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

1.흄

1-1. 버클리가 더블린에서 경험론의 형이상학을 세상에 선보인 직후에 경험론의 원칙을 형이상학에 반대하는 극단까지 밀고 나간 철학자가 에든버러(Edinburgh)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흄(David Hume)이다.  그는 1711년 스코틀랜드 작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에든버러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과 사랑에 빠진다. 뒤이어 법률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는데 포기했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철학과 폭넓은 배움을 추구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모든 일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혐오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또한 1734년부터 37년까지 양주의 라 플레슈라는 이전에 데카르트가 예수회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했던 곳에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첫 번째 저술이자 가장 중요한 저술인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썼다.  출판된 당시 책은 많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가 세상에 떠난 후 이 책은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20세기 영국 경험론자들은 이를 영어로 쓴 철학 저술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격찬했다.

2-1. «논고»는 모두 세권으로 구성되는데 ‘지성에 관하여’, ‘정념에 관하여’ 는 1739년에, ‘도덕에 관하여’는 1740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의 목표는 초판의 부제에 언급된 대로 실험적인 추론 방법을 도덕적 주제들에 도입하려는 시도이다.  그는 실험적 방법을 도덕적 주제들에 적용함으로써 뉴턴이 물리학에서 행한 바를 자신은 심리학에서 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관념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고 지금까지 형이상학자들이 잘못 해석하여 혼란스럽게 된 인과성이나 의무 등의 개념을 자신이 처음으로 확실히 해명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학문은 우리에게 이익을 준다. 이제 우리는 지식의 변방에서 작은 요새를 지키는 대신 ‘이런 학문들의 중심 또는 중앙을 향하여, 인간 본성 자체를 향하여 직접 행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2.  «논고»의 1권은 정신의 내용물을 경험론적으로 분류하는 작업과 더불어 시작된다. 여기서 로크 및 버클리 인식론의 근거가 많이 등장하지만 흄은 지각을 오직 인상과 관념으로 나눈다. 인상은 관념보다 강렬하며 생생하고 감각과 감정을 포함한다. 반면 관념은 사고와 추런을 포함한다. 그는 기억과 상상력의 관념 및 관념들 사이의 연상을 상세히 다루면서 로크의 추상관념에 대한 버클리의 비판을 더욱 강화한다.

«논고»의 1권 2부에서 그는 공간과 시간의 관념을 다룬 후 ‘지식과 개연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절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한다. 그는 감각이 직접 전하는 바를 넘어서서 확장된 모든 지식은 원인과 결과의 관념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과거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또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 추측하는 일은 모두 이 두 관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두 관념의 근원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관성의 관념이 본래 대상에 속하는 그 어떤 성질로 부터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서로 전혀 다른 종류의 대상들이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신 이 대상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아야한다. 그러면 우리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근접해서 발생하고 원인이 시간상 결과에 앞선다는 점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원인과 결과를 선언하기에 충분치않다.

그는 몇 페이지에 걸쳐 뛰어난 논증을 펼친 후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의 추론이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연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연결이 우리가 원인으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추론에 의존한다. 즉 원인과 결과 사이에 필연적 연결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믿음은 추론이 아니라 습관의 산물이다.

2-3.  «논고» 2권에서 정념 또는 감정에 관하여 탐구함으로써 흄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행보를 따른다. 하지만 이 주제는 합리론 철학자들보다 흄에게 더 큰 중요성을 지니는데 왜냐하면 흄은 합리론자들이 이성의 활동으로 여겼던 수많은 작용을 정념의 역할로 돌리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정념은 특별한 종류의 인상이다. 지각을 인상과 관념으로 나눈 후에 흄은 다시 인상을 원초적 인상과 이차적 인상으로 분류한다. 감각적 인상과 육체적 쾌락과 고통은 원초적 인상인 반면 정념은 이차적 인상에 해달되는데 이것이 바로 2권의 주제를 형성한다.  그에 따르면 이성 자체는 어떤 행위도 산출할 수 없다. 모든 자발적인 행위는 정념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된다. 이성은 결코 정념을 이길 수 없으며 오직 상반되는 정념만이 정념을 이긴다.  ‘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또한 노예여만 한다. 그리고 이성은 정념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임무도 탐내서는 안된다’

2권 끝부분에서 우리는 흄의 윤리 체계가 다른 전통적인 도덕철학과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예상한다. 이성은 우리를 행위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도덕 판단을 이성의 산물일 수 없다.  도덕판단의 목표는 오직 우리의 행위를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오직 정념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우리의 정념에 원인을 제공하지도 평가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해야만 한다’는 ‘이다’로부터 도출될 수 없으며 우리가 이끌어 내야 하는 결론, 즉 선과 악, 옮고 그름 사이의 구별은 이성이 아니라 도덕감의 산물이다.

2-4. 이를 기초로 삼아  흄은 «논고» 3권 2부에서 정의와 불의에 관해 논의하며, 자비심이나 정신의 위대함 같은 인간 본성의 덕을 다룬다. 그는 도덕적 구별의 주요 원천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sympathy)의 감정이라고 결론 짓는다. 예컨대 정의가 칭찬받는 까닭은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기 때문이지만 만약 공감의 감정을 통해 공공의 이익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  ‘덕은 오직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오직 그 목적이 가치있을 경우에만 수단 또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행복은 오직 공감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계몽주의

1. 시대적 배경

아담 스미스와 리드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로 알려진 사상적 흐름을 대표하는 두 인물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진정한 원류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프랑스라 여기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18세기에 일어났으며 이 시기의 유럽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무지와 미신으로 어두워진 세계에 대하여 이성의 빛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 했다. 프랑스 계몽주의는 1750년~1760년대에 정점을 이루었으며 <<백과전서, 또는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사건>>이 출판되어 계몽주의의 활성화를 도왔다.

2. 계몽주의 사상가들

<<백과전서, 또는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사건>>은 디드로와 달랑베르에 의해 편집되었지만 이 책의 출판에는 많은 수의 프랑스 사상가들의 토대를 쌓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러한 프랑스 사상가들에는 벨과 몽테스키외, 볼테르, <<인간기계론>>의 라메트리, 무신론자 바크, 결정론을 지지한 엘베시우스 등이 있다. 물론 이중 1706년에 죽은 벨은 <<백과전서>>에 직접적인 집필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벨은 <<역사와 비판 사전>>이라는 저술을 출판하였으며 이 저술에서 그는 성서와 역사의 탐구로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에 모순점과 부조화에 대하여 밝혔다. 그의 도덕 사상에 대한 견해도한 드러나는데 오직 관용을 통해서만 종교적 신앙이 드러나며 윤리적 가르침과 종교적 교훈이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벨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반박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라이프니츠가 있다. 그럼에도 그(벨)의 종교적 권위에 대한 부정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계몽주의 사상가 중 몽테스키외는 계몽주의의 긍정적인 요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법의 정신>>이란 저술을 출판했으며 이 저술에서 역사적 사회학적 지식에 기초하여 국가의 본질에 관한 이론을 구성했다. 그는 영국에 정치 체제에 대하여 칭찬했으며 이러한 영국에 대한 열정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도 이어졌다.

볼테르는 몽테스키외의 영국에 대한 열정이 이어진 계몽주의 철학자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최초 철학 저술인 <<철학 서간>>에서 영국의 정치 제도와 교회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칭찬하였고 나아가 영국의 관용적 태도를 진심으로 칭찬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영국의 철학자인 로크에 대해서도 근대 초기의 낭만주의적 공상에서 벗어나 영혼을 설명한 최초의 철학자라 평했다. 게다가 <<백과전서>>를 만들려는 생각은 영국의 체임버스라는 인물이 출판한 <<백과사전 또는 예술과 과학에 대한 보편적인 사전>>에 영향을 받았다.

<<백과전서>>의 두 편집자 중 하나인 달랑베르는 수학자로서 유체 역학을 다룬 독창적 저술을 남겼으며 산술학과 기하학의 확실성과 정확성을 모든 학문에 확산하려 노력하였다. 그는 하나의 통일 과학이라는 이상을 제시한 초기 인물로 <<백과전서>> 서문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디드로는 세계 안에 신의 설계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드러낸 <<맹인에 관한 편지>>라는 저술 때문에 상당 기간 동안 감옥에서 지내었다.

이 두 사람은 과학적 진보를 피할 수 없다는 믿음, 기독교가 인간의 삶 향상에 큰 방해물이 된다는 생각, 인간 본성에 대한 유물론적 입장을 지지 하였다.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는 <<백과전서>>의 다른 집필진들도 동의하였다.

3.계몽주의 철학자들에 대한 평가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모두 반성직주의자였지만 모두 무신론자는 아니었는데 대표적으로 볼테르가 있다. 볼테르는 자신의 저술인 <<철학 사전>>에서 무신론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는데 대표적인 대목으로는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발명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덕 법칙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가 있다. 그러나 그는 세계를 자유롭게 창조한 신의 존재는 믿지 않으며 세계는 신의 현존이 낳은 필연적이고 영원한 결과라 설명한다. 볼테르와 같이 이러한 유형의 신을 믿는 이들을 ‘이신론자’라 하였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반드시 급진적이거나 민주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생각하는 자유의 개념은 영국의 명예혁명(1688)에 등장한 개념과 유사하며 이들이 가장 중요시한 자유는 표현의 자유였다. 그리고 이들은 모국에서 정부의 권력남용에 대하여 저항하였지만 원리상의 귀족정치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았으며 어떤 근본적인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지 않았고 일반인의 권리 획득에 대하여 달갑지 않게 생각하였다.

스미스와 리드

스미스

아담 스미스는 철학사보다 경제학사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는 논리학과 도덕철학의 교수였다. 그는 <<도덕감정론>>이란 책을 출판 했고 이 책에서 흄의 공감에 관한 견해를 발전시켜 공감과 도덕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제시하였다.

스미스는 공감의 영역을 확장하여 감정을 공유하는 경우에도 공감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는 공감은 도덕 판단을 산출하는 역할을 하기에 동기가 중요하며 효용은 도덕의 궁극적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도덕 판단이 본질상 사회적 구성물로 여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거리가 있지 않으면 자신의 동기와 정서에 대하여 어떤 판단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나아가 그는 관망자로서의 자신과 행위자로서의 자신으로 구분해야함을 주장한다. 관망자로서의 자신은 나 자신을 그의 상황에 놓고 그의 특수한 관점에서 내 행위가 어떻게 보일지 고려하여 나의 행위를 낳은 정서를 밝히려 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자로서의 자신은 진정으로 자신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그의 행위에 대하여 나는 관망자의 관점 아래서 어떤 의견을 형성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 두 가지 개념을 통하여 스미스는 공평한 관망자라는 관점을 윤리학에 도입하였고 이후 많은 도덕철학자들의 저술에서 등장하였다.

리드

리드는 스미스에 뒤를 이어 도덕철학의 교수를 맡은 사람으로 흄을 비롯한 경험론적 전통 주의 전체에 대한 최초의 비판자이다. 리드는 흄의 논고들에 대항한 <<상식의 원리에 기초한 인간 정신 탐구>>란 저술을 출판한 뒤 인간의 지적 능력과 행위 능력을 다룬 두 편의 논문도 출판하였다.

그는 영국의 경험론자들과 대륙의 데카르트주의자들이 받아들인 관념의 체계에 대한 의심에서부터 비판을 시작하였다. 그는 데카르트와 로크가 범한 기본적 오류의 원인이 관념이란 단어의 애매함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는 일상어로서 관념은 정신의 작용을 의미 하지만 철학자들은 이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사용한 점을 지적하였다. 그 다른 의미의 관념은 사고나 개념이라는 정신의 작용이 아니라 어떤 사고 대상을 지시한다는 일종의 상으로 생각된다. 그는 이러한 철학적 의미의 관념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며 우리의 지식을 구성하는 역할은 개념이 아니라 명제라 하였다.

그는 단순한 파악을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판단을 분해하고 분석함으로서 얻어진다고 보았다. 여기서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판단은 정신이 지니는 최초의 내용으로 리드가 부르는 ‘인류의 상식’에 해당하는 것을 구성한다. 리드 이전의 철학자들과 달리 상식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추론에 의해서 얻어지지 않는 원리들의 집합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리드는 이성이라는 높은 수준의 능력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상식은 신이 부여한 보편적 산물이라 하였다.

리드는 우리가 의식적 사고를 하려면 정신이란 주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존하는 무엇이든지 그것의 원인이 있어야한다는 원리를 재확인한다. 이와 동시에 철학자들이 일반인의 대상의 현존에 대한 믿음을 경멸하는 이유가 철학자들이 믿음의 의미를 바꾸었기 때문이라 지적하며 상식적 단어의 의미를 바꾸려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한다.

리드는 ‘상식과 철학 사이의 불공평한 경쟁에서 철학은 항상 불명예와 손실을 뒤집어 쓴 채 떨어져 나가고 말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과학기술에 무지한 일반인의 언급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리드에게서 일반인의 결정 영역은 단어의 의미부분이며 상식은 다른 철학자들이 이성이나 직관으로 여긴 자명한 원리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리드는 과학에 독창적 기여를 하였는데 그 중 일부가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전을 예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실재론이 경험론자나 합리론자들의 철학과 같은 정도로 과학의 추구와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이려 했다.

스피노자

  1. 생애와 사상적 배경

1-1 다른 한편으로 데카르트의 사상을 대담한 방식으로 발전시킨 유대인 철학자가 네덜란드에 있었다. 1632년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스피노자는 어린 시절부터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알았다. 반 덴 엔덴은 기독교도 의사였는데 스피노자에게 라틴어를 가르쳤고 데카르트의 저술을 소개함으로써 스피노자의 사상 발전에 큰 영항을 미쳤다.

1-2 스피노자는 유대교 신학에 대하여 10대 후반부터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성년이 되면서 유대교의 관습을 대부분 거부했다. 1656년 그는 유대교 공동체에서 파문당했고 렌즈를 깎는 기술을 배워 여러 광학 기구들을 제작했다. 이를 직업으로 삼음으로써 그는 사색과 연구를 할 시간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1-3 이 당시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을 쓰기 시작 했다. 이 책은 지성의 개선을 주제로 지적인 전환을 상세히 설명하고 탐구의 과정을 밝히는 것이 《방법서설》과 유사하다. 그러나 완성되지 못한 채 그가 죽은 후에야 출판되었다.

1-4 1663년 한 학생에게 데카르트의 철학을 가르치고 친구였던 레이덴 대학 메이어 박사의 요청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를 ‘기하학적 형식’으로 진지하게 해설한 저술을 출판했다. 《철학의 원리》 중 처음 두 권을 완벽하게 정리한 후 여기에 자신의 주석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이 저술을 구성했다.

1-5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제시한 일련의 정의와 공리들을 이어받은 후 이를 확장하여 모두 58개의 정리를 증명했다. 데카르트의 정의와 공리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은 대체로 《철학의 원리》에 등장하는 내용을 따른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저술에 대한 서문을 쓴 메이어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견해와 데카르트의 견해가 모든면에서 일치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1-6 1670년 익명으로 《신학정치론》이라는 저술이 출판되었다. 이 저술은 사실 스피노자가 1665년 자신이 유대교를 떠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해명을 쓰기로 결정한 것이, 점점 확대되어 성서 비평과 정치 이론을 포함한 저술이 된 것이다. 스피노자는 성서 원전을 상세히 검토한 후 히브리어 성서는 그 보다 더 오래된 자료를 편집한 것이며, 아무리 올라가도 기원전 5세기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1-7 《신학정치론》은 세심한 논증과 고상한 표현을 통하여 문학의 한 유형으로서의 성서 비평을 주목하게 만든 훌륭한 저술이다. 하지만 이 저술은 구약성서에 대한 개방적인 해석으로 인해 유대교도는 물론 네덜란드의 칼뱅주의자들까지 이에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몇몇 교회 회의에서는 금서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다른 동시대인들은 이 책을 크게 칭찬했으며 스피노자가 이 책의 저자인 것이 알려지면서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67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 교수직을 제안 받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1. 사상

2-1 스피노자는 어떤 학문적인 지위도 맡지 않았고, 결혼하지도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평온한 삶을 살면서 묵묵히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논증된 에티카》를 쓰는 일을 계속했다. 1675년 이를 완성했지만 이 책을 출판하게 되면 무신론자로 몰려 처형당할지도 모른다는 친구들의 경고로 인해 출판하지 않고 다른 책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1677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티카》, 《정치론》등을 비롯한 그의 유작들은 한데 묶여 출판되었지만 채 일 년도 못되어 네덜란드에서 금서가 되었다,

2-2 《에티카》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체계를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바탕으로 설명한 저술이다.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제목은 ‘신에 관하여’, ‘정신의 기원 및 본성에 관하여’, ‘정서의 본성 및 기원에 관하여’, ‘인간의 굴레에 관하여’, ‘인간의 자유에 관하여’ 이다. 각 부는 일련의 정의와 공리로부터 출발해 다양한 정리들에 대한 형식적 증명으로 이어지고, 각각의 정리에는 정의와 공리로부터 도출되지 않은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기하학적인 방법이 스피노자의 체계를 제시하는데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증명들이 자주 결론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2-3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자신의 철학을 투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가정도 숨기지 않으며 오로지 한 정리에서 다음 정리로 나아가는 논리적 연결점만을 보이려 한다. 또한 기초적인 기하학의 개념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세계 전체를 설명하려 한다. 이 설명이 실패하더라도 이는 철학자의 잘못이기 보다는 철학 본질 자체의 잘못 때문이다.

2-4 《에티카》는 윤리학 외에도 많은 주제들을 다룬다. 1부에는 형이상학 뿐 아니라 자연신학도 등장한다. 실체의 본성을 설명하면서 신의 현존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도 제시한다. 데카르트는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 즉 두 종류의 기본적인 실체를 인정했지만 스피노자는 오직 한 종류의 실체만을 인정한다. 이는 사고라는 속성과 연장성이라는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결국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에티카》의 2부에서 설명하듯 정신은 사고라는 속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이며, 육체는 연장성이라는 속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이다. 결국 정신과 육체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를 기초로 스피노자는 세 단계의 지식, 즉 표상지, 이성지, 직관지가 존재한다는 인식론을 형성한다.

2-5 《에티카》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윤리적 논의는 3부에서부터 등장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현존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자신을 파괴하려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저항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런 충동에 대한 의식이 인간에게 욕구로 드러나는데 이 충동이 자유로울 때 쾌락을 느끼고 방해받을 때 고통을 느낀다고 보았다. 인간의 복합적인 정서들은 쾌락과 고통으로부터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도 욕구와 혐오에 의해 규정된다.

2-6 하지만 《에티카》의 마지막 두 부에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극단적인 정념에 의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정념을 지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능동적 정서와 수동적 정서 사이의 구별이다. 두려움, 분노와 같은 수동적 정서는 외부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 반면에 능동적 정서는 정신이 처한 상황을 스스로 파악함으로써 등장한다. 우리가 수동적 정서에 대한 명석, 판명함 관념을 지니면 정서는 능동적으로 바뀌는데, 수동적 정서를 능동적 정서로 대체하는 것이 바로 정서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한다.

2-7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의 필연성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도덕적 해방에 이른다. 다른 사람의 행위가 그의 본성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그들에 대한 증오를 멈추게 된다. 우리는 신과 같은 관점을 택해 모든 것들이 이루는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체계를 ‘영원한 모습에 비추어’ 바라보아야 한다.

2-8 스피노자의 독특한 체계는 철학사의 흐름에 따라 몇몇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로크의 이론과 관련되는 것으로 스피노자의 실체이론을 이해할 수 있다. 로크와 스피노자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실체 개념을 제거하려 했다. 반면에 그를 데카르트와 비교하는 관점을 택하면 데카르트의 가정이 암시하는 바를 명확하게 이끌어 냄으로써 스피노자는 신이 이 세계 안에서 유일한 행위자라는 결론에 이른 말브랑슈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이보다 더 나아가 신이 유일한 실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2-9 철학에서 17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란이 일어난 시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스콜라철학의 특징은 일종의 구별을 도입하고 인간과 물질세계를 설명할 때 이 구별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보이는 개념 쌍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는 이런 모든 규별을 무너뜨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란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 스피노자의 체계는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스피노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점에서 만나기도 한다.

2-10 스피노자의 철학은 자주 합리론을 지나치게 확장한 형태의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가 자신의 체계를 유클리드의 용어를 사용하여 기하학적으로 제시한 까닭은 다양한 주제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서 일뿐 아니라 논리적 연속성이 세계 전체에 작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극단적인 합리론의 체계는 이후 낭만주의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라이프니츠

 

  1. 시대적 배경과 생애

1-1 라이프니츠는 17세기와 18세기의 경계선에 걸쳐 앉은 철학자이다. 그는 체계적인 저술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철학사가들은 단편적인 조각글로부터 일관되고 종합적인 체계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해 왔다. 또한 이후 등장한 수많은 철학자들은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1-2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에서 철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유년기 시절부터 서재의 책들을 읽으며 보냈던 그는 문학, 역사, 법률, 수학, 자연학, 화학, 신학 등의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보였다. 1661년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여 3년 만에 학사학위를, 그리고 1667년 21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교수직 제의를 거부하고 마인츠 대주교 아래로 들어가 외교관으로 일하며 몇몇 학문적 저술들을 대주교에게 헌정했다. 한편 그는 가톨릭이 지배하는 궁정에서 개신교도로 살면서 모든 기독교 교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교리들을 기반으로 기독교의 통합을 주장하는 여러 저술을 쓰기도 했다. 1672년 라이프니츠는 십자군 원정에 나서도록 루이 14세를 설득하는 비밀 임무를 띠고 파리로 갔으나 아무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르노와 말브랑슈를 만났으며, 다음 해에는 런던을 방문하여 보일과 올덴버그 등 왕립학회 회원들에게 학회의 회원으로 초대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1676년 미분법을 발견했는데, 사실 뉴턴이 이보다 먼저 미분법을 발견하였으나 출판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독일로 돌아오며 스피노자를 방문하여 <<에티카>>의 초고를 읽고 논평을 쓰기도 하였다.

1-3 이후 라이프니츠는 그가 이전부터 해왔던 기독교 호교론 전파에 관하여 가명으로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전 유럽의 기독교 국가를 연방으로 통합하여 황제는 세속적인 통치를, 교황은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분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 통합 계획을 후원했던 공작이 사망하자 계획은 무너졌다.

2.사상

2-1 1685년 겨울 라이프니츠는 그의 저술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형이상학 논고>>를 집필했다. 그는 이를 자신의 성숙한 철학 체계를 언급한 최초의 저술로 여겼다. 짧지만 명료한 이 저술은 오늘날에도 라이프니츠 철학체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입문서로 평가되며, 그의 철학이 지닌 많은 특징을 잘 보여준다.

2-2. 이 저술에 맨 처음 등장하는 주장은 우리가 항상 이성에 따라 질서 잡힌 방식으로 작용하는 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세계에 산다는 것이다. 각각의 개체는 자신의 내력을 통해 자신에 대해 참인 많은 술어들을 얻고, 이런 술어들 전체가 그 실체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의한다. 이런 실체들은 자신의 방식에 따라 세계를 표현하며, 특정한 관점에서 세계를 요약하는데, 이 실체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인간의 행위는 우연적이며 자유 의지에 의존한다. 선택 또한 근거는 있지만 그 근거가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실체들은 서로 직접 작용할 수 없되, 한 실체에 일어나는 일이 다른 모든 실체에게 대응되도록 신이 배열해 놓았다. 결국 각각의 실체는 분리된 하나의 세계와 같으며, 신 이외의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2-3 인간의 정신은 모든 것들의 관념을 포함하며, 신을 제외한 어떤 외부적 대상도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관념과 의지 작용은 우리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신은 우리를 강제하지 않으면서 이끈다. 정신과 육체는 서로 상호작용을 주고받지는 않지만 사고와 육체적 사건은 서로 대응해서 일어나기 마련인데 그 까닭은 이들이 우리를 사랑하는 신의 섭리에 의해서 연결되기 때문이다(라고 적혀있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형이상학 논고>>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전통적인 기독교가 배경에 깔려 있으며, 이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주의 깊게 변형하려는 당시 대륙 철학자들의 시도가 드러남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체계가 지닌 특징을 데카르트, 말브랑슈, 스피노자의 체계와 대비하여 명확히 제시하면서 자신이 이들을 종합했다고 주장했다.

2-4.기독교 호교론 전파에 실패한 라이프니츠는 다른 방향으로 칼뱅주의 개신교도와 루터주의 개신교도 사이의 화해를 모색했다. 또한 그는 유럽 기독교 국가들을 하나의 연방으로 통합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두 가지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기독교 통합을 포기하지 않고 이후에도 가톨릭과 중국 유교의 신앙과 제사 사이에 조화를 모색하려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격려했다.

2-5. 한편, 로크의 본유관념 부정에 크게 자극받은 라이프니츠는 경험론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를 위하여 쓴 저술은 로크의 사망소식을 알고 출판하기를 단념하였고, 결국 라이프니츠의 사망 후 50년이 지난 뒤에서야 출판되었다. (<<신인간지성론>>)

2-6. 라이프니츠가 프로이센의 샤를로트 왕비에게 헌정한 <<변신론>>은 세계의 현실적인 악에 직면해서도 신은 여전히 정의롭다는 주장을 정당화한다. 이 책에서 그는 악으로 보이는 여러 현상에도 우리가 실제로 여러 가능 세계 중 최선의 세계에 산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낙관주의는 이후 볼테르의 강력한 비판을 받는다. ‘이것이 최선의 세계라면 다른 세계는 도대체 어떻다는 말인가?’

2-7. 1713년 출간된 <<모나드론>>에서 그는 <<형이상학 논고>>에서 암시했던 체계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모든 복합적인 것은 단순한 것들로 구성되며, 모든 단순한 것은 연장성을 지니지 않는다. 단순한 것이 연장성을 지닌다면 또 다시 분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순하고 비물질적인 어떤 요소를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라고 부르는데, 영혼과 유사한 정신적인 속성만을 지니는 무한히 많은 실체라고 생각했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드에게는 창문이 없으므로 그 무엇도 드나들 수 없다’고 말하며 다른 피조물로부터 인과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한다. 또한 신이 미리 모나드가 세계의 변화와 동시에 변화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2-8. 라이프니츠는 1716년 세상을 떠났는데 엄청난 분량의 미출판 원고와 수많은 미완의 계획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계획들은 남겨진 모든 저술을 포함한 전집을 출판하려는 사업과 함께 300여년이 지나도록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

 

홉스

1. 홉스

1-1. 1641년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고 평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인물 중에는 당대 최고의 영국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도 포함되었다. 홉스는 영국 함대가 스페인의 무적함대(Spanish Armada)를 격파한 1588년에 태어났기에 이런 요청을 받을 때는 53세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후 캐번디시 가문의 가정교사와 베이컨의 서기로 일했다. 1629년 투키디데스(Thucydides)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데카르트 친구인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메르센 신부는 그를 ‘철학의 모든 분야에 능통한 탁월한 학자’라고 기록했다. 1640년 홉스는 《자연법과 정치적인 법의 기초》를 영어로 출판하면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이 구성한 사회에 대한 그의 핵심적인 철학 원리들을 잘 드러냈다. 그 해 그는 장기 의회(Long Parliament)의 활동으로 내전을 예상하고 파리로 도피해 10년 이상 그곳에서 후에 왕위에 오르는 찰스 2세의 개인 교사로 지냈다. 그 동안 그는 《시민론》를 출판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상당한 명성을 그에게 안겨다주었다.

1-2.데카르트에 대한 홉스의 평가를 보면 홉스가 《성찰》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음이 드러난다. 이 두 철학자는 전통적으로 서로 정반대되는 철학의 양극단에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사실상 이 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예를 들어, 이 둘은 모두 수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홉스는 데카르트의 해석 기하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에 대해 ‘정합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묘하게도 말년에 홉스는 기하학 연구에 진지하게 몰두하며 옥스퍼드 수학 교수들과 몇 년 동안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외에도 데카르트와 홉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를 경멸했고 당시의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판을 치는 현실을 비난했다. 또한 둘은 한창 때를 망명 생활로 보냈으며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둘 다 스튜어트 왕가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이들은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을 경멸하며 모국어로 글쓰는 능력이 탁월해 전문 학술서뿐만 아니라 대중을 위한 책도 썼다.

이 두 철학자가 서로 일치된 의견을 보인,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논점은 이들이 각각 물질세계는 오직 운동의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확신한 점이다. 홉스는 ‘일반적인 사물의 원인은 저절로 드러나거나 아니면 사물의 본성을 통해 알려진다. 따라서 어떤 방법도 전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물은 모두 오직 하나의 보편적인 원인, 바로 운동이라는 원인을 갖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홉스는 데카르트와 같이 색과 소리 같은 제이성질과 같은 모든 우연적 속성들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점을 부정하며 광학이 감각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데 같은 의견을 보인다.

1-3.홉스는 데카르트의 철학의 절반, 즉 물체에 관한 철학과는 상당히 유사한 견해를 보이지만 나머지 절반, 즉 정신에 관한 철학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사실 홉스는 데카르트가 생각한 의미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홉스는 연장성을 지니지 않고 운동하지 않는 비물질적인 실체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천사든 신이든 비물질적인 정신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홉스의 유물론에 대해 신의 존재를 그가 어떻게 여겼는지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인간이 정신과 물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된다는 이원론을 확실하게 거부했다는 점이다.

데카르와 홉스는 수많은 철학적 태도와 선입견들을 서로 공유했지만 홉스는 유물론을 선택함으로써 데카르트에 반대하는 대표적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유물론과 이원론이라는 형이상학적 차이에 더하여 철학사가들은 이 둘을 인식론에서 반대되는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의 창시자로 여긴다. 사실 이 두 학파의 차이는 표면상 드러나는 것만큼 크지 않다.

1-4. 홉스는 데카르트보다 거의 30년을 더 살았지만 1650년 데카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프랑스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파리에서 신교도로 사는 것과 그를 구교도로 개종시키려는 메르센의 시도에 큰 불편함을 느꼈다. 또한 큰 병을 앓으면서 영국 성공회이ㅡ 의식에 따르겠다고 고집하기도 하면서 파리 마지막 해에 철학사에 영원히 남게 될 《리바이어던 또는 교회 국가 및 시민 국가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권력》을 썼다.

어떤 국가 조직도 없는 자연 상태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이런 자연 상태는 오직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에 지나지 않음을 보임으로써 홉스는 사람들이 합리적인 자기이익의 원리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무제한의 자유를 포기하고 결국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부과되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제한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자기 이익의 원리에 따라 사람들은 자기방어의 권리를 제외한 다른 권리들을 중앙의 권력에게 양도함으로써 이 권력이 처벌을 통하여 법률을 강요할 수 있도록 만든다. 여기서 맺은 사람들이 맺은 계약을 통해 최고 통치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계약에 참가하지 않으므로 위반할 계약 자체가 없다. 이런 통치자는 법률과 재산권의 근원이 되며, 국가를 구성하기 위한 최초의 계약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서로 맺은 개별적인 계약을 지키도록 강제한다.

1-5.《리바이어던》은 1651년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이 저술에는 절대 왕정을 세련되게 지지하고 있지만 당시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찰스 2세는 이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당시 찰스 2세가 궁정에서 추방당하고 홉스의 구교도 친구들도 세상을 떠나자 그는 영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영국은 찰스 1세의 처형 이후 호국경(Protector) 크롬웰(Oliver Cromwell)의 통치 아래 있었다.

크롬웰의 통치 기간 동안 홉스는 조용히 런던에 머물면서 정치철학에 관한 어떠한 저술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홉스는 자연철학에 관한《물체론》을 1655년 라틴어, 1656년 영어로 출판하고 밀턴의 《실낙원》에 등장하는 구절에 대해 브램홀 주교(Bishop Bramhall of Derry)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658년 홉스는 《인간론》을 라틴어로 출판했는데 이 또한 《시민론》과 마찬가지로 《법의 기초》에 등장했던 몇몇 사상들을 영어권 외부의 독자를 위해 다시 쓴 것이었다.

홉스는 1660년 찰스 2세가 영국으로 돌아와 왕위에 복귀하면서 궁정의 환영과 연금을 받게되었지만 다른 신하들로부터는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리바이어던》은 심각한 의혹의 대상이 되어 몇몇 주교들이 그를 이교도의 죄를 물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다.

1660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홉스는 런던과 체츠워스(Chatsworth), 하드윅(Hardwick) 등지의 데번셔(Devonshire) 백작 가문의 저택에 주로 머물렀다. 그는 더 이상 철학에 관한 저술을 쓰지 않고 《일리아스》《오디세이》번역에 몰두하면서 《베헤못》이라는 영국 내전의 역사에 관한 저술을 출판하려했지만 왕의 만류로 포기했다. 그는 1679년 91세의 나이로 하드윅 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말년에 파킨슨병에 걸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기찬 삶을 유지했다고 한다.

1-6. 홉스가 철학사에서 명성이 높은 까닭은 주로 그가 정치철학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언어철학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언어는 우리를 야수와 구별해주며, 학문을 추구할 수 있게 한다고 역설한다. 언어의 목적은 우리의 사고 과정을 연속된 단어로 바꾸는 것인데, 언어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첫째, 과거와 현재 모든 것들의 원인, 결과를 기록하는데 사용한다. 둘째, 얻은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상의하며 가르치는데 사용된다. 셋째, 우리의 의도와 목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 서로 도울 수 있게 사용되며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데 사용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언어의 네 가지 효용과 대비되는 네 가지 악용의 사례도 있는데 이런 악용을 피하려면 대단한 수고가 필요하다. ‘언어는 마치 돈과 같다. 현명한 사람들은 오직 계산을 할 때만 이를 적절히 사용하지만 바보들은 이를 무턱대고 써버린다’

홉스는 철저한 보편명목론자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단어들은 이름뿐인데 이름은 오직 개체들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름이 어떤 형태를 취하던 간에 그것은 하나 또는 다수의 개체 이외의 어떤 것도 결코 지시할 수 없다. ‘인간’과 같은 보편적인 이름은 세계 안의 어떤 보편적인 사물이나 우리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체들을 지시할 뿐이다. ‘이 세계에서 이름을 제외하면 보편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이름은 그것에 속하는 모든 개별적인 개체들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홉스는 이름들이 한데 모여 문장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만일 ‘소크라테스는 정의롭다’라고 말하면 여기서 ‘정의롭다’와 ‘소크라테스’와의 관계는 이 단어의 관계와 동일하다. 또한 문장 안에서 두 이름이 모두 동일한 것을 지시할 경우 그 문장은 참이 되는 반면 두 이름이 동일한 것을 지시하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

홉스의 두 이름 이론은 소박한 형태의 의미론에 해당하지만 이에 대하여 이미 중세부터 등장했고 특히 19세기 프레게(Gottlob Frege)의 저술을 통해서 제기된 심각한 논리적 비판을 견디지 못했다. 홉스식의 이론은 중세의 오컴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미숙했지만 그의 이론은 영국 경험론자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그들 자신이 오컴과 홉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2.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

2-1.  17세기 중반 홉스 및 데카르트와 다른 견해를 보이는 여섯 명의 영국철학자들이 등장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커드워스(Ralph Cudworth, 1617~88)를 비롯한 다섯 명은 케임브리지의 엠마누엘 칼리지를 졸업했으며, 다른 한명인 모어(Henry More, 1614~87)는 크라이스트 칼리지를 졸업했는데 커드워스는 이 칼리지에서 30년 동안 교수생활을 하기도 했다. 추종자들은 이 들을 존경, 찬양하며 이 그룹을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케임브리지 출신이었지만 당시 영국 내전 동안 케임브리지 지역과 대학을 지배했던 청교도주의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이들은 칼뱅의 예정은총설을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이 지닌 장점을 주장했다. 하지만 무신론자에게까지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는데 특히 이들은 홉스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홉스의 유물론이 결국 무신론에 이르리라고 본 것이다. 또한 이들은 찰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 성공회를 중심으로한 계층 질서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했으며 결국 찰스 1세의 퇴위와 처형으로 이어지게 했다. 그들은 ‘주교 없이는 왕도 없다’는 정치 구호를 ‘정신 없이는 신도 없다’고 외치면서 유물론자인 동시에 유신론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데카르트 편에 서서 홉스에 반대하는 특히 정신과 물체의 구별을 강조했다. 모어의《무신론에 대한 해독제》《영혼의 불멸성》, 커드워스의《우주의 진정하한 지적 체계》 등의 저술을 통해 이들이 인간 영혼의 불멸성과 정신적인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데 얼마나 몰두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모어는 인간이 ‘감각과 이성 그리고 지상의 여러 가지를 인간에게 적합하게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정신적인 피조물’이라고 보았고 커드워스는  우리 안에 신의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현존이 증명된다고 주장한다. 신의 관념은 일관성을 지니고 실제적이거나 실재를 필요로하기 때문에 신은 반드시 현존한다는 것이다.

2-2.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본유 관념의 존재를 믿었다. 이들에 따르면 정신은 텅 빈 백지가 아니라 닫혀있는 책과 같다. 감각은 단지 이 책을 여는 역할을 할 뿐이다. 모어는 정신 안에 다양한 본유관념이 들어있다고 보았는데 이 중에는 근본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도덕원리들도 포함되어있다. 커드워스는 정의와 불의가 단지 인간이 맺은 계약의 결과로 등장한다는 홉스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의 삶과 죽음의 권한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를 통치자에게 양도할 법 따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근본적인 도덕 원리들의 근거를 설명하면서 데카르트와 의견을 달리한다. 커드워스는 도덕을 비롯한 다른 영원한 진리들이 신의 전능한 의지에 의존하기에 원리상 변화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덕과 신성함은 신이 이들을 사랑하여 선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선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오직 그 자체로 선하기 때문에 신은 이들을 사랑할 뿐이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물체의 세계에 대한 데카르트의 설명을 접한 후 그와 더욱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과학의 새로운 발전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현상을 기계론적인 운동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부했다. 이들은 데카르트와 달리 동물도 의식과 감각적 영혼을 지닌다고 믿었으며 심지어 낙하 운동을 설명할 때에도 비물질적인 원리의 작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신이 모든 것을 직접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신이 물리적 세계에 일종의 매개체로서 규칙적이고 목적론적으로 작용하는, 세계 영혼과 유사한 ‘균형 잡힌 세계를 형성하는’ 임무를 맡겼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데카르트와 같이 목적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기계론적인 유신론자’에 지나지 않고 홉스같은 유물론자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보았다.

로크

  1. 시대적 배경 및 생애

1-1. 홉스는 근대 경험론의 선구자였지만 그의 명성은 그보다 훨씬 탁월한 의사 출신의 철학자 로크(John Locke)의 등장과 더불어 쇠퇴했다. 로크는 기독교도들은 다양한 형태의 신앙적 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내용의 짧은 저술 ≪관용론≫(Essay on Toleration)을 썼다. 로마 가톨릭을 제외한 모든 교파에 대하여 교리상의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톨릭 음모 사건과 배제 법안으로 인한 위기 무렵에 로크는 ≪정부에 관한 두 논고≫(Two Treatises on Government)를 썼다. 첫 번째 논고에서 그는 왕권신수설을 옹호한 필머(Sir Rovert Filmer)의 저술을 통렬하게 공격했으며, 두 번째 논고에서는 홉스가 제시한 것보다는 훨씬 낙관적인 상태로 자연 상태를 설명하고 정부와 국가는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 계약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일 어떤 정부가 전횡을 일삼고 정부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의 역할을 침해한다면 그런 정부는 해체되어야하고 혁명은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1. 사상

2-1. 로크는 네덜란드에 머무르는 동안 자신의 가장 위대한 철학적 저술 ≪인간지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이하 ≪지성론≫으로 약칭)을 쓰는데 몰두했고 1690년에 이르러서 출판되었다. 로크의 생전에 4판까지 출간되었다. ≪지성론≫은 4권으로 구성된다. 분량이 가장 적은 1권의 제목은 ‘본유 관념에 관하여’이다. 여기서 로크는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간에 어떤 본유적 원리도 우리의 정신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모든 관념은 오직 경험으로부터 얻어진다. 기하학과 같은 무관한 학문의 경우조차 우리가 수용하는 관념은 본유적이지 않다. ≪지성론≫의 2권은 모두 33장으로 여기서는 관념이 철저히 탐구된다. 로크는 ‘관념’이라는 용어를 우리의 정신적 능력과 정신이 형성하는 개념을 모두 특징짓는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2-2. 로크는 관념들을 단순 관념과 복합 관념, 명석 판명한 관념과 모호하고 혼동된 관념, 감각적 관념과 반성적 관념등과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한다. 그는 단순 관념을 다루면서 물체에서 드러나는 성질들을 두 범주로 나누는데 제일성질에는 단단함, 운동, 모양 등이 있다. 이들은 ‘우리가 지각하든 지각하지 않든 간에’ 물체에 속하는 성질이다. 제이성질로는 색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대상 자체에는 전혀 없는 것으로서 단지 대상의 제일성질을 통하여 우리 안의 다양한 감각을 생성하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반성적 관념들 중 지각적 관념은 우리의 정신에 관념을 형성하는 최초의 과정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지각은 순전히 수동적인 경험이며, 지각이 무엇인지는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봄으로써 누구나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각이라는 수동적 경험은 로크 철학 전체를 떠받치는 기초의 역할을 한다.

 

2-3. ≪지성론≫의 2권에는 정신과 의지에 대한 경험주의 철학이 제시되지만 이 외에도 시간과 공간, 수에 관한 고찰, 인간의 정념의 목록 등 많은 내용이 등장한다. 또한 인과 관계를 비롯한 다른 관계들도 다루어지며 이후에 큰 영향을 미친 개인의 동일성이 무엇인지에 관한 정교한 논의도 전개된다. 로크는 우리가 단순 관념들을 다른 도움 없이 스스로 충분히 인식할 수 있고,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어떤 단어도 그렇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믿으면서도 관념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통해서 자신들이 말하는 관념을 실제로 확인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는 ‘우리가 지닌 추상적 관념들과 보편적인 단어들 사이에는 서로 확고한 관련이 있으므로 우선 언어의 본성과 용법 그리고 의미를 검토하지 않고서는 모두 명제로 구성되는 우리의 지식을 명석, 판명하게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2-4. 뒤이어 그는 이 주제를 3권에서 다루는데 가장 유명한 부분은 추상 관념과 실체 이론을 논의하는 절들이다. 로크는 우리의 정신이 자연적 대상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관찰한 후 이것을 추상적인 보편 관념으로 분류하고 여기에 보편적인 이름을 붙인다고 말한다. 이런 보편 관념들은 주목할 만한 성질을 지닌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보편 관념은 ‘기울지도 않았고 직각도 아니며 또한 등변, 등각, 부등변도 아니어야 한다. 그것은 이런 성질들을 모두 지녀야 하며 동시에 이들 중 어떤 것도 지녀서는 안 된다.’ 이 세계의 실체들은 다양한 성질과 능력을 지니며 우리는 이를 활용하여 서로 다른 종류의 사물들을 정의한다. 하지만 우리가 내리는 정의는 사물들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며 단지 ‘명목상의 본질을’ 언급할 뿐이다. 실체 일반에 대하여 우리가 지닐 수 있는 유일한 관념은 ‘그것이 어떤 고유한 속성들을 지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라는 관념뿐이다.

 

2-5. ≪지성론≫ 전반에 걸쳐 인식론적인 고찰이 이루어지는데 특히 4권에서 지식이라는 주제가 전면에 부각된다. 우리는 사물들의 진정한 본질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연 세계의 존재들에 관한 진정한 학문을 구성할 수 없다. 단지 그럴 듯한 믿음만을 지니는데 우리 자신의 현존과 신의 현존에 관해서는 진정한 지식에 이를 수 있다. 현실적인 감각의 한계 안에만 머무른다면 다른 사물들의 현존에 관한 지식 역시 얻을 수 있다. 진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증거보다 더 큰 확실성을 주장하는 어떤 명제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영국에서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n)이 일어나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기초로 한 새로운 법체계가 마련되었고 로크는 영국으로 돌아와 이전에 위험한 내용 때문에 출판하지 못한 저술 ≪정부에 관한 두 논고≫, ≪지성론≫의 초판, ≪관용에 관한 편지≫의 영어 번역 출판했고 이후에도 저술을 계속하였다. 시빗거리가 될 만한 저술들은 대부분 익명으로 출판했는데 유일하게 이름을 밝혀 출판한 것이 ≪지성론≫이다.

말브랑슈

말브랑슈

1. 시대적 배경 및 생애

1-1. 말브랑슈는 17세기 초의 인물로 루이 14세의 통치 시기 하에 태어나고 활동하였다.  그는 20대에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에 데카르트의 저술 <<인간론>>을 접하였는데 이후 그는 가장 열정적인 데카르트 추종자가 되어 명석 판명한 관념 추구에 평생을 힘썼다.  그가 데카르트를 열성적으로 추종했다는 것은 그의 전기 작가의 글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너무나 강력한 심장의 고동을 멈추기 위하여 책을 계속 읽지 못하고 자주 쉴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17세기 중반쯤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술로 평가되는 <<진리의 탐구>>를 저술하였고 이어 자신의 사상적 체계를 요약한 <<형이상학에 관한 대화>>를 출판했다. 이외의 저술들은 대부분의 내용이 신학적 논쟁에 관한 것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연 및 은총론>>이 있다. 이 책은 1690년 금서 목록에도 올랐다. 그는 말년에 로크 사후에 출판된 대화체의 저술에서 자신이 공격대상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2. 사상

2-1. 그는 자신의 사상적 내용과 저술에 사용한 단어들의 정의는 데카르트와 동일했는데 예를 들면 상상력, 지성, 의지 등이 있다. 하지만 새로이 추가한 내용은 관념들의 연합을 두뇌 안 섬유 조직의 연결망으로 설명한 것이다.  즉 높은 곳이라는 관념과 죽음에 대한 관념은 서로의 두뇌 섬유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연결망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거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2-2. 말브랑슈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받아들이는데 데카르트의 사상 중 취약한 부분인 정신과 육체사이의 연관성과 관계에 대한 부분(송과선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한 부분)에 대하여 개선을 하려 했다. 그는 정신이 순수한 사고이고 육체가 순수한 연장성이면 상호 간 작용이 불가능 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에 대하여 의지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육체에 작용한다고 가정했을 때 육체의 작동 원리를 인간이 알지 못하기에 의지의 육체에 대한 작용이 허구라 설명한다. 그는 이어서 육체의 작용을 하는 것은 신에 의한 것이라 설명한다. 즉 신이 인간의 모든 행동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육체의 작용은 나의 의지의 작용과 함께 육체가 움직이기를 신이 원한 것이라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이론은 의지의 작용과 육체의 작용이 동시에 일어날 기회를 신이 제공하는 것이라 하여 기회원인론이라 명명할 수 있다. 이러한 신이 원인이 되는 것은 정신과 물체의 작용뿐만 아니라 물체와 물체 사이의 관계에서도 성립한다.

2-3. 정신이 물체에 작용하지 못하면 그 역은 성립하는가? 의 문제에서 말브랑슈는 관념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들을 거부하면서 새로이 답을 한다. 그에 답은 관념이 신들에 의하여 생겨나며 오직 신만이 우리의 지성에 인과적 작용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모든 것을 신안에서 파악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그는 신을 정신이 살아가는 환경과 같은 배경으로 보았다. 이러한 주장들은 로크의 반발을 샀다. 또한 그는 신의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의 관조로 지식을 얻는다는 주장과는 달리 우리의 지식이 신의 직접적 조명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새로이 주장한다. 즉 신 안의 연장성의 순수한 관념은 지성을 통해서만 파악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연장성의 관조가 물체에 대한 우리의 파악을 어떻게 이루는가에 대해서 그는 연장성의 원형을 파악함과 동시에 데카르트의 자연학의 모든 법칙을 함께 인식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인식 가능한 법칙이 그 역할을 하려면 두 조건을 전제하는데 단순한 법칙과 일반적인 법칙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단순한 운동 법칙 두 가지로 모든 현상을 설명 가능하며 그 운동 법칙 두 가지는 운동 중인 물체는 직선 방향으로 계속 운동한다는 것과 물체 간의 충돌 시에 크기에 비례하여 각각의 물체에 분배된다는 것이다.

2-4. 단순한 법칙과 일반적 법칙의 존재함에 대한 말브랑슈의 믿음은 나 이외의 세계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와 신의 창조물중 악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문제도 해결한다. 불완전한 세계와 악이나 외부 사물에 대한 것에 대한 해답으로는 신이 단순함의 법칙과 일반 법칙을 통하여 현재의 세계를 만들었고 이러한 법칙들을 가지고 더욱 완전한 세계를 창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신은 더 완전한 세계를 만들 능력을 가지지만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시공간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으로 단순한 법칙과 일반적 법칙을 수정해야 하는데 이는 신의 권위가 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더 완전한 세계에 대한 생성이 불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신학자들의 분노를 불렀으며 기적의 발생에 대한 성서의 설명과 양립 불가능한 주장이라 반박 당하였다.

파스칼

1. 시대적 배경과 생애

1-1. 홉스와 로크는 자신들을 데카르트의 반대하는 사람으로 여겼으나 실패한 인물들이었다. 그 후 데카르트의 비판자로 자처한 인물 중 가장 뛰어난 철학자가 있는데 바로 파스칼(Blaise Pascal)이다. 파스칼은 1632년에 오베르뉴(Auvergne)의 왕실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기 때부터 수학과 자연학에 뛰어난 재능을 드러낸다.

2.사상

2-1. 그러나 그는 1654년부터 수학과 자연학이 아닌, 신학을 주된 관심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포르루아얄 수녀원에서 활동한 금욕주의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 금욕주의자들은 당시 ‘얀센주의자들(Jansenists)’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들은 네덜란드 출신의 주교 얀센(Jansen)을 추종했는데, 얀센은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유명한 저술을 발표하며 비관주의적‧엄숙주의적인 형태의 가톨릭을 옹호했다. 얀센주의는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다는 것을 강조하며 오직 소수만이 구원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주장했다. 그는 인간은 죄를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은총을 저항할 수 없기에 인간의 자유 의지는 설자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2-2. 1653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Innocent X)는 얀센주의자의 가르침을 정죄했지만 그들은 이에 저항했는데, 이는 파스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지닌 능력을 낮게 평가한 이들의 주장에 따라 파스칼은 인간의 철학적 능력, 특히 신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회의했다. 그는 ‘철학의 진정한 길은 철학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라 하고, 데카르트를 ‘쓸모없고 불확실한 인물’이라고 평했다(P, 445, 671).

2-3. 파스칼은 죽으면서 일련의 단상들을 모은 원고를 남겼는데, 이는 『팡세(Pensees)』라는 제목으로 1670년 출간된다. 그는 경구의 대가이고 그의 많은 문구는 자주 인용된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이러하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나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 하지만 설령 우주가 그를 파괴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그 존재보다 고귀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신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많은 언급들은 기독교에 대한 호교론의 일부를 형성하고 신앙이 없고 세속에 물든 신자들을 개혁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는데, 그가 어떤 형태의 개혁을 원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다. 파스칼의 단편들에는 두 가지 주제가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그것은 신이 없는 인간의 비참함과 종교적 삶이 보장하는 행복이다.

2-4. 인간의 본성은 모순 덩어리로, 진리라는 이상을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오직 거짓에만 머문다. 진리의 보고인 동시에 오류의 소굴인 인간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파스칼은 인간을 “절반은 상승하고 절반은 추락하도록 창조된 존재, 진리의 유일한 판단자이지만 끝없는 오류에 내던져진 존재. 세계의 영광, 웃음거리, 수수께끼인 인간이여!”라고도 말한다(PⅡ,13). 이 수수께끼를 풀 열쇠는 인간의 타락에 관한 기독교 교리에서 발견된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죄가 없는 상태로 진리와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인간이 오직 타락하기만 했더라면 인간은 진리와 행복이라는 개념 자체를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2-5. 이성이 타락의 관념에 대항하려 해도 이성 또한 이 관념이 진리라는 점을 확립할 뿐인데, 그 출발점은 인간의 비참함이다. 철학적 저술에서 파스칼은 오직 신앙과 은총만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줄 것이라 주장하지만 이성에 적대적이지는 않다. 그는 마음에는 이성이 전혀 알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가 사용하는 단어인 ‘마음(heart)’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는 감정을 이성 위에 놓으려 한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추론과 연역적인 추론을 대비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 즉, 어떤 수식을 ‘암기해서(by heart)’ 익히라고 말할 때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기하학의 기초를 가르쳐 주는 것이 ‘마음’임이 명백히 드러난다. 즉, 파스칼은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와 전혀 대립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반종교 개혁의 철학

1-1. 이성을 배제하고 계시를 높이 평가한 몽테뉴의 태도가 반종교 개혁주의자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아담이 지은 죄에 의해서 완전히 타락했다는 루터의 주장에 반대하여 가톨릭 진영의 논쟁가들은 기본적인 종교적 진리가 다른 도움을 받지 않은 인간 지성의 영역 안에 속하며, 신앙 자체도 이성의 지지와 옹호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1-2. 반종교 개혁적인 공격의 선봉에 선 것은 새로 형성된 예수회(Society of Jesus)에 속한 수사들이었다. 모든 교단의 구성원들이 서약한 청빈과 정결, 순종에 더하여 예수회 사사들은 교황에 대한 절대 충성을 맹세했고 곧 세계 각지에서 교육과 선교 사업에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예수회는 새롭고, 스스로 더욱 발전된 형태로 여긴 스콜라 철학을 전개했다.

 

1-3.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이나 롬바르드(Peter Lombard)의 ≪신학명제집≫과 같은 표준적인 원전에 기초한 강의를 진행한 반면 예수회 학자들은 대학에서 독자적인 철학과 신학 강의를 시작했다. 17세기 초에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도미니크 수도회 학자들도 이런 강의 방식을 채택했고 이는 철학과 신학이 이전보다 더욱 뚜렷하게 구별되는 결과를 낳았다.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소속 학자 수아레스(Francisco Suarez)는 대학 강의에서 독자적인 교과서를 사용함으로써 철학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의 선구자로 그가 쓴 ≪형이상학 논쟁≫(Disputationes Metaphysicae, 1597)은 스콜라 철학의 형이상학을 체계적으로 다룬 최초의 저술이었다.

 

1-4. 수아레스는 1564년 예수회에 가입했으며, 평생 대학교수로 지냈다. 그는 신앙심 깊은 박학한 인물로서 순전히 지적인 능력으로만 본다면 충분히 16세기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그는 철학사에서 자신의 재능에 걸맞은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그의 저술은 대부분 중세의 주제들을 다시 언급하면서 세련되게 재구성한 수준에 그치며 어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지는 못했다. 둘째, 저술가로서 그는 무려 28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지만 그의 저술은 상당히 지루하고 장황하다.

 

1-5. 하지만 사실상 그는 형이상학과 정치철학의 두 영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아퀴나스를 진심으로 존경했지만 형이상학적 측면에서는 아퀴나스보다 이븐 시나(Avicenna)와 스코투스(Duns Scotus)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17, 18, 19세기에 걸쳐 토마스주의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퀴나스의 저술 ≪반이교도대전≫에 등장하는 내용보다는 수아레스의 형이상학에 더욱 가까웠다. 1621년에 출판된 ≪법에 관하여≫(De Legibus)는 정치철학에 크게 기여한 책이다. 여기에는 그보다 훨씬 널리 알려진 철학자들의 사상으로 전해지는 많은 사상의 원천이 등장하지만 이런 사실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았다.

 

1-6. 16세기에 구교와 신교 진영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철학적 주제는 인간의 자유 의지 문제였다. 이 문제는 트렌토 공의회에서 루터의 결정론과 칼뱅의 예정은총설에 반대한다는 선언이 이루어지면서 심화되었다. 예수회 학자들은 자신들이 인간의 자유를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선봉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수아레스와 그의 예수회 동료인 몰리나(Luis de Molina)는 자유로운 행위를 행위 과정에서 여러 대안들을 활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정의했고 이런 정의는 인간 자신의 선택과 이것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져야 하는 책임을 제대로 인정한다. 하지만 자유를 더욱 제한적인 것으로 보는 다른 설명과 비교해 보면 이런 정의는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미리 아는 신의 예지를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신의 예지는 구교와 신교가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몰리나는 널리 알려진 저술 ≪조화≫(Concordia)에서 이 문제에 대한 독창적이고 정교한 해법을 제시하지만 신교도뿐만 아니라 동료 구교도 사이에서도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학자이자 토마스주의자였던 바네스(Domingo Banez, 1528~1604)는 예수회 신학자들이 인간의 자유를 과대평가함으로써 신의 권능을 훼손한다고 생각했다. 두 교단 사이의 논쟁이 격화되자 1605년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양측 모두 침묵할 것을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