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과 자연선택부터 니체까지

1.다윈과 자연선택

1-1. 찰스 다윈은 1809년 슈루즈베리에서 태어나 ,1825년 에든버러의 의대생으로 입학했지만 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케임브리지의 크라이스트 칼리지로 가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식물학 교수의 추천을 받아 군함의 박물학자로 지명되었다. 5년간의 항해동안 그는 지질학, 식물학 등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발굴했고 이를 통해 해양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비글호항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1-2. 그 후 다윈은 1840-1850년대에 자신의 사유지에서 식물군과 동물군의 연구를 통해 나온 초안을 여러 사람이 돌려보게 함으로써 자연선택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를 1960년대 쯤 책으로 출판할 계획이었으나 다른 동물학자인 월리스가 자연선택과 유사한 적자생존 이론을 학회에 발표해 그는 자연선택이론의 독자성과 우선권을 위해 《종의기원》을 서둘러 출판했다. 이후 그는 여러 논문을 출판하였고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책 《인간의 계보, 선택과 성의 관계》에서 그는 인간이 오랑우탄, 침팬지와 공통된 조상을 갖는다는 주장을 옹호했다.

1-3. 다윈은 진화론을 맨 처음 제안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대 시칠리아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자연선택의 원리를 암시했고 스웨덴의 자연주의자 린네는 식물과 동물의 종을 분류해 다윈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린네와 그 밖의 분류학자들은 식물과 동물의 왕국을 속과 종으로 나누었다. 예를들면 모든 사자는 동일한 종이고, 사자종은 호랑이나 표범과 같은 다른종을 포함하는 고양이 속의 구성원이다. 일정한 종 내에서 개체의 형질은 크게 변할 수 있지만 종의 규정적 특징은 종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종의 자손을 낳기 위해 다른 구성원들과 교배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종의 구성원들 사이의 결합은 일반적으로 자손을 낳지 못한다.

몇몇 자연주의자들은 종교적인부분에서 이유를 찾으려기보다는 하나의 속에 포함되어 서로 다른 종 사이의 유사점이 머나먼 공통조상의 계보에 의해 설명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또한 종의 어느 세대에서 자손에게 넘겨줄 유리한 형질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장 높은 나뭇잎에 도달하려고 몸을 뻗치던 기린은 목이 늘어났고 이는 목이 긴 자손을 낳을 수 있게 해주었다.

다윈은 이러한 고대의 자연선택 관념을 이용해 종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설명했는데, 이러한 이론의 근본 바탕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유기체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정도에 따라 크게 변한다. 둘째, 모든 종은 세대마다 증가시킬 수 있는 만큼 번식할 수 있다. 셋째, 하지만 종이 이렇게 번식하지 않는 것은 각 세대에서 극소수의 자손만이 살아남아 번식하기 때문이다.

1-4. ‘이와 같은 생존 경쟁으로 인해, 모든 변이는 그것이 아무리 경미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어떤 원인으로 진행되든 간에, 만일 다른 유기체나 외부 자연과의 무한히 복잡한 관계 속에서 종의 개체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하다면, 그 변이는 개체를 보존하려는 경향을 가질 것이며, 일반적으로 자손에게 유전될 것이다. 따라서 그 자손 역시 더 잘 살아남을 기회를 갖게 될텐데, 그것은 종의 많은 개체들이 주기적으로 태어나기는 하나 그들 가운데 소수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OS 52)’

다윈은 세 가지 다른 종류의 선택을 구별했다. 목적에 가자 적합한 표본을 위한 인위선택과 목적적이지 않은 자연선택인데 자연선택은 다시 좁은 의미의 자연선택과 성 선택으로 나뉜다. 전자는 개체가 번식하기에 충분할 만큼 오래 살아남을지 여부를, 후자는 그렇게 살아남은 개체가 누구와 짝짓기 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적응변이는 그 변이 자체가 유전된 것이고 특유의 유리한 변이의 기원은 전적으로 우연의 문제일수 있다고 다윈은 믿었다.

자연선택은 단일한 종에 속한 형질들의 경우 쉽게 예증되고 관찰될 수 있다. 그 예로 자작나무에 사는 나방이 새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자작나무에 가까운 색을 띄는 형질로 점차 바뀌어 가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다윈은 자연선택이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되면서 식물과 동물의 완전히 새로운 종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굉장히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었을 것이며 실제로 지질학점 관점에서 화석을 살펴보았을 때 종의 탄생과 소멸을 다윈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1-5. 다윈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철학사가 아니라 과학사에 속한다. 그러나 다윈의 생물학적 연구가 종교철학과 형이상학 전반에 미친 영향 때문에, 어떤 철학사도 다윈에 대한 언급을 빠뜨릴 수 없다.

  1. 존 헨리 뉴먼

2-1. 교회단체가 다윈의 사상을 반대할 때 종교작가인 존 헨리 뉴먼은 이를 받아들였다. 《종의기원》이 발표된 직후 그는 각각의 종마다의 독자적인 창조를 믿는 사람은 화석이 박힌 바위의 창조역시 믿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다윈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했으며 과학과 종교사이의 어느 논쟁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뉴먼은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다녔으며 오리엘대학의 특별 연구원을 역임했다. 또 세인트 메리 성당의 주교 대리였으며 동시에 설교자로서 지속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복음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후에 기독교신앙에 대한 가톨릭의 해석이 옳다는것을 확신하고 로마 카톨릭교로 개종하면서 오리엘대학의 특별 연구원직에서 물러났다.

뉴먼은 더블린에 세워진 가톨릭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그 시절 강의와 연설들을 모아 《대학의 이념》이라는 교육이론의 고전을 출판했다.

2-2. 뉴먼은 신의 존재를 믿는 것 뿐 아니라 구체적인 종교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완전히 이성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세상에 입증해 보이려는 욕구 때문에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종교적인 믿음의 결론에 대한 증거가 신앙의 완전한 헌신에 부적합하게 보인다면 종교적 믿음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해 이성의 뒷받침 없이 신앙을 채택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고, 종교교리를 고수하는 것 자체가 이성적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문제를 다룰 때 그는 비종교적 맥락에서 믿음의 본성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관심을 자주 보였다. 그가 제기한 철학적 물음은 적합한 증거나 논증 없이 명제를 승인하는 것은 언제나 그른가였다. 명제가 확신이 아닌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에 의해 정당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로크에 대응하여 뉴먼은 우리의 대부분의 믿음이 빈약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잘 유지된다고 지적하고, 증거의 힘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 무조건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일도 과학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종교적 믿음은 추측에 근거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합리 하다고 비난받을 수 없다. 유대교의 역사에서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증거가 발견될 수 있지만 이 증거는 신의 존재와 계시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 에게만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왜 신을 믿어야하는지 물으면 그는 양심의 소리에서 발견될 수 있는 신성한 능력에 대한 내적 경험에 호소하라고 말한다.

2-3. 뉴먼의 기독교적 변증론이 포함된 일반적인 인식론적 설명은 신앙에 공감하지 않던 철학자들도 감탄하게 했다. 그것은 흄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의 믿음과 확실성에 관한 논의들 가운데 최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니체

3-1.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작센의 루터교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대학시절 전공은 고전문헌학 이었는데 학위를 받기도 전에 정교수가 될 정도로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니체는 대학교수가 되기 직전에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를 읽은 것과 작곡가 바그너를 만난 것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 두 사람의 영향을 받아 제일 처음 출판해낸 책이 《비극의 탄생》이다.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 정신의 두 측면을 대비했다. 한 측면은 비극에서 표현된 열광하는 비합리적 열정이었고 다른 측면은 서사시나 미술에서 표현된 절제력 있는 조화로운 아름다움 이었다. 그리스 문명의 성취는 그 둘 사이의 종합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3-2. 니체는 1873년에서 1876년 사이에 네편의 평론으로 이루어진 《반시대적 성찰》 출판했다. 4편중 두 편은 예수의 생애 저자로 유명한 슈트라우스와 과학자의 허세에 대한 비판이고

나머지 두 편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878년쯤 그는 염세주의에 숨이 막힐것 같아 바그너와 인연을 끊었고, 쇼펜하우어에 대한 열정 또한 식었다. 이 때문에 그는 후에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긍정의 삶으로 대체하길 희망하는 저작들을 출판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만 그답지 않게 공리주의 도덕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과학을 예술보다 우월한 것으로 평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예술이 일생일대의 과업이라는 끊임없는 근원적 확신을 시적이고 경구적인 저작형식으로 드러냈다. 그는 심리적 문제로 인한 병 때문에 교수직을 조기 은퇴하고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여러 곳에서 지냈다. 이때 그는 여러 작품을 남겼다. 1882년, 니체는 정신해방의 실천적 표현으로 독일의 물질주의자 이, 러시아의 남성평등주의자 살로메와 ‘삼위일체’를 맺고 동거를 시작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이 책에는 니체의 세 가지 신념이 담겨 있었다. 첫째, 현 상태의 인간이 초인에게 추월당한다. 여기서의 초인은 몸과 영혼이 당당하게 생긴 더 고등하고 강하고 의기양양하고 유쾌한 인간을 뜻한다. 둘째, 기독교적인 도덕적 우선권이 완전히 뒤집히는 가치의 재평가가 있을 것이다. 셋째, 언젠가 일어난 적이 있는 모든일이 무하하게 주기적으로 순환하면서 또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념들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니체의 저작에서 예언적인 방식은 줄이고 논증적인 방식을 늘린 형태로 해설되었다.

3-3. 1888년은 니체가 미친듯이 글을 쓴 해였다.《반그리스도》,《바그너사건》,《우상의 황혼》등이 있다. 1990년, 그는 일생을 정신이상으로 마감했다.

니체는 20세기 유럽대륙, 특히 러시아의 문학과 독일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 20세기 후반 분석적전통의 윤리학자들은 전통도덕에 관한 니체의 맹공격에 대해 응답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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