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1.1대부분의 도덕 체계에서 행복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도덕철학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오랜 세월동안 행복을 최고선으로 간주했으며 심지어 인간이 모든 선택 상황에서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벤담이 모든 행위가 행복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향성에 따라 평가되어야한다고 했을 때 그 의견은 오랜시간동안 지속된 대다수의 의견을 재천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벤담의 최대 행복의 원리는 전통적인 행복주의(eudaimonism)와는 매우 다르다.

우선, 벤담은 행복과 쾌락을 동일시했다. 행위의 최고 원동력은 쾌락으로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pain)과 쾌락(pleasure)이라는 두 군주의 지배를 받게 했다. 고통과 쾌락만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도록 하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알려 준다. 두 군주는 한 손에는 옳고 그름의 깃발을, 다른 손에는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붙잡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가 복종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일수록 그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될 따름이다.

따라서 벤담의 경우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은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플라톤이 덕을 쾌락과 고통의 올바른 선택이라고 보기 때문에 공리주의자들은 플라톤을 선조로 삼기도 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과 쾌락을 구별하고 특히 행복을 감각적 쾌락과 동일시했다. 하지만 벤담은 행복을 쾌락과 동등한 것으로 보고 쾌락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감각으로 간주했다.

1.2벤담은 괘락이 먹고 마시고 성행위를 함으로써 일으켜질 수 있는 감각일 뿐만 아니라, 부를 얻는 것, 동물을 돌보는 것, 신이 좋아서 믿는 것처럼 다양한 수많은 다른 것들에 의해서도 일으켜질 수 있는 감각이라는 점을 주의 깊게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벤담의 쾌락주의(hedonism)는 관능적 충동과 다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쾌락은 즐거운 활동인 반면 벤담의 경우 즐거운 활동과 그에 따른 쾌락은 인과관계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쾌락의 가치는 즐기는 활동의 가치와 동일한 반면 벤담에게 개개인의 모든 쾌락의 가치는 그것이 어떻게 일으켜지든 간에 동일한 것이다. 벤담은 ‘쾌락의 양이 같다면, 압정놀이나 시나 매한가지다.’라고 했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고통의 양은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고통의 부정적 가치를 측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리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쾌락과 고통의 정량화이다. 벤담은 이 일이 결코 사소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쾌락과 고통의 측정법을 내놓았다. 만일 쾌락 A가 더 강하고, 더 오래 지속되고, 더 확실하고, 더 가까이 있다면 쾌락 B보다 양이 더 많은 것으로 계산된다. 이 같은 요인들은 ‘행복계산법(felicific calculus)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하고 서로 비교 검토되어야한다. 우리는 여기서 생산성과 순수성도 고려해야하는데, 생산성은 유쾌한 행위가 계속 연달아 쾌락을 산출하는 것을 말하고 순수성은 그렇게 계속 지속하지 않을 경우를 말한다. 또 만일 공공정책을 고려중이라면 우리는 더 나아가 고통과 쾌락이 그 집단을 가로질러 얼마나 널리 퍼져 나가는 지에 대한 확장성을 고려해야한다.

2.1.그러나 이러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인상적인 슬로건을 면밀히 조사한다면 애매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첫 번째 제기되는 의문은 ‘무엇이 최대 다수인가?’이다. ‘유권자’, ‘시민’, ‘남성’, ‘인간’, ‘의식 있는 존재’ 등 무엇이 최대 다수에 해당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공리주의에 열성적인 추종자들은 대부분 ‘인간’이라고 답했을 것 가고 이것이 벤담이 제시했을 법한 대답으로 여겨진다.

최근에 많은 공리주의자들은 동물들도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면서 행복 원리를 인류를 넘어 그 밖의 의식 있는 존재들에까지 확장하였다. 벤담이 고양이 애호가였다해도 그는 자연법 권리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까지 동물들에게 권리를 확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감각의 문제를 최고의 도덕적 기준으로 설정함으로써, 동물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동물들을 우리 자신과 동일한 도덕 공동체로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벤담이 고전적이고 기독교적인 도덕전통을 깨뜨린 것으로 가장 의미심장한 귀결들 중 하나가 되었다.

2.2공리성 원리에 관한 두 번째 의문은 이렇다. 개인이나 정치가는 최대 행복의 원리를 따를 때 행복의 대상자 수를 통제하려고 해야만 하는가? 행복을 더 많은 수의 행복으로 확장한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또는 동물들)이 생겨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더 까다로운 의문, 어떤 집단의 행복을 측정할 때 오로지 전체의 행복만 고려하는가, 아니면 평균적인 행복도 고려해야하는가? 행복의 양뿐만 아니라 행복의 분배도 고려 대상으로 삼아야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의 양과 사람 수 간의 조화 문제에 직면한다.

이 쟁점은 도덕철학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철학의 문제다. 그러나 우리의 고려 대상을 개인적인 도덕의 문제로 제한한다고 할지라도, 심리적 쾌락주의(쾌락이 우리 모든 행위를 결정한다)와 윤리적 쾌락주의(쾌락은 옳고 그름의 표준이다) 간의 이중적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그러나 심리적 쾌락주의에서 언급된 쾌락은 개인의 쾌락이고 윤리적 쾌락주의에서의 쾌락은 도덕 공동체 전체의 쾌락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내가 모든 행동에서 자신의 쾌락을 극대화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내가 공익을 극대화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벤담은 공리주의를 다른 윤리 체계와 대조함으로써 공리주의의 장점을 내세웠다.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두 번째 장의 제목이 ‘공리성의 원리에 반대되는 원리들에 대하여’이다. 이 원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금욕주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공감과 반감의 원리이다. 금욕주의 원리는 행복의 양을 감소시키는 정도에 따라 행위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공리성 원리의 반대원리이다. 반면 공감과 반감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행위를 좋거나 나쁜 것으로 판단한다.

벤담은 금욕주의 원리를 하나의 허수아비로 여긴다. 종교적 전통은 실제로 극기와 육체의 금욕을 높이 평가했으나, 정작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자기 자신을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것을 모든 행위의 지밸 원리로 삼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종교적인 사람이건 세속적인 사람이건 최대 다시의 최대 불행을 추구하는 정책을 제안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벤담 자신은 ‘어떤 생물체도 금욕주의 원리를 일관성 있게 추구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공감과 반감의 원리는 매우 다른 종류의 도덕체계들이 들어있는 잡동사니 보관함이다. 벤담은 공감과 반감에 대해 도덕감, 상식, 이해력, 자연법, 올바른 이성 등 그럴듯한 명칭들을 가지고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철저히 옹호하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도덕 체계들은 모두 어떤 외적 표준에 호소하는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갖가지 계략들, 그리고 저자의 정서나 의견을 도덕 체계 자체에 대한 근거로 받아들이도록 독자를 설득하기 위한 갖가지 계략들로 이루어져있다.’ 또 ‘신의 기쁨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어떤 것을 신의 기쁨이라고 믿는다거나 신의 기쁨으로 여긴다고 공표하는 사람이 누구이건 간에 그 사람의 선량한 기쁨과 똑같고, (계시를 제외하면) 반드시 똑같을 수밖에 없다.’

2.3벤담은 공리주의와 그 밖의 도덕 체계 사이의 진짜 중요한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도덕철학자들을 절대주의자와 결과주의자로 나눌 수 있다. 절대주의자는 본래 그 자체가 그르고, 결코 행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행위가 있는 다고 믿는 반면 결과주의자는 행위의 도덕성이 행위 결과에 의해 판단되어야한다고 믿는다. 결과주의자들은 특수 상황에 이르면 행위 결과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부류의 행위는 없다고 믿는다. 벤담 이전 철학자들은 대부분 자연법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절대주의자였다. 만일 자연권과 자연법이 있다면 자연권을 침해하거나 자연법과 상충되는 그런 종류의 행위는 행위 결과와 관계없이 잘못으로 판명된다.

벤담은 그 어떤 두 사람도 자연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법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권리가 실정법에 의해서만 부여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연권이 무시될 수 없다는 생각을 엄청난 조롱거리로 삼았다. ‘자연권은 전혀 말도 안 되는 허튼소리이고, 자연적인 불가침의 권리는 수사적으로 과장된-죽마(竹馬) 타고 호언장담하는-허튼소리이다’

벤담과 이전 윤리학자들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은 대단히 중요한데, 그것은 아주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그리고 거의 모든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간통이 언제나 잘못이라고 믿었지만 벤담의 경우 그렇지 않다. 도덕 판단을 내리기 전에 간통을 범한 특정인이 예견한 결과들을 고려해야한다는 것이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