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그리고 마르크스

Ⅰ.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

1-1. 생애와 시대적 배경

1-1-1. 벤담은 공리성의 원리를 제시할 때, 그것을 행복을 줄이려 한 경우에 한해 행위의 가치가 인정된다는 금욕주의 원리와 비교했다. 벤담의 주요 비교대상은 기독교 도덕이었으나, 정작 기독교인들에게 금욕주의의 원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든 철학자들 가운데 금욕주의의 원리를 제일 용의주도하게 주장한 사람은 무신론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였다.

1-1-2. 쇼펜하우어는 단치히 상인의 아들로 1803년까지 아버지의 사업을 익히며 성장했다. 그는 의대생의 공부를 하다가 방향을 바꿔 1810년 괴팅겐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플라톤과 칸트를 좋아했지만, 칸트의 제자인 피히테는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1811년 베를린에서 피히테의 강의를 듣고 그의 민족주의를 혐오했다. 쇼펜하우어는 박사학위 논문이었던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을 쓰기 위해 나폴레옹에 대한 프로이센의 투쟁에 가담하지 않고 빠져나왔다.

1-2. 사상

1-2-1. 쇼펜하우어는 1814~1818년에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The World as Will and Idea)》를 썼다. 그는 네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에서는 관념(Idea)으로서의 세계에, 두 번째와 네 번째는 의지(Will)로서의 세계에 관해 썼다. 그가 말하는 ‘관념’(혹은 ‘표상(representation)’으로도 번역된다)은 개념이 아니라, 로크와 버클리가 지칭한 구체적인 경험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세계는 오로지 관념, 의식과 관련해서만 존재한다(‘세계는 나의 관념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몸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지각을 하고, 다른 대상들은 그것들의 상호 영향을 통해 알려진다.

1-2-2. 관념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설명은 칸트와 별반 다른 것이 없지만, 세계를 ‘의지’로 표현한 부분은 매우 독창적이다. 그는 관성 법칙이나 중력 법칙으로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이지만, 과학은 관성이나 중력과 같은 힘의 내적 본성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은 인식주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나의 신체는 스스로 의식하는 능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데, 오로지 이것만이 사물들의 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준다. 즉 쇼펜하우어는 ‘수수께끼의 답은 개인으로 여겨지는 인식 주체에게 주어져 있는 의지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인식 주체 자신의 실존에 대한 실마리를 주며, 인식 주체의 존재와 행위와 운동의 내적 구조를 보여준다(WWI 100)’고 말했다. 모든 대상의 내적 본성은 의지이다. 이 의지는 중력에서 자력에 이르기까지 많은 등급이 있는데, 중력과 자력보다 더 높은 등급만이 지식과 자기 결정력을 동반한다. 칸트도 의지를 추구하긴 했으나, 이는 쓸모가 없었던 물자체(thing-in-itself)의 참모습이다.

1-2-3. 쇼펜하우어는 무생물이 동기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으면서도, 왜 무생물의 자연적 경향성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욕망(appetite)’이나 뉴턴이 말한 ‘힘’이라 하지 않고 ‘의지’라고 했을까? 그는 힘을 의지로 설명할 경우, 그것은 조금 알려진 것을 많이 알려진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는 세계의 내적 본성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를 의식함으로써 주어진다고 보았다.

1-2-4. 그러나 의지 자체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에 따르면, 모든 의지는 욕구를 일으키고, 욕구는 결핍을 만들고, 결핍은 고통을 유발한다. 즉, 어떤 욕구가 충족되면 그 후에 또 다른 욕구가 생긴다. 우리의 의식이 의지로 가득 차게 되면, 우리는 결코 행복하거나 평화로울 수 없다. 최선의 바람은 고통과 권태가 번갈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1-2-5. 쇼펜하우어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책에서 의지의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두 가지 방식을 제시했다. 첫 번째 방식은 예술, 즉 미에 대한 순수하고 사심 없는 관조(contemplation)를 통한 탈출이고, 두 번째 방식은 단념(renunciation)을 통한 탈출이다. 삶에 대한 의지를 단념해야만 의지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삶에 대한 의지는 자살이 아닌 금욕주의에 의해 단념된다. 진정한 도덕적 진보를 위해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악함과, 우리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교활함을 버려야 한다. 또한 타인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정의로움과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선량함마저도 버려야한다. 즉 우리는 미덕을 넘어 금욕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궁극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는 순결, 결핍, 절제를 받아들여야 하며, 죽음이 악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1-2-6. 쇼펜하우어는 기독교와 힌두교, 불교의 성인들을 자기희생의 모범으로 여겼으나, 그 자신의 금욕주의에 대한 입장은 어떠한 종교적 전제에 의거해있지 않고, 대부분의 성인의 일대기가 미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개개의 주체와 대상은 단순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인도철학의 마야사상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다.

1-2-7.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는 직접적인 영향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1820년에 헤겔이 있는 베를린 대학으로 가서 강의를 했는데, 그는 헤겔을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강의를 일부러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개설했으나 그의 학생을 빼앗아오지 못했다. 그는 헤겔을 ‘아무 사상도 없는 지루한 이야기의 수면효과’나 ‘정말 따분하고 형편없는 허풍선’이라고 하며 조롱했다.

 

1-2-8. 쇼펜하우어는 1839년에 논문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로 ‘노르웨이 인 상’을 받기 전까지 그의 천재성을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이 논문과 윤리학의 기초를 다룬 다른 논문을 묶어 1841년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1844년에는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 증보판을, 1851년에는 《수필과 이삭줍기》라는 수필집을 냈다. 그의 저작들은 일반 사람들이 그의 부적절한 의견/정치적으로 잘못된 의견을 유쾌 또는 불쾌하게 음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치 있고 명료한 문체의 진가를 맛볼 수 있었다.

 

1-2-9.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을 비롯한 대륙의 실패한 혁명이 쇼펜하우어의 60번째 생일 직후에 일어났는데, 그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정치적 시도에 환멸을 느끼던 세대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비난한 독일 대학 기관의 환심을 샀고, 비열한 망상이라 맹비난했던 그 세상의 안락함을 누렸다. 그 자신의 삶이 그가 찬양했던 금욕주의적 이상과 완전히 달랐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이 실제로 지니고 있는 덕목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윤리학자에 대한 희한한 요구이다’라고 대답할 것 같다.

 

Ⅱ. 키르케고르의 도덕과 종교

2-1. 생애와 시대배경

2-1-1. 쇼펜하우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의지와 관념으로서의 세계》의 증보판을 준비하던 때,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철학자는 전혀 다른 형이상학적 기초 위의 금욕주의와 비슷한 요구 사항을 제시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는 1813년 비극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였다. 그의 어머니와 여섯 남매 중 다섯이 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양치기 소년일 때 신을 모독하는 말을 해서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다. 키르케고르는 1830년에 코펜하겐 대학에 신학을 공부하러 갔고, 쇼펜하우어처럼 헤겔 철학에 익숙해지면서 헤겔 철학을 혐오하게 됐다. 그는 신학은 싫어했지만,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신비로운 경험을 동반한 종교적 변환을 겪었다. 그는 1840년 올센과 약혼했으나, 자기 가족의 이력 때문에 결혼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일 년 뒤 파혼한다. 그 후 그는 자신을 철학자로서의 소명을 가진 사람으로 여겼다.

2-2. 사상

2-2-1. 키르케고르는 1841년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에 관한 학위 논문을 완성한 후 베를린으로 가 셸링의 강의를 들었다. 독일 관념주의에 대한 반감이 커졌는데, 그 이유는 쇼펜하우어와 달리 독일 관념주의는 구체적인 개인을 과소평가한 데 있었다. 그는 쇼펜하우어처럼 단념으로 종결되는 정신적 이력을 단계별로 묘사했으나, 정신적 이력의 단계가 고차적일수록 개체성은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독특한 개성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고 보았다.

2-2-2. 키르케고르의 학설은 1843~1846년에 여러 필명으로 출간된 일련의 저작들에서 설명이 나온다. 1843년의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는 두 가지 인생관, 즉 심미적 인생관과 도덕적 인생관을 제시한다. 군중의 일원이 개인이라는 출발점에서 보면, 심미적 인생은 자기실현을 향한 첫 번째 단계이다. 심미적인 사람은 맛과 멋(taste and elegance)이 있는 쾌락을 추구한다. 심미적인 사람은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이든 즉각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잡으려는 선택을 제한하는 것에 대해 결코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본질적 특성이 있다. 이런 사람은 시간이 지난 후 이러한 자유에 대한 자신의 요구가 현실적으로 자기 능력을 제한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즉 그는 자신을 사회제도 안에 포함하여 그 제도가 부과하는 의무를 수용해야하는 도덕적 단계로 옮아간다. 그러나 아무리 도덕 법칙을 완수하려 해도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2-2-3. 심미적 인생의 방식과 도덕적 인생의 방식 둘 다 종교적인 영역으로 상승하여 그 한계를 넘어야 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그가 다른 필명으로 쓴 다른 저작들 – ⟪공포와 전율⟫(1834년), ⟪분노의 개념⟫(1844년), ⟪삶의 방식의 단계⟫(1845년)에서 다양하게 전달된다. 이러한 글들은 1846년의 ⟪철학적 단편에 대한 비학문적 후기⟫를 출간하며 최고조에 달했다. 이 책의 메시지는 헤겔 신봉자가 말했듯 신앙은 객관적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2-2-4. 도덕적 영역에서 종교적 영역으로 옮아가는 과정은 ⟪공포와 전율⟫에서 신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명령한 성경 이야기를 통해 생생히 묘사되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도덕적 영웅은 보편적 도덕률을 위해 자기 인생을 바쳤으나, 아브라함은 특수 신의 명령 때문에 도덕률을 위반했다. 키르케고르는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도덕적 명령을 위반한 아브라함의 행위를 ‘도덕에 대한 목적론적 유예’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개인이 도덕률을 위반하는 것을 신의 소명으로 여긴다면, 이것이 그냥 유혹인지 진짜 신의 명령인지 분간할 수 없다. 혼자만으로는 그것을 알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2-2-5. 키르케고르는 1848년 두 번째 신비로운 경험 후, 글을 좀 더 쉽게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순수한 마음은 한 가지만 바라는 것이다⟫, ⟪사랑의 행위⟫와 같은 다수의 기독교 담론과 책들을 자기 이름으로 펴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는 다시 필명을 사용하며 절망의 유일한 대안으로, 진정한 실존을 실현하기 위해 신앙을 필요조건으로 제시했다.

2-2-6. 키르케고르의 후반부 인생은 이름만 기독교라 여긴 덴마크 국교회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그는 민스터(J.P.Mynster) 대주교를 아주 비판했고, 1854년 그가 죽은 후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책을 냈다. 키르케고르는 교권에 반대하는 소책자 ⟪순간⟫을 창간하고 지원하고, 9호까지 발간한 후, 거리에서 쓰러져 몇 주 동안 병을 앓다가 1855년 11월에 숨을 거둔다. 그 자신이 원하지 않았고 조카도 반대했는데도 그의 장례는 교회에서 치러졌다.

Ⅲ. 변증적 물질주의(마르크스)

3-1. 생애와 시대배경

3-1-1.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 모두 헤겔의 학설에 대한 반작용에서 철학적 추진력을 얻었다. 그러나 헤겔주의를 가장 격렬하고 강력하게 반대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Karl Marx)였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임무를 ‘헤겔을 뒤짚어 엎는 것’이라 했다. 헤겔의 변증적 관념주의(dialectical idealism)는 변증적 물질주의(dialectical materialism)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3-1-2.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1818년 아들이 태어나기 전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한 진보적인 유대교인이었다. 마르크스는 청소년 시절 트리어에서 학교를 다녔고, 본 대학에서 1년간 법학을 공부하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그 후 5년 동안 베를린 대학을 다니며 진지하게 살았는데, 시 쓰기를 좋아했으며 법학 대신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가 베를린에 갔을 때 헤겔은 이미 죽었지만,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가 활동하고 바우어(Bruno Bauer)가 이끌던 청년헤겔학파라는 좌파단체와 헤겔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는 헤겔과 바우어에게 역사를 변증적 과정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 역사의 각 단계는 기하학적 증명 과정과 아주 비슷한 과정으로 기초적인 논리적 원리나 형이상학적 원리에 따라 앞선 단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3-2. 사상

3-2-1. 청년헤겔학파는 사람들이 자기 존재의 진정한 본질적 요소인데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보는 상태인, 헤겔의 소외 개념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헤겔 자신이 강조한 소외의 형태는 어떤 단일한 정신의 발현인 개인들이 서로를 통일체의 구성요소로 보지 않고 적대적인 경쟁관계로 보는 것이다. 바우어와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자신의 삶과 의식을 비실재적인 신에게 맡기는 종교를 최고의 소외 형태로 간주했다. 포이어바흐는 ‘종교가 인간을 그 자신과 분리시킨다’면서 ‘신은 인간이 자신과 적대자로 맞서게 한다(W vi 41)고 말했다.

3-2-2. 헤겔과 포이어바흐에게 종교는 허위의식이었다. 헤겔은 이 허위의식이 종교적 신화를 관념주의 형이상학으로 변형함으로써 치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이어바흐에게는 헤겔주의 자체가 소외의 한 형태였다. 즉 종교는 제거되어야할 것이지 변형될 것이 아니며, 사회적 인간의 생활에 대한 실증적인 이해로 대체되어야 했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일종의 허위의식인 점은 동의했지만, 헤겔과 포이어바흐가 소외에 대해 터무니없는 처방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헤겔의 형이상학에서 인간은 자신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관망하기만 하는 존재였다. 반면 포이어바흐는 인간의 숭배 대상 가운데 인간을 소외시킨 실체가 오로지 신만이 아닌 점을 깨닫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사유 재산이 국가의 기반이 되는 한 국가 역시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소외시킨다고 보았다. 소외는 철학적 반성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철학자는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TF 11)’고 말하며, 사회의 대변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3-2-3.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에 관한 논문으로 1842년 예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청년헤겔학파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쾰른에서 급진파 신문 <라인신문>을 편집하면서 정치 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지낸 남작의 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1843년에 결혼하여 그녀가 죽을 때까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다. 마르크스가 결혼한 직후 러시아 황제의 압력으로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라인신문>은 폐간된다.

3-2-4. 마르크스는 파리로 이사해 정치경제학에 관한 영국 고전들을 통해 자신이 갈 길을 확인하였고, 많은 급진파 친구들을 만나며 신문 기자로써 추구해야 할 다른 일거리를 발견한다. 이 친구들 중 엥겔스(Friedrich Engels)와 만나 함께 ‘공산주의’ 이론, 즉 공동 소유를 위한 사유 재산의 폐지 이론을 세우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같이 연구한 ⟪독일의 이데올로기⟫은 마르크스가 반체제적 신문기자라는 이유로 파리에서 쫓겨난 뒤 이주한 브뤼셀에서 완성된다.

3-2-5. 이 책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물질주의적 역사 개념을 제시한다. 삶이 의식을 결정하지 의식이 삶을 결정하지 않는다. 역사의 근본적인 본성은 경제적 생산 과정이고, 그 과정을 이해하려면 경제적 생산의 물질적 조건을 이해해야 한다. 다양한 생산 방식은 사회 계급의 형성과 계급들 사이의 투쟁, 그리고 여러 형태의 정치 생활과 법률과 윤리를 초래한다. 예를 들면 맷돌은 봉건 영주가 다스리는 사회를 낳고, 증기 방앗간은 산업 자본가가 지배하는 사회를 가져온다. 변증적 과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공산주의의 등장을 위해 여러 단계를 거치며 세계를 끌어간다.

3-2-6. ⟪독일의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가 죽은 후에도 한참 출판되지 않았으나, 그 책의 아이디어는 1847년의 ⟪철학의 빈곤⟫에 집약되어 있다. 물질주의적 역사개념을 더 널리 알린 것은 엥겔스의 초안을 바탕으로 1848년에 발행한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이었다. 이것은 새로 설립된 ‘공산주의 동맹’의 원리와 이상을 개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언⟫의 메시지는 엥겔스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인류의 전 역사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의 투쟁과 경쟁의 역사였다. 온갖 착취와 억압, 계급 차별과 계급 투쟁으로부터 사회 전체를 동시에 완전히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이제 피착취 계급과 피지배 계급(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착취 계급과 지배 계급(부르주아 계급)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쟁취할 수 없는 그런 단계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계급 투쟁의 역사는 일련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CM 48)”

⟪선언⟫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마지막 문장이다. ‘공산주의 혁명에서 지배 계급들이 벌벌 떨게 하자.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사슬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지배할 세상이 온다. 온 나라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3-2-7. ⟪선언⟫이 발간된 해에, 파리, 베를린, 로마 등 여러 도시에서 무장 폭동이 일어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가 무상 교육 제도를 수립하고 운수업과 은행업을 국유화하며, 누진 소득세를 부과하도록 혁명가들을 촉구하기 위해 독일로 잠깐 돌아왔다. 마르크스는 혁명 실패한 후 쾰른에서 두 번 재판을 받고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프로이센 영토에서 추방당한다. 파리로 돌아와서도 추방당한 그는 남은 생애 런던에서 빈곤에 허덕였는데, 그의 아이 여섯 중 셋이 굶어 죽었다.

3-2-8. 마르크스는 런던에 살며 하루에 열 시간씩 연구하며 변증적 물질주의 이론을 전개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1857~1858년에 지난 10년간의 경제적 견해를 정리해 일련의 비망록을 작성했는데, 이 비망록을 기초로 하여 1859년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집필했다. 그 저작의 서문은 물질주의적 역사 이론에 대한 간결하고도 권위적인 진술을 담고 있다.

3-2-9.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이론과 실제를 결합시키려 평생 노력했다. 그는 1864년에 ‘국제 노동자협회의 창립을 도왔으나, 그 단체는 내부 분쟁을 겪고 파리의 야만적인 폭동을 지지한 탓에 평판이 나빠져 1876년에 해산된다.

3-2-10. 마르크스의 저술활동은 역사 과정이 어떻게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좌우됐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 ⟪자본론(Capital)⟫에서 최고조를 달한다. 이 책의 첫 번째 권은 18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되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권은 1883년 마르크스가 죽었을 때 출판되지 않은 채로 있다가 엥겔스에 의해 사후 유작으로 출판된다. 그는 하이게이트 묘지의 아내 곁에 묻혔다.

3-2-11. 마르크스의 거대한 저작의 기본 주장은, 자본주의 제도가 최종 위기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본성상 노동 계급의 착취를 필요로 한다. 모든 생산품의 가치는 생산품에 투여된 노동의 총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생산품의 실제 값보다 더 적게 지불해서 가치의 일부를 착취한다. 기술이 발달하면 동시에 노동자의 생산성이 향상됨에 따라 노동에 의해 산출된 부가 갈수록 자본가에게 쌓여간다. 이 착취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느끼는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그 때 자본주의 제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로 대체될 것이다. 그 독재 체제는 사유 재산을 폐지하고 생산 수단이 중앙 정부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사회주의 국가를 도입하게 된다. 그 후 사회주의 국가는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되는 공산주의 사회로 대체될 것이다.

3-2-12.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이어 보편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그가 죽은 후 역사에서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의 이론들은 본질상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고 정치적이었다. 바로 그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이론들은 성공과 실패 두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사건들이 경제적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잘못을 범한다. 마르크스주의 유형의 사회주의를 겪은 나라들을 보면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과 같은 개인들이 권력을 휘둘렀는데, 이는 오로지 비인격적 힘만이 역사를 구현할 수 있다는 이론이 거짓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적 요인들이 정치와 문화에 미치는 여향을 부인하는 역사가나 역사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3-2-13. ⟪공산당 선언⟫의 제안들을 150년쯤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면 폭정에 의해서만 집행되는 성급하고 가혹한 방법들 – 예를 들어 상속의 폐지와 강제적인 농업 노동, 선진국들이 현재 당연시 여기는 누진 소득세법, 보통 교육과 같은 제도들, 그리고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채택해 성공을 거둔 철도와 은행의 국유화같은 실험들이 뒤섞여 있음을 알게된다. 마르크스는 예언자로서는 신뢰를 얻지 못했지만, 그의 철학은 의식이 삶을 결정짓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 가장 설득력있게 논박했다. 그가 죽고 난 후,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는 과학적 이론이 아닌 정치적 행동주의(activism)에 대한 영감과 정치 체제에 대한 지침으로 여겨지는 그의 관념체계에게서 좋든 나쁘든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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