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의 회의주의부터 데카르트 대응까지

1-1. 16세기에 접어들면서 회의주의를 새로 유행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등장했다. 유럽에서 서로 다른 기독교 교파가 충돌하고,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지닌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 또한 이 사실을 인지한 몇몇 사상가들은 진리를 주장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신념 체계가 존재하는 지 의문을 품었다. 또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를 비롯한 고대 회의주의자들의 저술이 발견 되면서 인간 인식 능력의 신뢰 가능성에 대한 논증이 주목되었다. 몽테뉴의 <<레몽 세봉을 위한 변명>>은 회의주의를 가장 세련된 형태로 드러낸 저술 중 하나다.

1-2.  몽테뉴는 극단적 회의주의를 선호했다.  아무 것도 인식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편 회의주의의 창시자 피론의 이름을 딴 ‘피론주의적 회의주의’를 선호했다. 몽테뉴는 감각과 지성의 오류 가능성을 보이기 위해 많은 예를 들었다. 주로 섹스투스의 저술을 인용했고, 논증을 진행하면서는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이용했다.  몽테뉴는 섹스투스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오류 가능성을 보이는 데 스토아학파의 논증을 사용하고, 경험과 무관한 지식의 불가능성을 보이는데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논증을 사용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두 학파 모두의 논증을 부정하고, 진정한 지식 따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3. 몽테뉴는 “귀가 눈에게 판결을 내릴 수 있는가? 촉감이 귀에게, 맛이 촉감에게 거짓말했다는 판결을 내릴 수 있는가?” 라는 루크레티우스의 유명한 대목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몽테뉴는 루크레티우스와 달리 감각들이 오류에 빠져 있다는 결론에 까지 나아가진 않는다. 그는 감각이 참을 전한다는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도 똑같이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 ME2. 253)감각과 이성은 서로 협력해 지식을 산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각각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한편 우리의 의지에 속하는 정념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지각하는 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어떤 기준이란 것이 필요한데, 그런 기준은 성립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몽테뉴는 고대의 회의주의가 축적한 업적에 몇몇 새로운 자료를 더한 것이다.

2-1.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철학을 16세기에 전개된 회의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다. 그는 우선 ‘제일성찰’에서 몽테뉴보다 정돈된 형태의 논증을 제시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내가 지금까지 진정으로 참이라고… 중략… 불 옆에 앉아 있다고 굳게 믿은 것이 어디 한 두번이던가! (AT 7.19; CSMK 2.13) “내가 지금 꿈꾸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래서 내가 눈을 뜨고 있다는 점, 머리를 움직여 본다는 점… 중략… 따라서 최소한 일반적인 종류의 사물들, 눈, 머리, 손, 신체 등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대상이어야만 한다. (AT 7.20; CSMK 2.14)  그는 꿈을 꾸는 대상들도 결국 상상이 만들어 낸 복합체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는 이런 물체를 구성하는 더욱 단순한 구성요소들 – 즉 연장성, 형태, 크기, 수, 장소, 시간 등- 은 반드시 실재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만일 그렇다면 이런 대상들을 다루는 산술학과 기하학은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며, ‘내가 잠자든 깨어있든 간에 둘에 셋을 더하면 다섯이며, 사각형에는 네 변이 있다. 이런 명백한 진리를 거짓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한 듯이 보인다.’ 는 논증을 펼쳤다.

2-2 그러나 수학도 데카르트의 회의 대상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이는 수학도 일종의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진리의 근원이 되는 최고로 선한 신이 아니라 최고로 강력하고 교활한 악령이 존재하며 … 중략…  단지 이런 것들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존재로 여기려 한다. (AT 7.23; CSMK 2.15) 데카르트는 ‘제이성찰’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논증, 즉 그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명한 논증에 도달함으로써 이런 회의를 끝낸다. 설령 아무리 전능한 악령일지라도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고 생각하도록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떠받치는 확고한 기초다. 언뜻 타당한 듯 보이는 논증이다. 그렇다면 이 논증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이에 대해 회의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생각하는 것이므로 ‘나는 생각한다’는 회의 할 수 없는 전제라고 답했다.

2-3 심각한 문제는 ‘나는 생각한다’에서 등장하는 ‘나’에 관련된 것이다. 일인칭 대명사는 그 대명사를 발언하는 사람의 육체와 연결되어 그 의미를 얻게 된다. 자신에게 육체가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회의하는 사람이 독백을 하면서 ‘나’ 라는 개념을 사용할 자격을 지니는가? 에 대한 문제다. 어쩌면 데카르트는 ‘사고가 계속된다.’ 라고 말할 자격 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이와 유사한 의문으로는 ‘나’와 관련된 ‘존재가 계속된다’이다. 비판자들은 회의 중인 데카르트에게는 지속적인 실체로서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이는 데카르트 자신의 표현을 빌리더라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라는 인간 전체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점. 그 자체로 그것은 오직 그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점을 증명할 뿐이라는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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