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의 현상학

1.후설의 현상학

1.1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인생은 결정적인 대목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닮았다. 후설은 프로이트보다 세 살 아래였는데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모라비아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비엔나 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두 사람은 최초로 인간의 정신에 관한 진정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려는 개인적인 프로젝트에 대부분의 인생을 바쳤다. 그들은 인생 말년에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걸려들었고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에서 쫓겨나 망명 생활을 하다 죽고 후설의 책들은 1939년 프라하에 진군한 독일 군대에 의해 불탔다,

그러나 전문가로서의 후설의 인생은 프로이트와 매우 달랐다. 그는 철학으로 정통 학문 경력을 쌓아 대학에서 연달아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는 비엔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는 했지만 교수 자격 청구 논문을 위해 할레 대학으로가 오스트리아가 아닌 독일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후설은 1884년에서 1886년 사이 비엔나 대학에서 브렌타노(Franz Brentano,1838-1917)의 강의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브렌타노는 전직사제로서 영향력이 널리 입증된 《경험적 관점의 심리학》이라는 저작의 현대적인 실험적 탐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철학을 연결하려고 했던 박식한 학자였다. 그 책은 의식의 자료가 두 종류, 즉 물리 현상과 정신 현상으로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물리 현상은 색깔이나 냄새와 같은 것이고 생각과 같은 정신 현상은 어떤 내용을 가짐으로써 혹은 내재적 대상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 특징은 정신적인 행위와 정신적인 삶을 이해하는 실마리인데 브렌타노는 이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는 스콜라 철학의 용어를 재도입했다.

후설은 심리학에 대한 브렌타노의 연구 방법에 영향을 받으면서 초기에는 줄곧 수학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할레 대학에 제출한 교수 자격 청구 논문 주제는 수 개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수 개념의 심리적 기원인 활동을 확인함으로써 수 개념을 설명하려고 했다. 수학의 기초를 경험적 심리학에서 찾으려는 욕구 때문에 후설은 다소 따분한 결론을 낳기도 했다. 예컨대 영과 하나가 수라는 것을 부정했고, 소수의 산술학과 다수의 산술학을 명확하게 구분해야한다. 우리 마음의 눈으로는 오직 작은 집단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산술학의 소수 부분만 직관적 기초에 의존할 수 있다. 일단 다수를 다루게 되면 우리는 직관을 벗어나 순전히 기호들만 있는 영역으로 들어간다.

1-2.후설의 저서에 대한 논평자들, 특히 프레게는 그것이 상상과 사고를 혼동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심라학의 소재인 정신적 사건은 개인에게 사적이기 때문에 산술학과 같은 공적 학문의 기초가 될 수 없다. 후설은 그 논평을 받아들여 자신의 초기 심리주의를 단념했다. 그 후 후설은 프레게처럼 논리학과 심리학 사이의 명확한 구별을 유지했다. 그러나 분석적 전통을 이은 프레게는 논리학에 더 초점을 맞춘 반면 대륙적 전통을 이은 후설은 심리학적 측면에 더 초점을 맞추어 철학의 정통 본거지로 보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프레게와 후설은 플라톤의 소박한 실재론을 철학의 토대로 인정하는 점에서 하나가 되었다.

후설이 브렌타노한테서 넘겨받은 것은 지향성 개념, 즉 물리 현상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정신 현상의 특징은 그것이 대상을 향해 주의를 돌린다는 관념이었다. “나는 경우에 따라 트로이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고 나의 투자에 관해 걱정하기도 한다.”라는 문장에서 ‘대해(of)’와 ‘관해(about)’가 지향성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가리킨다.

생각의 본질은 두 가지이다. 생각의 ‘내용(content)’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생각의 ‘소유자(possessor)’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용을 생각한다고 해볼 때 이것을 생각이게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내가 독수리나 말에 대한 생각이 아닌 용에 대한 생각을 한다는 것고 다른 하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후설은 생각이란 특정한 물질(생각이 지향하는 대상)에 대한 나의 행위(act)라고 말함으로써 생각의 특징들을 명시하고자 했다. 다른 사람들도 용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후설에 의하면 바로 그때 우리는 동일한 종(species)에 속하는 여러 가지 개인적인 행위를 한다. 용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그와 같은 모든 행위가 속하는 종에 지나지 않는다.

개념(concept)은 《논리 연구》에서 이와 같이 심리학적 요소를 기반으로 정의되었다. 그렇다면 논리학과 개념의 관계는 어떤가? 후설은 이제 기하학의 정리들이 경험적인 삼차원의 물체와 관계를 맺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논리학이 개념과 관계를 맺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초기 심리주의를 단념할 수 있었고 심리학과 논리학을 선명하게 구분했다. 더 나아가 그는 심리학을 ‘현상학(phenomen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다시 고안해냄으로써 심리학과 인식론을 구별하였다.

1-3.현상학은 20세기 초 10년 사이에 개발되었다. 뮌헨의 철학자 집단에서 열성적인 ‘현상학’ 운동이 일어났는데 1913년 현상학적 연구 연보를 출간하고 이 연보의 창간호에는 단행본 분량의 후설의 글이 실렸다.

현상학의 목적은 의식이 우리에게 말하거나 말하려고 하는 어느 것도 언급함이 없이, 심리=외적(extra-mental) 세계에 관한 의식의 직접적 자료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내가 불사조를 생각할 때 내 생각의 지향성은 불사조가 실제로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정확히 동일하다. 후설은 이미 1901년 이렇게 썼다. “어떤 대상이 실존하는가. 허구하는가, 아니면 완전히 부조리한가의 문제는 대상이 의식에 나타나고 주어지는 일에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를 가져오지 못한다. 나는 쾰른 대성당을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벨탑을 생각한다. 나는 정천면체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천각형을 생각한다. 즉 내 경험의 지향성은 진짜 탁자가 그것에 있건 내가 환각 상태에 있건 정확히 동일하다. 현상학자는 심리 현상을 면밀히 연구해야 하며, 심리-외적 대상들의 세계를 괄호 안에 넣어야한다.; 현상학자는 심리- 외적 세계의 실존에 대하여 후설이 그리스 어로 에포케(epoche)라고 했던 판단 중지의 태도를 가져야한다. 이것을 일컫어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매우 신중한 소극적인 철학(philosophy drawing in its horns)이었다.

현상학은 현상주의(phenomenalism)와 같지 않다. 현상주의자는 현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으며, 물질적 대상과 같은 것들에 관한 진술은 현상에 관한 진술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버클리와 밀은 현상주의 견해를 유지했다. 반면에, 후설은 《이념들》에서 현상들 이외에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비현상적 대상들의 세계가 존재할 가능성을 신중하게 열어두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대상들은 후설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거나 적어도 본래의 관심사가 아니다.

후설에 따르면, 우리는 외부 세계에 관해서는 오로지 추리나 추정에 의한 정보만을 갖는 반면, 우리 자신의 의식 대상에 대해서는 오류 불가능한 직접지를 갖기 때문이다. 후설은 자명한 내재적(immanent)지각과 오류 가능한 초월적(transcendent)지각을 구별했다. 내재적 지각은 나 자신의 현재의 정신 활동이나 상태에 대한 나의 직접적인 익숙지이다. 초월적 지각은 물리적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나 자신의 과거활동이나 상태에 대한 나의 지각이며, 다른 사람들의 정신 내용에 대한 나의 지각이다.

내재적 지각은 현상학의 소재를 제공한다. 내재적 지각은 초월적 지각보다 더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초월적 지각이 오류 가능한 반면 내재적 지각은 자명하기 때문뿐만 아니라 초월적 지각을 성립시키는 추리와 추정이 내재적 지각의 평결에 근거하고, 또한 근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의식만이 ‘절대적 존재’다. 이를테면 다른 모든 형태의 존재는 그 실존 여부가 의식에 달려있다. 따라서 현상학은 모든 학문들 가운데 가장 기초적이다. 현상학의 소재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다른 모든 분야의 철학과 과학에 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1-4.후설은 《이념들》을 세 권의 책으로 계획했으나 마지막 두 권은 사후에야 출판되었다. 그는 1916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고 1923년 베를린 대학의 초빙을 거절하고 1928년에 퇴직할 때까지 그 대학의 정교수로 남았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는 하이데거나 스타인처럼 대단히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된 사람들도 있다. 몇 년 동안 후설은 책에 제시된 체계를 여러 방면으로 발전시켰다. 한 편으로는 데카르트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남겨 놓은 몇몇 가정들을 약화시킴으로써 자신의 판단 중지가 데카르트의 의심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되도록 현상학적 방법을 확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의 정신의 실존을 입증할 수 있는 상호 주관성(intersubjective) 문제의 해결책과 자신의 방법론적 유아주의를 결합하려고 애썼다. 그의 최종적인 입장은 그가 현상학의 불가피한 결론이라고 주장했던 선험적 관념주의(transcendental idealism)였다. 그의 후기 사상의 일부 결과물들은 퇴직한 그 다음 해에 발표되었으며 《데카르트의 성찰》과 《형식 논리와 선험논리》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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