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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에 관한 데카르트의 견해

BY 전수민

우리 정신의 내용은 사고들이다. 데카르트는 ‘사고’라는 용어를 매우 폭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그는 지적인 성찰 뿐 아니라 의지, 지성, 상상력, 감각능력의 모든 작용을 비롯한 의식의 대상들을 사고에 포함시킨다. 감각능력과 상상력의 대상이 외부에 현존하지 않더라도 데카르트에 따르면 감각과 상상이라고 부르며 이들이 오직 사고의 양태인 한에서 확실히 우리의 안에 존재한다.

데카르트에게 이해된 감각은 오직 사고 작용뿐인데 육체가 없어도 가능한 이런 명백한 감각은 이후 철학자들이 ‘감각적 자료들’이라고 불렀다. 데카르트 체계의 유지 여부는 이 개념에 일관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결정된다.

‘제삼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사고의 여러 유형 중 하나를 추려 이를 ‘관념’이라고 부른다. 데카르트의 관념은 단어에 대응하는 정신적 요소로 말할 수 있다. 그는 어떤 단어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관념이 내 안에 있다는 점을 확신하지 못한 채 그 말을 이해하려 한다면 아무것도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데카르트는 관념을 본유관념, 외부에서 획득한 관념, 내가 만들어낸 관념으로 분류한다. 본유관념에는 사물, 진리 그리고 사고의 관념을 둔다. 외부에서 획득한 관념은 주로 우리가 감각적으로 획득한 관념들을 말하고 우리가 상상과 같은 관념을 내가 만들어낸 관념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자신의 정신 안에 형성된 이런 관념들의 근원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획득’ 관념들이 외부의 대상으로부터 생겨난 것인지 전혀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신의 관념은 데카르트의 정신 외부에서 생겨난 듯이 보이는 관념이다. 신의관념과 결합된 완전성은 다른 어떤 것에 비해서 우월하기 때문에 신의 관념은 결코 자신이 만들어 낸 허구일 수 없다. 그런데 어떤 관념의 원인은 반드시 그 관념 자체보다 더욱 실재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세계 안에 오직 그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관념에 대응하는 신이 실재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신은 데카르트가 자신의 정신 외부에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최초의 실재로 데카르트의 인식론체계가 구성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신은 결함이 없기에 우리를 속이지 않고, 이 원리는 데카트르를 회의주의의 미로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실마리역할을 한다.

신이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했으므로 우리가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모든 것은 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직관과 같은 순각적인 직관뿐 아니라 경험과 무관한 학문 전체를 확신 할 수 있게 된다.

데카르트는 ‘제육성찰’에 이르러야 물질적 사물들이 존재하며 자신이 육체를 지닌다는 점을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확립한다. 그러면서 지성과 상상력에 차이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하는데 상상력은 지성에 추가되는 여분의 능력이며 지성만이 정신의 본질적 능력이라고 여긴다. ‘지성은 작용할 때 정신을 자기 자신에게 향하여 자신 안에 포함된 어떤 관념을 고찰하는데 비해 정신은 물체로 향하여 자신이 이해한 관념과 유사한 물체 안에서 바라본다.’(AT VII.73 ; CSMK II.50)

현대의 철학자들은 데카르트가 정당화해야 하는 평범한 과학적 진리보다 신의 존재를 훨씬 더 의문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전혀 설득력 없는 것으로 여긴다.

만일 신이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면 내가 끊임없이 오류에 빠지는 일을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에 대한 반박에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우리의 능력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결코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는다. 나는 지성이라는 능력을 지니는데 이를 통해서 어떤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며 내가 지성이 제공하는 명석, 판명한 지각의 경우에 대해서만 의지의 판단을 적용하면 결코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을 것이며, 내가 명석, 판명한 지각에 이르기 전에 성급한 판단을 내릴 경우에만 오류가 발생한다.

또 아르노는 데카르트가 신에게 호소하여 명석, 판명한 지각을 보증하는 과정에 명백한 순환논증이 포함된다며,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앞서 우리가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모든 것은 참이라는 점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고 반박하였다.

이 반박에 대하여 데카르트는 특수한 명석, 판명한 지각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모든 것은 참이라는 일반 원리 사이의 구별에 의존한다며, 개별적인 지각이 참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데는 신의 성실성에 호소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다. 또 내가 지금 여기에 무언가로 존재한다는 점이 명석, 판명하게 지각된다는 사실을 회의할 수 없다 할지라도, 신의 존재를 확립하기 이전이라도 내가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모든 것은 참이라는 일반명제는 회의할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이 단순한 직관들을 지니는 동안에는 이들을 회의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을 확립하기 위한 어떤 논증도 필요하지 않다. 신의 성실성에 호소하는 일이 필요한 경우는 오직 일반 원리와 관련되는 경우와 개별적인 지각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회의하는 경우뿐이므로 데카르트의 주장은 순환 논증에 빠지지 않는다.

몽테뉴의 회의주의부터 데카르트 대응까지

1-1. 16세기에 접어들면서 회의주의를 새로 유행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등장했다. 유럽에서 서로 다른 기독교 교파가 충돌하고,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지닌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 또한 이 사실을 인지한 몇몇 사상가들은 진리를 주장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신념 체계가 존재하는 지 의문을 품었다. 또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를 비롯한 고대 회의주의자들의 저술이 발견 되면서 인간 인식 능력의 신뢰 가능성에 대한 논증이 주목되었다. 몽테뉴의 <<레몽 세봉을 위한 변명>>은 회의주의를 가장 세련된 형태로 드러낸 저술 중 하나다.

1-2.  몽테뉴는 극단적 회의주의를 선호했다.  아무 것도 인식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편 회의주의의 창시자 피론의 이름을 딴 ‘피론주의적 회의주의’를 선호했다. 몽테뉴는 감각과 지성의 오류 가능성을 보이기 위해 많은 예를 들었다. 주로 섹스투스의 저술을 인용했고, 논증을 진행하면서는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이용했다.  몽테뉴는 섹스투스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오류 가능성을 보이는 데 스토아학파의 논증을 사용하고, 경험과 무관한 지식의 불가능성을 보이는데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논증을 사용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두 학파 모두의 논증을 부정하고, 진정한 지식 따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3. 몽테뉴는 “귀가 눈에게 판결을 내릴 수 있는가? 촉감이 귀에게, 맛이 촉감에게 거짓말했다는 판결을 내릴 수 있는가?” 라는 루크레티우스의 유명한 대목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몽테뉴는 루크레티우스와 달리 감각들이 오류에 빠져 있다는 결론에 까지 나아가진 않는다. 그는 감각이 참을 전한다는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도 똑같이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 ME2. 253)감각과 이성은 서로 협력해 지식을 산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각각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한편 우리의 의지에 속하는 정념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지각하는 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어떤 기준이란 것이 필요한데, 그런 기준은 성립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몽테뉴는 고대의 회의주의가 축적한 업적에 몇몇 새로운 자료를 더한 것이다.

2-1.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철학을 16세기에 전개된 회의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다. 그는 우선 ‘제일성찰’에서 몽테뉴보다 정돈된 형태의 논증을 제시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내가 지금까지 진정으로 참이라고… 중략… 불 옆에 앉아 있다고 굳게 믿은 것이 어디 한 두번이던가! (AT 7.19; CSMK 2.13) “내가 지금 꿈꾸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래서 내가 눈을 뜨고 있다는 점, 머리를 움직여 본다는 점… 중략… 따라서 최소한 일반적인 종류의 사물들, 눈, 머리, 손, 신체 등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대상이어야만 한다. (AT 7.20; CSMK 2.14)  그는 꿈을 꾸는 대상들도 결국 상상이 만들어 낸 복합체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는 이런 물체를 구성하는 더욱 단순한 구성요소들 – 즉 연장성, 형태, 크기, 수, 장소, 시간 등- 은 반드시 실재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만일 그렇다면 이런 대상들을 다루는 산술학과 기하학은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며, ‘내가 잠자든 깨어있든 간에 둘에 셋을 더하면 다섯이며, 사각형에는 네 변이 있다. 이런 명백한 진리를 거짓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한 듯이 보인다.’ 는 논증을 펼쳤다.

2-2 그러나 수학도 데카르트의 회의 대상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이는 수학도 일종의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진리의 근원이 되는 최고로 선한 신이 아니라 최고로 강력하고 교활한 악령이 존재하며 … 중략…  단지 이런 것들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존재로 여기려 한다. (AT 7.23; CSMK 2.15) 데카르트는 ‘제이성찰’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논증, 즉 그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명한 논증에 도달함으로써 이런 회의를 끝낸다. 설령 아무리 전능한 악령일지라도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고 생각하도록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떠받치는 확고한 기초다. 언뜻 타당한 듯 보이는 논증이다. 그렇다면 이 논증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이에 대해 회의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생각하는 것이므로 ‘나는 생각한다’는 회의 할 수 없는 전제라고 답했다.

2-3 심각한 문제는 ‘나는 생각한다’에서 등장하는 ‘나’에 관련된 것이다. 일인칭 대명사는 그 대명사를 발언하는 사람의 육체와 연결되어 그 의미를 얻게 된다. 자신에게 육체가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회의하는 사람이 독백을 하면서 ‘나’ 라는 개념을 사용할 자격을 지니는가? 에 대한 문제다. 어쩌면 데카르트는 ‘사고가 계속된다.’ 라고 말할 자격 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이와 유사한 의문으로는 ‘나’와 관련된 ‘존재가 계속된다’이다. 비판자들은 회의 중인 데카르트에게는 지속적인 실체로서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이는 데카르트 자신의 표현을 빌리더라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라는 인간 전체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점. 그 자체로 그것은 오직 그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점을 증명할 뿐이라는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루소

 <<백과전서>>에서 음악과 관련되는 몇몇 항목의 글을 섯던 인물은 훨씬 더 멀리까지 나아가려 했는데 그가 바로 루소다. 1712년 제네바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고 칼뱅주의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16세때 도제 일을 하다 도망쳐 토리노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는 바랑 남작부인의 권유로 이루어졌는데 그와 1729년부터 1740년까지 살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루소는 달랑베르나 볼테르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750년 예술과 과학의 진보가 도덕에 유익한 결과를 낳았는지 묻는 현상 응모에 부정적인 논문을 써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에 확장해 4년후 <<인간불평등기원론>>을 발표했다. 두 저술의 주제는 인간성은 원래 선하지만 사회 제도 때문에 타락한다는 것이다. 루소는 ‘고상한 원시인’이 바람직한 인간상이라 주장했고 이는 과학적, 사회적 진보를 신봉하는 백과전서파 철학자들과 대치되는 것이었다. 볼테르는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인류에 반하는 책이라 하였다.
 루소는 세탁소 여종업원 테레즈 르바쇠르와 오랫동안 생활하며 당시 사회적 관행을 경멸하는 모습을 보였다. 루소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이들을 차례로 고아원에 맡겼다. 루소는 1754년 제네바로 돌아와 시민권을 얻기 위해 칼뱅교도로 다시 개종하기도 했다. 볼테르 역시 제네바에 정착했지만 두 철학자는 서로 좋은 이웃이 되지 못했다. 1756년 루소가 출간한 <<섭리에 관한 편지>>는 이를 증명하는 사례였다. 또한 1761년 <<도덕에관한편지>>를 출간하며 백과전서파 철학자들과 완전 결별했다.
프랑스의 작은 시골마을에 은거한 1758년부터 1761년은 루소에게 매우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는 소설 <<신 엘로이즈>>를 썼는데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다. 또한 두 권의 철학 저술도 썼는데 그중하나는 교육철학 <<에밀>.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철학을 다룬 <<사회계약론>>이다. <<사회계약론>>은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는 유명한 말로 시작된다. 두 저술은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주장 때문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파리와 제네바 모두에서 루소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됐고 루소는 스위스로 피신했다. 그러던 중 흄의 호의로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의 배은망덕한 태도 때문에 흄은 그에게 등을 돌렸고, 말년에 이르러 파리로 돌아와 생을 보냈다. 이 시기에 가장 큰 업적중 하나인 <<고백론>>을 써냈다. 출판은 사후에 되었다.
 1778년은 볼테르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하다.  만년에 접어들며 루소의 저술은 반기독교적 경향이 심해졌다. 평생의 논적이었던 루소와 볼테르는 프랑스의 위대한 인물들이 묻히는 파리의 팡테옹 지하 묘지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루소는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프랑스 및 유럽을 휩쓴 혁명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 받는다. <<프랑스혁명>>의 저자 칼라일은 ‘전에 루소라고 불린 인물이 있었다. 그가 쓴 책은 이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책 재판은 초판을 비웃었던 사람들의 가죽으로 장정되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피히테와 셸링, 그리고 헤겔

피히테와 셸링, 그리고 헤겔

Ⅰ. 피히테

1-1. 생애와 시대적 배경

1-1-1. 칸트는 만년에 이르러서까지 자신의 철학적 체계를 구축하는 시도를 했는데, 그 내용은 그가 죽은 후 ⟪유고(Opus Postumum)⟫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에 칸트 자신이 ⟪순수이성비판⟫에서 제시한 몇몇 요소에 대해 불만을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불만은 칸트의 열렬한 지지자들과 제자들에게 그를 비판할 계기를 제공했다. 이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은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로, 그는 칸트가 사망했을 때 철학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중에 있었다.

1-1-2. 피히테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거위 돌보는 일을 했었는데, 그의 뛰어난 지적 재능을 알아본 자선 사업가인 남작에게 후원을 받아 예나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는 대학에서 레싱과 스피노자, 칸트를 숭배하게 된다. 그는 괴테의 추천으로 1794년 예나 대학 교수로 임명되고, 이곳에서 시인이자 극작가인 실러와 동료로 지낸다. 피히테는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인정받지 못해 1799년 예나 대학을 떠나게 되고, 한동안 직장을 찾지 못하다가 1810년에 새로 생긴 베를린 대학의 철학부 학장이 된다. 그는 1812년 프랑스에 맞서 저항군에 지원 입대 하였으나, 1814년 발진 티푸스에 전염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1-2. 사상

1-2-1. 피히테의 철학적 명성은 1804년에 발표한 ⟪지식학⟫으로 얻게 되는데, 이 책에서 그는 철학의 임무를 경험의 기능성에 대한 선험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라 보며 칸트의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순수한 객관(물자체)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독단론의 길을, 자유로운 주관(자아)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관념론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 말했다. 그는 의식 전체를 사고하는 주체의 자유로운 경험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그 자신을 독일 관념론의 창시자로 만들었다.

1-2-2. 모든 것을 자신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자아’란 무엇인가? 피히테는 행위를 하면서 자신의 자기의식에 대한 지적인 직관이 없다면, 인간은 행위할 수 없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의 이론은 개인적 자아가 물질세계 전체를 창조할 수 있다는 유아론(solipsism)에 빠지는 듯 보이지만, 그 자신은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현상적인 자아를 포함한 모든 현상을 창조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직접적이고 정신적인 생명’이라고 주장했다.

1-2-3. 이는 마치 신에 관해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피히테는 모든 철학의 기초를 제공하는 것은 현존하는 유한한 자아가 아니라 신적인 이념이라고 말했다. 존재가 아닌 생명이 없으며, 신이 아닌 존재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신적인 존재를 믿는 것은 미신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유신론자라기보다 범신론자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Ⅱ. 셸링

2-1. 피히테 이론을 가장 열렬히 지지했던 셸링(F. W. J. Schelling)은, 피히테의 종교철학은 스피노자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1798년 23세의 나이로 예나 대학 교수로 임명된 피히테의 동료였다. 그는 피히테의 철학이 스피노자가 독단적인 형태로 제시했던 이론을 비판적인 형태로 바꾼것이라 보았다. 셸링은 비교적 덜 강경한 형태의 관념론인 자신의 철학 체계인 ‘자연 철학’을 제시했다. 그는 최초의 절대적인 것이 서로 나란히 존재하고 서로 동등한 두 세계, 즉 정신적인 의식이고 물리적인 자연을 만들어 낸다고 보았다. 그는 최초의 절대적인 것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자연이고, 물질적 자연의 체계는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로서의 자연이라고 여겼다.

2-2. 셸링의 체계는 풍부하지만 동시에 난해하다. 현재 영어권에 속하는 나라들에서 그의 저술은 거의 읽히지 않는다. 대부분의 철학사에서 셸링은 피히테와 헤겔의 관념론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셸링과 헤겔은 1802~3년에 예나에서 함께 철학 저널 편집자로 일했다.

Ⅲ. 헤겔

생애와 시대배경

3-1. 헤겔이 쓴 최초의 저술은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을 비교한 것이었다. 1770년에 태어난 헤겔은 신학을 공부하고 1801년에 예나 대학에서 두 철학자와 함께 지냈다. 그는 1806년 프로이센 군대가 나폴레옹에게 대패하여 예나 대학이 폐쇄될 때 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대학이 문을 닫고 곤궁한 상태에서 그는 유명한 《정신현상학》을 출판한다. 헤겔은 1816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가 된다. 그는 《논리학》을 출판하고 그 다음 해 철학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철학강요》를 출판했다. 그는 1818년 베를린 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1831년 콜레라로 사망하기 전까지 교수직을 유지했다. 그가 베를린 대학 교수로 있는 동안 그가 했던 강의록이 사후에 편집되어 출판된다. 그의 강의록은 철학사를 비롯해 미학, 역사철학 등이 있는데, 이는 그가 매우 독창적이고 폭넓은 지성을 소유했던 학자였음을 보여준다.

3-2. 헤겔이 사상사에 가장 크게 기여한 바는 철학에 역사적 요소를 도입한 것이다. 그가 역사철학을 다룰 당시 고전적인 저술 두 권이 이미 출판되어있었는데, 그 책은 비코의 《새로운 과학》과 헤르더의 《인류사의 철학에 대한 이념》이었다. 이 두 권은 역사 탐구 방법을 검토하고 인류의 진화론적 발전을 강조했다. 하지만 철학 안에서 역사에 특별한 지위를, 그리고 역사 서술에서 철학자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 인물은 헤겔이다.

사상

3-3. 헤겔은 철학자가 역사에 대해 일반 역사학자들이 지닐 수 없는 특별한 통찰이 있다고 보았다. 오직 철학자만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이성이고, 세계사는 이성의 전개 과정이라는 점을 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해에 도달하는 방법은 형이상학적 체계를 탐구하는 방법과 역사 자체를 귀납적으로 탐구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역사가 이성의 전개라는 믿음은 신의 섭리에 대한 종교적 신앙과 대응하는데, 헤겔은 형이상학적 이해를 하는 철학자가 신학보다 더 세계의 궁극적 운명과 궁극적인 운명 그리고 그 실현 방법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3-4. 헤겔에 따르면 세계사는 정신(Geist)이 전개되는 이야기로 구성된다. 정신의 내적 발전은 구체적인 실재로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헤겔은 태초로부터 하늘과 땅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오직 자신을 인식하고 발견하려는 정신의 투쟁일 뿐이라고 보았다. 정신은 사전에 완벽하게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는 무언가가 아니라,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나아가고 잠재성을 실현하려는 정신의 충동을 동인으로 갖는 것이다. 보편사는 ‘정신이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바에 관해 인식을 점차 드러내고 현실화하는 과정이다’.

3-5. 헤겔은 정신의 존재를 논리학과 관련되는 주제라고 말하며 ‘논리학’을 자신만의 특별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는 역사를 논리의 현시로 여기고 동시에 논리학을 역사적인, 대립 및 투쟁과 관련되는 용어로 여긴다. 두 명제가 서로 모순을 이룰 경우 그는 이를 두 명제 사이의 대립으로 표현한다. 두 명제가 서로 싸워 승패가 나뉘는 이것을 ‘변증법’이라 한다. 이는 한 명제(정립)가 다른 명제(반정립)와 싸움을 벌이고 결국 이들 모두를 극복한 제 3의 명제(종합)이 등장하는 과정이다. 정신에 이르기 위해서는 두 단계의 변증법을 거쳐야 한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최초의 정립은 절대적인 것이 순수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어떤 성질도 지니지 않는 순수한 존재는 무와 같으므로 ‘절대적인 것은 무’라는 반정립에 이르게 된다. 종합은 정립과 반정립을 극복하며, 존재와 무의 결합은 생성이므로 ‘절대적인 것은 생성’이라는 종합에 이른다.

3-6. 생성과 생명 그리고 절대적인 것은 다시 두 번째 단계의 변증법을 제공한다. 헤겔은 절대적인 것을 사고의 주체, 즉 보편적인 사고의 주체로 여기며 이를 ‘개념’이라 불렀다. 이는 지성이 사고를 통하여 산출하는 모든 개념의 총체를 의미한다. 또한 그는 절대적인 것을 사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을 ‘자연’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지성이 탐구할 수 있는 대상의 총체라는 의미한다. 이렇게 자기의식이라는 종합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정신이다.

3-7. 헤겔이 생각한 정신의 개념은 처음 접하면 몹시 당황스럽다. 헤겔이 말하는 정신이 신 – 스피노자의 경우처럼 자연과 동일시되는 – 이라고 생각할 수도, 혹은 개인으로서 인간이 지닌 정신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 중 어떤 것도 완전히 옳지는 않다. 이들보다 인류에 관해 언급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나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헤겔은 ‘정신’이라는 용어에 두 가지 형이상학적 요소를 더한다. 첫째, 그는 인간의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역사에 관해 언급한다. 둘째, 그는 세계를 세밀하게 나타나는 나름대로의 생활 주기를 지니는 유기적 전체로 여긴다.

3-8. 헤겔은 우리가 자연의 구체적인 유기체를 볼 때처럼 세계도 그렇게 보기를 요청한다. 그는 식물은 자신의 이념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어린아이는 육체가 발달하고 지적인 기법을 습득하면서 점차 자신의 본성과 이념을 의식하게 되는 예를 들며, 정신이 진보함으로써 이런 발달 과정은 세계를 포괄하는 규모로 재현된다고 보았다. “정신은 개인적이고 유한한 의식으로 여겨져서는 안되며 그 자체로 보편적이고 구체적인 정신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진보는 가장 풍부한 형태로 세계사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보편적 정신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따라서 세계사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정신의 자기의식이 전개되는 역사이다. 정신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에 대한 의식이 성장하는 것에 맞춰 자유의 의식을 통해 진보한다.

3-9. 정신의 자유는 정신을 물체와 구별하는 근거가 되는데, 물체는 만유인력과 같은 필연적인 법칙의 제한을 받는다. 세계의 전개는 정신이 자신의 자유를 확장하고 의식해 나가는 과정이다. 국가는 ‘자유의 실현, 즉 절대적인 최종 목표의 실현이며 따라서 오직 그 자체를 위하여 존재한다’. 국가는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은 오직 국가의 구성원이 됨으로써만 가치를 소유하게 된다.

3-10. 어떤 국가를 구성하는 민족의 정신이 어떤가에 따라 서로 다른 국가들이 서로 다른 특징을 드러낸다. 각 민족에게 한번의, 오직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헤겔은 이 기회가 자기가 살았던 당시 독일 민족의 프로이센 왕국에게 주어졌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정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치 제도가 아니라 철학 자체에서 드러난다. 헤겔은 철학이 진보한다고 굳게 믿었다. 절대적 존재의 자기의식은 인간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통해 현존하고, 철학사를 통해 절대적 존재는 자기 자신을 직접 마주보게 된다. 그는 철학사 강의에서 이전의 다양한 철학들을 차례대로 독일 관념론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적인 발전에 굴복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칸트

1-1 칸트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데 삶 전체를 바친 인물로 여행도, 결혼도 하지 않았고 어떤 공직도 하지 않았기에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오로지 그의 사상이야기 뿐이다. 루터주의 경건파 가정에서 자랐지만 자유주의적인 신학적 견해를 보였고 항상 엄격하게 정해진 삶을 살았다.

 1-2 칸트는 1760년대부터 진지하게 철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 후 20년 동안 칸트가 출판한 저술은 신중하게 여러 가능성을 보색하는 것이거나 관례상 반드시 써야 하는 것들이었다. 1763년 베를린 학술원에서 ‘형이상학의 진리가 기하학의 진리와 같은 정도로 확실하게 증명될 수 있는가’를 주제로 현상 논물을 모집했는데 칸트는 이 주제에 대해 수학적 방법과 철학적 방법 사이의 많은 결정적인 차이에 주목했다. 수학자들이 명확한 정의에서 출발하여 개념을 형성하고 이를 발전시킨다면 철학자들은 혼란스러운 개념에서 정의에 이르기 위해 개념을 분석한다. 이에 칸트는 수학자들보다 철학자들이 오히려 뉴턴의 방법에 따라야 하며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경험이라는 현상에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1-3 칸트는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철학에 빠져있을 때 흄이 ‘독단의 잠’에서 깨웠음을 인정한다. 1760년대부터 칸트는 과학적 형이상학의 성립 가능성에 대하여 점점 회의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인과관계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결코 논리적 필연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1-4 교수로 취임한 후 11년 동안 칸트는 자신의 독창적인 체계를 발전시키는데 전념했고 이 결과가 1781년 《순수이성비판》으로 출판되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의 목표는 철학의 과학화였다. 칸트는 지식을 두 종류로 아프리오리한 지식과 아포스테리오리한 지식으로 구별한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어떤 진리를 인식한다면 그것은 아포스테리오리하다. 반면에 어떤 진리를 모든 경험과 무관하게 인식한다면 그것은 아프리오리하다. 칸트는 모든 지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되지만 경험으로부터 등장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프리오리하게 인식하는 진리들은 단지 경험의 일반화를 틍해 얻을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칸트는 아프리오리하게 내리는 판단은 분석적인 것과 종합적인 것으로 나뉜다고 보았다. ‘모든 물체는 연장성을 지닌다.’와 같은 분석판단에서는 이미 주어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바가 술어를 통해 더욱 명확히 드러나는데 비해 종합판단에서는 ‘모든 물체는 무게가 있다’처럼 술어가 주어의 내용에 새로운 무언가를 더한다. 아포스테리오리한 명제는 모두 종합적이며, 분석명제는 아프리오리하다. 칸트는 아프리오리하면서 종합적인 명제가 존재한다고 보았고 형이상학을 진정한 학문으로 만들려면 아프리오리한 동시에 종합적인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1-5 인간이 지닌 정신적 능력의 본성과 한계를 붆명히 밝히는 것을 철학자의 첫 번째 임무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중세철학자들과 합리론자와 같이 칸트는 감성과 지성을 뚜렷하게 구별하고 지성을 오성과 이성으로 나눈다. 오성은 인간의 지식을 형성하기 위하여 감각들을 결합하는 작용을 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이성은 오성이 도달할 수 있는 바를 넘어서려는 지성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은 경험과 분리 될 경우 ‘순수이성’이 되는데 이것이 칸트가 비판하려는 대상이다.

1-6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순수 이성에 관하여 언급하기 전에 감성과 오성을 체계적으로 탐구한다. 감성은 ‘선험적 감성론’에서 오성은 ‘선험적 논리학’에서 탐구가 이뤄진다. 칸트는 선험적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데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지만 현실적 경험이 전하는 바를 넘어선 또는 그 배후의 무언가라는 개념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1-7 선험적 감성론은 대체로 공간과 시간에 대한 탐구이다. 칸트는 감성이 재료와 형식을 지닌다고 말한다. 공간은 외부적 감가의 형식이며, 시간은 내부적 감각의 형식이다. 공간과 시간은 우리의 정신이 발견하는 세계 안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감성이 경험을 형성하면서 부여하는 일종의 틀이다.

1-8 선험적 논리학은 선험적 분석론과 선험적 변증론으로 나뉜다. 분석론에서는 오성을 경험에 타당하게 적용하기 위한 기준들을 제시하고 변증론에서는 이성이 분석론에서 설정된 한계를 넘어서려 할 때 발생하는 환상이 폭로된다. 분석론에서 칸트는 ‘범주들’라고 부르는 일련의 아프리오리한 개념과 ‘원칙들’ 이라고 부르는 일련이 아프리오리한 판단들을 제시한다, 분석론은 핵심적인 두 부분으로 나누어 ‘범주들의 연역’과 ‘원칙들의 체계’로 구성된다.

1-9 분석론 중 첫 번째 절에서 범주들의 연역 또는 정당화가 논의된다. 범주는 특별한 종류의 기본 개념으로 ‘원인’과 ‘실체’의 개념을 범주의 예로 든다. 칸트는 이러한 범주가 없다면 우리는 단편적이고 무질서한 대부분의 경험을 개념화 하거나 파악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우리의 모든 지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경험론자의 주장에 동의 하지만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등장한다는 주장은 거부한다.

1-10 분석론 중 두 번째 절에서 해당하는 원칙들의 체계에서는 경험에 관한 수많은 아프리오리한 종합 명제들이 등장한다. 칸트에 주장에 따르면 경험은 연장, 밀도의 두 종류의 크기를 지녀야 한다, 더욱이 우리의 지각들이 서로 필연적으로 연결된 경우에만 경험이 가능하며 원인과 결과사이의 관계를 먼저 확립하지 않는 한 우리는 객관적인 시간의 연속성을 결코 확보 할 수 없다.

1-11 칸트는 합리론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범주들이 스스로 자신의 적용 가능성을 규정할 수 없으며, 원칙들이 자신의 진리를 스스로 확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아프리오리하게 확립할 수 있는 바는 오직 만일 경험이 가능하려면 이런저런 조건들이 적용되어야 한다. 경험의 가능성은 오직 현실적인 경험 자체에 의해서 드러날 뿐이다.

1-12 칸트는 분석론을 통하여 어떤 범주에도 포섭되지 않고 어떤 규칙에 의해서도 예시되지 않는 순수한 현상이나 감각적 대상의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보인다. 칸트는 ‘선험적 변증론’을 통해 오직 순수 이성을 사용하여 탐구 할 수 있는, 감각을 넘어서는 대상들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살펴본다.

1-13 칸트는 변증론에서 형이상학적, 심리학과 형이상학적 우주론, 형이상학적 신학을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는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이성주의 심리학은 ‘나는 생각한다’는 전제를 출발점으로 삼아 비 물질적이고 파괴되지 않고, 개인적이고 불멸하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칸트는 이런 논증의 전개가 다양한 오류를 범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네가지 오류를 지적하면서 ‘순수 이성의 오류추리’라고 불렀다.

 

1-14 아프리오리한 우주론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칸트는 네 가지 이율배반을 제시한다. 이율배반은 상반되는 결론에 이르는 한 쌍의 서로 대립하는 논증(정립과 반정립)으로 구성된다. 그 중 첫 번째 것의 정립은 ‘세계에는 시간상 출발점이 있으며 공간상 제한된다’이며 반정립은 ‘세계에는 시간상 출발점이 없으며 공간상 제한이 없다’이다. 칸트는 이 두 가지 모두 증명을 제시하지만 모두 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단지 전체로서의 ‘세계’에 관하여 언급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1-15 각각의 이율배반에서 정립은 어떤 연속적인 것이 완전히 멈추게 된다고 주장하며 반정립은 그것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이율배반은 분할 가능성과 관련되고, 세 번째는 인과성, 네 번째는 우연성과 관련된다. 칸트는 각각의 이율배반에서 정립은 독단론의, 반정립은 경험론의 오류에 빠진다고 생각한다. 네 번째 이율배바에서 칸트는 필연적 존재의 현존에 찬성하고 반대하는 논증들을 제시하고 《순수이성비판》의 뒤이은 절에서는 자연신학에서 주장하는 신의 개념을 계속 검토한다. 그는 신 존재 증명을 세 가지의 기본 유형으로 분류하고 각각의 증명이 모두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보인다.

 

1-16 60대에 접어들면서 칸트는 윤리학과 미학으로 관심을 돌려 《도덕 형이상학 기초》,《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의 저술을 출판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론이성의 아프리오리한 종합적 원리들을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실천 이성의 아프리오리한 종합적 원리들을 비판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1-17 칸트 도덕이론의 출발점은 무조건적으로 선한 유일한 것은 오직 선의지뿐이라는 사실이다. 선의지는 무엇을 성취하는가와는 전혀 무관하다. 선의지의 노력이 좌절될지라도 선의지는 오직 그 자체 만으로 선하다. 의지를 선하게 만드는 바는 그것의 동기가 바로 의무라는 사실이다.

 

1-18 의무로부터 행위하는 것은 도덕 법칙을 존중하여 이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며, 도덕적 명령에 복종하여 행위하는 것이다. 명령에는 가언 명령, 정언 명령 두 종류가 있다. 가언 명령은 만일 당신이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원한다면 이런저런 방식으로 행위하라고 말하는데 비해 정언명령은 당신이 성취하려는 목적과 상관없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행위하라고 한다. 인간의 목적이 다양하므로 수 많은 가언 명령이 존재하는데 비해 정언 명령은 오직 하나뿐으로 ‘오직 동시에 보편법칙이 될 것을 원할 수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 하라’ 이다. 이것을 다른 식으로 말하면 ‘당신 자신의 인격이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 안의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 이다.

 

1-19 세 번째 비판서인 《판단력비판》에서 칸트는 자신이 이전 비판서들에서 과학적, 윤리적 개념에 적용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분석을 아름다움이나 숭고함과 같은 미학적 개념에 적용하려 한다. 미적 취미 판단은 감정에 의존하지만 보편성 타당성을 지니지만 이는 잘못 되었다고 주장한다.

계몽주의

1. 시대적 배경

아담 스미스와 리드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로 알려진 사상적 흐름을 대표하는 두 인물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진정한 원류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프랑스라 여기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18세기에 일어났으며 이 시기의 유럽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무지와 미신으로 어두워진 세계에 대하여 이성의 빛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 했다. 프랑스 계몽주의는 1750년~1760년대에 정점을 이루었으며 <<백과전서, 또는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사건>>이 출판되어 계몽주의의 활성화를 도왔다.

2. 계몽주의 사상가들

<<백과전서, 또는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사건>>은 디드로와 달랑베르에 의해 편집되었지만 이 책의 출판에는 많은 수의 프랑스 사상가들의 토대를 쌓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러한 프랑스 사상가들에는 벨과 몽테스키외, 볼테르, <<인간기계론>>의 라메트리, 무신론자 바크, 결정론을 지지한 엘베시우스 등이 있다. 물론 이중 1706년에 죽은 벨은 <<백과전서>>에 직접적인 집필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벨은 <<역사와 비판 사전>>이라는 저술을 출판하였으며 이 저술에서 그는 성서와 역사의 탐구로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에 모순점과 부조화에 대하여 밝혔다. 그의 도덕 사상에 대한 견해도한 드러나는데 오직 관용을 통해서만 종교적 신앙이 드러나며 윤리적 가르침과 종교적 교훈이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벨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반박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라이프니츠가 있다. 그럼에도 그(벨)의 종교적 권위에 대한 부정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계몽주의 사상가 중 몽테스키외는 계몽주의의 긍정적인 요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법의 정신>>이란 저술을 출판했으며 이 저술에서 역사적 사회학적 지식에 기초하여 국가의 본질에 관한 이론을 구성했다. 그는 영국에 정치 체제에 대하여 칭찬했으며 이러한 영국에 대한 열정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도 이어졌다.

볼테르는 몽테스키외의 영국에 대한 열정이 이어진 계몽주의 철학자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최초 철학 저술인 <<철학 서간>>에서 영국의 정치 제도와 교회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칭찬하였고 나아가 영국의 관용적 태도를 진심으로 칭찬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영국의 철학자인 로크에 대해서도 근대 초기의 낭만주의적 공상에서 벗어나 영혼을 설명한 최초의 철학자라 평했다. 게다가 <<백과전서>>를 만들려는 생각은 영국의 체임버스라는 인물이 출판한 <<백과사전 또는 예술과 과학에 대한 보편적인 사전>>에 영향을 받았다.

<<백과전서>>의 두 편집자 중 하나인 달랑베르는 수학자로서 유체 역학을 다룬 독창적 저술을 남겼으며 산술학과 기하학의 확실성과 정확성을 모든 학문에 확산하려 노력하였다. 그는 하나의 통일 과학이라는 이상을 제시한 초기 인물로 <<백과전서>> 서문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디드로는 세계 안에 신의 설계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드러낸 <<맹인에 관한 편지>>라는 저술 때문에 상당 기간 동안 감옥에서 지내었다.

이 두 사람은 과학적 진보를 피할 수 없다는 믿음, 기독교가 인간의 삶 향상에 큰 방해물이 된다는 생각, 인간 본성에 대한 유물론적 입장을 지지 하였다.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는 <<백과전서>>의 다른 집필진들도 동의하였다.

3.계몽주의 철학자들에 대한 평가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모두 반성직주의자였지만 모두 무신론자는 아니었는데 대표적으로 볼테르가 있다. 볼테르는 자신의 저술인 <<철학 사전>>에서 무신론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는데 대표적인 대목으로는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발명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덕 법칙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가 있다. 그러나 그는 세계를 자유롭게 창조한 신의 존재는 믿지 않으며 세계는 신의 현존이 낳은 필연적이고 영원한 결과라 설명한다. 볼테르와 같이 이러한 유형의 신을 믿는 이들을 ‘이신론자’라 하였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반드시 급진적이거나 민주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생각하는 자유의 개념은 영국의 명예혁명(1688)에 등장한 개념과 유사하며 이들이 가장 중요시한 자유는 표현의 자유였다. 그리고 이들은 모국에서 정부의 권력남용에 대하여 저항하였지만 원리상의 귀족정치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았으며 어떤 근본적인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지 않았고 일반인의 권리 획득에 대하여 달갑지 않게 생각하였다.

스미스와 리드

스미스

아담 스미스는 철학사보다 경제학사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는 논리학과 도덕철학의 교수였다. 그는 <<도덕감정론>>이란 책을 출판 했고 이 책에서 흄의 공감에 관한 견해를 발전시켜 공감과 도덕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제시하였다.

스미스는 공감의 영역을 확장하여 감정을 공유하는 경우에도 공감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는 공감은 도덕 판단을 산출하는 역할을 하기에 동기가 중요하며 효용은 도덕의 궁극적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도덕 판단이 본질상 사회적 구성물로 여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거리가 있지 않으면 자신의 동기와 정서에 대하여 어떤 판단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나아가 그는 관망자로서의 자신과 행위자로서의 자신으로 구분해야함을 주장한다. 관망자로서의 자신은 나 자신을 그의 상황에 놓고 그의 특수한 관점에서 내 행위가 어떻게 보일지 고려하여 나의 행위를 낳은 정서를 밝히려 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자로서의 자신은 진정으로 자신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그의 행위에 대하여 나는 관망자의 관점 아래서 어떤 의견을 형성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 두 가지 개념을 통하여 스미스는 공평한 관망자라는 관점을 윤리학에 도입하였고 이후 많은 도덕철학자들의 저술에서 등장하였다.

리드

리드는 스미스에 뒤를 이어 도덕철학의 교수를 맡은 사람으로 흄을 비롯한 경험론적 전통 주의 전체에 대한 최초의 비판자이다. 리드는 흄의 논고들에 대항한 <<상식의 원리에 기초한 인간 정신 탐구>>란 저술을 출판한 뒤 인간의 지적 능력과 행위 능력을 다룬 두 편의 논문도 출판하였다.

그는 영국의 경험론자들과 대륙의 데카르트주의자들이 받아들인 관념의 체계에 대한 의심에서부터 비판을 시작하였다. 그는 데카르트와 로크가 범한 기본적 오류의 원인이 관념이란 단어의 애매함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는 일상어로서 관념은 정신의 작용을 의미 하지만 철학자들은 이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사용한 점을 지적하였다. 그 다른 의미의 관념은 사고나 개념이라는 정신의 작용이 아니라 어떤 사고 대상을 지시한다는 일종의 상으로 생각된다. 그는 이러한 철학적 의미의 관념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며 우리의 지식을 구성하는 역할은 개념이 아니라 명제라 하였다.

그는 단순한 파악을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판단을 분해하고 분석함으로서 얻어진다고 보았다. 여기서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판단은 정신이 지니는 최초의 내용으로 리드가 부르는 ‘인류의 상식’에 해당하는 것을 구성한다. 리드 이전의 철학자들과 달리 상식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추론에 의해서 얻어지지 않는 원리들의 집합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리드는 이성이라는 높은 수준의 능력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상식은 신이 부여한 보편적 산물이라 하였다.

리드는 우리가 의식적 사고를 하려면 정신이란 주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존하는 무엇이든지 그것의 원인이 있어야한다는 원리를 재확인한다. 이와 동시에 철학자들이 일반인의 대상의 현존에 대한 믿음을 경멸하는 이유가 철학자들이 믿음의 의미를 바꾸었기 때문이라 지적하며 상식적 단어의 의미를 바꾸려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한다.

리드는 ‘상식과 철학 사이의 불공평한 경쟁에서 철학은 항상 불명예와 손실을 뒤집어 쓴 채 떨어져 나가고 말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과학기술에 무지한 일반인의 언급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리드에게서 일반인의 결정 영역은 단어의 의미부분이며 상식은 다른 철학자들이 이성이나 직관으로 여긴 자명한 원리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리드는 과학에 독창적 기여를 하였는데 그 중 일부가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전을 예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실재론이 경험론자나 합리론자들의 철학과 같은 정도로 과학의 추구와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이려 했다.

로크

  1. 시대적 배경 및 생애

1-1. 홉스는 근대 경험론의 선구자였지만 그의 명성은 그보다 훨씬 탁월한 의사 출신의 철학자 로크(John Locke)의 등장과 더불어 쇠퇴했다. 로크는 기독교도들은 다양한 형태의 신앙적 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내용의 짧은 저술 ≪관용론≫(Essay on Toleration)을 썼다. 로마 가톨릭을 제외한 모든 교파에 대하여 교리상의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톨릭 음모 사건과 배제 법안으로 인한 위기 무렵에 로크는 ≪정부에 관한 두 논고≫(Two Treatises on Government)를 썼다. 첫 번째 논고에서 그는 왕권신수설을 옹호한 필머(Sir Rovert Filmer)의 저술을 통렬하게 공격했으며, 두 번째 논고에서는 홉스가 제시한 것보다는 훨씬 낙관적인 상태로 자연 상태를 설명하고 정부와 국가는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 계약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일 어떤 정부가 전횡을 일삼고 정부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의 역할을 침해한다면 그런 정부는 해체되어야하고 혁명은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1. 사상

2-1. 로크는 네덜란드에 머무르는 동안 자신의 가장 위대한 철학적 저술 ≪인간지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이하 ≪지성론≫으로 약칭)을 쓰는데 몰두했고 1690년에 이르러서 출판되었다. 로크의 생전에 4판까지 출간되었다. ≪지성론≫은 4권으로 구성된다. 분량이 가장 적은 1권의 제목은 ‘본유 관념에 관하여’이다. 여기서 로크는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간에 어떤 본유적 원리도 우리의 정신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모든 관념은 오직 경험으로부터 얻어진다. 기하학과 같은 무관한 학문의 경우조차 우리가 수용하는 관념은 본유적이지 않다. ≪지성론≫의 2권은 모두 33장으로 여기서는 관념이 철저히 탐구된다. 로크는 ‘관념’이라는 용어를 우리의 정신적 능력과 정신이 형성하는 개념을 모두 특징짓는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2-2. 로크는 관념들을 단순 관념과 복합 관념, 명석 판명한 관념과 모호하고 혼동된 관념, 감각적 관념과 반성적 관념등과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한다. 그는 단순 관념을 다루면서 물체에서 드러나는 성질들을 두 범주로 나누는데 제일성질에는 단단함, 운동, 모양 등이 있다. 이들은 ‘우리가 지각하든 지각하지 않든 간에’ 물체에 속하는 성질이다. 제이성질로는 색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대상 자체에는 전혀 없는 것으로서 단지 대상의 제일성질을 통하여 우리 안의 다양한 감각을 생성하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반성적 관념들 중 지각적 관념은 우리의 정신에 관념을 형성하는 최초의 과정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지각은 순전히 수동적인 경험이며, 지각이 무엇인지는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봄으로써 누구나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각이라는 수동적 경험은 로크 철학 전체를 떠받치는 기초의 역할을 한다.

 

2-3. ≪지성론≫의 2권에는 정신과 의지에 대한 경험주의 철학이 제시되지만 이 외에도 시간과 공간, 수에 관한 고찰, 인간의 정념의 목록 등 많은 내용이 등장한다. 또한 인과 관계를 비롯한 다른 관계들도 다루어지며 이후에 큰 영향을 미친 개인의 동일성이 무엇인지에 관한 정교한 논의도 전개된다. 로크는 우리가 단순 관념들을 다른 도움 없이 스스로 충분히 인식할 수 있고,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어떤 단어도 그렇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믿으면서도 관념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통해서 자신들이 말하는 관념을 실제로 확인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는 ‘우리가 지닌 추상적 관념들과 보편적인 단어들 사이에는 서로 확고한 관련이 있으므로 우선 언어의 본성과 용법 그리고 의미를 검토하지 않고서는 모두 명제로 구성되는 우리의 지식을 명석, 판명하게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2-4. 뒤이어 그는 이 주제를 3권에서 다루는데 가장 유명한 부분은 추상 관념과 실체 이론을 논의하는 절들이다. 로크는 우리의 정신이 자연적 대상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관찰한 후 이것을 추상적인 보편 관념으로 분류하고 여기에 보편적인 이름을 붙인다고 말한다. 이런 보편 관념들은 주목할 만한 성질을 지닌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보편 관념은 ‘기울지도 않았고 직각도 아니며 또한 등변, 등각, 부등변도 아니어야 한다. 그것은 이런 성질들을 모두 지녀야 하며 동시에 이들 중 어떤 것도 지녀서는 안 된다.’ 이 세계의 실체들은 다양한 성질과 능력을 지니며 우리는 이를 활용하여 서로 다른 종류의 사물들을 정의한다. 하지만 우리가 내리는 정의는 사물들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며 단지 ‘명목상의 본질을’ 언급할 뿐이다. 실체 일반에 대하여 우리가 지닐 수 있는 유일한 관념은 ‘그것이 어떤 고유한 속성들을 지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라는 관념뿐이다.

 

2-5. ≪지성론≫ 전반에 걸쳐 인식론적인 고찰이 이루어지는데 특히 4권에서 지식이라는 주제가 전면에 부각된다. 우리는 사물들의 진정한 본질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연 세계의 존재들에 관한 진정한 학문을 구성할 수 없다. 단지 그럴 듯한 믿음만을 지니는데 우리 자신의 현존과 신의 현존에 관해서는 진정한 지식에 이를 수 있다. 현실적인 감각의 한계 안에만 머무른다면 다른 사물들의 현존에 관한 지식 역시 얻을 수 있다. 진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증거보다 더 큰 확실성을 주장하는 어떤 명제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영국에서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n)이 일어나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기초로 한 새로운 법체계가 마련되었고 로크는 영국으로 돌아와 이전에 위험한 내용 때문에 출판하지 못한 저술 ≪정부에 관한 두 논고≫, ≪지성론≫의 초판, ≪관용에 관한 편지≫의 영어 번역 출판했고 이후에도 저술을 계속하였다. 시빗거리가 될 만한 저술들은 대부분 익명으로 출판했는데 유일하게 이름을 밝혀 출판한 것이 ≪지성론≫이다.

말브랑슈

말브랑슈

1. 시대적 배경 및 생애

1-1. 말브랑슈는 17세기 초의 인물로 루이 14세의 통치 시기 하에 태어나고 활동하였다.  그는 20대에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에 데카르트의 저술 <<인간론>>을 접하였는데 이후 그는 가장 열정적인 데카르트 추종자가 되어 명석 판명한 관념 추구에 평생을 힘썼다.  그가 데카르트를 열성적으로 추종했다는 것은 그의 전기 작가의 글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너무나 강력한 심장의 고동을 멈추기 위하여 책을 계속 읽지 못하고 자주 쉴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17세기 중반쯤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술로 평가되는 <<진리의 탐구>>를 저술하였고 이어 자신의 사상적 체계를 요약한 <<형이상학에 관한 대화>>를 출판했다. 이외의 저술들은 대부분의 내용이 신학적 논쟁에 관한 것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연 및 은총론>>이 있다. 이 책은 1690년 금서 목록에도 올랐다. 그는 말년에 로크 사후에 출판된 대화체의 저술에서 자신이 공격대상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2. 사상

2-1. 그는 자신의 사상적 내용과 저술에 사용한 단어들의 정의는 데카르트와 동일했는데 예를 들면 상상력, 지성, 의지 등이 있다. 하지만 새로이 추가한 내용은 관념들의 연합을 두뇌 안 섬유 조직의 연결망으로 설명한 것이다.  즉 높은 곳이라는 관념과 죽음에 대한 관념은 서로의 두뇌 섬유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연결망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거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2-2. 말브랑슈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받아들이는데 데카르트의 사상 중 취약한 부분인 정신과 육체사이의 연관성과 관계에 대한 부분(송과선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한 부분)에 대하여 개선을 하려 했다. 그는 정신이 순수한 사고이고 육체가 순수한 연장성이면 상호 간 작용이 불가능 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에 대하여 의지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육체에 작용한다고 가정했을 때 육체의 작동 원리를 인간이 알지 못하기에 의지의 육체에 대한 작용이 허구라 설명한다. 그는 이어서 육체의 작용을 하는 것은 신에 의한 것이라 설명한다. 즉 신이 인간의 모든 행동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육체의 작용은 나의 의지의 작용과 함께 육체가 움직이기를 신이 원한 것이라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이론은 의지의 작용과 육체의 작용이 동시에 일어날 기회를 신이 제공하는 것이라 하여 기회원인론이라 명명할 수 있다. 이러한 신이 원인이 되는 것은 정신과 물체의 작용뿐만 아니라 물체와 물체 사이의 관계에서도 성립한다.

2-3. 정신이 물체에 작용하지 못하면 그 역은 성립하는가? 의 문제에서 말브랑슈는 관념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들을 거부하면서 새로이 답을 한다. 그에 답은 관념이 신들에 의하여 생겨나며 오직 신만이 우리의 지성에 인과적 작용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모든 것을 신안에서 파악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그는 신을 정신이 살아가는 환경과 같은 배경으로 보았다. 이러한 주장들은 로크의 반발을 샀다. 또한 그는 신의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의 관조로 지식을 얻는다는 주장과는 달리 우리의 지식이 신의 직접적 조명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새로이 주장한다. 즉 신 안의 연장성의 순수한 관념은 지성을 통해서만 파악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연장성의 관조가 물체에 대한 우리의 파악을 어떻게 이루는가에 대해서 그는 연장성의 원형을 파악함과 동시에 데카르트의 자연학의 모든 법칙을 함께 인식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인식 가능한 법칙이 그 역할을 하려면 두 조건을 전제하는데 단순한 법칙과 일반적인 법칙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단순한 운동 법칙 두 가지로 모든 현상을 설명 가능하며 그 운동 법칙 두 가지는 운동 중인 물체는 직선 방향으로 계속 운동한다는 것과 물체 간의 충돌 시에 크기에 비례하여 각각의 물체에 분배된다는 것이다.

2-4. 단순한 법칙과 일반적 법칙의 존재함에 대한 말브랑슈의 믿음은 나 이외의 세계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와 신의 창조물중 악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문제도 해결한다. 불완전한 세계와 악이나 외부 사물에 대한 것에 대한 해답으로는 신이 단순함의 법칙과 일반 법칙을 통하여 현재의 세계를 만들었고 이러한 법칙들을 가지고 더욱 완전한 세계를 창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신은 더 완전한 세계를 만들 능력을 가지지만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시공간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으로 단순한 법칙과 일반적 법칙을 수정해야 하는데 이는 신의 권위가 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더 완전한 세계에 대한 생성이 불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신학자들의 분노를 불렀으며 기적의 발생에 대한 성서의 설명과 양립 불가능한 주장이라 반박 당하였다.

파스칼

1. 시대적 배경과 생애

1-1. 홉스와 로크는 자신들을 데카르트의 반대하는 사람으로 여겼으나 실패한 인물들이었다. 그 후 데카르트의 비판자로 자처한 인물 중 가장 뛰어난 철학자가 있는데 바로 파스칼(Blaise Pascal)이다. 파스칼은 1632년에 오베르뉴(Auvergne)의 왕실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기 때부터 수학과 자연학에 뛰어난 재능을 드러낸다.

2.사상

2-1. 그러나 그는 1654년부터 수학과 자연학이 아닌, 신학을 주된 관심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포르루아얄 수녀원에서 활동한 금욕주의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 금욕주의자들은 당시 ‘얀센주의자들(Jansenists)’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들은 네덜란드 출신의 주교 얀센(Jansen)을 추종했는데, 얀센은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유명한 저술을 발표하며 비관주의적‧엄숙주의적인 형태의 가톨릭을 옹호했다. 얀센주의는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다는 것을 강조하며 오직 소수만이 구원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주장했다. 그는 인간은 죄를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은총을 저항할 수 없기에 인간의 자유 의지는 설자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2-2. 1653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Innocent X)는 얀센주의자의 가르침을 정죄했지만 그들은 이에 저항했는데, 이는 파스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지닌 능력을 낮게 평가한 이들의 주장에 따라 파스칼은 인간의 철학적 능력, 특히 신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회의했다. 그는 ‘철학의 진정한 길은 철학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라 하고, 데카르트를 ‘쓸모없고 불확실한 인물’이라고 평했다(P, 445, 671).

2-3. 파스칼은 죽으면서 일련의 단상들을 모은 원고를 남겼는데, 이는 『팡세(Pensees)』라는 제목으로 1670년 출간된다. 그는 경구의 대가이고 그의 많은 문구는 자주 인용된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이러하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나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 하지만 설령 우주가 그를 파괴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그 존재보다 고귀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신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많은 언급들은 기독교에 대한 호교론의 일부를 형성하고 신앙이 없고 세속에 물든 신자들을 개혁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는데, 그가 어떤 형태의 개혁을 원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다. 파스칼의 단편들에는 두 가지 주제가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그것은 신이 없는 인간의 비참함과 종교적 삶이 보장하는 행복이다.

2-4. 인간의 본성은 모순 덩어리로, 진리라는 이상을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오직 거짓에만 머문다. 진리의 보고인 동시에 오류의 소굴인 인간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파스칼은 인간을 “절반은 상승하고 절반은 추락하도록 창조된 존재, 진리의 유일한 판단자이지만 끝없는 오류에 내던져진 존재. 세계의 영광, 웃음거리, 수수께끼인 인간이여!”라고도 말한다(PⅡ,13). 이 수수께끼를 풀 열쇠는 인간의 타락에 관한 기독교 교리에서 발견된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죄가 없는 상태로 진리와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인간이 오직 타락하기만 했더라면 인간은 진리와 행복이라는 개념 자체를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2-5. 이성이 타락의 관념에 대항하려 해도 이성 또한 이 관념이 진리라는 점을 확립할 뿐인데, 그 출발점은 인간의 비참함이다. 철학적 저술에서 파스칼은 오직 신앙과 은총만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줄 것이라 주장하지만 이성에 적대적이지는 않다. 그는 마음에는 이성이 전혀 알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가 사용하는 단어인 ‘마음(heart)’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는 감정을 이성 위에 놓으려 한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추론과 연역적인 추론을 대비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 즉, 어떤 수식을 ‘암기해서(by heart)’ 익히라고 말할 때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기하학의 기초를 가르쳐 주는 것이 ‘마음’임이 명백히 드러난다. 즉, 파스칼은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와 전혀 대립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