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

 <<백과전서>>에서 음악과 관련되는 몇몇 항목의 글을 섯던 인물은 훨씬 더 멀리까지 나아가려 했는데 그가 바로 루소다. 1712년 제네바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고 칼뱅주의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16세때 도제 일을 하다 도망쳐 토리노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는 바랑 남작부인의 권유로 이루어졌는데 그와 1729년부터 1740년까지 살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루소는 달랑베르나 볼테르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750년 예술과 과학의 진보가 도덕에 유익한 결과를 낳았는지 묻는 현상 응모에 부정적인 논문을 써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에 확장해 4년후 <<인간불평등기원론>>을 발표했다. 두 저술의 주제는 인간성은 원래 선하지만 사회 제도 때문에 타락한다는 것이다. 루소는 ‘고상한 원시인’이 바람직한 인간상이라 주장했고 이는 과학적, 사회적 진보를 신봉하는 백과전서파 철학자들과 대치되는 것이었다. 볼테르는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인류에 반하는 책이라 하였다.
 루소는 세탁소 여종업원 테레즈 르바쇠르와 오랫동안 생활하며 당시 사회적 관행을 경멸하는 모습을 보였다. 루소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이들을 차례로 고아원에 맡겼다. 루소는 1754년 제네바로 돌아와 시민권을 얻기 위해 칼뱅교도로 다시 개종하기도 했다. 볼테르 역시 제네바에 정착했지만 두 철학자는 서로 좋은 이웃이 되지 못했다. 1756년 루소가 출간한 <<섭리에 관한 편지>>는 이를 증명하는 사례였다. 또한 1761년 <<도덕에관한편지>>를 출간하며 백과전서파 철학자들과 완전 결별했다.
프랑스의 작은 시골마을에 은거한 1758년부터 1761년은 루소에게 매우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는 소설 <<신 엘로이즈>>를 썼는데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다. 또한 두 권의 철학 저술도 썼는데 그중하나는 교육철학 <<에밀>.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철학을 다룬 <<사회계약론>>이다. <<사회계약론>>은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는 유명한 말로 시작된다. 두 저술은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주장 때문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파리와 제네바 모두에서 루소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됐고 루소는 스위스로 피신했다. 그러던 중 흄의 호의로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의 배은망덕한 태도 때문에 흄은 그에게 등을 돌렸고, 말년에 이르러 파리로 돌아와 생을 보냈다. 이 시기에 가장 큰 업적중 하나인 <<고백론>>을 써냈다. 출판은 사후에 되었다.
 1778년은 볼테르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하다.  만년에 접어들며 루소의 저술은 반기독교적 경향이 심해졌다. 평생의 논적이었던 루소와 볼테르는 프랑스의 위대한 인물들이 묻히는 파리의 팡테옹 지하 묘지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루소는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프랑스 및 유럽을 휩쓴 혁명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 받는다. <<프랑스혁명>>의 저자 칼라일은 ‘전에 루소라고 불린 인물이 있었다. 그가 쓴 책은 이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책 재판은 초판을 비웃었던 사람들의 가죽으로 장정되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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