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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양상논리학 (중간탈주)

현대 양상논리학

프레게나 러셀, 화이트헤드 등이 명제논리학이나 술어논리학, 기호논리학 등을 연구할 때 다른 논리학자들은 중세이래로 방치되었던 양상논리학(modal logic)을 연구하였다. 양상논리학은 필연성과 가능성 개념의 논리학인데 현대 양상논리학 연구는 함언(implication)에 대한 이론을 통해 그 개념들에 접근한다. 이러한 연구는 루이스의 저작에서부터 시작된다. 루이스는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고안한 개념인 실질 함언(material implication) 이라는 것과 대비하여 엄밀 함언(strict implication) 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이것만이 진정한 함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주장에 이어 실질 함언 기호가 엄밀 함언을 나타내는 새로운 기호로 대체된 공리 체계를 새웠는데 이것이 양상논리학의 최초 형식 체계가 되었다. 그러나 엄밀 함언 역시 실질 함언과 마찬가지로 역설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루이스의 양상에 관한 연구는 그자체로서 흥미로웠는데 그는 S1~S5까지의 서로 다른 공리체계를 제시했고 각각이 정합성 있고 독립적임을 증명했다. 이 중 가장 흥미로운 체계는 S4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만일 필연적으로 p라면, p이다.

(2). 만일 필연적으로 p라면, (만일 필연적으로 p라면,[만일 p라면 q이다]라면 필연 적으로 q이다.)

(3). 만일 필연적으로 p라면, 필연적으로 p라는 것이 필연적이다.

이러한 S4는 필연성과 가능성의 상호 정의 가능성을 활용한다. 즉 ‘필연적으로는 가능하게 아닌 것이 아닌’ 으로 정의될 수 있고, ‘가능하게는 필연적으로 아닌 것이 아닌’ 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양상논리학에는 수많은 진술들이 있는데 그 진술들의 진리치에 대하여 논리학자들의 의견일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큰 논란이 되는 진술들은 양상 연산자가 반복되는 것들인데 이것들의 예로는 S4나 S5가 있다. 이러한 논란은 논리학자들뿐만이 아니라 종교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신의 실존과 관련한 진술과 S5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양상 기호와 술어논리학의 양화사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은데 ‘필연적인’ 과 ‘가능한’의 상호 정의 가능성은 ‘모든’ 과 ‘약간’의 상호 정의 가능성과 유사하다. 또한 양화 이론의 분배법칙과 유사한 분배법칙이 양상논리학에도 있다. 이러한 유사점에 따라 양화를 양상논리학에 도입하여 양상 기호와 양화사를 함께 사용하면 이중 양화와 유사한 체계가 된다. 양화된 양상논리학에서는 양상 기호와 양화사가 놓인 순서를 살피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그 순서에 따라 문장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양상 기호가 양화사보다 먼저 나오는 문장은 언어 양상(문장 예시는 책에서) 이라하며 양화사가 양상 기호 앞에 나오는 문장은 존재 양상이라 한다.

양화 이론과 양상논리학이 비슷한 점이 있다하여도 동일성 개념을 통해 보았을 경우 그 차이점 역시 드러나게 된다. 그 차이점은 콰인이 말하길 양상논리학은 양화의 문맥과 달리 지칭 대상이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지칭대상의 불투명의 정의는 책 참조) 양상 문맥이 불투명한 경우는 쉽게 발견되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행성의 수가 9개 일 때 필연적으로 9는 7보다 크다는 옳지만 필연적으로 행성의 수는 7보다 크다는 옳지 않다. 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불투명 때문에 콰인은 양상논리학을 거부했지만 1970년대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양상논리학은 꽤 훌륭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대 양상논리학에서 주요 주제는 필연성을 모든 가능 세계에서 옳은 것으로 정의하고 가능성을 일부 가능 세계에서 옳은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양화와 양상 사이의 유사점을 밝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진리는 모든 가능 세계 중 하나인 현실 세계에서만 진리로 간주되는데 가능 세계의 논의에서는 형이상학적 내용을 전혀 포함하지 않아도 된다. 즉 양상 의미론(양상의미론이 이루어지는 예시는 책을 통해서 봅시다)의 경우 어느 모형이든 적절한 형식적 구조를 갖추기만 하면 된다.

밀의 경험주의 논리학

밀의 경험주의 논리학

 

1.1 존 스튜어트 밀의 《논리학 체계》는 주요 부분이 둘로 나뉜다. 처음 두 권은 형식 논리학의 체계를 제시하고 나머지 네 권은 자연과학,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다룬다. 그는 첫 번째 부분을 언어분석, 특히 명명 이론(theory of naming)으로 시작한다.

밀은 형식논리학을 진지하게 여긴 최초의 영국 경험주의자였으며, 그는 홉스 시절 이후 경험주의를 결부시킨 유명론과 자신이 관련이 없음을 분명하게 하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유명론은 명제에 대한 두 이름이 주어와 술어가 동일한 대상의 이름 일 때만 옳다는 이론이다. 밀은 홉스의 설명이 ‘툴리우스의 키케로이다’처럼 술어와 주어가 둘 다 고유 명사인 명제들에게만 적합하기에 다른 모든 명제들에 대해서는 부적합한 이론일 수밖에 없다.

밀은 ‘이름(name)’이라는 낱말을 아주 넓게 사용한다. 그는 고유명사나 대명사뿐만 아니라 ’정복자 윌리엄을 계승한 왕‘과 같은 한정 기술도 이름으로 여긴다. 그리고 ’인간‘이나 ’현명한‘과 같은 한정 기술도 이름으로 여긴다. 그리고 일반명사, 추상명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이건, 추상적이건, 구체적이건 모든 이름은 대상을 지시한다. 고유명사는 지명하는 대상을 지시하고 일반 명사는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을 지시한다.’소크라테스‘라는 고유명사만 소크라테스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명사 ’인간‘ ,’현명한‘ 역시 소크라테스를 지시한다. 일반명사는 이런 방식으로 외연뿐만 아니라 그것이 내포하는 항목들도 있다. 일반 명사가 내포하는 것은 그것이 나타내는 속성들, 즉 일반명사에 대한 사전적 정의에 명시될 수 있다.’인류가 현명하다는 말을 고정시킬 때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생각하지 않았다. ‘와 같이 논리학에서 내포는 외연에 앞선다.

‘이름’이 그처럼 다수의 명사들을 망라하기 때문에, 밀은 모든 명제가 이름들의 결합이라는 유명론자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도 밀은 홉스의 견해와 관련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홉스와 달리 명제의 진리 조건을 제시할 때 내포에 의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죽는다’와 같이 두 개의 내포적 용어를 연결하는 문장은 어떤 속성들, 동물성과 합리성을 지닌 것들은 언제나 죽음의 속성을 수반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1.2두 번째 책에서 밀은 추리를 실질적 추리와 언어적 추리 두 종류로 구별하여 논한다. 언어적 추리는 세계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가져오지 않는다. 언어에 관한 지식만 있으면 전제에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어떤 위대한 장군도 무모한 사람이 아니다’로부터 ‘어떤 무모한 사람도 위대한 장군이 아니다/에 이르는 추리를 언어적 추리의 실례로 제시한다. 이 두 문제는 전제와 결론 둘 다 동일한 것을 주장한다고 말한다. 반면 실질적 추리는 전제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어떤 진리를 결론으로 추리한다.

밀은 새로운 진리들이 어떻게 일반적인 추론에 의해 발견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가 매우 까다롭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추론이 정언적이라고 믿었으며, 모든 정언 논증에서 결론은 실제로 전제에 포함되어 있고 함의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같은 논증을 예로 들어 보자. 만약 이 논증이 연역적으로 타당하다면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명제는 좀 더 일반적인 가정인 모든 ‘사람은 죽는다’를 전제해야한다. 다른 한편, 만약 소크라테스를 아직 죽지 않은 누군가의 이름으로 대체한다면,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긴 해도 그 결론은 증거를 요약한 첫 번째 전제에 의해 정당화되지 못한다. 고로 연역 추리는 진정한 추리가 아니다.

 

모든 추리는 특수 사례로부터 특수 사례로 나아간다. 일반 명제는 이미 만들어진 그와 같은 추리의 목록일 따름이고 이상의 추리를 위한 축약된 형식 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연역 추리의 주요 전제는 축약된 형식 문이며, 결론은 형식 문으로부터 도출된 추리가 아니라 형식 문에 따라서 도출된 추리이다. 실질적인 논리적 선행 조건이나 전제는 귀납에 의해 특수 사실들로부터 만들어진 일반 명제이다.

 

2.1.‘귀납’은 논리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특수 사례들로부터 일반적 진리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지칭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귀납이 한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피터는 유대인이다. 제임스는 유대인이다. 존은 유대인이다…….’라고 진술하고 계속 사도를 열거한다고 해보자. 나는 ‘모든 사도는 유대인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지만 밀은 그렇게 할 경우 실제로 특수에서 일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결론은 전제에 나타난 특수 사실들에 대한 압축적 표현일 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일반화되는 항목들을 빠짐없이 완전히 조사한 것도 아니면서 그것들을 근거로 일반화할 때이다.

밀의 연역 논증에 대한 비판은 논리학과 인식론의 혼동에 연루되어 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추리는 정보를 전달하지 않고서도 연역적으로 타당할 수 있다. 타당성은 논증이 옳은 정보를 산출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정언 논증만이 추리의 유일한 형식은 아니며 실제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정언적이지 않은 타당한 논증들도 많이 있다. 예컨대, A=B, B=C, A=C와 같은 형식의 논증들. 정언 논증의 경우에도 ‘모든 사람은 죽는다’를 ’죽는 것‘이 사람의 집합에 속하는 모든 원소의 이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죽는 것‘이 내포하는 속성들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해석한다면, 연역추리가 실질적 추리가 되도록 설명을 할 수 있다.

2.2밀은 귀납이 아니고서야 그런 연관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으면서 자신의 논리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귀납적 발견의 규칙들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원인과 결과의 귀납적 발견에서 탐구자를 안내하는 실험적 조사와 다섯 가지 규칙 혹은 규범을 제시한다. 그 실례로서 처음 두 가지 규범을 검토해보자.

첫 번째는 일치법이다. 만일 현상 F가 상황 A, B, C와 관련하여 나타나고, 또 상황 C, D, E와 관련하여 나타난다면, 우리는 유일한 공통 특징인 C가 F와 인과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두 번째는 불일치법이다. 만일 F가 A, B, C가 있을 때는 나타나지만 A, B, D가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두 경우를 구별하는 유일한 특징인 C가 F와 인과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결론 내릴 것이다.

반드시 의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런 규범들이 일상생활, 법정에서 늘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불일치법을 예증하기 위하여 ‘어떤 남자의 심장이 관통되었을 때, 그를 죽인 것은 발사도니 탄환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불일치법에 의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는 직전까지 충만한 삶을 살았고, 부상을 제외하면 모든 상황이 동일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밀의 일치법과 불일치법은 베이컨의 존재와 부재의 표를 세련되게 만드는 것이다. 베이컨과 마찬가지로 밀의 방법은 일반 법칙의 불변성을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밀은 ‘자연의 과정이 한결같다는 명제는 귀남의 기본 원리 혹은 일반 공리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하지만 이 일반 공리는 밀에 의하면 인과법칙과 멀리 떨어진 별에서도 적용되는 것은 무리라고 말하면서 일반 공리 자체를 경험으로부터 일반화되는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 일반 원리가 귀납의 기반이라면, 일반 원리 자체가 어떻게 귀납에 의해 입증될 수 있는지 난감해진다. 그렇지만 밀은 물리학의 기본 법칙들뿐만 아니라, 무모순의 원리 자체를 포함하여 산술학과 논리학의 기본 법칙들까지도 아주 완벽하게 확증된 경험적 일반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고자 한다.

퍼스의 귀납과 가설추리

1-1

프레게가 논리학에서 새로 고안해낸 것들 가운데 상당수가 완전히 독자적으로 퍼스(C.S.Peirce)에게서도 나타나지만, 퍼스는 자신의 성과들을 엄밀한 체계로 구체화하지 않았으며 완성된 형태로 출판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논리학의 역사에서 과학적 탐구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역논리는 우리의 지식을 조직화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을 넓히는 추론유형은 귀납, 가설, 유비이다. 퍼스에 의하면 이와같은 추리들은 모두 본질상 표본 추출(sampling)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연역적 추리에 대한설명은 수학적 확률 이론과 연관 될 수밖에 없다.

1-2

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가설을 기반으로 예측한 다음, 그 가설을 확증하거나 반박하기 위해 관찰을 한다. 퍼스는 이러한 단계를 가설추리(abduction), 연역(deduction), 귀납(induction)이라고 한다. 각 단계에서 차례대로 탐구자는 고려 대상 이론을 선택하고, 그 이론을 시험하는 방법을 명확히 진술한 뒤, 시험의 결과를 평가한다.

과학자는 어떤 가설이 귀납적 시험을 받을 만한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하는가? 과학자가 조사하고자 하는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들을 수없이 많을 수 있다. 과학자가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그는 어떤 이론을 조사해야 할 거인지에 관해 얼마간의 지침을 필요로 하는데, 추측의 논리 규칙들이 이 지침을 제공한다. 이론은 그것이 옳다면 실제로 설명력이 있어야만 한다. 이론은 경험적으로 시험 가능해야만 한다. 이론은 단순해야 하고, 자연현상에 관한 것이어야 하며, 앞서 일어났을 법한 일에 관한 우리의 주관적 의견과 반드시 정합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현존의 지식과 정합해야만 한다. (P7.220-1)

하지만 가설추리의 규칙들만으로는 과학자가 가설을 성공적으로 선택했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과학자가 자연을 탐구할 때 자연 자체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과학은 우리가 올바르게 ‘추측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인간의 정신이 올바르게 추측하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수많은 가설들에 앞서 시험하려고 했다는 것을 신뢰할 수 없다면, 즉 지적인 추측이 모든 시험을 견뎌 낼 그 하나의 가설로 우리를 이끌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면… 진리를 습득하려는 온갖 시도를 단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P6.530)

이 신뢰는 비록 아무런 증거가 없을지라도 처음부터 전제되어야만 하지만 사실상 과학의 역사는 그와 같은 신뢰에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명석한 천재는 올바른 가설이 발견되기까지 두세 개 이상의 가설을 시험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1-3

일단 이론이 선택되면, 연역이 가설추리의 뒤를 잇는다. 연역의 귀결들은 선택된 가설에서 도출된 것으로서 가설이 정확하다면 옳거나 옳게 될 실험적 예측들이다. 펴스는 연역의 경우 정신이 습관의 지배를 받는다, 즉 일반적인 생각이 특수 사례를 제시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는 특수 예화의 예측을 검증하거나 반증함으로써 시험 대상인 가설을 확증하거나 경우에 따라 반박하기도 한다. 검증과 반증은 시험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귀납이며 이는 본질상 표본 추출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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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퍼스에 의하면 우리가 잠정적으로 추리한다는 말은 우리의 경험이 무한히 확장되고 우리의 근사치가 무한히 좁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추리가 결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확률 이론에 좌우되는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귀납은 양적귀납, 즉 표본의 비율로부터 모집단의 비율로 나아가는 추리이다.

과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중요한 또 다른 종류의 귀납은 질적 귀납인데 이는 어떤 개체의 하나 이상의 관찰된 성질로부터 관찰되지 않은 다른 성질을 추리하는 경우이다. 예를 위해 퍼스는 머그웜프(당파를 초월한 자주적 정치인) 개념을 도입한다.

그는 자존심이 강하고, 사회적 명예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이다. 그는 미국의 정치인들이 자기네 유권자를 관리할 때 요란스럽고 세련되지 못한 교제 활도을 대부분 못마땅해 한다…그는 공공 정책의 현안들 가운데 재정적인 고려 사항이 늘 중대 현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문명사회의 최대 동력으로서 개인주의와 자유방임주의의 원리를 존중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런 견해들이야말로 ‘머그웜프’의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기차 안에서 어떤 한 남자를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가 계속 이런 식의 견해를 내세운다. 나는 당연히 그가 ‘머그웜프’라고 가정하기에 이른다. 바로 그것이 가설추리이다. 다시 말하면, 손쉽게 검증할 수 있는 머그웜프의 특징들을 골라냈기 때문에, 나는 이남자가 이런 특징들을 갖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그런 유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게끔 하는 다른 모든 특징들을 그가 갖는다고 추리한다. (EWP 210)

이 실례는 퍼스가 말한 탐구의 세 단계를 예시한다. 나는 대화를 나눈 승객이 국회의원이 하층민의 비속한 행동을 한다고 개탄하는 것을 듣고 그가 머그웜프라는 가설을 세운 뒤 그가 정부의 기업 규제에 반대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에게 자유 경쟁 제한 조치에 관해 묻자 그는 맹렬하게 비난하고 이로서 나의 가설이 확증된다.

프레게의 논리학 재건

 

논리학

프레게의 논리학 재건

1-1. 이 문제에 관해 프레게는 밀과 정반대 입장에 섰다. 밀의 경우 모든 명제가 후천적으로 아는 반면, 프레게의 경우 산술학은 논리학처럼 선천적일 뿐만 아니라 분석적이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프레게는 밀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정립하지 못한 논리학을 연구하고 체계화해야 했다. 그는 논리학을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구성했고,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맨 처음 수립된 학문의 두 번째 창시자가 되었다.

1-2. 논리학을 정의하는 한 가지 방법은 좋은 추리를 나쁜 추리로부터 가려내는 학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프레게 직전가지 논리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언 논증의 타당성과 부당성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1) “모든 독일인은 유럽인이다”, “약간의 독일인은 금발이다”, 그러므로 “약간의 유럽인은 금발이다.”

(2) “모든 암소는 포유동물이다“, ”약간의 포유동물은 네발짐승이다“, 그러므로 ”모든 암소는 네발짐승이다.“

이 추리 둘 다 옳은 결론을 가졌음에도 첫 번째 추리만 타당하다. 즉 첫 번째 추리만이 옳은 전제에서 그른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는 형식을 가진 추리이다.

1-3. 정언적 추리는 사실상 타당한 추론 형식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 해당한다. 트롤럽은 『총리』에서 옴니엄 공작 부인은 전통적으로 그 가문의 영지였던 실버브리지 자치구의 하원 의원이 되길 열망한다. 옴니엄 공작은 그녀가 ‘공작이 그 자치구를 다스리고, 공작의 아내가 공작을 다스리므로, 공작의 아내가 그 자치구를 다스린다는 유치한 정언 논증을 생각해냈다’고 말했다. 공작부인의 추론은 완벽히 타당하긴 하지만 정언 논증이 아니라서 하나의 정언 논증으로 형식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언논리는 오직 주어-술어 문장들만 다루도록 고안된 체계여서 관계 지술에 대처할 만큼 포괄적인 체계가 아닌데 반하여 그 추론은 ‘다스린다’가 이행적 관계라는 사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1-4. 정언적 추리의 또 다른 약점은 ‘모든’(all)이나 ‘약간의’(some)와 같은 낱말들이 문법적 술어의 어딘가에 나타나는 추리들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언 논증의 규칙들은 ‘모든 정치인들은 약간의(혹은 모든) 거짓말을 한다’와 같은 전제를 포함하는 추리의 타당성을 확인할 수 없는데, 이 경우 추리는 ‘약간의’ 혹은 ‘모든’이라는 낱말에 좌우된다.

1-5. 프레게는 자신의 『개념표기법』에서 처음에 이런 난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체계를 고안한다. 첫 단계는 주어와 술어라는 문법 개념을 ‘독립 변수’와 ‘함수’라는 새로운 논리적 개념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웰링턴이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라는 문장에서 ‘웰링턴’이 주어ㅣ고 ‘나폴레옹을 물리친 것’이 술어라고 말할 것이다. 프레게의 독립 변수와 함수 개념의 도입은 그 문장을 더 유연하게 분석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1-6. 그 방법은 이렇다. ‘웰링턴이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라는 문장에서 ‘나폴레옹’ 대신 ‘넬슨’을 넣는다 해보자. 그 문장의 내용은 바뀌고 옳은 문장이 그른 문장으로 변한다. 우리는 그 문장이 ‘웰링턴이 ..을 물리쳤다’라는 변하지 않는 성분과 ‘나폴레옹’이라는 대체가능한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프레게는 첫 번째 고정된 성분을 함수, 두 번째 성분을 그 함수의 독립변수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이 문장은 ‘나폴레옹’이라는 독립변수에 대한 ‘웰링턴이 물리쳤다’라는 함수 값이고, ‘웰링턴이 넬슨을 물리쳤다’는 ‘넬슨’이라는 독립변수에 대한 동일한 함수값이다.

1-7. 우리는 그 문장을 또 다르게 분석할 수 있다. ‘웰링턴이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는 ‘웰링턴’이라는 독립 변수에 대한 ‘..이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는 함수의 값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문장이 ‘웰링턴’과 ‘나폴레옹’이라는 독립변수에 대한 ‘..이 ..을 물리쳤다’는 함수의 값이라 말할 수도 있다. 프레게의 용어로 말하면 ‘웰링턴이 ..를 물리쳤다’와 ‘..이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는 단 하나의 독립 변수의 함수이고, ‘..이 ..을 물리쳤다’는 두 개의 독립 변수의 함수이다.

1-8. 주어-술어 구분과 비교해볼 때 함수-독립 변수 이분법은 문장들 사이의 논리적으로 관련 있는 유사성을 나타낼 수 있는 훨씬 더 유연한 방법이다. 주어-술어 부석은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했다’와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물리쳤다’ 사이의 유사성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지만,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했다’와 ‘폼페이우스는 갈리아를 회피했다’ 사이의 유사성은 나타낼 수 없다. 이것은 ‘카이사르’나 ‘갈리아’같은 고유 명사가 아니라 ‘모든 로마인’, ‘약간의 지역’과 같은 양화 표현을 포함한 정언 논증들에 나타나는 문장들을 취급할 때 논리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

1-9. 함수와 독립 변수 개념을 도입한 프레게의 다음 단계는 ‘모든’ 같은 낱말이 문장 속 어디에 나타나든 그에 의해 나타나는 일반성의 유형을 표시하는 새로운 기호 표현을 도입하는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가 옳은 문장이라면 ‘..은 죽는다’라는 함수는 ‘소크라테스’라는 독립변수에 대해 옳게 된다. 일반성을 표시하기 위해서 일정한 함수의 독립 변수가 무엇이든 그 함수가 옳게 된다는 것을 표시하는 기호가 필요하게 된다. 프레게가 도입한 기호 표현을 채택하면, 논리학자는 ‘..은 죽는다’라는 함수에 대한 독립 변수로 무엇이 들어가든 그 함수는 옳게 된다는 것을 이렇게 나타낸다.

(x)(x는 죽는다)

이것은 ‘모든 x에 대하여, x는 죽는다’라고 읽을 수 있으며, 어느 것이든 모두 죽는다는 진술과 동일하다. 일반성을 표시하는 이 기호는 함수와 독립 변수로 분석될 수 있는 문장들에서 완전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x)(신은 x보다 더 위대하다) = ‘신은 모든 것보다 더 위대하다’

이는 부정기호(‘~’)와 결합되서 ‘어떤 ..도 아니다’(no)나 ‘어떤 ..은 아니다’(none)을 포함하는 문장과 동등한 기호 표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x)~(x는 영생한다) = ‘모든 x에 대하여, x가 영생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 ‘어떤 것도 영생하지 않는다.’

프레게는 ‘약간의’와 같은 표현들을 포함하는 문장을 표현하기 위해 동치, ‘약간의 로마인은 겁쟁이다’와 ‘모든 로마인이 겁쟁이인 것은 아니다’ 사이의 동치를 활용했다. 프레게의 후계자들은 ‘약간의’를 표현하기 위해 편의상 ‘~(x)~’과 동등한 것으로 ‘Ex’라는 기호를 사용했다. 프레게의 기호 표현과 축약된 표현은 다른 정류의 사물들의 존재에 관한 진술을 만드는 데 사용될 수 있다.

(Ex)(x는 말이다) = ‘말들이 있다’

1-10. 프레게는 모든 종류의 대상들이 명명될 수 있으며 논리적 기호 표현의 독립 변수 자리는 어느 것이든 모두 그것의 이름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x)(x는 죽는다)’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만 아니라, 어느 것이든 모두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1-11. 사실상 그처럼 무제한의 일반적 진술의 경우는 드물고, 어떤 종류의 모든 것이 어떤 속성을 갖는다거나 일정한 어떤 속성이 다른 어떤 속성을 갖는다고 말하려는 경우가 훨씬 흔하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거나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온다’는 일상 언어로 이루어진 보편적 문장들은 프레게의 체계 안에서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의 술어 계산을 명제 계산과 접목시켜야 한다.

1-12. 프레게의 명제 논리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일상 언어의 ‘만일’과 조건부를 표시하는 기호이다. 고대 논리학자 필론은 ‘만일 p라면 q이다’라는 명제는, p가 옳고 q가 그른 경우에 그르고, 있을 수 있는 나머지 세 경우에 옳은 명제라고 말하며 명제를 정의했다. 프레게 역시 조건부를 나타내는 자신의 기호를, 그 기호가 일상 언어의 ‘만일 .. 라면’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의시켰다. ‘p→q’를 ’만일 p라면 q이다‘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 ’만일 태양이 비치면, 3×7=21’와 같은 명제들은 옳은 것이 된다. ‘만일’은 일상 언어에서 달리 작용한다. 프레게의 기호는 ‘만일’이라는 낱말의 가장 기본적인 것만 남긴 형태, 즉 ‘만일’을 포함하는 엄격한 증명의 형식화에 필요한 바로 그 의미 양상만을 정확히 포착하기 위해 고안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1-13. 프레게의 용어로 말하면, ‘..→..’은 문장을 독립변수로 하는 함수고, 그 값은 문장이다. 함수의 값인 문장이 옳은가 그른가는 오직 그 함수의 독립 변수인 문장이 옳은지 그른지에 달려 있는데, 이런 종류의 함수는 ‘진리 함수’라고 한다. 조건문뿐만 아니라 부정문도 진리 함수인데, 부정문은 부정되는 문장이 그를 경우에 옳고, 부정되는 문장이 옳은 경우에만 그르다.

1-14. 프레게는 이 두 기호의 도움으로 완전한 명제 논리 체계, 즉 (q→p)→(~p→~q)나 ‘~~p→q’와 같은 일정한 원초적 진리/공리 집단으로부터 바로 그 논리학의 모든 진리를 이끌어 내는 체계를 세웠다. ’그리고‘나 ’또는‘처럼 ’만일‘과 다른 연결사들은 조건부와 부정에 의해 정의된다. 프레게가 알아차렸던 것처럼, 연언을 원초적인 것으로 하는 다른 체계가 있을 수 있으며, 조건부는 연언과 부정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논리학에서는 연역이 연언보다 더 중요한데, 그 때문에 ’그리고‘가 아니라 ’만일‘을 더 원초적인 것으로 여긴다.

1-15. 논리학자들은 일찍부터 다수의 추리 규칙들, 한 명제에서 다른 명제로 넘어가기 위한 규칙들을 세웠다. 대표적인 것은 ‘“p”와 “만일p라면 q이다”로부터 “p”를 추리하는’ 전겅 긍ㅈ어 논법이다. 프레게는 자신의 체계에서 단 하나의 추리 규칙으로서 전건 긍정 논법을 이용해 논리학의 모든 법칙들을 증명한다고 주장햇다. 나머지 다른 규칙들은 체계의 공리이거나 공리로부터 증명된 정리이다. (대우)

1-16. 프레게의 명제 계산과 술어 계산을 함께 제시할 때, 우리는 일반성 기호와 조건부 기호 둘 다 이용하여 일상 언어의 보편적 문장들을 기호화할 수 있다.

‘(x)(Fx→Gx)’ = ‘모든 x에 대하여, 만일 Fx라면 Gx다’ = x가 무엇이든 ‘Fx’가 옳다면 ‘Gx’가 옳다.

1-17. ‘F’에 ‘사람이다’를 대입하고, G에 ‘죽는다’를 대입하면, 프레게가 ‘모든 사람은 죽는다’에 번역으로 제시하는 ‘모든 x에 대하여 x가 사람이라면 x는 죽는다’가 된다. 이것과 모순되는 ‘약간의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x)(x가 사람이다 →x는 죽는다)’가 된다. 이같은 번역을 통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언 논리의 모든 정리들이 자신의 체계의 일부분임을 입증할 수 있게 된다.

1-18. 프레게의 논리 계산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언 논리보다 더 체계적이고 또한 포괄적이다. 예를 들어, ‘모든 소년이 어떤 소년을 사랑한다 = (x)(x가 소년이다 → Ey(y는 소녀이다 & x가 y를 사랑한다))라는 문장과, ’어떤 소녀가 모든 소년의 사랑을 받는다 = (Ey(y가 소녀이다 & (x)(x가 소년이다 →x가 y를 사랑한다))라는 문장과의 차이를 표시할 수 있다.

1-19.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논리학자들은 일찍 일상 언어의 애매한 문장들에서 나타나는 의미의 차이를 드러내는 단순하고 명확한 방법을 찾으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이제 프레게 기호 체계의 마지막 통찰을 언급해보자.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소크라테스’를 독립변수로, ‘..는 죽는다’를 함수로 갖는데, 그런데 ‘..는 죽는다’ 자체는 더 높은 수준에서 작용되는 함수의 독립변수로 간주될 수 있다. 이는 이 함수가 한정된 독립 변수가 아니라 ‘(x)(x는 죽는다)’같이 양화사로 끝날 때 나타난다. 따라서 ‘(x)(x는..)’은 ‘..는 죽는다’라는 일차 함수에 대한 이차 함수로 간주될 수 있다. 프레게는 첫 번째 함수가 불완전하다는 점을 늘 강조했는데, 이는 두 방식으로 완전해질 수 있다. 하나는 독립 변수의 자리에 독립 변수를 끼워 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 변수 자체가 2차 함수의 독립 변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는 죽는다’에서 생략 부호 자리가 ‘모든 것’과 같은 양화사로 채워질 때 나타난다.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Ⅰ.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1-1. 최대 행복의 원리를 도입할 때 벤담은 통치자와 입법자에게 공동체의 경영에 관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만큼 개인의 도덕적 선택의 기준을 제공하는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공동체에서 행복의 총량과 행복의 분배까지 고려해야 하는 경우에, 최대 행복의 원리만으로는 신뢰할만한 결정 절차를 제공하지 못한다.

1-2. 행복을 측정하는 척도, 즉 0이 최대 불행이고 10이 최대 행복을 나타내는 0에서 10까지의 척도를 정립했다고 해보자. 어떤 사회에서 정치 제도와 법적 제도를 고안하는 데, 유효한 두 모델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모델 A를 선택하면 시민 60%가 6을, 40%가 4를 득점하게 되고, 모델 B를 채택하면 시민 80%가 10을, 20%가 0을 득점하게 된다. 이와 같은 선택에 직면할 경우, 평등이나 박애를 고려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델 B보단 A를 선택하려할 것이다. 하지만 벤담의 행복 계산법을 그대로 적용하면 모델 B는 총 800점인데 모델 A는 520점에 불과하다.

1-3.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원리는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 혹은 행복한 사람의 수를 극대화하는 것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에 도달한다. 따라서 분배적 정의에 크게 위배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으려면, 그 원리를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불균형을 어느 정도 제한하고, 빈곤층의 최저 생활을 보장함으로써 보완될 필요가 있다.

1-4. 벤담의 야심 찬 원리가 지닌 문제점들이 있음에도 그는 정치철학에 매우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그는 ‘사회 경영 가운데 순전히 사업 부분을 조직하고 조정할 때’ 최상의 능력을 보여준다. 그는 국가의 형사 처분을 다루는 대목에서 그의 재능을 십분 발휘한다.

1-5. 그는 처벌 제도의 목적에 대해 묻는다.

“처벌의 직접적인 주목적은 행위를 통제하는 것이다. 처벌은 범법자의 행위를 통제하거나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통제한다. … 전자의 경우 처벌은 교정(reformation)의 방식으로 작용하고 후자의 경우 처벌은 무력화(無力化, disablement)의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범법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통제는 그들의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 이외에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없는데, 이와 같은 경우의 처벌은 본보기(example)의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일컬어진다.” (P 13.1)

처벌은 고통을 가하는 것인 일종의 악이기에, 그것은 어느 정도 더 큰 악을 배제할 가망이 있을 경우에만 허용되어야 한다. 벤담은 해를 준 사람은 해를 당해야 정의롭다는 응보적(retributive) 처벌 이론을 거부한다. 처벌하는 일이 억제 효과나 치료 효과를 주지 않는 한, 응보는 악을 악으로 되갚는 것일 뿐, 정의의 균형을 되찾기는커녕 세상에 악의 총량을 증가시키기만 한다.

1-6. 비록 범법자에 대한 처벌이 전혀 억제 효과나 교정 효과를 주지 못하더라도 처벌하는 일은 피해자나 법을 준수하는 일반 대중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벤담은 처벌에 의해 산출된 쾌락은 결코 처벌에 의한 고통과 동등할 수 없기기에 어떤 처벌도 징벌적인 목적으로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1-7.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14장에서 벤담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응보 원리가 아니라, 처벌로써 잠재적 범법자에게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효과에 입각해 죄와 벌의 균형을 맞추는 규칙을 세웠다. 그는 장래의 범법자가 위법 행위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경우를 생각해봤고, 손해가 이익을 능가하도록 하는 것을 형사법의 기능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법은 위법 행위를 억제할 만큼 처벌을 해야 하지만, 동시에 필요 이상의 처벌을 해서도 안 된다. 즉 처벌은 절약(frugal)을 필요로 한다.

1-8. 억제가 처벌의 주목적이라지만, 그는 범법자에 대한 교화나 무력화와 같은 부차적인 목적을 인정한다. 교도소의 현실적 상황을 감안하면 교화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벤담은 몇 가지 특수한 교화 제도를 제안한 적 있다. 감금은 범법자에 대한 일시적 무력화의 효과를 지니지만, 가장 효과적인 무력화는 사형이다. 벤담은 ‘그와 동시에 이런 처벌은 너무 과도한 처벌인데, 이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에도 사형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는 많은 반론들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P15.19)고 진술한다.

1-9.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철학은 도덕철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벤담에게 많은 신세를 지긴 했으나, 그는 자기 스승의 엄격한 공리주의를 완화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자연권을 부인하는 벤담의 체계는 경우에 따라 지극히 독재적인 정부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실질적인 침해를 원리상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의 체계는 밀이 젊은 시절에 지껄인 적이 있고,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 체계를 탄생시켰던 초기 형태의 사회주의 또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원숙한 나이에 이른 밀은 사회 제도가 원리상 아무리 호의적이라 할지라도 개인의 독립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제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 여겼다. 그는 콩트의 실증정치학 체계를 ‘정신적인 스승과 통치자들로 이루어진 조직체에 의해 일반 여론을 지배함으로써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의 행위를 통제하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생각을 통제하려는’ 책략이라 했다. 그는 콩트가 ‘지금까지 인간의 머리로 생각해 본 적 없는 가장 완벽한체제의 정신적이고 세속적인 독재’를 제의하는 것에 대해 공공연히 비난했다. 『자유론』(On Liberty)에서 밀은 그 동기가 공리주의나 사회주의나 실증주의에 있건 부당한 권위주의적 침해로부터 개인을 보호할 수 있는 일반적인 자유주의 원리를 세우려고 했다.

1-10. 민주 사회에서는 다수가 소수를 폭압할 수도 있기에, 밀은 전제 군주 정치를 신뢰할 만한 민주 정치로 대체한다고 해서 자유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사회가 더 교묘한 다른 억압 수단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의 권력을 제한한다고 자유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과 감정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말하자면 사회의 관념과 관습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민사처벌 이외의 수단을 동원하여 관념과 관습을 행위 규칙으로 강요하는 사회적 성향으로부터, 그리고 사회의 풍습을 거스르는 개성의 발달을 가로막음과 동시에 되도록 그와 같은 개성이 아예 형성되지 못하게 하려는 사회적 성향으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다.” (L 130)

물리력이나 여론에 의한 강압을 정당하게 제한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제약에 따라야 하는 유일한 행위는 타인과 관련된 행위뿐이라는 것을 근본 원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단순히 자기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행위에서는 행위자의 독립적인 지위가 절대적이어야 한다.

1-11. 이 원리는 사상의 자유, 이를테면 말하기와 글쓰기의 자유에 중요하게 적용된다. 밀에 따르면 독재적 권력이든 민주적 권력이든 어느 권력도 의견의 표현을 억압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 ‘비록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인류가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한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이 부당한 것은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잡았을 때 인류를 침묵시키는 것이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이다.’(L 130) 이것이 부당한 것은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 인류 전체를 유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완전히 그른 의견조차도 반대 의견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진리라는 것이 단순히 어느 한 쪽에 치우친 견해이나 공식적인 선언이 아님을 확인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밀은 의견을 가질 자유와 의견을 표현하는 자유야말로 인류의 정신적 행복을 위한 필수 요소라고 결론짓는다.

1-12. 하지만 의견의 자유가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견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하며, 신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이웃에게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자유가 타인을 해칠 권리까지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해악을 선동하는 것인 상황에는 언론의 자유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인이나 타인의 관심사가 오로지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진정한 의미의 동의와 참여’일 경우에는 다양한 인물과 삶이 폭넓게 허용되어야 한다. 개인의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개인 자신의 인격이어야지 다른 사람의 전통이나 관습이어서는 안 된다. 만일 이 원칙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인간 행복의 주요 요소들 중 하나를 상실하는 것이며, 개인적 진보와 사회적 진보의 중요한 요소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 된다.’ (L 185)

1-13. 개성이 없으면 인간은 외부에서 부과한 모형을 따르는 기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도처에서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고 발육시키는 한 그루 나무이다.’(L 188) 만일 특이한 행동이 배척당한다면, 강압을 받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피해를 입게 된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함으로써 한때 진리였던 것이 이제 더 이상 진리가 아님을 알려주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관행을 시작함으로서 인간의 삶에서 더 계몽된 행위의 모범을 보이고 더 나은 취미와 감각의 모범을 보이는 사람들이 항상 필요한 법이다.’(L 193) 여론이 세상을 지배하고 개인이 군중 속으로 사라져 갈 때야말로 어느 시대 보다 정열적이고 비정통적인 인물이 필요하게 된다.

1-14. 밀이 ‘실험적인 삶’을 권장할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그는 그 행동의 실례를 제시하기보다 일련의 풍부한 은유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해설한다. 밀이 자신의 원칙들을 실제에 적용할 때, 천재성의 계발을 억제하는 법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사람들의 평범한 행동을 방해하는 법률을 비난하는 선에 그친다.

1-15. 밀이 일상적인 관례를 따르지 않도록 장려할 때 깊이 간직한 본보기는 자신이 결혼하기 전 오랫동안 해리엇 테일러과 맺었던 인습에서 벗어난 관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게도 모르몬교의 일부다처제 승인을 실험적인 삶의 본보기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탐탁찮게 생각했다. 그가 인정한 이런 실험적인 삶은 ‘공동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쇠사슬로 옭아매 놓고,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에게는 호혜적 의무를 면제해 주고 있기’(L 224) 때문에, 자유주의의 원리와 정면으로 상충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여성들은 결혼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세상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많은 여성이 아예 결혼을 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여러 아내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밀은 일부다처제를 권유하지 않으면서도, 모르몬교들이 일부다처제를 포기하도록 강압하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1-16. 1851년 결혼에 즈음하여 밀은 계약 당사자의 인격과 재산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한쪽 당사자에게만 일방적으로 부여한 법에 반대하는 항의서를 제출했다. 그는 『여성의 종속에 관하여』라는 소책자에서 영국의 혼인법에 대한 반론을 구체적으로 제기했다. 한 성이 다른 성에 법적으로 종속되는 것은 원칙상 잘못이고, 인간의 진보에 대한 주요 장애물이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고용된 사람이고 평생 그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고 아내가 취득한 재산은 곧바로 남편의 손에 넘어가는, 어떻게 보면 아내는 노예만도 못했다.

1-17.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은 남성의 더 강한 근력에서 비롯되었고, 순전히 남성의 이기심으로 인해 문명의 시대에 계속 이어졌다. 현재의 남성 우월체제가 어떤 대안보다 더 낫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어떤 대안도 시도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은 긴 세월 훈련을 통해 남성 우월 체제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양육되었다.

“첫째, 이성은 서로 자연스럽게 매력을 느낀다는 것, 둘째, 아내는 전적으로 남편에 달려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인간적인 추구와 고려 대상 및 사회적인 야망의 대상은 오직 남편을 통해서만 추구되거나 획득될 수 있다는 것, 이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볼 때,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대상을 여성 교육과 인격 형성의 길잡이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을 것이다.”(L 487)

여성들이 굴레를 벗어나려 하지만 주인에게 반항하는 것은 폭군에게 반항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남성들의 포학함이 다른 온갖 형태의 권위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공리주의의 수정~단념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견해

공리주의의 수정

1-1. 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과 마찬가지로 결과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아주 공격적으로 여겨졌던 벤담의 학설을 다른 방식으로 완화시켰다. 우리는 쾌락을 양적으로 구별할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구별하게 된다.

1-2. 그렇다면 쾌락의 서로 다른 종류를 어떻게 등급으로 나눌 것인가? 밀에 따르면, ‘두 가지 쾌락이 있는데, 둘 다 경험해 본 사람 모두 또는 거의 모두가 어떤 도덕적 의무감과도 관계없이 그 중 어느 하나를 선호한다면, 바로 그것이 더 바람직한 쾌락이다.’

또한 지성적이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온갖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무식한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만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족스러워 하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1-3. 밀에 따르면, 행복은 만족뿐만 아니라 자존감을 필요로 한다. 저급한 쾌락이 제아무리 많다고 한들 자존감이 없으면 행복이 아니다. 따라서 최대 행복의 원리는 다시 진술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자의식과 자기 관찰의 습관을 갖게 된 사람들은 질의 시금석 및 질을 양과 대비해서 측정하는 척도를 선호함으로써 최선의 비교 수단을 갖추게 된다. “

1-4. 어느 비판자가 공리주의는 돼지처럼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는 밀의 말을 시인한다고 해보자. 그럼에도 그 비판자는 공리주의가 최상의 인간성에 호소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덕은 행복보다 중요하고, 절제와 자기희생의 행위는 가장 훌륭한 인간 행위이다. 밀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행복을 단념하는 것이 숭고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홀로 고행을 감수하는 금욕주의자를 감탄스럽게 바라보는 것과 그런 식의 감탄은 받을 만하다.’

1-5. 공리주의에 대한 반대는 두 가지 다른 형식으로 나타난다. 도덕률로서의 공리주의는 너무 엄격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고, 너무 느슨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공리주의가 너무 엄격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거의 성인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이타주의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공리주의가 너무 느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떤 종류의 행위에 대한 절대적 금지를 융통성 있게 폐지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용문 무슨 연관,,?)

1-6. 에서 밀은 두 전선을 모두 방어하려고 한다.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주장에 대적하여 그는 도덕적 표준과 행위 동기를 구별하라고 강조한다. 말하자면 공리주의가 모든 사람의 행복을 궁극적인 도덕적 표준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행복이 모든 행동의 목적일 필요는 없다.

1-7. 밀 자신이 가장 진지하게 취급하는 공리주의의 난점은 공리주의가 정의보다 편의를 더 선호하는 수단이라는 주장이다. 밀은 정의의 명령이 사실은 일반적인 편의 영역의 일부에 해당하지만, 그럼에도 편리한 것, 도덕적인 것, 공정한 것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고 응수한다. 어떤 것이 편리하다면, 공리주의적 근거에 따라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전혀 의무의 문제를 관련시킬 필요가 없다. 어떤 것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기도 하다면 의무가 발생하며, 의무를 완수하도록 정당하게 강제될 수 있다는 것은 의무 관념의 중요 요소이다. 즉 밀의 경우, 정의와 도덕적 권리 사이의 관계를 특징짓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불공정한 법적 권리가 있을 수 있고, 법과 상충되는 공정한 요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1-8. 밀은 정의와 관련 있는 여러 관념들이 공리주의적 편의의 원리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최대 행복의 원리에 내재하는 문제, 즉 공동체에서 행복의 전체 총합을 늘리다 보니 도외시된 개인의 불행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는다.

1-9. 그뿐 아니라, 에서 밀은 분배적 정의의 형식이 체제마다 서로 다르게 제공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 말고는 분배적 정의에 관해 거의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2- 단념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견해

2-1. 쇼펜하우어의 윤리적 가르침은 그의 형이상학, 특히 경험 세계는 환상에 불과하고 진정한 실재인 물자체는 보편적 의지라는 주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개체들이 무에서 생겨나 선물로 생명을 얻은 다음 죽을 때 이 선물을 놓고 다시 무로 되돌아가는 것을 본다. 그러나 생명을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모든 현상 속의 물자체인 의지는 결코 생사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2. 죽음은 개체성이 망각된 수면일 뿐이다. 하나의 개체가 또 하나의 개체와 구분되는 것은 현상에 불과하다. ‘물자체로서의 개체는 모든 것에 나타나는 의지이며, 죽음은 한 개체의 의식이 나머지 개체의 의식과 다르다는 착각을 없애 버린다. 이것이 내세 혹은 불멸이다.’

2-3. 도덕은 인격 수양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말인지는 우리가 칸트의 자유와 필연성의 조화를 받아들일 경우 쇼펜하우어에 따라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물자체인 의지는 영원토록 자유롭지만, 인간의 본성을 포함하여 자연의 모든 것은 필연성에 의해 결정된다. 물자체인 의지는 영원토록 자유롭지만, 인간의 본성을 포함하여 자연의 모든 것은 필연성에 의해 결정된다.

2-4. 우리의 모든 윤리적 행위가 인격에 의해 결정된다면,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쓸데없는 고생이므로, 행위로 나타나는 온갖 성향을 그 자체로서 만족스러운 것으로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거부하면서 인격을 여러 종류로 구별한다. 예지적 인격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근원적인 실재이고, 시간 바깥에 있으며,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상황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결정하는 것이다. 또한 경험적 인격이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경험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예지적 인격의 본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획득된 인격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인격의 본성과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이 갖게 되는 인격이다. 이런 사람들은 가장 좋은 의미의 인격을 가진 사람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있고, 그에 맞게 자신의 계획가 야망을 마름질하는 사람들이다.

2-5. 우리의 의지는 결코 변할 수 없지만, 우리의 의지를 인식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추상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충하는 동기들을 방치하지 않고 그 상충을 알아차리는데, 이것이 바로 선택을 가능하게 해 준다. ‘우리 자신의 정신과 온갖 종류의 정신 능력에 대한 인식, 그리고 변경할 수 없는 정신 능력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우리 자신에 대해 최고로 만족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2-6. 쇼펜하우어는 최상의 인간에 대해서조차도 만족스러워할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의지의 피조물이고, 그 본성을 향한 의지는 만족을 모른다. 모든 의지의 기초는 결핍과 고통인데, 우리는 결핍이 충족될 때까지 줄곧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일단 충족되어 의지가 욕구할 대상이 없어지면, 인생은 권태라는 무거운 짐이 된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진자처럼 흔들린다’.

2-7. 의지의 포학을 피하는 아주 확실한 방법은 완전한 단념에 있다. 의지는 언제나 삶을 의욕한다. 그러므로 의지와 관계를 끊으려면, 삶에 대한 의지를 끊어야만 한다.

2-8. 단념은 자기 자신을 단념하는 것이며, 도덕적 진보는 이기주의, 다시 말해서 개인이 그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서 그 자신의 삶과 행복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키려는 경향성을 감소시키는 데 있다.

2-9. 일상적인 평범한 나쁜 사람은 자신의 의지는 모든 것에 작용하는 단 하나의 삶에 대한 의지의 현상적인 겉모습일 뿐임을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후회를 할 때 고통이 나타나게 된다. 나쁜 사람의 후회는 좋은 사람의 징표인 단념의 반대 개념이다.

2-10.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 사이에 중간 인격, 즉 공정한 사람이 있다. 나쁜 사람과 달리 공정한 사람은 개체성을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는 절대적인 장벽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자신과 똑 같은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 만큼 타인의 삶에 대한 의지가 자기 자신의 의지와 동일한 수준에 있는 것으로 기꺼이 인정한다.

2-11. 정말 좋은 사람의 경우에는 개체성의 관문에 들어가기가 훨씬 더 용이하며, 개별화의 원리는 더 이상 절대적인 장벽이 아니다. 나쁜 사람은 자신과 타인이 현격하게 다르다고 보는 반면, 좋은 사람은 그 구별이 무상하고 공허한 현상에 속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2-12. 그러나 선행과 자비가 최고의 윤리적 상태는 아니므로 좋은 사람은 곧바로 그것을 뛰어넘고자 한다. “모든 존재 속에서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진실한 자아를 깨닫는 그런 사람은 또한 고통을 겪는 모든 존재의 무한한 고통을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간주하고, 온 세상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명확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좋은 사람은 덕행을 뛰어넘어 금욕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남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현상적인 삶에 나타나는 온갖 것에 혐오감을 갖게 될 것이며, 비참한 이 세계의 씨앗인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려고 할 것이다.

2-13. 쇼펜하우어는 종교적 진리를 적나라한 형태로 제시할 경우 교육받지 못한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기 어렵기 때문에 그 진리에 신화적인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 종교 체계들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는 ‘철학자가 성인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성인도 철학자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2-14. 쇼펜하우어의 산문의 효력과 은유의 매력은 그의 윤리 체계가 숭고하다는 인생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의 윤리 체계는 그릇된 형이상학에 기초해 있고, 자기 자신을 무능력하게 한다. 세계가 환상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믿거나 만족할 줄 모르는 의지가 궁극적 실재라고 인정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2-15. 쇼펜하우어는 왜 최종적으로 금욕주의 프로그램을 채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염세주의에 치우친 생각 말고는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자비로운 사람일수록 확실히 자신의 살을 타인의 살과 더 많이 동일시하려고 한다지만, 왜 자신의 삶을 기쁨과는 관련짓지 않고 고통하고만 관련짓는 것일까?

2-16.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의 완전한 단념은 용어상의 모순인 것 같다. 왜냐하면 단념이 자발적인 것이라면 그 자체가 의지의 작용이며, 단념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진정한 단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의 도덕적 상승과 니체의 가치전도

Ⅰ. 키르케고르의 도덕적 상승

 

1-1. 키르케고르의 도덕 체계는 쇼펜하우어의 도덕 체계와 많이 비슷하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의 도덕적 조건에 대해 철저히 염세주의적이고, 단념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발전 과정을 나타낸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체계는 무신론적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하는 반면, 키르케고르의 체계는 개신교 신앙을 배경으로 전개되고, 그에게 도덕적 인생의 최고점인 단념은 결국 신앙으로의 도약을 위한 준비 단계일 뿐이다. 쇼펜하우어의 프로그램은 개체성(individuality)을 없애는 쪽으로 나아가는 데 입안된 반면, 키르케고르의 목적은 유일무이한 신의 피조물인 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완전히 소유하는 데에 있다.

1-2. 키르케고르의 현재 관심사는 심미적 단계와 종교적 단계 사이에 있는 도덕적 단계다. 그가 말하는 심미적인 사람은 자신의 느낌에 좌우되고 정신적 가치에 무감각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심미적인 사람을 힘 좋은 시골뜨기 혹은 성도착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사람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두 주인공 중 한 사람으로, 세련되고 법을 잘 지키고 사회에서 인기 있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 사람이 진지한 도덕적 행위자와 다른 점은, 직접 매력을 느끼는 것이면 곧바로 추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선택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관공서나 개인 사무소에서 일을 하지 않으려 하고, 깊은 우정을 맺는 것이나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한다.

1-3. 키르케고르는 사실 자유는 지극히 제한적이라서, 심미적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을 지하실과 1층 2층으로 이루어진 집으로 설명한다면, 인간의 영혼은 정신적 존재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심미적 인간은 지하실, 심미적인 것의 범주 안에 거주하길 좋아하고 자신의 지하실만 사랑한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그와 같은 인간은 절망 상태에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말하는 ‘절망’은 침울하거나 낙담한 상태가 아니다. 심미적인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다. 키르케고르의 어법에 따르면, 절망한 사람은 현재의 삶보다 더 높은 무언가를 성취할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절망하는 것은 더 높은 정신적 자아를 성취할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이러한 절망은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세상의 볼모가 된다’고 말한다.

1-4. 구원을 향한 첫 번째 단계는 세상 사람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심미적 사람의 행복 깊숙한 곳에 이미 불안한 공포가 깃들여 있고, 그 자신의 방탕으로 인해 자신이 해체된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른다. 그는 절망하는 자신을 포기할 건지, 아니면 자신을 도덕적 인생으로 넘겨 상승의 길을 갈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1-5. 도덕적 인생의 본성 그리고 도덕적 인생을 살아야 할 필요성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제 2부 가명 저자 빌헬름 판사의 편지에서 상세히 설명된다. 빌헬름 자신은 도덕적 사회의 완전히 헌신적인 구성원이다. 유감스럽게 독자가 보기에 그는 답답하고 반복하는 방식의 문체를 사용하는데, 이 문체는 이제 교화시키는 편지의 수령인이 된 『이것이냐 저것이냐』 제 1부의 심미적 저자에게 키르케고르가 부여한 익살맞은 통속 소설같은 문체와 완전히 구별된다.

1-6. 빌헬름은 심미적 인격과 도덕적 인격 사이의 큰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모든 심미적 인생관이 절망이라고 말하는데, 이 인생관이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기반으로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적 인생관은 존재에 속하는 것을 그 인생관의 본질적 속성으로 삼아 인생을 설립한다. 심미적인 것은 어떤 사람이 현상태의 바로 그 사람이도록 하고, 도덕적인 것은 어떤 사람이 앞으로 다른 어떤 사람이 되도록 한다.”

키르케고르는 자아(self) 개념을 매우 중요시 했다.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의 재능이나 덕을 갖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자아를 갖기를 결코 진지하케 원할 수 없다. 심미적 단계의 자아는 성숙하지 못했고 개별화되지 않았다. 도덕적 단계에 들어가는 진정한 자아 형성을 하는데, 여기서 ‘자아’는 자유롭게 선택도니 인격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 단계의 자아는 자신의 재능을 개발하기만 하지 않고, 자신의 소명 의식을 따른다. 도덕적 인생은 의무의 인생으로, 이때의 의무는 외부에서 가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에서 깨달은 의무이다. 개인의 진정한 발전은 보편 법칙의 내면화를 포함한다.

“개인 자신이 보편적인 것일 때야 비로소 도덕적인 것이 실현될 수 있고, 이것이 양심의 비밀이다. … 그는 자신을 보편적인 사람으로 만드는데, 자신의 구체성을 스스로 벗어 버림으로써가 아니라, 스스로 구체성의 옷을 입은 채 그것에 보편적인 것을 침투시킴으로써 보편적인 사람으로 만든다.”(E/O 547)

외국어 문법을 보면 어떤 특정한 낱말이 명사의 어형 변화와 동사의 형태 변화를 예증하는 모범 사례로 선택되는데, 그 낱말은 개개의 명사와 동사 모두에 관해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이처럼 빌헬름이 따라야 할 모범 사례는 개인적인 덕의 습득 통해서, 시민의 덕을 통해서 인도하고, 최종적으로 종교적인 덕으로 마무리한다. 키르케고르가 도덕적 사람의 모범 사례로 제일 많이 선택한 사람은 소크라테스로, 그의 삶은 도덕적 단계가 개인에게 엄격한 요구를 할 수 있고, 영웅적인 자기 희생을 요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증했다.

1-7. 빌헬름 판사는 그의 체계에서 도덕적인 것이 최고 범주가 아니기 때문에, 도덕성에 관한 키르케고르의 최종 발언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 자신이 도덕적 인생의 두 가지 특징인 직업도 갖지 않았고, 자신과 가족의 기구한 운명으로 행복한 결혼의 필수 요소를 실행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이 도덕적 인생의 요구 사항들에 직면할 때 인간의 나약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고, 강인한 의지로 나약함을 극복하려 하지만 역부족임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덕 법칙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이것을 그는 죄책감과 죄의식으로 끌고 간다. 이 상태를 벗어나고 싶다면, 도덕적 영역으로부터 ‘신앙의 영역’인 종교적 영역으로 도약, 상승해야만 한다.

 

 

Ⅱ. 니체와 가치 전도

2-1. 니체는 기독교적인 삶을 살도록 요구하는 것이 근거에 입각해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라는 키르케고르의 견해에 동의했으나, 그는 ‘단순한 근거라도 그만큼 더 나쁘다’고 한 반면 니체는 ‘기독교 신앙을 요구하면 그만큼 더 나쁘다’고 단언했다. 니체는 기독교 신앙이 인간을 비겁하게 만들고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것이 주된 불만이었다. 『도덕의 계보』와 같은 저작들에서 그는 기독교 도덕의 주장들에 관한 논박이 아닌 비천한 혈통을 추적한다.

2-2. 니체는 역사에 두 가지 종류의 도덕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고대의 강력한 특권 귀족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계급에 속한다고 느끼고, 자시의 자질들을 ‘좋은 것’으로 묘사했고, 평민의 특성을 ‘나쁜 것’으로 간주했는데, 이것이 바로 주인도덕(master morality)이다. 귀족들의 능력과 재산을 불쾌히 여기고 가난하고 약한 자는 이 체제를 완전히 뒤엎어서, 하층민을 위한 대조적인 가치 체계를 세웠다. 그들은 귀족형의 사람을 나쁜 사람 그리고 흉악무도한 사람으로 보았다. 니체는 이 새로운 체제의 설립을 ‘가치 전도’라고 불렀고, 이를 유대인 탓으로 돌렸다.

“귀족의 등식을 뒤바꿔 정반대 등식을 놀라울 만큼 일관된 논리로 과감하게 제시하고 뿌리 깊은 증오의 힘으로 그 등식을 끝끝내 고수한 것은 유대인들이었다.”(GM 19)

유대인에 의해 시작된 노예의 반란은 기독교의 상승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귀족적 덕의 고국이었던 로마에서도 네 명의 유대인 예수, 마리아, 베드로, 바울에게 머리 숙여 경배한다.

2-3. 기독교 자체가 사랑의 종교를 표방하지만, 니체에 따르면 사실 나약함과 공포와 악의의 종교다. 기독교의 주된 동기는 원한, 즉 약자가 강자에게 복수하려는 욕구로, 이 욕구는 죄인을 벌하려는 욕구로 가장되어 있다고 니체는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신 명령의 집행자인 양 행세하지만, 사실 그들의 떳떳하지 못한 마음을 숨기는 것일 뿐이다. 기독교인들은 동정심을 덕으로 떠받들지만, 그들이 고통 받는 자를 돕는 것은 그들을 대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연민은 온정적인 사람에게 타인의 고통을 감염시키는 독약이다.

2-4. 기독교의 성공은 인류의 퇴보를 가져왔다. 나약한 자에 대한 제도적인 배려는 인류의 건강과 강인함을 해치게 되었고, 현대인은 진정한 인간이 되려는 의지를 상실한 난쟁이에 불과했다. 인류가 타락에서 구원받으려면, 첫 번째 단계는 제 2의 가치 전도를 단행하여 기독교의 가치를 뒤엎는 것이어야 한다. 니체는 『반기독교』에서 ‘나약한 자와 실패한 자는 멸망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인류를 사랑하는 첫 번째 원칙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인간 진화의 상향선을 그리는 ‘상승하는’ 사람들과 하향선을 그리는 ‘하강하는’ 사람들, 두 유형으로 나뉜다.

2-5. 그러나 우리가 뒤엎어야 할 것이 기독교 도덕만이 아니라, 노예 도덕의 특징인 선과 악의 대립도 넘어서야 한다. 진리를 근본적인 가치로 간주하는 것은 기독교인만이 아니다. 하지만 니체는 판단이 잘못이라는 이유만으로 판단에 반대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문제는 판단이 어느 정도까지 생명을 활성화하고 생명을 보존하며, 어느 정도까지 종을 보존하고 경우에 따라 종을 향상시키기도 하느냐는 것이다. … 허위를 삶의 조건으로 인정하고 전통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이런 일을 감행하는 철학은 이미 그 자체가 선과 악을 넘어 저편에 있다.”(BGE 7)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없이는 특정한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과오다. 생명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고의 가치다. 인간의 생명은 지금까지 발생한 최고 형태의 생명이지만, 현대 세계에서 인간의 생명은 그에 앞서 발생한 일부 형태의 생명 수준으로 퇴보했다. 우리는 생명을 확인해 그것을 새로운 수준, 즉 주인과 노예에 대한 정립과 반정립을 초월하는 종합의 상태인 초인(超人, Ubermensch)의 수준으로 이끌어야 한다.

2-6. 초인의 선은 니체의 신탁과 같은 대변인 차라투스트라의 예언적 메시지다. 초인은 삶의 최고 형태, 삶에 대한 의지에 대한 최종 확인이다. 우리의 삶에 대한 의지는 모든 생명의 비밀인 힘에 대한 의지(will to power)여야만 한다. 쾌라은 힘의 발휘에 대한 자각에 불과하고 지식은 힘의 도구에 불과하다. 인간 능력의 최고의 실현은 초인의 창조일 것이다.

2-7. 인간성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초인에 이르는 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다. 즉 인간은 건너야 할 다리지 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초인은 진화의 힘이 아니라 오로지 의지를 발휘함으로써 나타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의지로 하여금 “초인이 세상을 의미있게한다”라고 말하게 하자.’

2-8.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그대들은 반드시 초인을 창조할 수 있다. 그대들 자신은 혹시 초인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대들은 자신을 초인의 조상이자 선구자로 변형시킬 수 있다.’ 초인이 등장함으로써 세상이 완벽해지고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역사는 영구히 순환하기 때문에 초인의 등장은 역사의 종말이 아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초인과 같이 무수한 초인이 등장할 것이다.

2-9. 초인은 어떤 존재인가? 만약 초인의 특성이 인간의 선과 악을 판단하는 어떤 기준이 된다면 우리는 초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 필요가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도, 후기의 니체도 더 이상 초인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더 높은 수준의 인간’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는데, 우리는 저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다양한 재능을 최대한 개발한 괴테와 나폴레옹의 조합이 니체의 이상인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이 조합은 ‘그리스도의 영혼과 카이사르’의 조합보다 더 그럴 듯하다.

2-10. 니체의 저작은 대개 종잡을 수 없고, 학자들마다 해석과 평가가 천차만별이라 니체의 윤리학을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니체가 잔임함의 도덕성과 같은 그런 문제에 어떤 입장인지 알기 쉽지 않다. 그는 노예 도덕에서 죄책감이 하는 역할을 집요한 광신자가 가하는 고문을 격렬하게 묘사하는 반면, 귀족적인 ‘금발의 야수’의 난폭함에 대해서는 온정적인 묘사를 한다.

2-11. 확실히 니체는 전쟁에 관한 열렬한 지지자로, ‘전쟁을 단념하는 것은 위대한 삶을 단념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전쟁은 자유를 교육시키고 자유는 승리를 즐기는 남성적 본능이 행복에 대한 욕구를 비롯해 다른 본능들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2-12. 자살 역시 어떤 상황에서는 니체의 칭찬 대상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자랑스럽게 살 수 없다면 자랑스럽게 죽어야 한다. 자유롭게 선택된 죽음, 아이들과 입회인들에 둘러싸여 기꺼이 즐겁게 맞이한 적절한 시기의 죽음 – 작별을 고하는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 진정한 작별이 여전히 가능하도록 하는 죽음 – 이 모든 것은 기독교가 죽음을 맞이하여 행하는 섬뜩하고 가련한 희극과 대조를 이룬다.”(TI 61)

당신이 자살을 한다면, 매우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생존권은 대부분 당신에게 달려 있다.

2-13. 그래도 어쨌든 니체는 윤리학자인가? 그는 선과 악에 대해 좀처럼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진정한 도덕가인가, 아니면 옳고 그름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철저한 무도덕한(amoral) 사람인가? 니체는 과거의 몇몇 훌륭한 도덕가들과 동일한 분야에 속해 있다. 반면 니체 자신은 선과 악은 기발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과 악의 범주를 완전히 초월해 있다고 공언한다. 그는 대부분의 도덕 체계에 포함되어 있는 정의와 죄책감 이 핵심 개념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2-14. 내가 생각하기에 해결책은 니체가 인간의 번영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전통 도덕과 나누어 갖는 것이다. 그가 여러 관습적 덕을 비난하는 이유는 관습적 덕이 가치있는 삶을 성취하도록 돕지 않고 훼방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선함보다 위대함을, 신사보다 귀족을 선호하며, 근본적으로 자신은 좋은 삶의 도덕적 기준보다 미적 기준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상적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뿐더러 아예 이웃을 갖지 않는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1.1대부분의 도덕 체계에서 행복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도덕철학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오랜 세월동안 행복을 최고선으로 간주했으며 심지어 인간이 모든 선택 상황에서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벤담이 모든 행위가 행복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향성에 따라 평가되어야한다고 했을 때 그 의견은 오랜시간동안 지속된 대다수의 의견을 재천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벤담의 최대 행복의 원리는 전통적인 행복주의(eudaimonism)와는 매우 다르다.

우선, 벤담은 행복과 쾌락을 동일시했다. 행위의 최고 원동력은 쾌락으로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pain)과 쾌락(pleasure)이라는 두 군주의 지배를 받게 했다. 고통과 쾌락만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도록 하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알려 준다. 두 군주는 한 손에는 옳고 그름의 깃발을, 다른 손에는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붙잡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가 복종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일수록 그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될 따름이다.

따라서 벤담의 경우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은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플라톤이 덕을 쾌락과 고통의 올바른 선택이라고 보기 때문에 공리주의자들은 플라톤을 선조로 삼기도 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과 쾌락을 구별하고 특히 행복을 감각적 쾌락과 동일시했다. 하지만 벤담은 행복을 쾌락과 동등한 것으로 보고 쾌락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감각으로 간주했다.

1.2벤담은 괘락이 먹고 마시고 성행위를 함으로써 일으켜질 수 있는 감각일 뿐만 아니라, 부를 얻는 것, 동물을 돌보는 것, 신이 좋아서 믿는 것처럼 다양한 수많은 다른 것들에 의해서도 일으켜질 수 있는 감각이라는 점을 주의 깊게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벤담의 쾌락주의(hedonism)는 관능적 충동과 다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쾌락은 즐거운 활동인 반면 벤담의 경우 즐거운 활동과 그에 따른 쾌락은 인과관계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쾌락의 가치는 즐기는 활동의 가치와 동일한 반면 벤담에게 개개인의 모든 쾌락의 가치는 그것이 어떻게 일으켜지든 간에 동일한 것이다. 벤담은 ‘쾌락의 양이 같다면, 압정놀이나 시나 매한가지다.’라고 했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고통의 양은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고통의 부정적 가치를 측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리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쾌락과 고통의 정량화이다. 벤담은 이 일이 결코 사소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쾌락과 고통의 측정법을 내놓았다. 만일 쾌락 A가 더 강하고, 더 오래 지속되고, 더 확실하고, 더 가까이 있다면 쾌락 B보다 양이 더 많은 것으로 계산된다. 이 같은 요인들은 ‘행복계산법(felicific calculus)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하고 서로 비교 검토되어야한다. 우리는 여기서 생산성과 순수성도 고려해야하는데, 생산성은 유쾌한 행위가 계속 연달아 쾌락을 산출하는 것을 말하고 순수성은 그렇게 계속 지속하지 않을 경우를 말한다. 또 만일 공공정책을 고려중이라면 우리는 더 나아가 고통과 쾌락이 그 집단을 가로질러 얼마나 널리 퍼져 나가는 지에 대한 확장성을 고려해야한다.

2.1.그러나 이러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인상적인 슬로건을 면밀히 조사한다면 애매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첫 번째 제기되는 의문은 ‘무엇이 최대 다수인가?’이다. ‘유권자’, ‘시민’, ‘남성’, ‘인간’, ‘의식 있는 존재’ 등 무엇이 최대 다수에 해당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공리주의에 열성적인 추종자들은 대부분 ‘인간’이라고 답했을 것 가고 이것이 벤담이 제시했을 법한 대답으로 여겨진다.

최근에 많은 공리주의자들은 동물들도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면서 행복 원리를 인류를 넘어 그 밖의 의식 있는 존재들에까지 확장하였다. 벤담이 고양이 애호가였다해도 그는 자연법 권리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까지 동물들에게 권리를 확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감각의 문제를 최고의 도덕적 기준으로 설정함으로써, 동물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동물들을 우리 자신과 동일한 도덕 공동체로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벤담이 고전적이고 기독교적인 도덕전통을 깨뜨린 것으로 가장 의미심장한 귀결들 중 하나가 되었다.

2.2공리성 원리에 관한 두 번째 의문은 이렇다. 개인이나 정치가는 최대 행복의 원리를 따를 때 행복의 대상자 수를 통제하려고 해야만 하는가? 행복을 더 많은 수의 행복으로 확장한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또는 동물들)이 생겨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더 까다로운 의문, 어떤 집단의 행복을 측정할 때 오로지 전체의 행복만 고려하는가, 아니면 평균적인 행복도 고려해야하는가? 행복의 양뿐만 아니라 행복의 분배도 고려 대상으로 삼아야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의 양과 사람 수 간의 조화 문제에 직면한다.

이 쟁점은 도덕철학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철학의 문제다. 그러나 우리의 고려 대상을 개인적인 도덕의 문제로 제한한다고 할지라도, 심리적 쾌락주의(쾌락이 우리 모든 행위를 결정한다)와 윤리적 쾌락주의(쾌락은 옳고 그름의 표준이다) 간의 이중적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그러나 심리적 쾌락주의에서 언급된 쾌락은 개인의 쾌락이고 윤리적 쾌락주의에서의 쾌락은 도덕 공동체 전체의 쾌락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내가 모든 행동에서 자신의 쾌락을 극대화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내가 공익을 극대화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벤담은 공리주의를 다른 윤리 체계와 대조함으로써 공리주의의 장점을 내세웠다.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두 번째 장의 제목이 ‘공리성의 원리에 반대되는 원리들에 대하여’이다. 이 원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금욕주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공감과 반감의 원리이다. 금욕주의 원리는 행복의 양을 감소시키는 정도에 따라 행위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공리성 원리의 반대원리이다. 반면 공감과 반감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행위를 좋거나 나쁜 것으로 판단한다.

벤담은 금욕주의 원리를 하나의 허수아비로 여긴다. 종교적 전통은 실제로 극기와 육체의 금욕을 높이 평가했으나, 정작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자기 자신을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것을 모든 행위의 지밸 원리로 삼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종교적인 사람이건 세속적인 사람이건 최대 다시의 최대 불행을 추구하는 정책을 제안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벤담 자신은 ‘어떤 생물체도 금욕주의 원리를 일관성 있게 추구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공감과 반감의 원리는 매우 다른 종류의 도덕체계들이 들어있는 잡동사니 보관함이다. 벤담은 공감과 반감에 대해 도덕감, 상식, 이해력, 자연법, 올바른 이성 등 그럴듯한 명칭들을 가지고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철저히 옹호하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도덕 체계들은 모두 어떤 외적 표준에 호소하는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갖가지 계략들, 그리고 저자의 정서나 의견을 도덕 체계 자체에 대한 근거로 받아들이도록 독자를 설득하기 위한 갖가지 계략들로 이루어져있다.’ 또 ‘신의 기쁨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어떤 것을 신의 기쁨이라고 믿는다거나 신의 기쁨으로 여긴다고 공표하는 사람이 누구이건 간에 그 사람의 선량한 기쁨과 똑같고, (계시를 제외하면) 반드시 똑같을 수밖에 없다.’

2.3벤담은 공리주의와 그 밖의 도덕 체계 사이의 진짜 중요한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도덕철학자들을 절대주의자와 결과주의자로 나눌 수 있다. 절대주의자는 본래 그 자체가 그르고, 결코 행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행위가 있는 다고 믿는 반면 결과주의자는 행위의 도덕성이 행위 결과에 의해 판단되어야한다고 믿는다. 결과주의자들은 특수 상황에 이르면 행위 결과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부류의 행위는 없다고 믿는다. 벤담 이전 철학자들은 대부분 자연법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절대주의자였다. 만일 자연권과 자연법이 있다면 자연권을 침해하거나 자연법과 상충되는 그런 종류의 행위는 행위 결과와 관계없이 잘못으로 판명된다.

벤담은 그 어떤 두 사람도 자연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법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권리가 실정법에 의해서만 부여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연권이 무시될 수 없다는 생각을 엄청난 조롱거리로 삼았다. ‘자연권은 전혀 말도 안 되는 허튼소리이고, 자연적인 불가침의 권리는 수사적으로 과장된-죽마(竹馬) 타고 호언장담하는-허튼소리이다’

벤담과 이전 윤리학자들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은 대단히 중요한데, 그것은 아주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그리고 거의 모든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간통이 언제나 잘못이라고 믿었지만 벤담의 경우 그렇지 않다. 도덕 판단을 내리기 전에 간통을 범한 특정인이 예견한 결과들을 고려해야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분석철학

4.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분석철학

 

 

1) 옥스퍼드의 형이상학 교수 라일은 1949년 <정신 개념>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라일은 능력지(knowing how)와 명제지(knowing that)의 구별을 강조했다. 2)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가 1953년에 유작으로 세상에 나오자, 생생하기는 했으나 투박하게 전개되었던 라일의 생각이 이제야 훨씬 더 치밀하고 심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5) 비트겐슈타인이 죽은 뒤 많은 사람들은 콰인을 영어권 철학의 일인자로 간주했다. 6) 철학에서 콰인의 목적은 고학 특히 물리 과학의 용어를 이용한 자연주의적 세계 설명의 기본 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경험주의자이면서 행동주의자인 그는 언어 분석에 의해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세계를 설명하는 모든 이론은 우리 감각에 입력된 것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7)콰인은 철저하게 경험주의적인 프로그램을 추구했으면서도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독단’으로 철학에 첫 번째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공격의 두 표적을 다음과 같은 말로 진술했다. ‘하나는 분석적 진리와 종합적 진리, 즉 사실의 문제와 무관하게 의미에 근거하는 진리와 사실에 근거하는 진리 사이에 근본적인 어떤 틈이 있다는 신념이다. 또 하나의 독단은 환원주의이다. 즉 개개의 의미 있는 진술은 직접 경험을 지칭하는 용어들로 이루어진 어떤 논리적 구성체와 동치라는 신념이다.’ 8) 콰인에 따르면, 검증되거나 반증되는 것은 단일 문장들이 아니라 체계 전체라는 것이다. ‘외부 세계에 관한 우리의 진술들은 개인이 아니라 오로지 법인의 신분으로만 감각 경험의 심판을 받는다.’ 9) 콰인은 신념이나 이해와 같은 내포적 개념의 도움을 받아 해석되어야 하는 그런 의미란 없다고 단언했다. 의미는 언어 행동에 영향을 주는 감각적 자극들을 사상(mapping)함으로써 순전히 외연적인 용어들로 설명되어야 한다.

 

10) 콰인의 사고 실험 결과는 세 수준의 불확정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첫째, 개별적인 지칭 대상의 불확정성이 있다. 둘째, 언어 전체의 수준에 불확정성이 있다. 11) 우리는 세계에 대한 어떤 고정된 지식이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콰인의 초기 논문 ‘있는 것에 관하여’에서 ‘있는 것은 경계 변수’의 값이 있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12) 비트겐슈타인과 콰인은 유럽 대륙에서 유난히 분석철학의 지도적인 대표자 두 사람으로 간주되곤 했다. 사실 그들의 철학은 매우 다르다. 특히 두 사람은 철학의 본성에 관해 의견이 달랐다. 콰인은 분석-종합 구분에 대한 불신 때문에 철학과 경험 과학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가르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은은 과학주의, 즉 철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보려는 시도를 몹시 싫어했다. 13) 그러나 미국에서는 콰인에 의해 도입된 과학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데, 가장 설득력 있는 대표자 한 사람이 콰인의 하버드 제자인 데이비슨이었다. 14) 데이비슨의 의미 이론은 진리 이론을 기반으로 한다. 진리 이론은 유한한 용어 목록과 유한한 구문론적 규칙들을 포함할 텐데, 그로부터 도출된 주장들로서 ‘ “S”는 p인 경우 오직 그 경우에서만 L에서 옳다’는 형식을 지닌 잠재적으로 무한한 수의 진리 문장들을 수반할 것이다.

 

15) 콰인과 마찬가지로, 데이비슨은 완전히 낯선 언어를 가진 공동체와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를 고려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예증한다. 그 언어를 해석하려면 우리는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문장에 동의하는가를 관찰함으로써 그들의 언어에 대한 진리 이론을 세워야 한다. 16) 사람들의 실제적인 행동은 그들의 이유, 말하자면 데이비슨이 정신적 사건이라고 말하는 욕구와 신념에 의해 결정된다. 이와 같은 정신적 사건과 정신적 사건에 의해 ‘합리화되는’ 행위의 관계는 인과적 관계이다. 그러나 데이비슨의 경우에는 그 인과 관계가 느슨하다.

 

16) 데이비슨은 물리적 사건이 아닌 사건은 결코 없다는 점에서 물질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는 ‘정신적인 것의 변칙성’이라는 것을 역설함으로써 이런 식의 자극적인 물질주의를 완화시키려고 한다. 어느 정신적 사건이든 물리적 사건과 동일하지만, 정신적인 것으로서의 사건과 물리적인 것으로서의 사건은 서로 다르게 기술된다.

 

17) 영국에는 줄곧 과학과 철학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믿는 철학자들과 그 경계가 정말 모호하다고 믿는 철학자들이 있었다. 라일이나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들은 철학의 목표가 정보가 아니라 이해라고 주장했다. 스트로슨은 자신의 개인 교수인 그라이스와 함께 ‘독단에 대한 옹호’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분석-종합 구문에 관한 콰인의 공격을 논박했다.

 

18) 기술형이상학은 세계에 관한 우리 사고의 구조를 개선하려는 야심을 갖지 않고 그 사고의 실제 구조를 기술하고자 한다. 19) 스트로슨은 물질적 신체와 개인이 우리의 개념 지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 즉 이 두 종류의 개별자가 기본적인 개별자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다. 20) 스트로슨의 경우, 물질적 신체 못지않게 개인 역시 기본적인 논리적 범주이다. 그러므로 원초적인 것은 정신 개념이 아니라 개인 개념이다. 그런데도 스트로슨은 신체가 죽은 뒤 자기 개체의 생존을 생각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었다. 21) 스트로슨은 2006년 초 자신의 죽음으로 영국철학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자크 데리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자크 데리다

 

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1-1. 하이데거에게 잠시 배운 적이 있는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는 우파 실존주의인 하이데거와 다르게 정치적 좌파로의 실존주의 형태를 전개했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1924~1928년에 고등사범학교에 수학했고, 몇 년간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는 1933~1935년에 베를리 대학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는데, 그의 철학은 1936년에 「자아의 초월성」과 「상상력 : 심리학적 비판」이라는 두 논문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 논문들은 소설 『구토』(1939)와 『감정 이론 개요』(1939)로 이어졌다.

1-2. 사르트르의 전쟁 이전 에세이들은 현상학적 틀 안에서 심리철학을 연구한 것들이다.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그는 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을 충분히 해내지 못했다고 불만스러워했다. 후설은 데카르트의 자아인 사고 주체를 의식의 자료로 인정했으나, 사실 데카르트의 자아는 의식의 자료가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던 것에 몰두할 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자아를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오직 반성적 사고를 할 때뿐이므로, 철저한 현상학자가 되려면 전-반성적(pre-reflective) 의식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아, 즉 사고 주체는 의식의 외부에 있고, 따라서 타인의 정신처럼 의식을 초월한 세계에 속한다.

 

1-3. 사르트르는 「상상력」에서 널리 알려져 있고 특히 흄이 말한 관념, 즉 내적인 정신세계의 내용을 상상 속에서 관찰한다는 관념을 공격했다. 사르트르는 지각과 상상 모두 심상이나 환영의 정신적 현전(現前, presence)에 있다고 생각하고, 지각된 이미지가 상상의 이미지보다 더 강렬하고 생생하다는 것이 그 둘의 유일한 차이점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임을 보였다. 그에 의하면 상상은 내적 이미지가 아니라 지각과 마찬가지로 정신 외적 대상과 관련을 맺지만, 관련을 맺는 양상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이 실제로 현존하지 않을 경우, 우리가 하는 일은 어떤 대상을 세계에 창조하는 것이다.

1-4. 그에 의하면, 감정을 수동적 내적 감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감정은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우리 환경에 대한 불편부당한 인식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마주치는 상황에 대한 ‘마술적 변형’을 감정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울할 때 우리는 세상을 향해 마술을 건 나머지, 온갖 노력이 허망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1-5. 1939년에 전쟁이 일어나자 사르트르는 징집되어서 1년 후 독일군의 포로가 될 때 까지 싸웠다. 휴전 후 풀려난 그는 파리에 철학 선생으로 돌아왔으나, 나치 점령군에 맞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기도 했다. 1943년에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받은 그의 대표작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가 출간되었다. 『존재와 무』의 일부분은 『존재와 시간』에 못지않게 난해하다. 그러나 소설가와 극작가이기도 한 그는 철학의 핵심들을 상세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예시하는 재능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그는 『실존주의와 휴머니즘』에서 저작의 주요 주제들을 더 간략하고 더 대중적인 방식으로 다뤘다.

1-6. 사르트르의 경우, 존재는 우리가 의식 속에서 마주치는 서로 다른 모든 종류의 사물들과 모든 양상의 사물들에 선행하고 기초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과 목적에 따라 우리는 사물을 종류와 집합으로 구별한다. 의식이 만들어 낸 모든 구별의 옷이 사라지면, 우리는 불투명하고, 단일하고, 우연적인 순수 존재, 존재 자체, 즉자존재(卽自存在)로 남는다. 그것은 ‘이유도 없고, 원인도 없고, 필연성도 없다(BN 619).’ 원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그 자체의 원인, 즉 자체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그렇게 거기에 있을 뿐이다. 사르트르는 그것을 ‘무상(無償, gratuitous)’, 때로는 ‘잉여(剩餘)’라고 말했다.

1-7. 즉자존재는 『존재와 무』의 두 가지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다른 하나는 대자존재(對自存在), 자존적 존재, 즉 인간의 의식이다. 이것이 제목의 무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사르트르는 무를 통해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한다. 존재에 대한 부정은 대자와 즉자를 구별해주는 요소이다.

1-8. 사르트르는 여기서 하이데거의 기본 주장을 부연하여 설명한다. 영어권 철학자들은 ‘무가 무화한다(nothing noths)’를 하이데거의 언명을 불합리한 극치로 간주하지만, 사르트르는 무의 객관화이고 무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인다. 의식이 세계를 명확히 표현할 때 의식은 부정을 수단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내가 빨강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면, 나는 세계를 빨강과 빨강-아닌-것으로 나눈다. 내가 의식과 존재를 구별하고자 한다면, 나는 의식이 존재-아닌-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세계에 무를 나타나게 하는 존재는 그 존재 자신의 무가 아니면 안된다.’ (BN 23)

1-9. 역사가가 보면, 그것은 마치 파르메니데스가 생각해 냈고 오래전에 플라톤이 해결했던 수수께끼를 사르트르가 재도입한 것처럼 보인다. 1945년에 에이어(A. J. Ayer)가 사르트르가 무를 다루는 방식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길을 보니 아무도 없다(she sees nobody on the road)라고 말할 때 나타낸 왕의 반응과 비교했다. ‘정말이지 내가 저런 눈을 가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니! 그것도 저 정도 거리에서 말이야!’ 『존재와 무』에는 제목이 사르트르의 ‘무화(無化)’에 대한 설명과 무관하게 중요한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대부분의 대상들은 본질이 실존에 앞서지만, ‘실존이 본질에 앞서게 되는 어떤 한 존재, 그 어떤 개념으로도 정의되기 이전에 실존하는 어떤 한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존재가 인간이다.’ (EH 66)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질에 앞서며,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한다. 인간은 어떤 종류에 속해있지 않고 각자 어떤 종류의 것이 될 것인지 결정한다. 인간의 자유는 대상들의 세계를 갈라놓는다.

1-10.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 개개인의 삶은 창조자나, 필연적인 원인이나, 절대적 도덕 법칙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내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필연성은 선택의 필연성이다. 인간의 자유는 절대적이지만 그 또한 불안한 것이기에 외면하려 하고, 도덕이나 사회가 미리 정해 준 역할을 따르려 한다. 그러나 자유를 은폐하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자기 자신을 단순한 대상으로 격하시키면서도 암암리에 자유를 느끼는 이중적인 마음을 갖게 되는데, 이것을 그는 ‘자기 기만(bad faith)’이라 일컬었다.

1-11. 바람직한 태도는 자신의 자유를 인정하고 긍정하며 자신의 행위와 삶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전통적 도덕적 명령이나 우연적 환경에 구속받아서는 안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는 물리적 한계가 있긴 하지만, 자신의 욕구와 계획을 조정하며 내가 직면한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나다. ‘나를 나이게끔 하는 유일무이한 최초의 기투(企投, project)에 직면하여 홀로 두려워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자유를 의식함으로써 모든 장벽과 철책은 무너지고 무효화된다. 존재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나라는 사실에 반하는 어떤 가치에도 나는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의지할 수도 없다.’ (EH 66).

1-12.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동안 그는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와 함께 파리 좌안(left bank)의 문화적이고 지성적인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아방가르드의 월간지 『현대』를 창간하고 편집했고, 성공적인 희곡들을 썼다.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즉자와 대자 이외에도 타자를-위한-존재(being-for-others)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것은 본래 내가 타자에게 나타나는 방식이고 타자에 의해 관찰되는 방식으로, 나는 타자에게 하나의 대상에 지나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질투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는 타자를-위한-존재의 고유 의미를 대립이라 했다. 그는 후기 저작에서 이 주제를 개진하고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1-13. 실존주의의 기본 방침이었던 절대적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자의 결정론이 쉽게 양립할 수 없었음에도 그는 공산당에 가까운 사회 정치적 입장을 취했다. 이와 같은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1960년에 『변증적 이성 비판』을 썼다. 그는 1964년에 노벨 평화상을 정중히 거절했고, 1980년에 죽었다.

 

Ⅱ. 자크 데리다

2-1. 1960년대에 접어들자 대륙철학과 영어권 철학 사이의 관계가 잠시 회복되는 듯 했다. 알제리의 유대인 집안 출신인 서른 두 살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1962년에 후설과 기하학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출간했다. 같은 해 옥스퍼드의 철학자 오스틴(J. L. Austin,1911-1960)의 강의록 『말과 행위』이 유작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책은 서로 다른 종류의 발화 행위들(speech acts)에 관한 이론을 주장하였다. 1967년에 데리다는 오스틴의 영향을 받은 독창적인 저작 『글쓰기와 차이』,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언어와 현상』을 내놓았다.

2-2. 그런데 두 철학자는 동일한 논제를 매우 다른 방식으로 다루었다. 오스틴은 1946년에 두 종류의 언어, 즉 사실 확인(constative) 언어와 수행적(performative) 언어를 구별했다. 사실 확인 문장은 ‘비가 내린다’처럼 사실의 문제로 상황이 어떠한가를 진술하는 데 사용된다. 수행적 발언은 사실을 보고하는 진술이 아니라 상황을 변화시키는 발화 행위를 일컬었다. 예컨대 ‘나는 이 배를 퀸 엘리자베스라고 명명한다’, ‘내 시계를 동생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2-3. 오스틴은 다른 많은 종류의 수행적 발언들, 즉 내기, 임명, 저주와 같은 발언을 분류하면서 외관상 간단한 진술 속에 숨어 있는 수행적 요소들을 확인해 나갔다. 일정한 발전 단계에 도달하자 그의 이론은 발화 행위의 세 요소인 발화(locutionary), 발화 수단(illocutionary), 발화 효과(perlocutionary)의 작용을 논의하는 방향으로 갔다. 누군가 ‘그녀를 쏴!’라고 말한다면, 발화 행위는 ‘쏴’의 의미와 ‘그녀’가 지칭하는 것을 구체화함으로써 명확해진다. 발화 수반 행위는 명령하거나 재촉하는 등의 행위이다. (발화 수반 행위가 목적을 달성한 경우에만) 발화 효과 행위는 ‘그는 나로 하여금 그녀를 쏘게 했다’라는 형태로 쓰여질 수 있다.

2-4. 오스틴은 서로 다른 종류의 발화 행위들과 발화 행위의 요소들을 구별하기 위해 여러 새로운 전문 용어들을 도입했는데, 그 용어들은 알기 쉬운 용어로 정의되고 실례를 통해 선명히 밝혀졌다. 전반적인 효과는 방대하고 중요한 언어철학 분야를 미시적인 수준에서 명료화하는 것이다.

2-5. 데리다의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그도 역시 전문 용어를 아주 많이 도입한다. 예를 들어 ‘gram’, ‘reserve’, ‘spacing’, ‘pharmakon’ 등의 용어들을 도입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전문 용어를 스스로 정의할 용의는 없었고, 만약 용어를 정의해달라는 요구를 받으면 어떻게 정의해도 마땅치 않다고 거절했다. 그가 제시하는 예증 실례들이 용어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잘 알아차리기 어려운 나머지, 평범한 형태의 용어는 오묘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2-6. 오스틴은 발화행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말로 하는 것과 글로 쓰는 것을 구별하는 데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철학적 논의 사항을 두 종류의 언어 사용에 적용했다. 다른 한편 데리다는 그가 말한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 즉 서양문화에서 지나치게 말하기를 강조하는 태도를 공격하면서 그 구별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현대 사회에 시민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을 감안하면, 데리다의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비난은 플라톤읜 『파이드로스』에 나오는 다수의 기이한 텍스트들에 입각해 있음이 분명했다.

2-7. 수행적 발화 행위들 가운데 약속하는 행위는 오스틴과 데리다 둘 다 관심을 가졌다. 오스틴은 약속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적절치 못한 상황을 교훈적인 방식으로 목록을 만들었다. 데리다는 모든 수행적 발화 행위에는 늘 죽음이 따라다닌다(‘누구든 약속을 완수하기 전에 죽을 수 있다’)는 말로 표현되는 상황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는 모두 어김없이 죽기 때문에 죽음의 가능성은 수행적 발화 행위와 아무 관련도 없다. 약속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자전거를 타는 일도 죽으면 그만이다.

2-8. 데리다의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적개심은 그가 말하는 ‘현전 형이상학’, 즉 의미와 진리에 대한 주장의 기반은, 의식 안에 주어진 익숙한 어떤 것이라는 생각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는 일차적으로 후설을 공격하려 했지만, 경험주의자의 감각 자료 개념 역시 유사한 비판에 열려 있었다. 그에 의하면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의미대상인 사고가 가장 이상적인데, 말하기가 글쓰기보다 사고와 더 가깝기 때문에 서양 전통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와 글쓰기 사이의 대립을 ‘해체하고’(deconstruct), 저자의 통제에서 벗어나 가지각색의 또 다른 해석을 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으로 글로 쓴 텍스트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했다. 어떤 사람들은 현전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공격이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개념의 해체와 기조는 다르나 기획 자체는 유사하다고 보았다.

2-9. 데리다는 초기 저작에서 대단한 철학적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나, 1967년 이후 그의 사상과 저작은 오스틴이나 비트겐슈타인, 현대 분석철학,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후설에 이르는 철학자들에 의해 이해된 철학과 현저하게 달라졌다. 데리다는 서로 혼동될 수 있는 개념들을 구별하고, 필요하다면 이 구별을 뚜렷히 나타내는 용어들을 창작하거나 개작하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새로운 용어를 도입하여서 완전히 다른 관념들을 오히려 혼동하게 만들었다.

2-10. 데리다가 대단히 자랑하는 ‘차연’(deferrence) 개념을 살펴보면, 차연은 연기(deferring)의 개념과 차이(difference)의 개념을 결합한 것으로, 그는 ‘차연은 지연으로서의 연기와 차이의 실제 작용으로서 다름(differing)이 서로 분리되기 전에 생각해 낸 것이다’고 말한다. 이처럼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을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는 그의 해설과 부연을 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가를 이해해보면, ‘그것은 대상의 이름이 아니며, 나타날 수 있는 어떤 “존재”의 이름이 아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은 어떤 개념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데리다의 텍스트에서 ‘차연’을 여러 가지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바로 그 자체가 차연의 한 실례일 수도 있다. 즉 차용증서들(IOUs)이라는 말은 정의(正義)와 완전 다르게 사용되고 실제적인 의미 부여를 미래로 연기한다.

2-11. 데리다는 저자들을 상대하는 방법, 즉 꽃다발 방법(nosegay method)이라 약칭하는 기술을 고안한다. 우리는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 동일한 낱말이 포함된 다수의 텍스트를 수집해서 문맥과 날짜, 텍스트의 발언자의 목소리를 알 수 없게 잘라내서 자연적 의미를 변형시킨다. 우리는 인상적이거나 자극적인 일부 주장을 한데 모아 묶어서 꽃다발로 선물한다. 이 기술은 전통적인 문학 비평에서 조금만 노력해도 되기 때문에 일부에서 유행하게 된다.

2-12. 후기의 데리다는 기발한 수사적 기교로 독자의 지속적 관심을 받는데, 특히 성공적인 수사 기술은 ‘논박할 수 없는 역설’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한다. 『그리마톨로지에서』에서 자주 인용된 문장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이다. 아주 매력적이고 충격적이고 주목할만하다. 흑사병과 유대인 대학살은 존슨의 비평집 『시인들의 삶』을 말하는 텍스트 사건과는 다르다. 그러나 후기 데리다는 텍스트가 글쓰기의 집합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한계, 실재의 한계, 역사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글쎄, 우리의 이야기는 우주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뿐이라면, 그것을 반박하는 것은 성급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을 맥락 속에서 보려고 노력하라는 권고는 분명히 건전한 충고이다.

2-13. 데리다는 자기가 실제로 노련한 수사학자인 듯 성과 죽음을 끌어들여 독자들을 일깨운다. 혼잣말은 자위가 성교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큰 소리로 말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독자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간질이지는 못했다. 요한 계시록에 ‘그리고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신다, 오라! 그리고 듣는 자에게 말씀하신다, 오라!’라는 구절을 그는 영어와 프랑스어의 ‘오라’(come) 낱말에 붙어 있는 텍스트에 관해 장광설을 늘어 놓는다.

2-14. 방금 예시한 그런 방식으로 데리다를 비판하는 것이 꼴사나워 보일 수 도 있으나, 그렇게 비판한 이유는 올바른 비평에 대한 그와 같은 흉내 내기가 바로 데리다가 후기 저작에서 채택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적 무기가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말장난, 외설, 키득거림이다. 후기의 데리다에는 어떤 신조도 찾아볼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데리다에게 냉담한 독자가 그의 신조를 이해 못 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자신의 저작이 명제들로 요약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실제로 그는 철학자가 되려는 야망을 때로 포기하기도 했다.

2-15. 그렇다면 비난이던 칭찬이던 철학의 역사 속에 데리다를 포함시키는 것이 부당하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말하든 그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진지한 철학자로 인정받았으니 그만큼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진짜 철학과 사이비 철학을 식별하는 일에 소홀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