될 때와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로 신에게도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통과 결별하였다.  또한 그는 형이상학을 존재자체로서 존재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면서 존재 안에 기독교적인 무한한 신을 포함시킴으로써 존재의 범위를 매우 크게 넓혔다. 또한 그는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비판하면서 신의 현존을 확립하기 위한 자기 자신의 매우 정교한 형이상학적 증명을 제시한다. 그는 아퀴나스와 달리 신의 속성을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보았다.

3-3-2.  그는 ‘질료,형상,실체, 우연’등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질료형상론의 구성 요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 그러나 이런 용어들 대부분은 근본적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공간에 대해서 근느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단지 물체의 가능성만으로도 진공을 둘러싼 벽을 유지하고 공간을 확보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또한 시간에 대해서 그는 시간은 단지 운동을 위한 잠재성만을 측정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운동없이도 시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으로 그는 가능 세계에 관한 철학의 창시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3-3-3. 그는 또한 아퀴나스와 비교하여 인간 지성의 영역을 두 방향으로 확정했다. 아퀴나스와 달리 그는 각각의 존재가 자신의 내부에 개체화의 원리를 지니고 이를 파악할 수 있기에 지성은 각 개체의 단일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우리가 현세와 내세를 고려한다면 지성의 적절한 대상은 존재만큼이나 넓다고 말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지성이 보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신으로부터 특별한 조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앙리의 주장을 거부하지만 그의 인식론에서 신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모순과 함께 존재할 수 없기에 우리를 속이는 방식으로 절대적 능력을 발휘하지 않기 때문이다.

3-3-4. 그는 심리철학과 관련해서 지성과 의지 사이의 관계를 언급한다. 그는 아퀴나스가 의지를 본질적으로 실천적 추론의 유연한 본성에 기인해 자유를 얻게된 이성적 욕망으로 본 것과 달리 의지를 일종의 통제력이라고 보았다.  의지는 이성적 능력으로 다양하게 발휘될수 있지만 이 말이 의지의 발휘가 이성의 아래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인간과 신의 의지를 어떤 철학자보다도 훨씬 넓은 능력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의지는 서로 정반대의 것들도 원할 수 잇는 능력이며 신의 의지 또한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넓은 의미로써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신은 많은 사람들이 자연법이라고 믿는 것들까지도 마음대로 면제하거나 폐기할 수 있다.

스콜라 철학자들: 12세기에서 르네상스까지 그로스테스트에서 아퀴나스까지

 

1. 시대적 상황

12세기에 등장한 헌신적 번역가들은 다양한 철학자들 이상으로 철학에 큰 기여를 하였다. 12세기 초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은 <<범주론>>과 <<명제론>>뿐 이었는데 다른 저술들의 번역이 발견되고 자코모가 <<분석론 후서>>를 번역하여 오르가논의 라틴어 번역이 완성되었다. 또한 12세기 중반 자코모가 <<자연학>> <<영혼에 관하여>> 등의 저술을 번역하였다. 12세기 후반 아랍어로 쓰인 철학 원전들이 번역되었고 뛰어난 이슬람과 유대 철학자들(알 킨디 알 파라비 알 가잘리 이븐 시나 등)의 저술들이 번역되었다. 번역에 관해 다른 중요한 점은 이븐 루슈드의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에 대한 주석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으로 1220년경 스콧이 시작하였다. 이러한 12세기의 번역작업을 통해 13세기 초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과 주석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라틴어로 접할 수 있었으며 12세기의 등장한 초기 번역본 뒤에 더 많은 새 번역본이 등장 할 수 있었다. 새로운 번역들 중 기욤의 번역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의 번역이 아퀴나스를 비롯한 여러 스콜라 철학자들이 표준판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13세기의 사상적 발달의 배경에는 새로 등장한 대학과 종교 교단이 있었다. 볼로냐와 살레르노에서 최초의 대학이 설립되었다 주장하지만 그 두 곳은 전문대학적 성격을 띠기에 파리와 옥스퍼드를 최초의 대학으로 봐야한다. 중세 대학은 4가지 학부로 구성되었는데 공통과목인 인문학부와 상위학부인 신학 법학 의학의 구성이다. 모든 대학이 라틴어를 공용어로 사용했으며 상위학부 학생들은 일정 나이까지 자유롭게 대학을 옮겨 다닐 수 있었다. 학부의 교과과정은 교과서 중심으로 조직되었는데 인문학부는 일반적 기준이 마련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1210년 파리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관한 모든 강의를 금지하고 저술들을 불태우라 했지만 1255년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의 많은 저술들이 강의에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 신학의 교과서로는 <<신학명제집>>과 성서 법학 교과서로는 <<로마법대전>>이나 <<교령집>>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교과서들은 각 대학마다 달랐다. 중세의 지적 분위기 형성에 도움을 준 교단으로는 프란체스코 교단과 도미니크 수도회가 있다. 각 1210년과 1216년에 정식으로 승인 받았다. 두 수도회 모두 1219년에 파리에 대학을 설립했으며 1230년에 옥스퍼드에 학교를 세웠다. 중세의 위대한 철학자 대부분이 이 두 교단의 소속 수도사들인데 대표적으로 알베르투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 둔스 스코투스 오컴 등이 있다. 그 외 위콜리프가 수도회 출신이 아닌 철학자인데 철학사가들은 그가 정말로 수도회 소속이 아니였는지에 대하여 의심스럽게 생각하기도 한다.

2. 그로스테스트와 알베르투스

2-1. 그로스테스트의 업적 및 평가

그로테스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주교로 임명되기 전 옥스퍼드에서 공부하였으며 초기 총장 중 한사람으로서 5년간 강의 하였다. 그는 많은 저술을 썼을 뿐만 아니라 <<분석론 후서>>에 대하여 최초의 라틴어 주석을 썼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새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13세기 위대한 철학자들 보다 한 세대 앞서 등장 했으며 많은 학자들이 철학사보다 과학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긴다. 그 연유는 그가 과학적 개념들이 논증의 필연적 진리 체계를 구성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진리가 조건문의 형식을 취한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조건문으로 표현된 진리의 일부는 연역이 아닌 실험으로 확립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측면과 다른 측면들로 인해 서유럽의 실험 과학의 아버지라 평가 받아왔다. 또한 그는 천문학과 기상학에 관한 독립적인 저술도 썼으며 <<분석론>>에 주석에서 드러나 인간의 과학적 노력에 대한 전반적 견해로 보아 베이컨이나 파라셀수스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에 가까운 인물로 볼 수 있다.

2-2. 그로스테스트의 사상

그로스테스트는 인간 지식의 5가지 보편이 있다고 말한다. 1. 신의 정신 안에 존재하는 영원한 근거들이다. (플라톤은 이것들은 이데아라 불렀다. 이것들이 서로 분리된 실체는 오류이다.) 2. 신이 천사들의 정신에 각인한 형상이 있는데 이것은 이데아와 마찬가지로 창조의 과정에서 전형이나 모법으로 작용한다. 3. 지상의 존재에게는 작용하는 인과적 근거가 있는데 이 인과적 근거는 천상에 존재한다. 4. 지상의 실체들에 속하는 형상들은 실체의 유와 종을 규정한다. 5. 대상의 우연적 형상은 본래 그런 형상을 지닌 실체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과학과 형이상학을 연결한 그로스테스트의 예는 광학이론에서 드러난다, 광학이론은 <<천지창조론>>과 <<빛에 관하여>>라는 저술에서 전개되는데 그는 빛이 최초로 창조된 물질형태의 것이라 주장한다. 빛은 제일 질료와 결합하여 단순하며 크기가 없는 실체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시간이 시작된 순간 삼차원에 공간을 창조하였다. 또한 이빛이 아홉 개의 천체를 차례로 창조했으며 9번째가 달이다. 이 빛은 달로부터 지구에 이르러 4원소를 창조한다. 여기서 그는 신학으로 옮겨가는데 빛을 신의 본성과 가장 유사한 자연적 본성을 지닌 것으로 보아 신과 같이 다른 것의 도움 없이 자신의 내부로 모든 것을 창조 가능한 것으로 파악했다. 빛은 순수한 형상과 작용에 가장 가까우며 신 자신이 영원한 빛이며 천사는 비물질적 빛이다. 신은 모든 것의 보편적 형상이지만 질료와 결합하는 형상이 아니라 모든 것의 전형이 되는 형상이다. 인간의 지성이 진리에 이를 수 있으면 오직 최고 진리인 신의 빛을 통해서이다.

2-3. 알베르투스

알베르투스는 최초의 독일 철학자로 1223년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가 되었으며 3년간 파리에서 신학을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 중 한명이 아퀴나스였다. 그의 저술에서도 그로스테스트와 같이 형이상학과 과학의 결합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저술에선 과학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새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을 진심으로 반긴 최초 철학자들 중 한명으로 이븐 시나의 방식으로 다양한 주석서를 썼으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작으로 여겨지는 저술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그의 사상에 여전히 신플라톤주의적 요소가 남아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자연의 경험적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3. 보나벤투라

3-1. 생애와 업적

보나벤투라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본명은 조반니인데 그의 이름을 바꾼 이유는 어려서 병의 회복을 프란체스코의 덕택으로 여겨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들어가고 이름을 변경한 것이다. 그는 헤일즈의 알렉산더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신학명제집>>에 대한 나름의 주석을 썼으며 <<개요>>라는 제목의 신학교과서를 썼다. 또한 그는 수도회의 총회장이 된 후 서로 다른 분파를 화해시키기 위해 수도회를 재결합하고 재조직하였으며 프란체스코의 생애에 대한 전기를 두 권 썼다, 그는 총회장을 하면서 신자의 관점에서 신비주의적인 저술도 썼는데 그 책은 현재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다.

3-2. 사상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플라톤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말하였는데 그는 이데아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을 간단하게 반박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이데아를 부정한 최초의 오류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수많은 오류가 포함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데아가 신의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진 않는데 이데아는 영원한 근거로서 모든 것이 이에 따라 규정되는 전형으로 이런 이데아들이 인간지식의 일차적 대상이라 주장하였다. 그의 저술에서도 빛의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빛에 4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였다. 1. 기계적 기술로 생겨난 빛으로 가장 열등하며 은유적으로 빛으로 여겨진다. 2. 감각 지각의 빛으로 은유로서의 빛이 아니며 각각의 감각은 서로 다른 강도의 빛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다. 3. 지적 진리 탐구의 길로 인도하는 빛으로 철학의 3가지 영역(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을 비춘다. 4, 성서의 빛으로 최고의 빛이며 정신이 구원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그는 철학의 세분과를 각각의 빛으로 여겨 총 6가지의 빛이 창조의 여섯 에 대응한다고 주장하며 모든 학문에 쇠퇴가 있기에 마지막 휴식의 날이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축복받은 자들이 신의 정신 안에 이데아들을 바로 인식할 수 있으며 직접 관찰보다는 반사 된 빛으로만 진리의 인식이 가능하다 주장하였다. 인간 지성에 의해서 창조된 빛은 사물에 대한 확실성에 이르기에 충분치 못 하므로 특별한 빛이 필요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류를 반박하는데 열중하였으며 세계의 창조와 세계의 지속의 양립을 불가능 하다 여겼다. 그렇기에 그는 세계가 시작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일련의 논증을 제시한다. 그의 체계에서 수동지성과 능동지성의 구분을 인정하지만 각각이 인간 개인의 능력이라 생각하며 아랍학자들이 생각하였던 능동지성의 임무가 신의 직접적 조명에 의해 수행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을 받아들였으며 인간 영혼이 육체의 형상이라는 점도 받아들여 아랍학자들의 심령일원론을 반박하는 데 사용한다. 그는 이븐 가비롤에 따라 질료형상론의 구조를 영혼자체에 적용하여 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질료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영혼도 질료를 포함한다는 점을 순응하고 개인의 영혼이 지속가능하다는 것과 질료로 개체화의 원리를 보일 수 있다는 주장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영혼이 순전한 비물질적이라는 주장의 난점을 피할 수 있었지만 정신적 질료라는 개념의 명확한 설명을 필요로 하였다.

4. 토마스 아퀴나스

4-1. 생애와 저술, 사상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 이탈리아 출생으로 5살 때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에서 베네딕트 수도사들의 손에 성장하였다. 1239년 황제와 교황사이 분쟁 발생으로 이 수도원에서 더 이상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자 나폴리 대학에서 피터의 아래서 논리학과 자연학을 처음 접했다. 1244년 그는 가족이 원했던 베네딕트회 신부가 되기를 거절하고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가 되었고 이에 그는 가족에게 납치당해 감금생활을 하였는데 이때 두 편의 논리학 논문을 썼다. 감금생활에서 풀려난 후 파리로 가 알베르투스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 스승과 함께 쾰른으로 떠났다. 1252년 그는 신학 석사학위를 위해 공부를 시작하였고 <<신학명제집>>에 대한 주석을 통해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었다. 또한 이 시기에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라는 소논문을 썼으며 이것을 통해 이븐 시나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256년 석사학위를 받은 후 3년 동안 더 머물면서 성서에 대하여 강의를 하였는데 그는 교수로서 학생들의 논박을 감독할 의무를 지녔다. 그가 감독한 논박의 내용은 <<진리에 관하여 논박한 질문들>>이라는 자료를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 책은 다양한 주제와 253가지의 개별적 논박이 등장하여 방대한 분량을 보인다. 이 시기에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에 대한 주석을 써 자연과학 수학 형이상학의 관계를 논의하면서 질료로부터의 순서를 자리 매김한다. 1259년~1260년대 초반 아퀴나스는 교황을 따라 오르비에토로 갔는데 그는 거기서 기욤을 만났으며 <<반이교도대전>>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아퀴나스의 다른 저술과 비교 하였을 때 기독교 교리가 아닌 철학적 전제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 큰 차이가 있는데 이 철학적 전제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철학자들이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는 점을 지녔다. 따라서 이 저술은 자연신학에 관한 저술로 볼 수 있다. <<반이교도대전>>은 총4권으로 이루어지고 각 권의 내용은 신의 본성, 신의 창조 및 창조된 세계 신안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법과 윤리적 문제 삼위일체나 성육신 등의 기독교 교리와 관련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아퀴나스는 1,2,3권에서 성서를 논증의 전제로 삼지 않았다. 그는 <<반이교도 대전>>을 완성한 후 로마에 도미니크 수도회의 부속학교 대리 교장을 하는 동안 또 다시 논박을 감독했는데 이때 이와 관련된 3가지 저술을 남겼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 대한 권위 있는 주석을 쓰기 시작한 것도 로마에서부터 시작하였는데 그는 <<영혼에 관하여>>에 대한 주석을 가장 먼저 썼고 이 주석은 현재까지도 학자들이 많이 참고한다. 다음으로 <<자연학>>에 대한 주석을 썼다. 하지만 그가 로마에 머물면서 쓴 가장 중요한 저술은 신학대전의 저술 시작이었다. 신학대전은 매우 방대한 저술로 총 3부로 이루어진다. <<신학대전>>이 생생한 학문적 논박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논박과 마찬가지로 질문과 항목별로 나누어 구성된다. 신학대전의 각 항목은 3단계로 구성되는데 1. 항목이 내세우려하는 주장의 난점을 제시함 2. 항목이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대 주장에 이어 다른 측면에서의 고찰이 뒤따름 3. 각 항목의 본문에서 아퀴나스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근거와 함께 제시함. 이후 난점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구성은 철학자가 무엇인가를 당연시하는 것을 막기 위한 강력한 지적훈련을 위해 도입된 것으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설득시킬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반박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끔 만든다. <<신학대전>>은 불필요한 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아퀴나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신학대전>>의 1부에서는 <<반이교도대전>>의 주제들을 거의 포함하며 가톨릭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을 주요 독자로 보고 신의 속성을 제시하고 바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다룬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이성에 의해 발견되는 진리와 계시를 통해 얻어지는 진리의 구별을 하였다. 그는 <<신학대전>> 1부를 쓰는 동안 <<군주의 통치에 관하여>>도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성직자를 군주의 위에 놓고 군주가 세속국가를 이끌어가는 원리를 제시하려 했다. 이 책은 아퀴나스가 사망하기 전까지 완성하지 못했기에 톨로메오가 완성하였다. 1268년 아퀴나스는 파리로 다시 돌아와 이븐 루슈드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랍학자들의 주석을 받아들여 정통 가톨릭 교리와 상반됨을 주장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자체를 반가톨릭적이라는 오명을 씌워지게 만들었는데 이에 대한 논쟁을 위해 아퀴나스는 두 편의 소책자를 저술하였다. 이 두 편의 소책자에서 그는 능동지성과 수동지성이 모두 개인의 능력이라는 주장과 세계가 어떠한 시작점을 지닌다는 사실을 철학적 논증에 의해 확립, 반박 불가의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주장들을 통해 그는 이븐 루슈드주의자들에 맞서고 프란체스코회의 신학자들과 맞서게 되었다. 이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방어책으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을 명확히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계속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 대한 주석 작업을 진행하여 나갔다. 그가 파리에서 두 번째로 머물었을 때 가장 주요한 것은 <<신학대전>>의 2부를 저술한 것이다. 2부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인용되고 주제상 <<반이교도대전>>의 3권에 대응하지만 그 내용이 더 방대하며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영향을 받은 점이 더 많이 등장한다. <<신학대전>> 2부 전반부는 인간 삶의 궁극적 목표 고찰로 시작한다. 그는 궁극적 목표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행복이라 주장하며 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입장을 같이한다. 하지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차이를 보이는데 그 차이점은 행복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활동이 오직 신의 본질을 관조하는 데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주장하고 현세의 일상적 상황에서 행복이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 참된 행복은 오직 천상에서 축복받은 영혼만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덕이 행위와 정서 모두에서 표현되는 심리적 성향이라 함에 따라 자신도 행위와 정서에 관한 언급과 덕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한다. 그는 성향 개념에 대한 일반적 고찰도 제시하는데 이것은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철학이 쇠퇴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큰 중요성을 유지하였다. 덕에 대한 아퀴나스의 언급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언급에 기초하지만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목록에 사랑 믿음 희망을 더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과 기독교에서 칭송하는 성격상의 특성을 연결하고 악과 죄를 연결한다. 신학대전의 전반부 마지막 주제는 은총과 법으로 법의 본성,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의 구별, 본성과 은총사이의 관계, 구약의 법과 신약의 법 사이의 대비, 죄인을 구원하는 것의 정당성 등의 주제를 다룬다. 이런 주제들에서 아퀴나스는 신교와 구교의 중간정도의 입장을 고수 한다. <<신학대전>>의 2부 전반부가 윤리학적 성격을 지닌다면 후반부는 개별적 도덕주제에 대한 상세한 가르침을 포함한 각론이다. 후반부에서는 각각의 덕이 분석되고 죄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믿음 사랑 이외 다른 덕들은 4주덕(사려 용기 정의 절제)을 상위 구조 삼아 논의되는데 그 중 정의에 관한 분야 중 하나를 경건함이라 하고 이를 신에게 돌려야하는 것을 마땅히 돌려야 한다는 덕이다. 아퀴나스의 덕 목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목록과 일치하지 않는데 이유는 그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등장하는 이교도적 특성을 보이는 몇 가지 덕을 기독교화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예로 자신의 탁월성을 관대함과 겸손의 덕과 양립할 뿐만 아니라 겸손의 일부로 만드는데 이 두 가지를 자신의 장단점에 대한 정당한 판단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신학대전>>의 2부는 활동적 삶과 관조적 삶의 비교로 마무리 되는데 여기서 아퀴나스는 관조적 삶을 바람직하게 여기긴 하지만 선교와 가르침을 포함하는 관조적 삶을 최선의 삶으로 보았다. 이 시기 <<신학대전>> 2부외에도 많은 저술을 썼는데 대표적으로 <<형이상학>>에 대한 주석이 있다. 그가 1272년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에서 머물 때 <<신학대전>> 3부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3부는 오로지 신학적 주제만 다루며 성찰하였다. 이를 통해 아퀴나스는 자아정체성 개체화 술어논리 등에 대하여 언급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며 물질적 실체의 본성과 실체의 변화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신학대전>>은 완성되지 못하였는데 그는 망연자실한 상태에 빠지는 일을 자주 겪었으며 신비한 체험을 하기도 한 후 더 이상 모든 학문적 활동을 중단하고 집필하지 않았다. 이후 그의 비서와 동료들이 아퀴나스가 죽은 후 죽음 심판 천국 지옥 부분에 대하여 이전의 저술을 참고하여 마무리하였다. 1274년 공의회를 참가하기위해 북쪽으로 갔지만 리옹에 도착하기 전에 몸이 좋지 않아 포사노바에서 머물다가 몇 주 후 시토 수도회 소속 수도원으로 옮겼고 1274년 3월 7일 세상을 떠났다.

 

윌리엄 오컴부터 오컴에 대한 반응

윌리엄 오컴

1-1 오컴은 스코투스가 떠난 직후  옥스퍼드에 도착했다. 그의 성은 잉글랜드 작은 마을 오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280년대 후반 출생했으며 프란체스코 교단이다. 런던 회색 수도원에서 철학적 훈련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310년 전후 신학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옥스퍼드에 갔으나 스코투스주의자들과 대립했다. 수많은 논쟁을 이끌었고 논리학과 자연학 저술 및 운명예정설과 미개의 우연에 관해 상당한 영향을 끼친 저술도 썼다.  유명하게 알려진 ‘오컴의 면도날’ , 즉 실재들은 필요 이상으로 늘어나면 안된다는 주장으로 잘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가 이런 말을 하진 않았다고 한다.

1-2 그는 논리학과 형이상학과 관련해 스코투스의 것을 더 발전시킨다. 혹은 정반대 되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스코투스의 것에 비해 사유 자체도 덜 복잡하며 언어도 더 명료한 장점이 있다. 그는 존재를 한 가지 의미를 지닌 용어로 신과 피조물 모두에 적용하는 것으로 여겼다.  또한 창조된 존재 수를 줄이며,  실체와 속성을 축소했다.

1-3 스코투스와 다른점은 보편의 본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많은 개체 사이에 공통적 본성이 있다는 것을 거부했다. 보편은 오직 우리 정신 안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보편은 사물이 아니라 기호이며 단지 많은 것을 나타내는 기호란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기호는 자연적 기호와 관습적 기호가 있다. 전자는 우리 마음의 생각이며 후자는 이런 생각을 표현 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 낸 단어다.

2-1 그를 유명론 ( nominalism)자 라고 부르는 것 보단,  개념 실재론자 (conceptualist)라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또한 그의 초기 이론에선, 정신이 실재하는 사물을 닮은 정신적인 상 또는 ‘허구’를 만든다고 보았다.  실재하는 것에 대응하는 것으로 정신적 명제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제공 한다는 것이다. 훗날 이 견해에 대해 비판을 받았고 이러한 주장을 포기했다.  또한 오컴은 객관적 지식과 추상적 지식을 구별한 스코투스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오컴의 이런 주장은 스코투스의 것을 더 명확한 것으로 만들었다. 스코투스가 제시한 인식론적 가능성은, 동시에 회의주의에 이르는 길을 크게 넓혔다.

2-2-1컴은 프란체스코 수도사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그의 철학적 전환점은 교황과의 대립 문제에서 발생했다. 오컴은 교황의 포교와 명령들이 부도덕하며 이단적이라며 공개적으로 이를 비난했다. 결국 교황에게 이단으로 낙인 찍힌 후 루트비히의 아래로 도망치게 된다. 그곳에 있던 것은 루트비히의 또 다른 철학적 후원자 였던 ‘마르실리오’ 였다. 그 역시 요한네스22세를 비난했다. 또한 교황 제도 자체에 반대했다.

2-2-2 마르실리오의 책 《평화의 옹호자》(Defensor pacis , 1324) 는 정치철학의 고전적 문헌이다. 이 책은 세련된 철학적 수준을 갖췄고 당시 교황 편에서는 쉽게 반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후에는  정통파 카톨릭 학자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계기 또한 제공하게 된다.

2-3 오컴의 견해 중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연권 이론이다.( OND6. 268~71).  마르실리오의 정부 개념은 당시 이탈리아를 근거로 형성된 반면, 오컴은 신성로마제국을 바탕으로 했다. 그는 자신의 통치자를 선택할 권리는 인간의 자연권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2-4 오컴은 흑사병이 유행하던 1394년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당한 상태로 뮌헨에서 세상을 떠난다.

오컴에 대한 반응

 

1-1 중세 전성기 파리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은 가장 규모가 큰 대학이었다. 그 중 파리의 수많은 사상가들이 오컴 저술의 특정한 주제들을 추적해 발전시켰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의 그레고리오는 오컴의 자연철학을 받아들였다. 소르본의 학장이었던 뷔리당은 오컴의 유명론에 공감하며 세계를 과학저긍로 탐구함으로써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오컴보다 훨씬 더 신뢰했다.

1-2-1오컴의 인식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두 프랑스 학자로 시토 수도회 소속인 미르쿠르의 장과 세속의 수사 신부였던 오트르쿠르의 티콜라가 있다. 장의 인식론은 오컴의 개념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또한 장은 후에 데카르트가 ‘두 번째 성찰’의 첫머리에서 도달한 관점과 매우 유사한 태도를 보이며 데카르트의 관점을 예견한 듯도 하다.

1-2-2 장과 달리 니콜라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회의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기 위한 통로로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여기 지금 지성적인 사고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지성이 현존한다’는 주장조차도 확실한 논증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2 -1 옳든 그르든 간에 니콜라의 회의주의는 이후 오컴의 가르침이 낳을 수 있는 극단적이고 과도한 경우를 드러내는 예로 자주 인용되었다. 마찬가지로 20세기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니콜라를 자신들의 탁월한 선구자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