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론⟫과 논리실증주의

Ⅰ.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론⟫

1-1.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비엔나에서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유대인 출신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명한 철강 재벌인 아버지와 가톨릭교도 부인과 아홉 자녀가 있는 대가족이었고, 자녀 모두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브람스가 손님으로 자주 왔고, 그의 형 파울은 1차 세계대전으로 한 팔을 잃었음에도 명성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비트겐슈타인은 14살까지는 가정교육을 받고, 그 후 3년간 린쯔에 있는 실업학교에 다녔는데, 그곳의 동기생 중 한 명이 히틀러였다.

1-2. 비트겐슈타인은 학교를 다닐 때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신앙생활을 그만두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공학을 공부해 맨체스터 대학에 갔는데 거기서 비행기의 제트추진 엔진을 설계했다. 그는 러셀의 ⟪수학의 원리⟫와 프레게의 저작을 읽고, 1911년에 예나 대학의 프레게를 찾아갔다. 프레게의 권고로 그는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가서 다섯 학기를 러셀의 지도하에 있었다. 러셀은 그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보고 그가 능력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었다.

1-3. 비트겐슈타인은 1913년 케임브리지를 떠나 자신이 만든 노르웨이의 오두막에 은둔했는데, 그 시기에 그는 일생 동안 유지할 그의 철학관을 보여 주는 비망록과 편지를 썼다. 그는 철학은 연역적 학문이 아니고 또한 자연과학과 똑같은 위치에 놓일 수 없다고 기록했다.

‘철학은 실재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지 못하며, 과학적 탐구를 확증할 수 도 없다.(NB 93)’

1-4. 1914년에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오스트리아 포병대에 자원입대했고, 1918년 11월 이탈리아 군인에게 붙잡혀 몬테카시노 근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 철학적인 생각들을 일기에 썼고, 수용소에 있을 때 그 철학적 생각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판된 철학책 ⟪논리철학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으로 빛을 보게 된다. 그는 수용소에서 책 원고를 러셀에게 보내, 후에 네덜란드에서 만나 토론을 한다. 책은 1921년에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얼마 후 오그던의 영어 번역과 러셀의 머리말을 덧붙여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1-5. ⟪논리철학론⟫은 간결하고, 우아하고, 수수께끼 같다. 일련번호가 붙은 문단들로 구성되어 있는 그 책은 ‘세계는 성립할 수 있는 경우들 전체다’로 시작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로 끝난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의미에 관한 그림이론(picture theory)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명제들로 이루어진다. 명제(proposition)은 사고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이고, 사고(thought)는 사실들에 대한 논리적 그림이고, 그리고 세계(world)는 사실들 전체이다.

1-6. ‘런던 기차는 11.15에서 출발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와 같은 문장은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와 사고는 문자 그대로 그림이라 믿었다. 만약 명제와 사고가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언어가 사고를 심하게 왜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일상 언어에서도 묘사적 요소가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나의 포크가 나의 나이프 왼쪽에 있다’는 문장은 똑같은 낱말들로 이루어진 다른 문장, 즉 ‘나의 나이프가 나의 포크 왼쪽에 있다’와 전혀 다른 말이다. 첫 번째 문장이 그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은 ‘나의 포크’라는 낱말들이 ‘나의 나이프’라는 낱말들 왼쪽에 나타난다는 사실이다(그러나 두 번째 문장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낱말들의 공간적 관계는 사물들의 공간적 관계를 묘사한다(TLP 4.102).

1-7. 이렇게 단순한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문장을 글이 아닌 말로 한다면 그것은 식탁 위에 있는 것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공간적 관계라기보다는 소리들의 시간적 관계이다. 이것은 말하는 순서와 공간적 배열이 일정한 추상적 구조를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철학론⟫에 따르면, 그림이라면 어느 것이 그것이 묘사하는 것과 공통된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 그는 이 최소한의 공통점을 그것들의 논리적 형식(logical form)이라 말했다. 대부분의 명제들은 앞에서 본 경우와는 다르게 명제가 묘사하는 상황과 공통된 공간 형태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명제라면 어느 것이나 그것이 묘사하는 것과 공통된 논리적 형식을 가져야 한다.

1-8. 비트겐슈타인은 왜곡된 일상 언어 뒤에 숨어있는 사고의 묘사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러셀이 제시한 것처럼 논리적 분석을 해 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우리가 이 분석을 하다보면 결국 전혀 복합적이지 않은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들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완전히 분석된 명제는 원자 명제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데, 각각의 원자 명제는 단순 대상의 이름들, 즉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옳거나 그르게 묘사하는 방식에서 서로 관련된 이름들을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완전한 분석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지만, 명제가 표현하는 사고는 완전히 분석된 명제의 복합체를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 우리는 복잡한 규칙들을 부지불식간에 가동해서 명제가 표현하는 사고를 일상의 언어로 표현한다. 언어와 세계의 연결은 마음속에 있는 사고의 궁극적 요소들과 세계의 본질을 구성하는 원자 대상들(atomic objects) 사이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런 상호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말할 수 없다. 그건 우리 각자가 사적 언어를 만들어 혼자서 확인할 수밖에 없는 신비한 과정이다.

1-9. 명제와 그 명제가 나타내는 세계 구조에 대한 그림 이론을 해설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양한 종류의 명제들이 어떻게 원자 그림들의 결합으로 분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과학은 명제들로 이루어지는데, 그 명제들의 진리치는 그 명제들을 구성하는 원자 명제들의 진리치로 결정된다. 논리학은 항진 명제들(tautologies), 즉 그 요소 명제의 진리치가 뭐든 상관없이 옳은 복합 명제들(complex propositions)로 이루어진다. 어떤 명제들은 그 자체가 사이비 명제(pseudo-proposition)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명제들 중 윤리학과 신학의 명제도 있다. 그리고 ⟪논리철학론⟫자체의 명제들을 포함한 철학 명제들 역시 사이비 명제에 속하게 된다.

1-10. ⟪논리철학론⟫은 다른 형이상학 논문들처럼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기술하고자 했으나,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림은 그것이 그리는 대상과 독립적일 수밖에 없으며, 올바른 그림이 있는 것처럼 잘못된 그림 또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명제라면 어느 것이나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포함해야 하므로, 명제는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그릴 수 없다. 형이상학자가 말하려는 것은 그저 보일 수 있을 뿐이다. ⟪논리철학론⟫의 문단들을 딛고 올라가 세계를 정확히 보게 되면 걷어차야 하는 사다리와 같다.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비철학적 명제들을 명료화하는 활동(activity)이다. 일단 비철학적인 명제들이 명료해지면 그 명제들은 세계의 논리적 형식을 비출 것이고, 그럼 철학자가 말하려는 것이 보이겠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1-11. 과학도 철학도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보여주지는 못하나, 이것이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심이 물음(question)이 있을 때에만 의심일 수 있고, 물음은 답이 있을 때만 물음일 수 있으며, 답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을 때에만 답일 수 있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과학적 물음의 답을 모조리 알게 되었을 때조차도 삶의 문제(problem)는 완전히 그대로 남는다고 느낀다. 물론 답을 모조리 알게 되면 더 이상 남은 물음이 없을 텐데, 이 자체가 삶의 문제에 대한 답이다. 삶의 문제는 문제가 사라지는 순간 해결된다(TLP 6.5-6.521).”

사람이 불멸을 믿는다고 삶의 의미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원히 산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영생 그 자체가 하나의 난문제인 셈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신은 세계 속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신비한 것은 사물들이 세계 속에 어떻게 있느냐가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다(TLP 6.432, 6.44).’

1-12. 철학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나, ⟪논리철학론⟫만은 철학이 해 줄 수 있는 일을 했다 – 비트겐슈타인도 그렇게 믿었다. 완벽한 책을 내놓았기 때문에 그는 철학을 그만두고 평범한 일들을 했다. 아버지 칼 비트겐슈타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와 형제자매들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나,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자기 몫을 포기하고 수도원에서 정원사 일을 하거나 시골 학교에서 교사를 하며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1926년 한 학생이 가학성 벌을 받았다고 고소하며 기소되었고,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교사를 그만두었다.

Ⅱ. 논리실증주의

2-1. 비트겐슈타인은 비엔나로 돌아왔고, 자기 누나를 위해 새로 지을 집을 설계하는 걸 도왔다. 그는 1922년에 누나에게서 비엔나 대학의 과학철학 교수로 있는 슐리크(Moritz Schlick)를 소개받아, 그와 함께 철학적 탐구를 다시 시작했다. 두 사람은 1927-8년 월요일 저녁마다 만났고, 카르납(Rudolf Carnap)과 바이스만(Friedrich Waismann) 등 다른 사람들도 만났다. 1929년 그는 (사후 ⟪철학적 논평⟫으로 출판된) 철학 원고를 쓰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갔다. 그가 없는 동안 토론 그룹은 의식적인 철학 운동을 전개했고, ‘비엔나 학단의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선언문을 발행했다. 그 선언문은 과학적 세계관에 마땅히 내놓아야 하는 예전 그대로의 형이상학 체계에 반대하는 캠페인의 시작이었다.

2-2. 반형이상학 프로그램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의 일부 발상들을 활용했고, 필연적 진리가 필연적인 것은 오로지 그것이 항진 명제이기 때문이라 선언했다. 이는 수학적 진리가 세계에 관해 무언가를 알려준다는 것을 부정함과 동시에 그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승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세계에 관한 지식은 오직 경험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고, 명제는 경험에 의해 검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명제의 의미는 명제가 검증되는 방식이라는 검증원리는 형이상학을 공격하는 강력한 무기였다. 두 형이상학자가 절대자의 본성이나 우주의 목적을 놓고 논쟁을 벌일 경우, ‘그 논쟁이 가능한 어떤 경험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2-3. 곧바로 검증 원리의 위상과 공식에 관해 여러 논쟁이 벌어졌다. 검증 원리 자체는 항진명제인가? 검증 원리는 경험에 의해 검증 가능한가? 어느 답도 만족스러울 것 같지 않다. 게다가 형이상학적 신조들 못지않게 과학의 일반 법칙들도 결정적인 검증을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과학의 일반 법칙들은 여전히 반증될 수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검증 원리를 반증 원리로 대체해야 할까? 그럴 경우, 존재 주장들이 어떻게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존재 주장들은 우주를 남김없이 돌아다녔을 경우에만 결정적으로 반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 기준을 좀 더 약한 형태로 표현하여, 명제는 명제의 옳고 그름과 관련 있는 약간의 관찰들이 있을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중해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검증 원리에 대해 조건부로 동의했지만, 당시 그는 수학적 명제 의미는 명제의 증명 방법이라는 선천적으로 유사한 주장을 옹호했다.

2-4. 실증주의자들은 철학의 진정한 과제가 보편적인 명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닌, 비철학적인 진술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이 점으로 비트겐슈타인과 하나가 됐다. 그들이 선택한 명료화의 방법은 경험적 진술들이 경험의 직접 기록인 요소 진술들 혹은 ‘원초’(protocol) 진술들로부터 어떻게 진리 함수적으로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원초 진술에 나오는 낱말의 의미는 그 낱말이 나타내는 경험의 특징을 가리키는 예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에서 비롯된다.

2-5. 이 프로그램은 큰 장애물에 부딪쳤다. 원초 진술로 기록된 경험들은 각 개인에게 사적으로(private) 나타난다. 만약 의미가 검증에 좌우되고, 우리 각자가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어떤 과정에 의해 검증을 수행한다면,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의미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슐리크는 이 물음에 형식(form)과 내용(content)을 구별하면 된다고 답했다. 나의 경험 내용은 내가 붉은 어떤 것을 보거나 푸른 어떤 것을 볼 때와 같이, 내가 가지고 있거나 내가 겪는 것이다. 이것은 사적이고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경험의 형식이나 구조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공통일 수 있다. 내가 나무를 보거나 석양을 볼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보는 것과 동일한 경험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 나무가 푸르다고 하고 석양이 붉다고 하는 한, 우리는 서로 소통할 수 있고 과학의 언어를 구성할 수 있다.

2-6. 비트겐슈타인은 이 해결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유아주의(solipsism)의 위협을 받지 않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비엔나 학단을 멀리하고 케임브리지로 완전히 돌아와서, 《논리철학론》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고 트리니티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비엔나 학단은 슐리크와 베를린의 라이엔바흐가 공동 편집한 《인식》이라는 학술지에서 반형이상학 프로그램을 계속했다. 비엔나 학단의 기본적인 생각들은 1936년 에이어(A. J. Ayer)의 《언어, 진리, 논리》가 출판되면서 영국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 해 슐리크는 한 학생이 총을 쏴 살해되었고, 비엔나 학단은 탁월한 일부 회원들이 정부의 탄압으로 망명을 떠나면서 1939년 막을 내렸다. 비엔나 학단이 후세를 위해 남긴 아주 뛰어난 유산은 1935년 포퍼(Karl Popper)의 《과학적 발견의 논리》 출판이었다.

2 thoughts on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론⟫과 논리실증주의

  1. ???

    “1-1 유명한 철강 재벌인 아버지와 가톨릭교도 부인과 아홉 자녀가 있는 대가족이었고, 자녀 모두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 여기에서의 부인은 비트겐슈타인의 어머니일까요? 비트겐슈타인의 아내일까요? 여기에서의 자녀는 비트겐슈타인의 형제자매들일까요? 비트겐슈타인의 자녀들일까요? 하필 비트겐슈타인에관한 글 서문이 비문으로 시작된 것에 안타까움을 느껴 코멘트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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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ialektike

      헐! 비문이네요. 수정하겠습니다. 학생들이 책을 요약한 것인데, 고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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