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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 – 아벨라르 부터 마이모니데스 까지

  1. 아벨라르

1-1 아벨라르는 로슬랭의 가장 유명한 제자이며, 그의 편지는 로슬랭이 논리학 저술을 남겼을 것이라는 증거로 남아있다. 그는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이 각 개인 안에 존재한다는 보편 실재론보다는 스승의 유명론을 지지하였으며, 믈룅에서 그의 초기 작품들, 즉 아리스토텔레스나 포르피리오스, 보이티우스의 논리학 저술에 대한 주석을 주로 남겼다.

 

1-2 결혼한 이후 그는 생드니의 수도원에서 교육활동과 저술활동을 계속 이어 나갔는데, 《최고선의 신학》은 아벨라르가 이 시기에 남긴 작품이다. 1130년 초반에 다시 파리로 거처를 옮기면서도 《너 자신을 알라》, 《예 그리고 아니오》, 앞선 ‘최고선의 신학’을 발전시킨 《학자들의 신학》 등등을 펴냈다. 하지만 이러한 저술들 때문에 그는 교회와 많은 마찰을 빗기도 했다.

 

1-3 아벨라르가 철학사에서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논리학과 스콜라철학의 방법에 미친 영향 때문이다. 그가 저술활동을 벌이던 시기에는 라틴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술이 전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벨라르가 논리학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은 자신의 통찰과 독창성을 통하여 중세의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당시의 교수법을 이끌어 낸 사람도 아벨라르였다. 상급 학생과 하급 학생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고 교수가 판정하는 식의 교육 방법이 그것이다. 이는 아벨라르의 저술에서도 자주 등장하며, 중세의 전성기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가장 널리 쓰였다.

  1. 이븐 루슈드

2-1 콩슈의 기욤, 푸아티에의 쥘베르, 독일출신의 위그, 스코틀랜드 출신의 리샤르 등등 아벨라르와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기독교인들도 철학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정작 아벨라르와 필적할 만한 당시의 철학자들로 이슬람교도인 이븐 루슈드와 유대교도인 마이모니데스를 꼽는다.

 

2-2 이븐 루슈드는 이슬람교도이면서도 철학을 옹호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 이성이 신학적 문제를 탐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적절한 지적능력을 지닌 사람은 스스로 율법을 지킴과 동시에 철학의 탐구 또한 의무로 생각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이중진리론이 아닌 그저 진리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의 수준을 구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2-3 이븐 시나를 통렬히 비판했던 알 가잘리에 대응한 이븐 루슈드는 두 사람의 입장 사이의 어딘가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 창조에 대해서는 이븐 시나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존재와 현존사이의 이분법 및 신을 대신한 존재가 현실 세계의 본성적 형상을 만들었다는 주장은 거부하였다. 또한 그는 창조된 우주에는 진정한 인과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알 가잘리에 반대한다. 하지만 인간 지성에 대해서는 인과성의 역할을 이븐 시나보다도 축소한다. 그에게는 수동적 지성조차 단일하고, 초자연적이며, 비물질적인 실체다.

 

2-4 이븐 루슈드의 가장 큰 공헌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을 38편이나 남겼다는 것이다. 그의 주석은 분량에 따라 긴 것, 중간 것, 짧은 것으로 나뉜다. 이븐 루슈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최고의 천재로 평가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당연히 그보다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플라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2-5 그는 동료 이슬람교도들에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저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석을 중세 라틴 세계에 전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13세기 중요한 철학자들이 다룬 주제를 미시 제시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에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자들에게 이븐 루슈드는 진정한 주석가였다.

 

  1. 마이모니데스

3-1 마이모니데스의 명성은 신이 내린 명령의 목록을 정리했다던가, 토라의 요약본을 쓴 것과 같은, 유대교 율법학자라는 그의 역할에서 나온다. 무엇보다도 《혼란에 빠진 자들을 위한 길잡이》라는 그의 저서가 마이모니데스의 명성에 큰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 저서에서 그는 종교과 철학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3-2 마이모니데스는 유대교가 아닌 다른 이교도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한다. 또한 이븐 루슈드의 주석에도 영향을 받아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상 최고의 천재라고 생각했다.

 

3-3 신에 대해서, 마이모니데스는 무신론적 견해를 취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데, 우리와 신은 아무런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 신은 완전한 현실태이고 불변하며, 어떤 속성도 지니지 않는다. 우리가 신을 묘사할 방법은 그저 신은 어떻지 않다고 말하는 부정의 길 뿐이다.

3-4 마이모니데스에게서 볼 수 있는 종교와 철학의 조화는 창조와 섭리의 이론에서 드러난다.

창조의 측면에서, 그는 우주가 영원하며, 세계가 고정된 필연적인 종들로 구성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을 거부한다. 섭리의 측면에서는, 신이 모든 개별적 사건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며 인간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관여하지만,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표는 우리가 신을 인식하고 닮아가는 것에 있었다. 비록 신에 대한 지식은 적을지 몰라도, 이 지식은 신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져야하며, 이를 통해 사람들이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아카데메이아의 회의주의 ~ 유대교와 기독교

1.아카데메이아의 회의주의

1-1 아카데메이아의 노선 : 기원전 3세기 경, 아카데메이아는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아 회의주의를 채택한다. 철학에서의 회의주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피론은 아무것도 인식될 수 없다고 가르친 바 있으며, 그의 자제인 아르케실라오스는 한 때 아카데메이아의 수장이 되었다. 또한 티몬은 과학의 기초로 활용할 수 있는 자명한 원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1-2 스토아철학에 대한 비판 : 스토아철학은 아카데메이아의 주 공격대상이었다. 아르케실라오스는 그들이 존재할 수 없는 정신적 인상을 근거로 진리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판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수장이 된 카르네아데스 또한 진리가 아닌 개연성이 우리의 삶을 인도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은 키케로에게 이어져 더욱 세련된 형태로 발전한다.

2. 루크레티우스

2-1 주도권 : 기원전 1세기 이후, 철학의 주도권은 그리스에서 로마로 넘어간다. 로마의 라틴철학 역시 운문형태의 저술에서 산문형태의 것으로 변화되었으며, 당시 전체가 완벽히 라틴어로 서술된 최초의 철학적 저술은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철학시 이다.

2-2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이 시는 종교가 주는 두려움을 떨쳐낸 에피쿠로스를 칭찬하면서 시작된다. 1권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설명하고, 2권에서는 소박한 쾌락만을 추구하는 태도를 칭송한다. 3권은 영혼과 감각의 기능에 대한 에피쿠로스적 이론을 설명한다. 우리 영혼의 본성이 물질적이라는 사실을 알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 4권은 원자론에 기초한 생리학적 설명 및 성행위에 대한 묘사가 기록되어 있다.

3. 키케로

3-1 생애 : 키케로의 저술의 특징은 당시의 철학적 흐름을 잘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다. 젊었을 때의 그는 스토아철학, 아카데메이아 등등 다양한 철학학파들을 접했으며, 그 후에는 정치가로서 오랫동안 몸을 담았다. 그 영향으로 주로 정치철학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카이사르의 독재기간 및 딸이 죽었던 시기에 철학과 관련된 저술 대부분을 남겼다. 《위안에 관하여》와 《호르텐시우스》가 이 시기의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3-2 키케로의 철학 : 키케로는 로마인들이 ‘모국어’로 철학을 할 수 있도록 라틴어로 구성된 철학 용어들을 만들어 내었다. 인식론에서의 그는 아카데메이아의 수장인 필론의 영향을 받아 온건한 회의주의를 선호하였고, 윤리학에서는 에피쿠로스가 아닌 스토아학파를 따랐다. 그는 위안과 마음의 평안을 위한 도덕철학을 추구하였으며, 감정과 덕, 행복 사이의 관계 및 철학적 신론과 결정론에 관한 논의들을 다루었다.

3-3 말년 : 카이사르가 죽은 뒤, 다시 복직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죽고 만다. 그는 그리 깊이있는 철학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논증은 날카로웠고 문체 또한 우아하여 항상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4.유대교와 기독교

4-1 예수의 등장 : 나자렛 출신인 예수의 등장은 철학의 발전과정 중에서도 중요한 사건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도덕철학은 이전의 철학에서도 볼 수 있었던 만큼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도덕철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4-2 가르침 :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하여 유일신 야훼가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관점을 바탕으로 삼는다. 또한 신의 심판이 임박하여 자신이 곧 구세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4-3 필론 : 예수가 죽은 이후로도 그의 유대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필론은 기원후 1세기의 유대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대인을 박해하고 황제숭배를 강요한 일에 대해 항의하였으며, 모세의 삶에 대한 저술의 주석서를 쓰기도 하였다.

4-4 바울로 : 기독교는 주로 그리스어를 할 줄 아는 유대인 학자들을 통해 로마 제국에 전파되었다. 그 과정에서 바울로는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와 논쟁을 벌인 바 있다. 그는 기독교가 알 수 없는 신을 위한 제단을 차렸다는 비난에 대항하여 철학자들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신을 숭배한다고 되받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