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hor Archives: 선식

죄 은총 그리고 자유

 

1.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는 16세기 철학자로 루터와 대립적 관계에 있었다. 그 대립의 주된 이유는 루터 의 자유 의지에 대한 견해에서 비롯하였다. 루터는 자유 의지가 실재가 없는 것이며 허구의 것이라 주장하였고 그에 대한 근거로 인간이 선악의 계획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능력인 것을 들었다.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론>>이라는 저술에서 구약과 신약 성서와 다양한 문헌을 인용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를 지님을 증명해보이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선악을 자유 의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성서의 모든 유의미한 내용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고 주장 하였다. 하지만 철학적 관점에서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스콜라 철학 시대의 거의 상식으로 통했던 견해만 반복할 뿐 더 진전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스콜라 철학자들처럼 신의 예지가 우연인지 필연적인지 탐구하는 것이 종교와 무관한 호기심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콜라 철학이 보이는 미묘함과 난해함을 혐오하는 태도를 보였었다.

2.루터, 모어

루터는 에라스무스, 모어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자유 의지에 관하여 에라스무스와 반대되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앞서 언급했듯이 자유 의지를 허구로 보고 신의 예지가 필연적이기에 완전하고 불변하는 신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을 계획하고 행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사건에 대한 필연성을 인정하지만 필연성의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는데 영원불변의 필연성과 강제적 필연성이다. 이 두 가지의 필연성이 뜻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는 은총과 같은 영원불변의 필연성에 지배되지만 강제성에 의하여 지배되지 않는데 이는 신이나 사탄이 인간에게 강제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의지는 영원불변의 필연성에 의해 신 혹은 사탄에 의하여 조종될 뿐 신이나 사탄에 대한 선택을 자발적으로 하진 못한다. 나아가 그는 자유 의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고 의지의 자발성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유 의지라는 용어의 의미를 보인다는 점에 동의한다. 루터의 주된 관심은 저주와 구원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문제에서의 자유 의지의 부정에 있다. 모어는 루터의 추종자이자 성서번역가인 틴들과의 논쟁에서 비롯해 자유 의지 논쟁에 끼어들게 된다. 그는 루터의 결정론에 반대하면서 운명에 관한 스토아학파의 논의를 사용한다. 이러한 모어와 루터의 논쟁과 같은 자유와 결정론에 관한 논쟁은 고, 중세철학의 상식에 가까운 논증을 반복하는 수준에 그치며 인문주의 교육에 부정적 측면을 보여주었다. 또한 서로를 모국어로 거칠게 공격했던 모어와 루터의 논쟁에서 인문주의자들의 논쟁에서 드러나는 호전적인 관행이 종교 개혁자들의 분리를 강화한 요인들 중 하나가 되는 역할을 하였다.

 

 

스콜라 철학자들: 12세기에서 르네상스까지 그로스테스트에서 아퀴나스까지

 

1. 시대적 상황

12세기에 등장한 헌신적 번역가들은 다양한 철학자들 이상으로 철학에 큰 기여를 하였다. 12세기 초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은 <<범주론>>과 <<명제론>>뿐 이었는데 다른 저술들의 번역이 발견되고 자코모가 <<분석론 후서>>를 번역하여 오르가논의 라틴어 번역이 완성되었다. 또한 12세기 중반 자코모가 <<자연학>> <<영혼에 관하여>> 등의 저술을 번역하였다. 12세기 후반 아랍어로 쓰인 철학 원전들이 번역되었고 뛰어난 이슬람과 유대 철학자들(알 킨디 알 파라비 알 가잘리 이븐 시나 등)의 저술들이 번역되었다. 번역에 관해 다른 중요한 점은 이븐 루슈드의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에 대한 주석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으로 1220년경 스콧이 시작하였다. 이러한 12세기의 번역작업을 통해 13세기 초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과 주석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라틴어로 접할 수 있었으며 12세기의 등장한 초기 번역본 뒤에 더 많은 새 번역본이 등장 할 수 있었다. 새로운 번역들 중 기욤의 번역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의 번역이 아퀴나스를 비롯한 여러 스콜라 철학자들이 표준판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13세기의 사상적 발달의 배경에는 새로 등장한 대학과 종교 교단이 있었다. 볼로냐와 살레르노에서 최초의 대학이 설립되었다 주장하지만 그 두 곳은 전문대학적 성격을 띠기에 파리와 옥스퍼드를 최초의 대학으로 봐야한다. 중세 대학은 4가지 학부로 구성되었는데 공통과목인 인문학부와 상위학부인 신학 법학 의학의 구성이다. 모든 대학이 라틴어를 공용어로 사용했으며 상위학부 학생들은 일정 나이까지 자유롭게 대학을 옮겨 다닐 수 있었다. 학부의 교과과정은 교과서 중심으로 조직되었는데 인문학부는 일반적 기준이 마련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1210년 파리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관한 모든 강의를 금지하고 저술들을 불태우라 했지만 1255년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의 많은 저술들이 강의에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 신학의 교과서로는 <<신학명제집>>과 성서 법학 교과서로는 <<로마법대전>>이나 <<교령집>>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교과서들은 각 대학마다 달랐다. 중세의 지적 분위기 형성에 도움을 준 교단으로는 프란체스코 교단과 도미니크 수도회가 있다. 각 1210년과 1216년에 정식으로 승인 받았다. 두 수도회 모두 1219년에 파리에 대학을 설립했으며 1230년에 옥스퍼드에 학교를 세웠다. 중세의 위대한 철학자 대부분이 이 두 교단의 소속 수도사들인데 대표적으로 알베르투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 둔스 스코투스 오컴 등이 있다. 그 외 위콜리프가 수도회 출신이 아닌 철학자인데 철학사가들은 그가 정말로 수도회 소속이 아니였는지에 대하여 의심스럽게 생각하기도 한다.

2. 그로스테스트와 알베르투스

2-1. 그로스테스트의 업적 및 평가

그로테스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주교로 임명되기 전 옥스퍼드에서 공부하였으며 초기 총장 중 한사람으로서 5년간 강의 하였다. 그는 많은 저술을 썼을 뿐만 아니라 <<분석론 후서>>에 대하여 최초의 라틴어 주석을 썼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새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13세기 위대한 철학자들 보다 한 세대 앞서 등장 했으며 많은 학자들이 철학사보다 과학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긴다. 그 연유는 그가 과학적 개념들이 논증의 필연적 진리 체계를 구성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진리가 조건문의 형식을 취한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조건문으로 표현된 진리의 일부는 연역이 아닌 실험으로 확립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측면과 다른 측면들로 인해 서유럽의 실험 과학의 아버지라 평가 받아왔다. 또한 그는 천문학과 기상학에 관한 독립적인 저술도 썼으며 <<분석론>>에 주석에서 드러나 인간의 과학적 노력에 대한 전반적 견해로 보아 베이컨이나 파라셀수스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에 가까운 인물로 볼 수 있다.

2-2. 그로스테스트의 사상

그로스테스트는 인간 지식의 5가지 보편이 있다고 말한다. 1. 신의 정신 안에 존재하는 영원한 근거들이다. (플라톤은 이것들은 이데아라 불렀다. 이것들이 서로 분리된 실체는 오류이다.) 2. 신이 천사들의 정신에 각인한 형상이 있는데 이것은 이데아와 마찬가지로 창조의 과정에서 전형이나 모법으로 작용한다. 3. 지상의 존재에게는 작용하는 인과적 근거가 있는데 이 인과적 근거는 천상에 존재한다. 4. 지상의 실체들에 속하는 형상들은 실체의 유와 종을 규정한다. 5. 대상의 우연적 형상은 본래 그런 형상을 지닌 실체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과학과 형이상학을 연결한 그로스테스트의 예는 광학이론에서 드러난다, 광학이론은 <<천지창조론>>과 <<빛에 관하여>>라는 저술에서 전개되는데 그는 빛이 최초로 창조된 물질형태의 것이라 주장한다. 빛은 제일 질료와 결합하여 단순하며 크기가 없는 실체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시간이 시작된 순간 삼차원에 공간을 창조하였다. 또한 이빛이 아홉 개의 천체를 차례로 창조했으며 9번째가 달이다. 이 빛은 달로부터 지구에 이르러 4원소를 창조한다. 여기서 그는 신학으로 옮겨가는데 빛을 신의 본성과 가장 유사한 자연적 본성을 지닌 것으로 보아 신과 같이 다른 것의 도움 없이 자신의 내부로 모든 것을 창조 가능한 것으로 파악했다. 빛은 순수한 형상과 작용에 가장 가까우며 신 자신이 영원한 빛이며 천사는 비물질적 빛이다. 신은 모든 것의 보편적 형상이지만 질료와 결합하는 형상이 아니라 모든 것의 전형이 되는 형상이다. 인간의 지성이 진리에 이를 수 있으면 오직 최고 진리인 신의 빛을 통해서이다.

2-3. 알베르투스

알베르투스는 최초의 독일 철학자로 1223년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가 되었으며 3년간 파리에서 신학을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 중 한명이 아퀴나스였다. 그의 저술에서도 그로스테스트와 같이 형이상학과 과학의 결합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저술에선 과학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새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을 진심으로 반긴 최초 철학자들 중 한명으로 이븐 시나의 방식으로 다양한 주석서를 썼으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작으로 여겨지는 저술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그의 사상에 여전히 신플라톤주의적 요소가 남아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자연의 경험적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3. 보나벤투라

3-1. 생애와 업적

보나벤투라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본명은 조반니인데 그의 이름을 바꾼 이유는 어려서 병의 회복을 프란체스코의 덕택으로 여겨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들어가고 이름을 변경한 것이다. 그는 헤일즈의 알렉산더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신학명제집>>에 대한 나름의 주석을 썼으며 <<개요>>라는 제목의 신학교과서를 썼다. 또한 그는 수도회의 총회장이 된 후 서로 다른 분파를 화해시키기 위해 수도회를 재결합하고 재조직하였으며 프란체스코의 생애에 대한 전기를 두 권 썼다, 그는 총회장을 하면서 신자의 관점에서 신비주의적인 저술도 썼는데 그 책은 현재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다.

3-2. 사상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플라톤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말하였는데 그는 이데아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을 간단하게 반박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이데아를 부정한 최초의 오류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수많은 오류가 포함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데아가 신의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진 않는데 이데아는 영원한 근거로서 모든 것이 이에 따라 규정되는 전형으로 이런 이데아들이 인간지식의 일차적 대상이라 주장하였다. 그의 저술에서도 빛의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빛에 4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였다. 1. 기계적 기술로 생겨난 빛으로 가장 열등하며 은유적으로 빛으로 여겨진다. 2. 감각 지각의 빛으로 은유로서의 빛이 아니며 각각의 감각은 서로 다른 강도의 빛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다. 3. 지적 진리 탐구의 길로 인도하는 빛으로 철학의 3가지 영역(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을 비춘다. 4, 성서의 빛으로 최고의 빛이며 정신이 구원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그는 철학의 세분과를 각각의 빛으로 여겨 총 6가지의 빛이 창조의 여섯 에 대응한다고 주장하며 모든 학문에 쇠퇴가 있기에 마지막 휴식의 날이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축복받은 자들이 신의 정신 안에 이데아들을 바로 인식할 수 있으며 직접 관찰보다는 반사 된 빛으로만 진리의 인식이 가능하다 주장하였다. 인간 지성에 의해서 창조된 빛은 사물에 대한 확실성에 이르기에 충분치 못 하므로 특별한 빛이 필요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류를 반박하는데 열중하였으며 세계의 창조와 세계의 지속의 양립을 불가능 하다 여겼다. 그렇기에 그는 세계가 시작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일련의 논증을 제시한다. 그의 체계에서 수동지성과 능동지성의 구분을 인정하지만 각각이 인간 개인의 능력이라 생각하며 아랍학자들이 생각하였던 능동지성의 임무가 신의 직접적 조명에 의해 수행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을 받아들였으며 인간 영혼이 육체의 형상이라는 점도 받아들여 아랍학자들의 심령일원론을 반박하는 데 사용한다. 그는 이븐 가비롤에 따라 질료형상론의 구조를 영혼자체에 적용하여 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질료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영혼도 질료를 포함한다는 점을 순응하고 개인의 영혼이 지속가능하다는 것과 질료로 개체화의 원리를 보일 수 있다는 주장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영혼이 순전한 비물질적이라는 주장의 난점을 피할 수 있었지만 정신적 질료라는 개념의 명확한 설명을 필요로 하였다.

4. 토마스 아퀴나스

4-1. 생애와 저술, 사상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 이탈리아 출생으로 5살 때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에서 베네딕트 수도사들의 손에 성장하였다. 1239년 황제와 교황사이 분쟁 발생으로 이 수도원에서 더 이상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자 나폴리 대학에서 피터의 아래서 논리학과 자연학을 처음 접했다. 1244년 그는 가족이 원했던 베네딕트회 신부가 되기를 거절하고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가 되었고 이에 그는 가족에게 납치당해 감금생활을 하였는데 이때 두 편의 논리학 논문을 썼다. 감금생활에서 풀려난 후 파리로 가 알베르투스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 스승과 함께 쾰른으로 떠났다. 1252년 그는 신학 석사학위를 위해 공부를 시작하였고 <<신학명제집>>에 대한 주석을 통해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었다. 또한 이 시기에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라는 소논문을 썼으며 이것을 통해 이븐 시나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256년 석사학위를 받은 후 3년 동안 더 머물면서 성서에 대하여 강의를 하였는데 그는 교수로서 학생들의 논박을 감독할 의무를 지녔다. 그가 감독한 논박의 내용은 <<진리에 관하여 논박한 질문들>>이라는 자료를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 책은 다양한 주제와 253가지의 개별적 논박이 등장하여 방대한 분량을 보인다. 이 시기에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에 대한 주석을 써 자연과학 수학 형이상학의 관계를 논의하면서 질료로부터의 순서를 자리 매김한다. 1259년~1260년대 초반 아퀴나스는 교황을 따라 오르비에토로 갔는데 그는 거기서 기욤을 만났으며 <<반이교도대전>>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아퀴나스의 다른 저술과 비교 하였을 때 기독교 교리가 아닌 철학적 전제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 큰 차이가 있는데 이 철학적 전제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철학자들이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는 점을 지녔다. 따라서 이 저술은 자연신학에 관한 저술로 볼 수 있다. <<반이교도대전>>은 총4권으로 이루어지고 각 권의 내용은 신의 본성, 신의 창조 및 창조된 세계 신안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법과 윤리적 문제 삼위일체나 성육신 등의 기독교 교리와 관련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아퀴나스는 1,2,3권에서 성서를 논증의 전제로 삼지 않았다. 그는 <<반이교도 대전>>을 완성한 후 로마에 도미니크 수도회의 부속학교 대리 교장을 하는 동안 또 다시 논박을 감독했는데 이때 이와 관련된 3가지 저술을 남겼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 대한 권위 있는 주석을 쓰기 시작한 것도 로마에서부터 시작하였는데 그는 <<영혼에 관하여>>에 대한 주석을 가장 먼저 썼고 이 주석은 현재까지도 학자들이 많이 참고한다. 다음으로 <<자연학>>에 대한 주석을 썼다. 하지만 그가 로마에 머물면서 쓴 가장 중요한 저술은 신학대전의 저술 시작이었다. 신학대전은 매우 방대한 저술로 총 3부로 이루어진다. <<신학대전>>이 생생한 학문적 논박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논박과 마찬가지로 질문과 항목별로 나누어 구성된다. 신학대전의 각 항목은 3단계로 구성되는데 1. 항목이 내세우려하는 주장의 난점을 제시함 2. 항목이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대 주장에 이어 다른 측면에서의 고찰이 뒤따름 3. 각 항목의 본문에서 아퀴나스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근거와 함께 제시함. 이후 난점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구성은 철학자가 무엇인가를 당연시하는 것을 막기 위한 강력한 지적훈련을 위해 도입된 것으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설득시킬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반박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끔 만든다. <<신학대전>>은 불필요한 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아퀴나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신학대전>>의 1부에서는 <<반이교도대전>>의 주제들을 거의 포함하며 가톨릭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을 주요 독자로 보고 신의 속성을 제시하고 바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다룬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이성에 의해 발견되는 진리와 계시를 통해 얻어지는 진리의 구별을 하였다. 그는 <<신학대전>> 1부를 쓰는 동안 <<군주의 통치에 관하여>>도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성직자를 군주의 위에 놓고 군주가 세속국가를 이끌어가는 원리를 제시하려 했다. 이 책은 아퀴나스가 사망하기 전까지 완성하지 못했기에 톨로메오가 완성하였다. 1268년 아퀴나스는 파리로 다시 돌아와 이븐 루슈드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랍학자들의 주석을 받아들여 정통 가톨릭 교리와 상반됨을 주장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자체를 반가톨릭적이라는 오명을 씌워지게 만들었는데 이에 대한 논쟁을 위해 아퀴나스는 두 편의 소책자를 저술하였다. 이 두 편의 소책자에서 그는 능동지성과 수동지성이 모두 개인의 능력이라는 주장과 세계가 어떠한 시작점을 지닌다는 사실을 철학적 논증에 의해 확립, 반박 불가의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주장들을 통해 그는 이븐 루슈드주의자들에 맞서고 프란체스코회의 신학자들과 맞서게 되었다. 이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방어책으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을 명확히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계속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 대한 주석 작업을 진행하여 나갔다. 그가 파리에서 두 번째로 머물었을 때 가장 주요한 것은 <<신학대전>>의 2부를 저술한 것이다. 2부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인용되고 주제상 <<반이교도대전>>의 3권에 대응하지만 그 내용이 더 방대하며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영향을 받은 점이 더 많이 등장한다. <<신학대전>> 2부 전반부는 인간 삶의 궁극적 목표 고찰로 시작한다. 그는 궁극적 목표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행복이라 주장하며 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입장을 같이한다. 하지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차이를 보이는데 그 차이점은 행복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활동이 오직 신의 본질을 관조하는 데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주장하고 현세의 일상적 상황에서 행복이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 참된 행복은 오직 천상에서 축복받은 영혼만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덕이 행위와 정서 모두에서 표현되는 심리적 성향이라 함에 따라 자신도 행위와 정서에 관한 언급과 덕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한다. 그는 성향 개념에 대한 일반적 고찰도 제시하는데 이것은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철학이 쇠퇴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큰 중요성을 유지하였다. 덕에 대한 아퀴나스의 언급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언급에 기초하지만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목록에 사랑 믿음 희망을 더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과 기독교에서 칭송하는 성격상의 특성을 연결하고 악과 죄를 연결한다. 신학대전의 전반부 마지막 주제는 은총과 법으로 법의 본성,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의 구별, 본성과 은총사이의 관계, 구약의 법과 신약의 법 사이의 대비, 죄인을 구원하는 것의 정당성 등의 주제를 다룬다. 이런 주제들에서 아퀴나스는 신교와 구교의 중간정도의 입장을 고수 한다. <<신학대전>>의 2부 전반부가 윤리학적 성격을 지닌다면 후반부는 개별적 도덕주제에 대한 상세한 가르침을 포함한 각론이다. 후반부에서는 각각의 덕이 분석되고 죄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믿음 사랑 이외 다른 덕들은 4주덕(사려 용기 정의 절제)을 상위 구조 삼아 논의되는데 그 중 정의에 관한 분야 중 하나를 경건함이라 하고 이를 신에게 돌려야하는 것을 마땅히 돌려야 한다는 덕이다. 아퀴나스의 덕 목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목록과 일치하지 않는데 이유는 그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등장하는 이교도적 특성을 보이는 몇 가지 덕을 기독교화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예로 자신의 탁월성을 관대함과 겸손의 덕과 양립할 뿐만 아니라 겸손의 일부로 만드는데 이 두 가지를 자신의 장단점에 대한 정당한 판단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신학대전>>의 2부는 활동적 삶과 관조적 삶의 비교로 마무리 되는데 여기서 아퀴나스는 관조적 삶을 바람직하게 여기긴 하지만 선교와 가르침을 포함하는 관조적 삶을 최선의 삶으로 보았다. 이 시기 <<신학대전>> 2부외에도 많은 저술을 썼는데 대표적으로 <<형이상학>>에 대한 주석이 있다. 그가 1272년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에서 머물 때 <<신학대전>> 3부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3부는 오로지 신학적 주제만 다루며 성찰하였다. 이를 통해 아퀴나스는 자아정체성 개체화 술어논리 등에 대하여 언급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며 물질적 실체의 본성과 실체의 변화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신학대전>>은 완성되지 못하였는데 그는 망연자실한 상태에 빠지는 일을 자주 겪었으며 신비한 체험을 하기도 한 후 더 이상 모든 학문적 활동을 중단하고 집필하지 않았다. 이후 그의 비서와 동료들이 아퀴나스가 죽은 후 죽음 심판 천국 지옥 부분에 대하여 이전의 저술을 참고하여 마무리하였다. 1274년 공의회를 참가하기위해 북쪽으로 갔지만 리옹에 도착하기 전에 몸이 좋지 않아 포사노바에서 머물다가 몇 주 후 시토 수도회 소속 수도원으로 옮겼고 1274년 3월 7일 세상을 떠났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철학에서부터 이슬람과 유대 철학자들

 

1.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철학

1-1.  시대적 상황

로마제국의 외부적 상황에 큰 변화가 있었다. 마호메트가 633년 세상을 떠난 뒤로 10년도 체 되지 않은 시기에 이슬람교가 정복전쟁을 통해 종교를 많은 지역(페르시아 제국,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에 널리 전파하였다. 708~711년 북아프리카 맹주가 되었으며 스페인으로 교세를 확장시켰다. 이후 북유럽으로 진출하였는데 이러한 확장은 732년 프랑크족과의 전투에서 패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768년 샤를마뉴가 왕위에 오른 후 이슬람교도들을 피레네 산맥 밖으로 내몰았지만 조금의 영토가 줄어든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동쪽 지방의 점령을 통해 이탈리아에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샤를마뉴는 반란으로 쫓겨난 교황레오3세를 보호하고 다시 복위 시켰으며 800년 로마제국의 왕관을 받으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수립을 성립하였다. 814년 샤를마뉴가 세상을 떠난 이후 거의 모든 서유럽대륙의 기독교인이 이 제국 안에서 살게 되었다. 샤를마뉴는 표준적인 교육과 문화를 확립하려 노력하였다. 이것을 위해 왕립학교를 세우려 하였고 많은 학자들을 초빙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은 앨퀸이다. 앨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관심이 있었으며 논리학의 교과서로 <<변증학>>을 저술하였고 소수의 특권층에게 천문학을 선보였다. 이러한 9~11세기에 철학이 부활하였을 때 주 무대로는 샤를마뉴를 계승한 프랑크왕국과 이슬람교도들의 아바스 왕조가 있었다. 각 무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로는 서방의 요하네스 스코투스와 동방의 이븐 시나가 있다.

1-2.  인물: 요하네스 스코투스

아일랜드 출생으로 9세기에 활동하였다. 그는 종종 14세기의 둔스 스코투스와 혼동되는데 두 명의 영어 표기가 동일한 점 때문과 두 사람 모두 스코틀랜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혼동의 원인이 된다. 그렇기에 요하네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에리우게나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에리우게나는 샤를 궁전으로 갔는데 이는 샤를이 그리스와 관련된 것을 좋아하여 그리스어에 능통한 에리우게나를 총애하였다. 그는 궁정에서 자유의 7과목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이후 철학에 관심을 점차 가지었다. 그는 힝크마르 대주교의 초청으로 철학에 직접관여하게 되었다. 힝크마르가 그를 초청한 이유는 고트샬크의 이중 예정설(성자뿐만 아니라 죄인도 운명이 정해져있다)에 대한 반박을 하기 위해서이다. 에리우게나의 이중 예정설 반박은 매우 빈약했으며 기존의 예정설에 대한 것까지 무너뜨리는 듯 보였다. 그 반박내용으로는 신의 단일성과 나누어지지 않음으로 이중예정설의 성립 불가를 주장하며 나아가 신의 영원성으로 미리 정해진 운명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빈약한 이유는 이중예정설이 신의 단일성을 위협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고 반박의 논거가 죄인의 회개할만한 동기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신의 작용에 시간상의 제약을 준다 해도 그 작용은 우리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이후 에리우게나는 공의회에서 파문당하였고 공의회는 기존의 예정설을 확고히 하였다. 그가 파문을 당한 후에도 샤를은 여전히 에리우게나를 총애하여 위 디오니시오스의 세 저술의 번역을 맡겼다. 그는 이것들을 번역하면서 신플라톤주의의 사상이 자신과 잘 맞음을 깨닫고 이와 유사한 체계로 자신의 사상을 구성하였는데 그 내용을 <<자연에 관하여>> 라는 5권의 저술에 담아 보였다.

1-3.  사상과 평가: 에리우게나의 사상과 평가

에리우게나는 자연을 4가지로 나누었다. 그 4가지는 1.창조하며 창조되지 않는 자연, 2.창조되며 창조하는 자연, 3.창조되며 창조하지 않는 자연, 4.창조하지 않으며 창조되지 않는 자연이다. 1번은 신이며 2번은 플라톤의 이데아로 이루어진 지적세계 3번은 2번에서 파생된 물질적 대상의 세계이고 4번은 최종목적으로서 만물의 돌아가는 것으로써의 신이다. 이러한 자연의 4가지 구분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의 구분이다, 그는 이에 따라 신을 존재하지 않는 것에 속한다고 하였는데 이 뜻은 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10가지 존재의 범주 안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뜻한다. 신은 존재를 초월하며 현존을 넘어서고 언어적 표현불가와 파악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름을 붙인다면 무이다. 그의 분류에서 가장 파악하기 쉬운 것은 3번 세계로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동일한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그는 우주가 세 개의 천구로 이루어짐을 주장하였는데 지구 해와 이외의 행성 달과 별이 그 구성요소이다. 에리우게나는 지구 중심설을 설파 했지만 지구외의 다른 행성들이 태양을 회전한다고 믿으며 태양중심설에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의 자연의 분류중 인간은 2,3번의 세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동물로서 3번째 세계에 속하지만 이성, 정신과 같은 것을 가짐으로서 동물을 능가하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두 번 창조되었다고 보아야한다. 이 말은 두 영혼을 지님을 뜻하는 것이 아닌데 인간은 오직 각각의 것으로 분리되지 않은 영혼 하나를 지니며 영혼이 신의 대리인으로 작용하여 육체를 창조한다. 따라서 영혼은 2번 세계에 속하며 이 분류의 것을 에리우게나는 사물의 근본원인으로 부르며 플라톤의 이데아와 동일시한다. 인간의 이데아는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질 때의 형상과 동일한데 이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손상되었다.

1-3-1.  그에 대한 평가로는 독창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인물로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한 사상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체계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역설을 즐겼으며 모순명제로부터 문장을 이끌어 내었다. 그는 이러한 모순명제의 사용으로 상호 조화적 해석방법을 제시하였지만 그 스스로가 자신의 말의 수렁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의 저술은 신 플라톤 주의적 내용 탓에 이교도철학으로 간주해 금서로 처분 받았다.

2. 이슬람과 유대 철학자들

2-1. 배경

이슬람 지역의 학자들은 그리스 학문의 대부분을 서방 라틴세계로 전해지는 우회로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비중이 크다. 이러한 이슬람 학자들에 배경으로는 4세기에 에데사 지역에 세워진 기독교학교에서 시작되었다. 489년 이학교가 폐쇄된 이후에도 페르시아로 이주하여 기존의 작업들을 지속하였다. 이후 이슬람교도들이 페르시아 지방을 정복한 후 여러 이슬람시대의 군주들이 이학교의 출신 학자들과 후계자들을 바그다드 궁정으로 초빙하였다. 이시기(750~900) 시리아 출신 학자들은 플라톤의 저술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대부분을 아랍어로 번역 하였고 다양한 의학 저서를 번역하여 이슬람 세계에서 통용하게 하였다, 인도의 수학과 천문학 저술 역시 번역되면서 아라비아 숫자가 들어왔다. 번역된 고대 그리스 철학은 이슬람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교의 사변신학은 이미 기본적인 철학용어를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리스 철학이라는 외래적 사상에 배타적 태도를 보였다.

2-2. 인물: 알 킨디와 알 파라비, 가온 사아디아

알 킨디는 전통적으로 이슬람 철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인물로 에리우게나와 동시대 사람으로 이슬람 사변신학과 외래 사상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였다. 그는 제일철학에 관한 저서에서 세계의 시간적 유한성에 대하여 사변신학적 논증이 매우 형식적으로 전개된다. 그는 단일한 우주적 지성의 작용에 의해 우리의 지성이 작용하게 됨을 주장하였는데 여기서 우주적지성은 신플라톤주의의 삼위일체설 중 정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알 파라비가 이 생각을 계승 발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는 문법과 논리를 명확히 구분한 후 논리를 철학을 위한 기초적 도구로 여기고 철학을 세분과로 나누었다. 세분과는 자연학 형이상학 윤리학으로 구성되며 신학을 철학과 별개 학문으로 생각하였고 심리학은 자연학의 일부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신학에 대해서는 최초 운동의 원인으로서 필연적 존재로 신이 현존함을 증명하는 철학적 논증을 사용할 수 있다. 그는 신비주의 교파의 일원으로 신으로부터의 회귀를 강조했다.

2-2-1. 알 파라비와 동시대 사람인 가온 사아디아는 중세 최초 유대인 철학자로 이집트에서 출생하여 바빌론에서 성서연구 학교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성서를 아랍어로 번역하였고 유대교의 전례와 전통에 관한 여러 저술을 남겼다. 이런 작업과 동시에 그는 성서의 교리와 이성적 철학의 조화를 꾀하려 노력하면서 이 두 가지를 같은 줄기에서 나온 가지로 생각하였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적 원천과 이슬람의 사변신학적 자료에 의존하였으며 <<교리와 신앙에 관하여>>라는 저술을 통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인간이 얻을 수 있는 확실성을 이성 감각 전통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보았다. 이성은 이성적 직관과 이성적 추론의 두 가지 종류가 있으며 이성적 추론을 통해 인간이 영혼소유와 우주의 원인 등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서로 예언자들에 의해 그 타당성이 입증되며 독립적 원천임에도 다른 원천에서의 지식을 염두하고 신중하며 사려 깊게 해석되어야 한다. 감각은 세계의 시작이나 현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에 이성으로 파악해야 하는데 그는 세계가 시간상의 어떠한 때에 창조됨에 대한 4가지 증명을 제시하였다. 1. 우주 안의 모든 것이 유한하기에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우주 역시 유한하며 계속 현존해온 것이라 볼 수 없다, 2. 우주의 구성요소는 복잡하지만 서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에 창조자가 존재한다. 3. 자연의 것들은 우연적이기에 필연적 실체가 필요하다. 4. 무한한 것은 파악하거나 추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간은 유한하다. 이러한 증명들은 필로포노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후세에까지 논의 되었다.

 

로마제국의 스토아학파부터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

로마제국의 스토아학파

1. 세네카와 에픽테토스 아우렐리우스

1-1 생애: 세네카는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49세 때 네로의 개인 교사가 되었고 네로가 황제가 된 후 곁에서 최고 조언자 역할을 하였으며 기원 후 62년 네로에 대한 모든 영향력을 잃고 65년 반란의 혐의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기원 후 1세기에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여겨지며 열 개의 윤리적 대화편과 은퇴 후에 남긴 124편의 서한으로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주 관심 분야는 윤리학이었으며 자연 과학에 대하여 관심이 있어서 저술도 썼지만 이는 자연 현상에서 도덕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었다.

1-2 세네카의 철학이론: 그는 정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노력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육체적 혼란과 그릇된 판단의 분명한 구별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진정으로 벗어나야 할 본질적인 것은 그릇된 판단임을 주장하였다. 마음에 우연히 떠오르는 것 존재하는 대상을 보고 영향을 받아 생긴 것은 정념이라 할 수 없으며 이러한 것에 굴복하여 우연으로 따르는 것이 정념이라 하였다. 그렇기에 신체적 현상보다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는 유물론자로 영혼이 물질적인 세계의 일부라 생각했지만 내세에 대하여 염두를 두고 있었다. 그는 스토아학파가 제시한 덕에 이르는 길이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며 도덕적 발전을 세 단계를 구별했다. 또한 이론과 교훈 사이의 정의를 명확히 하여 구별을 용이하게 하였다.

1-3 세네카에 대한 평가 및 에픽테토스와 아우렐리우스: 세네카는 위선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스토아학파가 제시한 기준에 따르는 삶을 살았다고 평가를 받았으며 로마제국의 스토아학파 창시자이다. 에픽테토스와 아우렐리우스 모두 세네카와 유사하게 도덕철학과 연관이 있다. 에픽테토스의 저술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 중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어떤 악도 진정으로 우리를 해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보이기 위해 자아와 도덕적 의지를 동일시하였다. 아우렐리우스는 주요 철학학파들을 위한 학교를 위한 학교를 세웠으며 명상록이라는 저술을 통해 여러 격언과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자신에 철학적 의견을 보인다.

초기 기독교 철학

2. 초기 기독교 철학의 상황과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2-1 초기 기독교 철학과 상황: 에피쿠로스학파 주의와 스토아학파가 아우렐리우스로 마무리되었다. 아우렐리우스 지배 당시 기독교를 잔인하게 박해하였으며 최초의 기독교 철학자 유스티누스가 기독교를 옹호하는 변증론을 헌정하고 이후 처형되었다. 2세기 기독교인들은 최초로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예수와 바울로의 종교를 조화시키려 시도 하였다.

2-2 클레멘스: 일련의 잡기라는 저술을 출판하였으며 교양 있는 기독교인은 철학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플라톤의 사상을 이원론을 주장하는 이교도들에 대항하는 동맹으로 여기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기독교와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하였고 정념으로부터 자유를 주장하는 스토아학파의 이상을 찬미했다. 그는 구약성서의 우화적 측면을 배제하려 하며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다시 드러내었으며 여러 문헌을 편집하여 대중화하였다.

2-3 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 출신 플라톤주의자인 암모니오스 사카스의 제자로 당시 기독교인들이 이단으로 여기던 철학 사상들을 자신의 체계에 수용하려 하였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탄생 이전에 존재한다고 믿으며 자유정신인 영혼이 육체와 결합 후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자유의지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즉 모든 이성적 존재가 구원받으며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에 충성을 맹세하며 로마제국에서 추방 후 신과 자유 불멸성에 대하여 기독교적 믿음을 옹호하는 철학적 논증을 펼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부활

3. 플루타르코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의 주석 전통

3-1 플루타르코스: 그리스 영웅과 로마의 영웅을 비교한 영웅전을 쓴 역사가이다. 영웅전 이외에도 대중적인 철학적 주제에 관한 글을 모아 도덕론을 펴냈다. 플라톤주의자로서 대화편 티마이오스에 대한 주석을 달았으며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에 반대하는 수많은 논쟁적 글을 써 두 학파의 체계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3-2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에 관한 주석 전통: 플라톤주의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부활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시기인 만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 대하여 전문적인 주석 전통이 만들어졌다. 또한 이 시기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주석으로부터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로 여기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그 외에 알렉산드로스가 형이상학 감각에 관하여 기타 논리학 저술들에 대한 주석 작업도 이루어졌다.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

4.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

4-1 플로티노스: 오리게네스와 동시대 사람이며 플라톤이 생각하던 국가를 캄파니아지역에 세우려고 항상 생각하였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제자가 6가지 주제로 그의 저술을 분류하였는데 그것은 윤리학과 미학, 자연학과 우주론, 심리학, 형이상학, 논리학, 인식론의 6가지이다. 그의 사상체계에서 중요한 개념은 일자 개념으로 단일성을 존재의 핵심적인 속성으로 본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에서 플라톤으로 플라톤에서 플로티노스로 이어진 개념이다. 일자는 플라톤이 언급한 선의 이데아와 동일시되며 모든 존재의 기초이며 모든 가치의 기준이다. 그러나 일자는 존재와 선을 넘어서 있기에 모든 것은 일자로부터 이어지는 하나의 연속적인 유출과정으로 존재한다. 연속적인 유출과정이란 대략 일자->정신->영혼->자연->순전한 질료로 구성되는 과정으로 각각이 상위 단계와의 의존을 통해 현존하고 활동할 수 있다. 이러한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적 체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도출된 철학적 원리를 기초로 제시된 것이다. 그의 사상은 죽은 뒤 유지되지 못했지만 기독교들에게 전해졌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4-2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는 354년 기독교 어머니와 이교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라틴 문학과 수사학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그의 젊은 시절은 자서전 격인 고백록에 의존한다. 그는 겉핥기로 그리스어를 배웠지만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칠 수 있었다. 18세 때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플라톤의 사상에 빠지게 되었으며 10년간 마니교를 믿었다. 이후 로마로 건너가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와 친분을 나누고 그 후에 어머니와 암브로시우스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전향하였다. 387년 세례 후에도 여전히 플로티노스철학의 영향을 받았는데 몇 편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적 신플라톤주의를 분명히 드러내었다. 아카데메이아학파에 반대하여 라는 저술에서는 아카데메이아 중심의 회의주의에 반대하는 논증을 보이고 이데아에 관하여 에서는 이데아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제시하여 이데아를 신의 정신 안에서 영원불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 외에도 자유의지론과 83가지 서로 다른 질문들이라는 저술 등이 존재하며 플라톤주의의 입장을 유지한다. 이러한 저술들은 391년 사제 임명 직전에 쓴 것으로 사제가 된 후에도 신국론을 포함한 여러 저술을 썼지만 사제임명 이후 저술들에서는 플로티노스의 제자가 아닌 중세 기독교 철학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제시한다.

피타고라스에서 엘레아학파까지

1. 피타고라스학파

1-1. 생애, 기원

1-1-1. 사모스 섬에서 기원전 570년경 출생함

1-1-2. 크립톤 지역에 피타고라스가 종교단체와 유사한 공동체를 설립 약 50년가까이 유지되다가 해체됨

1-2. 이론이나 업적

1-2-1. 철학자라는 단어 처음 사용(지혜를 사랑하는 자)

1-2-2. 음악의 음계와 수 적 비례가 서로 관련됨을 발견

1-2-3. 영혼 윤회설(영혼은 죽지 않고 다른 종류의 동물로 재탄생 함)

1-3. 영향

1-3-1. 수학과 신비주의의 영역에 큰 영향을 줌 고대 철학전반에 강하게 드러남

1-3-2. 피타고라스가 설립한 공동체가 이후의 다른 철학적 공동체의 근원적 모델 역할

1-3-3. 사후 추종자들에 의하여 신격화됨

2. 크세노파네스

2-1. 생년과 일생

2-1-1. 콜로폰 지역 출신으로 방랑 음유시인으로 그리스 전역을 여행

2-1-2. 오랜 기간 살면서 철학적 시 외에도 여러 시를 낭송함

2-2. 이론

2-2-1. 우주론: 흙과 물이 만물의 원질-> 화석에 대한 과학적 관찰과 기록을 근거함

2-2-2. 천체론: 지구가 무한히 존재한다 생각함-> 매일 뜨는 해가 항상 새로운 해라 주장

2-3. 영향

2-3-1. 이전 시대의 철학자들의 이론에 존재하던 종교적 영향과 물활론 적 요소에서 벗어남(자연주의를 택함)

2-3-2. 신학과 자연학을 연관 지어 생각하고 유일신론을 옹호함

3. 헤라클레이토스

3-1. 생년

3-1-1. 이오니아 지방 출신으로 여러 단편들을 남겼지만 모호한 문체로 인하여 다양한 해석이 나옴

3-2. 이론

3-2-1. 우주의 전체가 항상 변화하는 것임(크세노파네스의 새로운 해에 대한 것을 확장)

3-2-2. 불=Logos=영혼-> 불은 변화의 전형을 보여줌 로고스는 이성적 추론 능력 혹은 질서와 아름다움의 우주적 원리의 의미 영혼은 그 자체로 불로 생각되는 것으로 건조한 영혼을 중요시 함

3-2-3. 모순적 요소의 공존을 주장-> 상대적임을 드러냄, 지속적 영원한 순환의 과정으로 이해 가능

3-3. 영향

3-3-1. 헤겔을 비롯한 후대의 여러 철학자에 영향을 줌

3-3-2. 인간의 법위의 존재하는 규범적인 법을 언급함-> 정치철학에 영향

4. 파르메니데스와 엘레아학파

4-1. 파르메니데스

4-1-1. 있다와 있지 않다 두 가지의 탐구의 길-> 후대에 존재론과 형이상학에 영향을 줌

4-1-2. 존재는 존재 그자체이며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진리의 길)

4-1-3. 일상 세계의 일어나는 변화는 있으며 감각의 길에서 다룸(거짓 개념)

4-2. 멜리소스

4-2-1. 파르메니데스의 제자로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풀어서 설명함

4-2-2. 우주는 무한, 불변, 부동의 나누어지지 않는 동일한 것이라 주장

4-2-3. 우주에 대한 주장을 통해 고통과 진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 도출

4-3. 제논

4-3-1. 파르메니데스의 제자로 운동의 가능성에 대하여 부정함

4-3-2. 운동 시 목표점 도달의 목적을 반복되는 중간점 도달문제로 인해 불가능함을 주장

4-3-3. 그의 주장은 궤변이라는 평가와 수학르네상스의 기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