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서양철학사

다윈과 자연선택부터 니체까지

1.다윈과 자연선택

1-1. 찰스 다윈은 1809년 슈루즈베리에서 태어나 ,1825년 에든버러의 의대생으로 입학했지만 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케임브리지의 크라이스트 칼리지로 가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식물학 교수의 추천을 받아 군함의 박물학자로 지명되었다. 5년간의 항해동안 그는 지질학, 식물학 등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발굴했고 이를 통해 해양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비글호항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1-2. 그 후 다윈은 1840-1850년대에 자신의 사유지에서 식물군과 동물군의 연구를 통해 나온 초안을 여러 사람이 돌려보게 함으로써 자연선택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를 1960년대 쯤 책으로 출판할 계획이었으나 다른 동물학자인 월리스가 자연선택과 유사한 적자생존 이론을 학회에 발표해 그는 자연선택이론의 독자성과 우선권을 위해 《종의기원》을 서둘러 출판했다. 이후 그는 여러 논문을 출판하였고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책 《인간의 계보, 선택과 성의 관계》에서 그는 인간이 오랑우탄, 침팬지와 공통된 조상을 갖는다는 주장을 옹호했다.

1-3. 다윈은 진화론을 맨 처음 제안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대 시칠리아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자연선택의 원리를 암시했고 스웨덴의 자연주의자 린네는 식물과 동물의 종을 분류해 다윈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린네와 그 밖의 분류학자들은 식물과 동물의 왕국을 속과 종으로 나누었다. 예를들면 모든 사자는 동일한 종이고, 사자종은 호랑이나 표범과 같은 다른종을 포함하는 고양이 속의 구성원이다. 일정한 종 내에서 개체의 형질은 크게 변할 수 있지만 종의 규정적 특징은 종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종의 자손을 낳기 위해 다른 구성원들과 교배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종의 구성원들 사이의 결합은 일반적으로 자손을 낳지 못한다.

몇몇 자연주의자들은 종교적인부분에서 이유를 찾으려기보다는 하나의 속에 포함되어 서로 다른 종 사이의 유사점이 머나먼 공통조상의 계보에 의해 설명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또한 종의 어느 세대에서 자손에게 넘겨줄 유리한 형질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장 높은 나뭇잎에 도달하려고 몸을 뻗치던 기린은 목이 늘어났고 이는 목이 긴 자손을 낳을 수 있게 해주었다.

다윈은 이러한 고대의 자연선택 관념을 이용해 종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설명했는데, 이러한 이론의 근본 바탕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유기체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정도에 따라 크게 변한다. 둘째, 모든 종은 세대마다 증가시킬 수 있는 만큼 번식할 수 있다. 셋째, 하지만 종이 이렇게 번식하지 않는 것은 각 세대에서 극소수의 자손만이 살아남아 번식하기 때문이다.

1-4. ‘이와 같은 생존 경쟁으로 인해, 모든 변이는 그것이 아무리 경미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어떤 원인으로 진행되든 간에, 만일 다른 유기체나 외부 자연과의 무한히 복잡한 관계 속에서 종의 개체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하다면, 그 변이는 개체를 보존하려는 경향을 가질 것이며, 일반적으로 자손에게 유전될 것이다. 따라서 그 자손 역시 더 잘 살아남을 기회를 갖게 될텐데, 그것은 종의 많은 개체들이 주기적으로 태어나기는 하나 그들 가운데 소수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OS 52)’

다윈은 세 가지 다른 종류의 선택을 구별했다. 목적에 가자 적합한 표본을 위한 인위선택과 목적적이지 않은 자연선택인데 자연선택은 다시 좁은 의미의 자연선택과 성 선택으로 나뉜다. 전자는 개체가 번식하기에 충분할 만큼 오래 살아남을지 여부를, 후자는 그렇게 살아남은 개체가 누구와 짝짓기 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적응변이는 그 변이 자체가 유전된 것이고 특유의 유리한 변이의 기원은 전적으로 우연의 문제일수 있다고 다윈은 믿었다.

자연선택은 단일한 종에 속한 형질들의 경우 쉽게 예증되고 관찰될 수 있다. 그 예로 자작나무에 사는 나방이 새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자작나무에 가까운 색을 띄는 형질로 점차 바뀌어 가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다윈은 자연선택이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되면서 식물과 동물의 완전히 새로운 종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굉장히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었을 것이며 실제로 지질학점 관점에서 화석을 살펴보았을 때 종의 탄생과 소멸을 다윈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1-5. 다윈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철학사가 아니라 과학사에 속한다. 그러나 다윈의 생물학적 연구가 종교철학과 형이상학 전반에 미친 영향 때문에, 어떤 철학사도 다윈에 대한 언급을 빠뜨릴 수 없다.

  1. 존 헨리 뉴먼

2-1. 교회단체가 다윈의 사상을 반대할 때 종교작가인 존 헨리 뉴먼은 이를 받아들였다. 《종의기원》이 발표된 직후 그는 각각의 종마다의 독자적인 창조를 믿는 사람은 화석이 박힌 바위의 창조역시 믿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다윈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했으며 과학과 종교사이의 어느 논쟁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뉴먼은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다녔으며 오리엘대학의 특별 연구원을 역임했다. 또 세인트 메리 성당의 주교 대리였으며 동시에 설교자로서 지속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복음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후에 기독교신앙에 대한 가톨릭의 해석이 옳다는것을 확신하고 로마 카톨릭교로 개종하면서 오리엘대학의 특별 연구원직에서 물러났다.

뉴먼은 더블린에 세워진 가톨릭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그 시절 강의와 연설들을 모아 《대학의 이념》이라는 교육이론의 고전을 출판했다.

2-2. 뉴먼은 신의 존재를 믿는 것 뿐 아니라 구체적인 종교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완전히 이성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세상에 입증해 보이려는 욕구 때문에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종교적인 믿음의 결론에 대한 증거가 신앙의 완전한 헌신에 부적합하게 보인다면 종교적 믿음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해 이성의 뒷받침 없이 신앙을 채택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고, 종교교리를 고수하는 것 자체가 이성적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문제를 다룰 때 그는 비종교적 맥락에서 믿음의 본성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관심을 자주 보였다. 그가 제기한 철학적 물음은 적합한 증거나 논증 없이 명제를 승인하는 것은 언제나 그른가였다. 명제가 확신이 아닌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에 의해 정당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로크에 대응하여 뉴먼은 우리의 대부분의 믿음이 빈약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잘 유지된다고 지적하고, 증거의 힘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 무조건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일도 과학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종교적 믿음은 추측에 근거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합리 하다고 비난받을 수 없다. 유대교의 역사에서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증거가 발견될 수 있지만 이 증거는 신의 존재와 계시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 에게만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왜 신을 믿어야하는지 물으면 그는 양심의 소리에서 발견될 수 있는 신성한 능력에 대한 내적 경험에 호소하라고 말한다.

2-3. 뉴먼의 기독교적 변증론이 포함된 일반적인 인식론적 설명은 신앙에 공감하지 않던 철학자들도 감탄하게 했다. 그것은 흄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의 믿음과 확실성에 관한 논의들 가운데 최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니체

3-1.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작센의 루터교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대학시절 전공은 고전문헌학 이었는데 학위를 받기도 전에 정교수가 될 정도로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니체는 대학교수가 되기 직전에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를 읽은 것과 작곡가 바그너를 만난 것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 두 사람의 영향을 받아 제일 처음 출판해낸 책이 《비극의 탄생》이다.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 정신의 두 측면을 대비했다. 한 측면은 비극에서 표현된 열광하는 비합리적 열정이었고 다른 측면은 서사시나 미술에서 표현된 절제력 있는 조화로운 아름다움 이었다. 그리스 문명의 성취는 그 둘 사이의 종합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3-2. 니체는 1873년에서 1876년 사이에 네편의 평론으로 이루어진 《반시대적 성찰》 출판했다. 4편중 두 편은 예수의 생애 저자로 유명한 슈트라우스와 과학자의 허세에 대한 비판이고

나머지 두 편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878년쯤 그는 염세주의에 숨이 막힐것 같아 바그너와 인연을 끊었고, 쇼펜하우어에 대한 열정 또한 식었다. 이 때문에 그는 후에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긍정의 삶으로 대체하길 희망하는 저작들을 출판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만 그답지 않게 공리주의 도덕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과학을 예술보다 우월한 것으로 평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예술이 일생일대의 과업이라는 끊임없는 근원적 확신을 시적이고 경구적인 저작형식으로 드러냈다. 그는 심리적 문제로 인한 병 때문에 교수직을 조기 은퇴하고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여러 곳에서 지냈다. 이때 그는 여러 작품을 남겼다. 1882년, 니체는 정신해방의 실천적 표현으로 독일의 물질주의자 이, 러시아의 남성평등주의자 살로메와 ‘삼위일체’를 맺고 동거를 시작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이 책에는 니체의 세 가지 신념이 담겨 있었다. 첫째, 현 상태의 인간이 초인에게 추월당한다. 여기서의 초인은 몸과 영혼이 당당하게 생긴 더 고등하고 강하고 의기양양하고 유쾌한 인간을 뜻한다. 둘째, 기독교적인 도덕적 우선권이 완전히 뒤집히는 가치의 재평가가 있을 것이다. 셋째, 언젠가 일어난 적이 있는 모든일이 무하하게 주기적으로 순환하면서 또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념들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니체의 저작에서 예언적인 방식은 줄이고 논증적인 방식을 늘린 형태로 해설되었다.

3-3. 1888년은 니체가 미친듯이 글을 쓴 해였다.《반그리스도》,《바그너사건》,《우상의 황혼》등이 있다. 1990년, 그는 일생을 정신이상으로 마감했다.

니체는 20세기 유럽대륙, 특히 러시아의 문학과 독일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 20세기 후반 분석적전통의 윤리학자들은 전통도덕에 관한 니체의 맹공격에 대해 응답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과 실용주의부터 영국관념주의와 그에 대한 비판까지

1.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과 실용주의

 

1-1.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1842-1910)는 프레게보다 여섯 살 더 많았지만, 철학은 훨씬 늦게 시작했다. 그는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를 신봉한 신학자의 아들이자 유명한 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형으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국 교육을 받기도 했고, 프랑스와 독일의 학교에서 유럽교육을 받기도 했다. 화가와 의사의 갈림길에서 망설였지만 1864년 하버드 의과대학에 등록했다. 학위를 취득한 후 건강이 나빴고 조울증을 앓았으나 프랑스 철학자 르누비에(Charles Renouvier)의 저작을 읽고 회복했다. 그의 관심은 점점 경험적 심리학으로 옮겨가 1876년 처음으로 심리학 실험실을 만들었다. 심리학의 과제는 두뇌 상태를 의식의 흐름 현상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그 책이 표준적인 교과서가 되기는 했으나, 그것이 출판될 무렵 제임스는 심리학을 떠나 철학 교수가 되었다. 제임스는 과학적 세계관을 신, 자유,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과 조화시키기를 열망했다. 그는 이론적 증거를 억지로 끌어들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을 논의하면서 진리를 믿어야 할 의무가 과오를 피해야 할 의무와 비중이 같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사람들마다 각자 무엇을 신이라고 생각하든 자신을 그것과 관련 있는 존재로 이해할 때 그 사람들이 갖는 감정, 행위, 경험을 음미하려고 애썼다. 그는 신비주의 현상이나 다른 형태의 종교적 감정의 진정성과 효력이 입증되기를 기대하면서 그것들을 경험적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제임스가 미국철학의 일인자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1907년 《실용주의》 출판 덕분이었다, 그는 저작의 제목과 논지가 퍼스한테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 더할 나위없이 명료하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인지 가능한 실제적인 유형의 효과를 가졌는지를 고려하면 된다. 이와 같은 효과가 즉시 나타나건 나중에 나타나건 그 효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어쨌든 긍정적인 의의를 갖는 한, 그 당시 우리로서 그 대상에 가질 수 있는 모든 생각이다”

1-2. 그러나 퍼스의 실용주의는 의미 이론이자 인간과계에 관련된 객관적 것인 반면 제임스의 실용주의는 진리 이론이자 개인주의적이며 주관주의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퍼스는 자신의 이론이 제임스의 이론과 무관하다고 말하고 자신의 이론을 ‘프래그머티시즘(pragmaticism)’이라고 고쳐 불렀다. 제임스의 실용주의에 따르면, 관념은 그것이 우리 삶에 유익하다고 믿는 한 옳다. ‘옳음은 신념에 유리하게 좋은 것으로 판명된 모든 것을 일컫는다.’ 즉 ‘옳은 것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비평가들은 거짓을 믿는 것이 진리를 믿는 것보다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진리가 장기적인 만족과 동일시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반대했다. ‘신의 wswo에 대한 가정이 가장 넓은 의미로 만족스럽게 이릉 해낸다면, 그것은 옳다’

제임스는 자신의 이론이 객관적 실재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실재와 진리는 서로 다르다. 사물은 실재하는 것이다. 옳은 것은 과념과 신념이다. ‘실재가 옳은 것이 아니라 신념이 옳다. 그리고 신념은 실재에 대해 옳다’. 어떤 신념이 옳고 그른지를 알게 되는 것은 그 신념의 결과가 좋은지 어떤지 발견함으로써가 아니라 신념이 습관적으로 옳다 그르다고 말하는 것들의 차이점에 알기 쉬운 실용적 의미를 부여한 결과다. 관념과 실재의 대응 관계에 대한 확인이나 검증 과정을 통해서 관념을 옳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의 실용주의 체계는 어떤 실재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그 실재가 만족스럽다는 신념의 필요조건인지 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이 없어도 그 대상에 대한 신념이 만족스러울 수 있는지는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있다.

제임스는 《다원적 우주》에서 실용주의를 이용해 종교적 세계관을 옹호하였다. 그는 세상의 수많은 고통으로 인해 무한하고 절대적인 신성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하자면 초인의 인식이 능력이나 지식에 혹은 둘 모두에 한계가 있다고 믿었다. 신 역시 미래를 결정하거나 예언할 수 없으며, 세상이 더 좋아질지 나빠질지는 신의 도움 아래 인간이 행하는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

제임스는 자신의 형이상학 체계를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실용주의 프로그램은 그가 죽은 뒤 다른 사람들, 특히 듀이(John Dewey)가 이어받았다. 듀이는 교수 생활을 하면서 실용주의를 아주 특별하게 미국의 교육 분야에 적용했으며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주제에 관한 저작들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그의 변함없는 목적은 자연과학과 공학에서 그토록 성공적이었던 탐구 방법들이 인간 노력의 다른 분야들 어디까지 연장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2.영국 관념주의와 그에 대한 비판

 

2-1.그토록 굳건하게 유지되던 영국 경험주의 전통은 존 스튜어트 밀이 죽자 반발에 부딪치기 시자했다. 밀이 죽고 1년이 지난 1874년, 밸리올 칼리지의 교수인 그린(T.H.Green,1836-82)은 경험주의의 전제 가정들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상당 분량의 서문을 붙여 흄의 《인간본성론》을 출간했다. 또 머튼 칼리지의 브래들리(F.H.Bradley)는 영국 헤겔주의의 기초 고전인 《윤리학 연구》를 출간했고. 1893년에는 영국 관념주의의 완전 결정판인 《현상과 실재》를 완성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케임브리지에서는 헤겔 논리학의 방법들과 몇몇 신조들이 트리니티 칼리지의 철학자 맥타가트(J.M.E.McTaggart)가 쓴 일련의 논문을 통해 자세히 소개되었다.

제임스의 실용주의와 마찬가지로 그린의 관념주의는 어느 정도 종교적인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자연적이고 자의식적인 유일한 존재가 있으며, 실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의 활동이자 표현이다. 우리 모두는 이 초자연적인 존재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 존재의 표현인 세계의 부분들로서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가 그것을 통해 즉시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자신을 세계와 구별하는 그 자의식에 대한 약간 불완전한 상태의 분담자로서도 관련되어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관계가 도덕과 종교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브래들리와 맥타가트는 다소 간련성이 적은 기독교적인 내용의 관념주의를 배제하고, 결국 유한한 자아들의 공동체 이외의 다른 어떤 절대자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실재가 본질상 완전히 초자연적이라는 것은 영국 관념주의자들의 공통점이었다. 그들은 정신과 물질이 존재의 동등하고 독자적인 두 영역이라는 이원론적 관념을 거부했다. 그러나 브래들리의 ‘일원론’은 또 다른 근본적인 양상을 가졌다. 그는 실재가 전체상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진리성은 개별적인 원자 명제들의 속성이 아니라, 오로지 전체로서의 존재에 관한 판단들의 속성이다. 그는 《현상과 실재》엥서 우즈를 서로 아무 관련 없는 독립적 실제들의 복합체라고 생각하면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우주의 개개의 모든 것은 개개의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있다. 바로 그 본질로 인해 내적으로 관련되어있다.

2-2. 관념주의의 우월함은 20세기 초 케임브리지의 젊은 두 철학자 무어(G. E.Moore,1873-1958)와 러셀(Bertrand Russel)에 의해 결정적으로 의문시되었다. 무어는   ‘판단의 본성(The Nature  of   Judgement      ,1899)’에서 실재가 정신의 창조물이라는 근본적인 주장을 거부하는 대신 플라톤의 실재론, 즉 개념은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실재이며, 세계는 서로 결합하여 옳은 명제가 되는 그런 개념들로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관념주의 논박’(The Refutation of Idealism)에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거부했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과 온전히 다른 어떤 것이며, 우리의 지식 대상은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별개이다. 또한 물질적 대상들은 우리가 직접 지각하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관념주의에 대한 무어의 저항은 러셀에게 충격을 주었고 러셀은 잔디가 실제로 푸르다는 생각에 벅찬 해방감을 느꼈다. 무어와 마찬가지로 러셀은 관념주의를 단념하는 대신 보편자에 대한 플라톤의 신조, 즉 개개의 모든 낱말은 특수한 것이건 일반적인 것이건 객관적 실재를 나타낸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벤담의 공리주의부터 존 스튜어트 밀의 발전

1.벤담의 공리주의

1-1. 영국은 유럽 전반을 뒤흔든 극심한 체계 격변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벗어났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죽은 뒤 오랫동안 도덕적, 정치적 사고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한 권의 책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1789년 잉글랜드에서 발간되었다. 그것은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이었고, 공리주의라고 알려진 학파의 창립현장이 되었다.

벤담은 1748년에 런던의 유력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몸집이 아주 작고 책을 좋아하며 조숙했던 그는 7살에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가고, 15살에 옥스퍼드 퀸스 칼리지를 졸업했다. 21살에 법정 변호사가 되었으나, 그는 당시의 법적 관행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유명한 법학자 블랙스턴(William Blackstone)의 강의를 들을 때 이미 당시의 법률 이론을 역겨워했다. 그는 영국의 법제도가 번거롭고 인위적이고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정당한 법의 원리에 비추어 밑바닥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믿었다.

 

1-2. 벤담은 그런 근본적인 원리를 생각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흄(David Hume) 덕분이라고 했다. 《인간본성론》을 읽고 비로소 진실에 눈을 뜨게 되었고, 공리성이야말로 모든 덕의 시금석이자 정의의 유일한 기원이라고 믿게 되었다. 벤담은 국교 반대파 화하자 프리스틀리의 논문에 근거해 시민들의 최대 행복이 국정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의미로 공리성 원리를 해석했다. 즉 도덕성의 진정한 표준과 법 제정의 참된 목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stes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에 있었다.

벤담은 1770년대 《영국법 논평》에 대한 비판 작업을 하면서 일부로 사회계약 개념을 공격하는 《정부에 관한 소론》을 출간했다. 동시에 그는 이탈리아 형법학자 베카리아의 착상을 바탕으로 처벌의 목적과 한계에 대한 분석해 공리성의 원리와 더불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의 핵심을 이루었다. 벤담은 《정부에 관한 소론》에서 ‘올바름과 그릇됨의 척도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라는 원리를 맨 처음 공표하였다,

 

1-3. 그는 1785년부터 1787년까지 유럽 횡단 여행을 하면서 기발한 형태의 감옥인 팬옵티콘(Panopticon)을 생각해냈다. 팬옵티콘은 교도관이 수감자를 완벽하게 감시할 수 있는 중앙 관측소가 있는 원형 건물이다. 그는 시범 감옥을 세우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정부를 설득했으나 조지 3세의 사적인 개입 때문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법 이론과 법적 관행에 관한 벤담의 관심은 당초 주목 대상이었던 형법을 넘어 크게 확대되었다, 민법의 혼란스러움에 격분한 벤담은 《법 일반에 대하여》라는 긴 논문을 썼다. 빈민 구제법에 대해 벤담은 원형 감옥 체제가 ‘극빈자’를 위한 구제소 역할을 하도록 건립되어야하며 구제소는 입소자가 자신들의 생활 유지비를 벌기 위해 노동할 경우 배당금을 지급하는 국영 합자회사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1-4. 1808년 벤담은 때마침 기념비적인 저서 《인도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스코틀랜드 철학자 제임스 밀(James Mill)과 친구가 됐다. 밀에게는 비범한 아들 존 스튜어트가 있었는데, 벤담이 바로 그 영재의 교육을 도와주었다, 법정에서 몇 년간 증거의 적합성 검사 업무를 보던 그는 일정 부분 밀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법적 절차와 관행을 비판하기보다는 정치를 개혁하고 헌법을 개정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의회 개혁론》을 쓰고 후에 근본적인 의회 개혁 초안이 상정되었다. 벤담은 수년간 헌법 초안 작업에 몰두했으나 죽을 때까지 마치지 못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무렵, 영국의 현행 헌법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부자들의 음모를 감추는 장막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군주제와 상원을 폐지하고, 보통 선거권에 의해 선출되는 연례 의회를 도입하고 영국 국교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벤담의 입헌적이고 진보적인 제안들은 영국을 넘어 다른 곳까지 확산되었다. 1811년에 벤담은 미국의 헌법 초안을 작성해야했던 제임스 메디슨에게 자신의 구상을 제안했으며 한때 자신의 헌법 체계가 콜롬비아 대통령인 시몬 볼리바르에 의해 중남미에서 시행되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1-5. 벤담의 이상을 받아들인 ‘철학적 급진주의자’ 그룹은 공리주의자의 쟁점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1823년 《웨스트민트터 리뷰》를 창간했다. 그들은 열렬한 교육 개혁 지지자였는데 벤담은 그리스 어와 라틴 어보다는 과학과 기술을 강조하는 중등 교육 과정을 고안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1823년에 열게 되었다. 이곳은 영구에서 종교 시험을 치르지 않고 입학할 수 있는 최초의 종합 대학 수준의 대학이었다, 1832년 벤담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유언에 따라 말든 ‘실물 초상’은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벤담의 노고에 더 알맞은 기념비는 의원 선거권을 널리 확대한 ‘대개혁 법안’이었다.

벤담을 잘 아는 사람들, 심지어는 그를 열렬히 추종했던 사람들조차도 이구동성으로 그의 지적능력은 정말 특출하고 대단하지만 감정에는 결함이 있는 편협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밀은 ‘벤담의 지식이 전적으로 경험주의적이기는 하나 경험이 매우 부족한 사람의 경험주의자였다’고 말했다. 밀이 보기에 벤담은 결코 원숙한 어른이 아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어린애였다’

 2.존 스튜어트 밀의 발전

2-1.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에게는 소년 시절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엄격한 가정교육으로 그는 학교에 다니지도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 세 살에 그리스 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열두 살에 플라톤의 원전을 다 읽었다. 밀이 지난날을 되돌아볼 때 그런 특별 교육의 가장 값진 점은 아버지가 내 스스로 생각하도록 놓아두었다는 것이었다. ‘생각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면 어느 것이든 내가 그것을 스스로 이해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지 않는 한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밀은 그런 교육이 자신을 ‘단순한 추론 기계’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신경쇠약에 시달렸고 가장 효율적인 개혁 작업조차 아주 무의미하게 보일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밀은 1828년 가을 워즈워드의 시를 읽으면서 스스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워즈워드의 시는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벤담의 학문체계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던 인생의 다양한 면들을 깨닫게 했다. 그는 위기를 극복한 뒤, 벤담을 다시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으나 벤담의 학문체계가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 모두 수정, 보완될 필요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밀의 사상은 영국 시인들 그중 콜리지(Samuel Tylor Coleridge)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게 되었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생시몽(Saint-Simon,1760-1825)의 초기 사회주의와 콩트(August Comte,1789-1857)의 초기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밀은 사회주의 프로그램에 대해 확신하지는 않았으나, 사유 재산 제도와 자유 시장 제도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생시몽주의자들의 이상주의에 찬사를 보냈고 그들의 많은 원칙들, 특히 완전한 남녀평등에 관한 그들의 주장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밀이 콩트와 생시몽주의자들한테서 얻은 것은 진보(progress)에 관한 견해였다. 밀은 콩트의 유기적 시기와 그 다음 시기에 비판적이고 파괴적인 시기가 있다고 보았으며, 자신이 그와 같은 시기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판적 시기의 최선의 성질과 유기적 시기의 최선의 성절이 결합할 미래이다. 그 미래에는 아무런 구속이 없는 사상의 자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어떤 식의 행위든 개인적인 행위의 무한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 유용한 것과 유해한 것에 관한 확신 역시 어린 시절의 고육과 일반적인 공감대 형성을 통해 마음속 깊이 새겨질 것이다.’

 

2-2. 밀은 젊었을 때부터 글을 많이 쓴 사람이기는 하나 30대 말까지 책을 한권도 출판하지 않았다. 1843년에 처음으로 책을 출판했는데, 곧바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고 지속적인 관ㅅ미의 대상이 되었다. 바로 여섯 권으로 된 《논리학의 체계》다. 밀은 영국의 경험주의 전통을 19세기 현재로 갱신하려는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이 책 안에서 폭넓고 다양한 주제를 통합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정신 자체에 대해서 타인의 정신이 실존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철학자들에게 특히 어려운 문제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경험주의자들과 달리 형식 논리학과 과학의 방법론에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

밀은 추리에 관한 이론을 자세히 제시했는데, 추리를 실질적 추리(real inference)와 언어적 추리(verbal inference)로 나누었다. 정언적 추리(syllogistic inference)는 어떤 새로운 지식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적 추리다. 반면 실질적 추리는 귀납적이기 때문에 특수사례에서 일반 법칙을 도출하지 않는다. 밀은 귀납적인 과학적 연구를 안내하는 다섯 가지 실험 규칙 혹은 규준을 제시했다. 그는 그와 같은 규준들을 사용하게 되면 전혀 선천적 진리에 의존하지 않고 경험적 탐구를 진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밀은 경험주의를 현대적으로 제시하면서 전례 없는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수학의 진리성은 우리 지식의 가장 확실한 대상에 속하는 것 같은데도 경험의 결과라기보다 경험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경험주의자들에게 늘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밀은 산술학, 기하학이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경험적 가설들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후대 철학자들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 주장은 《논리학의 체계》에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목적이란 정신 외적인 진리들은 경험과 상관없이 직관(intuition)에 의해 알려질 수 있다는 그 관념을 논박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두 철학파 사이의 차이, 직관에 대한 차이와 경험 및 연합에 대한 차이는 단순한 추상적 사변의 문제가 아니다. 그 차이는 수많은 실질적 귀결들로 나타나고, 진보의 시대에 가장 커다란 온갖 실질적인 의견 차이의 바탕이 되었다.’

 

2-3. 밀이 이런 지적 전투에서 벌인 최대의 공격적 캠페인은 그의 말기 저작들 가운데 하나인 《윌리엄 해밀턴 경의 철학에 대한 고찰》에서 수행되었다. 해밀턴 경은 애든버러에서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를 역임한 개혁가인데 그는 그의 강의에서 리드의 상식철학(common-sense philosophy)을 새롭고 개선된 형태로 드러내고자 했다. 밀은 그의 책이 발간되자 온갖 형태의 직관주의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퍼부어 댈 이상적인 표적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내용에 비해 과분한 명성을 얻었으나 오늘날에는 그다지 연구되지 않는다.

밀은 1851년 20여 년간 친밀하게 지낸 해리엇과 결혼했는데 그는 그녀가 자신의 소논문 《자유론》과 《여성의 종속》의 공동 저자로 간주되어야한다고 했다, 《자유론》은 정부가 개인의 자유에 대해 간섭할 수 있는 한계를 그으려고 했는데 핵심 원리는 다음과 같다.

 

‘인류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사회 구성원 누군가에 대해 행동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보호가 목적일 경우에만 허용된다. 문명화된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그 목적이 오로지 타인에 대한 피해를 방지하려는 것일 경우에만 정당화 된다. 물질적이든 도덕적이든 자기 자신의 이익은 힘을 행사할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밀에 의하면,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절대군주이다. 《자유론》은 의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아주 명백하게 옹호하기 위해 이 원리를 여러 분야에 적용한다. 《여성의 종속》은 밀이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고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오랫동안 전개한 여성 운동의 정점이었다. 그는 1859년 《의회개혁사상》에서 ‘세금징수원이 전혀 하지 않는 차별을 선거 사무원이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모든 주택 거주자에게 남자든 여자든 투표할 권리를 주어야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남녀평등 문제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사건과 선거 개혁에 관여했다. 영국 정부의 아일랜드 강압정책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토지 소유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소논문을 출간했다. 또 그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의회 선거의 비례 대표제를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861년 《대의정치에 대한 고찰》로 출판되었다.

 

2-4. 밀의 자유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그가 죽은 뒤 체계적인 철학자로서의 명성은 급속하게 시들었다.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영국을 뒤덮은 관념주의 물결은 밀의 경험주의를 집어삼켜 버렸다. 그러나 공리주의 전통은 시지윅(Henry Sidgwick)에 의해 중단 없이 살아남았다.

시지윅은 밀의 중요한 두 원리, 심리적 쾌락주의(모든 사람은 그들 자신의 행복의 추구해야한다)와 윤리적 쾌락주의(모든 사람은 일반적인 행복을 추구해야만 한다) 사이에 부정합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실천 이성의 이중성’을 해결하려 했다. 시지윅은 사고 과정에서 심리적 쾌락주의 원리를 포기하고, 사람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선을 추구할 의무를 갖는다는 합리적 이기주의의 윤리적 원리로 대체했다.

그의 학설은 공리주의를 직관주의와 결함한 형태로 도덕에 대한 상식적 접근으로 원리를 간주했다. 하지만 그는 상식의 전형적인 직관은 아주 명확하고 구체적이지만 공리주의 도덕의 기초가 되는 직관은 다소 추상적이라고 믿었다. 예컨대 미래의 선이 현재의 선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의 관점에서 볼 때 한 사람의 선은 다른 사람의 선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공리주의의 직관을 합리적 이기주의 직관과 일치시키는 것인데 시지윅은 나의 행복과 일반적인 행복 사이의 상충을 일상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대부분 사람들이 개인의 이익과 의무를 신과 연관 짓는데 자신은 신에 호소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합리적 행위의 완벽한 이상을 고안해 내려는 인간 지성의 장기적인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그리고 마르크스

Ⅰ.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

1-1. 생애와 시대적 배경

1-1-1. 벤담은 공리성의 원리를 제시할 때, 그것을 행복을 줄이려 한 경우에 한해 행위의 가치가 인정된다는 금욕주의 원리와 비교했다. 벤담의 주요 비교대상은 기독교 도덕이었으나, 정작 기독교인들에게 금욕주의의 원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든 철학자들 가운데 금욕주의의 원리를 제일 용의주도하게 주장한 사람은 무신론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였다.

1-1-2. 쇼펜하우어는 단치히 상인의 아들로 1803년까지 아버지의 사업을 익히며 성장했다. 그는 의대생의 공부를 하다가 방향을 바꿔 1810년 괴팅겐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플라톤과 칸트를 좋아했지만, 칸트의 제자인 피히테는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1811년 베를린에서 피히테의 강의를 듣고 그의 민족주의를 혐오했다. 쇼펜하우어는 박사학위 논문이었던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을 쓰기 위해 나폴레옹에 대한 프로이센의 투쟁에 가담하지 않고 빠져나왔다.

1-2. 사상

1-2-1. 쇼펜하우어는 1814~1818년에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The World as Will and Idea)》를 썼다. 그는 네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에서는 관념(Idea)으로서의 세계에, 두 번째와 네 번째는 의지(Will)로서의 세계에 관해 썼다. 그가 말하는 ‘관념’(혹은 ‘표상(representation)’으로도 번역된다)은 개념이 아니라, 로크와 버클리가 지칭한 구체적인 경험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세계는 오로지 관념, 의식과 관련해서만 존재한다(‘세계는 나의 관념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몸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지각을 하고, 다른 대상들은 그것들의 상호 영향을 통해 알려진다.

1-2-2. 관념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설명은 칸트와 별반 다른 것이 없지만, 세계를 ‘의지’로 표현한 부분은 매우 독창적이다. 그는 관성 법칙이나 중력 법칙으로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이지만, 과학은 관성이나 중력과 같은 힘의 내적 본성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은 인식주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나의 신체는 스스로 의식하는 능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데, 오로지 이것만이 사물들의 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준다. 즉 쇼펜하우어는 ‘수수께끼의 답은 개인으로 여겨지는 인식 주체에게 주어져 있는 의지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인식 주체 자신의 실존에 대한 실마리를 주며, 인식 주체의 존재와 행위와 운동의 내적 구조를 보여준다(WWI 100)’고 말했다. 모든 대상의 내적 본성은 의지이다. 이 의지는 중력에서 자력에 이르기까지 많은 등급이 있는데, 중력과 자력보다 더 높은 등급만이 지식과 자기 결정력을 동반한다. 칸트도 의지를 추구하긴 했으나, 이는 쓸모가 없었던 물자체(thing-in-itself)의 참모습이다.

1-2-3. 쇼펜하우어는 무생물이 동기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으면서도, 왜 무생물의 자연적 경향성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욕망(appetite)’이나 뉴턴이 말한 ‘힘’이라 하지 않고 ‘의지’라고 했을까? 그는 힘을 의지로 설명할 경우, 그것은 조금 알려진 것을 많이 알려진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는 세계의 내적 본성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를 의식함으로써 주어진다고 보았다.

1-2-4. 그러나 의지 자체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에 따르면, 모든 의지는 욕구를 일으키고, 욕구는 결핍을 만들고, 결핍은 고통을 유발한다. 즉, 어떤 욕구가 충족되면 그 후에 또 다른 욕구가 생긴다. 우리의 의식이 의지로 가득 차게 되면, 우리는 결코 행복하거나 평화로울 수 없다. 최선의 바람은 고통과 권태가 번갈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1-2-5. 쇼펜하우어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책에서 의지의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두 가지 방식을 제시했다. 첫 번째 방식은 예술, 즉 미에 대한 순수하고 사심 없는 관조(contemplation)를 통한 탈출이고, 두 번째 방식은 단념(renunciation)을 통한 탈출이다. 삶에 대한 의지를 단념해야만 의지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삶에 대한 의지는 자살이 아닌 금욕주의에 의해 단념된다. 진정한 도덕적 진보를 위해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악함과, 우리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교활함을 버려야 한다. 또한 타인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정의로움과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선량함마저도 버려야한다. 즉 우리는 미덕을 넘어 금욕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궁극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는 순결, 결핍, 절제를 받아들여야 하며, 죽음이 악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1-2-6. 쇼펜하우어는 기독교와 힌두교, 불교의 성인들을 자기희생의 모범으로 여겼으나, 그 자신의 금욕주의에 대한 입장은 어떠한 종교적 전제에 의거해있지 않고, 대부분의 성인의 일대기가 미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개개의 주체와 대상은 단순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인도철학의 마야사상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다.

1-2-7.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는 직접적인 영향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1820년에 헤겔이 있는 베를린 대학으로 가서 강의를 했는데, 그는 헤겔을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강의를 일부러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개설했으나 그의 학생을 빼앗아오지 못했다. 그는 헤겔을 ‘아무 사상도 없는 지루한 이야기의 수면효과’나 ‘정말 따분하고 형편없는 허풍선’이라고 하며 조롱했다.

 

1-2-8. 쇼펜하우어는 1839년에 논문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로 ‘노르웨이 인 상’을 받기 전까지 그의 천재성을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이 논문과 윤리학의 기초를 다룬 다른 논문을 묶어 1841년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1844년에는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 증보판을, 1851년에는 《수필과 이삭줍기》라는 수필집을 냈다. 그의 저작들은 일반 사람들이 그의 부적절한 의견/정치적으로 잘못된 의견을 유쾌 또는 불쾌하게 음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치 있고 명료한 문체의 진가를 맛볼 수 있었다.

 

1-2-9.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을 비롯한 대륙의 실패한 혁명이 쇼펜하우어의 60번째 생일 직후에 일어났는데, 그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정치적 시도에 환멸을 느끼던 세대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비난한 독일 대학 기관의 환심을 샀고, 비열한 망상이라 맹비난했던 그 세상의 안락함을 누렸다. 그 자신의 삶이 그가 찬양했던 금욕주의적 이상과 완전히 달랐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이 실제로 지니고 있는 덕목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윤리학자에 대한 희한한 요구이다’라고 대답할 것 같다.

 

Ⅱ. 키르케고르의 도덕과 종교

2-1. 생애와 시대배경

2-1-1. 쇼펜하우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의 증보판을 준비하던 때,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철학자는 전혀 다른 형이상학적 기초 위의 금욕주의와 비슷한 요구 사항을 제시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는 1813년 비극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였다. 그의 어머니와 여섯 남매 중 다섯이 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양치기 소년일 때 신을 모독하는 말을 해서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다. 키르케고르는 1830년에 코펜하겐 대학에 신학을 공부하러 갔고, 쇼펜하우어처럼 헤겔 철학에 익숙해지면서 헤겔 철학을 혐오하게 됐다. 그는 신학은 싫어했지만,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신비로운 경험을 동반한 종교적 변환을 겪었다. 그는 1840년 올센과 약혼했으나, 자기 가족의 이력 때문에 결혼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일 년 뒤 파혼한다. 그 후 그는 자신을 철학자로서의 소명을 가진 사람으로 여겼다.

2-2. 사상

2-2-1. 키르케고르는 1841년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에 관한 학위 논문을 완성한 후 베를린으로 가 셸링의 강의를 들었다. 독일 관념주의에 대한 반감이 커졌는데, 그 이유는 쇼펜하우어와 달리 독일 관념주의는 구체적인 개인을 과소평가한 데 있었다. 그는 쇼펜하우어처럼 단념으로 종결되는 정신적 이력을 단계별로 묘사했으나, 정신적 이력의 단계가 고차적일수록 개체성은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독특한 개성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고 보았다.

2-2-2. 키르케고르의 학설은 1843~1846년에 여러 필명으로 출간된 일련의 저작들에서 설명이 나온다. 1843년의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는 두 가지 인생관, 즉 심미적 인생관과 도덕적 인생관을 제시한다. 군중의 일원이 개인이라는 출발점에서 보면, 심미적 인생은 자기실현을 향한 첫 번째 단계이다. 심미적인 사람은 맛과 멋(taste and elegance)이 있는 쾌락을 추구한다. 심미적인 사람은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이든 즉각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잡으려는 선택을 제한하는 것에 대해 결코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본질적 특성이 있다. 이런 사람은 시간이 지난 후 이러한 자유에 대한 자신의 요구가 현실적으로 자기 능력을 제한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즉 그는 자신을 사회제도 안에 포함하여 그 제도가 부과하는 의무를 수용해야하는 도덕적 단계로 옮아간다. 그러나 아무리 도덕 법칙을 완수하려 해도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2-2-3. 심미적 인생의 방식과 도덕적 인생의 방식 둘 다 종교적인 영역으로 상승하여 그 한계를 넘어야 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그가 다른 필명으로 쓴 다른 저작들 – ⟪공포와 전율⟫(1834년), ⟪분노의 개념⟫(1844년), ⟪삶의 방식의 단계⟫(1845년)에서 다양하게 전달된다. 이러한 글들은 1846년의 ⟪철학적 단편에 대한 비학문적 후기⟫를 출간하며 최고조에 달했다. 이 책의 메시지는 헤겔 신봉자가 말했듯 신앙은 객관적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2-2-4. 도덕적 영역에서 종교적 영역으로 옮아가는 과정은 ⟪공포와 전율⟫에서 신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명령한 성경 이야기를 통해 생생히 묘사되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도덕적 영웅은 보편적 도덕률을 위해 자기 인생을 바쳤으나, 아브라함은 특수 신의 명령 때문에 도덕률을 위반했다. 키르케고르는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도덕적 명령을 위반한 아브라함의 행위를 ‘도덕에 대한 목적론적 유예’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개인이 도덕률을 위반하는 것을 신의 소명으로 여긴다면, 이것이 그냥 유혹인지 진짜 신의 명령인지 분간할 수 없다. 혼자만으로는 그것을 알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2-2-5. 키르케고르는 1848년 두 번째 신비로운 경험 후, 글을 좀 더 쉽게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순수한 마음은 한 가지만 바라는 것이다⟫, ⟪사랑의 행위⟫와 같은 다수의 기독교 담론과 책들을 자기 이름으로 펴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는 다시 필명을 사용하며 절망의 유일한 대안으로, 진정한 실존을 실현하기 위해 신앙을 필요조건으로 제시했다.

2-2-6. 키르케고르의 후반부 인생은 이름만 기독교라 여긴 덴마크 국교회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그는 민스터(J.P.Mynster) 대주교를 아주 비판했고, 1854년 그가 죽은 후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책을 냈다. 키르케고르는 교권에 반대하는 소책자 ⟪순간⟫을 창간하고 지원하고, 9호까지 발간한 후, 거리에서 쓰러져 몇 주 동안 병을 앓다가 1855년 11월에 숨을 거둔다. 그 자신이 원하지 않았고 조카도 반대했는데도 그의 장례는 교회에서 치러졌다.

Ⅲ. 변증적 물질주의(마르크스)

3-1. 생애와 시대배경

3-1-1.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 모두 헤겔의 학설에 대한 반작용에서 철학적 추진력을 얻었다. 그러나 헤겔주의를 가장 격렬하고 강력하게 반대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Karl Marx)였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임무를 ‘헤겔을 뒤짚어 엎는 것’이라 했다. 헤겔의 변증적 관념주의(dialectical idealism)는 변증적 물질주의(dialectical materialism)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3-1-2.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1818년 아들이 태어나기 전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한 진보적인 유대교인이었다. 마르크스는 청소년 시절 트리어에서 학교를 다녔고, 본 대학에서 1년간 법학을 공부하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그 후 5년 동안 베를린 대학을 다니며 진지하게 살았는데, 시 쓰기를 좋아했으며 법학 대신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가 베를린에 갔을 때 헤겔은 이미 죽었지만,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가 활동하고 바우어(Bruno Bauer)가 이끌던 청년헤겔학파라는 좌파단체와 헤겔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는 헤겔과 바우어에게 역사를 변증적 과정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 역사의 각 단계는 기하학적 증명 과정과 아주 비슷한 과정으로 기초적인 논리적 원리나 형이상학적 원리에 따라 앞선 단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3-2. 사상

3-2-1. 청년헤겔학파는 사람들이 자기 존재의 진정한 본질적 요소인데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보는 상태인, 헤겔의 소외 개념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헤겔 자신이 강조한 소외의 형태는 어떤 단일한 정신의 발현인 개인들이 서로를 통일체의 구성요소로 보지 않고 적대적인 경쟁관계로 보는 것이다. 바우어와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자신의 삶과 의식을 비실재적인 신에게 맡기는 종교를 최고의 소외 형태로 간주했다. 포이어바흐는 ‘종교가 인간을 그 자신과 분리시킨다’면서 ‘신은 인간이 자신과 적대자로 맞서게 한다(W vi 41)고 말했다.

3-2-2. 헤겔과 포이어바흐에게 종교는 허위의식이었다. 헤겔은 이 허위의식이 종교적 신화를 관념주의 형이상학으로 변형함으로써 치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이어바흐에게는 헤겔주의 자체가 소외의 한 형태였다. 즉 종교는 제거되어야할 것이지 변형될 것이 아니며, 사회적 인간의 생활에 대한 실증적인 이해로 대체되어야 했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일종의 허위의식인 점은 동의했지만, 헤겔과 포이어바흐가 소외에 대해 터무니없는 처방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헤겔의 형이상학에서 인간은 자신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관망하기만 하는 존재였다. 반면 포이어바흐는 인간의 숭배 대상 가운데 인간을 소외시킨 실체가 오로지 신만이 아닌 점을 깨닫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사유 재산이 국가의 기반이 되는 한 국가 역시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소외시킨다고 보았다. 소외는 철학적 반성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철학자는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TF 11)’고 말하며, 사회의 대변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3-2-3.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에 관한 논문으로 1842년 예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청년헤겔학파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쾰른에서 급진파 신문 <라인신문>을 편집하면서 정치 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지낸 남작의 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1843년에 결혼하여 그녀가 죽을 때까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다. 마르크스가 결혼한 직후 러시아 황제의 압력으로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라인신문>은 폐간된다.

3-2-4. 마르크스는 파리로 이사해 정치경제학에 관한 영국 고전들을 통해 자신이 갈 길을 확인하였고, 많은 급진파 친구들을 만나며 신문 기자로써 추구해야 할 다른 일거리를 발견한다. 이 친구들 중 엥겔스(Friedrich Engels)와 만나 함께 ‘공산주의’ 이론, 즉 공동 소유를 위한 사유 재산의 폐지 이론을 세우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같이 연구한 ⟪독일의 이데올로기⟫은 마르크스가 반체제적 신문기자라는 이유로 파리에서 쫓겨난 뒤 이주한 브뤼셀에서 완성된다.

3-2-5. 이 책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물질주의적 역사 개념을 제시한다. 삶이 의식을 결정하지 의식이 삶을 결정하지 않는다. 역사의 근본적인 본성은 경제적 생산 과정이고, 그 과정을 이해하려면 경제적 생산의 물질적 조건을 이해해야 한다. 다양한 생산 방식은 사회 계급의 형성과 계급들 사이의 투쟁, 그리고 여러 형태의 정치 생활과 법률과 윤리를 초래한다. 예를 들면 맷돌은 봉건 영주가 다스리는 사회를 낳고, 증기 방앗간은 산업 자본가가 지배하는 사회를 가져온다. 변증적 과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공산주의의 등장을 위해 여러 단계를 거치며 세계를 끌어간다.

3-2-6. ⟪독일의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가 죽은 후에도 한참 출판되지 않았으나, 그 책의 아이디어는 1847년의 ⟪철학의 빈곤⟫에 집약되어 있다. 물질주의적 역사개념을 더 널리 알린 것은 엥겔스의 초안을 바탕으로 1848년에 발행한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이었다. 이것은 새로 설립된 ‘공산주의 동맹’의 원리와 이상을 개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언⟫의 메시지는 엥겔스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인류의 전 역사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의 투쟁과 경쟁의 역사였다. 온갖 착취와 억압, 계급 차별과 계급 투쟁으로부터 사회 전체를 동시에 완전히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이제 피착취 계급과 피지배 계급(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착취 계급과 지배 계급(부르주아 계급)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쟁취할 수 없는 그런 단계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계급 투쟁의 역사는 일련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CM 48)”

⟪선언⟫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마지막 문장이다. ‘공산주의 혁명에서 지배 계급들이 벌벌 떨게 하자.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사슬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지배할 세상이 온다. 온 나라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3-2-7. ⟪선언⟫이 발간된 해에, 파리, 베를린, 로마 등 여러 도시에서 무장 폭동이 일어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가 무상 교육 제도를 수립하고 운수업과 은행업을 국유화하며, 누진 소득세를 부과하도록 혁명가들을 촉구하기 위해 독일로 잠깐 돌아왔다. 마르크스는 혁명 실패한 후 쾰른에서 두 번 재판을 받고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프로이센 영토에서 추방당한다. 파리로 돌아와서도 추방당한 그는 남은 생애 런던에서 빈곤에 허덕였는데, 그의 아이 여섯 중 셋이 굶어 죽었다.

3-2-8. 마르크스는 런던에 살며 하루에 열 시간씩 연구하며 변증적 물질주의 이론을 전개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1857~1858년에 지난 10년간의 경제적 견해를 정리해 일련의 비망록을 작성했는데, 이 비망록을 기초로 하여 1859년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집필했다. 그 저작의 서문은 물질주의적 역사 이론에 대한 간결하고도 권위적인 진술을 담고 있다.

3-2-9.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이론과 실제를 결합시키려 평생 노력했다. 그는 1864년에 ‘국제 노동자협회의 창립을 도왔으나, 그 단체는 내부 분쟁을 겪고 파리의 야만적인 폭동을 지지한 탓에 평판이 나빠져 1876년에 해산된다.

3-2-10. 마르크스의 저술활동은 역사 과정이 어떻게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좌우됐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 ⟪자본론(Capital)⟫에서 최고조를 달한다. 이 책의 첫 번째 권은 18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되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권은 1883년 마르크스가 죽었을 때 출판되지 않은 채로 있다가 엥겔스에 의해 사후 유작으로 출판된다. 그는 하이게이트 묘지의 아내 곁에 묻혔다.

3-2-11. 마르크스의 거대한 저작의 기본 주장은, 자본주의 제도가 최종 위기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본성상 노동 계급의 착취를 필요로 한다. 모든 생산품의 가치는 생산품에 투여된 노동의 총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생산품의 실제 값보다 더 적게 지불해서 가치의 일부를 착취한다. 기술이 발달하면 동시에 노동자의 생산성이 향상됨에 따라 노동에 의해 산출된 부가 갈수록 자본가에게 쌓여간다. 이 착취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느끼는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그 때 자본주의 제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로 대체될 것이다. 그 독재 체제는 사유 재산을 폐지하고 생산 수단이 중앙 정부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사회주의 국가를 도입하게 된다. 그 후 사회주의 국가는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되는 공산주의 사회로 대체될 것이다.

3-2-12.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이어 보편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그가 죽은 후 역사에서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의 이론들은 본질상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고 정치적이었다. 바로 그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이론들은 성공과 실패 두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사건들이 경제적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잘못을 범한다. 마르크스주의 유형의 사회주의를 겪은 나라들을 보면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과 같은 개인들이 권력을 휘둘렀는데, 이는 오로지 비인격적 힘만이 역사를 구현할 수 있다는 이론이 거짓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적 요인들이 정치와 문화에 미치는 여향을 부인하는 역사가나 역사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3-2-13. ⟪공산당 선언⟫의 제안들을 150년쯤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면 폭정에 의해서만 집행되는 성급하고 가혹한 방법들 – 예를 들어 상속의 폐지와 강제적인 농업 노동, 선진국들이 현재 당연시 여기는 누진 소득세법, 보통 교육과 같은 제도들, 그리고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채택해 성공을 거둔 철도와 은행의 국유화같은 실험들이 뒤섞여 있음을 알게된다. 마르크스는 예언자로서는 신뢰를 얻지 못했지만, 그의 철학은 의식이 삶을 결정짓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 가장 설득력있게 논박했다. 그가 죽고 난 후,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는 과학적 이론이 아닌 정치적 행동주의(activism)에 대한 영감과 정치 체제에 대한 지침으로 여겨지는 그의 관념체계에게서 좋든 나쁘든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로크의 관념

홉스의 경험론보다 일반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로크의 경험론을 보자. 경험론을 대표하는 로크와 합리론을 대표하는 데카르트는 공통적인 전제들을 공유하는데, 이 둘 모두 직접적인 의식에 호소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한다.

로크의 ‘관념’이라는 용어가 대상을 의미하는지 활동을 의미하는지 구별하기가 어렵다. 로크는 관념이 ‘사고 과정에서 정신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정신에 등장하는 것’이라는 문구는 정신이 사고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정신이 참여하는 바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애매하다.

로크는 자주 데카르트에 반대하는 견해를 드러내지만 많은 철학적 주제들을 데카르트에서 빌려와 질문을 던진다. 동물은 일종의 기계인가? 영혼은 항상 사고하는가? 물질이 없는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 본유 관념이 존재하는가? 이들 중 마지막 질문은 결정적인 질문으로 어떤 대답을 하는지에 따라 합리론자 또는 경험론자로 분류된다. 또한 여기서 관념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서로 다른 의미 사이의 차이를 극복한다면 로크와 데카르트의 관점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위 질문은 사고 활동이 아니라 단지 사고 능력에 관한 것으로 데카르트와 로크에 따르면 인간만이 고유하게 타고나는 지성이라는 일반적인 능력이 존재한다. 로크의 《인간지성론》은 인간을 감각 능력을 지닌 나머지 존재들보다 우위에 서게 만드는 것이 바로 지성이라는 언급과 더불어 시작된다. (E, 43)

데카르트는 진리란 인간이 본유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본유 관념 중 일부는 심사숙고 후에 동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로크 또한 진리가 경험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개념을 얻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본다.

로크는 본유 관념에 관한 논의가 대부분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간에 우리가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어떤 원리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데 할애한다. 로크에 따르면 설령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진리가 있다 할지라도 보편성만으로는 그것이 본유적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설명이 공통적으로 학습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도 보편적 동의가 본유적임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만 본유적인 것도 보편적 동의를 함축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본유 관념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데카르트는 본유적 요소가 없이는 경험이 과학적 지식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로크는 경험이 없이는 본유 관념이 세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두 주장은 모두 얼마든지 옳을 수 있다.

로크는 합리론자들의 논변이 ‘색, 소리, 맛, 형태 등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념을 본유적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이성 및 경험과 반대되는 것은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고 주장(E, 58)하지만 데카르트는 어떤 특정한 사과의 색, 맛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본유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붉음이나 달콤함이라는 일반적 관념이 본유적이라는 생각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고 본다. 여기서 합리론과 경험론 사이의 논쟁이 근본적으로는 일치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색, 맛과 같은 성질들이 주관적이라는 주장에 대한 로크의 논변은 ‘오직 하나의 감각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에 형성되는’ 관념과 ‘하나 이상의 감각을 통해서 정신에 전달되는’ 관념을 구별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구별에 대응하여 물체에서 발견되는 성질들 사이의 구별도 이루어진다. 우리는 정신의 지각으로서의 관념을 구별하는 동시에 이런 지각을 일으키는 물체가 변형된 것으로서의 관념도 구별해야 한다. 또한 관념이 관념을 일으키는 물체 안의 무언가에 대한 정확한 상이라고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로크는 우리 안에 관념을 낳는 능력을 ‘성질들’이라고 말하며 하나 이상의 감각을 통해서 지각되는 성질을 ‘제일성질’, 오직 하나의 감각을 통해서 지각되는 성질을 ‘제이성질’이라고 말한다. 이런 구별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공통적 감각’ (=제일성질)과 ‘적절한 감각’ (=제이성질) 사시의 구별은 이미 하나의 관행이었다(E, 134~5). 로크는 적절한 감각의 객관성을 부정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와 결별한다. 이는 데카르트가 예견했던 바이기도 한데 이를 지지하기 위하여 로크와 데카르트는 더욱 설득력 높은 형태의 논변을 제시한다.

 로크는 오직 제일성질만이 그런 성질을 지닌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냄새, 맛이 전혀 없는 물체는 존재할 수 있지만 형태, 크기가 없는 물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연장성, 형태, 운동 가능성 등은 그대로 유지된다. 데카르트는 오직 연장성만이 물체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논변을 펼쳤다.

 어떤 돌의 관념에 집중하여 돌의 진정한 본성에 속하지 않는 돌의 단단함을 제거한다. 돌이 액체가 되거나 가루로 변하면 단단함이라는 성질은 사라지지지만 돌은 여전히 물체 상태를 유지한다. 이런 논변을 통하여 물체는 반드시 형태를 지녀야 하지만 어떤 특정한 형태를 얼마든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일성질의 영구성에 관한 논변은 이런 성질들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에 의존하는 듯이 보인다. 반면 제이성질의 비영구성에 관한 논변은 이런 성질들에 대한 개별적인 관점에 의존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성질들이 물체의 본질에 속하는 성질이 아니라고 해서 이들이 물체의 진정한 성질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

 로크는 제이성질이 우리 안에 감각을 산출하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나 홉스에서도 그랬듯이 여기서 다시 한 번 상대성과 주관성을 혼동하는 일이 일어난다. 어떤 속성은 상대적이면서도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로크의 언급에 따르면 ‘불 또는 눈의 일부에 해당하는 특정한 크기, 수, 형태, 운동은 누군가가 이들을 감각적으로 지각하든 그렇지 않든 실제로 이런 대상에 속한다.’ 반면에 밝음, 뜨거움, 흰 색깔, 차가움 등은 진정으로 이런 물체에 속하는 것이 아닌데 이는 질병, 고통이 복통을 일으키는 음식물 자체에 속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런 논변은 로크가 언급한 제이성질은 우리 안에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지닌 능력이라는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능력은 당연히 감각 기관이 있을 경우에만 발휘되지만 능력 자체는 설령 발휘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계속 존재해야 한다. 로크는 우리 안에 제이성질의 관념을 낳는 것이 오직 그런 능력을 지닌 대상의 제일성질일 뿐이라고 말한다. 

로크가 마지막으로 제시하는 논변은 지각과 느낌 사이의 유비이다. (논변) 하지만 이 유비는 잘못 적용된 것인데 로크의 이런 논변은 그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되고 만다.

로크는 친근한 예들을 통해서 동일한 대상에 의해서 생겨난 감각들이 주변 환경에 따라 서로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예로부터 제이성질이 객과적이 아니라는 점이 아니다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법에 관한 몽테스키외의 견해

 

1-1. 미국 헌법은 몽테스키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몽테스키외는 신뢰성과 상관없이 자료를 수집한 후 국가의 본질에 관한 이론을 구성한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인간은 다양한 요소의 지배를 받는다. 이런 요소로는 기후, 종교, 법률, 정부의 명령, 과거의 사건들, 관습, 태도 등을 들 수 있다.’ 그 사회에 적합한 법을 통해서 일반 정신이 표현되고 일반 정신은 법의 정신을 낳는다. 몽테스키외는 인간이 제정한 실정법보다 신이 확립한 정의로운 기본법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1-2. 아리스토텔레스가 국가의 형태를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의 세 종류의 형태로 분류했던 것처럼 몽테스키외 역시 세 가지의 국가 형태를 제시한다, 공화정, 군주정, 폭군에 의한 전제정으로 나누는데, 이 세 유형은 각각 덕과 명예 그리고 공포라는 대표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1-3. 이 세 특성은 각각의 정부가 지닌 원리다. 하지만 공화정이 덕을 원리로 삼는다 해서 공화정에 사는 모든 사람이 덕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덕을 갖추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각각의 특성을 해당 정부 아래에 사는 사람이 지니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특성을 지여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특성들이 없으면 정부는 불완전해진다.

1-4. 몽테스키외가 칭찬한 영국 헌법의 특징은 삼권 분립의 원칙이었다. 몽테스키외는 당시 하노버 공국의 정치체제를 무척 높이 평가함으로써 전 세계 다른 많은 나라의 헌법 제정에 계속 큰 영향을 미쳤다,

1-5. 몽테스키외가 삼권분립을 중요하게 여긴 까닭은 이것이 폭군을 막는 최선의 방파제인 동시에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에게서 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권리’이다. 몽테스키외는 독립적인 입법부가 제정한 것만을 법률로 여겼다. 또한 당시 많은 나라들에서 시민들은 자주 완벽하게 합법적이지만 권력자에게 반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행위 때문에 임의로 체포될 위험 아래 놓여있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폭군아래서 시민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1-6. 몽테스키외는 자유에 대한 더욱 본질적인 정의를 제시한다. 자유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해야 하는 바를 행하고, 원해서는 안 되는 바를 행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 능력이다.’ 자유로운 사회적 제도와 이상적인 형태의 개인적인 의지 사이의 이런 연결은 루소의<<사회계약론>>에서 더욱 중요한 정치 이론으로 발전된다.

라이프니츠의 인식론, 성질과 관념에 관한 버클리의 견해

라이프니츠의 인식론

1-1. 스피노자의 인식론에서 그는 자신의 형이상학적 주장, 즉 우리가 지식과 경험에 관하여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의 관념과 신체의 운동이 신인 동시에 자연이기도 한 유일 실체가 드러내는 개별적인 요소의 두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를 적절히 조화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등장시킨다. 라이프니츠의 인식론에도 또한 일상적인 말과 사고를 형이상학적 체계와 일치시키려는 시도가 나온다. 하지만 그의 체계에서는 관념과 운동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고, 둘 사이에는 아무 상호작용이 없는 완전히 독립적인 일련의 사건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스피노자의 체계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 둘은 신의 정신 안에 들어 있는 예정 조화에 따라 서로 연결된다.

1-2. 라이프니츠의 표준적인 모나드론에 따르면, 일반적인 어떤 형태의 인식론이 성립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정신과 외부 세계 사이의 어떤 관련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감각적 지각을 설명해야 하는가? 그리고 모든 단순 관념이 오직 정신 내부의 산물이라고 하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은 우리의 본유 관념과 획득 관념을 둘러싼 논쟁에서 무슨 관심을 보일 수 있는가? 라이프니츠의 가장 중요한 저술 <<신인간지성론>>은 인식론에 관한 저술로, 그는 이 저술에서 로크의 경험론적 지식 이론을 상세하게 비판한다. <<신인간지성론>>은 로크의 견해를 대변하는 필랄레테스(Philalethes)와 라이프니츠의 견해를 표명하는 테오필루스(Theophilus)가 등장해 벌이는 논쟁으로, 이 저술의 각각의 장은 로크의 <<인간지성론>>의 장들과 정확히 대응하며 로크의 주장을 반박한다.

1-3. <<신인간지성론>>에서 라이프니츠가 옹호하는 수많은 견해와 논변들은 훨씬 더 상식적인 형이상학을 지닌 철학자도 얼마든지 채택할 수 있는 것들이다. 라이프니츠도 이 점을 인지하고, 이는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는 철학자도 해가 뜨고 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며 스스로를 옹호했다. 모나드론보다 인식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이 저술은 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1-4. 경험론자들은 감각 안에 없는 것은 지성 안에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지성 자체를 제외하고’ 그렇다 답한다. 우리의 영혼은 존재이고 실체이고 단일체이며, 그 자신과 동일하고 원인이며 관념과 추론이 위치하는 장소이다. 존재와 실체 등의 관념은 오직 영혼이 자신에 대해 반성할 때만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들은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본유적이다. 정신은 앞으로 그려 나갈 그림의 밑그림이 수(number)에 의해서 이미 연필로 표시된 캔버스이다.

1-5. 이런 의미에서 본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념의 예로, 라이프니츠는 논리학과 산술, 기하학의 원리를 예로 든다. 라이프니츠는 ‘사각형은 원이 아니다’는 본유적인 반면 ‘단맛은 쓴맛이 아니다’는, 달거나 쓴 느낌은 감각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여 본유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외부 세계는 정신에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하고 영혼의 모든 사고와 행위는 내부에서 발생한다는 주장과 조화시킬 수 있을까?

1-6. 이에 답하려면 라이프니츠가 인간 영혼을 모나드들의 위계질서에서 가장 상위의 모나드로, 즉 인간 신체의 서로 다른 부분과 기관에 대응하는 살아 있는 실재로 여겼음을 알아야 한다. 모나드의 관점에서 보면, 감각으로부터 정신에 어떤 느낌이 생겼다는 말은 곧 상위의 모나드가 지닌 관념 중 일부가 하위의 모나드로부터 발생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하위 모나드들의 지각은 통각(상위 모나드의 자기의식)에 의해 명확해진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는 창이 없어서 외부 세계로부터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한다. 모나드들은 그 대신 일종의 텔레파시 같은 것으로 서로 연결 되는 듯하다.

1-7. 라이프니츠는 이런 생각을 의식의 단계에 관한 탐구로 전환한다. ‘우리 안에 끊임없이 수많은 지각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도록 이끄는 요소들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이런 지각은 통각과 반성이 없이 이루어진다.(G V.46)’ 우리의 의식이 지니는 경험 중 대부분은 수많은 매우 작은 지각들로 구성되는데, 우리는 이 지각에 대해 판명한 관념을 갖지 못한다. 하위 모나드가 지니는 지각의 특징은 혼란스러운 관념이다. 상위 모나드의 통각은 우리의 관념에 명석, 판명함을 부여한다. 혼란스럽기 때문에 감각적 지각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듯 보인다.

1-8. 그는 의식의 단계 사이의 구별을 본유 관념에 대한 우리가 논리학의 기본 법칙을 인식하기 훨씬 이전에 개별적 진리로부터 배우기 시작한다는 전형적인 반박에 답하는 데 사용한다. ‘일반 원리들은 우리의 사고 안으로 들어와 영혼의 각 부분을 형성하고 이들을 서로 연결한다. … 마치 걷기 위해서 근육과 힘줄이 필요하듯이 이들은 항상 필요하다.’ 정신은 항상 논리에 의지하지만, 논리 법칙을 확인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1-9. 로크는 지식을 형성하는 기본 요소가 감각을 통해서 얻는 단순 관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단순 관념이라는 개념 자체를 일종의 환상으로 보았다. “나는 누군가가 어떤 감각적 관념을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관념은 자신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여지를 정신에 제공하지 않는다. … 예를 들면 녹색이 파란색과 노란색을 한데 섞은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므로, 따라서 녹색의 관념이 이 두 색의 관념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녹색의 관념은 파란색이나 따듯함의 관념과 마찬가지로 단지 외견상 단순하게 보일 뿐이다.(G V.109)” 라이프니츠는 색과 같은 제이성질은 주관적이고 형태와 같은 제일 성질은 객관적이라 하는 로크의 구별을 거부한다. 그는 제일성질과 제이성질 모두 현상일 뿐이라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이후 버클리에 의해 더욱 완전한 형태로 발전된다.

 

성질과 관념에 관한 버클리의 견해

2-1. <<하일라스와 필로누스 사이의 대화>>에서 버클리는 우선 제이성질이 주관적이라는 로크의 주장에 동조하여 이를 논증한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논증을 통해 제일성질 또한 주관적이라고 주장하며 로크에게 등을 돌린다. 그는 어떤 관념도, 제일성질의 관념조차도 대상과 유사하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2-2. 대화가 전개되면서 유물론자인 하일라스는, 우리가 물질적 대상 자체가 아닌 오직 대상의 감각 가능한 성질들만을 지각한다는 로크의 전제를 의심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물체의 존재를 옹호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감각 가능한 것이라는 말을 통해 나는 오직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바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실상 감각은 자신이 직접 지각하는 바가 아닌 그 무엇도 지각하지 않는데, 감각은 추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BPW, 138)’ 물질적 대상은 추론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각되지는 않는다. 감각 가능한 대상은 사실상 감각 가능한 수많은 성질들에 지나지 않는데, 이런 성질들은 정신과 무관하다.

2-3. 대화에서 관념론자로 등장하는 필로누스는, 감각 가능한 성질들이 객관적이라는 하일라스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뜨거움이 주관적임을 보이는 로크의 논증으로 그를 반박한다. 뜨거움의 모든 정도는 감각을 통해 지각된다(그 정도가 높을수록 더 선명히 지각된다). 하지만 매우 높은 정도의 뜨거움은 동시에 큰 고통이다. 물질적 실체는 고통을 느낄 수 없으므로 매우 높은 정도의 뜨거움은 물질적 실체 안에 존재할 수 없다.

2-4. 이 논변은 오류로 가득 차 있는데 버클리는 이를 교묘히 숨긴다. 여러 논변에서 잘못된 진행은 하일라스의 말에 내재하는데, 필로누스는 단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만 한다. 필로누스가 “감각 가능한 것이 실재한다는 점은 지각을 통해 알게 되는지, 아니면 그것은 지각된다는 사실과 구별되는 무언가로서 정신과 아무 관련이 없는지”에 관해 묻자 하일라스는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과 지각된다는 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라고 답한다.

이제 뜨거움을 물리적 관점(힘의 한 형태로서의)이 아니라 지각 가능한 성질로 보고 이에 관해 논의한다고 가정해보자. 존재한다는 것과 지각된다는 것은 서로 별개라는 하일라스의 말은 옳다. 하지만 하일라스는 ‘지각된다는 사실과 구별된다는 점’과 ‘정신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을 동일시하는 필로누스의 등식을 받아들이면 안된다. 실제로 존재하는 성질이 현실적으로 지각되는 바와는 분명히 구별된다는 점을 강력히 밀고 나가야 한다.

2-5. (1) 필로누스가 “가장 격렬하고 강력한 정도의 뜨거움은 매우 큰 고통이 아닌가”라는 물음에 대해 하일라스는 그렇다고 답한다. (2) 이어서 필로누스는 “지각 능력이 없는 것에게는 쾌락이나 고통의 능력이 있을 수 있는가”를 묻자 하일라스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답한다. (3) 필로누스는 “자네(하일라스)가 말하는 물질적 실체는 감각 능력이 없는 존재라면 그 실체는 고통의 주체가 될 수 없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하일라스는 절대로 될 수 없다고 답한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 하일라스는 일종의 구별을 제시하며 대답해야만 했다. 즉 가장 강한 정도의 뜨거움이 큰 고통을 일으킨다는 점은 동의하지만, 뜨거움이 그 자체로 큰 고통이라는 점은 부정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서 또한 구별을 해야 한다. 즉 고통을 느낄 능력은 없지만 고통을 일으킬 능력은 있다 답해야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에서 그는 물질적 실체가 감각 능력이 없다는 점에 결코 동의하면 안된다. 바위는 감각 능력이 없지만 고양이는 그런 능력을 지닌다. 여기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바는 물질적 실체가 감각을 지닐 수 없다 주장하는 로크의 논변이다. 왜냐하면 물질적 실체도 감각을 지니기 때문이다.

2-6. 대화가 반쯤 진행되면 하일라스는 제이성질들이 정신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제일성질들은 물체 안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로크의 견해를 옹호하려 한다. 이에 필로누스는 로크가 제이성질의 객관성을 부정하면서 사용한 논변들이 제일성질의 객관성에 반대하는 주장을 펴는 것에 똑같이 사용될 수 있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2-7. 로크는 인간에게는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대상이 동물에게는 달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을 들어 냄새는 실재하는 속성이 아니라 주장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의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대상이, 이보다 더 작은 어떤 동물에게는 거대한 산처럼 보인다는 점을 들어 크기 또한 실재하는 속성이 아니라 주장할 수 있다. 어떤 동일한 대상이 가까이 있는 사람의 눈에는 크고 각진 것으로 보이지만 멀리 있는 사람의 눈에는 작고 둥글게 보인다는 점을 들어, 이 세계에 어떤 크기나 형태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2-8. 하일라스는 물질적 대상 자체를 지각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이 대상이 관념을 통해 지각된다고 하는 주장을 필로누스는 비웃었다. 실재하는 대상 자체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색을 띨 수 있는가? 따라서 그는 관념이 정신 외부의 그 어떤 것에 관한 그 어떤 정보라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주장을 옹호할 수 없게 된다.

2-9. 감각적 관념에 관해 언급한 바와 전통적으로 지성의 영역으로 여겨져 온 보편 관념에 관해 언급하는 버클리의 인식론은 반드시 검토해야 한다. 로크는 일반 관념을 형성하는 능력이 인간과 동물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동물들과 달리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관념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니는데, 주어를 분류하는 술어와 같은 일반적 단어들은 추상적 일반 관념에 대응된다. <<인간 지식 원리론>>에서 버클리는 로크의 추상화 이론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퍼붓는다. 버클리는 로크가 추상 관념을 “어떤 특정한 인간이 각각 특유하게 지닌 바를 나타내는 복합 관념은 제쳐두고, 오직 모두에게 공통되는 바만을 유지하여 인간에 대한 추상 관념을 형성한 후 모든 개별적 인간들이 이에 포함된다”고 생각했다고 보았다.

2-10. 버클리는 이를 불합리한 생각으로 일축한다. ‘나 자신이 형성하는 인간의 관념에는 백색 또는 황갈색 등의 피부색 등이 똑바르거나 아니면 크거나 작거나 등이 반드시 포함된다. 나는 그 어떤 노력을 기울여 생각을 해 보아도 추상 관념을 떠올릴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명백한 오류를 저지른다. ‘관념’이라는 용어가 개념을 의미한다면, ‘인간’의 개념이 피부색이나 신장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 개념을 소유한 사람은 누구나 이 사실을 안다. 이 대목에서 버클리는 관념을 일종의 심상으로 여기는 듯한데, 설령 그렇다 해도 여전히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정신적 심상은 심상의 대상이 지닌 모든 속성을 포함할 필요는 없다.

2-11. 한 대목에서 로크는 삼각형에 대한 일반 관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순전히 허튼소리라는 버클리의 지적은 옳다. 하지만 그는 어떤 종류의 심상을 지니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개념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는 식으로 로크를 공격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로크의 언어 이론에서 잘못된 바는 바로 이 점이며, 그가 잘못된 심상을 선택했거나 심상을 자기모순적인 용어로 서술한 점이 결코 아니다.

2-12. X를 반영하는 심상이나 형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X의 개념을 미리 지녀야 한다. 심상은 자신이 반영하는 바를 규정하는 그 무엇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참나무 잎에 대한 심상은 참나무 잎을 그린 그림과 마찬가지로 잎이나 참나무, 나무 일반, 보이 스카우트 활동, 군대 계급을 비롯한 많은 것들을 반영할 수 있다. 그리고 개념은 단지 심상에서 구체적 특성들을 제거한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또한 결코 심상으로부터 명확하게 도출될 수 없는 다른 개념들도 있는데, 수학적 개념이 그런 예이다.

2-13. 로크에 반대하여 언어에 숙달하는 일과 추상적 일반 관념을 지니는 일을 분리한 버클리의 생각은 옳았다. 하지만 정신적 심상이 언어의 핵심 요소라는 생각은 유지했다. 그는 일반 명사가 하나의 추상적인 심상이 아니라 ‘수많은 특수한 심상들을 서로 구별 없이’ 지시한다고 여겼다. 심상이 사고의 핵심이 아님은 삽화가 책의 핵심이 아님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심상이 개념을 지닌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개념이 심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사회적 혼란과 통치권에 관한 홉스의 견해

1. 사회적 혼란과 통치권에 관한 홉스의 견해

1-1.수아레스와 그로티우스는 여러 나라들이 서로 합의한 도덕적 체계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하는 자연적 질서를 유지하려면 때로는 전쟁도 필요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17세기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인 홉스는 정치의 본질에 대하여 이와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견해를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자유로운 개인들이 모인 자연 상태에서는 오직 전쟁이 계속 이어질 뿐이며, 도덕철학자의 임무는 정부에 복종함으로써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려는 개인들 사이의 합의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홉스의 대표적 저술 《리바이어던》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

홉스는 인류의 자연 상태를 매우 비관적인 모습으로 묘사한다. 본성상 인간은 정신적, 육체적 능력이 대체로 평등하지만 목적을 성취하려는 희망도 대체로 평등하기 때문에 서로 적이 된다고 보았다. 각 개인은 경쟁하는 상대방을 불신하며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한다. 개인은 동료들로부터 칭찬받기를 원하면서 그들이 자신을 경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원한을 품는다. ‘인간은 본성 안에서 우리를 서로 다투게 만드는 주요 원인 세 가지가 발견되는데 첫째는 경쟁, 둘째는 불신, 셋째는 공명심이다’

사람들을 위압하는 공통 권력이 없는 한 그리고 그런 권력이 형성되기 이전까지 사람들은 재화와 권력, 명예를 둘러싼 끊임없는 다툼과 통제할 수 없는 경쟁에 휘말린다. 이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벌이는 전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구 표면에 관한 지식, 시간의 측정, 예술이나 학문이 전혀 성립될 수 없으며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이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짧다는 점이다.”

어떤 독자들은 이런 묘사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전 세계가 이런 상황은 아닐지라도 당시의 아메리카는 바로 이런 전쟁 상태에 놓여있었다. 홉스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여행할 때 무장을 하고 여러 사람이 함께 가는 편을 선호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문단속을 한다. 집에 있을 때조차도 금고문을 단단히 잠가둔다. 우리 사회에 엄연히 법률이 있으며 치안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렇게 한다.’

1-2. 홉스는 자연의 전쟁 상태를 묘사하면서 인간이 어떤 사악한 본성 때문에 이런 상태에 빠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옳고 그름 또는 정의와 불의 개념이 설 자리가 없다. ‘공통의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법이 성립할 수 없다. 법이 없는 곳에서는 불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과 기만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두 가지 기본적인 덕이다.’ 마찬가지로 자연상태에서는 재산이나 소유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누구든지 무언가를 얻고 지킬 수 있는 한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여긴다.’

철학자들은 습관적으로 자연법(lex naturalis)와 자연권(ius naturalis)을 함께 언급한다. 하지만 홉스는 권과 권리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권리란 무언가를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자유며 법이란 무언가를 반드시 하거나 하지 말라는 명령이라고 말한다. 엄밀한 자연상태에서는 법도 권리도 존재하지 않으나 ‘자연법’은 존재한다. 이는 합리적인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우너리, 즉 생존의 기회를 최대화하려는 처방이다. 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원하는 자연적 필연성이 존재하는 한 각 개인은 모든 능력을 다하여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보존할 자연권을 지닌다.

인간들이 이런 권리를 유지하는 한 어느 누구도 자연 상태에서의 삶을 안전하게 영위할 수 없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간은 자연권이 부여한 무제한의 자유 중 일부를 포기하고 결국 다른 사람들과 같은 수준의 자유를 누리는 양보를 받아들인다. 이를 통해 자연법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기방어 권리를 제외한 자신의 모든 권리를 중아 권력에게 양도하며 중앙 권력은 처벌이라는 제재를 통하여 자연법의 준수를 강제할 수 있게 된다,

1-3. 다른 여러 자연법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제 삼의 자연법이다. 홉스는 약속(convert)를 특별한 형태의 계약(contract)으로 여기는데 계약이란 상호이익을 고려하여 자신의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홉스는 제 삼의 자연법이 없다면 ‘약속은 헛되고 공허한 말에 그칠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한 모든 사람의 권리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전쟁 상태에 머물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정의와 불의의 개념이 성립하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 또한 이 자연법이다. 왜냐하면 불의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며, 불의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것은 정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처럼 약속의 당사자들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약속은 구속력을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정의의 개념에 앞서 불의의 개념이 먼저 확립되어야하며, 약속을 어김으로써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익보다 훨씬 더 큰 처벌의 공포를 강조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약속을 이행하도록 만드는 어떤 강제적 권력이 존재해야한다.’국가가 확립도기 이전에는 이런 권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권력의 칼이 없다면 약속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할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

공통의 권력을 형성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 또는 하나의 합의체에 양도하는 것인데, 이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의 의지와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의 의지로 환원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중앙의 권력은 다수의 사람들 전체를 대표해 국가라고 불리는 하나의 인격으로 통합된다. ‘이리하여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이 탄생한다. 아니 좀 더 경건하게 말하자면 영원불멸하는 신의 가호 아래 인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지상의 신이 탄생하는 것이다.’

1-4. 하지만 홉스의 이런 설명에는 일종의 악순환이 포함되는 듯하다. 그는 약속을 강제하는 통치자가 없다면 어떤 약속도 구속력을 지닐 수 없다고 말하고 구속력을 지니는 계약을 통하여 권력을 양도받지 않는 한 어떤 통치자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두 주장은 계약과 통치자가 동시에 등장하지 않으면 해결되기 어렵다.

홉스는 자신이 왕정주의자라는 점을 일부러 숨기려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정치이론에서 통치자가 한 개인인지 아니면 집합체인지는 의도적으로 분명히 밝히지 않은 채 남겨둔다. 그는 통치 체제가 군주정이든 귀족정, 민주정이든 통치권은 절대적이어야한다고 주장한다.

홉스에 따르면 통치자는 모든 법률과 재산권의 근원이다. 그는 국가를 방어하는데 어떤 수단이 필요한지를 결정하며,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지 아니면 평화를 유지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그의 고유권한이다. 공직자, 공무원 임명, 처벌뿐만 아니라 통치자는 종교 문제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데 어떤 책을 성서로 받아들일지, 해석할지 결정하는 것은 성직자나 장로가 아닌 통치자라고 주장한다.

1-5. 그렇다면 홉스가 생각한 통치자 아래에서 국민에게는 어떤 자유가 있는가? 자유란 단지 법에 저촉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국민은 통치자가 법을 통하여 규제하지 않은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하지만 국민에게 통치자에게 명령에 따르지 않을 자유가 있는가?이에 대하여 홉스는 ‘결코 없다’고 대답하리라고 예상하지만 실제로 그는 국민들이 통치자에게 불복종할 자유를 상당히 인정한다.

“만일 통치자가 어떤 사람에게 (설령 그가 정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손상하거나, 불구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또는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지 말라거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음식이나 공기, 약품 또는 그 외의 어떤 것이라도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그 사람은 이런 명령에 따르지 않을 자유를 지닌다. ‘

국민은 자신의 유죄를 자백하고 강요당할 수 없으며, 통치자의 명령을 받더라도 군인으로 전쟁에 나가 싸우지 않아도 된다. 홉스는 남성도 여성과 같이 겁이 많다는 이유로 참전을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도망치는 게 비겁할지는 몰라도 부당한 행위는 아니다. 참전이 의무로 부과되는 때는 위급한 상황뿐이다. 마지막으로 ‘통치자에 대한 국민의 의무는 통치자의 권력이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한에서만 유지되며,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어야한다.’ 따라서 만일 통치자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자신의 주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통치자에 대한 의무 또한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1-6. 《리바이어던》에 등장하는 국가에 관한 이론은 무척 독창적이며 강력한 지적 체계를 드러내며 그것이 지닌 구조는 홉스 당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여러 정치철학자의 저술에 크게 반영되었다. 그의 체계는 비록 절대적인 통치권을 강조하지만 전체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오직 국민들을 위해서 존재하며 그 반대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홉스는 통치자의 정당성을 신의 권위에 조금도 호소하지 않고, 더욱이 인간 본성의 궁극적 원인이라는 신의 역할에도 전혀 의존하지 않고 오직 국민들 사이의 계약으로부터 직접 이끌어 낸 최초의 철학자이다.

정의로운 전쟁과 정의롭지 않은 전쟁

1.정의로운 전쟁과 정의롭지 않은 전쟁

1-1. 전쟁에 대한 유토피아 사람들의 태도에 관하여 논의하면서 모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이 전쟁을 하는 유일한 목적은 오직 사전에 확보했더라면 선전포고를 막을 수 있었을 상황을 얻기 위함이다.‘ 이런 규칙에 따를 경우 무조건 항복이나 전쟁 중 임무를 변경할 가능성 등은 완전히 배제된다. 모어 자신은 헨리 8세가 일으킨 전쟁에 여러 번 참여했지만 정작 정의로운 전쟁과 그렇지 않은 전쟁을 구별할 원리를 체계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이런 원리를 제시한 인물은 16세기 말에 등장한 예수회 소속의 신학자 수아레스(Francisco Suarez)였다.

1-2. 수아레스는 아퀴나스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정의로운 전쟁에 관한 고전적 이론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원리로 요약한다. “첫째, 합법적인 권위를 지닌 당사자에 의해서 선전 포고가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정당한 원인과 명분이 있어야 한다. 셋째, 전쟁의 개시와 진행 및 승리의 과정에서 적절한 수단과 균형이 드러나야 한다”

수아레스가 말한 합법적인 권위를 지닌 당사자라는 조건은 오직 통치권을 지닌 정부만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나라의 개인이나 집단은 불화를 무력으로 해결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교황은 초국가적 권위를 지니므로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 대립을 해소하는데 개입할 권리를 지닌다.

수아레스는 전쟁의 정당한 원인으로 두 가지를 인정한다. 자신의 나라가 공격받을 경우 무력을 사용해 나라를 방어할 권리를 지닌다. 또한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전쟁이 정당한 경우도 있는데 자신의 나라 또는 동맹국이 당하리라 예상되는 중대한 부당행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공격일 때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승리하리라는 충분한 희망이 있어야하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무력에 의지한다면 부당행위를 막을 수 없다.

세 번째 조건은 다시 세 요소로 구성된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통치자는 잠재적인 적국이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악함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어야한다. 그렇게 했음에도 사악한 일이 계속된다면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다. 또 전쟁 중에는 반드시 필요한 폭력만을 이용해야하며 끝난 후에는 적절한 보상과 정당한 처벌이 이루어져야한다.

1-3. 수아레스는 이들 중 두 번째 요소가 전쟁과 무관한 사람들에 대한 의도적인 공격을 금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누가 진정 전쟁과 무관한 사람인가? 자연법은 어린이와 여성들, 무력에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이 무관하다고 말하며 실정법에 따르면 대사와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은 금지된다. 하지만 수아레스는 이들을 제외한 무기를 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전쟁과 관련된다고 보았다.

수아레스는 자신들 규칙들이 기본적으로 통치자들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투 명령을 받는 일반 병사들은 명백한 불의가 드러나지 않는 한 정의롭게 여기기 때문에 통치자만이 스스로 전쟁에 대해 숙고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해 전쟁을 정의롭게 만드는 조건을 충족시킬 의무를 가진다.

1-4. 전쟁의 도덕성에 관한 수아레스의 주장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로티우스(Hu해 Grotius)로 이어지면서 훨씬 폭넓게 전파되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법학자이며 외교관이었던 그로티우스는 1625년 위대한 저술 《전쟁과 평화의 법》을 출판했으며 종교에 기초한 법의 개념으로 벗어나기 위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도덕 이론을 제시한다. 그가 종교적 신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종교전쟁을 통해 특정 종교에 대한 신앙이 안정적인 국제 질서를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관념과 인상에 관한 흄의 견해

1. 관념과 인상에 관한 흄의 견해

1-1. 사고와 심성을 동일시하려는 경험론자의 태도는 흄의 철학에서 가장 극단적인 지점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흄은 모든 지각을 ‘관념’이라고 부르는 대신 인상과 관념이라는 두 종류로 구별함으로써 로크와 버클리의 주장을 개선하려한다. 흄은 모든 사람이 감정과 사고의 차이를 안다고 말한다. 감정은 인상, 즉 감각 및 정서와 관련된다. 반면 사고에는 관념이 포함된다.

여기서 흄이 말하는 관념이 정신적 심상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이 관념은 인상과 유사하지만 덜 강력하고 덜 생생하다. 단순 관념은 인상의 모사에 지나지 않으며 이를 옹호하기 위해 그는 사고 실험을 통한 경험에 호소한다. 예컨대, 파란색만 지각하지 못한 사람은 당연히 특정한 색조가 빠져있는 빈자리를 지각한다. 또한 그 사람은 상상력으로 빠져있는 파란색의 색조를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보충하고 이에 따른 관념을 스스로 떠올린다.

이런 사고 실험을 통하여 그는 모든 관념이 인상으로부터 도출된다는 자신의 원리에 대한 예외를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런 사례는 무척 드물기 때문에’와 같은 말로 제멋대로 반례를 무시한다. 어쨌든 그는 ‘앞선 이상이 없다면 관념 또한 없다’라는 원리를 형이상학을 공격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1-2. 생생함의 정도를 사용하여 관념과 인상을 구별하는 기준은 생생함에 근거하여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관념, 즉 기억에 관한 관념과 상상에 의한 관념을 구별한다. 그는 기억의 관념이 상상에 의한 관념보다 훨씬 생생하고 강렬하다. 또한 기억과 달리 상상에 의한 관념은 인상이 지닌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과 상상에 의한 관념 모두 자신에 선행하고 대응되는 인상을 지녀야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렇다면 기억에 관한 관념과 상상에 관한 관념을 구별하는 두 가지 기준이, 즉 생생함과 질서정연함이 마련된다. 하지만 이런 기준들을 어떻게 활용해야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들을 통해 진정한 기억과 공상적 기억을 구별할 수는 있겠지만 회의의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공상이 기억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를 압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1-3. 흄은 기억이 정신 안에 일련의 과거 사건들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억에는 수 많은 종류의 기억이 존재하며 상상도 마찬가지로 공상을 펼치는 정신의 자유로운 활동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괄한다. 상상은 착각, 가정, 창조적 독창성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는 기억과 상상 안에 다양한 정신적 사건과 능력, 활동을 모두 포함시킬하지만 이들 모두를 오직 경험론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강요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동시에 흄의 설명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듯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새소리를 듣고 그것의 선율을 정신 안에서 재현할 때 우리는 나와 새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니라 새가 내는 듯이 보이는 생생한 소리를 내가 접한 결과인 것이다. 그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지각뿐이라는 경험론의 주장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의 삶 또한 내적 감각의 연속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2-1. 그렇다면 기억과 상상 사이의 차이 또한 내적 감각을 통해 밝혀져야 한다. 누군가는 이들 사이의 차이가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 자신도 우리가 스스로 믿지 않는 것들을 상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신적인 상태를 이런 방식으로 분류한다면 그는 믿음에 적절한 지위를 부여하기 어렵게 된다.

단순히 p를 생각 하는 것과 실제로 p를 믿는 것 사이의 차이가 내용의 차이일 수는 없다. 흄이 표현하듯 믿음은 우리가 믿는 바를 구성하는 관념 또는 관념들에 어떤 특별한 관념을 더함으로써 형성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관념이라도 자유롭게 더할 수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바를 선택해서 믿을 수는 없다. 이를 지지하는 근거는 만약 특별한 관념을 더함으로써 믿음이 형성된다면 누군가는 카이사르가 침대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믿는 것과 카이사르가 침대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서로 전혀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동일한 명제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2.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에서 흄은 믿음이 ‘그저 느슨한 공상이나 몽상과는 다른, 어떤 감정이나 정서를 동반하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일종의 인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흄은 이런 생각이 경험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믿음은 오직 관념들로만 구성되지만 그는 여전히 관념은 감정에 동의한다고 고집하면서 강력함, 생생함, 견고함, 확고함, 견실함 등의 용어로 예를 든다. 결국 그는 ‘이런 감정 또는 태도의 개념을 완벽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고’ 고백하면서 논의를 마친다.

2-3. 믿음의 특징을 생생함으로 설명하려는 흄의 시도는 그의 체계 안에서 난점을 일으킨다. 이와 관련해 흄은 명백한 관념도 아니고 명백한 인상도 아닌 지각에 놀란다. 예컨대, 우리는 침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떠나지 않았다는 카이사르의 예에서 이 둘의 기억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의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두 경우 모두 생생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의 최대 난점은 믿음이 상상을 포함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믿음에 상상이 포함될 경우 강박적인 공상이 실제 믿음보다 생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4. 흄은 뉴턴이 물리학에서 행한 바를 인식론에서 행하기 위하여 관념의 연상을 도입했는데 여기저기 흩어진 매우 적은 언급만으로 이를 해결하려는 그의 착각에는 다소 안쓰러운 면이 있다. 하지만 그의 철학적 심리학이 너무나 빈약하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는 솔직하게 경험론 전통의 허점과 모순을 인정했다. 그의 통찰은 이 전 철학자들의 심리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계속해서 연구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는 인식론에서 새로운 형태의 회의주의를 제시하면서 크게 기여했다

그의 회의주의는 관념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명제와 사실을 표현하는 명제 사이의 구별로부터 출발하는데 그는 어떤 사실이라도 부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더라도 결코 모순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내일 해가 떠오를 것과 떠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명제 중 후자의 명제를 믿는가?

2-5. 흄은 사실의 문제에 관한 우리의 모든 추론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인과 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가장 단순한 자연의 규칙성도 경험 없이는 확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는 서로 전혀 다른 사건이며 전자로부터 후자를 추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자연의 규칙성을 배운다는 것이다. 하지만 흄은 이에 대한 고찰을 계속해 나간다. 그는 설령 우리가 원인과 결과의 작용을 경험한 후라 할지라도 경험으로부터 이런 결론을 이끌어낼 근거가 과연 이성 안에 존재하는지를 묻는다. 우리는 미래의 대상이 과거의 대상과 유사하리라고 단지 현상적으로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다음 번에 내가 주잔자를 다시 난로 위에 올려놓았을 때 물이 끓지 않으리라는 가정은 아무런자기모순도 포함하지 않는다. 경험에 근거한 어떤 논증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연의 전행이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허용한다면 경험을 신뢰할 만한 인도자로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가 과거와 유사할 것이라는 시도는 명백한 순환 논증에 빠진다.

2-6. 그렇다면 엄밀한 논증의 수준에서는 회의주의가 승리를 거두는 듯하다. 하지만 흄은 이런 발견 때문에 낙담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추론보다 더 강력한 원리인 습관을 통해서 자연의 규칙성을 믿게 된다. ‘두 가지 대상이 -예를 들면 뜨거움과 불꽃이, 무게와 단단함이- 서로 항상 연결되는 것을 본 후에 우리는 하나의 현상이 다른 현상으로부터 등장하리라고 오직 습관적으로 기대할 뿐이다.’ 인간의 삶은 주로 추론이 아니라 습관에 의해서 인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