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와 실용주의부터 프레게의 논리주의까지

1. 퍼스와 실용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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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아메리카 대륙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다수 철학자들의 본고장이 되었지만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철학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불모지에서 찰스 샌더스 퍼스의 저작은 진정한 미국철학의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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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는 하버드의 뛰어난 수학교수의 아들로 1863면 하버드에서 최우등으로 화학학위를 받았다. 그 후 30년간 미국해안측량작업, 하버드 천문대에서의 연구를 진행하며 천문학책을 저술하고 <형이상학클럽> 이라는 토론모임에 참여했다. 그는 하버드에서 역사와 과학의 논리를,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논리학강의를 열었고 까다로운 동료로 대학의 관습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종신교수직에 임명되지 못했고 다시는 정규직업을 갖지 못했다. 퍼스의 첫 번 째 아내는 남녀평등주의자인 페이였고 1883년에 헤어졌고 생에 후반부를 헌신적인 두 번 째 아내 줄리엣과 가난하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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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는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19세기의 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또한 칸트철학을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형식논리학에 대한 칸트의 이해가 아마추어같다고 여겨 그의 부족한부분을 보충하기위해 범주이론을 재편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동료들 가운데 스콜라철학자들이 자만심이 없다고 칭찬했고, 논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라이프니츠를 최고의 동료로 여기며 스스로의 업적 또한 높이 평가했다. 그의 연구는 논리학, 언어이론, 인식론, 심리철학 등 폭넓게 이루어졌으며 실용주의(pragmatism)의 창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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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의 철학은 학회지논문으로만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1868년 그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어떤 능력에 관한 물음들’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에서 우리는 내적 관찰능력을 가질 수 없고 기호(sign)를 벗어나선 사고할 수 없으며 직관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부정적 결론의 초기인식론에 대해 얘기했다. 결론은 모든 인지는 선행하는 인지에 의해 논리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더 유력한 논문으로 1877년 ‘과학의 논리의 실례들’ 에서 인간의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는 오류가능주의의 원리를 발표했다. 절대적 진리는 과학적 탐구의 목표이지만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최선은 끊임없이 개선함으로써 절대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다. 1878년의 한 논문은 대상에 대해 명료하게 생각하기 위해선 그 대상이 인지할 수 있는 실제적 유형의 효과를 가져 오는지 고려해 보면 된다는 실용주의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

퍼스는 1884년 논문집 《존스 홉킨스의 논리학연구》를 편집하고 관계논리학에 관한 논문을 썼다. 또 그의 학생이 발표한 그의 양화논리학 체계에서 문장의 구조를 표현하기 위한 독창적인 기호법으로 합성기호를 사용했는데, 예를 들어 Lij는 isaac이 jessica를 Love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퍼스가 이름붙인 ‘일반대수논리’의 구문론은 퍼스가 알지 못했던 프레게에 의해 이미 개발된 논리체계의 구문론과 대등한 것이었다. 1891년 《일원론자》에 실린 ‘수수께끼 추측’에서 진화론적 우주론 전반의 배경에 반대하는 형이상학과 심리철학을 소개했고 1905년 《일원론자》에 실린 논문에서는 자신의 실용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진술을 담았다.

퍼스는 생애의 마지막 해에 기호에 대한 일반 이론을 사고와 언어에 관한 철학을 위한 기본 틀로 발전시키려고 분투했다. 이 아이디어는 철학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대부분은 1903년에서 1912년 사이 영국여성 웰비와 교신하며 생각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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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의 철학은 완전한 철학을 완성하지는 못했으며 그가 남긴 원고는 20세기에 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다른 철학자들에 대한 영향력은 그의 천재성에 비하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퍼스의 논리학 연구는 엄밀하게 형식을 갖추어 발표된적이 없었으며 퍼스와 프레게 두 사람이 독자적으로 생각해 낸 논리 체계가 러셀을 거쳐 세상에 알려지게 한 사람은 프레게였다.

2.프레게의 논리주의

2-1.

고틀로프 프레게는 생후에 철학의 역사 속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탁월한 수학자로 현대의 수학적 논리학을 만들었고, 영어권 대학들 내에서 유력한 지위를 차지했던 분석철학의 창시자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의 영향으로 철학에서 20세기를 특징짓는 언어적 전회가 이루어졌다.

프레게는 독일 발트연안의 비스마르에서 루터교회에 다니는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으며 1869년 예나대학에 입학해 네 학기를 마친 후 괴팅겐 대학으로 옮겨 1873년에 기하학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74년 객원강사로 예나대학에 돌아왔고 1879년에 교수가 되어 44년간 수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평범하게 조용히 살았고 그의 중요한 저작은 대부분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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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게의 풍요로운 저작경력은 1879년 《개념표기법》이라는 소책자를 출판하며 시작되었다. 개념표기법은 일상 언어의 불명료한 논리적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기호 체계로 프레게는 명제 계산 체계(propositional calculus)를 개발하기 위해 이 표기법을 사용했다. 이는 문장 전체가 부정, 연언, 선언의 의미에 의존하는 추리들을 다루는 논리학 분야로서, 기본원리는 ‘그리고’, ‘만일’, ‘또는’과 같은 연결어를 포함하는 문장의 진리치가 오로지 그 연결어로 이어진 요소문장들의 진리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눈은 희고, 잔디는 푸르다’와 같은 중문은 그 문장의 요소인 ‘눈은 희다’와 ‘잔디는 푸르다’와 같은 단순명제들의 진리함수(truth-functions)로 간주된다.

명제논리학은 이전에도 연구되어져 왔지만 제일처음으로 체계화 한 것은 프레게였다. 앞에서 말한 《개념표기법》은 공리적인 방식으로 명제계산체계를 제시하는데, 이를 위해 그가 고안했던 기호체계는 인쇄가 어렵고 명제계산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그 체계의 표현방법은 여전히 수학적 논리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레게가 논리학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술어계산(predicate calculus)이었다. 이것은 명제의 내적구조를 다루는 논리학의 분야이다. 그는 추리의 타당성이 ‘all’이나 ’some’, ‘no’나 ‘none’과 같은 표현에 의존하는 양화표기법을 사용해 지금까지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언논리를 대폭 개선한 술어 계산 체계를 제시했다. 이는 복합 양화사를 포함하는 문장(’모든 소년이 어떤 소녀를 사랑한다‘)에 대처할 수 있게 해주었다.

2-3.

《개념표기법》이 논리학사에서 전형적인 교과서가 되었으나 그 책을 쓸 때 그의 목적은 수학과 더 큰 관련이 있었다. 그는 논리학과 산술학의 형식체계를 제시함과 동시에 두 체계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산술학의 모든 진리가 어떤 보조수단도 필요 없이 논리학의 진리들로부터 도출됨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논리주의’로 알려지게 된다.

프레게의 논리주의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수(number)와 같은 산술학의 개념을 집합(class)과 같은 논리적인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의를 위해 그는 기수를 원소의 수가 동일한 집합(동등집합)으로 간주했다. 예를 들어 수 둘은 쌍으로 이루어진 것들의 집합이고, 수 셋은 삼인조로 이루어진 것들의 집합이다. 이는 순환적인 정의인 것 같지만 사실 집합들 사이의 동등 개념이 수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정의될 수 있기 때문에 순환적이지 않고 두 집합은 원소들 사이에 나머지 없이 1:1 대응 할 수 있을 때 서로 동등하다. 웨이터는 접시와 칼의 개수를 알지 못해도 탁자위에 접시가 있는 만큼 칼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웨이터에게 필요한 것은 접시의 오른쪽에는 칼이, 칼의 왼쪽에는 접시가 있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넷은 복음서 저자들의 집합과 동등한 모든 집합들의 집합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논리학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논리주의자의 목적을 고려했을 때 쓸모없는 것일 수도 있다. 프레게는 개개의 수에 대해 정확한 크기의 집합뿐만 아니라, 그 크기가 논리학에 의해 보증되는 집합을 찾아야 했기에 이를 위해 수 계열의 맨 처음을 영(zero)으로 시작한다. 영은 분명히 어떤 원소도 갖지 않은 집합이라고 논리적인 용어로 정의될 수 있다. 그 다음 수 하나는 그 유일한 원소가 영인 집합과 동등한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이 정의들로부터 나머지 자연수에 대한 정의들로 넘어가기 위해 그는 수 계열에서 ‘n은 m바로 다음에 온다’를 ‘F에 속하는 원소의 수가 n이고 F에 속하는 원소이기는 하나 x와 동일하지 않은 수가 m인, 그런 어떤 개년 F가 있고 F에 속하는 대상 x가 있다’ 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의 도움으로 나머지 수들도 동일성, 집합, 동등 집합과 같은 논리적 개념 이외의 다른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정의될 수 있다.

2-4.

《개념표기법》은 매우 엄격하고 형식적이지만 《산술학의 기초》는 논리주의 프로그램을 더 자세히 제시할 뿐만 아니라 더 비형식적으로 설명한다. 기호들이 드물게 나오고 자신의 책을 다른 철학자들 것과 관련짓느라 노심초사한다. 칸트는 산술학적 지식과 기하학적 지식은 둘다 직관에 의존한다고 주장하고《순수이성비판》에서 수학적 진리가 종합적이면서 선천적인 것이라 정의했으며 존 스튜어트 밀은 수학적 명제가 폭넓게 적용될 수 있고 폭넓게 확증될 수 있는데도 후천적인 명제라고 주장했다.

프레게는 수학이 선천적으로 알려진다는 점에서 밀에 반대하고, 기하학이 직관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칸트에게 찬성했다. 그러나 산술학이 분석적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종합적이라고 생각한 칸트와 차이가 있다. 만일 프레게가 옳다면, 산술학은 모든 지식영역에서 유효하고 경험적 사실들에 의해 입증될 필요가 없는 일반 법칙들만을 기반으로 한다.

2-5.

《산술학의 기초》에서 프레게가 중요하게 여긴 두 주장은 각각의 수는 독립적인 대상이라는 것과 수를 지정하는 진술의 내용은 개념에 관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한 ‘개념’과 ‘대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두 명제는 상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가 대상이라고 말할 때 그는 만져서 알 수 있는 것임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두가지를 부인하는데, 수가 어떤 것의 속성이라는 것과 수가 주관적인 것, 즉 어떤 심적 상태의 심상이거나 관념이거나 속성이라는 것이다.

프레게가 말하는 개념은 정신과 무관하기에 위에서 언급한 두 주장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없다. 그는 이 두 번째 주장은 ‘지구에 하나의 달이 있다’와 같은 진술은 지구의 달이라는 개념에 수 하나를 지정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금성에는 달이 없다’는 금성의 달이라는 개념에 수 영을 지정한다. 후자의 경우, 어떤 수를 속성으로 갖는 달이 없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수는 개념의 외연이라고 프레게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개념 F에 속하는 수는 ‘개념 F에 지정한 수와 동일한 수’라는 개념의 외연이다. 이는 F에 속하는 원소의 집합과 동일한 수의 원소를 갖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수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수가 대상이라는 그의 이론은 집합을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2-6.

1844년에서 1893년 사이에 프레게는 논리학에 근거하여 산술학을 구성하려는 논리주의를 완전하고 형식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산술학의 기본법칙》을 완성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과제는 자명한 논리학의 진리일 수 있는 일련의 공리들을 명확하게 진술하는 것이었고,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일련의 추리 규칙들을 제시하는 것 이었으며 산술학의 표준적 진리들을 그와 같은 공리들로부터 그와 같은 추리 규칙들에 의해 차례로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세권에 달하는 것이었지만 두 번째 권 까지만 완성되고 중단되었다. 1893년 그는 두 번째 권을 출판하는 사이에 영국철학자 러셀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최초의 공리들 가운데 다섯 번째 것이 체계 전체를 부정합하게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이 공리는 개개의 모든 F가 G이고, 개개의 모든 G가 F라면, F에 속하는 원소들의 집합은 G에 속하는 원소들의 집합과 같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 즉 개념으로부터 집합으로 이행하는 것을 인정하는 공리이고 수가 논리적 대상임을 입증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러셀이 지적한 문제는 이 공리를 포함하는 체계가 제한 없는 집합형성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집합은 그 자체로서 별개로 분류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제 자신의 원소인 집합과 제 자신의 원소가 아닌 집합이 존재 하는 것 같은데 이는 역설이 된다. 이 체계는 논리적으로 타당할 수 없다.

《산술학의 기본법칙》의 두 번째 권은 러셀의 편지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인쇄에 들어간 뒤였으므로 풀이 죽은 프레게는 그 역설을 부록에 넣어 문제의 그 공리를 약화시킴으로써 산술학 체계를 메꾸려 했으나 개정한 이 체계가 부정합한 것으로 판명났다. 1918년 예나대학에서 은퇴한 뒤 그는 산술학이 논리학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신념을 포기하고 산술학도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종합적이며 선천적이라는 칸트의 견해로 돌아갔던 것 같다.

2-7.

오늘날 우리는 논리주의 프로그램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두가지 이유로 프레게의 논리적 토대의 일부였던 소박한 집합론이 본래 정합성이 없었다는 것과 ‘산술학의 공리’라는 개념은 후에 오스트리아의 수학자 괴델에 의해 산술학을 완전하고 정합하는 공리 체계로 만드는 일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그 자체가 의문스럽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게의 철학적 유산은 엄청났다.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길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신대륙을 유럽에 알린 것처럼, 프레게는 산술학을 논리학에서 이끌어 내지는 못했지만 궁극적으로 산술학과 논리학의 전체 지도를 바꿀 만큼 논리학을 혁신했고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도 콜럼버스와 마찬가지로 우울과 좌절을 겪었지만 자신의 연구가 가치 있을 것이라는 기대만은 버리지 않았다. 그는 1925년 죽기직전 아들에게 원고를 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쓴 글들을 멸시하지 마라. 모두 금은 아닐지언정 그 안에 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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