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니츠의 인식론, 성질과 관념에 관한 버클리의 견해

라이프니츠의 인식론

1-1. 스피노자의 인식론에서 그는 자신의 형이상학적 주장, 즉 우리가 지식과 경험에 관하여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의 관념과 신체의 운동이 신인 동시에 자연이기도 한 유일 실체가 드러내는 개별적인 요소의 두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를 적절히 조화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등장시킨다. 라이프니츠의 인식론에도 또한 일상적인 말과 사고를 형이상학적 체계와 일치시키려는 시도가 나온다. 하지만 그의 체계에서는 관념과 운동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고, 둘 사이에는 아무 상호작용이 없는 완전히 독립적인 일련의 사건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스피노자의 체계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 둘은 신의 정신 안에 들어 있는 예정 조화에 따라 서로 연결된다.

1-2. 라이프니츠의 표준적인 모나드론에 따르면, 일반적인 어떤 형태의 인식론이 성립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정신과 외부 세계 사이의 어떤 관련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감각적 지각을 설명해야 하는가? 그리고 모든 단순 관념이 오직 정신 내부의 산물이라고 하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은 우리의 본유 관념과 획득 관념을 둘러싼 논쟁에서 무슨 관심을 보일 수 있는가? 라이프니츠의 가장 중요한 저술 <<신인간지성론>>은 인식론에 관한 저술로, 그는 이 저술에서 로크의 경험론적 지식 이론을 상세하게 비판한다. <<신인간지성론>>은 로크의 견해를 대변하는 필랄레테스(Philalethes)와 라이프니츠의 견해를 표명하는 테오필루스(Theophilus)가 등장해 벌이는 논쟁으로, 이 저술의 각각의 장은 로크의 <<인간지성론>>의 장들과 정확히 대응하며 로크의 주장을 반박한다.

1-3. <<신인간지성론>>에서 라이프니츠가 옹호하는 수많은 견해와 논변들은 훨씬 더 상식적인 형이상학을 지닌 철학자도 얼마든지 채택할 수 있는 것들이다. 라이프니츠도 이 점을 인지하고, 이는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는 철학자도 해가 뜨고 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며 스스로를 옹호했다. 모나드론보다 인식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이 저술은 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1-4. 경험론자들은 감각 안에 없는 것은 지성 안에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지성 자체를 제외하고’ 그렇다 답한다. 우리의 영혼은 존재이고 실체이고 단일체이며, 그 자신과 동일하고 원인이며 관념과 추론이 위치하는 장소이다. 존재와 실체 등의 관념은 오직 영혼이 자신에 대해 반성할 때만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들은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본유적이다. 정신은 앞으로 그려 나갈 그림의 밑그림이 수(number)에 의해서 이미 연필로 표시된 캔버스이다.

1-5. 이런 의미에서 본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념의 예로, 라이프니츠는 논리학과 산술, 기하학의 원리를 예로 든다. 라이프니츠는 ‘사각형은 원이 아니다’는 본유적인 반면 ‘단맛은 쓴맛이 아니다’는, 달거나 쓴 느낌은 감각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여 본유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외부 세계는 정신에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하고 영혼의 모든 사고와 행위는 내부에서 발생한다는 주장과 조화시킬 수 있을까?

1-6. 이에 답하려면 라이프니츠가 인간 영혼을 모나드들의 위계질서에서 가장 상위의 모나드로, 즉 인간 신체의 서로 다른 부분과 기관에 대응하는 살아 있는 실재로 여겼음을 알아야 한다. 모나드의 관점에서 보면, 감각으로부터 정신에 어떤 느낌이 생겼다는 말은 곧 상위의 모나드가 지닌 관념 중 일부가 하위의 모나드로부터 발생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하위 모나드들의 지각은 통각(상위 모나드의 자기의식)에 의해 명확해진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는 창이 없어서 외부 세계로부터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한다. 모나드들은 그 대신 일종의 텔레파시 같은 것으로 서로 연결 되는 듯하다.

1-7. 라이프니츠는 이런 생각을 의식의 단계에 관한 탐구로 전환한다. ‘우리 안에 끊임없이 수많은 지각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도록 이끄는 요소들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이런 지각은 통각과 반성이 없이 이루어진다.(G V.46)’ 우리의 의식이 지니는 경험 중 대부분은 수많은 매우 작은 지각들로 구성되는데, 우리는 이 지각에 대해 판명한 관념을 갖지 못한다. 하위 모나드가 지니는 지각의 특징은 혼란스러운 관념이다. 상위 모나드의 통각은 우리의 관념에 명석, 판명함을 부여한다. 혼란스럽기 때문에 감각적 지각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듯 보인다.

1-8. 그는 의식의 단계 사이의 구별을 본유 관념에 대한 우리가 논리학의 기본 법칙을 인식하기 훨씬 이전에 개별적 진리로부터 배우기 시작한다는 전형적인 반박에 답하는 데 사용한다. ‘일반 원리들은 우리의 사고 안으로 들어와 영혼의 각 부분을 형성하고 이들을 서로 연결한다. … 마치 걷기 위해서 근육과 힘줄이 필요하듯이 이들은 항상 필요하다.’ 정신은 항상 논리에 의지하지만, 논리 법칙을 확인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1-9. 로크는 지식을 형성하는 기본 요소가 감각을 통해서 얻는 단순 관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단순 관념이라는 개념 자체를 일종의 환상으로 보았다. “나는 누군가가 어떤 감각적 관념을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관념은 자신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여지를 정신에 제공하지 않는다. … 예를 들면 녹색이 파란색과 노란색을 한데 섞은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므로, 따라서 녹색의 관념이 이 두 색의 관념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녹색의 관념은 파란색이나 따듯함의 관념과 마찬가지로 단지 외견상 단순하게 보일 뿐이다.(G V.109)” 라이프니츠는 색과 같은 제이성질은 주관적이고 형태와 같은 제일 성질은 객관적이라 하는 로크의 구별을 거부한다. 그는 제일성질과 제이성질 모두 현상일 뿐이라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이후 버클리에 의해 더욱 완전한 형태로 발전된다.

 

성질과 관념에 관한 버클리의 견해

2-1. <<하일라스와 필로누스 사이의 대화>>에서 버클리는 우선 제이성질이 주관적이라는 로크의 주장에 동조하여 이를 논증한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논증을 통해 제일성질 또한 주관적이라고 주장하며 로크에게 등을 돌린다. 그는 어떤 관념도, 제일성질의 관념조차도 대상과 유사하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2-2. 대화가 전개되면서 유물론자인 하일라스는, 우리가 물질적 대상 자체가 아닌 오직 대상의 감각 가능한 성질들만을 지각한다는 로크의 전제를 의심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물체의 존재를 옹호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감각 가능한 것이라는 말을 통해 나는 오직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바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실상 감각은 자신이 직접 지각하는 바가 아닌 그 무엇도 지각하지 않는데, 감각은 추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BPW, 138)’ 물질적 대상은 추론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각되지는 않는다. 감각 가능한 대상은 사실상 감각 가능한 수많은 성질들에 지나지 않는데, 이런 성질들은 정신과 무관하다.

2-3. 대화에서 관념론자로 등장하는 필로누스는, 감각 가능한 성질들이 객관적이라는 하일라스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뜨거움이 주관적임을 보이는 로크의 논증으로 그를 반박한다. 뜨거움의 모든 정도는 감각을 통해 지각된다(그 정도가 높을수록 더 선명히 지각된다). 하지만 매우 높은 정도의 뜨거움은 동시에 큰 고통이다. 물질적 실체는 고통을 느낄 수 없으므로 매우 높은 정도의 뜨거움은 물질적 실체 안에 존재할 수 없다.

2-4. 이 논변은 오류로 가득 차 있는데 버클리는 이를 교묘히 숨긴다. 여러 논변에서 잘못된 진행은 하일라스의 말에 내재하는데, 필로누스는 단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만 한다. 필로누스가 “감각 가능한 것이 실재한다는 점은 지각을 통해 알게 되는지, 아니면 그것은 지각된다는 사실과 구별되는 무언가로서 정신과 아무 관련이 없는지”에 관해 묻자 하일라스는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과 지각된다는 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라고 답한다.

이제 뜨거움을 물리적 관점(힘의 한 형태로서의)이 아니라 지각 가능한 성질로 보고 이에 관해 논의한다고 가정해보자. 존재한다는 것과 지각된다는 것은 서로 별개라는 하일라스의 말은 옳다. 하지만 하일라스는 ‘지각된다는 사실과 구별된다는 점’과 ‘정신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을 동일시하는 필로누스의 등식을 받아들이면 안된다. 실제로 존재하는 성질이 현실적으로 지각되는 바와는 분명히 구별된다는 점을 강력히 밀고 나가야 한다.

2-5. (1) 필로누스가 “가장 격렬하고 강력한 정도의 뜨거움은 매우 큰 고통이 아닌가”라는 물음에 대해 하일라스는 그렇다고 답한다. (2) 이어서 필로누스는 “지각 능력이 없는 것에게는 쾌락이나 고통의 능력이 있을 수 있는가”를 묻자 하일라스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답한다. (3) 필로누스는 “자네(하일라스)가 말하는 물질적 실체는 감각 능력이 없는 존재라면 그 실체는 고통의 주체가 될 수 없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하일라스는 절대로 될 수 없다고 답한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 하일라스는 일종의 구별을 제시하며 대답해야만 했다. 즉 가장 강한 정도의 뜨거움이 큰 고통을 일으킨다는 점은 동의하지만, 뜨거움이 그 자체로 큰 고통이라는 점은 부정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서 또한 구별을 해야 한다. 즉 고통을 느낄 능력은 없지만 고통을 일으킬 능력은 있다 답해야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에서 그는 물질적 실체가 감각 능력이 없다는 점에 결코 동의하면 안된다. 바위는 감각 능력이 없지만 고양이는 그런 능력을 지닌다. 여기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바는 물질적 실체가 감각을 지닐 수 없다 주장하는 로크의 논변이다. 왜냐하면 물질적 실체도 감각을 지니기 때문이다.

2-6. 대화가 반쯤 진행되면 하일라스는 제이성질들이 정신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제일성질들은 물체 안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로크의 견해를 옹호하려 한다. 이에 필로누스는 로크가 제이성질의 객관성을 부정하면서 사용한 논변들이 제일성질의 객관성에 반대하는 주장을 펴는 것에 똑같이 사용될 수 있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2-7. 로크는 인간에게는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대상이 동물에게는 달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을 들어 냄새는 실재하는 속성이 아니라 주장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의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대상이, 이보다 더 작은 어떤 동물에게는 거대한 산처럼 보인다는 점을 들어 크기 또한 실재하는 속성이 아니라 주장할 수 있다. 어떤 동일한 대상이 가까이 있는 사람의 눈에는 크고 각진 것으로 보이지만 멀리 있는 사람의 눈에는 작고 둥글게 보인다는 점을 들어, 이 세계에 어떤 크기나 형태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2-8. 하일라스는 물질적 대상 자체를 지각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이 대상이 관념을 통해 지각된다고 하는 주장을 필로누스는 비웃었다. 실재하는 대상 자체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색을 띨 수 있는가? 따라서 그는 관념이 정신 외부의 그 어떤 것에 관한 그 어떤 정보라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주장을 옹호할 수 없게 된다.

2-9. 감각적 관념에 관해 언급한 바와 전통적으로 지성의 영역으로 여겨져 온 보편 관념에 관해 언급하는 버클리의 인식론은 반드시 검토해야 한다. 로크는 일반 관념을 형성하는 능력이 인간과 동물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동물들과 달리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관념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니는데, 주어를 분류하는 술어와 같은 일반적 단어들은 추상적 일반 관념에 대응된다. <<인간 지식 원리론>>에서 버클리는 로크의 추상화 이론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퍼붓는다. 버클리는 로크가 추상 관념을 “어떤 특정한 인간이 각각 특유하게 지닌 바를 나타내는 복합 관념은 제쳐두고, 오직 모두에게 공통되는 바만을 유지하여 인간에 대한 추상 관념을 형성한 후 모든 개별적 인간들이 이에 포함된다”고 생각했다고 보았다.

2-10. 버클리는 이를 불합리한 생각으로 일축한다. ‘나 자신이 형성하는 인간의 관념에는 백색 또는 황갈색 등의 피부색 등이 똑바르거나 아니면 크거나 작거나 등이 반드시 포함된다. 나는 그 어떤 노력을 기울여 생각을 해 보아도 추상 관념을 떠올릴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명백한 오류를 저지른다. ‘관념’이라는 용어가 개념을 의미한다면, ‘인간’의 개념이 피부색이나 신장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 개념을 소유한 사람은 누구나 이 사실을 안다. 이 대목에서 버클리는 관념을 일종의 심상으로 여기는 듯한데, 설령 그렇다 해도 여전히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정신적 심상은 심상의 대상이 지닌 모든 속성을 포함할 필요는 없다.

2-11. 한 대목에서 로크는 삼각형에 대한 일반 관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순전히 허튼소리라는 버클리의 지적은 옳다. 하지만 그는 어떤 종류의 심상을 지니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개념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는 식으로 로크를 공격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로크의 언어 이론에서 잘못된 바는 바로 이 점이며, 그가 잘못된 심상을 선택했거나 심상을 자기모순적인 용어로 서술한 점이 결코 아니다.

2-12. X를 반영하는 심상이나 형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X의 개념을 미리 지녀야 한다. 심상은 자신이 반영하는 바를 규정하는 그 무엇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참나무 잎에 대한 심상은 참나무 잎을 그린 그림과 마찬가지로 잎이나 참나무, 나무 일반, 보이 스카우트 활동, 군대 계급을 비롯한 많은 것들을 반영할 수 있다. 그리고 개념은 단지 심상에서 구체적 특성들을 제거한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또한 결코 심상으로부터 명확하게 도출될 수 없는 다른 개념들도 있는데, 수학적 개념이 그런 예이다.

2-13. 로크에 반대하여 언어에 숙달하는 일과 추상적 일반 관념을 지니는 일을 분리한 버클리의 생각은 옳았다. 하지만 정신적 심상이 언어의 핵심 요소라는 생각은 유지했다. 그는 일반 명사가 하나의 추상적인 심상이 아니라 ‘수많은 특수한 심상들을 서로 구별 없이’ 지시한다고 여겼다. 심상이 사고의 핵심이 아님은 삽화가 책의 핵심이 아님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심상이 개념을 지닌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개념이 심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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