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서양철학사

흄

1.흄

1-1. 버클리가 더블린에서 경험론의 형이상학을 세상에 선보인 직후에 경험론의 원칙을 형이상학에 반대하는 극단까지 밀고 나간 철학자가 에든버러(Edinburgh)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흄(David Hume)이다.  그는 1711년 스코틀랜드 작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에든버러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과 사랑에 빠진다. 뒤이어 법률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는데 포기했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철학과 폭넓은 배움을 추구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모든 일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혐오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또한 1734년부터 37년까지 양주의 라 플레슈라는 이전에 데카르트가 예수회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했던 곳에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첫 번째 저술이자 가장 중요한 저술인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썼다.  출판된 당시 책은 많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가 세상에 떠난 후 이 책은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20세기 영국 경험론자들은 이를 영어로 쓴 철학 저술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격찬했다.

2-1. «논고»는 모두 세권으로 구성되는데 ‘지성에 관하여’, ‘정념에 관하여’ 는 1739년에, ‘도덕에 관하여’는 1740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의 목표는 초판의 부제에 언급된 대로 실험적인 추론 방법을 도덕적 주제들에 도입하려는 시도이다.  그는 실험적 방법을 도덕적 주제들에 적용함으로써 뉴턴이 물리학에서 행한 바를 자신은 심리학에서 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관념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고 지금까지 형이상학자들이 잘못 해석하여 혼란스럽게 된 인과성이나 의무 등의 개념을 자신이 처음으로 확실히 해명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학문은 우리에게 이익을 준다. 이제 우리는 지식의 변방에서 작은 요새를 지키는 대신 ‘이런 학문들의 중심 또는 중앙을 향하여, 인간 본성 자체를 향하여 직접 행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2.  «논고»의 1권은 정신의 내용물을 경험론적으로 분류하는 작업과 더불어 시작된다. 여기서 로크 및 버클리 인식론의 근거가 많이 등장하지만 흄은 지각을 오직 인상과 관념으로 나눈다. 인상은 관념보다 강렬하며 생생하고 감각과 감정을 포함한다. 반면 관념은 사고와 추런을 포함한다. 그는 기억과 상상력의 관념 및 관념들 사이의 연상을 상세히 다루면서 로크의 추상관념에 대한 버클리의 비판을 더욱 강화한다.

«논고»의 1권 2부에서 그는 공간과 시간의 관념을 다룬 후 ‘지식과 개연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절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한다. 그는 감각이 직접 전하는 바를 넘어서서 확장된 모든 지식은 원인과 결과의 관념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과거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또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 추측하는 일은 모두 이 두 관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두 관념의 근원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관성의 관념이 본래 대상에 속하는 그 어떤 성질로 부터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서로 전혀 다른 종류의 대상들이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신 이 대상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아야한다. 그러면 우리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근접해서 발생하고 원인이 시간상 결과에 앞선다는 점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원인과 결과를 선언하기에 충분치않다.

그는 몇 페이지에 걸쳐 뛰어난 논증을 펼친 후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의 추론이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연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연결이 우리가 원인으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추론에 의존한다. 즉 원인과 결과 사이에 필연적 연결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믿음은 추론이 아니라 습관의 산물이다.

2-3.  «논고» 2권에서 정념 또는 감정에 관하여 탐구함으로써 흄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행보를 따른다. 하지만 이 주제는 합리론 철학자들보다 흄에게 더 큰 중요성을 지니는데 왜냐하면 흄은 합리론자들이 이성의 활동으로 여겼던 수많은 작용을 정념의 역할로 돌리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정념은 특별한 종류의 인상이다. 지각을 인상과 관념으로 나눈 후에 흄은 다시 인상을 원초적 인상과 이차적 인상으로 분류한다. 감각적 인상과 육체적 쾌락과 고통은 원초적 인상인 반면 정념은 이차적 인상에 해달되는데 이것이 바로 2권의 주제를 형성한다.  그에 따르면 이성 자체는 어떤 행위도 산출할 수 없다. 모든 자발적인 행위는 정념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된다. 이성은 결코 정념을 이길 수 없으며 오직 상반되는 정념만이 정념을 이긴다.  ‘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또한 노예여만 한다. 그리고 이성은 정념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임무도 탐내서는 안된다’

2권 끝부분에서 우리는 흄의 윤리 체계가 다른 전통적인 도덕철학과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예상한다. 이성은 우리를 행위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도덕 판단을 이성의 산물일 수 없다.  도덕판단의 목표는 오직 우리의 행위를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오직 정념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우리의 정념에 원인을 제공하지도 평가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해야만 한다’는 ‘이다’로부터 도출될 수 없으며 우리가 이끌어 내야 하는 결론, 즉 선과 악, 옮고 그름 사이의 구별은 이성이 아니라 도덕감의 산물이다.

2-4. 이를 기초로 삼아  흄은 «논고» 3권 2부에서 정의와 불의에 관해 논의하며, 자비심이나 정신의 위대함 같은 인간 본성의 덕을 다룬다. 그는 도덕적 구별의 주요 원천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sympathy)의 감정이라고 결론 짓는다. 예컨대 정의가 칭찬받는 까닭은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기 때문이지만 만약 공감의 감정을 통해 공공의 이익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  ‘덕은 오직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오직 그 목적이 가치있을 경우에만 수단 또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행복은 오직 공감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스피노자

  1. 생애와 사상적 배경

1-1 다른 한편으로 데카르트의 사상을 대담한 방식으로 발전시킨 유대인 철학자가 네덜란드에 있었다. 1632년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스피노자는 어린 시절부터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알았다. 반 덴 엔덴은 기독교도 의사였는데 스피노자에게 라틴어를 가르쳤고 데카르트의 저술을 소개함으로써 스피노자의 사상 발전에 큰 영항을 미쳤다.

1-2 스피노자는 유대교 신학에 대하여 10대 후반부터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성년이 되면서 유대교의 관습을 대부분 거부했다. 1656년 그는 유대교 공동체에서 파문당했고 렌즈를 깎는 기술을 배워 여러 광학 기구들을 제작했다. 이를 직업으로 삼음으로써 그는 사색과 연구를 할 시간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1-3 이 당시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을 쓰기 시작 했다. 이 책은 지성의 개선을 주제로 지적인 전환을 상세히 설명하고 탐구의 과정을 밝히는 것이 《방법서설》과 유사하다. 그러나 완성되지 못한 채 그가 죽은 후에야 출판되었다.

1-4 1663년 한 학생에게 데카르트의 철학을 가르치고 친구였던 레이덴 대학 메이어 박사의 요청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를 ‘기하학적 형식’으로 진지하게 해설한 저술을 출판했다. 《철학의 원리》 중 처음 두 권을 완벽하게 정리한 후 여기에 자신의 주석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이 저술을 구성했다.

1-5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제시한 일련의 정의와 공리들을 이어받은 후 이를 확장하여 모두 58개의 정리를 증명했다. 데카르트의 정의와 공리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은 대체로 《철학의 원리》에 등장하는 내용을 따른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저술에 대한 서문을 쓴 메이어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견해와 데카르트의 견해가 모든면에서 일치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1-6 1670년 익명으로 《신학정치론》이라는 저술이 출판되었다. 이 저술은 사실 스피노자가 1665년 자신이 유대교를 떠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해명을 쓰기로 결정한 것이, 점점 확대되어 성서 비평과 정치 이론을 포함한 저술이 된 것이다. 스피노자는 성서 원전을 상세히 검토한 후 히브리어 성서는 그 보다 더 오래된 자료를 편집한 것이며, 아무리 올라가도 기원전 5세기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1-7 《신학정치론》은 세심한 논증과 고상한 표현을 통하여 문학의 한 유형으로서의 성서 비평을 주목하게 만든 훌륭한 저술이다. 하지만 이 저술은 구약성서에 대한 개방적인 해석으로 인해 유대교도는 물론 네덜란드의 칼뱅주의자들까지 이에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몇몇 교회 회의에서는 금서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다른 동시대인들은 이 책을 크게 칭찬했으며 스피노자가 이 책의 저자인 것이 알려지면서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67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 교수직을 제안 받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1. 사상

2-1 스피노자는 어떤 학문적인 지위도 맡지 않았고, 결혼하지도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평온한 삶을 살면서 묵묵히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논증된 에티카》를 쓰는 일을 계속했다. 1675년 이를 완성했지만 이 책을 출판하게 되면 무신론자로 몰려 처형당할지도 모른다는 친구들의 경고로 인해 출판하지 않고 다른 책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1677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티카》, 《정치론》등을 비롯한 그의 유작들은 한데 묶여 출판되었지만 채 일 년도 못되어 네덜란드에서 금서가 되었다,

2-2 《에티카》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체계를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바탕으로 설명한 저술이다.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제목은 ‘신에 관하여’, ‘정신의 기원 및 본성에 관하여’, ‘정서의 본성 및 기원에 관하여’, ‘인간의 굴레에 관하여’, ‘인간의 자유에 관하여’ 이다. 각 부는 일련의 정의와 공리로부터 출발해 다양한 정리들에 대한 형식적 증명으로 이어지고, 각각의 정리에는 정의와 공리로부터 도출되지 않은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기하학적인 방법이 스피노자의 체계를 제시하는데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증명들이 자주 결론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2-3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자신의 철학을 투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가정도 숨기지 않으며 오로지 한 정리에서 다음 정리로 나아가는 논리적 연결점만을 보이려 한다. 또한 기초적인 기하학의 개념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세계 전체를 설명하려 한다. 이 설명이 실패하더라도 이는 철학자의 잘못이기 보다는 철학 본질 자체의 잘못 때문이다.

2-4 《에티카》는 윤리학 외에도 많은 주제들을 다룬다. 1부에는 형이상학 뿐 아니라 자연신학도 등장한다. 실체의 본성을 설명하면서 신의 현존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도 제시한다. 데카르트는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 즉 두 종류의 기본적인 실체를 인정했지만 스피노자는 오직 한 종류의 실체만을 인정한다. 이는 사고라는 속성과 연장성이라는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결국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에티카》의 2부에서 설명하듯 정신은 사고라는 속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이며, 육체는 연장성이라는 속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이다. 결국 정신과 육체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를 기초로 스피노자는 세 단계의 지식, 즉 표상지, 이성지, 직관지가 존재한다는 인식론을 형성한다.

2-5 《에티카》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윤리적 논의는 3부에서부터 등장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현존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자신을 파괴하려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저항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런 충동에 대한 의식이 인간에게 욕구로 드러나는데 이 충동이 자유로울 때 쾌락을 느끼고 방해받을 때 고통을 느낀다고 보았다. 인간의 복합적인 정서들은 쾌락과 고통으로부터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도 욕구와 혐오에 의해 규정된다.

2-6 하지만 《에티카》의 마지막 두 부에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극단적인 정념에 의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정념을 지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능동적 정서와 수동적 정서 사이의 구별이다. 두려움, 분노와 같은 수동적 정서는 외부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 반면에 능동적 정서는 정신이 처한 상황을 스스로 파악함으로써 등장한다. 우리가 수동적 정서에 대한 명석, 판명함 관념을 지니면 정서는 능동적으로 바뀌는데, 수동적 정서를 능동적 정서로 대체하는 것이 바로 정서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한다.

2-7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의 필연성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도덕적 해방에 이른다. 다른 사람의 행위가 그의 본성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그들에 대한 증오를 멈추게 된다. 우리는 신과 같은 관점을 택해 모든 것들이 이루는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체계를 ‘영원한 모습에 비추어’ 바라보아야 한다.

2-8 스피노자의 독특한 체계는 철학사의 흐름에 따라 몇몇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로크의 이론과 관련되는 것으로 스피노자의 실체이론을 이해할 수 있다. 로크와 스피노자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실체 개념을 제거하려 했다. 반면에 그를 데카르트와 비교하는 관점을 택하면 데카르트의 가정이 암시하는 바를 명확하게 이끌어 냄으로써 스피노자는 신이 이 세계 안에서 유일한 행위자라는 결론에 이른 말브랑슈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이보다 더 나아가 신이 유일한 실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2-9 철학에서 17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란이 일어난 시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스콜라철학의 특징은 일종의 구별을 도입하고 인간과 물질세계를 설명할 때 이 구별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보이는 개념 쌍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는 이런 모든 규별을 무너뜨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란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 스피노자의 체계는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스피노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점에서 만나기도 한다.

2-10 스피노자의 철학은 자주 합리론을 지나치게 확장한 형태의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가 자신의 체계를 유클리드의 용어를 사용하여 기하학적으로 제시한 까닭은 다양한 주제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서 일뿐 아니라 논리적 연속성이 세계 전체에 작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극단적인 합리론의 체계는 이후 낭만주의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라이프니츠

 

  1. 시대적 배경과 생애

1-1 라이프니츠는 17세기와 18세기의 경계선에 걸쳐 앉은 철학자이다. 그는 체계적인 저술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철학사가들은 단편적인 조각글로부터 일관되고 종합적인 체계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해 왔다. 또한 이후 등장한 수많은 철학자들은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1-2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에서 철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유년기 시절부터 서재의 책들을 읽으며 보냈던 그는 문학, 역사, 법률, 수학, 자연학, 화학, 신학 등의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보였다. 1661년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여 3년 만에 학사학위를, 그리고 1667년 21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교수직 제의를 거부하고 마인츠 대주교 아래로 들어가 외교관으로 일하며 몇몇 학문적 저술들을 대주교에게 헌정했다. 한편 그는 가톨릭이 지배하는 궁정에서 개신교도로 살면서 모든 기독교 교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교리들을 기반으로 기독교의 통합을 주장하는 여러 저술을 쓰기도 했다. 1672년 라이프니츠는 십자군 원정에 나서도록 루이 14세를 설득하는 비밀 임무를 띠고 파리로 갔으나 아무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르노와 말브랑슈를 만났으며, 다음 해에는 런던을 방문하여 보일과 올덴버그 등 왕립학회 회원들에게 학회의 회원으로 초대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1676년 미분법을 발견했는데, 사실 뉴턴이 이보다 먼저 미분법을 발견하였으나 출판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독일로 돌아오며 스피노자를 방문하여 <<에티카>>의 초고를 읽고 논평을 쓰기도 하였다.

1-3 이후 라이프니츠는 그가 이전부터 해왔던 기독교 호교론 전파에 관하여 가명으로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전 유럽의 기독교 국가를 연방으로 통합하여 황제는 세속적인 통치를, 교황은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분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 통합 계획을 후원했던 공작이 사망하자 계획은 무너졌다.

2.사상

2-1 1685년 겨울 라이프니츠는 그의 저술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형이상학 논고>>를 집필했다. 그는 이를 자신의 성숙한 철학 체계를 언급한 최초의 저술로 여겼다. 짧지만 명료한 이 저술은 오늘날에도 라이프니츠 철학체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입문서로 평가되며, 그의 철학이 지닌 많은 특징을 잘 보여준다.

2-2. 이 저술에 맨 처음 등장하는 주장은 우리가 항상 이성에 따라 질서 잡힌 방식으로 작용하는 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세계에 산다는 것이다. 각각의 개체는 자신의 내력을 통해 자신에 대해 참인 많은 술어들을 얻고, 이런 술어들 전체가 그 실체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의한다. 이런 실체들은 자신의 방식에 따라 세계를 표현하며, 특정한 관점에서 세계를 요약하는데, 이 실체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인간의 행위는 우연적이며 자유 의지에 의존한다. 선택 또한 근거는 있지만 그 근거가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체들은 서로 직접 작용할 수 없되, 한 실체에 일어나는 일이 다른 모든 실체에게 대응되도록 신이 배열해 놓았다. 결국 각각의 실체는 분리된 하나의 세계와 같으며, 신 이외의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2-3 인간의 정신은 모든 것들의 관념을 포함하며, 신을 제외한 어떤 외부적 대상도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관념과 의지 작용은 우리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신은 우리를 강제하지 않으면서 이끈다. 정신과 육체는 서로 상호작용을 주고받지는 않지만 사고와 육체적 사건은 서로 대응해서 일어나기 마련인데 그 까닭은 이들이 우리를 사랑하는 신의 섭리에 의해서 연결되기 때문이다(라고 적혀있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형이상학 논고>>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전통적인 기독교가 배경에 깔려 있으며, 이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주의 깊게 변형하려는 당시 대륙 철학자들의 시도가 드러남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체계가 지닌 특징을 데카르트, 말브랑슈, 스피노자의 체계와 대비하여 명확히 제시하면서 자신이 이들을 종합했다고 주장했다.

2-4.기독교 호교론 전파에 실패한 라이프니츠는 다른 방향으로 칼뱅주의 개신교도와 루터주의 개신교도 사이의 화해를 모색했다. 또한 그는 유럽 기독교 국가들을 하나의 연방으로 통합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두 가지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기독교 통합을 포기하지 않고 이후에도 가톨릭과 중국 유교의 신앙과 제사 사이에 조화를 모색하려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격려했다.

2-5. 한편, 로크의 본유관념 부정에 크게 자극받은 라이프니츠는 경험론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를 위하여 쓴 저술은 로크의 사망소식을 알고 출판하기를 단념하였고, 결국 라이프니츠의 사망 후 50년이 지난 뒤에서야 출판되었다. (<<신인간지성론>>)

2-6. 라이프니츠가 프로이센의 샤를로트 왕비에게 헌정한 <<변신론>>은 세계의 현실적인 악에 직면해서도 신은 여전히 정의롭다는 주장을 정당화한다. 이 책에서 그는 악으로 보이는 여러 현상에도 우리가 실제로 여러 가능 세계 중 최선의 세계에 산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낙관주의는 이후 볼테르의 강력한 비판을 받는다. ‘이것이 최선의 세계라면 다른 세계는 도대체 어떻다는 말인가?’

2-7. 1713년 출간된 <<모나드론>>에서 그는 <<형이상학 논고>>에서 암시했던 체계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모든 복합적인 것은 단순한 것들로 구성되며, 모든 단순한 것은 연장성을 지니지 않는다. 단순한 것이 연장성을 지닌다면 또 다시 분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순하고 비물질적인 어떤 요소를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라고 부르는데, 영혼과 유사한 정신적인 속성만을 지니는 무한히 많은 실체라고 생각했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드에게는 창문이 없으므로 그 무엇도 드나들 수 없다’고 말하며 다른 피조물로부터 인과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한다. 또한 신이 미리 모나드가 세계의 변화와 동시에 변화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2-8. 라이프니츠는 1716년 세상을 떠났는데 엄청난 분량의 미출판 원고와 수많은 미완의 계획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계획들은 남겨진 모든 저술을 포함한 전집을 출판하려는 사업과 함께 300여년이 지나도록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

 

홉스

1. 홉스

1-1. 1641년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고 평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인물 중에는 당대 최고의 영국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도 포함되었다. 홉스는 영국 함대가 스페인의 무적함대(Spanish Armada)를 격파한 1588년에 태어났기에 이런 요청을 받을 때는 53세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후 캐번디시 가문의 가정교사와 베이컨의 서기로 일했다. 1629년 투키디데스(Thucydides)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데카르트 친구인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메르센 신부는 그를 ‘철학의 모든 분야에 능통한 탁월한 학자’라고 기록했다. 1640년 홉스는 《자연법과 정치적인 법의 기초》를 영어로 출판하면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이 구성한 사회에 대한 그의 핵심적인 철학 원리들을 잘 드러냈다. 그 해 그는 장기 의회(Long Parliament)의 활동으로 내전을 예상하고 파리로 도피해 10년 이상 그곳에서 후에 왕위에 오르는 찰스 2세의 개인 교사로 지냈다. 그 동안 그는 《시민론》를 출판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상당한 명성을 그에게 안겨다주었다.

1-2.데카르트에 대한 홉스의 평가를 보면 홉스가 《성찰》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음이 드러난다. 이 두 철학자는 전통적으로 서로 정반대되는 철학의 양극단에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사실상 이 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예를 들어, 이 둘은 모두 수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홉스는 데카르트의 해석 기하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에 대해 ‘정합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묘하게도 말년에 홉스는 기하학 연구에 진지하게 몰두하며 옥스퍼드 수학 교수들과 몇 년 동안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외에도 데카르트와 홉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를 경멸했고 당시의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판을 치는 현실을 비난했다. 또한 둘은 한창 때를 망명 생활로 보냈으며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둘 다 스튜어트 왕가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이들은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을 경멸하며 모국어로 글쓰는 능력이 탁월해 전문 학술서뿐만 아니라 대중을 위한 책도 썼다.

이 두 철학자가 서로 일치된 의견을 보인,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논점은 이들이 각각 물질세계는 오직 운동의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확신한 점이다. 홉스는 ‘일반적인 사물의 원인은 저절로 드러나거나 아니면 사물의 본성을 통해 알려진다. 따라서 어떤 방법도 전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물은 모두 오직 하나의 보편적인 원인, 바로 운동이라는 원인을 갖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홉스는 데카르트와 같이 색과 소리 같은 제이성질과 같은 모든 우연적 속성들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점을 부정하며 광학이 감각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데 같은 의견을 보인다.

1-3.홉스는 데카르트의 철학의 절반, 즉 물체에 관한 철학과는 상당히 유사한 견해를 보이지만 나머지 절반, 즉 정신에 관한 철학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사실 홉스는 데카르트가 생각한 의미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홉스는 연장성을 지니지 않고 운동하지 않는 비물질적인 실체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천사든 신이든 비물질적인 정신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홉스의 유물론에 대해 신의 존재를 그가 어떻게 여겼는지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인간이 정신과 물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된다는 이원론을 확실하게 거부했다는 점이다.

데카르와 홉스는 수많은 철학적 태도와 선입견들을 서로 공유했지만 홉스는 유물론을 선택함으로써 데카르트에 반대하는 대표적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유물론과 이원론이라는 형이상학적 차이에 더하여 철학사가들은 이 둘을 인식론에서 반대되는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의 창시자로 여긴다. 사실 이 두 학파의 차이는 표면상 드러나는 것만큼 크지 않다.

1-4. 홉스는 데카르트보다 거의 30년을 더 살았지만 1650년 데카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프랑스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파리에서 신교도로 사는 것과 그를 구교도로 개종시키려는 메르센의 시도에 큰 불편함을 느꼈다. 또한 큰 병을 앓으면서 영국 성공회이ㅡ 의식에 따르겠다고 고집하기도 하면서 파리 마지막 해에 철학사에 영원히 남게 될 《리바이어던 또는 교회 국가 및 시민 국가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권력》을 썼다.

어떤 국가 조직도 없는 자연 상태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이런 자연 상태는 오직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에 지나지 않음을 보임으로써 홉스는 사람들이 합리적인 자기이익의 원리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무제한의 자유를 포기하고 결국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부과되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제한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자기 이익의 원리에 따라 사람들은 자기방어의 권리를 제외한 다른 권리들을 중앙의 권력에게 양도함으로써 이 권력이 처벌을 통하여 법률을 강요할 수 있도록 만든다. 여기서 맺은 사람들이 맺은 계약을 통해 최고 통치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계약에 참가하지 않으므로 위반할 계약 자체가 없다. 이런 통치자는 법률과 재산권의 근원이 되며, 국가를 구성하기 위한 최초의 계약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서로 맺은 개별적인 계약을 지키도록 강제한다.

1-5.《리바이어던》은 1651년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이 저술에는 절대 왕정을 세련되게 지지하고 있지만 당시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찰스 2세는 이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당시 찰스 2세가 궁정에서 추방당하고 홉스의 구교도 친구들도 세상을 떠나자 그는 영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영국은 찰스 1세의 처형 이후 호국경(Protector) 크롬웰(Oliver Cromwell)의 통치 아래 있었다.

크롬웰의 통치 기간 동안 홉스는 조용히 런던에 머물면서 정치철학에 관한 어떠한 저술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홉스는 자연철학에 관한《물체론》을 1655년 라틴어, 1656년 영어로 출판하고 밀턴의 《실낙원》에 등장하는 구절에 대해 브램홀 주교(Bishop Bramhall of Derry)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658년 홉스는 《인간론》을 라틴어로 출판했는데 이 또한 《시민론》과 마찬가지로 《법의 기초》에 등장했던 몇몇 사상들을 영어권 외부의 독자를 위해 다시 쓴 것이었다.

홉스는 1660년 찰스 2세가 영국으로 돌아와 왕위에 복귀하면서 궁정의 환영과 연금을 받게되었지만 다른 신하들로부터는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리바이어던》은 심각한 의혹의 대상이 되어 몇몇 주교들이 그를 이교도의 죄를 물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다.

1660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홉스는 런던과 체츠워스(Chatsworth), 하드윅(Hardwick) 등지의 데번셔(Devonshire) 백작 가문의 저택에 주로 머물렀다. 그는 더 이상 철학에 관한 저술을 쓰지 않고 《일리아스》《오디세이》번역에 몰두하면서 《베헤못》이라는 영국 내전의 역사에 관한 저술을 출판하려했지만 왕의 만류로 포기했다. 그는 1679년 91세의 나이로 하드윅 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말년에 파킨슨병에 걸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기찬 삶을 유지했다고 한다.

1-6. 홉스가 철학사에서 명성이 높은 까닭은 주로 그가 정치철학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언어철학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언어는 우리를 야수와 구별해주며, 학문을 추구할 수 있게 한다고 역설한다. 언어의 목적은 우리의 사고 과정을 연속된 단어로 바꾸는 것인데, 언어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첫째, 과거와 현재 모든 것들의 원인, 결과를 기록하는데 사용한다. 둘째, 얻은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상의하며 가르치는데 사용된다. 셋째, 우리의 의도와 목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 서로 도울 수 있게 사용되며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데 사용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언어의 네 가지 효용과 대비되는 네 가지 악용의 사례도 있는데 이런 악용을 피하려면 대단한 수고가 필요하다. ‘언어는 마치 돈과 같다. 현명한 사람들은 오직 계산을 할 때만 이를 적절히 사용하지만 바보들은 이를 무턱대고 써버린다’

홉스는 철저한 보편명목론자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단어들은 이름뿐인데 이름은 오직 개체들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름이 어떤 형태를 취하던 간에 그것은 하나 또는 다수의 개체 이외의 어떤 것도 결코 지시할 수 없다. ‘인간’과 같은 보편적인 이름은 세계 안의 어떤 보편적인 사물이나 우리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체들을 지시할 뿐이다. ‘이 세계에서 이름을 제외하면 보편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이름은 그것에 속하는 모든 개별적인 개체들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홉스는 이름들이 한데 모여 문장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만일 ‘소크라테스는 정의롭다’라고 말하면 여기서 ‘정의롭다’와 ‘소크라테스’와의 관계는 이 단어의 관계와 동일하다. 또한 문장 안에서 두 이름이 모두 동일한 것을 지시할 경우 그 문장은 참이 되는 반면 두 이름이 동일한 것을 지시하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

홉스의 두 이름 이론은 소박한 형태의 의미론에 해당하지만 이에 대하여 이미 중세부터 등장했고 특히 19세기 프레게(Gottlob Frege)의 저술을 통해서 제기된 심각한 논리적 비판을 견디지 못했다. 홉스식의 이론은 중세의 오컴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미숙했지만 그의 이론은 영국 경험론자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그들 자신이 오컴과 홉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2.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

2-1.  17세기 중반 홉스 및 데카르트와 다른 견해를 보이는 여섯 명의 영국철학자들이 등장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커드워스(Ralph Cudworth, 1617~88)를 비롯한 다섯 명은 케임브리지의 엠마누엘 칼리지를 졸업했으며, 다른 한명인 모어(Henry More, 1614~87)는 크라이스트 칼리지를 졸업했는데 커드워스는 이 칼리지에서 30년 동안 교수생활을 하기도 했다. 추종자들은 이 들을 존경, 찬양하며 이 그룹을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케임브리지 출신이었지만 당시 영국 내전 동안 케임브리지 지역과 대학을 지배했던 청교도주의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이들은 칼뱅의 예정은총설을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이 지닌 장점을 주장했다. 하지만 무신론자에게까지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는데 특히 이들은 홉스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홉스의 유물론이 결국 무신론에 이르리라고 본 것이다. 또한 이들은 찰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 성공회를 중심으로한 계층 질서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했으며 결국 찰스 1세의 퇴위와 처형으로 이어지게 했다. 그들은 ‘주교 없이는 왕도 없다’는 정치 구호를 ‘정신 없이는 신도 없다’고 외치면서 유물론자인 동시에 유신론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데카르트 편에 서서 홉스에 반대하는 특히 정신과 물체의 구별을 강조했다. 모어의《무신론에 대한 해독제》《영혼의 불멸성》, 커드워스의《우주의 진정하한 지적 체계》 등의 저술을 통해 이들이 인간 영혼의 불멸성과 정신적인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데 얼마나 몰두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모어는 인간이 ‘감각과 이성 그리고 지상의 여러 가지를 인간에게 적합하게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정신적인 피조물’이라고 보았고 커드워스는  우리 안에 신의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현존이 증명된다고 주장한다. 신의 관념은 일관성을 지니고 실제적이거나 실재를 필요로하기 때문에 신은 반드시 현존한다는 것이다.

2-2.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본유 관념의 존재를 믿었다. 이들에 따르면 정신은 텅 빈 백지가 아니라 닫혀있는 책과 같다. 감각은 단지 이 책을 여는 역할을 할 뿐이다. 모어는 정신 안에 다양한 본유관념이 들어있다고 보았는데 이 중에는 근본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도덕원리들도 포함되어있다. 커드워스는 정의와 불의가 단지 인간이 맺은 계약의 결과로 등장한다는 홉스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의 삶과 죽음의 권한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를 통치자에게 양도할 법 따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근본적인 도덕 원리들의 근거를 설명하면서 데카르트와 의견을 달리한다. 커드워스는 도덕을 비롯한 다른 영원한 진리들이 신의 전능한 의지에 의존하기에 원리상 변화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덕과 신성함은 신이 이들을 사랑하여 선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선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오직 그 자체로 선하기 때문에 신은 이들을 사랑할 뿐이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물체의 세계에 대한 데카르트의 설명을 접한 후 그와 더욱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과학의 새로운 발전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현상을 기계론적인 운동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부했다. 이들은 데카르트와 달리 동물도 의식과 감각적 영혼을 지닌다고 믿었으며 심지어 낙하 운동을 설명할 때에도 비물질적인 원리의 작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신이 모든 것을 직접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신이 물리적 세계에 일종의 매개체로서 규칙적이고 목적론적으로 작용하는, 세계 영혼과 유사한 ‘균형 잡힌 세계를 형성하는’ 임무를 맡겼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데카르트와 같이 목적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기계론적인 유신론자’에 지나지 않고 홉스같은 유물론자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보았다.

갈릴레오부터 베이컨까지

1.갈릴레오

1-1. 종교 재판에 넘겨져 고통받은 또 한 사람의 이탈리아 철학자 갈릴레오(Galileo Galilei)에게로 눈을 돌리면 브루노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발견한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동시대를 살고 피사(Pisa)에서 태어난 그는 1589년그 곳 대학의 수학교수가 된 뒤 1592년 파도바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18년동안 교수생활을 했다.

갈릴레오는 이미 젊은 시절에 여전히 당대를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브루노처럼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실험과 관찰 결과에 기초하여 비판했다.  그는 성당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등의 운동을 관찰한 후 추가 한번 진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오직 추가 맫라린 줄의 길이에 좌우될 뿐 무게나 진동의 크기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피사의 사탑에서 서로 무게가 다른 쇠공을 떨어뜨려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낙하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잘못임을 증명했다고 전해지는데 실제로 이 실험은 행하지 않았음이 거의 확실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기초한 ‘외부의 원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어떤 물체도 운동하지 않는다’는 원리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저항이 없을 경우 서로 다른 무게의 물체가 주어진 거리를 낙하하는 데 동일한 시간이 걸리고, 두 물체에 작용하는 가속도가 일정하다는 사실을 실제로 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또한 그는 정반대로 운동하는 물체가 마찰과 같은 정반대로 작용하는 힘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 계속 운동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후에 데카르트와 뉴턴이 주장한 관성의 원리들을 예건했다.

1-2. 역학을 다룬 저술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그는 위대한 과학자의 반열에 오르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는 또한 유체 정역학의 분야에서도 중요한 사실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에게 명성과 시련을 안겨 준 것은 천문학 연구였다. 그는 새로 발명한 망원경을 통해 목성을 네 위성을 발견하고 이 위성들을 토스카나의 코시모 2세 대공을 기리는 의미에서 ‘메디치 가문의 별들’이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그는 태양의 흑점,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천체가 투명한 5원소가 아닌 지구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을 묶어 그는 1610년 «별들의 소식»이라는 책을 출판해 코시모 대공에게 헌정한 뒤 토스카나 궁정의 종신 철학자 겸 수학자로 임명되었다.

이런 일 후 그는 금성이 가로지른 행성이 달의 위상과 유사한 위상을 보인다는 사실을 관찰한 후 금성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할 때만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의 행성으로서 자신의 궤도에 따라 운동하는 목성의 주위를 도는 위성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지지하는 강력한 근거로 제공했다.

처음에 그는 이러한 자산의 천문학적 발견을 통해 얻은 결론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데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로마 교무 위원회가 그의 관찰에 대해 공식적인 지적을 한 뒤 부터 그는 태양 중심설에 기초한 여려 견해를 폭넓게 전파했다. 마침내 1613년 그는 태양의 흑점을 다루는 책의 부록에서 자신이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한 성직자는 이를 태양 중심설을 성서에 어긋나는 것으로 비난했다. 이에 갈릴레오는 로마로 가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해명하기로 결정했다.

로마로 떠나기 전 그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예수회 출신의 추기경 벨라르미노(St. Robert Bellarmine)에게 편지를 써서 태양이 운동한다고 말한 성서 저자들의 언급은 단지 관용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벨라르미노는 이 문제를 종교 재판소에서 논의 한 후 태양 중심설이 이단이며 지동성은 오류를 범한 것이라는 의견을 내렸다. 당시 교황 바오로 5세의 훈령에 따라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그에게 어떠한 주장도 옹호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했다.

이렇게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벨라르미노는 당시 가장 위대한 과학자보다도 더욱 건전하게 과학철학을 파악했으며, 갈릴레오는 당시 가장 유명한 신학자보다도 더욱 건전하게 성서를 해석했음을 드러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둘의 대립은 수긍할만하지만 논쟁 과정에서 양측 주장이 서로에게 진정 공정하게 반영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실제로 갈릴레오가 자신의 저술이 정죄 받지 않은 그 후 몇년 동안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다.

1624년 갈릴레오는 다시 한 번 로마로 갔다. 당시 바오로 5세 와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이미 세상을 떠나씅며 우르바누스 8세가 새로 교황의 자리를 오른 뒤였다.  새 교황은 갈릴레오의 천문학적 발견을 열렬히 옹호했으며 갈릴레오는 태양 중심설을 선호하지 않고 두 우주관을 공정하게 다룬다는 조건으로 프롤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을 다룬 체계적인 저술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632년 갈릴레오는 교황청 검열관의 승인을 얻은 후 «두 가지 중요한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를 출판했다. 그러나 책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 중 전통적인 지구 중심설을 옹호하는 심플리키우스의 이름이 ‘바보'(simpleton)라고 해석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갈릴레오는 교황의 분노를 샀다. 결국 1633년 갈릴레오는 로마의 종교재판소에 회부되어 태양 중심설을 취소하지 않으면 고문을 당하리라는 위협을 받았다. 그는 종신형 판결을 받았지만 실제로 감옥에 갇히지 않고 가택 연금 상태로 지냈다.

가택 연금 상태였지만 그 동안 그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당시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 새로 세워진 하버드 대학교에서 초빙교수직을 제안받기도 했다. 그는 점점 눈이 멀어갔지만 저술 활동을 멈추지 않고 필생의 대작인 «새로운 두 과학에 관한 논의와 수학적 증명»을 완성했다. 이 책은 1638년 레이덴에서 출판되었으며 그의 저술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갈릴레오는 브루노를 비롯한 다른 많은 종교 재판소의 죄인들에 비해 훨씬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그에 대한 유죄 판결은 전 유럽에 걸쳐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우선 이탈리아에서 과학적 탐구가 쇠퇴하고 심지어 개신교가 지배한 네덜란드에서조차 데카르트가 자신의 과학적 우주론을 출판하는 것을 몇년씩 미루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교가 갈릴레오에게 잘못을 저질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으나 이미 350년이나 지난 후였다.

2. 베이컨

2-1. 갈릴레오와 같은 시대에 영국에서 활동했던 베이컨(Francis Bacon)은 갈릴레오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반감을 품었지만 과학적 방법의 실천보다는 그것에 대한 이론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1561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후 그레이스 인(Gray’s Inn)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584년 의회에 진출했으며 뒤이어 당시 영국 여황 엘리자베스의 총애를 받던 에섹스 백작(the Earl of Essex) 변호인이 되었다. 하지만 백작이 반역을 일으키자 베이컨은 그를 반역죄로 기소하는데 앞정섰으며 그후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베이컨은 법무 차관이 되었다. 그는 1606년 철학적 저술 중 최초의 것인 «학문의 진보»를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과학의 여러 분야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생애 중 전성기는 1618년 베룰람 경(Lord Verulam)이라는 호칭과 함께 대법관에 임명된 때였다. 동시에 그는 «위대한 부활»이라는 제목의 방대한 저술을 계획했는데 책의 목표는 모든 지식을 각자의 적절한 영역에 배정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직 두 부분만 완성되었는데 하나는 위의 «학문의 진보», 다른 하나는 바로 과학적 방법을 다룬것으로 유명한 «새로운 오르가논»(Novum Organum)이다.  그는 1612년 뇌물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지만 과학과 역사에 관한 저술을 멈추지 않았다. 1626년 런던 북쪽 하이게이트에서 냉동실험을 하다가 심한 감기에 걸려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과학의 순교자라는 이야기까지 듣고 있다.

2-2.베이컨은 «과학의 진보» 2권에서 인간의 학문을 세가지로  나눈다. 이 세 분야는 각각 인간의 지성의 세 부분과 관련되는데, 인간의 기억력은 역사학, 상상력은 시가, 이성은 철학과 관련된다. 그는 시가를 건성으로 다루면서 가장칭찬하는 시가는 바로 이솝 우화와 같은 도덕적 교훈을 전하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반면 역사학과 철학에 대해서는 상당히 길게 언급한다.

먼저 역사학은 자연사와 시만사로 나뉘는데 시민사는(Civil history)는 현재 우리가 역사학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자연사는 더욱 넓은 분야로 다시 세부분으로 나뉜다. ‘정상 경로에 따르는 자연을 다루는 역사학’, ‘정상 경로를 벗어난 다양한 자연을 다루는 역사학’, ‘변화하거나 변형된 자연을 다루는 역사학’으로 나뉜다. 그는 세번째 분과인 ‘만들어진 또는 가공된’ 자연의 역사를 가장 중요하고 유용한 것으로 보면서 이것의 가치가 특히 실용적인 적용과 효용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2-3. 철학을 분류하면서 베이컨은 우선 ‘신에 관한 철학’ 또는 자연 신학을 한쪽으로 제쳐 두면서 이는 무신론을 반박하기에는 충분할 지 몰라도 종교에 관한여 알려주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후에 그는 철학을 자연에 관한 철학과 인간에 관한 철학으로 나눈다. 자연에 관한 철학은 사변적이고 실용적인 영역이 있는데 사변적 영역에는 자연학과 형이상학이 포함되며 , 실천적 영역에는 역학과 마법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역학은 자연학을 현실에 적용한 것이고 마법은 형이상학을 현실에 적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철학을 이렇게 과감하고 도발적인 방법으로 분류한 시도는 겉보기 만큼 명확하지 않으며, 베이컨이 서로 다른 다양한 분야에 붙인 명치은 매우 기묘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그가 분류한 자연적 마법은 연금술이나 점성술 같은 미신적인 억지 주장과는 명백히 분류되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무슨 생각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한 물음은 자연학이 사물의 동력인과 질료인을 다루는 반면 형이상학은 목적인과 형상인을 다룬다는 대목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그는 나침반을 역학이 아니라 마법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배를 운동하게 하는 항해는 자연학이지만 배의 방향을 인도하는 나침반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형이상학’이라는 용어를 다른 학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른 학자들이 말하는 형이상학을 그는 ‘제일철학’, ‘개괄철학’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그는 이 철학이 어떤 분과에서도 배제되지 않는 보편적 원리들을 다루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설을 기초로 자연학과 형이상학을 구별한 시도는 그 자체로 이미 잘못된 것이다. 그의 도식 중 자연적 마법의 영역에서는 목적론이 차지할 공간이 전혀없다.  또한 그는 형상에 대해서 이런 것들이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하여 발견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들을 탐구하는 대신에 글자를 결합하는 형상과 같이 단순한 형상에에 주목해야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기본적 형상들은 갈릴레오가 쓴 수학적 도형이나 기호와 같은 알파벳과 비교할 때 상당히 모호하다.

철학의 또 다른 즁요 분과인 인간에 관한 철학도 자연에 관한 철학과 마찬가지로 두 영역으로 나뉜다. 베이컨은 그 중 하나는 ‘인간을 분리하여’ 고찰하는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통합하여’ 고찰하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후자는 오늘나 사회과학으로 불리는 학문들이다. 다시 이 아래에 속하는 세부분과들을 지정하면서 베이컨은 제멋대로 혼란스럽게 여러 학문들을 나열한다.

그리고 베이컨이 인간의 능력을 분류하면서 처음에 매우 중요한 지위를 부여한 상상력에 대해 그는 단지 다른 능력들의 시중을 드는 하인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상상력이 간혹 이성에 승리를 거두기도 하는데 종교적 믿음의 경우에 이런일이 일어난다,

2-4.베이컨이 인간의 정신을 마치 권력이 분리되어 각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처럼 서로 다른 능력들이 적절하게 배열된 일종의 내적인 사회로 여겼다는 점은 명백하다. 사화과학 자체를 다루면서 그는 이를 다시 우정, 사업, 정부와 관련하는 영역으로 나눈다. 정치의 경우 시민에 관한 철학의 일부인데 인간이 사회생활을 함으로써 얻는 이익을 다루는 영역이다.

베이컨은 분류 작업을 마친 후 스스로 자랑하지만 그가 제시한 방대한 목록에 포함도니 다양한 학문들이 같은 수준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어떤 학문은 완벽한 수준에 도달한 반면 다른 학문은 상당히 부족한 수준이라고 보았다. 그 중 논리학이 가장 수준이 떨어지는 학문이라고 보았는데 논리학의 문제를 과학적 발견에 관한 이론이 없다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논리학의 공백을 메우려는 작업에 착수하여 과학적 탐구를 인도하기 위한 나침반을 제공하려 한다.

탐구 방법에 관해 베이컨은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 모두를 포함한다. 탐구자의 첫번째 임무는 소극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관찰에 선입견을 도입하는 요소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다. 베이컨은 이런 선입견으로 네 가지를 지적하면서 이들을 ‘우상’이라고 불렀다. 이 우상에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있는데 종족의 우상은 경우는 사물을 표면적인 현상으로 판단하려는 성향을 말한다. 동굴의 우상은 객관성을 저해하는 개인의 기질적 특성을 의미하며 시장의 우상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숨어있는 언어의 함정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가식적인 무대 연기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그릇된 철학 체계를 의미한다.

탐구자의 적극적인 임무는 바로 귀납이다. 특수한 경우들을 체계적으로 검토함을써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귀납이 자연의 부적절한 사례에 기초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주의 깊게 체계화된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절차에 관한 규칙을 소개하면서 그는 귀납의 진정한 역할은 현상 X의 형상을 설명하는 후보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시작할 때 드러난다고 보았다. 귀납의 성공적인 후보가 되려면 X가  발생할때 나타나는 성질을 나타내야하며 동시에 X가 발생할 때 나타나지 않는 성질을 나타내지 않아야한다.

그러나 그는 목표로 삼았던 일련의 지침을 결코 완성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의 체계가 ‘귀납 논리’에 이르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연법칙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사례보다 소극적인 사례가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논점을 지적했다. 20세기 철학자들은 자연법칙이 결정적으로 검증될 수는 없지만 결정적으로 반증될 수는 있다는 점을 지적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영예를 그에게 서슴지 않고 부여한다.

아퀴나스 사후부터 둔스 스코투스까지

1.아퀴나스 사후

1-1. 아퀴나스가 13세기에 사망한 후 몇 해 안되서 그의 견해 중 일부는 파리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가르칠 수 없는 등 그에 대한 평판은 매우 다양하고 변화무쌍했다.   하지만 1316년 교황 요한네스 22세가 아퀴나스를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작업을 시작으로 겨우 50여 년전에 그의 저술 전반이 신학적으로 건전하다고 판정 받았다. 트렌토 공의회의 심의를 통하여 «신학대전»이 성서에 필적하는 저술이라는 영예로운 지위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1879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한 아버지’가 발표된 이후에야 비로소 아퀴나스는 이른바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의 공식 신학자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그를 추대하는 과정에는 많은 부작용도 낳았는데 우선 가톨릭교도가 아닌 철학자들이 아퀴나스를 철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길이 막혔고 철학자들이 단지 특정한 교회 조직의 대변인 정도로 생각한 인물들이 이들의 연구를 제한하고 억압한 결과를 초래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아퀴나스에게 존경을 표하지만 동시에 그의 복잡하고 세련된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그를 추종하고 미숙하게 그의 사상과 논증을 설명했다.

1-2. 현재 아퀴나스 연구는 새로운 관심 속에 놓여져있다.  이러한 관심은 그의 저술을 해석하고 받아들였던 이전의 태도에 비해 훨씬 다양한고 비판적으로 이루어져있으며 그의 저서의 라틴어를 번역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또한 그의 저서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예를 드는데 매우 인색하다. 설령 예를 든다 할 지라도 간접적이거나 진부한 수준에 그친다.  그리고 그의 천재성을 찬미하며 그의 저술을 잘 해명된 상태로 소개하고 싶어하는 학자는 그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일종의 불명료함을 지닌다는 것을 알아야한다.이는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철학적 불일치를 일으키는 근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는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조화시킨 인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저술에서는 플라톤주의적 요소도 상당 부분 발견된다. 현대 그의 많은 학자들은 그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더 많은 비중을 두려고 하지만 이에 반대하면서 플라톤적인 아퀴나스에 동조하는 학자들도 있다. 사실 아퀴나스 자신은 지상에 관련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지만 천상과 관련해서는 플라톤주의자였다.

2.브라방의 시제와 로저 베이컨

2-1. 만년에 아퀴나스는 파리대학에서 극단적 형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와 논쟁을 벌어는데 많은 정력을 소모했다. 이들 중에는 세계가 항상 존재하고 모든 인간에게 오직 하나의 지성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서 하나의 지성에 관한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권위있는 주석가인 이른 루슈드가 선호했다. 이러 학자들은 자주 ‘라틴 세계의 이븐 루슈드주의자들’이라고 불렸는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브랑방의 시제(Siger of Brabant, 1235~82)였다.

2-1-2. 이러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가르침은 시간상의 어떤 지점에서 이루어진 창조와 개별적인 인간 영혼에게 내세가 있다는 기독교 교리와 조화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1270년 파리 대주교는 ‘모든 사람의 지성은 동일하며 수적으로 하나이다’, ‘최초의 인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명제로 시작되는 13개의 교리를 정죄했다. 이 정죄는 부분적으로 아퀴나스가 시제의 특징적인 교리를 반대하기 위해 쓴 글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시 젊은 학자들은 이 둘이 같은 유형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정죄된 명제들에서는 시제와 아퀴나스로부터 도출된 주장이 함께 포함되있었고 단테가 이둘을 나란히 천국에 올리고 아퀴나스로 하여금 시제를 통해 영원한 빛을 던진 인물로 칭찬하게 만들었가 때문이다. 단테는 전문적 철학적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그의 «신곡»을 통해 스콜라철학의 이론을 절묘한 시구로 표현했으며 «제정론»을 통해 인간의 지적인 발전이 오직 평화인 상태에서 이루어지며 평화는 어떤 초자연적인 권위,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아래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직접 철학에 기여하였다.

2-2. 단테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아 바로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인데 그는 시제보다 십여 년 정도 오래살았다. 그는 1210년 경 일치스터에서 태어나고 1247년 옥스퍼드 대학 하굽에서 배우고 가르쳤다. 이 후 그는 파리로 거처를 옮기고 십년 후쯤 프란체스코 교단에 가입했다. 그는 파리를 싫어했지만 그에게 과학적 탐구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가르쳤던 마리쿠르의 피에르(Peter of Maricourt)만은 유일하게 높이 평가했다.  피에르는 철학에서 확실성에 이르는 문과 열쇠가 바로 ‘수학’이라고 믿도록 인도한 인물이다. 하지만 1257년 그가 속한 프렌체스코 교단 지도자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강의를 금지했지만 저술은 계속 허락되었다. 심지어 교황 클레멘스 4세는 그의 저술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2-2-1.그는 철학에서 실험의 역할을 강조한 17세기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등장을 예견한 선구적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대저작»에서 권위에의 복종, 맹목적인 습관, 대중의 섭입견, 우월한 지식을 지녔다는 가식적 태도 등이 오류의 근원으로 지적했으며 고대의 언어에 대한 탐구와  진정한 수학의 획득이  학문적 탐구의 필수적인 두 가지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그는 경험과 무관한 추론은 우리를 올바른 결론으로 이끌지만 오직 경험만이 우리에게 확실성을 제공한다고 말하면서 실험 과학(scientia experimentails)을 명백히 제시하였다.

3. 둔스 스코투스

3-1.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에 대한 생애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거의 추측에 의존하낟. 그에 대한 모든 설명은 문서 기록이 전하는 확실한 다음의 네 날짜에 기초한다. 먼저 1291년 3월 17일 노샘프턴(Northampton)에서 사제로 임명되었고 1300년 7월 26일 프란체스코 교단 소속의 탁발 수도사로 옥스퍼드에 머물렀는데 고해성사를 들을 자격을 얻으려 하였지만 실패했다. 1304년 2월 30일 그는 쾰른에서 신학을 강의하는 자리에 있었고 그가 사망한 날짜는 정확하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1308년 11월 8일로 알려져 있다.

3-2. 그의 저술은 많은 필사본이 전해지지만 이들의 진위와 쓰인 시기는 생애의 상세한 내용만큼이나 지극히 모호하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이들 대부분은 미완성인 단편의 형태로 남았는데 그 후 수세기를 걸쳐 여러 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편집되고 저술로 완성되었다. 20세기에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그가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에 대한 주석 대부분이 후대의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판명되었다. 여전히 그의 작품으로 인정된 것은 «범주론»,«명제론», «소피스트 식 논박»에 대한 주석과 포르피리오스에 대한 주석뿐이다. 그리고 «신학명제집»은 상당한 논란이 되었지만 저술 중 처음 두 권에 대한 강의록은 그가 직접 단 주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두 권은 «강의록»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정리집»이라고 스코투스 자신이 직접 최종적으로 손실하여 완성하지는 않았지만 비판적으로 검토한 끝에 출판되었다. 이 «강의록», «정리집»은 현재 스코투스를 연구하는 철학자와 신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헌의 역할을 하고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그의 성숙한 사상을 엿볼 수 있다.

3-3. 그의 저술을 읽기란 결코 쉽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의 언어는 이해하기 어려울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전문적이고 독자들에게 불친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철학을 탐구한 모든 학자를 통들어 가장 날카롭고 예민한 정신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많은 주제들에게 아퀴나스와 정반대되는 태도를 취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조금 앞서 활동한 강의 앙리와 다른 의견을 보인다는데 스스로 큰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앙리는 1276년부터  1292년까지 파리 대학에서 당시 인문학부의 일부 학자들이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택하는데 반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식의 신플라톤주의가 내세웠던 많은 주장들을 옹호했던 인물이다.

3-3-1. 그는 존재를 비롯하여 ‘좋음’과 같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다른 술어들을 서로 유사한 많은 것들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의미만을 지니며 피조물에 대하여 사용될 때와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로 신에게도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통과 결별하였다.  또한 그는 형이상학을 존재자체로서 존재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면서 존재 안에 기독교적인 무한한 신을 포함시킴으로써 존재의 범위를 매우 크게 넓혔다. 또한 그는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비판하면서 신의 현존을 확립하기 위한 자기 자신의 매우 정교한 형이상학적 증명을 제시한다. 그는 아퀴나스와 달리 신의 속성을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보았다.

3-3-2.  그는 ‘질료,형상,실체, 우연’등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질료형상론의 구성 요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 그러나 이런 용어들 대부분은 근본적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공간에 대해서 근느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단지 물체의 가능성만으로도 진공을 둘러싼 벽을 유지하고 공간을 확보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또한 시간에 대해서 그는 시간은 단지 운동을 위한 잠재성만을 측정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운동없이도 시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으로 그는 가능 세계에 관한 철학의 창시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3-3-3. 그는 또한 아퀴나스와 비교하여 인간 지성의 영역을 두 방향으로 확정했다. 아퀴나스와 달리 그는 각각의 존재가 자신의 내부에 개체화의 원리를 지니고 이를 파악할 수 있기에 지성은 각 개체의 단일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우리가 현세와 내세를 고려한다면 지성의 적절한 대상은 존재만큼이나 넓다고 말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지성이 보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신으로부터 특별한 조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앙리의 주장을 거부하지만 그의 인식론에서 신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모순과 함께 존재할 수 없기에 우리를 속이는 방식으로 절대적 능력을 발휘하지 않기 때문이다.

3-3-4. 그는 심리철학과 관련해서 지성과 의지 사이의 관계를 언급한다. 그는 아퀴나스가 의지를 본질적으로 실천적 추론의 유연한 본성에 기인해 자유를 얻게된 이성적 욕망으로 본 것과 달리 의지를 일종의 통제력이라고 보았다.  의지는 이성적 능력으로 다양하게 발휘될수 있지만 이 말이 의지의 발휘가 이성의 아래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인간과 신의 의지를 어떤 철학자보다도 훨씬 넓은 능력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의지는 서로 정반대의 것들도 원할 수 잇는 능력이며 신의 의지 또한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넓은 의미로써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신은 많은 사람들이 자연법이라고 믿는 것들까지도 마음대로 면제하거나 폐기할 수 있다.

중세철학 – 아벨라르 부터 마이모니데스 까지

  1. 아벨라르

1-1 아벨라르는 로슬랭의 가장 유명한 제자이며, 그의 편지는 로슬랭이 논리학 저술을 남겼을 것이라는 증거로 남아있다. 그는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이 각 개인 안에 존재한다는 보편 실재론보다는 스승의 유명론을 지지하였으며, 믈룅에서 그의 초기 작품들, 즉 아리스토텔레스나 포르피리오스, 보이티우스의 논리학 저술에 대한 주석을 주로 남겼다.

 

1-2 결혼한 이후 그는 생드니의 수도원에서 교육활동과 저술활동을 계속 이어 나갔는데, 《최고선의 신학》은 아벨라르가 이 시기에 남긴 작품이다. 1130년 초반에 다시 파리로 거처를 옮기면서도 《너 자신을 알라》, 《예 그리고 아니오》, 앞선 ‘최고선의 신학’을 발전시킨 《학자들의 신학》 등등을 펴냈다. 하지만 이러한 저술들 때문에 그는 교회와 많은 마찰을 빗기도 했다.

 

1-3 아벨라르가 철학사에서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논리학과 스콜라철학의 방법에 미친 영향 때문이다. 그가 저술활동을 벌이던 시기에는 라틴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술이 전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벨라르가 논리학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은 자신의 통찰과 독창성을 통하여 중세의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당시의 교수법을 이끌어 낸 사람도 아벨라르였다. 상급 학생과 하급 학생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고 교수가 판정하는 식의 교육 방법이 그것이다. 이는 아벨라르의 저술에서도 자주 등장하며, 중세의 전성기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가장 널리 쓰였다.

  1. 이븐 루슈드

2-1 콩슈의 기욤, 푸아티에의 쥘베르, 독일출신의 위그, 스코틀랜드 출신의 리샤르 등등 아벨라르와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기독교인들도 철학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정작 아벨라르와 필적할 만한 당시의 철학자들로 이슬람교도인 이븐 루슈드와 유대교도인 마이모니데스를 꼽는다.

 

2-2 이븐 루슈드는 이슬람교도이면서도 철학을 옹호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 이성이 신학적 문제를 탐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적절한 지적능력을 지닌 사람은 스스로 율법을 지킴과 동시에 철학의 탐구 또한 의무로 생각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이중진리론이 아닌 그저 진리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의 수준을 구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2-3 이븐 시나를 통렬히 비판했던 알 가잘리에 대응한 이븐 루슈드는 두 사람의 입장 사이의 어딘가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 창조에 대해서는 이븐 시나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존재와 현존사이의 이분법 및 신을 대신한 존재가 현실 세계의 본성적 형상을 만들었다는 주장은 거부하였다. 또한 그는 창조된 우주에는 진정한 인과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알 가잘리에 반대한다. 하지만 인간 지성에 대해서는 인과성의 역할을 이븐 시나보다도 축소한다. 그에게는 수동적 지성조차 단일하고, 초자연적이며, 비물질적인 실체다.

 

2-4 이븐 루슈드의 가장 큰 공헌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을 38편이나 남겼다는 것이다. 그의 주석은 분량에 따라 긴 것, 중간 것, 짧은 것으로 나뉜다. 이븐 루슈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최고의 천재로 평가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당연히 그보다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플라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2-5 그는 동료 이슬람교도들에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저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석을 중세 라틴 세계에 전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13세기 중요한 철학자들이 다룬 주제를 미시 제시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에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자들에게 이븐 루슈드는 진정한 주석가였다.

 

  1. 마이모니데스

3-1 마이모니데스의 명성은 신이 내린 명령의 목록을 정리했다던가, 토라의 요약본을 쓴 것과 같은, 유대교 율법학자라는 그의 역할에서 나온다. 무엇보다도 《혼란에 빠진 자들을 위한 길잡이》라는 그의 저서가 마이모니데스의 명성에 큰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 저서에서 그는 종교과 철학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3-2 마이모니데스는 유대교가 아닌 다른 이교도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한다. 또한 이븐 루슈드의 주석에도 영향을 받아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상 최고의 천재라고 생각했다.

 

3-3 신에 대해서, 마이모니데스는 무신론적 견해를 취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데, 우리와 신은 아무런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 신은 완전한 현실태이고 불변하며, 어떤 속성도 지니지 않는다. 우리가 신을 묘사할 방법은 그저 신은 어떻지 않다고 말하는 부정의 길 뿐이다.

3-4 마이모니데스에게서 볼 수 있는 종교와 철학의 조화는 창조와 섭리의 이론에서 드러난다.

창조의 측면에서, 그는 우주가 영원하며, 세계가 고정된 필연적인 종들로 구성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을 거부한다. 섭리의 측면에서는, 신이 모든 개별적 사건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며 인간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관여하지만,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표는 우리가 신을 인식하고 닮아가는 것에 있었다. 비록 신에 대한 지식은 적을지 몰라도, 이 지식은 신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져야하며, 이를 통해 사람들이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8장.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윤리학 부터 행복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까지

1.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윤리학

1.1.초기 그리스철학자들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 중에는 도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 많다. 예컨대, 탈레스는 ‘네가 대우받기를 바라는 대로 너도 행하라’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며, 어떻게 해야 최선의 삶을 살수 있는냐는 질문을 받고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했을 때 비난받을 만한 일을 우리 자신이 하지 않으면 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신비적이고 애매한 언급을 하곤 했는데 예컨대 ‘인간이 원하는 바를 모두 얻는다해도 이는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 ‘어떤 사람의 성격은 그의 운명이다’고 말했다.  그 외 다른 철학자들도 특정한 도덕적 문제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드러냈지만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름대로 도덕적 체계를 갖춘 철학자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2.도덕철학자 데모크리토스

2.1. 데모크리토스는 윤리적 주제에 대한 많은 언급을 남겼다. 그의 단편들 중 60여 쪽이 도덕적 충고인데 대부분은 일상의 삶에 관한 소박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자산의 능력을 넘어서는 임무를 맡지 말라, 부와 명성을 부러워하지 말라, 자신보다 처지가 나쁜 모든 사람을 생각하라 등 충고가 등장한다. 그의 조언은 자주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는데 ‘아이를 낫지 않는 편이 낫다’라는 말과 함께 그는 스스로 아이를 낳기 보다는 친구의 양자를 들이는게 낫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다른 말 ‘일상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아이를 낳는다면 어떤 아이가 태어나든 만족해야만 한다’라는 말과 상충한다.

2.2. 플라톤 이래로 많은 도덕철학자들이 육체를 영혼을 타락시키는 존재로 보는 반면 그는 정반대의 견해를 보였다. 만약 영혼이 육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영혼에 있는 것이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육체가 영혼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해도 도구가 나쁜 상태를 보이는 것은 도구 자체가 아니라 그 소유자에게 비난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2.3. 데모크리토스의 도덕적 견해는 일련의 경구나 격언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지만 그가 체계적인 윤리학을 전개하였다는 몇몇 증거들도 있다. 하지만 그의 도덕적 견해가 그의 원자론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호하다.  그는 삶의 목적에 관한 저술을 쓰면서 행복(eudaimonia)의 본성을 탐구하였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부유함이 아니라 영혼의 선함에서 발견되며. 우리는 유한한 것들에서 쾌락을 찾아서는 안된다.  또한 그는 교육받은 자들의 희망이 무지한 자들의 부유함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러나 행복안에서 발견되는 영혼의 선함은 고귀하고 신비한 종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이상은 오히려 즐거운 삶과 조용한 만족에 가까웠으며 이런 이유로 그는 후대에 웃는 철학자로 알려졌다.

2.4. 그는 뒤이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일종의 모범을 제공했다. 예컨대 ‘죄의 원인은 더 선한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조언은 소크라테스의 도덕 사상의 핵심을 이미 드러낸 것을 보여준다. 또한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보다 나쁜 일을 당학는 편이 훨씬 낫다’라는 말에서 후에 소크라테스가 일종의 원리로 발전시킨 생각을 이미 제시했다. 하지만 이 원리는 행위를 결과로 판단해야하고  행위자가 누구인지 확인해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공리주의와 같은 도덕체계와는 양립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2.5. 하지만 데모크리토스는 고대 그리스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아르테(arete) 또는 덕에 관하여 탐구하지 않앗다. 이 단어는 영어의 어떤 단어와도 일치하는게 없기 때문에 최근에는 이 덕을 ‘virtue’ 대신에 탁월성이라는 뜻의 ‘excellence’를 자주 사용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말이나 칼에 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치게 고풍스러워 어색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들 둘이 지닌 개념적 구조상 차이는 고대의 도덕철학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난점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3.덕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견해

3.1. 덕의 본성에 관한 체계적인 탐구를 시작한 인물은 소크라테스인데 그는 덕을 도덕철학의 핵심에, 더 나아가 철학 전체의 핵심에 놓았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는 특히 여러 덕목들이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에우티프론»에서는 경건함(hosiotes)이,  «카르미데스»에서는 절제(sophrosyne),  «라케스»에서는 용기(andreia),   «국가» 1권에서는 정의가 논의된다.

3.2이들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문답(elenchus)을 통하여 그 안의 인물들이 만족스러운 정의를 제시할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각 대화편은 결론 없이 끝난다. 하지만 위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무지를 고백한다고해서 소크라테스가 도덕적 덕들에 대한 어떤 확신도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무언가를 지식으로 간주하는데는 무척 높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3.3. 소크라테스는 덕의 본성을 탐구하면서 거듭하여 덕을 목수일,항해술, 의술 등 전문적 기술이나 기예 또는 산술학과 기하학 같은 학문과 비교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고대에서 부터 현대까지 이어졍왔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로 지적될 수 잇다.

하나는 만일 우리가 지성과 의지를 뚜렷하게 구별하는 것은 수 많은 세대를 거쳐 철학적 반성의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며 이 최초의 반성에 원동력을 부여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덕들과 여려 형태의 전문적 기술에는 중요한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 둘은 모두 타고나기보다는 태어난 후에 획득되며 둘 다 가치있는 특성에 속한다.그는 둘 모두 이를 지닌 사람에게 이익을 주장한다.

3.3.1 그는 이 둘의 사이의 유비를 계속 제시하면서 비교하며 대조하려하며 이 둘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검토하려 한다.  차이점 중 하나느 예술과 학문이 전문가의 가르침을 통해서 전수 될 수 있는 반면 덕을 가르칠 수 잇는 어떤 전문가도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또한 기술의 의도적인 실수가 저지른 사람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는 반면 덕을 갖추는데 의도적인 실패를 한 경우에는 이 행위가 무의식적인 실패보다 덜 나쁘다고 말하기에 매우 이상하게 들린다.

3.3.2. 그는 기술과 덕의 차이에 대해 논하면서 이 둘이 결국 동일시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앞에 말한 고의적인 문제에 대해 고의적으로 덕과 반대되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악행은 무지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한 지식 즉, 지혜(phronesis)없기 때문이다.

3.3.3. 또한 덕을 가르치는 교사가 없는 이유는 덕이 일종의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히 습득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지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식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전제를 제시한다. «프로타고라스»라는 제목의 대화편에서는 그는 선은 쾌락과, 악은 고통과 동일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만약 쾌락과 선이 동일한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사람들은 선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악을 저지른 셈이 되는 것이고 이는 불합리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3.3.4. 하지만 위의 전제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어떤 행위가 악하다는 지식은 그 행위의 결과를 고려했을 때 쾌락보다 큰 고통을 낳는다는 지식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른 행위를 하는 사람은 이런 지식이 부족함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쾌락과 고통, 현재와 미래의 크기를 비교하고 측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식이며 이런 선택이 바로 정의,절제,용기라는 덕들 각각의 서로 동일한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4. 정의와 쾌락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

4.1. ‘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진정으로 쾌락의 계산에 대 생각했는지는 학자들간에 일치하지 않는다.그러나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정의란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조화라고 주장한다. 우리 영혼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경우에만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는 정의로운 역할이라는 것이다.  즉 절제를 가진 일반시민, 용기를 가진 수호자, 지혜를 가진 통치자들이 각 계층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정의인 것이다.

4.2. 쾌락과 덕 간의 관계에 대해 대화 초기편에서는 쾌락은 덕의 목적이 아니라 영혼의 하위 부분이 동반하는 바로 드러나며 정의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이익을 준다는 결론은 보인다.  그러나 이는 잠정적인 결론이다. 왜냐하면중반부에 이데아의 역할이 해명된 후에는 정의로운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설명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영혼을 지혜로 가득 채우는 일은 그저 정욕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보다 훨씬 더 기쁨을 준다. 그는 정욕,기개,이성 중 어떤 요소가 그의 영혼을 지배하는가에 따라 탐욕스러운 인물, 야망을 가진 인물, 학문적인 인물로 분류되는데 이들 중 학문적인 사람인 철학자의 판단을 가장 선호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경험과 통찰, 추론 등에서 다른사람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4.3.하지만 플라톤은 아직 쾌락의 계산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 군주가 사악한 참주보다 729배나 행복한 삶을 산다는 논거를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대화편 «펠레보스»에서 쾌락이 최고 선이라고 주장하는 프로타르코스와 지혜가 쾌락보다 우월하며 우리를 행복으로 더욱 잘 인도한다고 보는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쾌락도 지혜도 행복한 삶의 본질이 아니라 두 요소가 적절하고 혼합된 삶만이 진정으로 선택할 가치가 있다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최고선은 쾌락과 지혜가 적절한 비율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5.행복에 관한 아리스토테레스의 견해

5.1. «필레보스»에서 제시된 좋은 삶의 기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좋음은 다른 목적들과 비교해 볼 때 더욱 완전하여야만 한다-즉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항상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되어야한다. 또한 그것은 자기 충족적인 것, 즉 오직 그 자체만으로 삶을 가치있게 만들며 더 이상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것이어야한다. “라고 하며 이것이 바로 행복의 속성이라고 말한다.

5.2. 그에게 좋은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지혜,덕,쾌락,명예,평판, 부,교양’이라는 7가지 후보로 내세운다. 또한 어떻게 이에 도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본성을 통해서, 배움을 통해서, 훈련을 통해서, 신의 호의를 통해서, 행운을 통해서’이라는 5가지 후보를 등장시킨다. 그러나 두번째 대답에 그는 몇가지를 배제한다. 왜냐하면 본성,행운,신의 은총으로 행복이 실현된다면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5.3.그러므로 그는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으려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무언가가 존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목적 중 하나는 쾌락이며 술,음식,성행위와 같은 동물수준의 쾌락이 아닌 미학적,지적 쾌락을 추구해야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좋은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지혜와 덕,쾌락으로 압축하여 제시한다. 이들은 각각 철학적,정치적,향락적 삶으로 드러나는데 이들이 행복과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보았다. 이 세 요소가 지니는 매력을 적절하게 결합함으로써 행복이 전통적인 삶의 형태에서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5.4. 그는 행복에 이르는 결정적인 단계를 설명하면서 윤리적인 영역에 잠재성과 현실성이라는 형이상학적 분석을 도입한다. 그는 어떤 상태(hexis), 활용(chresis), 발휘(energeia)를 구별하면서 덕과 지혜는 모두 상태인 반면 행복은 일종의 활동이므로 덕이나 지혜를 바로 행복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행복을 구성하는 활동은 덕의 활용 또는 발휘이며

 

스토아학파의 인식론부터 피론의 회의주의까지

1.스토아 학파의 인식론

1-1.초기 스토아 학파는 지식의 본성에 관한 많은 가정들을 에피쿠로스학파와 공유하였다. 에피쿠로스학파와 마찬가지로 스토아학파도 지식의 기초를  두 가지, 오류에 빠질 수 없는 감각적 인상과 원초적, 후천적 개념들이라고 믿었다. 또한 스토아 학파는 개념의 근원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한 설명을 하는데 그에 따르면 한 사람이 태어날 때 그의 정신은 텅 빈 백지같지만 그가 이성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개념이 이 백지 위에 쓰여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최초의 개념은 감각들에서 유래하며 이 경험들이 기억에 남는다. 몇몇 개념들은 자연적으로 생기기도 하는데 이를 ‘프롤렙시스’라고 부른다.  이 개념은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것이다.

1-2. 스토아학파는 에피쿠로스학파에 비해 인간의 정신적 상태에 대한 분류를 훨씬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그들은 회의주의에 맞설 수 있을만한 인식론을 제시했는데 플라톤이 대비했던 지식(episteme)과 의견(doxa)이라는 상태에 ‘인상(katalepsis)’을 도입한 것이다.  섹스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이 문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인상을 인식적 현상(phatasia kataleptike)과 관련해서 정의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서로 연결된 세 가지가 있는데 지식과 의견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인상이 바로 그들이다. 지식은 건전하고 확고하며 논증에 의해서 변화될 수 없는 인식이다. 의견은 근거가 약하며 거짓인 동의이다. 이들 사이에 인상이 위치하는데 이는 인식적 현상에 대한 동의라 할 수 있다.”

1-3. 위와 같은 현상이란 폭넓은 용어로서 감각에 드러나는 바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의견을 갖도록 하는 근거까지 포함한다. 인상 또한 마찬가지로 감각에서 유래할 수도, 이성에서 유래할 수 도 있다. 인상은 지식과 의견 사이에 위치하는데 의견은 일종의 특별한 요소인 동의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상은 의견과 달리 거짓일 수 없으며 또한 지식과 달리 결코 우리의 마음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힘을 포함하지 않는다. 고로 인식적 현상이란 ‘존재하는 바로부터 생겨나며, 존재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게 각인된 인상을 주는것’이다.

1-4. 스토아학파는 인식적 인상을 설득력을 기준으로 네 유형으로 분류한다.

(1)설득력이 있는 인상: ‘지금은 낮이다’,  ‘나는 말하는 중이다’

(2)설득력이 없는 인상: ‘만일 어둡다면 지금은 낮이다’

(3)설득력이 있는 동시에 없는 인상: 철학적 역설들

(4)설득력이 있지도 없지도 않는 인상: ‘모든 별들의 수는 홀수이다’

 그러나 설득력이 진리를 보장해주는 기준은 아니다. 현명한 사람은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합리거이기도 한 현상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이 문제가 복잡한 이유는 인상적 인상 뿐만 아니라 합리적 인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르케실라오스는 스토아학파의 인식적 인상인  ‘어떤 것이 존재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게 각인된 무언가’라는 정의를 비판한다. 그는 과연 참인 인상과 구별될 수 없는 거짓 인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제논은 만일 정확하게 일치하는 거짓인상이 존재하면 그런 인상은 인식적 인상알 수 없다고 동의한다. 그래서 그는 인식적 인상에 대한 위의 정의를 수정하여 ‘존재하지 않는 바로부터는 생겨날 수 없는 종류의 인상’이라는 점을 더한다.

2.아카데메이아의 회의주의

2-1.스토아학파의 인식론이 회의주의 진영으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유산을 이어받은 아카데메이아로부터 제기됬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예를 들면 아카데메이아 지도자중 아르케실라오스나 그 후계자 카르네아데스는 플라톤보다 위쪽인 소크라테스에 의지하면서, 그의 문답법이야말로 지식에서 거짓문장을 걸러 내는 탁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소크라테스과 달리 훨씬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일상적 문제에 대해서도 판단을 중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2-2. 회의주의에는 여러단계들이 있다.  어떤 회의지주의자들은 그저 진정한 지식의 성립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이런 회의주의자는 다양한 주제들에 관한 의견을 지니는 것에 단, 의견의 소유자가 의견이 지식의 지위에 도달했다고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또한 그 자신도 지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포함한 일련의 의견을 얼마든지 지닐 수 있다. 이때 그 사실을 인식하였다고 주장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보다 더 극단적인 회의주의자들은 지식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의견의 적절성까지도 의문시한다. 이들은 확실성에 대하여 확고한 동의를 표하는 일뿐만  아니라 어떤 의견에 대하여 잠정적인 동의를 표하는 일도 삼가야한다고 권고할 듯하다.

2-3.이 극단적인 회의주의에  ‘회의주의자가 모든 판단을 유보한다면 어떻게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겠는가’라고 흔히 제기되는 반박에 그들은 충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다.  동의는 의지와 관련해 스스로 자제할 수 있지만 현상은 우리의 통제 밖에 놓여있으며 현상에는 반드시 충동이 뒤따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진리를 발견하고 거짓을 피하려는 정신적인 작용인 동의가 없어도 이런 충동에 따르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3.피론의 회의주의

3-1.기원전 1세기 무렵 철저한 회의주의를 내세우는 새로운 근본주의 학파가 성장하였는데 이 학파의 창시자는 아이네시데모스다.  이 학파의 창시자들은 엘리스 출신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 소속 군인인 피론을 진정한 창시자로 여겼다.

3-2.  기원후 2세기에 활동한 피론주의 회의주의자인 섹스토스는 그가 우리에게 전한 아케데메이아의 회의주의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느 회의주의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동의를 표시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일상적인 지각의 문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견해를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저술이 가치있는 까닭은 회의주의 논의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한 게 아니라 초기에 등장한 더욱 독창적인 회의주의자들의 추론 방식에 관한 많은 귀중한 정보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3-3. 우리는 고대의 인식론을 연구함녀서 지식의 본성과 회의주의의 한계 등에 대하여 많은 것은 배울 수 있다. 특히 다음 몇 지의 통찰은 이후 모든 철학에 전해진 유산이 되었다. 먼저 오직 참인 것만이 지식이 될 수 있다. 지식은 오직 무언가에 의해, 경험이든 추론이든 혹은 다른 근거에 의에 암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지지될 경우에만 지식일 수 있다. 그리고 지식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후에 자신의 지식이 뒤집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한다. 그러나 이 인식론은 두 가지 오류에 빠져있다. 두 오류 모두 무엇이든 간에 지식은 참이어야만 한다는 진리를 오해한 결과로 등장하였다.

3-3-1.첫 번째 오류

‘무엇이든 간에 지식은 참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필연적으로 만일 p가 인식된다면 p는 참이다

(2)만일 p가 인식된다면 p는 필연적으로 참이다

여기서 (1)은 참이지만 (2)는 거짓이다. 이 오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까지 이어지는 고전적인 인식론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거듭해서 (2)를 (1)과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3-3-2.두 번째 오류

무엇이든 간에 참이어야만 한다면 지식은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 능력을 발휘한 결과여야만 하는 듯이 보인다. 이 오류는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제국 시대의 인식론에서 자주 발견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학파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평범하고 우연적인 일도 지식으로 인정하려 한다. 그러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작용하는 능력을 우리가 지닐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오류는 이 전 고전 시대의 오류를 거울에 비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제국의 스토아학파부터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

로마제국의 스토아학파

1. 세네카와 에픽테토스 아우렐리우스

1-1 생애: 세네카는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49세 때 네로의 개인 교사가 되었고 네로가 황제가 된 후 곁에서 최고 조언자 역할을 하였으며 기원 후 62년 네로에 대한 모든 영향력을 잃고 65년 반란의 혐의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기원 후 1세기에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여겨지며 열 개의 윤리적 대화편과 은퇴 후에 남긴 124편의 서한으로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주 관심 분야는 윤리학이었으며 자연 과학에 대하여 관심이 있어서 저술도 썼지만 이는 자연 현상에서 도덕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었다.

1-2 세네카의 철학이론: 그는 정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노력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육체적 혼란과 그릇된 판단의 분명한 구별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진정으로 벗어나야 할 본질적인 것은 그릇된 판단임을 주장하였다. 마음에 우연히 떠오르는 것 존재하는 대상을 보고 영향을 받아 생긴 것은 정념이라 할 수 없으며 이러한 것에 굴복하여 우연으로 따르는 것이 정념이라 하였다. 그렇기에 신체적 현상보다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는 유물론자로 영혼이 물질적인 세계의 일부라 생각했지만 내세에 대하여 염두를 두고 있었다. 그는 스토아학파가 제시한 덕에 이르는 길이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며 도덕적 발전을 세 단계를 구별했다. 또한 이론과 교훈 사이의 정의를 명확히 하여 구별을 용이하게 하였다.

1-3 세네카에 대한 평가 및 에픽테토스와 아우렐리우스: 세네카는 위선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스토아학파가 제시한 기준에 따르는 삶을 살았다고 평가를 받았으며 로마제국의 스토아학파 창시자이다. 에픽테토스와 아우렐리우스 모두 세네카와 유사하게 도덕철학과 연관이 있다. 에픽테토스의 저술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 중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어떤 악도 진정으로 우리를 해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보이기 위해 자아와 도덕적 의지를 동일시하였다. 아우렐리우스는 주요 철학학파들을 위한 학교를 위한 학교를 세웠으며 명상록이라는 저술을 통해 여러 격언과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자신에 철학적 의견을 보인다.

초기 기독교 철학

2. 초기 기독교 철학의 상황과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2-1 초기 기독교 철학과 상황: 에피쿠로스학파 주의와 스토아학파가 아우렐리우스로 마무리되었다. 아우렐리우스 지배 당시 기독교를 잔인하게 박해하였으며 최초의 기독교 철학자 유스티누스가 기독교를 옹호하는 변증론을 헌정하고 이후 처형되었다. 2세기 기독교인들은 최초로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예수와 바울로의 종교를 조화시키려 시도 하였다.

2-2 클레멘스: 일련의 잡기라는 저술을 출판하였으며 교양 있는 기독교인은 철학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플라톤의 사상을 이원론을 주장하는 이교도들에 대항하는 동맹으로 여기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기독교와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하였고 정념으로부터 자유를 주장하는 스토아학파의 이상을 찬미했다. 그는 구약성서의 우화적 측면을 배제하려 하며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다시 드러내었으며 여러 문헌을 편집하여 대중화하였다.

2-3 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 출신 플라톤주의자인 암모니오스 사카스의 제자로 당시 기독교인들이 이단으로 여기던 철학 사상들을 자신의 체계에 수용하려 하였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탄생 이전에 존재한다고 믿으며 자유정신인 영혼이 육체와 결합 후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자유의지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즉 모든 이성적 존재가 구원받으며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에 충성을 맹세하며 로마제국에서 추방 후 신과 자유 불멸성에 대하여 기독교적 믿음을 옹호하는 철학적 논증을 펼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부활

3. 플루타르코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의 주석 전통

3-1 플루타르코스: 그리스 영웅과 로마의 영웅을 비교한 영웅전을 쓴 역사가이다. 영웅전 이외에도 대중적인 철학적 주제에 관한 글을 모아 도덕론을 펴냈다. 플라톤주의자로서 대화편 티마이오스에 대한 주석을 달았으며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에 반대하는 수많은 논쟁적 글을 써 두 학파의 체계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3-2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에 관한 주석 전통: 플라톤주의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부활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시기인 만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 대하여 전문적인 주석 전통이 만들어졌다. 또한 이 시기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주석으로부터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로 여기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그 외에 알렉산드로스가 형이상학 감각에 관하여 기타 논리학 저술들에 대한 주석 작업도 이루어졌다.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

4.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

4-1 플로티노스: 오리게네스와 동시대 사람이며 플라톤이 생각하던 국가를 캄파니아지역에 세우려고 항상 생각하였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제자가 6가지 주제로 그의 저술을 분류하였는데 그것은 윤리학과 미학, 자연학과 우주론, 심리학, 형이상학, 논리학, 인식론의 6가지이다. 그의 사상체계에서 중요한 개념은 일자 개념으로 단일성을 존재의 핵심적인 속성으로 본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에서 플라톤으로 플라톤에서 플로티노스로 이어진 개념이다. 일자는 플라톤이 언급한 선의 이데아와 동일시되며 모든 존재의 기초이며 모든 가치의 기준이다. 그러나 일자는 존재와 선을 넘어서 있기에 모든 것은 일자로부터 이어지는 하나의 연속적인 유출과정으로 존재한다. 연속적인 유출과정이란 대략 일자->정신->영혼->자연->순전한 질료로 구성되는 과정으로 각각이 상위 단계와의 의존을 통해 현존하고 활동할 수 있다. 이러한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적 체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도출된 철학적 원리를 기초로 제시된 것이다. 그의 사상은 죽은 뒤 유지되지 못했지만 기독교들에게 전해졌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4-2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는 354년 기독교 어머니와 이교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라틴 문학과 수사학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그의 젊은 시절은 자서전 격인 고백록에 의존한다. 그는 겉핥기로 그리스어를 배웠지만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칠 수 있었다. 18세 때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플라톤의 사상에 빠지게 되었으며 10년간 마니교를 믿었다. 이후 로마로 건너가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와 친분을 나누고 그 후에 어머니와 암브로시우스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전향하였다. 387년 세례 후에도 여전히 플로티노스철학의 영향을 받았는데 몇 편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적 신플라톤주의를 분명히 드러내었다. 아카데메이아학파에 반대하여 라는 저술에서는 아카데메이아 중심의 회의주의에 반대하는 논증을 보이고 이데아에 관하여 에서는 이데아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제시하여 이데아를 신의 정신 안에서 영원불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 외에도 자유의지론과 83가지 서로 다른 질문들이라는 저술 등이 존재하며 플라톤주의의 입장을 유지한다. 이러한 저술들은 391년 사제 임명 직전에 쓴 것으로 사제가 된 후에도 신국론을 포함한 여러 저술을 썼지만 사제임명 이후 저술들에서는 플로티노스의 제자가 아닌 중세 기독교 철학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