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부터 이후의 분석철학까지

201500072 강종원

1.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 

1-1.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출신 가문으로 1889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는데, 대가족이었고 부유했다. 2) 그는 맨체스터 대학에 갔고, 그곳에서 비행기의 제트추진 엔진을 설계했다. 그는 러셀의 <수학의 원리>를 읽고 그 책을 통해 프레게의 저작에 친숙해졌으며, 1911년에 예나 대학의 프레게를 찾아갔다. 그는 프레게의 권고로 케임브리지로 갔고,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러셀의 지도 아래 다섯 학기를 보냈다. 러셀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도록 적극 도와주었다. 3) 비트겐슈타인은 1913년 케임브리지를 떠나 자신이 만든 노르웨이의 어느 오두막에 은둔했다. 이 시기에 썼던 비망록과 편지는 그가 일생 동안 줄곧 유지할 수 있었던 철학관의 싹을 보여주었다. ‘철학은 실재에 대한 그림을 보여 주지 못하며, 과학적 탐구를 확증할 수도 논박할 수도 없다'(는 그의 유명한 말도 이 때 나온 것이다.)
1-2. 1914년에 전쟁이 일어나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포병대에 자원입대했고, 동부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서 용맹을 떨쳤다. 그는 1918년 11월 티롤 남부의 이탈리아 군인들에게 붙잡혀 몬테카시노 근방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 철학적인 생각들을 일기장에 썼고, 수용소에 있는 동안 그 철학적인 생각들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판된 철학책 <논리철학론>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 책의 원고를 수용소에서 러셀에게 보냈고, 그것은 1921년에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얼마 뒤 영어 번역과 러셀의 머리말을 덧붙여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1-3. <논리철학론>은 간결하고, 우아하고, 수수께끼 같다. 그 책은 ‘세계는 성립할 수 있는 경우들 전체다’로 시작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로 끝난다. 핵심 주제는 의미에 관한 그림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명제들로 이루어진다. 명 제는 사고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이고, 사고는 사실들에 대한 논리적 그림이며, 세계는 사실들 전체이다. 6)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와 사고는 문자 그대로 그림이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낱말들의 공간적 관계는 사물들의 공간적 관계를 묘사한다. 7) <논리철학론>에 따르면, 그림(혹은 명제)이라면 어느 것이나 그것이 묘사하는 것과 공통된무언가를 가져야 한다. 이 최소한의 공통점을 비트겐슈타인은 그것들의 논리적 형식이라고 말한다. 8) 비트겐슈타인은 왜곡된 일상 언어 뒤에 숨어 있는 사고의 묘사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러셀이 제시한 노선에 따라 논리적 분석을 해 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우리가 이 분석을 하다 보면 결국은 전혀 복합적이지 않은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들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했다. 언어와 세계의 연결은 마음속 깊이 있는 이런 사고의 궁극적 요소들과 세계의 본질을 구성하는 원자 대상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9) 명제와 그 명제가 나타내는 세계 구조에 대한 그림 이론을 해설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양한 종류의 명제들이 어떻게 원자 그림들의 결합으로 분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1-4.<논리철학론>은 그 밖의 다른 형이상학 논문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형이상학자가 말하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일 수 있을 뿐이다. <논리철학론>의 문단들은 딛고 올라가서 세계를 정확히 보게 되면 걷어차야 하는 사다리와 같다. 철학은 비철학적인 명제들을 명료화하는 활동이다. 명료해진 명제들은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비출 것이고, 그에 따라 그 철학자가 말하려는 것이 보이겠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1-5. 과학도 철학도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보여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6.철학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논리철학론>, 이것만은 철학이 해줄 수 있는 일을 했다.

2. 논리 실증주의

2-1. 비트겐슈타인은 비엔나로 돌아왔고, 자기 누나를 위해 새로 지을 집을 설계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1922년부터 비엔나 대학의 과학철학 교수로 있는 슐리크를 누나에게서 소개받았고, 그 와 함께 철학적 탐구를 다시 시작했다. 2) 반형이상학 프로그램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의 일부 발상들을 활용했고, 필연적 진리가 필연적인 것은 오로지 그것이 항진 명제이기 때문이라고 선언했다. 3) 곧바로 검증 원리의 위상과 공식에 관해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2-2.실증주의자들은 철학의 진정한 과제가 보편적인 철학적 명제를 내세운다기보다는 오히려 비철학적인 진술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 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은 비트겐슈타인과 하나가 됐다. 그들이 선택한 명료화의 방법은 경험적 진술들이 경험의 직접 기록인 요소 진술들 혹은 ‘원초’ 진술들로부터 어떻게 진리 함수적으로 형성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5)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대규모 장애물에 부딪혔다. 원초 진술들로 기록된 경험들은 각 개인에게 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만일 의미가 검증에 좌우되고, 우리 각자 다른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어떤 과정에 의해 검증을 수행한다면, 누구든 다른 누군가의 의미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슐리크는 형식과 내용을 구별함으로써 이 물음에 답하려고 했다.) 6) 비트겐슈타인은 이 해결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유아주의(solipsism_자신만이 존재하고, 타인이나 그 밖의 다른 존재물은 자신의 의식 속에 있다고 하는 생각)의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려고 분투했다.

3.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

3-1. 비트겐슈타인은 1930년대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 선생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인식론과 심리철학을 뒤집어엎었다. 데카르트에서 슐리크에 이르기까지 이전 철학자들은 외부의 공적 세계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직관이나 경험이라는 궁극적이고 직접적이고 사적인 자료들을 근거로 성립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려고 애썼다. 비트겐슈타인이 그 시절 제시한 바에 따르면, 결코 지식과 신념의 설립 기반이 아닌 사적 경험은 그 자체가 공통의 공적 세계를 전제로 하는 어떤 것이었다. 아주 은밀하고 내적인 우리의 생각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낱말들조차도 그것들이 바로 그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의 공통된 외적 담화 안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철학의 문제는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부터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을 사회적인 배경 속에서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3-2.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으로 다시 돌아온 뒤 <논리철학론>의 많은 주장들을 단념했다. 그는 논리적 원자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았고, 일상적인 말에 숨어 있는 논리적으로 명확한 언어를 찾아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실증주의자들의 원초 진술에는 분명히 맞지 않는 말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요소 명제와 요소 명제가 아닌 명제의 구별을 의심하게 되었고, 언어의 궁극 요소가 단순 대상을 지시하는 이름이라는 생각을 단념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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