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소크라테스 자신의 철학(p. 78~96)

기원전 404년, 고대 그리스의 문명국가였던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항복하고 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너무도 달랐는데 스파르타는 엄격한 군국주의를 바탕으로 금욕과 절제를 강조한 반면 아테네는 다수결의 원리를 따르는 민주주의 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한때 그리스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던 아테네였지만 다수결의 폐단으로 인해 갈수록 불안정해져 갔다. 일례로 다수결로 죄의 유무를 가리던 아테네 법정은 법률에 대한 지식 없이 오직 화려한 말솜씨가 죄의 유무를 결정하는 중우정치 그 자체였다. 이 모습을 본 아테네의 일부 엘리트들은 스파르타의 체계적인 교육과 규율 등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 엘리트 중심에는 소크라테스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천민적 민주주의를 비난했고 스파르타 체제에 대한 필요성을 내비쳤다.

전쟁이 끝난 404년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정치체제를 민주주의에서 이른바 ‘30인 참주’에 의한 과두정치(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정치 체제)로 바꾸었는데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떤 역할도 담당하지 않고 어떤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이에 민주주의 정치가 아니토스는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부인하고 다른 새로운 신들을 도입함으로써 범죄를 저질렀다. 또 그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범죄도 저질렀다. 이에 대한 처벌로 사형을 요구한다.’며 소크라테스를 고발하였고 결국 소크라테스는 사형 당한다.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과 플라톤은 비록 실패했지만 소크라테스를 변호하는 글을 썼다. 우리는 이 변론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를 추측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사상을 확실히 알려주는 문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크세노폰과 플라톤에서 쓰인 소크라테스에 대한 묘사가 다르다는 점이다.

 

  1. 크세노폰이 묘사한 소크라테스

크세노폰은 군인 출신의 역사가로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후 변론을 저술로 남겼고 소크라테스 회상록과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 대화편<향연>을 추가적으로 저술하였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경건한 인물로 종교적인 의식에 충실히 따랐으며 신탁을 존중하였다. 탐욕이나 야심없이 예의 바르고 온화한, 욕망을 절제할 줄 알고 어려움을 잘 참는 사람이었다. 그는 교사가 아니었지만 말뿐만 아니라 실행을 통해서 덕을 가르쳤으며, 꾸지람뿐만이 아니라 짓궂게 놀리고 우회적인 비유를 들면서 악덕을 말렸다. 그가 이렇게 모범을 보였지만 몇몇 제자들은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그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비록 아테네 민주주의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그는 사람들의 좋은 친구였으며, 어떤 범죄나 국가에 대한 반역을 전혀 저지르지 않았다.

 

이처럼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를 융통성 없지만 예리한 통찰력을 갖추고 현실적인 윤리적 문제들에 대하여 조언을 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1.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

반면 플라톤이 저술한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그 외의 대화편에서 쓰인 소크라테스는 어떤 일관된 역할이나 특성을 보이지 않는다. 몇몇 대화편에서 그는 문답법(산파술)을 활용하여 스스로 모순을 발견하도록 유도하기도 하며, 또 청중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며 다소 독단적인 형태의 윤리적, 형이상학적 체계를 제시한다. 또 다른 대화편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맡아 철학적 논의의 주도권을 넘기고 떠나기도 한다. 이에 학자들은 대화편이 쓰인 시기를 구별하여 소크라테스에 대한 설명을 구분하고자 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각각에 드러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분류해 볼 수 있다.

먼저 초기의 대화편은 <크리톤>, <카르미데스>, <라케스> 등으로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견해를 잘 반영한다고 여겨진다. 초기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탐구자로 등장하며 이 때에는 중기, 후기와 달리 이데아론이 제시되지 않는다. 그리고 중기의 대화편은 <파이드로스>, <파이돈>, <국가>, <향연> 등으로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탐구자가 아닌 하나의 철학 체계 전반을 꿰뚫고 있는 교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중기부터 소크라테스보다는 플라톤 자신의 철학을 반영한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마지막으로 후기의 대화편은 <크라티아스>, <필레보스>, <소피스테스>, <티마이오스>등으로 이 무리에 속하는 대화편 모두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역할이 극히 미미하다. 이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스승 소크라테스보다는 자신의 사상을 완성한, 성숙한 플라톤의 견해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1. 소크라테스 자신의 철학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 묘사된 모습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소크라테스는 우주론 등의 과학적 탐구에서 벗어나 철학적 문제들에만 집중하였다. 플라톤의 <변론>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아폴론의 이름으로 전한 여사제로부터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사람이 없다는 신탁을 받고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다른 계층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정치가와 시인들은 어떤 전문적 지식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장인들도 단지 특수한 영역에서만 지식을 지녔음에도 보편적 지혜를 지닌 척하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를 통하여 소크라테스는 오직 자신만이 자신의 지혜가 부족함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자신이 현명하며 따라서 신탁은 옳았다고 결론짓는다. (무지의 지)

소크라테스에게 진정한 지식을 추구하고 거짓 지식을 폭로하는 일은 도덕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최선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그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그릇된 행위, 즉 비도덕적 행위는 무지의 결과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정의(定義)와 귀납적 논증을 추구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를 추구한 까닭은 우리가 정의(正義)나 경건함 등 어떤 덕목에 관하여 완벽한 정의(定義)를 내리지 못한다면 그 덕목의 특수한 속성을 유익성, 보편성 등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보편적인 정의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면 개별적인 경우들의 진리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귀납적 논증을 적용하는 것이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