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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 2장 분량 공지!

중세 철학 2장 분량 공지입니다

스콜라철학자들부터 토마스 아퀴나스까지 – 선식

아퀴나스 사후부터 둔스 스코투스까지 – 서연

윌리엄 오컴 부터 오컴에 대한 반응 – 동철선배

옥스퍼드의 계산기들 부터 파리와 옥스퍼드를 넘어서 – 다영언니

르세상스의 플라톤 주의부터 르네상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까지 – 창묵선배

이제 이번 학기 한달 밖에 안남았네요ㅎㅎ 한달만 바짝하고 방학을 맞이합시당!!

철학과 신앙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나라까지

 철학과 신앙 :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마이모니데스까지

1-1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는 서양 사상사에서 하나의 새로운 기원이다. 그는 생애 초반에 다양한 철학적 전통들을 몇 가지 경로를 통하여 받아들였다.  그중 특히 플라톤적인 전통을,  아카데메이아학파의 회의적 관점에서든 아니면 신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관점에서든 간에, 받아들였다. 이는 유대교와 그리스  그리고  기독교 사상을 종합한 것인데 서양의 철학적 사고라는 관점에서 다음  천년을 위한 준비였다.

1-2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중 황금기는 그가 기독교도로 세례를 받은 387년 부활절 직전과 직후다.   많은  저술중 ≪아카데메이아학파에 반대하여≫(Contra Academicos)가 유명한 데 이를 통해 그는 회의주의에서 참인 바와 거짓인 바를 구별하려 한다.

1-3-1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글을 썼는데 이를 ‘독백’이라 한다. 여기서 그는 이성은 태양이 우리 눈에 분명히 보이듯이 신이 그의 마음에 분명히 드러나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를 위하여 영혼의 눈은 유한한 것들에 대한 모든 욕구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화 중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부와 명예, 성적인 쾌락의 추구를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이성은 신을 드러내보이겠다는 약속을아직 지키지 않았지만 그 대신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혼의 불멸에 대한 증명을 제시한다. 진리의 개념을 생각해보라. 참인 것들도 사라져 버릴 수 있지만 진리 자체는 영원하다.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여전히 참이다. 그런데 진리의 안식처는 영혼이므로 진리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불멸해야 한다.  (S 1. 15 . 28 . 2. 15 .28)

1-3-2   397년 그는 ≪고백론≫ (Confessions) 라는 제목의 저술을 썼는데 이는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개종에 이르는 과정을 마치 기도를 하면서 신과 대화하듯이 서술한 책이다. 이는 일반적인 종류의 자서전은 아니지만 자서전이라는 형식의 기초를 제공한 대표적 저술로 평가된다. 이는 또한 개종 이전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 관하여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부수적으로 수많은 철학적 성찰을 포함하며 특히 시간의 본성이라는 독립적인 주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더불어 마무리 된다.

역사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

2-1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 중 그가 가장 공을 들인 작품은 ≪신국론≫(The City of God)이다.  이 저술을 그리스 고전 사상과 기독교 사상 사이의 종합을 최초로 드러낸다. ≪신국론≫은 십자가에 못 박힌 유대인들의 왕 예수를 이교도의 철학이 이상화한 도시국가의 정상에 놓으려 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그랬듯 아우구스티누스도 지금 자신이 제시하려는 진리를 철학자들이 오래전부터 다뤘지만 이에 제대로 이르지 못한 것을 보이기 위해 탈레스 시대부터 당시의 철학사를 요약한다.  또한 ≪신국론≫ 전반에 걸쳐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핵심적인 주장과 함께 나란히 제시하는데 특히 그가 가장 좋아하였으며 거의 기독교도로 여기기까지 했던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자주 언급된다. (DCD Ⅷ. 8~9)

 2-2=1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이나 키케로와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이 오랫동안 숭배한 신화와 신들을 불경스러운 것이라 비난한다. 그는 이런 사소한 신들을 숭배하는 것이 많은 철학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위대함이 어떤 참된 유일신이 시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들이 지닌 덕에 대한 보상으로 부여된 것이라 본 것이다.

2-2-2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이교도 신화에 등장하는 신을 허구로만 본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러한 신들이 참된 신에게 향해야 할 마땅한 숭배를 가로채는 사악한 악령이라 보았다. ( DCD Ⅷ. 14, ⅸ,8,Ⅹ.9).또한 정령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는데 그는 정령들을 타락한 천사와 동일시 했다. 정령들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고 천상이라는 감옥에 내던졌다고 본 것이다.

2-2-3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에는 최초 천사들의 창조에 관한 내용이 그리 많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천사가 진정 신의 피조물이란 사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천사들이 서로 대조되고 상방되는 두 사회를 형성했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빛”과 “어둠”이라는 개념으로 선과 악을 표현했다.

2-2-4 천사들이 구성한 두 사회가 ≪신국론≫ 전체의 외형적인 주제인 두 국가의 기원에 해당한다. 그는 선한 천사가 있듯 악한 천사가 있고 사람 역시 이와 같다고 보았다. 또한 천사와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결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2-5 그는 또한 인간을 천사와 말 못하는 동물 그 중간쯤으로 보았다. 창조를 설명할 때도 플라톤의≪티마이오스≫ 에선 최고의 존재가 아닌 그 하위의 신이 대리인의 역할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과는 달리, 그는 하위의 신은 존재하지만 무에서 유를 만드는 일을 오직 유일신만의 특권이라고 규정하였다. (DCD ⅩⅢ. 6). 인간의 창조에 대해 플라톤과 성서가 가장 대비되는 부분은 “혼과 육체의 분리인 죽음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대한 물음에서 극명하게 갈리기도 한다.

2-3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적 욕구와 정념이 영혼의 발전을 방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는 오직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육체에만 해당하는 얘기다.  낙원에서 인간의 육체는 감정이나 욕구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나라

3-1  그는 인류의 역사를 두 나라 이야기에 맞추어 추적한다. 많은 위대한 국가들 중 인간 사회를 오직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성서의 표현에 따하 이를 두 나라로 부를 수 있다 한다. (DCD ⅩⅣ.1). 그는 전자는 육체에 살고 자기애에 의해 창조 됐고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며 사탄과 함세해 멸망하도록 운명 지워졌다고 보았다. 후자의 경우엔 신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며, 영원한 신이 다스리도록 결정되어 있다고 했다. (DCD ⅩⅤ. 1과 4). 또한 이러한 두 나라의 분리는 아담과 이브의 자식들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했다. 첫째아들 카인이 인간의 나라이고 그의 동생인 아벨이 신의 나라에 속했다는 것이다 (DCD. ⅩⅤ.2). 또한  예루살렘은 신의 나라를 상징하고 바빌로니아는 지상의 나라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3-1-2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 ≫ 15권 .16권에서 신의 나라가 전개된 초기 역사를 추적한다. 17권에서는 선지자와 시편 작가들을 인용해 신의 나라를 설명하려 한다. 18권에서는 다시 세속의 역사로 돌아와 아시리아 , 이집트 등 여러 이교도 제국의 흥망을 다룬다.  여기서 철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논쟁 부분은 궁극적인 선과 악에 대한 것이다. 철학자들은 현세에서 궁극적 선을 발견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나라는 영원한 삶이 최고선이고 영원한 죽음을 최고의 악으로 보았다. 오직 신앙과 은총을 통해서 이러한 최고 선에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안다고 주장했다. (DCD ⅩⅠⅩ. 1~4).

3-2-1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예언자와 그리스도교의 설교 그리고 사도들 및 계시록 내용을 종합해 세계의 미래에 대한 내용을 우리에게 전한다. 그는 부활과 역사의 종말 사이엔 천 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이는 계시록의 내용과 같은 것이다. 또한 천년이 흐른 후 벌어질 마지막 일들을 언급하기도 한다. 천상의 예루살렘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아래 있는 지옥은 이러한 두 나라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3-2-2  주목할 점은 사악한 자들이 육체적 처벌을 받기 보다는 그들의 육체가 완전히 불 타 없어져 버려 금새 죽어버릴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그의 반박이다. 그는 영혼이 불멸한다는 사례를 들어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영원히 사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DCD ⅩⅩⅠ. 3~7). 또한 그는 영원한 처벌이 가능하며 정당할 뿐 아니라 이를 피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는 것을 각각의 단계를 밟아가며 설명한다. 이에 더불어 참된 신앙이 없는 이교들의 덕은 화려한 악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도 했다. 

3-3 마침내 그의 ≪신국론≫ 22권에 이르러 예루살렘의 영원한 축복을 받은 성자들의 내용을 살펴볼 수있다.  그는 기독교도라면 인간의 육체가 천상에서 존재할 가능성을 부정하면 안된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축복받은 자들의 약속된 영원한 삶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이러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믿을 만한 것으로 보이기 위해 신의 전능함으로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육체의 부활이라는 개념 전반에 관해 철학적 비판자들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반드시 답할 필요를 느끼기도 했다.

3-4 ≪신국론≫의 거의 모든 내용은 성서에 의존하지만 철학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적 전통과는 별개로 자신의 종교관을 세우려 노력했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고, 훗 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를 넘어서까지도 철학적 논의의 체계를 제공한 성서적이며 고전적인 요소를 처음 생각해 낸 것이 두 번째 이유다. 그는 철학사를 통틀어 흥미로운 인물 중 하나였다. 그의 글은 뛰어났으며 중세의 다른 철학자와는 달리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일화와 풍자나 역설등 또한 자세히 드는 정성을 들였다. 또한 철학적 문제들을 끝까지 추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사학적 표현을 지나치게 사용했다는 점과 만년에 이르러 진정한 논리 분석과 언어상의 기교 사이의 차이점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에게 수사학과 논리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철학에서부터 이슬람과 유대 철학자들

 

1.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철학

1-1.  시대적 상황

로마제국의 외부적 상황에 큰 변화가 있었다. 마호메트가 633년 세상을 떠난 뒤로 10년도 체 되지 않은 시기에 이슬람교가 정복전쟁을 통해 종교를 많은 지역(페르시아 제국,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에 널리 전파하였다. 708~711년 북아프리카 맹주가 되었으며 스페인으로 교세를 확장시켰다. 이후 북유럽으로 진출하였는데 이러한 확장은 732년 프랑크족과의 전투에서 패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768년 샤를마뉴가 왕위에 오른 후 이슬람교도들을 피레네 산맥 밖으로 내몰았지만 조금의 영토가 줄어든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동쪽 지방의 점령을 통해 이탈리아에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샤를마뉴는 반란으로 쫓겨난 교황레오3세를 보호하고 다시 복위 시켰으며 800년 로마제국의 왕관을 받으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수립을 성립하였다. 814년 샤를마뉴가 세상을 떠난 이후 거의 모든 서유럽대륙의 기독교인이 이 제국 안에서 살게 되었다. 샤를마뉴는 표준적인 교육과 문화를 확립하려 노력하였다. 이것을 위해 왕립학교를 세우려 하였고 많은 학자들을 초빙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은 앨퀸이다. 앨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관심이 있었으며 논리학의 교과서로 <<변증학>>을 저술하였고 소수의 특권층에게 천문학을 선보였다. 이러한 9~11세기에 철학이 부활하였을 때 주 무대로는 샤를마뉴를 계승한 프랑크왕국과 이슬람교도들의 아바스 왕조가 있었다. 각 무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로는 서방의 요하네스 스코투스와 동방의 이븐 시나가 있다.

1-2.  인물: 요하네스 스코투스

아일랜드 출생으로 9세기에 활동하였다. 그는 종종 14세기의 둔스 스코투스와 혼동되는데 두 명의 영어 표기가 동일한 점 때문과 두 사람 모두 스코틀랜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혼동의 원인이 된다. 그렇기에 요하네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에리우게나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에리우게나는 샤를 궁전으로 갔는데 이는 샤를이 그리스와 관련된 것을 좋아하여 그리스어에 능통한 에리우게나를 총애하였다. 그는 궁정에서 자유의 7과목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이후 철학에 관심을 점차 가지었다. 그는 힝크마르 대주교의 초청으로 철학에 직접관여하게 되었다. 힝크마르가 그를 초청한 이유는 고트샬크의 이중 예정설(성자뿐만 아니라 죄인도 운명이 정해져있다)에 대한 반박을 하기 위해서이다. 에리우게나의 이중 예정설 반박은 매우 빈약했으며 기존의 예정설에 대한 것까지 무너뜨리는 듯 보였다. 그 반박내용으로는 신의 단일성과 나누어지지 않음으로 이중예정설의 성립 불가를 주장하며 나아가 신의 영원성으로 미리 정해진 운명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빈약한 이유는 이중예정설이 신의 단일성을 위협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고 반박의 논거가 죄인의 회개할만한 동기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신의 작용에 시간상의 제약을 준다 해도 그 작용은 우리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이후 에리우게나는 공의회에서 파문당하였고 공의회는 기존의 예정설을 확고히 하였다. 그가 파문을 당한 후에도 샤를은 여전히 에리우게나를 총애하여 위 디오니시오스의 세 저술의 번역을 맡겼다. 그는 이것들을 번역하면서 신플라톤주의의 사상이 자신과 잘 맞음을 깨닫고 이와 유사한 체계로 자신의 사상을 구성하였는데 그 내용을 <<자연에 관하여>> 라는 5권의 저술에 담아 보였다.

1-3.  사상과 평가: 에리우게나의 사상과 평가

에리우게나는 자연을 4가지로 나누었다. 그 4가지는 1.창조하며 창조되지 않는 자연, 2.창조되며 창조하는 자연, 3.창조되며 창조하지 않는 자연, 4.창조하지 않으며 창조되지 않는 자연이다. 1번은 신이며 2번은 플라톤의 이데아로 이루어진 지적세계 3번은 2번에서 파생된 물질적 대상의 세계이고 4번은 최종목적으로서 만물의 돌아가는 것으로써의 신이다. 이러한 자연의 4가지 구분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의 구분이다, 그는 이에 따라 신을 존재하지 않는 것에 속한다고 하였는데 이 뜻은 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10가지 존재의 범주 안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뜻한다. 신은 존재를 초월하며 현존을 넘어서고 언어적 표현불가와 파악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름을 붙인다면 무이다. 그의 분류에서 가장 파악하기 쉬운 것은 3번 세계로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동일한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그는 우주가 세 개의 천구로 이루어짐을 주장하였는데 지구 해와 이외의 행성 달과 별이 그 구성요소이다. 에리우게나는 지구 중심설을 설파 했지만 지구외의 다른 행성들이 태양을 회전한다고 믿으며 태양중심설에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의 자연의 분류중 인간은 2,3번의 세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동물로서 3번째 세계에 속하지만 이성, 정신과 같은 것을 가짐으로서 동물을 능가하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두 번 창조되었다고 보아야한다. 이 말은 두 영혼을 지님을 뜻하는 것이 아닌데 인간은 오직 각각의 것으로 분리되지 않은 영혼 하나를 지니며 영혼이 신의 대리인으로 작용하여 육체를 창조한다. 따라서 영혼은 2번 세계에 속하며 이 분류의 것을 에리우게나는 사물의 근본원인으로 부르며 플라톤의 이데아와 동일시한다. 인간의 이데아는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질 때의 형상과 동일한데 이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손상되었다.

1-3-1.  그에 대한 평가로는 독창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인물로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한 사상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체계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역설을 즐겼으며 모순명제로부터 문장을 이끌어 내었다. 그는 이러한 모순명제의 사용으로 상호 조화적 해석방법을 제시하였지만 그 스스로가 자신의 말의 수렁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의 저술은 신 플라톤 주의적 내용 탓에 이교도철학으로 간주해 금서로 처분 받았다.

2. 이슬람과 유대 철학자들

2-1. 배경

이슬람 지역의 학자들은 그리스 학문의 대부분을 서방 라틴세계로 전해지는 우회로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비중이 크다. 이러한 이슬람 학자들에 배경으로는 4세기에 에데사 지역에 세워진 기독교학교에서 시작되었다. 489년 이학교가 폐쇄된 이후에도 페르시아로 이주하여 기존의 작업들을 지속하였다. 이후 이슬람교도들이 페르시아 지방을 정복한 후 여러 이슬람시대의 군주들이 이학교의 출신 학자들과 후계자들을 바그다드 궁정으로 초빙하였다. 이시기(750~900) 시리아 출신 학자들은 플라톤의 저술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대부분을 아랍어로 번역 하였고 다양한 의학 저서를 번역하여 이슬람 세계에서 통용하게 하였다, 인도의 수학과 천문학 저술 역시 번역되면서 아라비아 숫자가 들어왔다. 번역된 고대 그리스 철학은 이슬람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교의 사변신학은 이미 기본적인 철학용어를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리스 철학이라는 외래적 사상에 배타적 태도를 보였다.

2-2. 인물: 알 킨디와 알 파라비, 가온 사아디아

알 킨디는 전통적으로 이슬람 철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인물로 에리우게나와 동시대 사람으로 이슬람 사변신학과 외래 사상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였다. 그는 제일철학에 관한 저서에서 세계의 시간적 유한성에 대하여 사변신학적 논증이 매우 형식적으로 전개된다. 그는 단일한 우주적 지성의 작용에 의해 우리의 지성이 작용하게 됨을 주장하였는데 여기서 우주적지성은 신플라톤주의의 삼위일체설 중 정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알 파라비가 이 생각을 계승 발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는 문법과 논리를 명확히 구분한 후 논리를 철학을 위한 기초적 도구로 여기고 철학을 세분과로 나누었다. 세분과는 자연학 형이상학 윤리학으로 구성되며 신학을 철학과 별개 학문으로 생각하였고 심리학은 자연학의 일부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신학에 대해서는 최초 운동의 원인으로서 필연적 존재로 신이 현존함을 증명하는 철학적 논증을 사용할 수 있다. 그는 신비주의 교파의 일원으로 신으로부터의 회귀를 강조했다.

2-2-1. 알 파라비와 동시대 사람인 가온 사아디아는 중세 최초 유대인 철학자로 이집트에서 출생하여 바빌론에서 성서연구 학교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성서를 아랍어로 번역하였고 유대교의 전례와 전통에 관한 여러 저술을 남겼다. 이런 작업과 동시에 그는 성서의 교리와 이성적 철학의 조화를 꾀하려 노력하면서 이 두 가지를 같은 줄기에서 나온 가지로 생각하였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적 원천과 이슬람의 사변신학적 자료에 의존하였으며 <<교리와 신앙에 관하여>>라는 저술을 통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인간이 얻을 수 있는 확실성을 이성 감각 전통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보았다. 이성은 이성적 직관과 이성적 추론의 두 가지 종류가 있으며 이성적 추론을 통해 인간이 영혼소유와 우주의 원인 등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서로 예언자들에 의해 그 타당성이 입증되며 독립적 원천임에도 다른 원천에서의 지식을 염두하고 신중하며 사려 깊게 해석되어야 한다. 감각은 세계의 시작이나 현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에 이성으로 파악해야 하는데 그는 세계가 시간상의 어떠한 때에 창조됨에 대한 4가지 증명을 제시하였다. 1. 우주 안의 모든 것이 유한하기에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우주 역시 유한하며 계속 현존해온 것이라 볼 수 없다, 2. 우주의 구성요소는 복잡하지만 서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에 창조자가 존재한다. 3. 자연의 것들은 우연적이기에 필연적 실체가 필요하다. 4. 무한한 것은 파악하거나 추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간은 유한하다. 이러한 증명들은 필로포노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후세에까지 논의 되었다.

 

보이티우스의 위안부터 고대말기의 그리스 철학까지

1.보이티우스의 위안

1-1. 5세기에 이르러 로마제국은 주로 서쪽에서 외부의 침입을, 동쪽에서는 주로 신학적 논쟁을 함께 겪었다. 5세기를 거치면서 고트족과 반달족의 뒤를 이은 훈족의 아틸라 왕은 고트족의 왕과 연합한 로마장군인 갈리아에게 패할때까지 중국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또한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인간의 육체를 얻었다는 이른바 성육신(incarnation)의 교리에 대해 하나의 위격(person)인 그리스도가 서로 구별되는 두 본성을 가지느냐 혹은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을 모두다 가지느냐에 따라 공의회와 교황간의 논쟁이 있었다.   사상사의 측면에서 5세기 공의회 ‘위격’과 같은 전문 용어의 의미를 고심 끝에 통일함으로써 그 다음 세기에 전개된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1-2. 훈고족의 아틸라의 침략을 물리치긴 했지만 서로마제국은 그후 25년밖에 유지되지 못하고 이탈리아의 권력 대대분을 용병 지휘관에게 주고 말았다. 이 중 오도아케르(Odoacer)는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아우구스툴루스를 나폴리 근처로 추방했으며 그 후 50년 동안 이탈리아는 고트족의 지배를 받았다. 고트족의 왕은 기독교였지만 교리적 논쟁에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기독교 파들 중 아리우스파를 받아들였는데 이 교파는 오래전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이미 이단으로 판정받은 교파였다. 이 교파는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신인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 혹은 실체를 공유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고트족 왕중 테오도리쿠스는 아리우스파, 유대인, 정통 기독교 등 모두 평온을 유지하면서 관용을 베푸는 통치를 했으며 이를 통해 예술과 문화의 번영을 이루었디.

1-3. 이 테오도리쿠스의 장관 중 한 사람이 바로 보이티우스(Manlius Severinus Boethius)였는데 그는 상당한 권력을 지닌 로마 원로원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성실함과 탁월한 능력으로 행정의 최고직위인 ‘국무장관’이 되었지만 가톨릭교의 콘스탄티노플 황제 유스티누스 1세와의 편지를 주고받는 도중 반역을 의심받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유명한 저술 «철학의 위안»을 썼다.

1-3-1. 그는 이 책 첫 머리에서 철학을 위엄있고 다소 나이는 많지만 살결이 희고 금발이며, 더없이 정교하게 짜긴 했지만 무척 낡은 옷을 입은 여성을 철학으로 비유했다. 1권에서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비판에 맞서 스스로 옹호하려 한다. 그가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 까닭은 철학자라면 정치적인 일에도 적극적이어야한다는 플라톤의 명령에 따라 공직에 들어섰기 때문이라 한다.

1-3-2.  2권에서는 스토아학파적인 주제가 전개되는데 행운에 따라 좌우되는 것들이 우리 자신 안에 가치와 비교할 때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3권에서는 진정한 행복이 겉보기 좋은 것들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위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활용한다. 또한 4권에서는 ‘왜 사악한 자들이 번영을 누리는가?’라는 질문에 플라톤의 «고르기아스»를 통해 사악한 자들의 번영은 단지 외관상의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인다. 마지막 5권에서는 ‘신의 섭리가 지배하는 세계에 행운이나 우연같은 것들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신은 시간을 벗어난 존재이므로 섭리가 예지를, 즉 미리 아느 행위를 포함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방식을 취한다.

1-3-3. 그는 단지 이 저술을 통해 위안을 찾았기를 바랄뿐이었으나 극심한 고문을 당해 결국 곤봉으로 맞아 처형당했다. 그 후 많은 기독교들이 그를 순교자로 여겼으며 그를 성 세베리누스(St Severinus)라고 불렀다. 15세기 인문주의자였던 발라는 그를 ‘최후의 로마인인 동시에 최초의 스콜라철학자’라고 불렀으며 카토나 키케로가 진정한 동료라고 인정할만한 마지막 로마인이라고 말했다. 또한 «철학적 위안»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그가 높이 평가한 모든 요소를 모아놓은 일종의 자료집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 안의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와의 관계에 대한 그의 논의는 중세 기독교 시대동안 큰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스토아학파의 논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2. 고대 말기의 그리스 철학

2-1. 기독교의 관점에서 이교도 철학인 그리스철학은 보이티우스가 죽음을 맞아할 당시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의 철학 학교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 중이었다. 5세기 아테네 학교의 수장은 프로클로스(Proclus)였는데 그는 몇몇 플라톤 대화편에 주석을 쓰고 플로티누스의 «엔네아데스»에 관한 백과사전적 저술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적절한 개론서 역할을 하는 «신학원리»를 쓰는등 활발한 저술활동을 했다.

2-1-1. 그의 체계는 일자와 정신, 영혼이라는 세 요소로 이루어진 플로티노스의 사상에 기초한다. 이 세 요소의 내부에는 각각 일종의 발전 과정이 진행되는데 이는 원래의 요소가 지녔던 본성을 공유하면서도 원래의 요소와는 다르다.  자신의 근원 안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 나아가 다시 근원으로 돌아온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영혼,정신, 일 자의 세계 모두에 걸쳐있다. 인간의 영혼은 동물적 육체와 결헙해 에로스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며 인간 영혼 안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 진리에 대한 탐구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있다. 또한 영혼은 사고 능력보다 높은 능력도 지니는데 이를 사용해서 신비적이고 무아적인 경제에 도달해 일 자와의 합일을 추구하기도 한다. 이 이론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설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사실 그는 기독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다.

2-2.  5세기 알렉산드리아에는 막강한 권력을 쥔 기독교 대주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교도 철학이 아테네에 비해 번성하기 힘들었지만 신플라톤주의자이자 수학자, 천문학자 그리고 당대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철학에 우뚝 선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Hypatia)가 있었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쓰고 있을 때 광신적인 기독교 폭도들에 의해 사지가 찢겨 죽었다.그리고 플로클로스의 알렉산드리아 철학학교의 마지막 철학자인 암모니오스(Ammonius)도 있었다. 이 두 철학자는  로마법 대전을 편찬한 입법자이자 정복자인 유스티아누스 1세의 치하에서 활동했다.

2-3. 아테네 철학학교는 프로클로스의 반기독교적인 신플라톤주의를 게승했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에서 탐탁찮게 여겨졌다.  이 학교의 마지막 학자인 심플리키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의 저술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소크라테스 이전까지의 철학자의 말을 폭넓게 인용하여 이 후 철학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529년 아테네 철학 학교는 반기독교적인 경향을 이유로 유스티나아누스 황제에게 폐쇄당했다.

2-4. 플로포노스와 심플리키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박해받았지만 그 이유는 각각 달랐다. 필로포노스는 심플리키우스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를 잘 알면서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기독교도로서 세계가 영원하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세계에는 시초가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프로콜르스 주장을 뒤집으려 했다.  또한 그는 많은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들들처럼 성육신의 과정에서 그리스도가 오직 하나의 본성만을 지닌다는 단성론자였다. 이에 대해 황제는 그를 소환해 성육신에 대한 견해를 옹호하라고 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황제보다 몇 해 더 살았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이단적인 가르침을 이유로 파문당했다.

2-5. 필로포노스가 죽은 후 두 세기 동안 철학은 동면에 빠져들었으며 600년에서 800년 사이에 로마제국은 그리스나 발칸 반도의 여러나라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수준으로 떨어졌고 지적인 재능이 주로 신학적 논쟁에 소비되었다. 필로포노스가 속한 단성주의 교회는 이에 반대하는 정통교회에 의해 축출되었다.  하지만 본성이 두 가지여도 의지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하나의 현실태로 결합할 수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그는 기독교 교단을 재결합하려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흔히 고백자라고 알려진 막시무스는 ‘그리스도 단일 의지론’에 대항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의지와 현실태 개념을 상세히 분석하면서 그의 독창적인 연구를 남겼다.

 

 

[중세 철학] 1장 분량 공지

중세철학 1장 분량 공지입니다

철학과 신앙 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나라까지 – 동철선배

보이티우스의 위안 부터 고대 말기의 그리스 철학까지 – 서연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철학 부터 이슬람과 유대철학자들 까지- 선식

이븐 시나와 그 후계자들 부터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까지- 다영언니

아벨라르  부터 마이모니덷스까지 – 창묵선배

짧게 짧게 요약해서 담주 화욜날 봅시당!

8장.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윤리학 부터 행복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까지

1.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윤리학

1.1.초기 그리스철학자들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 중에는 도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 많다. 예컨대, 탈레스는 ‘네가 대우받기를 바라는 대로 너도 행하라’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며, 어떻게 해야 최선의 삶을 살수 있는냐는 질문을 받고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했을 때 비난받을 만한 일을 우리 자신이 하지 않으면 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신비적이고 애매한 언급을 하곤 했는데 예컨대 ‘인간이 원하는 바를 모두 얻는다해도 이는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 ‘어떤 사람의 성격은 그의 운명이다’고 말했다.  그 외 다른 철학자들도 특정한 도덕적 문제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드러냈지만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름대로 도덕적 체계를 갖춘 철학자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2.도덕철학자 데모크리토스

2.1. 데모크리토스는 윤리적 주제에 대한 많은 언급을 남겼다. 그의 단편들 중 60여 쪽이 도덕적 충고인데 대부분은 일상의 삶에 관한 소박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자산의 능력을 넘어서는 임무를 맡지 말라, 부와 명성을 부러워하지 말라, 자신보다 처지가 나쁜 모든 사람을 생각하라 등 충고가 등장한다. 그의 조언은 자주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는데 ‘아이를 낫지 않는 편이 낫다’라는 말과 함께 그는 스스로 아이를 낳기 보다는 친구의 양자를 들이는게 낫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다른 말 ‘일상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아이를 낳는다면 어떤 아이가 태어나든 만족해야만 한다’라는 말과 상충한다.

2.2. 플라톤 이래로 많은 도덕철학자들이 육체를 영혼을 타락시키는 존재로 보는 반면 그는 정반대의 견해를 보였다. 만약 영혼이 육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영혼에 있는 것이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육체가 영혼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해도 도구가 나쁜 상태를 보이는 것은 도구 자체가 아니라 그 소유자에게 비난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2.3. 데모크리토스의 도덕적 견해는 일련의 경구나 격언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지만 그가 체계적인 윤리학을 전개하였다는 몇몇 증거들도 있다. 하지만 그의 도덕적 견해가 그의 원자론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호하다.  그는 삶의 목적에 관한 저술을 쓰면서 행복(eudaimonia)의 본성을 탐구하였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부유함이 아니라 영혼의 선함에서 발견되며. 우리는 유한한 것들에서 쾌락을 찾아서는 안된다.  또한 그는 교육받은 자들의 희망이 무지한 자들의 부유함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러나 행복안에서 발견되는 영혼의 선함은 고귀하고 신비한 종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이상은 오히려 즐거운 삶과 조용한 만족에 가까웠으며 이런 이유로 그는 후대에 웃는 철학자로 알려졌다.

2.4. 그는 뒤이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일종의 모범을 제공했다. 예컨대 ‘죄의 원인은 더 선한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조언은 소크라테스의 도덕 사상의 핵심을 이미 드러낸 것을 보여준다. 또한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보다 나쁜 일을 당학는 편이 훨씬 낫다’라는 말에서 후에 소크라테스가 일종의 원리로 발전시킨 생각을 이미 제시했다. 하지만 이 원리는 행위를 결과로 판단해야하고  행위자가 누구인지 확인해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공리주의와 같은 도덕체계와는 양립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2.5. 하지만 데모크리토스는 고대 그리스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아르테(arete) 또는 덕에 관하여 탐구하지 않앗다. 이 단어는 영어의 어떤 단어와도 일치하는게 없기 때문에 최근에는 이 덕을 ‘virtue’ 대신에 탁월성이라는 뜻의 ‘excellence’를 자주 사용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말이나 칼에 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치게 고풍스러워 어색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들 둘이 지닌 개념적 구조상 차이는 고대의 도덕철학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난점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3.덕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견해

3.1. 덕의 본성에 관한 체계적인 탐구를 시작한 인물은 소크라테스인데 그는 덕을 도덕철학의 핵심에, 더 나아가 철학 전체의 핵심에 놓았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는 특히 여러 덕목들이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에우티프론»에서는 경건함(hosiotes)이,  «카르미데스»에서는 절제(sophrosyne),  «라케스»에서는 용기(andreia),   «국가» 1권에서는 정의가 논의된다.

3.2이들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문답(elenchus)을 통하여 그 안의 인물들이 만족스러운 정의를 제시할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각 대화편은 결론 없이 끝난다. 하지만 위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무지를 고백한다고해서 소크라테스가 도덕적 덕들에 대한 어떤 확신도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무언가를 지식으로 간주하는데는 무척 높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3.3. 소크라테스는 덕의 본성을 탐구하면서 거듭하여 덕을 목수일,항해술, 의술 등 전문적 기술이나 기예 또는 산술학과 기하학 같은 학문과 비교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고대에서 부터 현대까지 이어졍왔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로 지적될 수 잇다.

하나는 만일 우리가 지성과 의지를 뚜렷하게 구별하는 것은 수 많은 세대를 거쳐 철학적 반성의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며 이 최초의 반성에 원동력을 부여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덕들과 여려 형태의 전문적 기술에는 중요한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 둘은 모두 타고나기보다는 태어난 후에 획득되며 둘 다 가치있는 특성에 속한다.그는 둘 모두 이를 지닌 사람에게 이익을 주장한다.

3.3.1 그는 이 둘의 사이의 유비를 계속 제시하면서 비교하며 대조하려하며 이 둘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검토하려 한다.  차이점 중 하나느 예술과 학문이 전문가의 가르침을 통해서 전수 될 수 있는 반면 덕을 가르칠 수 잇는 어떤 전문가도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또한 기술의 의도적인 실수가 저지른 사람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는 반면 덕을 갖추는데 의도적인 실패를 한 경우에는 이 행위가 무의식적인 실패보다 덜 나쁘다고 말하기에 매우 이상하게 들린다.

3.3.2. 그는 기술과 덕의 차이에 대해 논하면서 이 둘이 결국 동일시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앞에 말한 고의적인 문제에 대해 고의적으로 덕과 반대되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악행은 무지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한 지식 즉, 지혜(phronesis)없기 때문이다.

3.3.3. 또한 덕을 가르치는 교사가 없는 이유는 덕이 일종의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히 습득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지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식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전제를 제시한다. «프로타고라스»라는 제목의 대화편에서는 그는 선은 쾌락과, 악은 고통과 동일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만약 쾌락과 선이 동일한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사람들은 선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악을 저지른 셈이 되는 것이고 이는 불합리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3.3.4. 하지만 위의 전제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어떤 행위가 악하다는 지식은 그 행위의 결과를 고려했을 때 쾌락보다 큰 고통을 낳는다는 지식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른 행위를 하는 사람은 이런 지식이 부족함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쾌락과 고통, 현재와 미래의 크기를 비교하고 측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식이며 이런 선택이 바로 정의,절제,용기라는 덕들 각각의 서로 동일한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4. 정의와 쾌락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

4.1. ‘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진정으로 쾌락의 계산에 대 생각했는지는 학자들간에 일치하지 않는다.그러나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정의란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조화라고 주장한다. 우리 영혼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경우에만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는 정의로운 역할이라는 것이다.  즉 절제를 가진 일반시민, 용기를 가진 수호자, 지혜를 가진 통치자들이 각 계층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정의인 것이다.

4.2. 쾌락과 덕 간의 관계에 대해 대화 초기편에서는 쾌락은 덕의 목적이 아니라 영혼의 하위 부분이 동반하는 바로 드러나며 정의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이익을 준다는 결론은 보인다.  그러나 이는 잠정적인 결론이다. 왜냐하면중반부에 이데아의 역할이 해명된 후에는 정의로운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설명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영혼을 지혜로 가득 채우는 일은 그저 정욕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보다 훨씬 더 기쁨을 준다. 그는 정욕,기개,이성 중 어떤 요소가 그의 영혼을 지배하는가에 따라 탐욕스러운 인물, 야망을 가진 인물, 학문적인 인물로 분류되는데 이들 중 학문적인 사람인 철학자의 판단을 가장 선호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경험과 통찰, 추론 등에서 다른사람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4.3.하지만 플라톤은 아직 쾌락의 계산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 군주가 사악한 참주보다 729배나 행복한 삶을 산다는 논거를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대화편 «펠레보스»에서 쾌락이 최고 선이라고 주장하는 프로타르코스와 지혜가 쾌락보다 우월하며 우리를 행복으로 더욱 잘 인도한다고 보는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쾌락도 지혜도 행복한 삶의 본질이 아니라 두 요소가 적절하고 혼합된 삶만이 진정으로 선택할 가치가 있다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최고선은 쾌락과 지혜가 적절한 비율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5.행복에 관한 아리스토테레스의 견해

5.1. «필레보스»에서 제시된 좋은 삶의 기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좋음은 다른 목적들과 비교해 볼 때 더욱 완전하여야만 한다-즉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항상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되어야한다. 또한 그것은 자기 충족적인 것, 즉 오직 그 자체만으로 삶을 가치있게 만들며 더 이상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것이어야한다. “라고 하며 이것이 바로 행복의 속성이라고 말한다.

5.2. 그에게 좋은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지혜,덕,쾌락,명예,평판, 부,교양’이라는 7가지 후보로 내세운다. 또한 어떻게 이에 도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본성을 통해서, 배움을 통해서, 훈련을 통해서, 신의 호의를 통해서, 행운을 통해서’이라는 5가지 후보를 등장시킨다. 그러나 두번째 대답에 그는 몇가지를 배제한다. 왜냐하면 본성,행운,신의 은총으로 행복이 실현된다면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5.3.그러므로 그는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으려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무언가가 존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목적 중 하나는 쾌락이며 술,음식,성행위와 같은 동물수준의 쾌락이 아닌 미학적,지적 쾌락을 추구해야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좋은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지혜와 덕,쾌락으로 압축하여 제시한다. 이들은 각각 철학적,정치적,향락적 삶으로 드러나는데 이들이 행복과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보았다. 이 세 요소가 지니는 매력을 적절하게 결합함으로써 행복이 전통적인 삶의 형태에서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5.4. 그는 행복에 이르는 결정적인 단계를 설명하면서 윤리적인 영역에 잠재성과 현실성이라는 형이상학적 분석을 도입한다. 그는 어떤 상태(hexis), 활용(chresis), 발휘(energeia)를 구별하면서 덕과 지혜는 모두 상태인 반면 행복은 일종의 활동이므로 덕이나 지혜를 바로 행복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행복을 구성하는 활동은 덕의 활용 또는 발휘이며

 

스토아학파의 인식론부터 피론의 회의주의까지

1.스토아 학파의 인식론

1-1.초기 스토아 학파는 지식의 본성에 관한 많은 가정들을 에피쿠로스학파와 공유하였다. 에피쿠로스학파와 마찬가지로 스토아학파도 지식의 기초를  두 가지, 오류에 빠질 수 없는 감각적 인상과 원초적, 후천적 개념들이라고 믿었다. 또한 스토아 학파는 개념의 근원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한 설명을 하는데 그에 따르면 한 사람이 태어날 때 그의 정신은 텅 빈 백지같지만 그가 이성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개념이 이 백지 위에 쓰여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최초의 개념은 감각들에서 유래하며 이 경험들이 기억에 남는다. 몇몇 개념들은 자연적으로 생기기도 하는데 이를 ‘프롤렙시스’라고 부른다.  이 개념은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것이다.

1-2. 스토아학파는 에피쿠로스학파에 비해 인간의 정신적 상태에 대한 분류를 훨씬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그들은 회의주의에 맞설 수 있을만한 인식론을 제시했는데 플라톤이 대비했던 지식(episteme)과 의견(doxa)이라는 상태에 ‘인상(katalepsis)’을 도입한 것이다.  섹스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이 문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인상을 인식적 현상(phatasia kataleptike)과 관련해서 정의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서로 연결된 세 가지가 있는데 지식과 의견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인상이 바로 그들이다. 지식은 건전하고 확고하며 논증에 의해서 변화될 수 없는 인식이다. 의견은 근거가 약하며 거짓인 동의이다. 이들 사이에 인상이 위치하는데 이는 인식적 현상에 대한 동의라 할 수 있다.”

1-3. 위와 같은 현상이란 폭넓은 용어로서 감각에 드러나는 바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의견을 갖도록 하는 근거까지 포함한다. 인상 또한 마찬가지로 감각에서 유래할 수도, 이성에서 유래할 수 도 있다. 인상은 지식과 의견 사이에 위치하는데 의견은 일종의 특별한 요소인 동의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상은 의견과 달리 거짓일 수 없으며 또한 지식과 달리 결코 우리의 마음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힘을 포함하지 않는다. 고로 인식적 현상이란 ‘존재하는 바로부터 생겨나며, 존재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게 각인된 인상을 주는것’이다.

1-4. 스토아학파는 인식적 인상을 설득력을 기준으로 네 유형으로 분류한다.

(1)설득력이 있는 인상: ‘지금은 낮이다’,  ‘나는 말하는 중이다’

(2)설득력이 없는 인상: ‘만일 어둡다면 지금은 낮이다’

(3)설득력이 있는 동시에 없는 인상: 철학적 역설들

(4)설득력이 있지도 없지도 않는 인상: ‘모든 별들의 수는 홀수이다’

 그러나 설득력이 진리를 보장해주는 기준은 아니다. 현명한 사람은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합리거이기도 한 현상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이 문제가 복잡한 이유는 인상적 인상 뿐만 아니라 합리적 인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르케실라오스는 스토아학파의 인식적 인상인  ‘어떤 것이 존재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게 각인된 무언가’라는 정의를 비판한다. 그는 과연 참인 인상과 구별될 수 없는 거짓 인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제논은 만일 정확하게 일치하는 거짓인상이 존재하면 그런 인상은 인식적 인상알 수 없다고 동의한다. 그래서 그는 인식적 인상에 대한 위의 정의를 수정하여 ‘존재하지 않는 바로부터는 생겨날 수 없는 종류의 인상’이라는 점을 더한다.

2.아카데메이아의 회의주의

2-1.스토아학파의 인식론이 회의주의 진영으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유산을 이어받은 아카데메이아로부터 제기됬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예를 들면 아카데메이아 지도자중 아르케실라오스나 그 후계자 카르네아데스는 플라톤보다 위쪽인 소크라테스에 의지하면서, 그의 문답법이야말로 지식에서 거짓문장을 걸러 내는 탁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소크라테스과 달리 훨씬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일상적 문제에 대해서도 판단을 중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2-2. 회의주의에는 여러단계들이 있다.  어떤 회의지주의자들은 그저 진정한 지식의 성립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이런 회의주의자는 다양한 주제들에 관한 의견을 지니는 것에 단, 의견의 소유자가 의견이 지식의 지위에 도달했다고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또한 그 자신도 지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포함한 일련의 의견을 얼마든지 지닐 수 있다. 이때 그 사실을 인식하였다고 주장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보다 더 극단적인 회의주의자들은 지식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의견의 적절성까지도 의문시한다. 이들은 확실성에 대하여 확고한 동의를 표하는 일뿐만  아니라 어떤 의견에 대하여 잠정적인 동의를 표하는 일도 삼가야한다고 권고할 듯하다.

2-3.이 극단적인 회의주의에  ‘회의주의자가 모든 판단을 유보한다면 어떻게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겠는가’라고 흔히 제기되는 반박에 그들은 충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다.  동의는 의지와 관련해 스스로 자제할 수 있지만 현상은 우리의 통제 밖에 놓여있으며 현상에는 반드시 충동이 뒤따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진리를 발견하고 거짓을 피하려는 정신적인 작용인 동의가 없어도 이런 충동에 따르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3.피론의 회의주의

3-1.기원전 1세기 무렵 철저한 회의주의를 내세우는 새로운 근본주의 학파가 성장하였는데 이 학파의 창시자는 아이네시데모스다.  이 학파의 창시자들은 엘리스 출신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 소속 군인인 피론을 진정한 창시자로 여겼다.

3-2.  기원후 2세기에 활동한 피론주의 회의주의자인 섹스토스는 그가 우리에게 전한 아케데메이아의 회의주의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느 회의주의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동의를 표시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일상적인 지각의 문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견해를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저술이 가치있는 까닭은 회의주의 논의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한 게 아니라 초기에 등장한 더욱 독창적인 회의주의자들의 추론 방식에 관한 많은 귀중한 정보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3-3. 우리는 고대의 인식론을 연구함녀서 지식의 본성과 회의주의의 한계 등에 대하여 많은 것은 배울 수 있다. 특히 다음 몇 지의 통찰은 이후 모든 철학에 전해진 유산이 되었다. 먼저 오직 참인 것만이 지식이 될 수 있다. 지식은 오직 무언가에 의해, 경험이든 추론이든 혹은 다른 근거에 의에 암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지지될 경우에만 지식일 수 있다. 그리고 지식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후에 자신의 지식이 뒤집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한다. 그러나 이 인식론은 두 가지 오류에 빠져있다. 두 오류 모두 무엇이든 간에 지식은 참이어야만 한다는 진리를 오해한 결과로 등장하였다.

3-3-1.첫 번째 오류

‘무엇이든 간에 지식은 참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필연적으로 만일 p가 인식된다면 p는 참이다

(2)만일 p가 인식된다면 p는 필연적으로 참이다

여기서 (1)은 참이지만 (2)는 거짓이다. 이 오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까지 이어지는 고전적인 인식론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거듭해서 (2)를 (1)과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3-3-2.두 번째 오류

무엇이든 간에 참이어야만 한다면 지식은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 능력을 발휘한 결과여야만 하는 듯이 보인다. 이 오류는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제국 시대의 인식론에서 자주 발견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학파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평범하고 우연적인 일도 지식으로 인정하려 한다. 그러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작용하는 능력을 우리가 지닐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오류는 이 전 고전 시대의 오류를 거울에 비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3,6장 분량공지 수정!!!!!

(3장 논리학이 너무 양이 적어서 4장까지 분량으로 잡았습니다.)

라고 저번에 말했지만 스터디때 교수님과 상의한 결과

3장 논리학과 5장 자연학은 빼고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동철선배, 선식, 저 빼구 다영언니랑 묵묵선배만 분량이 수정!

이제부터 분량공지는 여기다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6장 존재하는바:형이상학 부터 플라톤의 이데아와 그 문제점들까지 – 창묵선배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부터 존재와 현존까지 – 다영언니

지식과 그 한계 : 인식론 부터 «테아이테토스»에서 논의되는 지식 – 동철선배

지식과 이데아 부터 에피쿠로스학파의 인식론까지 – 선식

스토아학파의 인식론 부터 피론의 회의주의까지 – 서연

저번에 공지한 건 내일까지 마무리하고 이번껀 다음주까지 해오시면 됩니다. 모두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연대(年代)에 관한 여러 학설들

  • 연대(年代)에 관한 여러 학설들

예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전에 관한 책을 쓰고 난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연구가 여러 학설을 토대로 발전하고 있다. 예거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사상은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청년기는 그의 스승인 플라톤과 가까우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플라톤에서 점차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의 저작과 후기의 저작을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a)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 저작들은 대화편들이라 할 수 있다. 이 대화편에서는 아직 아카데미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다분히 플라톤적이라 할 수 있다. b) 과도기 시절의 저작들도 아직은 플라톤의 사상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저작들은 원래적인 자연학(「자연학」 1ㆍ2ㆍ3권, 「천계론」, 「발생과 소멸」), 원래적인 형이상학(「형이상학」 1ㆍ3권, 11권 1-8장, 제8장을 제외한 12권 전부, 13권 9장-10장, 14권), 원래적인 윤리학(에우데모스윤리학 1ㆍ2ㆍ3ㆍ5권) 및 원래적인 정치학(「정치학」 2ㆍ3ㆍ7ㆍ8권)등이다. c) 이 시기가 지난 리케이온 시대에 와서야 플라톤의 영향을 벗어나게 되는 데, 이 때 그의 저작 「형이상학」 7, 8, 9권에서 형이상학을 초감각적인 세계가 아닌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로 파악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집필된 심리학, 윤리학, 정치학도 현실과 떨어져 있지 않게 된다.
Hv. 아르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발전을 예거의 그것과는 다르게 본다. 「형이상학」의 11ㆍ12ㆍ14권이 초기의 것이고, 그 이외의 권들이 리케이온시대에 속한다고 본다. 따라서 예거가 후기에 속한다고 본, 7ㆍ8ㆍ9권도 1ㆍ3권과 같은 시대의 것으로 본다. 또 「대윤리학」이 「에우데모스윤리학」 대신에 원래적인 윤리학이며, 「에우데모스 윤리학」은 두 번째로 아테나이에 머물렀던 시기의 것이라고 본다.
W.D. 로스는 예거의 사상과 비슷하다. a) 아카데미아시대 : 플라톤을 본받은 대화편. b) 아소스, 레스보스 및 마케도니아 시대 : 플라톤의 영향력이 짙은 시기로 이런 사상을 드러내는 이 시기의 저작들로는 「자연학」, 「천계론」, 「발생과 소멸」, 「영혼론」 제 3권, 「에우데모스윤리학」, 「형이상학」, 「정치학」의 오래된 부분, 「동물지」의 오래된 부분이 있다. 이 때 「형이상학」의 오래된 부분이란, 1ㆍ5ㆍ11권 1장-8장ㆍ12ㆍ14권을 말하고, 「정치학」의 오래된 부분이란 7ㆍ8권을 말한다. c) 리케이온시대에는 「형이상학」, 「니코마코스윤리학」, 「정치학」 및 「수사학」, 국가헌번의 수집, 「기상학」, 심리학적 저작들과 생물학적 저작들이 완성된다. 로스가 말하는 요점은, 「다른 세계, 즉 저쪽 편에 있는 세계로부터, 자연과 역사의 구체적인 요인들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고, 세계의 형상과 의미가 질료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질료 속에 뿌리박고 있다고 확신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스는 플라톤에게서도 이러한 발전을 찾아볼 수 있다고 본다. 다만 플라톤은 거꾸로 이데아의 초월성을 강화시킴으로써 「초감각적인 것」을 전적으로 분리시킨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초감각적인 것에서 감각적인 것으로 다시 옮겨간다고 한다. 그런데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분리」란, 전면적인 분리가 아니라, 일정한 견해에 따라 행해지는 특수한 분리이다. 로스는 이러한 초감각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형이상학의 개념을 잘못 이해한다. 이러한 잘못된 개념은 문헌사적인 개념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올케의 이론은 또 다르다. a) 40세까지는 플라톤적이다. b)아테나이에서 아소스로 옮겨간 후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스로의 윤리적ㆍ정치적인 생각을 형성하기에 전념한다. 이 때에 「대윤리학」, 가장 오래된 「논리학」, 형이상학에 관한 여러 책이 나온다. 그러나 그는 철학적으로는 아직 「이데아론」의 바탕 위에 서있다. c) 아테나이로 되돌아온 후 그의 철학은 구체적이고 개체적인 실체를 대상으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可能態, Dynamis)의 개념을 뚜렷하게 드러냄으로써 옛날의 형상개념(Eidosbegriff)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고올케가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뚜렷한 변화는 그가 신학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예거가 말하는 것과는 반대된다. 형이상학에 관한 고올케의 연대기는 다음과 같다. 형이상학에는 네 가지의 층이 있다. 1)초기의 형이상학(1권 1장-9장, 3ㆍ4ㆍ5ㆍ7권, 구고(舊稿)와 10권), 2)중간기의 형이상학(1권 1장-7장과 10장, 2권-6권, 8권의 구고, 10ㆍ13권 1086a 21이하 14권), 3)소위 초안(草案, 11ㆍ12권), 4) 개고(改稿)를 시작했을 때의 형식. 이것은 중간기의 형이상학, 특히 제7권과 완전히 새로운 부분(2ㆍ8권, 13권의 1086a 21까지)에 대한 보충임이 분명하다. 자연학에 관한 그의 연대기는 다음과 같다. <움직여지지 않고 움직이는 자>라는 개념이 들어있지 않은 1ㆍ5ㆍ6권에서 8권까지의 구고, 2권에서 4권까지, 마지막으로 8권의 신고와 전체의 총괄.
M. 분트(Wundt)는 많은 점에서 고올케와 일치한다. 그도 역시 리케이온시대의 초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하나하나의 사물을 원래적인 뜻의 존재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이 문제란 바로 다른 종류의 실체, 즉 초감각적인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구체적인 개별자와 보편자라는 양극 사이에 끼여들게 될 수도 있다. 이 개별자에 해당되는 것은 이오니아학파가 문제삼았던 질료와 운동 및 여러 원리들에 관한 문제이고, 보편자에 해당되는 것은 이탈리아 철학과 플라톤의 철학이 문제삼았던 존재 그 자체와 형상 및 보편적인 에이도스(Eidos)에 관한 문제이다. 「자연학」 2권과 「형이상학」 4ㆍ6ㆍ12권에 나타나 있는 플라톤적인 층은, 보다 뒤에 와서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처음으로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한 쌍의 개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뒤에 와서야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해낸 개념이다. 「자연학」1권과 「형이상학」1권 1-2장 및 5권에 나타나 있는 이오니아적인 층은 진작부터 있었다. 우 두 가지의 사상의 영역이 대립하는 데서, 형이상학의 아포리아들이 생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개념들을 가지고서 이 아포리아들을 해결하려고 한다. 이 두가지의 개념을 포함하지 않은 책들은 포함한 책들보다 오래된 것이다. 「형이상학」의 6권과 12권이 보다 더 후기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움직여지지 않으면서도 움직이는 자>라는 개념이 더 후기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형이상학」 제7권의 첫머리에 실체란 제일실체이며 이렇게 됨으로써 형이상학이 추구하고 있는 대상이 주어진다는 근본사상이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형이상학의 뜻은 감각적이고 제약되어 있는 개별적인 실체를 제일 처음에 움직이는 자로서의 무제약적인 실체에로 이끌어올리는 데 있다.
J. 씰르허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전체 중에 순수한 것은 플라톤의 철할뿐이다. 그 나머지 것들은 후세에 테오프라스트가 가필을 한 것이라 주장한다. 이 테오프라스트는 30년간 스승의 원고를 정리했는데, 그러는 동안 원고들을 철저히 고쳤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A. 지식과 학문

  1. a)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탄생시키고, 고전적인 완성까지 이루었다. 이러한 완성도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온다. 논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사상은 「분석론」에 포함되어 있는 데, 분석론이라는 말처럼 논리학은 인간의 사고와 언어를 분석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이 여러 가지 요소들과 기본적인 기능들로 이루어진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구될 수 있고 기술될 수 있다 생각했다. 이 여러 가지 요소들이 바로 개념ㆍ판단 및 추리(推理) 속에 있다고 보았는 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 가지를 기술하고 분류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양한 경험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였을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분류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이론적인 관심 뿐 아니라 실천적인 관심으로 논리학을 전개시켰다. 이러한 실천적인 관심은 그가 반박할 여지가 없는 학문적인 사고와 증명, 그리고 반론 등을 제시하려고 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런 작업은 「토피카」와 「궤변론」을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그가 가지고 있던 물음은 형식적으로 볼 때, 우리들의 사고수단이 도구로서 얼마나 알맞으냐 하는 것뿐만 아니라, 과연 그것이 파악해야 할 바의 것을 파악하느냐 하는 물음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들이 말하는 인식론이기도 하다. 최근에 이르러 논리학의 현대적인 형식인 논리 계산(Logistik)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여 그가 이미 논리학의 정교한 형식에 접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의 형식논리학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는가를 그의 논리적인 사고의 발전과 함께 개관해보려는 시도도 행해졌다. 이러한 시도에서 그의 초기 작품인 제 1기의 논리학에서는 아직 원시적인 논리학에 지나지 않았다는 결론도 내려졌다. 이 시기의 저작인 「분석론」, 「토피카」 및 「궤변론」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제 2기의 논리학은 8~22장을 제외한 「분석론 전편」의 제 1편과, 「후편」의 제1권에 들어있다. 이 제2기의 논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연적(實然的) 삼단논법을 완성하고, 변항(變項)의 개념을 도출함으로써 논리적인 기술의 비교적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된다. 제3의 논리학(분석론 전편, 1권 8-22장과 2권)에는 일종의 양상논리학(樣相論理學), 「놀랄 만큼 예리한 형식 논리학적인 통찰」을 갖추고 있는 삼단논법에 대한 초논리학적인 성찰(보헨스키) 및 변항이 없는 상항(常項)만을 포함하고 있는 언표(言表) 논리적인 명제들이 덧붙어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논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한테서 이어받아 왔던 것은 개념과 판단 및 추리에 관한 사상뿐이었던 것이다.
분석이 발견해 낸 궁극적인 요소는 개념이다. 「한 가지의 명제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요소들, 즉 명제의 대상(主辭)과, 명제가 언표하는 것(賓辭)을, 나는 개념이라 한다」(분석론 전편, 1권 1장, 224b). 즉, 개념이란 명제에서 주어부분과 주어를 규정하는 부분으로 나누어져있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념이란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개념은 항상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파악한다. 이러한 본질을 파악하는 속성이 개념으로 하여금 진리가 되게 만든다. 이러한 사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정식으로 용인되지는 않았지만 그 말 뜻에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판단의 단순한 구성요소가 아니라 존재를 자명하게 밝혀내는 것인 플라톤의 「실체의 로고스」가 하는 역할을 보아 분명해진다.
올바르게 형성된 개념을 정의(定議)라 한다. 정의란 「본질을 드러내는 말」(토피카, 7권5장; 154 a 31 및 101 b 38 비교)이다. 이렇게 하는 규칙은 다음과 같다. 정의는 유개념(類槪念)과 종개념(種槪念)을 지적함으로써 생긴다. 즉 정의는 한 가지의 대상이 한 가지의 보편적인 유(類)에 끼어 넣어지면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3이라는 숫자는 그의 보편적인 유(類)인 수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러나 많은 수들이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유(類)로서의 수는, 여러 가지 수들 중에서 3이라는 수만 생각되어질 수 있도록 또 다른 규정에 의해서 좁게 제한되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3을 특정짓는 특이성인 ‘최초의 홀수’라는 말을 통해 드러난다. 그래서 3의 개념규정이 「첫 번째의 홀수」(분석론 후편, 2권 3장)라는 것이다. 이렇듯 정의는 항상 종개념(種槪念)을 가리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