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의 도덕적 상승과 니체의 가치전도

Ⅰ. 키르케고르의 도덕적 상승

 

1-1. 키르케고르의 도덕 체계는 쇼펜하우어의 도덕 체계와 많이 비슷하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의 도덕적 조건에 대해 철저히 염세주의적이고, 단념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발전 과정을 나타낸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체계는 무신론적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하는 반면, 키르케고르의 체계는 개신교 신앙을 배경으로 전개되고, 그에게 도덕적 인생의 최고점인 단념은 결국 신앙으로의 도약을 위한 준비 단계일 뿐이다. 쇼펜하우어의 프로그램은 개체성(individuality)을 없애는 쪽으로 나아가는 데 입안된 반면, 키르케고르의 목적은 유일무이한 신의 피조물인 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완전히 소유하는 데에 있다.

1-2. 키르케고르의 현재 관심사는 심미적 단계와 종교적 단계 사이에 있는 도덕적 단계다. 그가 말하는 심미적인 사람은 자신의 느낌에 좌우되고 정신적 가치에 무감각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심미적인 사람을 힘 좋은 시골뜨기 혹은 성도착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사람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두 주인공 중 한 사람으로, 세련되고 법을 잘 지키고 사회에서 인기 있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 사람이 진지한 도덕적 행위자와 다른 점은, 직접 매력을 느끼는 것이면 곧바로 추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선택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관공서나 개인 사무소에서 일을 하지 않으려 하고, 깊은 우정을 맺는 것이나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한다.

1-3. 키르케고르는 사실 자유는 지극히 제한적이라서, 심미적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을 지하실과 1층 2층으로 이루어진 집으로 설명한다면, 인간의 영혼은 정신적 존재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심미적 인간은 지하실, 심미적인 것의 범주 안에 거주하길 좋아하고 자신의 지하실만 사랑한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그와 같은 인간은 절망 상태에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말하는 ‘절망’은 침울하거나 낙담한 상태가 아니다. 심미적인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다. 키르케고르의 어법에 따르면, 절망한 사람은 현재의 삶보다 더 높은 무언가를 성취할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절망하는 것은 더 높은 정신적 자아를 성취할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이러한 절망은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세상의 볼모가 된다’고 말한다.

1-4. 구원을 향한 첫 번째 단계는 세상 사람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심미적 사람의 행복 깊숙한 곳에 이미 불안한 공포가 깃들여 있고, 그 자신의 방탕으로 인해 자신이 해체된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른다. 그는 절망하는 자신을 포기할 건지, 아니면 자신을 도덕적 인생으로 넘겨 상승의 길을 갈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1-5. 도덕적 인생의 본성 그리고 도덕적 인생을 살아야 할 필요성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제 2부 가명 저자 빌헬름 판사의 편지에서 상세히 설명된다. 빌헬름 자신은 도덕적 사회의 완전히 헌신적인 구성원이다. 유감스럽게 독자가 보기에 그는 답답하고 반복하는 방식의 문체를 사용하는데, 이 문체는 이제 교화시키는 편지의 수령인이 된 『이것이냐 저것이냐』 제 1부의 심미적 저자에게 키르케고르가 부여한 익살맞은 통속 소설같은 문체와 완전히 구별된다.

1-6. 빌헬름은 심미적 인격과 도덕적 인격 사이의 큰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모든 심미적 인생관이 절망이라고 말하는데, 이 인생관이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기반으로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적 인생관은 존재에 속하는 것을 그 인생관의 본질적 속성으로 삼아 인생을 설립한다. 심미적인 것은 어떤 사람이 현상태의 바로 그 사람이도록 하고, 도덕적인 것은 어떤 사람이 앞으로 다른 어떤 사람이 되도록 한다.”

키르케고르는 자아(self) 개념을 매우 중요시 했다.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의 재능이나 덕을 갖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자아를 갖기를 결코 진지하케 원할 수 없다. 심미적 단계의 자아는 성숙하지 못했고 개별화되지 않았다. 도덕적 단계에 들어가는 진정한 자아 형성을 하는데, 여기서 ‘자아’는 자유롭게 선택도니 인격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 단계의 자아는 자신의 재능을 개발하기만 하지 않고, 자신의 소명 의식을 따른다. 도덕적 인생은 의무의 인생으로, 이때의 의무는 외부에서 가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에서 깨달은 의무이다. 개인의 진정한 발전은 보편 법칙의 내면화를 포함한다.

“개인 자신이 보편적인 것일 때야 비로소 도덕적인 것이 실현될 수 있고, 이것이 양심의 비밀이다. … 그는 자신을 보편적인 사람으로 만드는데, 자신의 구체성을 스스로 벗어 버림으로써가 아니라, 스스로 구체성의 옷을 입은 채 그것에 보편적인 것을 침투시킴으로써 보편적인 사람으로 만든다.”(E/O 547)

외국어 문법을 보면 어떤 특정한 낱말이 명사의 어형 변화와 동사의 형태 변화를 예증하는 모범 사례로 선택되는데, 그 낱말은 개개의 명사와 동사 모두에 관해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이처럼 빌헬름이 따라야 할 모범 사례는 개인적인 덕의 습득 통해서, 시민의 덕을 통해서 인도하고, 최종적으로 종교적인 덕으로 마무리한다. 키르케고르가 도덕적 사람의 모범 사례로 제일 많이 선택한 사람은 소크라테스로, 그의 삶은 도덕적 단계가 개인에게 엄격한 요구를 할 수 있고, 영웅적인 자기 희생을 요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증했다.

1-7. 빌헬름 판사는 그의 체계에서 도덕적인 것이 최고 범주가 아니기 때문에, 도덕성에 관한 키르케고르의 최종 발언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 자신이 도덕적 인생의 두 가지 특징인 직업도 갖지 않았고, 자신과 가족의 기구한 운명으로 행복한 결혼의 필수 요소를 실행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이 도덕적 인생의 요구 사항들에 직면할 때 인간의 나약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고, 강인한 의지로 나약함을 극복하려 하지만 역부족임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덕 법칙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이것을 그는 죄책감과 죄의식으로 끌고 간다. 이 상태를 벗어나고 싶다면, 도덕적 영역으로부터 ‘신앙의 영역’인 종교적 영역으로 도약, 상승해야만 한다.

 

 

Ⅱ. 니체와 가치 전도

2-1. 니체는 기독교적인 삶을 살도록 요구하는 것이 근거에 입각해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라는 키르케고르의 견해에 동의했으나, 그는 ‘단순한 근거라도 그만큼 더 나쁘다’고 한 반면 니체는 ‘기독교 신앙을 요구하면 그만큼 더 나쁘다’고 단언했다. 니체는 기독교 신앙이 인간을 비겁하게 만들고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것이 주된 불만이었다. 『도덕의 계보』와 같은 저작들에서 그는 기독교 도덕의 주장들에 관한 논박이 아닌 비천한 혈통을 추적한다.

2-2. 니체는 역사에 두 가지 종류의 도덕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고대의 강력한 특권 귀족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계급에 속한다고 느끼고, 자시의 자질들을 ‘좋은 것’으로 묘사했고, 평민의 특성을 ‘나쁜 것’으로 간주했는데, 이것이 바로 주인도덕(master morality)이다. 귀족들의 능력과 재산을 불쾌히 여기고 가난하고 약한 자는 이 체제를 완전히 뒤엎어서, 하층민을 위한 대조적인 가치 체계를 세웠다. 그들은 귀족형의 사람을 나쁜 사람 그리고 흉악무도한 사람으로 보았다. 니체는 이 새로운 체제의 설립을 ‘가치 전도’라고 불렀고, 이를 유대인 탓으로 돌렸다.

“귀족의 등식을 뒤바꿔 정반대 등식을 놀라울 만큼 일관된 논리로 과감하게 제시하고 뿌리 깊은 증오의 힘으로 그 등식을 끝끝내 고수한 것은 유대인들이었다.”(GM 19)

유대인에 의해 시작된 노예의 반란은 기독교의 상승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귀족적 덕의 고국이었던 로마에서도 네 명의 유대인 예수, 마리아, 베드로, 바울에게 머리 숙여 경배한다.

2-3. 기독교 자체가 사랑의 종교를 표방하지만, 니체에 따르면 사실 나약함과 공포와 악의의 종교다. 기독교의 주된 동기는 원한, 즉 약자가 강자에게 복수하려는 욕구로, 이 욕구는 죄인을 벌하려는 욕구로 가장되어 있다고 니체는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신 명령의 집행자인 양 행세하지만, 사실 그들의 떳떳하지 못한 마음을 숨기는 것일 뿐이다. 기독교인들은 동정심을 덕으로 떠받들지만, 그들이 고통 받는 자를 돕는 것은 그들을 대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연민은 온정적인 사람에게 타인의 고통을 감염시키는 독약이다.

2-4. 기독교의 성공은 인류의 퇴보를 가져왔다. 나약한 자에 대한 제도적인 배려는 인류의 건강과 강인함을 해치게 되었고, 현대인은 진정한 인간이 되려는 의지를 상실한 난쟁이에 불과했다. 인류가 타락에서 구원받으려면, 첫 번째 단계는 제 2의 가치 전도를 단행하여 기독교의 가치를 뒤엎는 것이어야 한다. 니체는 『반기독교』에서 ‘나약한 자와 실패한 자는 멸망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인류를 사랑하는 첫 번째 원칙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인간 진화의 상향선을 그리는 ‘상승하는’ 사람들과 하향선을 그리는 ‘하강하는’ 사람들, 두 유형으로 나뉜다.

2-5. 그러나 우리가 뒤엎어야 할 것이 기독교 도덕만이 아니라, 노예 도덕의 특징인 선과 악의 대립도 넘어서야 한다. 진리를 근본적인 가치로 간주하는 것은 기독교인만이 아니다. 하지만 니체는 판단이 잘못이라는 이유만으로 판단에 반대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문제는 판단이 어느 정도까지 생명을 활성화하고 생명을 보존하며, 어느 정도까지 종을 보존하고 경우에 따라 종을 향상시키기도 하느냐는 것이다. … 허위를 삶의 조건으로 인정하고 전통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이런 일을 감행하는 철학은 이미 그 자체가 선과 악을 넘어 저편에 있다.”(BGE 7)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없이는 특정한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과오다. 생명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고의 가치다. 인간의 생명은 지금까지 발생한 최고 형태의 생명이지만, 현대 세계에서 인간의 생명은 그에 앞서 발생한 일부 형태의 생명 수준으로 퇴보했다. 우리는 생명을 확인해 그것을 새로운 수준, 즉 주인과 노예에 대한 정립과 반정립을 초월하는 종합의 상태인 초인(超人, Ubermensch)의 수준으로 이끌어야 한다.

2-6. 초인의 선은 니체의 신탁과 같은 대변인 차라투스트라의 예언적 메시지다. 초인은 삶의 최고 형태, 삶에 대한 의지에 대한 최종 확인이다. 우리의 삶에 대한 의지는 모든 생명의 비밀인 힘에 대한 의지(will to power)여야만 한다. 쾌라은 힘의 발휘에 대한 자각에 불과하고 지식은 힘의 도구에 불과하다. 인간 능력의 최고의 실현은 초인의 창조일 것이다.

2-7. 인간성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초인에 이르는 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다. 즉 인간은 건너야 할 다리지 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초인은 진화의 힘이 아니라 오로지 의지를 발휘함으로써 나타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의지로 하여금 “초인이 세상을 의미있게한다”라고 말하게 하자.’

2-8.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그대들은 반드시 초인을 창조할 수 있다. 그대들 자신은 혹시 초인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대들은 자신을 초인의 조상이자 선구자로 변형시킬 수 있다.’ 초인이 등장함으로써 세상이 완벽해지고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역사는 영구히 순환하기 때문에 초인의 등장은 역사의 종말이 아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초인과 같이 무수한 초인이 등장할 것이다.

2-9. 초인은 어떤 존재인가? 만약 초인의 특성이 인간의 선과 악을 판단하는 어떤 기준이 된다면 우리는 초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 필요가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도, 후기의 니체도 더 이상 초인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더 높은 수준의 인간’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는데, 우리는 저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다양한 재능을 최대한 개발한 괴테와 나폴레옹의 조합이 니체의 이상인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이 조합은 ‘그리스도의 영혼과 카이사르’의 조합보다 더 그럴 듯하다.

2-10. 니체의 저작은 대개 종잡을 수 없고, 학자들마다 해석과 평가가 천차만별이라 니체의 윤리학을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니체가 잔임함의 도덕성과 같은 그런 문제에 어떤 입장인지 알기 쉽지 않다. 그는 노예 도덕에서 죄책감이 하는 역할을 집요한 광신자가 가하는 고문을 격렬하게 묘사하는 반면, 귀족적인 ‘금발의 야수’의 난폭함에 대해서는 온정적인 묘사를 한다.

2-11. 확실히 니체는 전쟁에 관한 열렬한 지지자로, ‘전쟁을 단념하는 것은 위대한 삶을 단념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전쟁은 자유를 교육시키고 자유는 승리를 즐기는 남성적 본능이 행복에 대한 욕구를 비롯해 다른 본능들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2-12. 자살 역시 어떤 상황에서는 니체의 칭찬 대상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자랑스럽게 살 수 없다면 자랑스럽게 죽어야 한다. 자유롭게 선택된 죽음, 아이들과 입회인들에 둘러싸여 기꺼이 즐겁게 맞이한 적절한 시기의 죽음 – 작별을 고하는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 진정한 작별이 여전히 가능하도록 하는 죽음 – 이 모든 것은 기독교가 죽음을 맞이하여 행하는 섬뜩하고 가련한 희극과 대조를 이룬다.”(TI 61)

당신이 자살을 한다면, 매우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생존권은 대부분 당신에게 달려 있다.

2-13. 그래도 어쨌든 니체는 윤리학자인가? 그는 선과 악에 대해 좀처럼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진정한 도덕가인가, 아니면 옳고 그름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철저한 무도덕한(amoral) 사람인가? 니체는 과거의 몇몇 훌륭한 도덕가들과 동일한 분야에 속해 있다. 반면 니체 자신은 선과 악은 기발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과 악의 범주를 완전히 초월해 있다고 공언한다. 그는 대부분의 도덕 체계에 포함되어 있는 정의와 죄책감 이 핵심 개념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2-14. 내가 생각하기에 해결책은 니체가 인간의 번영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전통 도덕과 나누어 갖는 것이다. 그가 여러 관습적 덕을 비난하는 이유는 관습적 덕이 가치있는 삶을 성취하도록 돕지 않고 훼방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선함보다 위대함을, 신사보다 귀족을 선호하며, 근본적으로 자신은 좋은 삶의 도덕적 기준보다 미적 기준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상적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뿐더러 아예 이웃을 갖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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