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

1. 시대적 배경

아담 스미스와 리드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로 알려진 사상적 흐름을 대표하는 두 인물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진정한 원류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프랑스라 여기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18세기에 일어났으며 이 시기의 유럽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무지와 미신으로 어두워진 세계에 대하여 이성의 빛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 했다. 프랑스 계몽주의는 1750년~1760년대에 정점을 이루었으며 <<백과전서, 또는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사건>>이 출판되어 계몽주의의 활성화를 도왔다.

2. 계몽주의 사상가들

<<백과전서, 또는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사건>>은 디드로와 달랑베르에 의해 편집되었지만 이 책의 출판에는 많은 수의 프랑스 사상가들의 토대를 쌓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러한 프랑스 사상가들에는 벨과 몽테스키외, 볼테르, <<인간기계론>>의 라메트리, 무신론자 바크, 결정론을 지지한 엘베시우스 등이 있다. 물론 이중 1706년에 죽은 벨은 <<백과전서>>에 직접적인 집필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벨은 <<역사와 비판 사전>>이라는 저술을 출판하였으며 이 저술에서 그는 성서와 역사의 탐구로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에 모순점과 부조화에 대하여 밝혔다. 그의 도덕 사상에 대한 견해도한 드러나는데 오직 관용을 통해서만 종교적 신앙이 드러나며 윤리적 가르침과 종교적 교훈이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벨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반박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라이프니츠가 있다. 그럼에도 그(벨)의 종교적 권위에 대한 부정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계몽주의 사상가 중 몽테스키외는 계몽주의의 긍정적인 요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법의 정신>>이란 저술을 출판했으며 이 저술에서 역사적 사회학적 지식에 기초하여 국가의 본질에 관한 이론을 구성했다. 그는 영국에 정치 체제에 대하여 칭찬했으며 이러한 영국에 대한 열정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도 이어졌다.

볼테르는 몽테스키외의 영국에 대한 열정이 이어진 계몽주의 철학자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최초 철학 저술인 <<철학 서간>>에서 영국의 정치 제도와 교회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칭찬하였고 나아가 영국의 관용적 태도를 진심으로 칭찬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영국의 철학자인 로크에 대해서도 근대 초기의 낭만주의적 공상에서 벗어나 영혼을 설명한 최초의 철학자라 평했다. 게다가 <<백과전서>>를 만들려는 생각은 영국의 체임버스라는 인물이 출판한 <<백과사전 또는 예술과 과학에 대한 보편적인 사전>>에 영향을 받았다.

<<백과전서>>의 두 편집자 중 하나인 달랑베르는 수학자로서 유체 역학을 다룬 독창적 저술을 남겼으며 산술학과 기하학의 확실성과 정확성을 모든 학문에 확산하려 노력하였다. 그는 하나의 통일 과학이라는 이상을 제시한 초기 인물로 <<백과전서>> 서문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디드로는 세계 안에 신의 설계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드러낸 <<맹인에 관한 편지>>라는 저술 때문에 상당 기간 동안 감옥에서 지내었다.

이 두 사람은 과학적 진보를 피할 수 없다는 믿음, 기독교가 인간의 삶 향상에 큰 방해물이 된다는 생각, 인간 본성에 대한 유물론적 입장을 지지 하였다.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는 <<백과전서>>의 다른 집필진들도 동의하였다.

3.계몽주의 철학자들에 대한 평가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모두 반성직주의자였지만 모두 무신론자는 아니었는데 대표적으로 볼테르가 있다. 볼테르는 자신의 저술인 <<철학 사전>>에서 무신론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는데 대표적인 대목으로는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발명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덕 법칙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가 있다. 그러나 그는 세계를 자유롭게 창조한 신의 존재는 믿지 않으며 세계는 신의 현존이 낳은 필연적이고 영원한 결과라 설명한다. 볼테르와 같이 이러한 유형의 신을 믿는 이들을 ‘이신론자’라 하였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반드시 급진적이거나 민주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생각하는 자유의 개념은 영국의 명예혁명(1688)에 등장한 개념과 유사하며 이들이 가장 중요시한 자유는 표현의 자유였다. 그리고 이들은 모국에서 정부의 권력남용에 대하여 저항하였지만 원리상의 귀족정치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았으며 어떤 근본적인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지 않았고 일반인의 권리 획득에 대하여 달갑지 않게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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