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고대철학

#소피스트

#소피스트

4-1. 데모크리스토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미 그와 고향이 같은, 압데라 출신의 젊은 철학자 프로타고라스가 등장하였는데 프로타고라스는 새로운 철학자 계층인 소피스트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소피스트는 원래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면서 다양한 주제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말하자면 순회 교사들이었다. 설령 이들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철학을 넘어서 더욱 폭넓고 다양한 영역의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기관이나 시설을 세우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이들은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쳐 주면서 대가를 받았으므로 이들을 최초의 직업적인 철학자라고 불러도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소피스트 중에 가장 다재다능한 인물이엇던 엘리스 출신의 히피아스는 수학, 천문, 음악, 역사, 문학, 신화 등에 모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옷과 신발을 만드는 실용적인 기술까지도 겸비하였다고 전한다. 또 다른 소피스트들은 수학과 역사, 지리 등을 충분히 가르칠 수 있었다. 또한 이들 모두는 뛰어난 수사학자였다. 소피스트들은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주로 아테네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는데 당시 아테네에는 법정에서 변론을 펴거나 정치에 진출하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이 많았고, 이들은 교육과 지도를 받는 대가로 소피스트에게 상당한 액수의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였다.

4-2. 소피스트들은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웅변을 통한 설득의 방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들은 다양한 주제에 관한 글을 썼다. 이들은 기본 문법으로부터 출발하엿다. 프로타고라스는 명사의 성 및 동사의 시제와 법을 처음으로 구별하였다. 이들은 계속해서 논증의 기법을 열거하고 자기 옹호를 위한 요령을 개발하였다. 애매한 문헌들을 해석하고 상대방의 연설을 평가하면서 이들은 최초의 문학비평가로도 활동하엿다. 또한 이들은 대중을 상대로 한 강의와 공연을 하기도 하고 논쟁을 주고받는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교육을 다른 한편으로는 여흥을 위한 것이었다. 종합해 보면 이들은 현대사회의 교사, 상담역, 변호사, 홍보 전문가, 대중매체의 유명인사 등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4-3. 프로타고라스는 압데라의 대사 자격으로 아테네를 처음 방문하였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환영받았다고 전해지며 그 후 몇 차례 더 아테네를 방문하였다. 그는 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큰 소리로 읽었는데 그 첫머리는 오래토록 기억되어 오늘날까지 전한다. ‘신들에 관하여, 나는 그들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또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에 관한 지식에 이른느 길에는 많은 방해물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해물로는 주제 자체가 모호하다는 점 그리고 인간의 삶이 너무 짧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상대주의적인 인식론을 요약하여 표현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후에 상세히 살펴볼 예정이다.

4-4. 프로타고라스는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어떤 측면에 대해서도 논증을 펼칠 준비를 갖추었던 듯이 보인다. 사실 그는 자신은 항상 나쁜 논증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엿다. 어쩌면 이는 그저 그가 논증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잘 가르쳐 소송 등에 대비한 최선의 준비를 갖추어 줄 수 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비판자들은 이와는 전혀 달리 그가 나쁜 논증을 좋게 보이도록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하였다고 해석한다. 프로타고라스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그가 교육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에우알토스를 고소한 이야기를 즐겨 언급한다. 에우알토스는 프로타고라스의 가르침을 받은 후 재판에 나가 자신이 이기면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그는 아직 자신이 단 한번도 재판에서 이기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대가의 지불을 거절하였다. 프로타고라스는 대가를 지불하라고 그를 고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말을 잘 듣게. 만일 이 소송에서 내가 이기면 자네는 재판의 판결에 따라 나에게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네. 만일 자네가 이기더라도 여전히 자네는 나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하네. 왜냐하면 자네는 재판에서 이긴 셈이 되기 때문이지’.

4-5. 또 다른 소피스트 포르디코스는 에게 해의 섬 케오스 출신인데 프로타고라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속한 도시국가의 공적인 임무를 맡아 아테네로 왔다. 그는 언어학자였는데 문법보다는 단어의 의미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아마도 그를 최초의 사전 편찬자로 여길 수 있을 듯하다. 그가 시도한 몇몇 구별은 후에 큰 철학적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4-6. 프로디코스는 덕과 악덕을 두 여성으로 의인화한 후 이 둘 중 누구를 선택할지를 놓고 고민하는 젊은 헤라클레스를 다룬 낭만적이고 도덕적인 우화의 저자로 여겨진다. 또한 그는 종교의 근원에 관한 이론도 제시하였다.

4-7. 시칠레아의 레온타니 출신인 고르기아스는 프로타고라스에 뒤이은 대사 출신의 소피스트이다. 그는 설득력 잇는 웅변가엿을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수사학자로서 연설에서 사용되는 서로 다른 수사법, 예를 들면 대조법이나 수사를 위한 질문법 등을 분류하기도 하엿다. 그의 문체와 연설법은 그의 생전에는 크게 칭찬받았지만 후에는 지나치게 미사여구를 즐긴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저술들 중 철학적 관심을 그는 두 편의 짧은 글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4-8. 첫 번째 글은 트로이아의 헬레네를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항하여 그녀를 옹호하는 수사학적 훈련을 다룬 것인데, 여기서 고르기아스는 헬레네가 파리스와 함께 달아남으로써 트로이아 전쟁의 불씨를 제공하였다는 점을 들어 그녀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단지 자신이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바를 행했을 뿐이다. 그녀가 그렇게 한 까닭은 변덕스러운 운명에, 즉 신들의 결정이나 필연적인 섭리에 따랐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폭력에 의하여 유괴되었거나, 감언이설에 설득되었거나 또는 사랑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말은 실재하거나 지각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무척 부담스러운 존재이다. 하지만 말은 신과 같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만일 헬레네가 사랑에 빠졌다면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사랑은 우리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신과 같은 것 또는 우리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일종의 정신적 질병이기 때문이다. 이 짧고 재치 있는 언급이 바로 자유와 결정론, 불가항력, 외부의 자극, 억누를 수 없는 충동 등을 둘러싼 다양한 철학적 논의의 출발점을 이룬다.

4-9. 고르기아스의 저술 에는 세 가지 회의적인 결론에 이른느 논증이 등장한다. 이 세가지 결론은 첫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둘째 무언가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으며, 셋째 무언가를 인식하더라도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포함된 일련의 논증은 두 경로를 통해서 후세에 전해지는데 이 중 하나는 위 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저술인 이며 다른 하나는 섹스토스이다.

4-10. 첫 번째 논증은 ‘존재한다’는 그리스어 동사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는 특징을 다소 악용한 듯하다. 여기서 이 논증을 상세히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후에 6장에서 이 논증에는 결정적인 모호함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이려 한다. 두 번째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만일 사고의 대상들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오직 존재하는 것만이 사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사고의 대상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사고의 대상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사고하는 모든 것이 존재해야만 한다. 세 논증 중 가장 그럴듯한 세 번째 논증은 개인들 각각의 감각이 자신만이 갖는 사적인 것인데, 우리가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바는 경험이 아니라 단지 말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4-11. 이 유명한 소피스트가 자신의 궁색한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도입한 논증들은 사실 궤변에 가까우며, 이를 처음 접한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궤변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진단하기보다 이를 바로 거부하는 일이 손쉬울지 모르지만, 궤변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을 발견하기란 여전히 무척 어렵다. 첫 번째 궤변은 플라톤이 적절하게도 라고 이름 붙인 대화편에서 본질적으로 해소된다. 두 변째 궤변은 가끔 플라톤에서도 발견되는 논증적 오류를 포함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모든 A가 B는 아니다’가 ‘어떤 B도 A가 아니다’를 함축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후의 학자들에게 명확히 제시하였다. 세 번째 논증에서 등장한느 경험의 개인성 문제는 20세기에 이르러 비트겐슈타인의 저술이 등장한 후에야 비로소 결정적으로 해명되었다.

4-12. 프로타고라스와 히피아스, 프로디코스, 고르기아스 외에도 이름과 명성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또 다른 소피스트들이 있다. 힘이 곧 옳음이라는 주장의 강력한 옹호자인 칼리클레스, 정의란 권력을 쥔 자들의 자기이익이라고 폭로하였던 트라시마코스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상대방에게 당신의 아버지는 개라는 점을 증명해 보이려했던 한 쌍의 궤변가 에우티데모스와 디오니시도로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을 비롯하여 앞에서 살펴보앗던 더욱 유명한 소피스트들 모두가 주로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대화를 나누는 등장인물로 우리에게 알려진다.

4-13. 어쨌든 이제 소피스트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소크라테스를 살펴보려 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견해에 따르면 가장 위대한 소피스트이기도 하고, 다른 견해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궤변도 단호히 거부하고 그 반대편에 섬으로써 참된 철학자의 전형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원자론자들

#원자론자들

3-1.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가장 두드러지게 현대 과학을 예견하게 한 인물로 밀레토스 출신의 레우키포스와 압데라 출신의 데모크리토스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이름은 마치 무척 닮은 두 사람을 지칭하는 듯이 항상 함께 언급되므로 둘이 함께 원자론을 처음 제시하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레우키포스에 대해서는 데모크리토스의 스승이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현재 우리가 원자론에 대하여 아는 지식은 거의 모두 데모크리토스가 남긴 저술에 의존한다.

3-2. 데모크리토스는 초기의 중요 철학자들 중 그리스 본토에서 태어난 최초의 인물이다.

3-3. 데모크리토스의 기본 입장은 물체를 무한히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른 논증 과정을 현재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마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어떤 종류의 물체라도 한 조각 잘라내어 다시 그것을 현재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마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어떤 종류의 물체라도 한 조각을 잘라 내어 다시 그것을 가능한 한 작게 잘라 나누어 보자. 그것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작은 조각이 되면 이 일을 멈출 수밖에 없다. 물체를 무한히 나눌 수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럴 수 있다고 가정하려면 이렇게 끝까지 나눈 후에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자. 만일 무한한 수의 부분들 각각이 어떤 크기도 지닌다면 부분들은 다시 나뉠 수 있어야만 하는데, 이는 이미 끝까지 나누었다는 가정과 모순을 일으킨다. 반면에 만일 각각의 부분들이 어떤 크기도 지니지 않는다면 이들을 아무리 더한다 할지라도 어떤 분량에도 도달할 수 없다. 영은 무한히 더하더라도 여전히 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물체를 이렇게 나누는 일에는 어떤 한계가 있으며, 가능한 한 작게 나뉜 부분들도 반드시 크기와 형태를 지님에 틀림없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데모크리토스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이 작은 물체를 바로 ‘원자’라고 불렀다.

3-4.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은 너무 작아서 감각을 통해서는 인식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원자들의 수는 무한하며, 무한하게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지만 원자들 자체는 영원히 존재한다. 엘레아학파와는 달리 데모크리토스는 진공을 허용하더라도 아무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진공은 존재하며, 이 무한한 텅 빈 공간에서 원자들은 마치 어두운 방에 빛줄기가 비칠 때 보이는 먼지처럼 끊임없이 운동한다. 원자들은 서로 다른 형태를 보인다. 원자들은 형태가 서로 다를 수도 있고, 결합의 순서가 또는 위치가 다를 수도 있다. 원자들은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결합하기도 한다.

3-5. 아낙사고라스와 마찬가지로 데모크리토스도 다수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크기가 다른 무수히 많은 세계들이 존재한다.’
데모크리토스는 오직 원자와 빈 공간, 둘만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물이나 불, 식물이나 인간으로 인식하는 대상들 모두는 빈 공간에서 서로 결합된 원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파악하는 성질들은 실재하지 않으며, 이들은 단지 관습의 결과일 뿐이다.

3-6. 데모크리토스는 우리가 지각하는 성질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종류의 원자와 그 배열로부터 생겨나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예를 들면 매운 맛은 작고, 날카롭고, 모나고, 표면에 굴곡이 있는 원자들로부터, 단 맛은 크고, 둥글고, 부드러운 원자들로부터 생긴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얻는 지식은 원자론에 의해서 밝혀지는 지식에 비하면 단지 어둠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여러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데모크리토스는 체계적인 인식론을 발전시켰다.

3-7. 데모크리토스는 자연학뿐만 아니라 윤리학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썼다. 많은 내용이 격언의 형태로 오늘날까지 전하는데 이 중 몇몇은 일상에서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아래의 8장에서 살펴보겠지만, 그가 남긴 언급들을 주의 깊게 검토해 보면 그가 체계적인 도덕 이론을 전개한 최초의 사상가 중 한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

#아낙사고라스

2-1. 엠페도클레스가 다윈의 선구자로서 그 이름을 오늘날까지 전한다면 그와 같은 시대 인물은 아낙사고라스는 자주 최근에 유행하는 우주 대폭발 이론의 지적인 선구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2-2. 우주의 기원에 관한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함께 있었고, 수적으로 무한히 많은 동시에 무한히 작았다. 왜냐하면 작다는 것은 또한 한정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함께 있었으므로 그들 중 어떤 것도 작음으로 인하여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무한한 공기와 에테르의 아래에 놓여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런 원시 상태의 무한정한 것들이 그들을 둘러싼 에테르와 공기에서 벗어나 회전하기 시작하는데 이로부터 별들과 해, 달이 형성된다. 이 회전을 통하여 희박한 것으로부터 농후한 것이, 차가운 것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젖은 것으로부터 마른 것이, 어두운 것으로부터 밝은 것이 떨어져 나온다.

2-3. 아낙사고라스는 우주의 팽창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으며 미래에도 계속되리라고 주장한다. 어쩌면 우주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른 어떤 세계를 이미 만들어 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다른 세계에 관하여 아낙사고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혼이 부여된 다른 동물들도 형성되었다. 이런 일이 오직 우리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디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들이 모두 분리의 과정이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아낙사고라스는 한참 후에 브루노가 내세웠으며, 오늘날 상당히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주장, 즉 우리가 사는 우주는 단지 수많은 우주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우리의 우주와 마찬가지로 다른 우주들에도 얼마든지 지적인 존재들이 살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최초로 제시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4. 아낙사고라스에 따르면 우주의 전개를 이끄는 운동은 지성의 작용이다. ‘모든 것이 함께 있었는데, 지성이 등장하여 여기에 질서를 부여하였다’. 지성이 물체를 확고하게 지배한다는 이런 주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 때문에 그들은 아낙사고라스를 지성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2-5. 플라톤의 대화편 에서 소크라테스는 죽기 전 마지막 날 감옥에서 초기 철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자연과학의 영역에 적용되는 기계론적 설명에 대하여 자신이 점차 환멸감을 느끼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는 아낙사고라스가 모든 것을 지성 또는 정신을 통해서 설명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만족스러웠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낙사고라스의 저술에 가치에 관한 언급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점을 알고 실망하였음을 밝힌다. 즉 아낙사고라스는 소크라테스의 모든 행위가 오직 행위가 오직 지성에 따라 수행되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목적론적 설명이 기계론적 설명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누군가가 왜 각각의 것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또 계속 유지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면 그가 발견해야만 하는 바는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네. 즉 그것이 어떻게 존재해야 최선인지 도는 어떻게 다른 것들에 작용하고 또 작용을 받아야 최선인지를 밝혀야만 하네’.

2-6. 망명지 람프사코스에서 아낙사고라스는 처음으로 학교에 방학을 도입함으로써 마지막까지 인류에게 큰 기여를 하엿다. 도시의 관리들이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하여 무엇을 했으면 좋겠는가라고 묻자 그는 자신이 죽는 그 달에는 어린이들이 학교에 오지 않고 놀도록 매년 허락하라고 답하였다. 그는 쉬운 설명을 위하여 저술에 도표를 포함시킨 최초의 인물로서 이미 많은 과학도들이 그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소크라테스 자신의 철학(p. 78~96)

기원전 404년, 고대 그리스의 문명국가였던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항복하고 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너무도 달랐는데 스파르타는 엄격한 군국주의를 바탕으로 금욕과 절제를 강조한 반면 아테네는 다수결의 원리를 따르는 민주주의 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한때 그리스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던 아테네였지만 다수결의 폐단으로 인해 갈수록 불안정해져 갔다. 일례로 다수결로 죄의 유무를 가리던 아테네 법정은 법률에 대한 지식 없이 오직 화려한 말솜씨가 죄의 유무를 결정하는 중우정치 그 자체였다. 이 모습을 본 아테네의 일부 엘리트들은 스파르타의 체계적인 교육과 규율 등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 엘리트 중심에는 소크라테스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천민적 민주주의를 비난했고 스파르타 체제에 대한 필요성을 내비쳤다.

전쟁이 끝난 404년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정치체제를 민주주의에서 이른바 ‘30인 참주’에 의한 과두정치(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정치 체제)로 바꾸었는데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떤 역할도 담당하지 않고 어떤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이에 민주주의 정치가 아니토스는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부인하고 다른 새로운 신들을 도입함으로써 범죄를 저질렀다. 또 그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범죄도 저질렀다. 이에 대한 처벌로 사형을 요구한다.’며 소크라테스를 고발하였고 결국 소크라테스는 사형 당한다.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과 플라톤은 비록 실패했지만 소크라테스를 변호하는 글을 썼다. 우리는 이 변론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를 추측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사상을 확실히 알려주는 문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크세노폰과 플라톤에서 쓰인 소크라테스에 대한 묘사가 다르다는 점이다.

 

  1. 크세노폰이 묘사한 소크라테스

크세노폰은 군인 출신의 역사가로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후 변론을 저술로 남겼고 소크라테스 회상록과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 대화편<향연>을 추가적으로 저술하였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경건한 인물로 종교적인 의식에 충실히 따랐으며 신탁을 존중하였다. 탐욕이나 야심없이 예의 바르고 온화한, 욕망을 절제할 줄 알고 어려움을 잘 참는 사람이었다. 그는 교사가 아니었지만 말뿐만 아니라 실행을 통해서 덕을 가르쳤으며, 꾸지람뿐만이 아니라 짓궂게 놀리고 우회적인 비유를 들면서 악덕을 말렸다. 그가 이렇게 모범을 보였지만 몇몇 제자들은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그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비록 아테네 민주주의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그는 사람들의 좋은 친구였으며, 어떤 범죄나 국가에 대한 반역을 전혀 저지르지 않았다.

 

이처럼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를 융통성 없지만 예리한 통찰력을 갖추고 현실적인 윤리적 문제들에 대하여 조언을 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1.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

반면 플라톤이 저술한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그 외의 대화편에서 쓰인 소크라테스는 어떤 일관된 역할이나 특성을 보이지 않는다. 몇몇 대화편에서 그는 문답법(산파술)을 활용하여 스스로 모순을 발견하도록 유도하기도 하며, 또 청중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며 다소 독단적인 형태의 윤리적, 형이상학적 체계를 제시한다. 또 다른 대화편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맡아 철학적 논의의 주도권을 넘기고 떠나기도 한다. 이에 학자들은 대화편이 쓰인 시기를 구별하여 소크라테스에 대한 설명을 구분하고자 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각각에 드러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분류해 볼 수 있다.

먼저 초기의 대화편은 <크리톤>, <카르미데스>, <라케스> 등으로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견해를 잘 반영한다고 여겨진다. 초기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탐구자로 등장하며 이 때에는 중기, 후기와 달리 이데아론이 제시되지 않는다. 그리고 중기의 대화편은 <파이드로스>, <파이돈>, <국가>, <향연> 등으로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탐구자가 아닌 하나의 철학 체계 전반을 꿰뚫고 있는 교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중기부터 소크라테스보다는 플라톤 자신의 철학을 반영한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마지막으로 후기의 대화편은 <크라티아스>, <필레보스>, <소피스테스>, <티마이오스>등으로 이 무리에 속하는 대화편 모두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역할이 극히 미미하다. 이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스승 소크라테스보다는 자신의 사상을 완성한, 성숙한 플라톤의 견해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1. 소크라테스 자신의 철학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 묘사된 모습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소크라테스는 우주론 등의 과학적 탐구에서 벗어나 철학적 문제들에만 집중하였다. 플라톤의 <변론>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아폴론의 이름으로 전한 여사제로부터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사람이 없다는 신탁을 받고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다른 계층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정치가와 시인들은 어떤 전문적 지식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장인들도 단지 특수한 영역에서만 지식을 지녔음에도 보편적 지혜를 지닌 척하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를 통하여 소크라테스는 오직 자신만이 자신의 지혜가 부족함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자신이 현명하며 따라서 신탁은 옳았다고 결론짓는다. (무지의 지)

소크라테스에게 진정한 지식을 추구하고 거짓 지식을 폭로하는 일은 도덕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최선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그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그릇된 행위, 즉 비도덕적 행위는 무지의 결과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정의(定義)와 귀납적 논증을 추구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를 추구한 까닭은 우리가 정의(正義)나 경건함 등 어떤 덕목에 관하여 완벽한 정의(定義)를 내리지 못한다면 그 덕목의 특수한 속성을 유익성, 보편성 등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보편적인 정의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면 개별적인 경우들의 진리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귀납적 논증을 적용하는 것이다.

#엠페도클레스

고대철학 스터디

#엠페도클레스

1-1.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초기 철학자들 중 갖아 눈부신 활약을 펼친 인물은 엠페도클레스인데 그는 주로 기원전 5세기 중반에 활동하였다.

1-2. 엠페도클레스는 말 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은 종마를 위한 사육장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 그는 민족주의자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도시국가에 독재를 실시하려는 음모를 좌절시켰다고 한다. 이에 감사한 시민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그는 이 직위를 거부하고 자연학자와 조언자로서 검소한 삶을 사는 편을 택했다.

1-3. 시인으로서 엠페도클레스는 파르메니데스보다 원숙한 모습을 보이며 더욱 다재다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는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침공한 사건에 대해 서사시도 썼다고 하며,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몇 변의 비극도 썼다고 전한다.

1-4. 엠페도클레스의 자연철학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오니아철학자들의 사상을 종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물, 공기, 흙, 불 이 네 실체 모두를 우주의 근본적인 구성요소 또는,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뿌리’라는 동일한 용어로 부른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뿌리들은 항상 존재해 왔는데 다양한 비율로 서로 혼합됨으로써 우리에게 친숙한 세계의 여러 동식물들을 만들어 낸다.

1-5. (시_)
엠페도클레스가 뿌리라고 불렀던 바를 플라톤을 비롯한 이후 그리스철학자들은 요소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는데 이 용어는 원래 단어의 음절을 의미하였다. 이 용어의 라틴어 번역은 elementum이며 이로부터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요소’라는 용어가 유래하엿다. 17세기 보일(Boyle)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엠페도클레스가 제시한 네 요소를 물리학과 화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여겼다.

사실 이 네 요소는 다소 변형된 형태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의 요소들을 서로 다른 네 종류의 물체로 생각하였다. 현재 우리는 고체, 액체, 기체를 물체의 세 가지 상태로 여긴다. 엠페도클레스라면 얼음과 물, 수증기를 각각 흙과 물, 공기의 특별한 경우로 간주하겠지만 우리는 이를 물이라는 동일한 물질의 상태라고 생각한다. 불을, 특히 해가 내뿜는 불을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네 번째의 요소로 생각하는 일은 그리 불합리하지 않다. 어쩌면 20세기에 해와 같이 높은 온도 상태의 물체가 지니는 속성들을 연구하는 플라즈마 물리학이 등장한 사실은 엠페도클레스의 네번째 요소에 다른 세 요소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1-6. 아리스토텔레스는 엠페도클레스가 우주론이 우주에 존재하는 요소들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되는 어떤 원인, 즉 현실 세계의 생물과 무생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전개되고 혼합되는 데 필요한 원인을 지적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칭찬한다. 엠페도클레스는 사랑과 불화가 바로 이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요소들을 결합하며, 불화는 이들을 분리시킨다. 네 가지 뿌리는 어떤 때는 다수가 결합하여 하나를 이루기도 하고, 다른 대는 불화의 증오가 작용하여 서로 분리되기도 하는, 이런 계속되는 상호관계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고 엠페도클레스는 말한다.

1-7. 사랑과 불화는 그 후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자연에 관한 이론에서 자주 등장하였던 인력과 척력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내는 독창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엠페도클레스는 역사가 때로는 사랑이, 때로는 불화가 지배하는 일종의 순환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영향을 받을 때는 여러 요소들이 결합하여 안정되고 조화로운, 빛나는 세계를 이루는데, 이는 파르메니데스의 우주를 떠올리게 한다. 불화의 영향을 받을 때는 요소들이 서로 분리되지만 사랑이 회복되면서 잃었던 영역을 되찾을 때 서로 다른 모든 생물체의 종이 등장한다. 네발짐승과 새, 물고기 등의 모든 복합적 존재는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피조물일 뿐이다. 오직 네 가지 요소만이 영원히 지속되며, 오직 우주적 순환만이 영원히 이어진다.

1-8. 생물 종들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엠페도클레스는 적자생존이라는 주목할 만한 진화론을 제시한다. 맨 처음 살과 뼈는 네 요소의 화학적 혼합에 의해 생겨났는데 살은 불과 공기, 물이 각각 같은 분량으로 섞여 만들어졌고, 뼈는 둘만큼의 물과 둘만큼의 흙 그리고 넷만큼의 불이 섞여 만들어졋다. 이런 복합물로부터 아직 세분되지 않은 팔다리와 기관들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서로 결합할 만한 상대방을 찾을 때까지 여기저기를 방황한다. 이들이 우연히 만난 상대방과 결합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나느데 이렇게 미숙한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결합은 지극히 부적절하다. 이렇게 우연히 만들어진 유기체 대부분은 허약하고 제대로 대를 잇지 못한다. 오직 가장 적합한 구조를 갖춘 존재들만이 살아남아 현재 우리가 아는 인간과 동물 종이 된다. 이들이 생식에 적합하여 계속 살아남는지 여부는 의도나 계획이 아니라 우연의 문제이다.

1-9. 아리스토텔레스는 엠페도클레스가 서로 다른 생명체가 지닌 서로 다른 기관이 동일한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는 중요한 생물학의 원리를 처음 발견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목적론을 우연으로 축소 해석하려는 엠페도클레스의 시도는 비난하는데, 그 후 수세기 동안 생물학자들은 엠페도클레스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랐다. 하지만 다윈이 '그리 엄밀하지는 않지만 자연 선택의 원리를 예견하였다는 점'을 들어 엠페도클레스에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최후에 미소를 지은 사람은 엠페도클레스라 할 수 있다.

1-10.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의 네 요소를 활용하여 감각적 지각에 대한 설명도 제시하는데 이는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을 통해서 알려진다는 원리에 기초한다. 이라는 종교시에서 그는 자신의 자연학 이론을 피타고라스의 윤회설과 연결한다.

1-11. 엠페도클레스는 엄격한 기계론적 태도와 신비적인 종교적 태도 사이를 계속 오가는 모습을 보인다. 때로 그는 자신의 네 요소를 각각 신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1-12. 그의 죽음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의사들이 이미 죽었다고 단념한 판테이아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엠페도클레스가 그녀의 생명을 기적적으로 소생시켰다.
(시)

8장.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윤리학 부터 행복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까지

1.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윤리학

1.1.초기 그리스철학자들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 중에는 도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 많다. 예컨대, 탈레스는 ‘네가 대우받기를 바라는 대로 너도 행하라’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며, 어떻게 해야 최선의 삶을 살수 있는냐는 질문을 받고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했을 때 비난받을 만한 일을 우리 자신이 하지 않으면 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신비적이고 애매한 언급을 하곤 했는데 예컨대 ‘인간이 원하는 바를 모두 얻는다해도 이는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 ‘어떤 사람의 성격은 그의 운명이다’고 말했다.  그 외 다른 철학자들도 특정한 도덕적 문제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드러냈지만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름대로 도덕적 체계를 갖춘 철학자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2.도덕철학자 데모크리토스

2.1. 데모크리토스는 윤리적 주제에 대한 많은 언급을 남겼다. 그의 단편들 중 60여 쪽이 도덕적 충고인데 대부분은 일상의 삶에 관한 소박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자산의 능력을 넘어서는 임무를 맡지 말라, 부와 명성을 부러워하지 말라, 자신보다 처지가 나쁜 모든 사람을 생각하라 등 충고가 등장한다. 그의 조언은 자주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는데 ‘아이를 낫지 않는 편이 낫다’라는 말과 함께 그는 스스로 아이를 낳기 보다는 친구의 양자를 들이는게 낫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다른 말 ‘일상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아이를 낳는다면 어떤 아이가 태어나든 만족해야만 한다’라는 말과 상충한다.

2.2. 플라톤 이래로 많은 도덕철학자들이 육체를 영혼을 타락시키는 존재로 보는 반면 그는 정반대의 견해를 보였다. 만약 영혼이 육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영혼에 있는 것이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육체가 영혼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해도 도구가 나쁜 상태를 보이는 것은 도구 자체가 아니라 그 소유자에게 비난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2.3. 데모크리토스의 도덕적 견해는 일련의 경구나 격언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지만 그가 체계적인 윤리학을 전개하였다는 몇몇 증거들도 있다. 하지만 그의 도덕적 견해가 그의 원자론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호하다.  그는 삶의 목적에 관한 저술을 쓰면서 행복(eudaimonia)의 본성을 탐구하였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부유함이 아니라 영혼의 선함에서 발견되며. 우리는 유한한 것들에서 쾌락을 찾아서는 안된다.  또한 그는 교육받은 자들의 희망이 무지한 자들의 부유함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러나 행복안에서 발견되는 영혼의 선함은 고귀하고 신비한 종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이상은 오히려 즐거운 삶과 조용한 만족에 가까웠으며 이런 이유로 그는 후대에 웃는 철학자로 알려졌다.

2.4. 그는 뒤이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일종의 모범을 제공했다. 예컨대 ‘죄의 원인은 더 선한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조언은 소크라테스의 도덕 사상의 핵심을 이미 드러낸 것을 보여준다. 또한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보다 나쁜 일을 당학는 편이 훨씬 낫다’라는 말에서 후에 소크라테스가 일종의 원리로 발전시킨 생각을 이미 제시했다. 하지만 이 원리는 행위를 결과로 판단해야하고  행위자가 누구인지 확인해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공리주의와 같은 도덕체계와는 양립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2.5. 하지만 데모크리토스는 고대 그리스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아르테(arete) 또는 덕에 관하여 탐구하지 않앗다. 이 단어는 영어의 어떤 단어와도 일치하는게 없기 때문에 최근에는 이 덕을 ‘virtue’ 대신에 탁월성이라는 뜻의 ‘excellence’를 자주 사용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말이나 칼에 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치게 고풍스러워 어색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들 둘이 지닌 개념적 구조상 차이는 고대의 도덕철학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난점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3.덕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견해

3.1. 덕의 본성에 관한 체계적인 탐구를 시작한 인물은 소크라테스인데 그는 덕을 도덕철학의 핵심에, 더 나아가 철학 전체의 핵심에 놓았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는 특히 여러 덕목들이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에우티프론»에서는 경건함(hosiotes)이,  «카르미데스»에서는 절제(sophrosyne),  «라케스»에서는 용기(andreia),   «국가» 1권에서는 정의가 논의된다.

3.2이들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문답(elenchus)을 통하여 그 안의 인물들이 만족스러운 정의를 제시할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각 대화편은 결론 없이 끝난다. 하지만 위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무지를 고백한다고해서 소크라테스가 도덕적 덕들에 대한 어떤 확신도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무언가를 지식으로 간주하는데는 무척 높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3.3. 소크라테스는 덕의 본성을 탐구하면서 거듭하여 덕을 목수일,항해술, 의술 등 전문적 기술이나 기예 또는 산술학과 기하학 같은 학문과 비교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고대에서 부터 현대까지 이어졍왔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로 지적될 수 잇다.

하나는 만일 우리가 지성과 의지를 뚜렷하게 구별하는 것은 수 많은 세대를 거쳐 철학적 반성의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며 이 최초의 반성에 원동력을 부여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덕들과 여려 형태의 전문적 기술에는 중요한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 둘은 모두 타고나기보다는 태어난 후에 획득되며 둘 다 가치있는 특성에 속한다.그는 둘 모두 이를 지닌 사람에게 이익을 주장한다.

3.3.1 그는 이 둘의 사이의 유비를 계속 제시하면서 비교하며 대조하려하며 이 둘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검토하려 한다.  차이점 중 하나느 예술과 학문이 전문가의 가르침을 통해서 전수 될 수 있는 반면 덕을 가르칠 수 잇는 어떤 전문가도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또한 기술의 의도적인 실수가 저지른 사람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는 반면 덕을 갖추는데 의도적인 실패를 한 경우에는 이 행위가 무의식적인 실패보다 덜 나쁘다고 말하기에 매우 이상하게 들린다.

3.3.2. 그는 기술과 덕의 차이에 대해 논하면서 이 둘이 결국 동일시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앞에 말한 고의적인 문제에 대해 고의적으로 덕과 반대되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악행은 무지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한 지식 즉, 지혜(phronesis)없기 때문이다.

3.3.3. 또한 덕을 가르치는 교사가 없는 이유는 덕이 일종의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히 습득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지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식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전제를 제시한다. «프로타고라스»라는 제목의 대화편에서는 그는 선은 쾌락과, 악은 고통과 동일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만약 쾌락과 선이 동일한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사람들은 선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악을 저지른 셈이 되는 것이고 이는 불합리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3.3.4. 하지만 위의 전제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어떤 행위가 악하다는 지식은 그 행위의 결과를 고려했을 때 쾌락보다 큰 고통을 낳는다는 지식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른 행위를 하는 사람은 이런 지식이 부족함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쾌락과 고통, 현재와 미래의 크기를 비교하고 측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식이며 이런 선택이 바로 정의,절제,용기라는 덕들 각각의 서로 동일한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4. 정의와 쾌락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

4.1. ‘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진정으로 쾌락의 계산에 대 생각했는지는 학자들간에 일치하지 않는다.그러나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정의란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조화라고 주장한다. 우리 영혼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경우에만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는 정의로운 역할이라는 것이다.  즉 절제를 가진 일반시민, 용기를 가진 수호자, 지혜를 가진 통치자들이 각 계층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정의인 것이다.

4.2. 쾌락과 덕 간의 관계에 대해 대화 초기편에서는 쾌락은 덕의 목적이 아니라 영혼의 하위 부분이 동반하는 바로 드러나며 정의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이익을 준다는 결론은 보인다.  그러나 이는 잠정적인 결론이다. 왜냐하면중반부에 이데아의 역할이 해명된 후에는 정의로운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설명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영혼을 지혜로 가득 채우는 일은 그저 정욕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보다 훨씬 더 기쁨을 준다. 그는 정욕,기개,이성 중 어떤 요소가 그의 영혼을 지배하는가에 따라 탐욕스러운 인물, 야망을 가진 인물, 학문적인 인물로 분류되는데 이들 중 학문적인 사람인 철학자의 판단을 가장 선호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경험과 통찰, 추론 등에서 다른사람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4.3.하지만 플라톤은 아직 쾌락의 계산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 군주가 사악한 참주보다 729배나 행복한 삶을 산다는 논거를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대화편 «펠레보스»에서 쾌락이 최고 선이라고 주장하는 프로타르코스와 지혜가 쾌락보다 우월하며 우리를 행복으로 더욱 잘 인도한다고 보는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쾌락도 지혜도 행복한 삶의 본질이 아니라 두 요소가 적절하고 혼합된 삶만이 진정으로 선택할 가치가 있다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최고선은 쾌락과 지혜가 적절한 비율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5.행복에 관한 아리스토테레스의 견해

5.1. «필레보스»에서 제시된 좋은 삶의 기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좋음은 다른 목적들과 비교해 볼 때 더욱 완전하여야만 한다-즉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항상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되어야한다. 또한 그것은 자기 충족적인 것, 즉 오직 그 자체만으로 삶을 가치있게 만들며 더 이상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것이어야한다. “라고 하며 이것이 바로 행복의 속성이라고 말한다.

5.2. 그에게 좋은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지혜,덕,쾌락,명예,평판, 부,교양’이라는 7가지 후보로 내세운다. 또한 어떻게 이에 도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본성을 통해서, 배움을 통해서, 훈련을 통해서, 신의 호의를 통해서, 행운을 통해서’이라는 5가지 후보를 등장시킨다. 그러나 두번째 대답에 그는 몇가지를 배제한다. 왜냐하면 본성,행운,신의 은총으로 행복이 실현된다면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5.3.그러므로 그는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으려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무언가가 존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목적 중 하나는 쾌락이며 술,음식,성행위와 같은 동물수준의 쾌락이 아닌 미학적,지적 쾌락을 추구해야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좋은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지혜와 덕,쾌락으로 압축하여 제시한다. 이들은 각각 철학적,정치적,향락적 삶으로 드러나는데 이들이 행복과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보았다. 이 세 요소가 지니는 매력을 적절하게 결합함으로써 행복이 전통적인 삶의 형태에서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5.4. 그는 행복에 이르는 결정적인 단계를 설명하면서 윤리적인 영역에 잠재성과 현실성이라는 형이상학적 분석을 도입한다. 그는 어떤 상태(hexis), 활용(chresis), 발휘(energeia)를 구별하면서 덕과 지혜는 모두 상태인 반면 행복은 일종의 활동이므로 덕이나 지혜를 바로 행복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행복을 구성하는 활동은 덕의 활용 또는 발휘이며

 

스토아학파의 인식론부터 피론의 회의주의까지

1.스토아 학파의 인식론

1-1.초기 스토아 학파는 지식의 본성에 관한 많은 가정들을 에피쿠로스학파와 공유하였다. 에피쿠로스학파와 마찬가지로 스토아학파도 지식의 기초를  두 가지, 오류에 빠질 수 없는 감각적 인상과 원초적, 후천적 개념들이라고 믿었다. 또한 스토아 학파는 개념의 근원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한 설명을 하는데 그에 따르면 한 사람이 태어날 때 그의 정신은 텅 빈 백지같지만 그가 이성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개념이 이 백지 위에 쓰여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최초의 개념은 감각들에서 유래하며 이 경험들이 기억에 남는다. 몇몇 개념들은 자연적으로 생기기도 하는데 이를 ‘프롤렙시스’라고 부른다.  이 개념은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것이다.

1-2. 스토아학파는 에피쿠로스학파에 비해 인간의 정신적 상태에 대한 분류를 훨씬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그들은 회의주의에 맞설 수 있을만한 인식론을 제시했는데 플라톤이 대비했던 지식(episteme)과 의견(doxa)이라는 상태에 ‘인상(katalepsis)’을 도입한 것이다.  섹스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이 문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인상을 인식적 현상(phatasia kataleptike)과 관련해서 정의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서로 연결된 세 가지가 있는데 지식과 의견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인상이 바로 그들이다. 지식은 건전하고 확고하며 논증에 의해서 변화될 수 없는 인식이다. 의견은 근거가 약하며 거짓인 동의이다. 이들 사이에 인상이 위치하는데 이는 인식적 현상에 대한 동의라 할 수 있다.”

1-3. 위와 같은 현상이란 폭넓은 용어로서 감각에 드러나는 바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의견을 갖도록 하는 근거까지 포함한다. 인상 또한 마찬가지로 감각에서 유래할 수도, 이성에서 유래할 수 도 있다. 인상은 지식과 의견 사이에 위치하는데 의견은 일종의 특별한 요소인 동의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상은 의견과 달리 거짓일 수 없으며 또한 지식과 달리 결코 우리의 마음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힘을 포함하지 않는다. 고로 인식적 현상이란 ‘존재하는 바로부터 생겨나며, 존재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게 각인된 인상을 주는것’이다.

1-4. 스토아학파는 인식적 인상을 설득력을 기준으로 네 유형으로 분류한다.

(1)설득력이 있는 인상: ‘지금은 낮이다’,  ‘나는 말하는 중이다’

(2)설득력이 없는 인상: ‘만일 어둡다면 지금은 낮이다’

(3)설득력이 있는 동시에 없는 인상: 철학적 역설들

(4)설득력이 있지도 없지도 않는 인상: ‘모든 별들의 수는 홀수이다’

 그러나 설득력이 진리를 보장해주는 기준은 아니다. 현명한 사람은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합리거이기도 한 현상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이 문제가 복잡한 이유는 인상적 인상 뿐만 아니라 합리적 인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르케실라오스는 스토아학파의 인식적 인상인  ‘어떤 것이 존재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게 각인된 무언가’라는 정의를 비판한다. 그는 과연 참인 인상과 구별될 수 없는 거짓 인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제논은 만일 정확하게 일치하는 거짓인상이 존재하면 그런 인상은 인식적 인상알 수 없다고 동의한다. 그래서 그는 인식적 인상에 대한 위의 정의를 수정하여 ‘존재하지 않는 바로부터는 생겨날 수 없는 종류의 인상’이라는 점을 더한다.

2.아카데메이아의 회의주의

2-1.스토아학파의 인식론이 회의주의 진영으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유산을 이어받은 아카데메이아로부터 제기됬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예를 들면 아카데메이아 지도자중 아르케실라오스나 그 후계자 카르네아데스는 플라톤보다 위쪽인 소크라테스에 의지하면서, 그의 문답법이야말로 지식에서 거짓문장을 걸러 내는 탁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소크라테스과 달리 훨씬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일상적 문제에 대해서도 판단을 중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2-2. 회의주의에는 여러단계들이 있다.  어떤 회의지주의자들은 그저 진정한 지식의 성립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이런 회의주의자는 다양한 주제들에 관한 의견을 지니는 것에 단, 의견의 소유자가 의견이 지식의 지위에 도달했다고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또한 그 자신도 지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포함한 일련의 의견을 얼마든지 지닐 수 있다. 이때 그 사실을 인식하였다고 주장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보다 더 극단적인 회의주의자들은 지식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의견의 적절성까지도 의문시한다. 이들은 확실성에 대하여 확고한 동의를 표하는 일뿐만  아니라 어떤 의견에 대하여 잠정적인 동의를 표하는 일도 삼가야한다고 권고할 듯하다.

2-3.이 극단적인 회의주의에  ‘회의주의자가 모든 판단을 유보한다면 어떻게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겠는가’라고 흔히 제기되는 반박에 그들은 충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다.  동의는 의지와 관련해 스스로 자제할 수 있지만 현상은 우리의 통제 밖에 놓여있으며 현상에는 반드시 충동이 뒤따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진리를 발견하고 거짓을 피하려는 정신적인 작용인 동의가 없어도 이런 충동에 따르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3.피론의 회의주의

3-1.기원전 1세기 무렵 철저한 회의주의를 내세우는 새로운 근본주의 학파가 성장하였는데 이 학파의 창시자는 아이네시데모스다.  이 학파의 창시자들은 엘리스 출신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 소속 군인인 피론을 진정한 창시자로 여겼다.

3-2.  기원후 2세기에 활동한 피론주의 회의주의자인 섹스토스는 그가 우리에게 전한 아케데메이아의 회의주의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느 회의주의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동의를 표시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일상적인 지각의 문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견해를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저술이 가치있는 까닭은 회의주의 논의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한 게 아니라 초기에 등장한 더욱 독창적인 회의주의자들의 추론 방식에 관한 많은 귀중한 정보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3-3. 우리는 고대의 인식론을 연구함녀서 지식의 본성과 회의주의의 한계 등에 대하여 많은 것은 배울 수 있다. 특히 다음 몇 지의 통찰은 이후 모든 철학에 전해진 유산이 되었다. 먼저 오직 참인 것만이 지식이 될 수 있다. 지식은 오직 무언가에 의해, 경험이든 추론이든 혹은 다른 근거에 의에 암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지지될 경우에만 지식일 수 있다. 그리고 지식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후에 자신의 지식이 뒤집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한다. 그러나 이 인식론은 두 가지 오류에 빠져있다. 두 오류 모두 무엇이든 간에 지식은 참이어야만 한다는 진리를 오해한 결과로 등장하였다.

3-3-1.첫 번째 오류

‘무엇이든 간에 지식은 참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필연적으로 만일 p가 인식된다면 p는 참이다

(2)만일 p가 인식된다면 p는 필연적으로 참이다

여기서 (1)은 참이지만 (2)는 거짓이다. 이 오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까지 이어지는 고전적인 인식론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거듭해서 (2)를 (1)과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3-3-2.두 번째 오류

무엇이든 간에 참이어야만 한다면 지식은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 능력을 발휘한 결과여야만 하는 듯이 보인다. 이 오류는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제국 시대의 인식론에서 자주 발견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학파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평범하고 우연적인 일도 지식으로 인정하려 한다. 그러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작용하는 능력을 우리가 지닐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오류는 이 전 고전 시대의 오류를 거울에 비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제국의 스토아학파부터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

로마제국의 스토아학파

1. 세네카와 에픽테토스 아우렐리우스

1-1 생애: 세네카는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49세 때 네로의 개인 교사가 되었고 네로가 황제가 된 후 곁에서 최고 조언자 역할을 하였으며 기원 후 62년 네로에 대한 모든 영향력을 잃고 65년 반란의 혐의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기원 후 1세기에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여겨지며 열 개의 윤리적 대화편과 은퇴 후에 남긴 124편의 서한으로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주 관심 분야는 윤리학이었으며 자연 과학에 대하여 관심이 있어서 저술도 썼지만 이는 자연 현상에서 도덕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었다.

1-2 세네카의 철학이론: 그는 정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노력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육체적 혼란과 그릇된 판단의 분명한 구별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진정으로 벗어나야 할 본질적인 것은 그릇된 판단임을 주장하였다. 마음에 우연히 떠오르는 것 존재하는 대상을 보고 영향을 받아 생긴 것은 정념이라 할 수 없으며 이러한 것에 굴복하여 우연으로 따르는 것이 정념이라 하였다. 그렇기에 신체적 현상보다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는 유물론자로 영혼이 물질적인 세계의 일부라 생각했지만 내세에 대하여 염두를 두고 있었다. 그는 스토아학파가 제시한 덕에 이르는 길이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며 도덕적 발전을 세 단계를 구별했다. 또한 이론과 교훈 사이의 정의를 명확히 하여 구별을 용이하게 하였다.

1-3 세네카에 대한 평가 및 에픽테토스와 아우렐리우스: 세네카는 위선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스토아학파가 제시한 기준에 따르는 삶을 살았다고 평가를 받았으며 로마제국의 스토아학파 창시자이다. 에픽테토스와 아우렐리우스 모두 세네카와 유사하게 도덕철학과 연관이 있다. 에픽테토스의 저술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 중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어떤 악도 진정으로 우리를 해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보이기 위해 자아와 도덕적 의지를 동일시하였다. 아우렐리우스는 주요 철학학파들을 위한 학교를 위한 학교를 세웠으며 명상록이라는 저술을 통해 여러 격언과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자신에 철학적 의견을 보인다.

초기 기독교 철학

2. 초기 기독교 철학의 상황과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2-1 초기 기독교 철학과 상황: 에피쿠로스학파 주의와 스토아학파가 아우렐리우스로 마무리되었다. 아우렐리우스 지배 당시 기독교를 잔인하게 박해하였으며 최초의 기독교 철학자 유스티누스가 기독교를 옹호하는 변증론을 헌정하고 이후 처형되었다. 2세기 기독교인들은 최초로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예수와 바울로의 종교를 조화시키려 시도 하였다.

2-2 클레멘스: 일련의 잡기라는 저술을 출판하였으며 교양 있는 기독교인은 철학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플라톤의 사상을 이원론을 주장하는 이교도들에 대항하는 동맹으로 여기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기독교와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하였고 정념으로부터 자유를 주장하는 스토아학파의 이상을 찬미했다. 그는 구약성서의 우화적 측면을 배제하려 하며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다시 드러내었으며 여러 문헌을 편집하여 대중화하였다.

2-3 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 출신 플라톤주의자인 암모니오스 사카스의 제자로 당시 기독교인들이 이단으로 여기던 철학 사상들을 자신의 체계에 수용하려 하였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탄생 이전에 존재한다고 믿으며 자유정신인 영혼이 육체와 결합 후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자유의지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즉 모든 이성적 존재가 구원받으며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에 충성을 맹세하며 로마제국에서 추방 후 신과 자유 불멸성에 대하여 기독교적 믿음을 옹호하는 철학적 논증을 펼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부활

3. 플루타르코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의 주석 전통

3-1 플루타르코스: 그리스 영웅과 로마의 영웅을 비교한 영웅전을 쓴 역사가이다. 영웅전 이외에도 대중적인 철학적 주제에 관한 글을 모아 도덕론을 펴냈다. 플라톤주의자로서 대화편 티마이오스에 대한 주석을 달았으며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에 반대하는 수많은 논쟁적 글을 써 두 학파의 체계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3-2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에 관한 주석 전통: 플라톤주의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부활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시기인 만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 대하여 전문적인 주석 전통이 만들어졌다. 또한 이 시기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주석으로부터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로 여기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그 외에 알렉산드로스가 형이상학 감각에 관하여 기타 논리학 저술들에 대한 주석 작업도 이루어졌다.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

4.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

4-1 플로티노스: 오리게네스와 동시대 사람이며 플라톤이 생각하던 국가를 캄파니아지역에 세우려고 항상 생각하였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제자가 6가지 주제로 그의 저술을 분류하였는데 그것은 윤리학과 미학, 자연학과 우주론, 심리학, 형이상학, 논리학, 인식론의 6가지이다. 그의 사상체계에서 중요한 개념은 일자 개념으로 단일성을 존재의 핵심적인 속성으로 본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에서 플라톤으로 플라톤에서 플로티노스로 이어진 개념이다. 일자는 플라톤이 언급한 선의 이데아와 동일시되며 모든 존재의 기초이며 모든 가치의 기준이다. 그러나 일자는 존재와 선을 넘어서 있기에 모든 것은 일자로부터 이어지는 하나의 연속적인 유출과정으로 존재한다. 연속적인 유출과정이란 대략 일자->정신->영혼->자연->순전한 질료로 구성되는 과정으로 각각이 상위 단계와의 의존을 통해 현존하고 활동할 수 있다. 이러한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적 체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도출된 철학적 원리를 기초로 제시된 것이다. 그의 사상은 죽은 뒤 유지되지 못했지만 기독교들에게 전해졌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4-2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는 354년 기독교 어머니와 이교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라틴 문학과 수사학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그의 젊은 시절은 자서전 격인 고백록에 의존한다. 그는 겉핥기로 그리스어를 배웠지만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칠 수 있었다. 18세 때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플라톤의 사상에 빠지게 되었으며 10년간 마니교를 믿었다. 이후 로마로 건너가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와 친분을 나누고 그 후에 어머니와 암브로시우스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전향하였다. 387년 세례 후에도 여전히 플로티노스철학의 영향을 받았는데 몇 편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적 신플라톤주의를 분명히 드러내었다. 아카데메이아학파에 반대하여 라는 저술에서는 아카데메이아 중심의 회의주의에 반대하는 논증을 보이고 이데아에 관하여 에서는 이데아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제시하여 이데아를 신의 정신 안에서 영원불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 외에도 자유의지론과 83가지 서로 다른 질문들이라는 저술 등이 존재하며 플라톤주의의 입장을 유지한다. 이러한 저술들은 391년 사제 임명 직전에 쓴 것으로 사제가 된 후에도 신국론을 포함한 여러 저술을 썼지만 사제임명 이후 저술들에서는 플로티노스의 제자가 아닌 중세 기독교 철학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제시한다.

아카데메이아의 회의주의 ~ 유대교와 기독교

1.아카데메이아의 회의주의

1-1 아카데메이아의 노선 : 기원전 3세기 경, 아카데메이아는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아 회의주의를 채택한다. 철학에서의 회의주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피론은 아무것도 인식될 수 없다고 가르친 바 있으며, 그의 자제인 아르케실라오스는 한 때 아카데메이아의 수장이 되었다. 또한 티몬은 과학의 기초로 활용할 수 있는 자명한 원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1-2 스토아철학에 대한 비판 : 스토아철학은 아카데메이아의 주 공격대상이었다. 아르케실라오스는 그들이 존재할 수 없는 정신적 인상을 근거로 진리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판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수장이 된 카르네아데스 또한 진리가 아닌 개연성이 우리의 삶을 인도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은 키케로에게 이어져 더욱 세련된 형태로 발전한다.

2. 루크레티우스

2-1 주도권 : 기원전 1세기 이후, 철학의 주도권은 그리스에서 로마로 넘어간다. 로마의 라틴철학 역시 운문형태의 저술에서 산문형태의 것으로 변화되었으며, 당시 전체가 완벽히 라틴어로 서술된 최초의 철학적 저술은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철학시 이다.

2-2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이 시는 종교가 주는 두려움을 떨쳐낸 에피쿠로스를 칭찬하면서 시작된다. 1권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설명하고, 2권에서는 소박한 쾌락만을 추구하는 태도를 칭송한다. 3권은 영혼과 감각의 기능에 대한 에피쿠로스적 이론을 설명한다. 우리 영혼의 본성이 물질적이라는 사실을 알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 4권은 원자론에 기초한 생리학적 설명 및 성행위에 대한 묘사가 기록되어 있다.

3. 키케로

3-1 생애 : 키케로의 저술의 특징은 당시의 철학적 흐름을 잘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다. 젊었을 때의 그는 스토아철학, 아카데메이아 등등 다양한 철학학파들을 접했으며, 그 후에는 정치가로서 오랫동안 몸을 담았다. 그 영향으로 주로 정치철학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카이사르의 독재기간 및 딸이 죽었던 시기에 철학과 관련된 저술 대부분을 남겼다. 《위안에 관하여》와 《호르텐시우스》가 이 시기의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3-2 키케로의 철학 : 키케로는 로마인들이 ‘모국어’로 철학을 할 수 있도록 라틴어로 구성된 철학 용어들을 만들어 내었다. 인식론에서의 그는 아카데메이아의 수장인 필론의 영향을 받아 온건한 회의주의를 선호하였고, 윤리학에서는 에피쿠로스가 아닌 스토아학파를 따랐다. 그는 위안과 마음의 평안을 위한 도덕철학을 추구하였으며, 감정과 덕, 행복 사이의 관계 및 철학적 신론과 결정론에 관한 논의들을 다루었다.

3-3 말년 : 카이사르가 죽은 뒤, 다시 복직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죽고 만다. 그는 그리 깊이있는 철학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논증은 날카로웠고 문체 또한 우아하여 항상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4.유대교와 기독교

4-1 예수의 등장 : 나자렛 출신인 예수의 등장은 철학의 발전과정 중에서도 중요한 사건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도덕철학은 이전의 철학에서도 볼 수 있었던 만큼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도덕철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4-2 가르침 :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하여 유일신 야훼가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관점을 바탕으로 삼는다. 또한 신의 심판이 임박하여 자신이 곧 구세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4-3 필론 : 예수가 죽은 이후로도 그의 유대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필론은 기원후 1세기의 유대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대인을 박해하고 황제숭배를 강요한 일에 대해 항의하였으며, 모세의 삶에 대한 저술의 주석서를 쓰기도 하였다.

4-4 바울로 : 기독교는 주로 그리스어를 할 줄 아는 유대인 학자들을 통해 로마 제국에 전파되었다. 그 과정에서 바울로는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와 논쟁을 벌인 바 있다. 그는 기독교가 알 수 없는 신을 위한 제단을 차렸다는 비난에 대항하여 철학자들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신을 숭배한다고 되받아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과 시학 부터 우주론까지

1.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과 시학

1-1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과 관련해 두 권의 저술을 썼다. 하나는 수사학, 다른 하나는 시학이다. 이 둘은 각각 법정에서 변호를 맡은 사람과 희곡작가들의 임무를 돕기 위해서 쓰였다고 한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수사학이, 어떤 상황에도 가능한 설득의 방법을 제시하려는 학문 분과라고 말한다. 이는 결코 어떤 특수한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논의 주제와 무관하다. 또한 그는 말을 통해 설득하는 데에는  세가지가 기초로 작용한다.  이 셋은 말하는 사람의 특성,  청중들의 태도 그리고 말 자체의 논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와 특성에 관해서는 다른 저서들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감정에 대해서는 《수사학》2권에서 가장 완전한 견해를 드러낸다.

1-1-1  수사학과 달리 《시학》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폭 넓게 읽혔다.       현재 《시학》의 1권만이 전해지는데 여기선 서사시와 비극이 논한다.  희극은 다룬 2권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시학》제대로 이해하려면 플라톤의 시에 대한 견해를 알아야 한다.  플라톤 물질적인 대상들을 실재하는 이데아의 모방으로 간주한다. 즉 대상에 대한 예술적인 묘사는 실재로부터 이중으로 멀어진 것,  다시 말해 저급한 것으로 정의한 것이다.

1-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시와 철학의 대립을 해소하려 했다. 그는 모방이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라 말한다. 모방은 인간을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로 만드는 특성중 하나로 본다. 인간의 학습 범위를  넓혀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묘사는 그 자체만으로 큰 기쁨을 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묘사한 그림들을 보며 충분 히 즐기고 감탄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1-2-1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엔 여섯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말했다.  줄거리, 성격, 문체, 사상, 시각적 효과 그리고 노래다.  그는 특히 처음 두 가지인 줄거리와 성격에 관심을 보인다. 그는 비극의 위대성은 희곡을 읽는  것만으로 제대로 평가 할 수 있다 보았다.  또한 사상과 문체에 관해선 더욱 중요하게 보았다. 이는 설득력 있는  표현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 비극의 정수가 되는 것은 결국 성격과 줄거리라 주장했다.

1-2-2  그는 비극을 구성하는 등장인물이 선한 면과 악한 면 모두를 갖추고 작품 전체에 어울리는 성격을 소유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등장인물은 줄거리를 위해 창조되어야 하며, 줄거리는 도입,전개,종결이 명확히 통일성을 지닌 하나의 귀결된 사건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3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비극론을 통해 이러한 예술 행위들이 단순한 이데아 세계에 대한 모방만이 아니라 주장했다. 시와 연극 등은 또  다른 창조행위고, 일상적 삶에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대부분을 순전한 우연한 산물로 보았다. 오직 허구의 세계에서만 자연스런 결과로 이어지는 방향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저술들

1.  그의 전집  중 도덕철학에 관환 저술을 세 종류가 전해진다.  10권으로 구성된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으로 구성된 《에우데모스 윤리학》과 2권으로 구성된 《대윤리학》이 바로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얼마 되지 않은 때 , 여러 학자들은 그의 윤리적 저술을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세를 거치고 근대 초 고전 연구가 부흥한 이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정수로 여겨지며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 되었다.

2.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달리 《에우데모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사이에서 지극히 소수만 관심을 보였다. 후에 이 작품은 아리스토텔레스 사후에 쓰인 작품이라는 주장과 세 작품 중 가장 먼저 쓰였다는 주장으로 나뉘어 논의 되기도 한다.  후에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에우데모스 윤리학》이 그 내용 면에서 겹치고,  문체면에서 《에우데모스 윤리학》이 플라톤의 주장에 더 잘 어울리고 가깝다는  점에서 《에우데모스 윤리학》을 리케이온  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3. 세 윤리학 저서는 전반적으로 상당히 유사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이데아론을 배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철학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가 아닌 행복을 최고선으로 보았다. 윤리학은 인간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바를 다루는 실천적 학문이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유사한 점은 덕을 갖춘 삶과 행복한 삶 사이의 밀접한 연결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즉 행복한 삶은 덕이 있는 행위를 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차이점으로는 덕에 대한 유형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조금 다르다는 점이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이론

 1.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마지막 보충 부분에서 최선의 국가는 어떤 헌법을 채택해야 하며 또 반대는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할 예정이라고 말한다. 이는 《정치학》의 머릿말처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가 최고선을 삼는 최고 수준의 공동체라는 말과 함께 논의를 시작한다. 또한 국가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최초의 공동체로서 가족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공동체라고 말한다. 국가가 인간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3.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용하고 비판한 대표적인 철학자는 플라톤이다.  그가 플라톤과 다른 주장을 펼친 주된 요지는 도시국가에서의 삶이 병영에서 의 삶과 같아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정치 체계를 설명 하는 데에 플라톤의 제언을 풍부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이론적 논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때로는 둘의 개념적 구조가 매우 유사하기도 하다.

4.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정치 체제들을 상세히 평가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국가의 본질을 논한다. 그는 일종의 입헌민주정을 선호했는데 그가 생각한 ‘이상적 민주정’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며 최고 수준의 자질을 갖춘 시민이 나머지 모든 시민의 만족을 목표 삼아 통치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체제를 심의부, 관리부, 사법부  세 부분으로 나눈 최초의 형태를 제시하기도 한다. 특이한 점은 노예제도의 정당화와 고리대금의 금지에 관한 것이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따른 것으로 현대에서의 두 개념으로 논의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명 다른 견해를 펼쳤을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4.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

  우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선구자들과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위치한다고 한다.

  또한 천체의 정신은 초자연적, 살아 있는 지성으로서 우주에서 천체의 운행을 인도한다고 보았다. 이런 주장은 불변하는, 영원한 운동의 원인이 , 즉 다른 존재들을 운동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적 저술 중 가장 나은 것도 오늘날에는 단지 역사적 관심의 대상 밖에 되지 않는다. 

 그의 저술들이 계속 가치를 지니는 까닭은 시대를 넘어서 다른 시대의 자연학에까지 폭넓게 영향을 미치는 기본 개념들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