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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실존주의

 1.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1-1.후설이 퇴직하기 2년 전 제자 중 한 사람이 특히 철학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한 권을 냈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은 현상학이 현 상태로는 주도면밀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현상학은 의식의 자료들을 음미하려 했으나 이전의 철학에서 물려받은 항목들은 ‘주관’ ‘대상’, ‘행위’, ‘내용’과 같은 개념들을 사용했다. 후설이 상관 관계가 있는 의식과 실재의 두 영역이 있다는 데카르트의 기본 틀을 받아들인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후설이 현상학에서 채택한 소재는 의식과 실재 중 의식이었으나 하이데거는 현상학의 첫 번째 과제가 의식과 실제의 구분에 선행하는 존재(Sein)개념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식과 실재를 정반대로 대비하게끔 하는 그 경험이 곧 우리가 음미해야할 원초적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철학의 본성을 분명히 하고 의식이 아니라 존재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하기 위해 데카르트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위적 범주로 돌아가는 것은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전의 철학이야말로 철두철미한 현상학자가 본받아야 할 최상의 실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온갖 전제 가정들이 달라붙은 전문적인 철학적 어휘가 형성되기 이전에 생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이데거는 우리가 순수한 자연 상태에서 철학을 할 수 있도록 청결한 어휘를 고안하는 과업을 수행하고자 했다.

1-2. 하이데거의 가장 중요한 신조어는 현존재(Dasein)이다. 현존재는 철학적인 물음을 물을 수 있는 존재 유형인데, 하이데거의 현존재에 대한 설명을 보면 처음에는 데카르트의 자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지만 데카르트의 자아는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인 반면 하이데거에서 생각은 본질적이 아니다. 그에게 생각은 현존재가 존재하게 되는 여러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다. 현존재의 원초적 요소는 ‘세계-내-존재’이며, 현존재는 생각과 의지의 구별이나 이론과 실천의 구별에 선행한다. 현존재는 관심을 갖는 존재로서 걱정하는 존재다. 내가 세계에 관해 무언가 걱정하거나 관심을 보이는 경우에 한해서, 나는 세계에 관해 물음을 던지게 되고 그와 같은 물음에 대해 지식 주장의 형태로 답을 하게 된다,

개념과 판단은 세계에 대처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한층 더 원초적인 그와 같은 도구들, 즉 문자 그대로 도구인 것들이 있다. 목수는 망치를 사용함으로써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능숙하게 그것을 잘 다룰 경우에는 망치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망치에 대한 의식은 목수가 실재와 충실하게 마주치려는 자신의 계획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이렇게 뻔 한 방식으로 대처하는 실재들을 ‘손 안에 있음’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손안에 있는 것과 손안에 있지 않은 것의 구별은 우리가 세계의 공간성을 구성하는 기본 바탕이 된다.

1-3.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기본적 본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현존재를 하나의 실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인생을 펼쳐가는 존재라고 생각해야한다. 우리의 인생은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개발하는 것이다. 애당초 우리는 물리적이고 문화적인 역사적 상황에 내던져져있다. 하이데거는 이 ‘던져져있음’이 현존재의 ‘사실성’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직 겪어본 적 없는 그 사람일 수 있고 나의 잠재력은 나의 성취와 마찬가지로 나의 존재에 본질적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실제로 내가 누구인지 규정지을 때 미래는 과거와 현재에 우선한다. 현존재는 ‘될 능력’이며, 내 인생에서 내가 무엇을 목표로 삼고 있는가에 따라 나의 현재 상황과 능력의 중요성이 결정된다. 하지만 그 성취와 잠재력이 무엇이든 간에 모두 끝은 죽음이다. 내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내가 무엇이 될 것인지와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의 차이를 고려해야하는데 여기서 죄의식과 분노가 나온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활동은 세 가지 근본적인 양상을 갖는다. 첫째, 그가 ‘조율’이라고 일컫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내던져진 상황 자체를 매력적이라거나 불안하다거나 따분하다는 식으로 나타내고, 그 상황에 다양한 종류의 기분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둘째, 현존재는 담론 적이다. 현존재는 담화의 세계 안에서 즉 우리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언어와 문화에 의해 명확히 표현되고 해석된 것들 사이에서 작용한다. 셋째. 현존재는 특별한 의미의 ‘이해’다. 현존재의 활동은 어떤 목표, 현존재의 문화적 맥락 안에서 인생 전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어떤 ‘위하여’를 지향한다. 현존재의 이 세 가지 양상은 각각 시간 과거, 현재, 미래에 해당한다.

비록 현존재가 생물학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작용한다고 할지라도 개인의 활동을 일으키는 인간의 본성과 같은 그런 것은 없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본질은 그것의 실존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실존주의’, 즉 개인의 종의 구성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면 보편 법칙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철학 학파의 아버지가 되었다. 내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하여 나 자신을 무엇이 되게 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냥 순응ㅇ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것은 현존재의 진정한 결정이 아니며 나의 현존재에 대한 배신이다. 진정한 결정을 위해서는 나는 선택의 이유가 인간의 본성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신의 명령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과 어떤 선택도 나의 삶에 선험적 의미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자각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야한다.

1-4. 《존재와 시간》은 읽기 어려운 책이라서 하이데거 특유의 어휘와 난해한 구문이 그의 프로젝트에 필수적이었는지 자의적이었는지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신랄한 반대자인 길버트 라일도 그의 책 논평에서 ‘인간 영혼의 근원적인 작용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에 감탄할 따름이라고 인정했다.

현상학의 저작으로서 《존재와 시간》은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의 어느 저작들보다 더 큰 갈채를 받았으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불행했다, 하이데거는 1929년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의 철학 교수직을 이어받았다. 1933년 그 대학의 총장이 되어 5월 취임연설에서 나치주의야말로 독일 국민이 마침내 역사사의 정신적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매개체라고 환영했다. 그는 총장으로서 명예 교수인 후설을 비롯하여 정년이 아직 5년이나 남은 다섯 명의 유대인 교수들을 모두 대학 도서관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전쟁이 끝난 뒤 하이데거는 히틀러에 대한 지지를 속죄해야 했고, 1945년에서 1950년까지 스스로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중단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1976년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은 뒤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후설의 현상학

1.후설의 현상학

1.1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인생은 결정적인 대목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닮았다. 후설은 프로이트보다 세 살 아래였는데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모라비아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비엔나 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두 사람은 최초로 인간의 정신에 관한 진정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려는 개인적인 프로젝트에 대부분의 인생을 바쳤다. 그들은 인생 말년에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걸려들었고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에서 쫓겨나 망명 생활을 하다 죽고 후설의 책들은 1939년 프라하에 진군한 독일 군대에 의해 불탔다,

그러나 전문가로서의 후설의 인생은 프로이트와 매우 달랐다. 그는 철학으로 정통 학문 경력을 쌓아 대학에서 연달아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는 비엔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는 했지만 교수 자격 청구 논문을 위해 할레 대학으로가 오스트리아가 아닌 독일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후설은 1884년에서 1886년 사이 비엔나 대학에서 브렌타노(Franz Brentano,1838-1917)의 강의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브렌타노는 전직사제로서 영향력이 널리 입증된 《경험적 관점의 심리학》이라는 저작의 현대적인 실험적 탐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철학을 연결하려고 했던 박식한 학자였다. 그 책은 의식의 자료가 두 종류, 즉 물리 현상과 정신 현상으로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물리 현상은 색깔이나 냄새와 같은 것이고 생각과 같은 정신 현상은 어떤 내용을 가짐으로써 혹은 내재적 대상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 특징은 정신적인 행위와 정신적인 삶을 이해하는 실마리인데 브렌타노는 이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는 스콜라 철학의 용어를 재도입했다.

후설은 심리학에 대한 브렌타노의 연구 방법에 영향을 받으면서 초기에는 줄곧 수학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할레 대학에 제출한 교수 자격 청구 논문 주제는 수 개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수 개념의 심리적 기원인 활동을 확인함으로써 수 개념을 설명하려고 했다. 수학의 기초를 경험적 심리학에서 찾으려는 욕구 때문에 후설은 다소 따분한 결론을 낳기도 했다. 예컨대 영과 하나가 수라는 것을 부정했고, 소수의 산술학과 다수의 산술학을 명확하게 구분해야한다. 우리 마음의 눈으로는 오직 작은 집단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산술학의 소수 부분만 직관적 기초에 의존할 수 있다. 일단 다수를 다루게 되면 우리는 직관을 벗어나 순전히 기호들만 있는 영역으로 들어간다.

1-2.후설의 저서에 대한 논평자들, 특히 프레게는 그것이 상상과 사고를 혼동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심라학의 소재인 정신적 사건은 개인에게 사적이기 때문에 산술학과 같은 공적 학문의 기초가 될 수 없다. 후설은 그 논평을 받아들여 자신의 초기 심리주의를 단념했다. 그 후 후설은 프레게처럼 논리학과 심리학 사이의 명확한 구별을 유지했다. 그러나 분석적 전통을 이은 프레게는 논리학에 더 초점을 맞춘 반면 대륙적 전통을 이은 후설은 심리학적 측면에 더 초점을 맞추어 철학의 정통 본거지로 보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프레게와 후설은 플라톤의 소박한 실재론을 철학의 토대로 인정하는 점에서 하나가 되었다.

후설이 브렌타노한테서 넘겨받은 것은 지향성 개념, 즉 물리 현상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정신 현상의 특징은 그것이 대상을 향해 주의를 돌린다는 관념이었다. “나는 경우에 따라 트로이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고 나의 투자에 관해 걱정하기도 한다.”라는 문장에서 ‘대해(of)’와 ‘관해(about)’가 지향성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가리킨다.

생각의 본질은 두 가지이다. 생각의 ‘내용(content)’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생각의 ‘소유자(possessor)’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용을 생각한다고 해볼 때 이것을 생각이게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내가 독수리나 말에 대한 생각이 아닌 용에 대한 생각을 한다는 것고 다른 하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후설은 생각이란 특정한 물질(생각이 지향하는 대상)에 대한 나의 행위(act)라고 말함으로써 생각의 특징들을 명시하고자 했다. 다른 사람들도 용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후설에 의하면 바로 그때 우리는 동일한 종(species)에 속하는 여러 가지 개인적인 행위를 한다. 용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그와 같은 모든 행위가 속하는 종에 지나지 않는다.

개념(concept)은 《논리 연구》에서 이와 같이 심리학적 요소를 기반으로 정의되었다. 그렇다면 논리학과 개념의 관계는 어떤가? 후설은 이제 기하학의 정리들이 경험적인 삼차원의 물체와 관계를 맺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논리학이 개념과 관계를 맺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초기 심리주의를 단념할 수 있었고 심리학과 논리학을 선명하게 구분했다. 더 나아가 그는 심리학을 ‘현상학(phenomen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다시 고안해냄으로써 심리학과 인식론을 구별하였다.

1-3.현상학은 20세기 초 10년 사이에 개발되었다. 뮌헨의 철학자 집단에서 열성적인 ‘현상학’ 운동이 일어났는데 1913년 현상학적 연구 연보를 출간하고 이 연보의 창간호에는 단행본 분량의 후설의 글이 실렸다.

현상학의 목적은 의식이 우리에게 말하거나 말하려고 하는 어느 것도 언급함이 없이, 심리=외적(extra-mental) 세계에 관한 의식의 직접적 자료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내가 불사조를 생각할 때 내 생각의 지향성은 불사조가 실제로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정확히 동일하다. 후설은 이미 1901년 이렇게 썼다. “어떤 대상이 실존하는가. 허구하는가, 아니면 완전히 부조리한가의 문제는 대상이 의식에 나타나고 주어지는 일에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를 가져오지 못한다. 나는 쾰른 대성당을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벨탑을 생각한다. 나는 정천면체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천각형을 생각한다. 즉 내 경험의 지향성은 진짜 탁자가 그것에 있건 내가 환각 상태에 있건 정확히 동일하다. 현상학자는 심리 현상을 면밀히 연구해야 하며, 심리-외적 대상들의 세계를 괄호 안에 넣어야한다.; 현상학자는 심리- 외적 세계의 실존에 대하여 후설이 그리스 어로 에포케(epoche)라고 했던 판단 중지의 태도를 가져야한다. 이것을 일컫어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매우 신중한 소극적인 철학(philosophy drawing in its horns)이었다.

현상학은 현상주의(phenomenalism)와 같지 않다. 현상주의자는 현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으며, 물질적 대상과 같은 것들에 관한 진술은 현상에 관한 진술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버클리와 밀은 현상주의 견해를 유지했다. 반면에, 후설은 《이념들》에서 현상들 이외에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비현상적 대상들의 세계가 존재할 가능성을 신중하게 열어두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대상들은 후설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거나 적어도 본래의 관심사가 아니다.

후설에 따르면, 우리는 외부 세계에 관해서는 오로지 추리나 추정에 의한 정보만을 갖는 반면, 우리 자신의 의식 대상에 대해서는 오류 불가능한 직접지를 갖기 때문이다. 후설은 자명한 내재적(immanent)지각과 오류 가능한 초월적(transcendent)지각을 구별했다. 내재적 지각은 나 자신의 현재의 정신 활동이나 상태에 대한 나의 직접적인 익숙지이다. 초월적 지각은 물리적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나 자신의 과거활동이나 상태에 대한 나의 지각이며, 다른 사람들의 정신 내용에 대한 나의 지각이다.

내재적 지각은 현상학의 소재를 제공한다. 내재적 지각은 초월적 지각보다 더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초월적 지각이 오류 가능한 반면 내재적 지각은 자명하기 때문뿐만 아니라 초월적 지각을 성립시키는 추리와 추정이 내재적 지각의 평결에 근거하고, 또한 근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의식만이 ‘절대적 존재’다. 이를테면 다른 모든 형태의 존재는 그 실존 여부가 의식에 달려있다. 따라서 현상학은 모든 학문들 가운데 가장 기초적이다. 현상학의 소재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다른 모든 분야의 철학과 과학에 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1-4.후설은 《이념들》을 세 권의 책으로 계획했으나 마지막 두 권은 사후에야 출판되었다. 그는 1916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고 1923년 베를린 대학의 초빙을 거절하고 1928년에 퇴직할 때까지 그 대학의 정교수로 남았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는 하이데거나 스타인처럼 대단히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된 사람들도 있다. 몇 년 동안 후설은 책에 제시된 체계를 여러 방면으로 발전시켰다. 한 편으로는 데카르트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남겨 놓은 몇몇 가정들을 약화시킴으로써 자신의 판단 중지가 데카르트의 의심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되도록 현상학적 방법을 확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의 정신의 실존을 입증할 수 있는 상호 주관성(intersubjective) 문제의 해결책과 자신의 방법론적 유아주의를 결합하려고 애썼다. 그의 최종적인 입장은 그가 현상학의 불가피한 결론이라고 주장했던 선험적 관념주의(transcendental idealism)였다. 그의 후기 사상의 일부 결과물들은 퇴직한 그 다음 해에 발표되었으며 《데카르트의 성찰》과 《형식 논리와 선험논리》로 출판되었다,

퍼스와 실용주의부터 프레게의 논리주의까지

1. 퍼스와 실용주의

1-1.

오늘날에는 아메리카 대륙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다수 철학자들의 본고장이 되었지만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철학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불모지에서 찰스 샌더스 퍼스의 저작은 진정한 미국철학의 시대를 열었다.

1-2.

퍼스는 하버드의 뛰어난 수학교수의 아들로 1863면 하버드에서 최우등으로 화학학위를 받았다. 그 후 30년간 미국해안측량작업, 하버드 천문대에서의 연구를 진행하며 천문학책을 저술하고 <형이상학클럽> 이라는 토론모임에 참여했다. 그는 하버드에서 역사와 과학의 논리를,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논리학강의를 열었고 까다로운 동료로 대학의 관습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종신교수직에 임명되지 못했고 다시는 정규직업을 갖지 못했다. 퍼스의 첫 번 째 아내는 남녀평등주의자인 페이였고 1883년에 헤어졌고 생에 후반부를 헌신적인 두 번 째 아내 줄리엣과 가난하게 보냈다.

1-3.

퍼스는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19세기의 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또한 칸트철학을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형식논리학에 대한 칸트의 이해가 아마추어같다고 여겨 그의 부족한부분을 보충하기위해 범주이론을 재편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동료들 가운데 스콜라철학자들이 자만심이 없다고 칭찬했고, 논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라이프니츠를 최고의 동료로 여기며 스스로의 업적 또한 높이 평가했다. 그의 연구는 논리학, 언어이론, 인식론, 심리철학 등 폭넓게 이루어졌으며 실용주의(pragmatism)의 창시자였다.

1-4.

퍼스의 철학은 학회지논문으로만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1868년 그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어떤 능력에 관한 물음들’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에서 우리는 내적 관찰능력을 가질 수 없고 기호(sign)를 벗어나선 사고할 수 없으며 직관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부정적 결론의 초기인식론에 대해 얘기했다. 결론은 모든 인지는 선행하는 인지에 의해 논리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더 유력한 논문으로 1877년 ‘과학의 논리의 실례들’ 에서 인간의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는 오류가능주의의 원리를 발표했다. 절대적 진리는 과학적 탐구의 목표이지만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최선은 끊임없이 개선함으로써 절대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다. 1878년의 한 논문은 대상에 대해 명료하게 생각하기 위해선 그 대상이 인지할 수 있는 실제적 유형의 효과를 가져 오는지 고려해 보면 된다는 실용주의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

퍼스는 1884년 논문집 《존스 홉킨스의 논리학연구》를 편집하고 관계논리학에 관한 논문을 썼다. 또 그의 학생이 발표한 그의 양화논리학 체계에서 문장의 구조를 표현하기 위한 독창적인 기호법으로 합성기호를 사용했는데, 예를 들어 Lij는 isaac이 jessica를 Love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퍼스가 이름붙인 ‘일반대수논리’의 구문론은 퍼스가 알지 못했던 프레게에 의해 이미 개발된 논리체계의 구문론과 대등한 것이었다. 1891년 《일원론자》에 실린 ‘수수께끼 추측’에서 진화론적 우주론 전반의 배경에 반대하는 형이상학과 심리철학을 소개했고 1905년 《일원론자》에 실린 논문에서는 자신의 실용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진술을 담았다.

퍼스는 생애의 마지막 해에 기호에 대한 일반 이론을 사고와 언어에 관한 철학을 위한 기본 틀로 발전시키려고 분투했다. 이 아이디어는 철학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대부분은 1903년에서 1912년 사이 영국여성 웰비와 교신하며 생각해낸 것이었다.

1-5.

퍼스의 철학은 완전한 철학을 완성하지는 못했으며 그가 남긴 원고는 20세기에 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다른 철학자들에 대한 영향력은 그의 천재성에 비하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퍼스의 논리학 연구는 엄밀하게 형식을 갖추어 발표된적이 없었으며 퍼스와 프레게 두 사람이 독자적으로 생각해 낸 논리 체계가 러셀을 거쳐 세상에 알려지게 한 사람은 프레게였다.

2.프레게의 논리주의

2-1.

고틀로프 프레게는 생후에 철학의 역사 속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탁월한 수학자로 현대의 수학적 논리학을 만들었고, 영어권 대학들 내에서 유력한 지위를 차지했던 분석철학의 창시자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의 영향으로 철학에서 20세기를 특징짓는 언어적 전회가 이루어졌다.

프레게는 독일 발트연안의 비스마르에서 루터교회에 다니는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으며 1869년 예나대학에 입학해 네 학기를 마친 후 괴팅겐 대학으로 옮겨 1873년에 기하학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74년 객원강사로 예나대학에 돌아왔고 1879년에 교수가 되어 44년간 수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평범하게 조용히 살았고 그의 중요한 저작은 대부분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2-2.

프레게의 풍요로운 저작경력은 1879년 《개념표기법》이라는 소책자를 출판하며 시작되었다. 개념표기법은 일상 언어의 불명료한 논리적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기호 체계로 프레게는 명제 계산 체계(propositional calculus)를 개발하기 위해 이 표기법을 사용했다. 이는 문장 전체가 부정, 연언, 선언의 의미에 의존하는 추리들을 다루는 논리학 분야로서, 기본원리는 ‘그리고’, ‘만일’, ‘또는’과 같은 연결어를 포함하는 문장의 진리치가 오로지 그 연결어로 이어진 요소문장들의 진리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눈은 희고, 잔디는 푸르다’와 같은 중문은 그 문장의 요소인 ‘눈은 희다’와 ‘잔디는 푸르다’와 같은 단순명제들의 진리함수(truth-functions)로 간주된다.

명제논리학은 이전에도 연구되어져 왔지만 제일처음으로 체계화 한 것은 프레게였다. 앞에서 말한 《개념표기법》은 공리적인 방식으로 명제계산체계를 제시하는데, 이를 위해 그가 고안했던 기호체계는 인쇄가 어렵고 명제계산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그 체계의 표현방법은 여전히 수학적 논리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레게가 논리학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술어계산(predicate calculus)이었다. 이것은 명제의 내적구조를 다루는 논리학의 분야이다. 그는 추리의 타당성이 ‘all’이나 ’some’, ‘no’나 ‘none’과 같은 표현에 의존하는 양화표기법을 사용해 지금까지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언논리를 대폭 개선한 술어 계산 체계를 제시했다. 이는 복합 양화사를 포함하는 문장(’모든 소년이 어떤 소녀를 사랑한다‘)에 대처할 수 있게 해주었다.

2-3.

《개념표기법》이 논리학사에서 전형적인 교과서가 되었으나 그 책을 쓸 때 그의 목적은 수학과 더 큰 관련이 있었다. 그는 논리학과 산술학의 형식체계를 제시함과 동시에 두 체계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산술학의 모든 진리가 어떤 보조수단도 필요 없이 논리학의 진리들로부터 도출됨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논리주의’로 알려지게 된다.

프레게의 논리주의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수(number)와 같은 산술학의 개념을 집합(class)과 같은 논리적인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의를 위해 그는 기수를 원소의 수가 동일한 집합(동등집합)으로 간주했다. 예를 들어 수 둘은 쌍으로 이루어진 것들의 집합이고, 수 셋은 삼인조로 이루어진 것들의 집합이다. 이는 순환적인 정의인 것 같지만 사실 집합들 사이의 동등 개념이 수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정의될 수 있기 때문에 순환적이지 않고 두 집합은 원소들 사이에 나머지 없이 1:1 대응 할 수 있을 때 서로 동등하다. 웨이터는 접시와 칼의 개수를 알지 못해도 탁자위에 접시가 있는 만큼 칼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웨이터에게 필요한 것은 접시의 오른쪽에는 칼이, 칼의 왼쪽에는 접시가 있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넷은 복음서 저자들의 집합과 동등한 모든 집합들의 집합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논리학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논리주의자의 목적을 고려했을 때 쓸모없는 것일 수도 있다. 프레게는 개개의 수에 대해 정확한 크기의 집합뿐만 아니라, 그 크기가 논리학에 의해 보증되는 집합을 찾아야 했기에 이를 위해 수 계열의 맨 처음을 영(zero)으로 시작한다. 영은 분명히 어떤 원소도 갖지 않은 집합이라고 논리적인 용어로 정의될 수 있다. 그 다음 수 하나는 그 유일한 원소가 영인 집합과 동등한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이 정의들로부터 나머지 자연수에 대한 정의들로 넘어가기 위해 그는 수 계열에서 ‘n은 m바로 다음에 온다’를 ‘F에 속하는 원소의 수가 n이고 F에 속하는 원소이기는 하나 x와 동일하지 않은 수가 m인, 그런 어떤 개년 F가 있고 F에 속하는 대상 x가 있다’ 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의 도움으로 나머지 수들도 동일성, 집합, 동등 집합과 같은 논리적 개념 이외의 다른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정의될 수 있다.

2-4.

《개념표기법》은 매우 엄격하고 형식적이지만 《산술학의 기초》는 논리주의 프로그램을 더 자세히 제시할 뿐만 아니라 더 비형식적으로 설명한다. 기호들이 드물게 나오고 자신의 책을 다른 철학자들 것과 관련짓느라 노심초사한다. 칸트는 산술학적 지식과 기하학적 지식은 둘다 직관에 의존한다고 주장하고《순수이성비판》에서 수학적 진리가 종합적이면서 선천적인 것이라 정의했으며 존 스튜어트 밀은 수학적 명제가 폭넓게 적용될 수 있고 폭넓게 확증될 수 있는데도 후천적인 명제라고 주장했다.

프레게는 수학이 선천적으로 알려진다는 점에서 밀에 반대하고, 기하학이 직관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칸트에게 찬성했다. 그러나 산술학이 분석적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종합적이라고 생각한 칸트와 차이가 있다. 만일 프레게가 옳다면, 산술학은 모든 지식영역에서 유효하고 경험적 사실들에 의해 입증될 필요가 없는 일반 법칙들만을 기반으로 한다.

2-5.

《산술학의 기초》에서 프레게가 중요하게 여긴 두 주장은 각각의 수는 독립적인 대상이라는 것과 수를 지정하는 진술의 내용은 개념에 관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한 ‘개념’과 ‘대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두 명제는 상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가 대상이라고 말할 때 그는 만져서 알 수 있는 것임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두가지를 부인하는데, 수가 어떤 것의 속성이라는 것과 수가 주관적인 것, 즉 어떤 심적 상태의 심상이거나 관념이거나 속성이라는 것이다.

프레게가 말하는 개념은 정신과 무관하기에 위에서 언급한 두 주장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없다. 그는 이 두 번째 주장은 ‘지구에 하나의 달이 있다’와 같은 진술은 지구의 달이라는 개념에 수 하나를 지정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금성에는 달이 없다’는 금성의 달이라는 개념에 수 영을 지정한다. 후자의 경우, 어떤 수를 속성으로 갖는 달이 없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수는 개념의 외연이라고 프레게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개념 F에 속하는 수는 ‘개념 F에 지정한 수와 동일한 수’라는 개념의 외연이다. 이는 F에 속하는 원소의 집합과 동일한 수의 원소를 갖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수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수가 대상이라는 그의 이론은 집합을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2-6.

1844년에서 1893년 사이에 프레게는 논리학에 근거하여 산술학을 구성하려는 논리주의를 완전하고 형식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산술학의 기본법칙》을 완성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과제는 자명한 논리학의 진리일 수 있는 일련의 공리들을 명확하게 진술하는 것이었고,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일련의 추리 규칙들을 제시하는 것 이었으며 산술학의 표준적 진리들을 그와 같은 공리들로부터 그와 같은 추리 규칙들에 의해 차례로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세권에 달하는 것이었지만 두 번째 권 까지만 완성되고 중단되었다. 1893년 그는 두 번째 권을 출판하는 사이에 영국철학자 러셀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최초의 공리들 가운데 다섯 번째 것이 체계 전체를 부정합하게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이 공리는 개개의 모든 F가 G이고, 개개의 모든 G가 F라면, F에 속하는 원소들의 집합은 G에 속하는 원소들의 집합과 같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 즉 개념으로부터 집합으로 이행하는 것을 인정하는 공리이고 수가 논리적 대상임을 입증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러셀이 지적한 문제는 이 공리를 포함하는 체계가 제한 없는 집합형성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집합은 그 자체로서 별개로 분류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제 자신의 원소인 집합과 제 자신의 원소가 아닌 집합이 존재 하는 것 같은데 이는 역설이 된다. 이 체계는 논리적으로 타당할 수 없다.

《산술학의 기본법칙》의 두 번째 권은 러셀의 편지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인쇄에 들어간 뒤였으므로 풀이 죽은 프레게는 그 역설을 부록에 넣어 문제의 그 공리를 약화시킴으로써 산술학 체계를 메꾸려 했으나 개정한 이 체계가 부정합한 것으로 판명났다. 1918년 예나대학에서 은퇴한 뒤 그는 산술학이 논리학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신념을 포기하고 산술학도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종합적이며 선천적이라는 칸트의 견해로 돌아갔던 것 같다.

2-7.

오늘날 우리는 논리주의 프로그램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두가지 이유로 프레게의 논리적 토대의 일부였던 소박한 집합론이 본래 정합성이 없었다는 것과 ‘산술학의 공리’라는 개념은 후에 오스트리아의 수학자 괴델에 의해 산술학을 완전하고 정합하는 공리 체계로 만드는 일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그 자체가 의문스럽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게의 철학적 유산은 엄청났다.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길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신대륙을 유럽에 알린 것처럼, 프레게는 산술학을 논리학에서 이끌어 내지는 못했지만 궁극적으로 산술학과 논리학의 전체 지도를 바꿀 만큼 논리학을 혁신했고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도 콜럼버스와 마찬가지로 우울과 좌절을 겪었지만 자신의 연구가 가치 있을 것이라는 기대만은 버리지 않았다. 그는 1925년 죽기직전 아들에게 원고를 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쓴 글들을 멸시하지 마라. 모두 금은 아닐지언정 그 안에 금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부터 이후의 분석철학까지

201500072 강종원

1.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 

1-1.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출신 가문으로 1889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는데, 대가족이었고 부유했다. 2) 그는 맨체스터 대학에 갔고, 그곳에서 비행기의 제트추진 엔진을 설계했다. 그는 러셀의 <수학의 원리>를 읽고 그 책을 통해 프레게의 저작에 친숙해졌으며, 1911년에 예나 대학의 프레게를 찾아갔다. 그는 프레게의 권고로 케임브리지로 갔고,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러셀의 지도 아래 다섯 학기를 보냈다. 러셀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도록 적극 도와주었다. 3) 비트겐슈타인은 1913년 케임브리지를 떠나 자신이 만든 노르웨이의 어느 오두막에 은둔했다. 이 시기에 썼던 비망록과 편지는 그가 일생 동안 줄곧 유지할 수 있었던 철학관의 싹을 보여주었다. ‘철학은 실재에 대한 그림을 보여 주지 못하며, 과학적 탐구를 확증할 수도 논박할 수도 없다'(는 그의 유명한 말도 이 때 나온 것이다.)
1-2. 1914년에 전쟁이 일어나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포병대에 자원입대했고, 동부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서 용맹을 떨쳤다. 그는 1918년 11월 티롤 남부의 이탈리아 군인들에게 붙잡혀 몬테카시노 근방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 철학적인 생각들을 일기장에 썼고, 수용소에 있는 동안 그 철학적인 생각들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판된 철학책 <논리철학론>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 책의 원고를 수용소에서 러셀에게 보냈고, 그것은 1921년에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얼마 뒤 영어 번역과 러셀의 머리말을 덧붙여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1-3. <논리철학론>은 간결하고, 우아하고, 수수께끼 같다. 그 책은 ‘세계는 성립할 수 있는 경우들 전체다’로 시작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로 끝난다. 핵심 주제는 의미에 관한 그림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명제들로 이루어진다. 명 제는 사고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이고, 사고는 사실들에 대한 논리적 그림이며, 세계는 사실들 전체이다. 6)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와 사고는 문자 그대로 그림이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낱말들의 공간적 관계는 사물들의 공간적 관계를 묘사한다. 7) <논리철학론>에 따르면, 그림(혹은 명제)이라면 어느 것이나 그것이 묘사하는 것과 공통된무언가를 가져야 한다. 이 최소한의 공통점을 비트겐슈타인은 그것들의 논리적 형식이라고 말한다. 8) 비트겐슈타인은 왜곡된 일상 언어 뒤에 숨어 있는 사고의 묘사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러셀이 제시한 노선에 따라 논리적 분석을 해 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우리가 이 분석을 하다 보면 결국은 전혀 복합적이지 않은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들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했다. 언어와 세계의 연결은 마음속 깊이 있는 이런 사고의 궁극적 요소들과 세계의 본질을 구성하는 원자 대상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9) 명제와 그 명제가 나타내는 세계 구조에 대한 그림 이론을 해설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양한 종류의 명제들이 어떻게 원자 그림들의 결합으로 분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1-4.<논리철학론>은 그 밖의 다른 형이상학 논문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형이상학자가 말하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일 수 있을 뿐이다. <논리철학론>의 문단들은 딛고 올라가서 세계를 정확히 보게 되면 걷어차야 하는 사다리와 같다. 철학은 비철학적인 명제들을 명료화하는 활동이다. 명료해진 명제들은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비출 것이고, 그에 따라 그 철학자가 말하려는 것이 보이겠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1-5. 과학도 철학도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보여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6.철학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논리철학론>, 이것만은 철학이 해줄 수 있는 일을 했다.

2. 논리 실증주의

2-1. 비트겐슈타인은 비엔나로 돌아왔고, 자기 누나를 위해 새로 지을 집을 설계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1922년부터 비엔나 대학의 과학철학 교수로 있는 슐리크를 누나에게서 소개받았고, 그 와 함께 철학적 탐구를 다시 시작했다. 2) 반형이상학 프로그램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의 일부 발상들을 활용했고, 필연적 진리가 필연적인 것은 오로지 그것이 항진 명제이기 때문이라고 선언했다. 3) 곧바로 검증 원리의 위상과 공식에 관해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2-2.실증주의자들은 철학의 진정한 과제가 보편적인 철학적 명제를 내세운다기보다는 오히려 비철학적인 진술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 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은 비트겐슈타인과 하나가 됐다. 그들이 선택한 명료화의 방법은 경험적 진술들이 경험의 직접 기록인 요소 진술들 혹은 ‘원초’ 진술들로부터 어떻게 진리 함수적으로 형성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5)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대규모 장애물에 부딪혔다. 원초 진술들로 기록된 경험들은 각 개인에게 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만일 의미가 검증에 좌우되고, 우리 각자 다른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어떤 과정에 의해 검증을 수행한다면, 누구든 다른 누군가의 의미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슐리크는 형식과 내용을 구별함으로써 이 물음에 답하려고 했다.) 6) 비트겐슈타인은 이 해결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유아주의(solipsism_자신만이 존재하고, 타인이나 그 밖의 다른 존재물은 자신의 의식 속에 있다고 하는 생각)의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려고 분투했다.

3.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

3-1. 비트겐슈타인은 1930년대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 선생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인식론과 심리철학을 뒤집어엎었다. 데카르트에서 슐리크에 이르기까지 이전 철학자들은 외부의 공적 세계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직관이나 경험이라는 궁극적이고 직접적이고 사적인 자료들을 근거로 성립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려고 애썼다. 비트겐슈타인이 그 시절 제시한 바에 따르면, 결코 지식과 신념의 설립 기반이 아닌 사적 경험은 그 자체가 공통의 공적 세계를 전제로 하는 어떤 것이었다. 아주 은밀하고 내적인 우리의 생각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낱말들조차도 그것들이 바로 그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의 공통된 외적 담화 안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철학의 문제는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부터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을 사회적인 배경 속에서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3-2.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으로 다시 돌아온 뒤 <논리철학론>의 많은 주장들을 단념했다. 그는 논리적 원자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았고, 일상적인 말에 숨어 있는 논리적으로 명확한 언어를 찾아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실증주의자들의 원초 진술에는 분명히 맞지 않는 말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요소 명제와 요소 명제가 아닌 명제의 구별을 의심하게 되었고, 언어의 궁극 요소가 단순 대상을 지시하는 이름이라는 생각을 단념하기에 이르렀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론⟫과 논리실증주의

Ⅰ.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론⟫

1-1.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비엔나에서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유대인 출신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명한 철강 재벌인 아버지와 가톨릭교도 부인과 아홉 자녀가 있는 대가족이었고, 자녀 모두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브람스가 손님으로 자주 왔고, 그의 형 파울은 1차 세계대전으로 한 팔을 잃었음에도 명성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비트겐슈타인은 14살까지는 가정교육을 받고, 그 후 3년간 린쯔에 있는 실업학교에 다녔는데, 그곳의 동기생 중 한 명이 히틀러였다.

1-2. 비트겐슈타인은 학교를 다닐 때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신앙생활을 그만두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공학을 공부해 맨체스터 대학에 갔는데 거기서 비행기의 제트추진 엔진을 설계했다. 그는 러셀의 ⟪수학의 원리⟫와 프레게의 저작을 읽고, 1911년에 예나 대학의 프레게를 찾아갔다. 프레게의 권고로 그는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가서 다섯 학기를 러셀의 지도하에 있었다. 러셀은 그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보고 그가 능력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었다.

1-3. 비트겐슈타인은 1913년 케임브리지를 떠나 자신이 만든 노르웨이의 오두막에 은둔했는데, 그 시기에 그는 일생 동안 유지할 그의 철학관을 보여 주는 비망록과 편지를 썼다. 그는 철학은 연역적 학문이 아니고 또한 자연과학과 똑같은 위치에 놓일 수 없다고 기록했다.

‘철학은 실재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지 못하며, 과학적 탐구를 확증할 수 도 없다.(NB 93)’

1-4. 1914년에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오스트리아 포병대에 자원입대했고, 1918년 11월 이탈리아 군인에게 붙잡혀 몬테카시노 근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 철학적인 생각들을 일기에 썼고, 수용소에 있을 때 그 철학적 생각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판된 철학책 ⟪논리철학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으로 빛을 보게 된다. 그는 수용소에서 책 원고를 러셀에게 보내, 후에 네덜란드에서 만나 토론을 한다. 책은 1921년에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얼마 후 오그던의 영어 번역과 러셀의 머리말을 덧붙여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1-5. ⟪논리철학론⟫은 간결하고, 우아하고, 수수께끼 같다. 일련번호가 붙은 문단들로 구성되어 있는 그 책은 ‘세계는 성립할 수 있는 경우들 전체다’로 시작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로 끝난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의미에 관한 그림이론(picture theory)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명제들로 이루어진다. 명제(proposition)은 사고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이고, 사고(thought)는 사실들에 대한 논리적 그림이고, 그리고 세계(world)는 사실들 전체이다.

1-6. ‘런던 기차는 11.15에서 출발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와 같은 문장은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와 사고는 문자 그대로 그림이라 믿었다. 만약 명제와 사고가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언어가 사고를 심하게 왜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일상 언어에서도 묘사적 요소가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나의 포크가 나의 나이프 왼쪽에 있다’는 문장은 똑같은 낱말들로 이루어진 다른 문장, 즉 ‘나의 나이프가 나의 포크 왼쪽에 있다’와 전혀 다른 말이다. 첫 번째 문장이 그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은 ‘나의 포크’라는 낱말들이 ‘나의 나이프’라는 낱말들 왼쪽에 나타난다는 사실이다(그러나 두 번째 문장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낱말들의 공간적 관계는 사물들의 공간적 관계를 묘사한다(TLP 4.102).

1-7. 이렇게 단순한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문장을 글이 아닌 말로 한다면 그것은 식탁 위에 있는 것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공간적 관계라기보다는 소리들의 시간적 관계이다. 이것은 말하는 순서와 공간적 배열이 일정한 추상적 구조를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철학론⟫에 따르면, 그림이라면 어느 것이 그것이 묘사하는 것과 공통된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 그는 이 최소한의 공통점을 그것들의 논리적 형식(logical form)이라 말했다. 대부분의 명제들은 앞에서 본 경우와는 다르게 명제가 묘사하는 상황과 공통된 공간 형태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명제라면 어느 것이나 그것이 묘사하는 것과 공통된 논리적 형식을 가져야 한다.

1-8. 비트겐슈타인은 왜곡된 일상 언어 뒤에 숨어있는 사고의 묘사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러셀이 제시한 것처럼 논리적 분석을 해 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우리가 이 분석을 하다보면 결국 전혀 복합적이지 않은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들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완전히 분석된 명제는 원자 명제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데, 각각의 원자 명제는 단순 대상의 이름들, 즉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옳거나 그르게 묘사하는 방식에서 서로 관련된 이름들을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완전한 분석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지만, 명제가 표현하는 사고는 완전히 분석된 명제의 복합체를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 우리는 복잡한 규칙들을 부지불식간에 가동해서 명제가 표현하는 사고를 일상의 언어로 표현한다. 언어와 세계의 연결은 마음속에 있는 사고의 궁극적 요소들과 세계의 본질을 구성하는 원자 대상들(atomic objects) 사이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런 상호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말할 수 없다. 그건 우리 각자가 사적 언어를 만들어 혼자서 확인할 수밖에 없는 신비한 과정이다.

1-9. 명제와 그 명제가 나타내는 세계 구조에 대한 그림 이론을 해설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양한 종류의 명제들이 어떻게 원자 그림들의 결합으로 분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과학은 명제들로 이루어지는데, 그 명제들의 진리치는 그 명제들을 구성하는 원자 명제들의 진리치로 결정된다. 논리학은 항진 명제들(tautologies), 즉 그 요소 명제의 진리치가 뭐든 상관없이 옳은 복합 명제들(complex propositions)로 이루어진다. 어떤 명제들은 그 자체가 사이비 명제(pseudo-proposition)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명제들 중 윤리학과 신학의 명제도 있다. 그리고 ⟪논리철학론⟫자체의 명제들을 포함한 철학 명제들 역시 사이비 명제에 속하게 된다.

1-10. ⟪논리철학론⟫은 다른 형이상학 논문들처럼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기술하고자 했으나,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림은 그것이 그리는 대상과 독립적일 수밖에 없으며, 올바른 그림이 있는 것처럼 잘못된 그림 또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명제라면 어느 것이나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포함해야 하므로, 명제는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그릴 수 없다. 형이상학자가 말하려는 것은 그저 보일 수 있을 뿐이다. ⟪논리철학론⟫의 문단들을 딛고 올라가 세계를 정확히 보게 되면 걷어차야 하는 사다리와 같다.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비철학적 명제들을 명료화하는 활동(activity)이다. 일단 비철학적인 명제들이 명료해지면 그 명제들은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비출 것이고, 그럼 철학자가 말하려는 것이 보이겠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1-11. 과학도 철학도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보여주지는 못하나, 이것이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심이 물음(question)이 있을 때에만 의심일 수 있고, 물음은 답이 있을 때만 물음일 수 있으며, 답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을 때에만 답일 수 있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과학적 물음의 답을 모조리 알게 되었을 때조차도 삶의 문제(problem)는 완전히 그대로 남는다고 느낀다. 물론 답을 모조리 알게 되면 더 이상 남은 물음이 없을 텐데, 이 자체가 삶의 문제에 대한 답이다. 삶의 문제는 문제가 사라지는 순간 해결된다(TLP 6.5-6.521).”

사람이 불멸을 믿는다고 삶의 의미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원히 산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영생 그 자체가 하나의 난문제인 셈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신은 세계 속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신비한 것은 사물들이 세계 속에 어떻게 있느냐가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다(TLP 6.432, 6.44).’

1-12. 철학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나, ⟪논리철학론⟫만은 철학이 해 줄 수 있는 일을 했다 – 비트겐슈타인도 그렇게 믿었다. 완벽한 책을 내놓았기 때문에 그는 철학을 그만두고 평범한 일들을 했다. 아버지 칼 비트겐슈타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와 형제자매들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나,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자기 몫을 포기하고 수도원에서 정원사 일을 하거나 시골 학교에서 교사를 하며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1926년 한 학생이 가학성 벌을 받았다고 고소하며 기소되었고,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교사를 그만두었다.

Ⅱ. 논리실증주의

2-1. 비트겐슈타인은 비엔나로 돌아왔고, 자기 누나를 위해 새로 지을 집을 설계하는 걸 도왔다. 그는 1922년에 누나에게서 비엔나 대학의 과학철학 교수로 있는 슐리크(Moritz Schlick)를 소개받아, 그와 함께 철학적 탐구를 다시 시작했다. 두 사람은 1927-8년 월요일 저녁마다 만났고, 카르납(Rudolf Carnap)과 바이스만(Friedrich Waismann) 등 다른 사람들도 만났다. 1929년 그는 (사후 ⟪철학적 논평⟫으로 출판된) 철학 원고를 쓰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갔다. 그가 없는 동안 토론 그룹은 의식적인 철학 운동을 전개했고, ‘비엔나 학단의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선언문을 발행했다. 그 선언문은 과학적 세계관에 마땅히 내놓아야 하는 예전 그대로의 형이상학 체계에 반대하는 캠페인의 시작이었다.

2-2. 반형이상학 프로그램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의 일부 발상들을 활용했고, 필연적 진리가 필연적인 것은 오로지 그것이 항진 명제이기 때문이라 선언했다. 이는 수학적 진리가 세계에 관해 무언가를 알려준다는 것을 부정함과 동시에 그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승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세계에 관한 지식은 오직 경험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고, 명제는 경험에 의해 검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명제의 의미는 명제가 검증되는 방식이라는 검증원리는 형이상학을 공격하는 강력한 무기였다. 두 형이상학자가 절대자의 본성이나 우주의 목적을 놓고 논쟁을 벌일 경우, ‘그 논쟁이 가능한 어떤 경험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2-3. 곧바로 검증 원리의 위상과 공식에 관해 여러 논쟁이 벌어졌다. 검증 원리 자체는 항진명제인가? 검증 원리는 경험에 의해 검증 가능한가? 어느 답도 만족스러울 것 같지 않다. 게다가 형이상학적 신조들 못지않게 과학의 일반 법칙들도 결정적인 검증을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과학의 일반 법칙들은 여전히 반증될 수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검증 원리를 반증 원리로 대체해야 할까? 그럴 경우, 존재 주장들이 어떻게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존재 주장들은 우주를 남김없이 돌아다녔을 경우에만 결정적으로 반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 기준을 좀 더 약한 형태로 표현하여, 명제는 명제의 옳고 그름과 관련 있는 약간의 관찰들이 있을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중해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검증 원리에 대해 조건부로 동의했지만, 당시 그는 수학적 명제 의미는 명제의 증명 방법이라는 선천적으로 유사한 주장을 옹호했다.

2-4. 실증주의자들은 철학의 진정한 과제가 보편적인 명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닌, 비철학적인 진술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이 점으로 비트겐슈타인과 하나가 됐다. 그들이 선택한 명료화의 방법은 경험적 진술들이 경험의 직접 기록인 요소 진술들 혹은 ‘원초’(protocol) 진술들로부터 어떻게 진리 함수적으로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원초 진술에 나오는 낱말의 의미는 그 낱말이 나타내는 경험의 특징을 가리키는 예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에서 비롯된다.

2-5. 이 프로그램은 큰 장애물에 부딪쳤다. 원초 진술로 기록된 경험들은 각 개인에게 사적으로(private) 나타난다. 만약 의미가 검증에 좌우되고, 우리 각자가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어떤 과정에 의해 검증을 수행한다면,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의미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슐리크는 이 물음에 형식(form)과 내용(content)을 구별하면 된다고 답했다. 나의 경험 내용은 내가 붉은 어떤 것을 보거나 푸른 어떤 것을 볼 때와 같이, 내가 가지고 있거나 내가 겪는 것이다. 이것은 사적이고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경험의 형식이나 구조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공통일 수 있다. 내가 나무를 보거나 석양을 볼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보는 것과 동일한 경험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 나무가 푸르다고 하고 석양이 붉다고 하는 한, 우리는 서로 소통할 수 있고 과학의 언어를 구성할 수 있다.

2-6. 비트겐슈타인은 이 해결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유아주의(solipsism)의 위협을 받지 않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비엔나 학단을 멀리하고 케임브리지로 완전히 돌아와서, 《논리철학론》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고 트리니티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비엔나 학단은 슐리크와 베를린의 라이엔바흐가 공동 편집한 《인식》이라는 학술지에서 반형이상학 프로그램을 계속했다. 비엔나 학단의 기본적인 생각들은 1936년 에이어(A. J. Ayer)의 《언어, 진리, 논리》가 출판되면서 영국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 해 슐리크는 한 학생이 총을 쏴 살해되었고, 비엔나 학단은 탁월한 일부 회원들이 정부의 탄압으로 망명을 떠나면서 1939년 막을 내렸다. 비엔나 학단이 후세를 위해 남긴 아주 뛰어난 유산은 1935년 포퍼(Karl Popper)의 《과학적 발견의 논리》 출판이었다.

다윈과 자연선택부터 니체까지

1.다윈과 자연선택

1-1. 찰스 다윈은 1809년 슈루즈베리에서 태어나 ,1825년 에든버러의 의대생으로 입학했지만 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케임브리지의 크라이스트 칼리지로 가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식물학 교수의 추천을 받아 군함의 박물학자로 지명되었다. 5년간의 항해동안 그는 지질학, 식물학 등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발굴했고 이를 통해 해양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비글호항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1-2. 그 후 다윈은 1840-1850년대에 자신의 사유지에서 식물군과 동물군의 연구를 통해 나온 초안을 여러 사람이 돌려보게 함으로써 자연선택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를 1960년대 쯤 책으로 출판할 계획이었으나 다른 동물학자인 월리스가 자연선택과 유사한 적자생존 이론을 학회에 발표해 그는 자연선택이론의 독자성과 우선권을 위해 《종의기원》을 서둘러 출판했다. 이후 그는 여러 논문을 출판하였고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책 《인간의 계보, 선택과 성의 관계》에서 그는 인간이 오랑우탄, 침팬지와 공통된 조상을 갖는다는 주장을 옹호했다.

1-3. 다윈은 진화론을 맨 처음 제안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대 시칠리아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자연선택의 원리를 암시했고 스웨덴의 자연주의자 린네는 식물과 동물의 종을 분류해 다윈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린네와 그 밖의 분류학자들은 식물과 동물의 왕국을 속과 종으로 나누었다. 예를들면 모든 사자는 동일한 종이고, 사자종은 호랑이나 표범과 같은 다른종을 포함하는 고양이 속의 구성원이다. 일정한 종 내에서 개체의 형질은 크게 변할 수 있지만 종의 규정적 특징은 종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종의 자손을 낳기 위해 다른 구성원들과 교배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종의 구성원들 사이의 결합은 일반적으로 자손을 낳지 못한다.

몇몇 자연주의자들은 종교적인부분에서 이유를 찾으려기보다는 하나의 속에 포함되어 서로 다른 종 사이의 유사점이 머나먼 공통조상의 계보에 의해 설명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또한 종의 어느 세대에서 자손에게 넘겨줄 유리한 형질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장 높은 나뭇잎에 도달하려고 몸을 뻗치던 기린은 목이 늘어났고 이는 목이 긴 자손을 낳을 수 있게 해주었다.

다윈은 이러한 고대의 자연선택 관념을 이용해 종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설명했는데, 이러한 이론의 근본 바탕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유기체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정도에 따라 크게 변한다. 둘째, 모든 종은 세대마다 증가시킬 수 있는 만큼 번식할 수 있다. 셋째, 하지만 종이 이렇게 번식하지 않는 것은 각 세대에서 극소수의 자손만이 살아남아 번식하기 때문이다.

1-4. ‘이와 같은 생존 경쟁으로 인해, 모든 변이는 그것이 아무리 경미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어떤 원인으로 진행되든 간에, 만일 다른 유기체나 외부 자연과의 무한히 복잡한 관계 속에서 종의 개체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하다면, 그 변이는 개체를 보존하려는 경향을 가질 것이며, 일반적으로 자손에게 유전될 것이다. 따라서 그 자손 역시 더 잘 살아남을 기회를 갖게 될텐데, 그것은 종의 많은 개체들이 주기적으로 태어나기는 하나 그들 가운데 소수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OS 52)’

다윈은 세 가지 다른 종류의 선택을 구별했다. 목적에 가자 적합한 표본을 위한 인위선택과 목적적이지 않은 자연선택인데 자연선택은 다시 좁은 의미의 자연선택과 성 선택으로 나뉜다. 전자는 개체가 번식하기에 충분할 만큼 오래 살아남을지 여부를, 후자는 그렇게 살아남은 개체가 누구와 짝짓기 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적응변이는 그 변이 자체가 유전된 것이고 특유의 유리한 변이의 기원은 전적으로 우연의 문제일수 있다고 다윈은 믿었다.

자연선택은 단일한 종에 속한 형질들의 경우 쉽게 예증되고 관찰될 수 있다. 그 예로 자작나무에 사는 나방이 새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자작나무에 가까운 색을 띄는 형질로 점차 바뀌어 가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다윈은 자연선택이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되면서 식물과 동물의 완전히 새로운 종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굉장히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었을 것이며 실제로 지질학점 관점에서 화석을 살펴보았을 때 종의 탄생과 소멸을 다윈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1-5. 다윈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철학사가 아니라 과학사에 속한다. 그러나 다윈의 생물학적 연구가 종교철학과 형이상학 전반에 미친 영향 때문에, 어떤 철학사도 다윈에 대한 언급을 빠뜨릴 수 없다.

  1. 존 헨리 뉴먼

2-1. 교회단체가 다윈의 사상을 반대할 때 종교작가인 존 헨리 뉴먼은 이를 받아들였다. 《종의기원》이 발표된 직후 그는 각각의 종마다의 독자적인 창조를 믿는 사람은 화석이 박힌 바위의 창조역시 믿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다윈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했으며 과학과 종교사이의 어느 논쟁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뉴먼은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다녔으며 오리엘대학의 특별 연구원을 역임했다. 또 세인트 메리 성당의 주교 대리였으며 동시에 설교자로서 지속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복음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후에 기독교신앙에 대한 가톨릭의 해석이 옳다는것을 확신하고 로마 카톨릭교로 개종하면서 오리엘대학의 특별 연구원직에서 물러났다.

뉴먼은 더블린에 세워진 가톨릭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그 시절 강의와 연설들을 모아 《대학의 이념》이라는 교육이론의 고전을 출판했다.

2-2. 뉴먼은 신의 존재를 믿는 것 뿐 아니라 구체적인 종교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완전히 이성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세상에 입증해 보이려는 욕구 때문에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종교적인 믿음의 결론에 대한 증거가 신앙의 완전한 헌신에 부적합하게 보인다면 종교적 믿음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해 이성의 뒷받침 없이 신앙을 채택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고, 종교교리를 고수하는 것 자체가 이성적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문제를 다룰 때 그는 비종교적 맥락에서 믿음의 본성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관심을 자주 보였다. 그가 제기한 철학적 물음은 적합한 증거나 논증 없이 명제를 승인하는 것은 언제나 그른가였다. 명제가 확신이 아닌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에 의해 정당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로크에 대응하여 뉴먼은 우리의 대부분의 믿음이 빈약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잘 유지된다고 지적하고, 증거의 힘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 무조건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일도 과학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종교적 믿음은 추측에 근거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합리 하다고 비난받을 수 없다. 유대교의 역사에서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증거가 발견될 수 있지만 이 증거는 신의 존재와 계시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 에게만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왜 신을 믿어야하는지 물으면 그는 양심의 소리에서 발견될 수 있는 신성한 능력에 대한 내적 경험에 호소하라고 말한다.

2-3. 뉴먼의 기독교적 변증론이 포함된 일반적인 인식론적 설명은 신앙에 공감하지 않던 철학자들도 감탄하게 했다. 그것은 흄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의 믿음과 확실성에 관한 논의들 가운데 최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니체

3-1.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작센의 루터교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대학시절 전공은 고전문헌학 이었는데 학위를 받기도 전에 정교수가 될 정도로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니체는 대학교수가 되기 직전에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를 읽은 것과 작곡가 바그너를 만난 것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 두 사람의 영향을 받아 제일 처음 출판해낸 책이 《비극의 탄생》이다.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 정신의 두 측면을 대비했다. 한 측면은 비극에서 표현된 열광하는 비합리적 열정이었고 다른 측면은 서사시나 미술에서 표현된 절제력 있는 조화로운 아름다움 이었다. 그리스 문명의 성취는 그 둘 사이의 종합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3-2. 니체는 1873년에서 1876년 사이에 네편의 평론으로 이루어진 《반시대적 성찰》 출판했다. 4편중 두 편은 예수의 생애 저자로 유명한 슈트라우스와 과학자의 허세에 대한 비판이고

나머지 두 편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878년쯤 그는 염세주의에 숨이 막힐것 같아 바그너와 인연을 끊었고, 쇼펜하우어에 대한 열정 또한 식었다. 이 때문에 그는 후에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긍정의 삶으로 대체하길 희망하는 저작들을 출판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만 그답지 않게 공리주의 도덕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과학을 예술보다 우월한 것으로 평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예술이 일생일대의 과업이라는 끊임없는 근원적 확신을 시적이고 경구적인 저작형식으로 드러냈다. 그는 심리적 문제로 인한 병 때문에 교수직을 조기 은퇴하고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여러 곳에서 지냈다. 이때 그는 여러 작품을 남겼다. 1882년, 니체는 정신해방의 실천적 표현으로 독일의 물질주의자 이, 러시아의 남성평등주의자 살로메와 ‘삼위일체’를 맺고 동거를 시작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이 책에는 니체의 세 가지 신념이 담겨 있었다. 첫째, 현 상태의 인간이 초인에게 추월당한다. 여기서의 초인은 몸과 영혼이 당당하게 생긴 더 고등하고 강하고 의기양양하고 유쾌한 인간을 뜻한다. 둘째, 기독교적인 도덕적 우선권이 완전히 뒤집히는 가치의 재평가가 있을 것이다. 셋째, 언젠가 일어난 적이 있는 모든일이 무하하게 주기적으로 순환하면서 또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념들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니체의 저작에서 예언적인 방식은 줄이고 논증적인 방식을 늘린 형태로 해설되었다.

3-3. 1888년은 니체가 미친듯이 글을 쓴 해였다.《반그리스도》,《바그너사건》,《우상의 황혼》등이 있다. 1990년, 그는 일생을 정신이상으로 마감했다.

니체는 20세기 유럽대륙, 특히 러시아의 문학과 독일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 20세기 후반 분석적전통의 윤리학자들은 전통도덕에 관한 니체의 맹공격에 대해 응답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과 실용주의부터 영국관념주의와 그에 대한 비판까지

1.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과 실용주의

 

1-1.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1842-1910)는 프레게보다 여섯 살 더 많았지만, 철학은 훨씬 늦게 시작했다. 그는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를 신봉한 신학자의 아들이자 유명한 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형으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국 교육을 받기도 했고, 프랑스와 독일의 학교에서 유럽교육을 받기도 했다. 화가와 의사의 갈림길에서 망설였지만 1864년 하버드 의과대학에 등록했다. 학위를 취득한 후 건강이 나빴고 조울증을 앓았으나 프랑스 철학자 르누비에(Charles Renouvier)의 저작을 읽고 회복했다. 그의 관심은 점점 경험적 심리학으로 옮겨가 1876년 처음으로 심리학 실험실을 만들었다. 심리학의 과제는 두뇌 상태를 의식의 흐름 현상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그 책이 표준적인 교과서가 되기는 했으나, 그것이 출판될 무렵 제임스는 심리학을 떠나 철학 교수가 되었다. 제임스는 과학적 세계관을 신, 자유,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과 조화시키기를 열망했다. 그는 이론적 증거를 억지로 끌어들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을 논의하면서 진리를 믿어야 할 의무가 과오를 피해야 할 의무와 비중이 같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사람들마다 각자 무엇을 신이라고 생각하든 자신을 그것과 관련 있는 존재로 이해할 때 그 사람들이 갖는 감정, 행위, 경험을 음미하려고 애썼다. 그는 신비주의 현상이나 다른 형태의 종교적 감정의 진정성과 효력이 입증되기를 기대하면서 그것들을 경험적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제임스가 미국철학의 일인자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1907년 《실용주의》 출판 덕분이었다, 그는 저작의 제목과 논지가 퍼스한테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 더할 나위없이 명료하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인지 가능한 실제적인 유형의 효과를 가졌는지를 고려하면 된다. 이와 같은 효과가 즉시 나타나건 나중에 나타나건 그 효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어쨌든 긍정적인 의의를 갖는 한, 그 당시 우리로서 그 대상에 가질 수 있는 모든 생각이다”

1-2. 그러나 퍼스의 실용주의는 의미 이론이자 인간과계에 관련된 객관적 것인 반면 제임스의 실용주의는 진리 이론이자 개인주의적이며 주관주의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퍼스는 자신의 이론이 제임스의 이론과 무관하다고 말하고 자신의 이론을 ‘프래그머티시즘(pragmaticism)’이라고 고쳐 불렀다. 제임스의 실용주의에 따르면, 관념은 그것이 우리 삶에 유익하다고 믿는 한 옳다. ‘옳음은 신념에 유리하게 좋은 것으로 판명된 모든 것을 일컫는다.’ 즉 ‘옳은 것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비평가들은 거짓을 믿는 것이 진리를 믿는 것보다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진리가 장기적인 만족과 동일시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반대했다. ‘신의 wswo에 대한 가정이 가장 넓은 의미로 만족스럽게 이릉 해낸다면, 그것은 옳다’

제임스는 자신의 이론이 객관적 실재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실재와 진리는 서로 다르다. 사물은 실재하는 것이다. 옳은 것은 과념과 신념이다. ‘실재가 옳은 것이 아니라 신념이 옳다. 그리고 신념은 실재에 대해 옳다’. 어떤 신념이 옳고 그른지를 알게 되는 것은 그 신념의 결과가 좋은지 어떤지 발견함으로써가 아니라 신념이 습관적으로 옳다 그르다고 말하는 것들의 차이점에 알기 쉬운 실용적 의미를 부여한 결과다. 관념과 실재의 대응 관계에 대한 확인이나 검증 과정을 통해서 관념을 옳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의 실용주의 체계는 어떤 실재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그 실재가 만족스럽다는 신념의 필요조건인지 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이 없어도 그 대상에 대한 신념이 만족스러울 수 있는지는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있다.

제임스는 《다원적 우주》에서 실용주의를 이용해 종교적 세계관을 옹호하였다. 그는 세상의 수많은 고통으로 인해 무한하고 절대적인 신성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하자면 초인의 인식이 능력이나 지식에 혹은 둘 모두에 한계가 있다고 믿었다. 신 역시 미래를 결정하거나 예언할 수 없으며, 세상이 더 좋아질지 나빠질지는 신의 도움 아래 인간이 행하는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

제임스는 자신의 형이상학 체계를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실용주의 프로그램은 그가 죽은 뒤 다른 사람들, 특히 듀이(John Dewey)가 이어받았다. 듀이는 교수 생활을 하면서 실용주의를 아주 특별하게 미국의 교육 분야에 적용했으며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주제에 관한 저작들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그의 변함없는 목적은 자연과학과 공학에서 그토록 성공적이었던 탐구 방법들이 인간 노력의 다른 분야들 어디까지 연장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2.영국 관념주의와 그에 대한 비판

 

2-1.그토록 굳건하게 유지되던 영국 경험주의 전통은 존 스튜어트 밀이 죽자 반발에 부딪치기 시자했다. 밀이 죽고 1년이 지난 1874년, 밸리올 칼리지의 교수인 그린(T.H.Green,1836-82)은 경험주의의 전제 가정들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상당 분량의 서문을 붙여 흄의 《인간본성론》을 출간했다. 또 머튼 칼리지의 브래들리(F.H.Bradley)는 영국 헤겔주의의 기초 고전인 《윤리학 연구》를 출간했고. 1893년에는 영국 관념주의의 완전 결정판인 《현상과 실재》를 완성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케임브리지에서는 헤겔 논리학의 방법들과 몇몇 신조들이 트리니티 칼리지의 철학자 맥타가트(J.M.E.McTaggart)가 쓴 일련의 논문을 통해 자세히 소개되었다.

제임스의 실용주의와 마찬가지로 그린의 관념주의는 어느 정도 종교적인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자연적이고 자의식적인 유일한 존재가 있으며, 실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의 활동이자 표현이다. 우리 모두는 이 초자연적인 존재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 존재의 표현인 세계의 부분들로서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가 그것을 통해 즉시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자신을 세계와 구별하는 그 자의식에 대한 약간 불완전한 상태의 분담자로서도 관련되어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관계가 도덕과 종교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브래들리와 맥타가트는 다소 간련성이 적은 기독교적인 내용의 관념주의를 배제하고, 결국 유한한 자아들의 공동체 이외의 다른 어떤 절대자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실재가 본질상 완전히 초자연적이라는 것은 영국 관념주의자들의 공통점이었다. 그들은 정신과 물질이 존재의 동등하고 독자적인 두 영역이라는 이원론적 관념을 거부했다. 그러나 브래들리의 ‘일원론’은 또 다른 근본적인 양상을 가졌다. 그는 실재가 전체상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진리성은 개별적인 원자 명제들의 속성이 아니라, 오로지 전체로서의 존재에 관한 판단들의 속성이다. 그는 《현상과 실재》엥서 우즈를 서로 아무 관련 없는 독립적 실제들의 복합체라고 생각하면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우주의 개개의 모든 것은 개개의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있다. 바로 그 본질로 인해 내적으로 관련되어있다.

2-2. 관념주의의 우월함은 20세기 초 케임브리지의 젊은 두 철학자 무어(G. E.Moore,1873-1958)와 러셀(Bertrand Russel)에 의해 결정적으로 의문시되었다. 무어는   ‘판단의 본성(The Nature  of   Judgement      ,1899)’에서 실재가 정신의 창조물이라는 근본적인 주장을 거부하는 대신 플라톤의 실재론, 즉 개념은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실재이며, 세계는 서로 결합하여 옳은 명제가 되는 그런 개념들로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관념주의 논박’(The Refutation of Idealism)에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거부했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과 온전히 다른 어떤 것이며, 우리의 지식 대상은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별개이다. 또한 물질적 대상들은 우리가 직접 지각하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관념주의에 대한 무어의 저항은 러셀에게 충격을 주었고 러셀은 잔디가 실제로 푸르다는 생각에 벅찬 해방감을 느꼈다. 무어와 마찬가지로 러셀은 관념주의를 단념하는 대신 보편자에 대한 플라톤의 신조, 즉 개개의 모든 낱말은 특수한 것이건 일반적인 것이건 객관적 실재를 나타낸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벤담의 공리주의부터 존 스튜어트 밀의 발전

1.벤담의 공리주의

1-1. 영국은 유럽 전반을 뒤흔든 극심한 체계 격변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벗어났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죽은 뒤 오랫동안 도덕적, 정치적 사고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한 권의 책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1789년 잉글랜드에서 발간되었다. 그것은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이었고, 공리주의라고 알려진 학파의 창립현장이 되었다.

벤담은 1748년에 런던의 유력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몸집이 아주 작고 책을 좋아하며 조숙했던 그는 7살에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가고, 15살에 옥스퍼드 퀸스 칼리지를 졸업했다. 21살에 법정 변호사가 되었으나, 그는 당시의 법적 관행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유명한 법학자 블랙스턴(William Blackstone)의 강의를 들을 때 이미 당시의 법률 이론을 역겨워했다. 그는 영국의 법제도가 번거롭고 인위적이고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정당한 법의 원리에 비추어 밑바닥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믿었다.

 

1-2. 벤담은 그런 근본적인 원리를 생각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흄(David Hume) 덕분이라고 했다. 《인간본성론》을 읽고 비로소 진실에 눈을 뜨게 되었고, 공리성이야말로 모든 덕의 시금석이자 정의의 유일한 기원이라고 믿게 되었다. 벤담은 국교 반대파 화하자 프리스틀리의 논문에 근거해 시민들의 최대 행복이 국정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의미로 공리성 원리를 해석했다. 즉 도덕성의 진정한 표준과 법 제정의 참된 목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stes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에 있었다.

벤담은 1770년대 《영국법 논평》에 대한 비판 작업을 하면서 일부로 사회계약 개념을 공격하는 《정부에 관한 소론》을 출간했다. 동시에 그는 이탈리아 형법학자 베카리아의 착상을 바탕으로 처벌의 목적과 한계에 대한 분석해 공리성의 원리와 더불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의 핵심을 이루었다. 벤담은 《정부에 관한 소론》에서 ‘올바름과 그릇됨의 척도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라는 원리를 맨 처음 공표하였다,

 

1-3. 그는 1785년부터 1787년까지 유럽 횡단 여행을 하면서 기발한 형태의 감옥인 팬옵티콘(Panopticon)을 생각해냈다. 팬옵티콘은 교도관이 수감자를 완벽하게 감시할 수 있는 중앙 관측소가 있는 원형 건물이다. 그는 시범 감옥을 세우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정부를 설득했으나 조지 3세의 사적인 개입 때문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법 이론과 법적 관행에 관한 벤담의 관심은 당초 주목 대상이었던 형법을 넘어 크게 확대되었다, 민법의 혼란스러움에 격분한 벤담은 《법 일반에 대하여》라는 긴 논문을 썼다. 빈민 구제법에 대해 벤담은 원형 감옥 체제가 ‘극빈자’를 위한 구제소 역할을 하도록 건립되어야하며 구제소는 입소자가 자신들의 생활 유지비를 벌기 위해 노동할 경우 배당금을 지급하는 국영 합자회사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1-4. 1808년 벤담은 때마침 기념비적인 저서 《인도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스코틀랜드 철학자 제임스 밀(James Mill)과 친구가 됐다. 밀에게는 비범한 아들 존 스튜어트가 있었는데, 벤담이 바로 그 영재의 교육을 도와주었다, 법정에서 몇 년간 증거의 적합성 검사 업무를 보던 그는 일정 부분 밀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법적 절차와 관행을 비판하기보다는 정치를 개혁하고 헌법을 개정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의회 개혁론》을 쓰고 후에 근본적인 의회 개혁 초안이 상정되었다. 벤담은 수년간 헌법 초안 작업에 몰두했으나 죽을 때까지 마치지 못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무렵, 영국의 현행 헌법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부자들의 음모를 감추는 장막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군주제와 상원을 폐지하고, 보통 선거권에 의해 선출되는 연례 의회를 도입하고 영국 국교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벤담의 입헌적이고 진보적인 제안들은 영국을 넘어 다른 곳까지 확산되었다. 1811년에 벤담은 미국의 헌법 초안을 작성해야했던 제임스 메디슨에게 자신의 구상을 제안했으며 한때 자신의 헌법 체계가 콜롬비아 대통령인 시몬 볼리바르에 의해 중남미에서 시행되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1-5. 벤담의 이상을 받아들인 ‘철학적 급진주의자’ 그룹은 공리주의자의 쟁점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1823년 《웨스트민트터 리뷰》를 창간했다. 그들은 열렬한 교육 개혁 지지자였는데 벤담은 그리스 어와 라틴 어보다는 과학과 기술을 강조하는 중등 교육 과정을 고안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1823년에 열게 되었다. 이곳은 영구에서 종교 시험을 치르지 않고 입학할 수 있는 최초의 종합 대학 수준의 대학이었다, 1832년 벤담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유언에 따라 말든 ‘실물 초상’은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벤담의 노고에 더 알맞은 기념비는 의원 선거권을 널리 확대한 ‘대개혁 법안’이었다.

벤담을 잘 아는 사람들, 심지어는 그를 열렬히 추종했던 사람들조차도 이구동성으로 그의 지적능력은 정말 특출하고 대단하지만 감정에는 결함이 있는 편협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밀은 ‘벤담의 지식이 전적으로 경험주의적이기는 하나 경험이 매우 부족한 사람의 경험주의자였다’고 말했다. 밀이 보기에 벤담은 결코 원숙한 어른이 아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어린애였다’

 2.존 스튜어트 밀의 발전

2-1.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에게는 소년 시절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엄격한 가정교육으로 그는 학교에 다니지도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 세 살에 그리스 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열두 살에 플라톤의 원전을 다 읽었다. 밀이 지난날을 되돌아볼 때 그런 특별 교육의 가장 값진 점은 아버지가 내 스스로 생각하도록 놓아두었다는 것이었다. ‘생각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면 어느 것이든 내가 그것을 스스로 이해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지 않는 한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밀은 그런 교육이 자신을 ‘단순한 추론 기계’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신경쇠약에 시달렸고 가장 효율적인 개혁 작업조차 아주 무의미하게 보일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밀은 1828년 가을 워즈워드의 시를 읽으면서 스스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워즈워드의 시는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벤담의 학문체계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던 인생의 다양한 면들을 깨닫게 했다. 그는 위기를 극복한 뒤, 벤담을 다시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으나 벤담의 학문체계가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 모두 수정, 보완될 필요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밀의 사상은 영국 시인들 그중 콜리지(Samuel Tylor Coleridge)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게 되었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생시몽(Saint-Simon,1760-1825)의 초기 사회주의와 콩트(August Comte,1789-1857)의 초기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밀은 사회주의 프로그램에 대해 확신하지는 않았으나, 사유 재산 제도와 자유 시장 제도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생시몽주의자들의 이상주의에 찬사를 보냈고 그들의 많은 원칙들, 특히 완전한 남녀평등에 관한 그들의 주장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밀이 콩트와 생시몽주의자들한테서 얻은 것은 진보(progress)에 관한 견해였다. 밀은 콩트의 유기적 시기와 그 다음 시기에 비판적이고 파괴적인 시기가 있다고 보았으며, 자신이 그와 같은 시기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판적 시기의 최선의 성질과 유기적 시기의 최선의 성절이 결합할 미래이다. 그 미래에는 아무런 구속이 없는 사상의 자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어떤 식의 행위든 개인적인 행위의 무한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 유용한 것과 유해한 것에 관한 확신 역시 어린 시절의 고육과 일반적인 공감대 형성을 통해 마음속 깊이 새겨질 것이다.’

 

2-2. 밀은 젊었을 때부터 글을 많이 쓴 사람이기는 하나 30대 말까지 책을 한권도 출판하지 않았다. 1843년에 처음으로 책을 출판했는데, 곧바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고 지속적인 관ㅅ미의 대상이 되었다. 바로 여섯 권으로 된 《논리학의 체계》다. 밀은 영국의 경험주의 전통을 19세기 현재로 갱신하려는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이 책 안에서 폭넓고 다양한 주제를 통합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정신 자체에 대해서 타인의 정신이 실존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철학자들에게 특히 어려운 문제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경험주의자들과 달리 형식 논리학과 과학의 방법론에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

밀은 추리에 관한 이론을 자세히 제시했는데, 추리를 실질적 추리(real inference)와 언어적 추리(verbal inference)로 나누었다. 정언적 추리(syllogistic inference)는 어떤 새로운 지식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적 추리다. 반면 실질적 추리는 귀납적이기 때문에 특수사례에서 일반 법칙을 도출하지 않는다. 밀은 귀납적인 과학적 연구를 안내하는 다섯 가지 실험 규칙 혹은 규준을 제시했다. 그는 그와 같은 규준들을 사용하게 되면 전혀 선천적 진리에 의존하지 않고 경험적 탐구를 진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밀은 경험주의를 현대적으로 제시하면서 전례 없는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수학의 진리성은 우리 지식의 가장 확실한 대상에 속하는 것 같은데도 경험의 결과라기보다 경험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경험주의자들에게 늘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밀은 산술학, 기하학이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경험적 가설들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후대 철학자들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 주장은 《논리학의 체계》에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목적이란 정신 외적인 진리들은 경험과 상관없이 직관(intuition)에 의해 알려질 수 있다는 그 관념을 논박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두 철학파 사이의 차이, 직관에 대한 차이와 경험 및 연합에 대한 차이는 단순한 추상적 사변의 문제가 아니다. 그 차이는 수많은 실질적 귀결들로 나타나고, 진보의 시대에 가장 커다란 온갖 실질적인 의견 차이의 바탕이 되었다.’

 

2-3. 밀이 이런 지적 전투에서 벌인 최대의 공격적 캠페인은 그의 말기 저작들 가운데 하나인 《윌리엄 해밀턴 경의 철학에 대한 고찰》에서 수행되었다. 해밀턴 경은 애든버러에서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를 역임한 개혁가인데 그는 그의 강의에서 리드의 상식철학(common-sense philosophy)을 새롭고 개선된 형태로 드러내고자 했다. 밀은 그의 책이 발간되자 온갖 형태의 직관주의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퍼부어 댈 이상적인 표적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내용에 비해 과분한 명성을 얻었으나 오늘날에는 그다지 연구되지 않는다.

밀은 1851년 20여 년간 친밀하게 지낸 해리엇과 결혼했는데 그는 그녀가 자신의 소논문 《자유론》과 《여성의 종속》의 공동 저자로 간주되어야한다고 했다, 《자유론》은 정부가 개인의 자유에 대해 간섭할 수 있는 한계를 그으려고 했는데 핵심 원리는 다음과 같다.

 

‘인류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사회 구성원 누군가에 대해 행동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보호가 목적일 경우에만 허용된다. 문명화된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그 목적이 오로지 타인에 대한 피해를 방지하려는 것일 경우에만 정당화 된다. 물질적이든 도덕적이든 자기 자신의 이익은 힘을 행사할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밀에 의하면,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절대군주이다. 《자유론》은 의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아주 명백하게 옹호하기 위해 이 원리를 여러 분야에 적용한다. 《여성의 종속》은 밀이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고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오랫동안 전개한 여성 운동의 정점이었다. 그는 1859년 《의회개혁사상》에서 ‘세금징수원이 전혀 하지 않는 차별을 선거 사무원이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모든 주택 거주자에게 남자든 여자든 투표할 권리를 주어야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남녀평등 문제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사건과 선거 개혁에 관여했다. 영국 정부의 아일랜드 강압정책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토지 소유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소논문을 출간했다. 또 그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의회 선거의 비례 대표제를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861년 《대의정치에 대한 고찰》로 출판되었다.

 

2-4. 밀의 자유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그가 죽은 뒤 체계적인 철학자로서의 명성은 급속하게 시들었다.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영국을 뒤덮은 관념주의 물결은 밀의 경험주의를 집어삼켜 버렸다. 그러나 공리주의 전통은 시지윅(Henry Sidgwick)에 의해 중단 없이 살아남았다.

시지윅은 밀의 중요한 두 원리, 심리적 쾌락주의(모든 사람은 그들 자신의 행복의 추구해야한다)와 윤리적 쾌락주의(모든 사람은 일반적인 행복을 추구해야만 한다) 사이에 부정합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실천 이성의 이중성’을 해결하려 했다. 시지윅은 사고 과정에서 심리적 쾌락주의 원리를 포기하고, 사람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선을 추구할 의무를 갖는다는 합리적 이기주의의 윤리적 원리로 대체했다.

그의 학설은 공리주의를 직관주의와 결함한 형태로 도덕에 대한 상식적 접근으로 원리를 간주했다. 하지만 그는 상식의 전형적인 직관은 아주 명확하고 구체적이지만 공리주의 도덕의 기초가 되는 직관은 다소 추상적이라고 믿었다. 예컨대 미래의 선이 현재의 선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의 관점에서 볼 때 한 사람의 선은 다른 사람의 선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공리주의의 직관을 합리적 이기주의 직관과 일치시키는 것인데 시지윅은 나의 행복과 일반적인 행복 사이의 상충을 일상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대부분 사람들이 개인의 이익과 의무를 신과 연관 짓는데 자신은 신에 호소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합리적 행위의 완벽한 이상을 고안해 내려는 인간 지성의 장기적인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그리고 마르크스

Ⅰ.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

1-1. 생애와 시대적 배경

1-1-1. 벤담은 공리성의 원리를 제시할 때, 그것을 행복을 줄이려 한 경우에 한해 행위의 가치가 인정된다는 금욕주의 원리와 비교했다. 벤담의 주요 비교대상은 기독교 도덕이었으나, 정작 기독교인들에게 금욕주의의 원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든 철학자들 가운데 금욕주의의 원리를 제일 용의주도하게 주장한 사람은 무신론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였다.

1-1-2. 쇼펜하우어는 단치히 상인의 아들로 1803년까지 아버지의 사업을 익히며 성장했다. 그는 의대생의 공부를 하다가 방향을 바꿔 1810년 괴팅겐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플라톤과 칸트를 좋아했지만, 칸트의 제자인 피히테는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1811년 베를린에서 피히테의 강의를 듣고 그의 민족주의를 혐오했다. 쇼펜하우어는 박사학위 논문이었던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을 쓰기 위해 나폴레옹에 대한 프로이센의 투쟁에 가담하지 않고 빠져나왔다.

1-2. 사상

1-2-1. 쇼펜하우어는 1814~1818년에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The World as Will and Idea)》를 썼다. 그는 네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에서는 관념(Idea)으로서의 세계에, 두 번째와 네 번째는 의지(Will)로서의 세계에 관해 썼다. 그가 말하는 ‘관념’(혹은 ‘표상(representation)’으로도 번역된다)은 개념이 아니라, 로크와 버클리가 지칭한 구체적인 경험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세계는 오로지 관념, 의식과 관련해서만 존재한다(‘세계는 나의 관념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몸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지각을 하고, 다른 대상들은 그것들의 상호 영향을 통해 알려진다.

1-2-2. 관념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설명은 칸트와 별반 다른 것이 없지만, 세계를 ‘의지’로 표현한 부분은 매우 독창적이다. 그는 관성 법칙이나 중력 법칙으로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이지만, 과학은 관성이나 중력과 같은 힘의 내적 본성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은 인식주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나의 신체는 스스로 의식하는 능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데, 오로지 이것만이 사물들의 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준다. 즉 쇼펜하우어는 ‘수수께끼의 답은 개인으로 여겨지는 인식 주체에게 주어져 있는 의지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인식 주체 자신의 실존에 대한 실마리를 주며, 인식 주체의 존재와 행위와 운동의 내적 구조를 보여준다(WWI 100)’고 말했다. 모든 대상의 내적 본성은 의지이다. 이 의지는 중력에서 자력에 이르기까지 많은 등급이 있는데, 중력과 자력보다 더 높은 등급만이 지식과 자기 결정력을 동반한다. 칸트도 의지를 추구하긴 했으나, 이는 쓸모가 없었던 물자체(thing-in-itself)의 참모습이다.

1-2-3. 쇼펜하우어는 무생물이 동기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으면서도, 왜 무생물의 자연적 경향성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욕망(appetite)’이나 뉴턴이 말한 ‘힘’이라 하지 않고 ‘의지’라고 했을까? 그는 힘을 의지로 설명할 경우, 그것은 조금 알려진 것을 많이 알려진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는 세계의 내적 본성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를 의식함으로써 주어진다고 보았다.

1-2-4. 그러나 의지 자체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에 따르면, 모든 의지는 욕구를 일으키고, 욕구는 결핍을 만들고, 결핍은 고통을 유발한다. 즉, 어떤 욕구가 충족되면 그 후에 또 다른 욕구가 생긴다. 우리의 의식이 의지로 가득 차게 되면, 우리는 결코 행복하거나 평화로울 수 없다. 최선의 바람은 고통과 권태가 번갈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1-2-5. 쇼펜하우어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책에서 의지의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두 가지 방식을 제시했다. 첫 번째 방식은 예술, 즉 미에 대한 순수하고 사심 없는 관조(contemplation)를 통한 탈출이고, 두 번째 방식은 단념(renunciation)을 통한 탈출이다. 삶에 대한 의지를 단념해야만 의지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삶에 대한 의지는 자살이 아닌 금욕주의에 의해 단념된다. 진정한 도덕적 진보를 위해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악함과, 우리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교활함을 버려야 한다. 또한 타인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정의로움과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선량함마저도 버려야한다. 즉 우리는 미덕을 넘어 금욕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궁극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는 순결, 결핍, 절제를 받아들여야 하며, 죽음이 악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1-2-6. 쇼펜하우어는 기독교와 힌두교, 불교의 성인들을 자기희생의 모범으로 여겼으나, 그 자신의 금욕주의에 대한 입장은 어떠한 종교적 전제에 의거해있지 않고, 대부분의 성인의 일대기가 미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개개의 주체와 대상은 단순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인도철학의 마야사상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다.

1-2-7.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는 직접적인 영향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1820년에 헤겔이 있는 베를린 대학으로 가서 강의를 했는데, 그는 헤겔을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강의를 일부러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개설했으나 그의 학생을 빼앗아오지 못했다. 그는 헤겔을 ‘아무 사상도 없는 지루한 이야기의 수면효과’나 ‘정말 따분하고 형편없는 허풍선’이라고 하며 조롱했다.

 

1-2-8. 쇼펜하우어는 1839년에 논문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로 ‘노르웨이 인 상’을 받기 전까지 그의 천재성을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이 논문과 윤리학의 기초를 다룬 다른 논문을 묶어 1841년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1844년에는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 증보판을, 1851년에는 《수필과 이삭줍기》라는 수필집을 냈다. 그의 저작들은 일반 사람들이 그의 부적절한 의견/정치적으로 잘못된 의견을 유쾌 또는 불쾌하게 음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치 있고 명료한 문체의 진가를 맛볼 수 있었다.

 

1-2-9.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을 비롯한 대륙의 실패한 혁명이 쇼펜하우어의 60번째 생일 직후에 일어났는데, 그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정치적 시도에 환멸을 느끼던 세대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비난한 독일 대학 기관의 환심을 샀고, 비열한 망상이라 맹비난했던 그 세상의 안락함을 누렸다. 그 자신의 삶이 그가 찬양했던 금욕주의적 이상과 완전히 달랐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이 실제로 지니고 있는 덕목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윤리학자에 대한 희한한 요구이다’라고 대답할 것 같다.

 

Ⅱ. 키르케고르의 도덕과 종교

2-1. 생애와 시대배경

2-1-1. 쇼펜하우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의 증보판을 준비하던 때,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철학자는 전혀 다른 형이상학적 기초 위의 금욕주의와 비슷한 요구 사항을 제시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는 1813년 비극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였다. 그의 어머니와 여섯 남매 중 다섯이 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양치기 소년일 때 신을 모독하는 말을 해서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다. 키르케고르는 1830년에 코펜하겐 대학에 신학을 공부하러 갔고, 쇼펜하우어처럼 헤겔 철학에 익숙해지면서 헤겔 철학을 혐오하게 됐다. 그는 신학은 싫어했지만,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신비로운 경험을 동반한 종교적 변환을 겪었다. 그는 1840년 올센과 약혼했으나, 자기 가족의 이력 때문에 결혼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일 년 뒤 파혼한다. 그 후 그는 자신을 철학자로서의 소명을 가진 사람으로 여겼다.

2-2. 사상

2-2-1. 키르케고르는 1841년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에 관한 학위 논문을 완성한 후 베를린으로 가 셸링의 강의를 들었다. 독일 관념주의에 대한 반감이 커졌는데, 그 이유는 쇼펜하우어와 달리 독일 관념주의는 구체적인 개인을 과소평가한 데 있었다. 그는 쇼펜하우어처럼 단념으로 종결되는 정신적 이력을 단계별로 묘사했으나, 정신적 이력의 단계가 고차적일수록 개체성은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독특한 개성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고 보았다.

2-2-2. 키르케고르의 학설은 1843~1846년에 여러 필명으로 출간된 일련의 저작들에서 설명이 나온다. 1843년의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는 두 가지 인생관, 즉 심미적 인생관과 도덕적 인생관을 제시한다. 군중의 일원이 개인이라는 출발점에서 보면, 심미적 인생은 자기실현을 향한 첫 번째 단계이다. 심미적인 사람은 맛과 멋(taste and elegance)이 있는 쾌락을 추구한다. 심미적인 사람은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이든 즉각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잡으려는 선택을 제한하는 것에 대해 결코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본질적 특성이 있다. 이런 사람은 시간이 지난 후 이러한 자유에 대한 자신의 요구가 현실적으로 자기 능력을 제한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즉 그는 자신을 사회제도 안에 포함하여 그 제도가 부과하는 의무를 수용해야하는 도덕적 단계로 옮아간다. 그러나 아무리 도덕 법칙을 완수하려 해도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2-2-3. 심미적 인생의 방식과 도덕적 인생의 방식 둘 다 종교적인 영역으로 상승하여 그 한계를 넘어야 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그가 다른 필명으로 쓴 다른 저작들 – ⟪공포와 전율⟫(1834년), ⟪분노의 개념⟫(1844년), ⟪삶의 방식의 단계⟫(1845년)에서 다양하게 전달된다. 이러한 글들은 1846년의 ⟪철학적 단편에 대한 비학문적 후기⟫를 출간하며 최고조에 달했다. 이 책의 메시지는 헤겔 신봉자가 말했듯 신앙은 객관적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2-2-4. 도덕적 영역에서 종교적 영역으로 옮아가는 과정은 ⟪공포와 전율⟫에서 신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명령한 성경 이야기를 통해 생생히 묘사되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도덕적 영웅은 보편적 도덕률을 위해 자기 인생을 바쳤으나, 아브라함은 특수 신의 명령 때문에 도덕률을 위반했다. 키르케고르는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도덕적 명령을 위반한 아브라함의 행위를 ‘도덕에 대한 목적론적 유예’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개인이 도덕률을 위반하는 것을 신의 소명으로 여긴다면, 이것이 그냥 유혹인지 진짜 신의 명령인지 분간할 수 없다. 혼자만으로는 그것을 알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2-2-5. 키르케고르는 1848년 두 번째 신비로운 경험 후, 글을 좀 더 쉽게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순수한 마음은 한 가지만 바라는 것이다⟫, ⟪사랑의 행위⟫와 같은 다수의 기독교 담론과 책들을 자기 이름으로 펴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는 다시 필명을 사용하며 절망의 유일한 대안으로, 진정한 실존을 실현하기 위해 신앙을 필요조건으로 제시했다.

2-2-6. 키르케고르의 후반부 인생은 이름만 기독교라 여긴 덴마크 국교회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그는 민스터(J.P.Mynster) 대주교를 아주 비판했고, 1854년 그가 죽은 후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책을 냈다. 키르케고르는 교권에 반대하는 소책자 ⟪순간⟫을 창간하고 지원하고, 9호까지 발간한 후, 거리에서 쓰러져 몇 주 동안 병을 앓다가 1855년 11월에 숨을 거둔다. 그 자신이 원하지 않았고 조카도 반대했는데도 그의 장례는 교회에서 치러졌다.

Ⅲ. 변증적 물질주의(마르크스)

3-1. 생애와 시대배경

3-1-1.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 모두 헤겔의 학설에 대한 반작용에서 철학적 추진력을 얻었다. 그러나 헤겔주의를 가장 격렬하고 강력하게 반대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Karl Marx)였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임무를 ‘헤겔을 뒤짚어 엎는 것’이라 했다. 헤겔의 변증적 관념주의(dialectical idealism)는 변증적 물질주의(dialectical materialism)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3-1-2.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1818년 아들이 태어나기 전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한 진보적인 유대교인이었다. 마르크스는 청소년 시절 트리어에서 학교를 다녔고, 본 대학에서 1년간 법학을 공부하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그 후 5년 동안 베를린 대학을 다니며 진지하게 살았는데, 시 쓰기를 좋아했으며 법학 대신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가 베를린에 갔을 때 헤겔은 이미 죽었지만,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가 활동하고 바우어(Bruno Bauer)가 이끌던 청년헤겔학파라는 좌파단체와 헤겔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는 헤겔과 바우어에게 역사를 변증적 과정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 역사의 각 단계는 기하학적 증명 과정과 아주 비슷한 과정으로 기초적인 논리적 원리나 형이상학적 원리에 따라 앞선 단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3-2. 사상

3-2-1. 청년헤겔학파는 사람들이 자기 존재의 진정한 본질적 요소인데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보는 상태인, 헤겔의 소외 개념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헤겔 자신이 강조한 소외의 형태는 어떤 단일한 정신의 발현인 개인들이 서로를 통일체의 구성요소로 보지 않고 적대적인 경쟁관계로 보는 것이다. 바우어와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자신의 삶과 의식을 비실재적인 신에게 맡기는 종교를 최고의 소외 형태로 간주했다. 포이어바흐는 ‘종교가 인간을 그 자신과 분리시킨다’면서 ‘신은 인간이 자신과 적대자로 맞서게 한다(W vi 41)고 말했다.

3-2-2. 헤겔과 포이어바흐에게 종교는 허위의식이었다. 헤겔은 이 허위의식이 종교적 신화를 관념주의 형이상학으로 변형함으로써 치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이어바흐에게는 헤겔주의 자체가 소외의 한 형태였다. 즉 종교는 제거되어야할 것이지 변형될 것이 아니며, 사회적 인간의 생활에 대한 실증적인 이해로 대체되어야 했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일종의 허위의식인 점은 동의했지만, 헤겔과 포이어바흐가 소외에 대해 터무니없는 처방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헤겔의 형이상학에서 인간은 자신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관망하기만 하는 존재였다. 반면 포이어바흐는 인간의 숭배 대상 가운데 인간을 소외시킨 실체가 오로지 신만이 아닌 점을 깨닫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사유 재산이 국가의 기반이 되는 한 국가 역시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소외시킨다고 보았다. 소외는 철학적 반성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철학자는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TF 11)’고 말하며, 사회의 대변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3-2-3.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에 관한 논문으로 1842년 예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청년헤겔학파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쾰른에서 급진파 신문 <라인신문>을 편집하면서 정치 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지낸 남작의 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1843년에 결혼하여 그녀가 죽을 때까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다. 마르크스가 결혼한 직후 러시아 황제의 압력으로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라인신문>은 폐간된다.

3-2-4. 마르크스는 파리로 이사해 정치경제학에 관한 영국 고전들을 통해 자신이 갈 길을 확인하였고, 많은 급진파 친구들을 만나며 신문 기자로써 추구해야 할 다른 일거리를 발견한다. 이 친구들 중 엥겔스(Friedrich Engels)와 만나 함께 ‘공산주의’ 이론, 즉 공동 소유를 위한 사유 재산의 폐지 이론을 세우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같이 연구한 ⟪독일의 이데올로기⟫은 마르크스가 반체제적 신문기자라는 이유로 파리에서 쫓겨난 뒤 이주한 브뤼셀에서 완성된다.

3-2-5. 이 책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물질주의적 역사 개념을 제시한다. 삶이 의식을 결정하지 의식이 삶을 결정하지 않는다. 역사의 근본적인 본성은 경제적 생산 과정이고, 그 과정을 이해하려면 경제적 생산의 물질적 조건을 이해해야 한다. 다양한 생산 방식은 사회 계급의 형성과 계급들 사이의 투쟁, 그리고 여러 형태의 정치 생활과 법률과 윤리를 초래한다. 예를 들면 맷돌은 봉건 영주가 다스리는 사회를 낳고, 증기 방앗간은 산업 자본가가 지배하는 사회를 가져온다. 변증적 과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공산주의의 등장을 위해 여러 단계를 거치며 세계를 끌어간다.

3-2-6. ⟪독일의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가 죽은 후에도 한참 출판되지 않았으나, 그 책의 아이디어는 1847년의 ⟪철학의 빈곤⟫에 집약되어 있다. 물질주의적 역사개념을 더 널리 알린 것은 엥겔스의 초안을 바탕으로 1848년에 발행한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이었다. 이것은 새로 설립된 ‘공산주의 동맹’의 원리와 이상을 개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언⟫의 메시지는 엥겔스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인류의 전 역사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의 투쟁과 경쟁의 역사였다. 온갖 착취와 억압, 계급 차별과 계급 투쟁으로부터 사회 전체를 동시에 완전히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이제 피착취 계급과 피지배 계급(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착취 계급과 지배 계급(부르주아 계급)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쟁취할 수 없는 그런 단계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계급 투쟁의 역사는 일련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CM 48)”

⟪선언⟫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마지막 문장이다. ‘공산주의 혁명에서 지배 계급들이 벌벌 떨게 하자.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사슬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지배할 세상이 온다. 온 나라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3-2-7. ⟪선언⟫이 발간된 해에, 파리, 베를린, 로마 등 여러 도시에서 무장 폭동이 일어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가 무상 교육 제도를 수립하고 운수업과 은행업을 국유화하며, 누진 소득세를 부과하도록 혁명가들을 촉구하기 위해 독일로 잠깐 돌아왔다. 마르크스는 혁명 실패한 후 쾰른에서 두 번 재판을 받고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프로이센 영토에서 추방당한다. 파리로 돌아와서도 추방당한 그는 남은 생애 런던에서 빈곤에 허덕였는데, 그의 아이 여섯 중 셋이 굶어 죽었다.

3-2-8. 마르크스는 런던에 살며 하루에 열 시간씩 연구하며 변증적 물질주의 이론을 전개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1857~1858년에 지난 10년간의 경제적 견해를 정리해 일련의 비망록을 작성했는데, 이 비망록을 기초로 하여 1859년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집필했다. 그 저작의 서문은 물질주의적 역사 이론에 대한 간결하고도 권위적인 진술을 담고 있다.

3-2-9.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이론과 실제를 결합시키려 평생 노력했다. 그는 1864년에 ‘국제 노동자협회의 창립을 도왔으나, 그 단체는 내부 분쟁을 겪고 파리의 야만적인 폭동을 지지한 탓에 평판이 나빠져 1876년에 해산된다.

3-2-10. 마르크스의 저술활동은 역사 과정이 어떻게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좌우됐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 ⟪자본론(Capital)⟫에서 최고조를 달한다. 이 책의 첫 번째 권은 18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되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권은 1883년 마르크스가 죽었을 때 출판되지 않은 채로 있다가 엥겔스에 의해 사후 유작으로 출판된다. 그는 하이게이트 묘지의 아내 곁에 묻혔다.

3-2-11. 마르크스의 거대한 저작의 기본 주장은, 자본주의 제도가 최종 위기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본성상 노동 계급의 착취를 필요로 한다. 모든 생산품의 가치는 생산품에 투여된 노동의 총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생산품의 실제 값보다 더 적게 지불해서 가치의 일부를 착취한다. 기술이 발달하면 동시에 노동자의 생산성이 향상됨에 따라 노동에 의해 산출된 부가 갈수록 자본가에게 쌓여간다. 이 착취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느끼는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그 때 자본주의 제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로 대체될 것이다. 그 독재 체제는 사유 재산을 폐지하고 생산 수단이 중앙 정부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사회주의 국가를 도입하게 된다. 그 후 사회주의 국가는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되는 공산주의 사회로 대체될 것이다.

3-2-12.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이어 보편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그가 죽은 후 역사에서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의 이론들은 본질상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고 정치적이었다. 바로 그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이론들은 성공과 실패 두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사건들이 경제적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잘못을 범한다. 마르크스주의 유형의 사회주의를 겪은 나라들을 보면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과 같은 개인들이 권력을 휘둘렀는데, 이는 오로지 비인격적 힘만이 역사를 구현할 수 있다는 이론이 거짓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적 요인들이 정치와 문화에 미치는 여향을 부인하는 역사가나 역사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3-2-13. ⟪공산당 선언⟫의 제안들을 150년쯤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면 폭정에 의해서만 집행되는 성급하고 가혹한 방법들 – 예를 들어 상속의 폐지와 강제적인 농업 노동, 선진국들이 현재 당연시 여기는 누진 소득세법, 보통 교육과 같은 제도들, 그리고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채택해 성공을 거둔 철도와 은행의 국유화같은 실험들이 뒤섞여 있음을 알게된다. 마르크스는 예언자로서는 신뢰를 얻지 못했지만, 그의 철학은 의식이 삶을 결정짓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 가장 설득력있게 논박했다. 그가 죽고 난 후,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는 과학적 이론이 아닌 정치적 행동주의(activism)에 대한 영감과 정치 체제에 대한 지침으로 여겨지는 그의 관념체계에게서 좋든 나쁘든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