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의 수정~단념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견해

공리주의의 수정

1-1. 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과 마찬가지로 결과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아주 공격적으로 여겨졌던 벤담의 학설을 다른 방식으로 완화시켰다. 우리는 쾌락을 양적으로 구별할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구별하게 된다.

1-2. 그렇다면 쾌락의 서로 다른 종류를 어떻게 등급으로 나눌 것인가? 밀에 따르면, ‘두 가지 쾌락이 있는데, 둘 다 경험해 본 사람 모두 또는 거의 모두가 어떤 도덕적 의무감과도 관계없이 그 중 어느 하나를 선호한다면, 바로 그것이 더 바람직한 쾌락이다.’

또한 지성적이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온갖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무식한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만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족스러워 하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1-3. 밀에 따르면, 행복은 만족뿐만 아니라 자존감을 필요로 한다. 저급한 쾌락이 제아무리 많다고 한들 자존감이 없으면 행복이 아니다. 따라서 최대 행복의 원리는 다시 진술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자의식과 자기 관찰의 습관을 갖게 된 사람들은 질의 시금석 및 질을 양과 대비해서 측정하는 척도를 선호함으로써 최선의 비교 수단을 갖추게 된다. “

1-4. 어느 비판자가 공리주의는 돼지처럼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는 밀의 말을 시인한다고 해보자. 그럼에도 그 비판자는 공리주의가 최상의 인간성에 호소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덕은 행복보다 중요하고, 절제와 자기희생의 행위는 가장 훌륭한 인간 행위이다. 밀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행복을 단념하는 것이 숭고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홀로 고행을 감수하는 금욕주의자를 감탄스럽게 바라보는 것과 그런 식의 감탄은 받을 만하다.’

1-5. 공리주의에 대한 반대는 두 가지 다른 형식으로 나타난다. 도덕률로서의 공리주의는 너무 엄격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고, 너무 느슨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공리주의가 너무 엄격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거의 성인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이타주의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공리주의가 너무 느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떤 종류의 행위에 대한 절대적 금지를 융통성 있게 폐지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용문 무슨 연관,,?)

1-6. 에서 밀은 두 전선을 모두 방어하려고 한다.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주장에 대적하여 그는 도덕적 표준과 행위 동기를 구별하라고 강조한다. 말하자면 공리주의가 모든 사람의 행복을 궁극적인 도덕적 표준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행복이 모든 행동의 목적일 필요는 없다.

1-7. 밀 자신이 가장 진지하게 취급하는 공리주의의 난점은 공리주의가 정의보다 편의를 더 선호하는 수단이라는 주장이다. 밀은 정의의 명령이 사실은 일반적인 편의 영역의 일부에 해당하지만, 그럼에도 편리한 것, 도덕적인 것, 공정한 것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고 응수한다. 어떤 것이 편리하다면, 공리주의적 근거에 따라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전혀 의무의 문제를 관련시킬 필요가 없다. 어떤 것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기도 하다면 의무가 발생하며, 의무를 완수하도록 정당하게 강제될 수 있다는 것은 의무 관념의 중요 요소이다. 즉 밀의 경우, 정의와 도덕적 권리 사이의 관계를 특징짓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불공정한 법적 권리가 있을 수 있고, 법과 상충되는 공정한 요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1-8. 밀은 정의와 관련 있는 여러 관념들이 공리주의적 편의의 원리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최대 행복의 원리에 내재하는 문제, 즉 공동체에서 행복의 전체 총합을 늘리다 보니 도외시된 개인의 불행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는다.

1-9. 그뿐 아니라, 에서 밀은 분배적 정의의 형식이 체제마다 서로 다르게 제공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 말고는 분배적 정의에 관해 거의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2- 단념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견해

2-1. 쇼펜하우어의 윤리적 가르침은 그의 형이상학, 특히 경험 세계는 환상에 불과하고 진정한 실재인 물자체는 보편적 의지라는 주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개체들이 무에서 생겨나 선물로 생명을 얻은 다음 죽을 때 이 선물을 놓고 다시 무로 되돌아가는 것을 본다. 그러나 생명을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모든 현상 속의 물자체인 의지는 결코 생사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2. 죽음은 개체성이 망각된 수면일 뿐이다. 하나의 개체가 또 하나의 개체와 구분되는 것은 현상에 불과하다. ‘물자체로서의 개체는 모든 것에 나타나는 의지이며, 죽음은 한 개체의 의식이 나머지 개체의 의식과 다르다는 착각을 없애 버린다. 이것이 내세 혹은 불멸이다.’

2-3. 도덕은 인격 수양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말인지는 우리가 칸트의 자유와 필연성의 조화를 받아들일 경우 쇼펜하우어에 따라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물자체인 의지는 영원토록 자유롭지만, 인간의 본성을 포함하여 자연의 모든 것은 필연성에 의해 결정된다. 물자체인 의지는 영원토록 자유롭지만, 인간의 본성을 포함하여 자연의 모든 것은 필연성에 의해 결정된다.

2-4. 우리의 모든 윤리적 행위가 인격에 의해 결정된다면,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쓸데없는 고생이므로, 행위로 나타나는 온갖 성향을 그 자체로서 만족스러운 것으로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거부하면서 인격을 여러 종류로 구별한다. 예지적 인격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근원적인 실재이고, 시간 바깥에 있으며,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상황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결정하는 것이다. 또한 경험적 인격이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경험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예지적 인격의 본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획득된 인격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인격의 본성과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이 갖게 되는 인격이다. 이런 사람들은 가장 좋은 의미의 인격을 가진 사람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있고, 그에 맞게 자신의 계획가 야망을 마름질하는 사람들이다.

2-5. 우리의 의지는 결코 변할 수 없지만, 우리의 의지를 인식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추상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충하는 동기들을 방치하지 않고 그 상충을 알아차리는데, 이것이 바로 선택을 가능하게 해 준다. ‘우리 자신의 정신과 온갖 종류의 정신 능력에 대한 인식, 그리고 변경할 수 없는 정신 능력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우리 자신에 대해 최고로 만족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2-6. 쇼펜하우어는 최상의 인간에 대해서조차도 만족스러워할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의지의 피조물이고, 그 본성을 향한 의지는 만족을 모른다. 모든 의지의 기초는 결핍과 고통인데, 우리는 결핍이 충족될 때까지 줄곧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일단 충족되어 의지가 욕구할 대상이 없어지면, 인생은 권태라는 무거운 짐이 된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진자처럼 흔들린다’.

2-7. 의지의 포학을 피하는 아주 확실한 방법은 완전한 단념에 있다. 의지는 언제나 삶을 의욕한다. 그러므로 의지와 관계를 끊으려면, 삶에 대한 의지를 끊어야만 한다.

2-8. 단념은 자기 자신을 단념하는 것이며, 도덕적 진보는 이기주의, 다시 말해서 개인이 그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서 그 자신의 삶과 행복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키려는 경향성을 감소시키는 데 있다.

2-9. 일상적인 평범한 나쁜 사람은 자신의 의지는 모든 것에 작용하는 단 하나의 삶에 대한 의지의 현상적인 겉모습일 뿐임을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후회를 할 때 고통이 나타나게 된다. 나쁜 사람의 후회는 좋은 사람의 징표인 단념의 반대 개념이다.

2-10.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 사이에 중간 인격, 즉 공정한 사람이 있다. 나쁜 사람과 달리 공정한 사람은 개체성을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는 절대적인 장벽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자신과 똑 같은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 만큼 타인의 삶에 대한 의지가 자기 자신의 의지와 동일한 수준에 있는 것으로 기꺼이 인정한다.

2-11. 정말 좋은 사람의 경우에는 개체성의 관문에 들어가기가 훨씬 더 용이하며, 개별화의 원리는 더 이상 절대적인 장벽이 아니다. 나쁜 사람은 자신과 타인이 현격하게 다르다고 보는 반면, 좋은 사람은 그 구별이 무상하고 공허한 현상에 속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2-12. 그러나 선행과 자비가 최고의 윤리적 상태는 아니므로 좋은 사람은 곧바로 그것을 뛰어넘고자 한다. “모든 존재 속에서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진실한 자아를 깨닫는 그런 사람은 또한 고통을 겪는 모든 존재의 무한한 고통을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간주하고, 온 세상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명확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좋은 사람은 덕행을 뛰어넘어 금욕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남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현상적인 삶에 나타나는 온갖 것에 혐오감을 갖게 될 것이며, 비참한 이 세계의 씨앗인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려고 할 것이다.

2-13. 쇼펜하우어는 종교적 진리를 적나라한 형태로 제시할 경우 교육받지 못한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기 어렵기 때문에 그 진리에 신화적인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 종교 체계들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는 ‘철학자가 성인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성인도 철학자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2-14. 쇼펜하우어의 산문의 효력과 은유의 매력은 그의 윤리 체계가 숭고하다는 인생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의 윤리 체계는 그릇된 형이상학에 기초해 있고, 자기 자신을 무능력하게 한다. 세계가 환상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믿거나 만족할 줄 모르는 의지가 궁극적 실재라고 인정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2-15. 쇼펜하우어는 왜 최종적으로 금욕주의 프로그램을 채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염세주의에 치우친 생각 말고는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자비로운 사람일수록 확실히 자신의 살을 타인의 살과 더 많이 동일시하려고 한다지만, 왜 자신의 삶을 기쁨과는 관련짓지 않고 고통하고만 관련짓는 것일까?

2-16.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의 완전한 단념은 용어상의 모순인 것 같다. 왜냐하면 단념이 자발적인 것이라면 그 자체가 의지의 작용이며, 단념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진정한 단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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