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1. 생애와 사상적 배경

1-1 다른 한편으로 데카르트의 사상을 대담한 방식으로 발전시킨 유대인 철학자가 네덜란드에 있었다. 1632년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스피노자는 어린 시절부터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알았다. 반 덴 엔덴은 기독교도 의사였는데 스피노자에게 라틴어를 가르쳤고 데카르트의 저술을 소개함으로써 스피노자의 사상 발전에 큰 영항을 미쳤다.

1-2 스피노자는 유대교 신학에 대하여 10대 후반부터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성년이 되면서 유대교의 관습을 대부분 거부했다. 1656년 그는 유대교 공동체에서 파문당했고 렌즈를 깎는 기술을 배워 여러 광학 기구들을 제작했다. 이를 직업으로 삼음으로써 그는 사색과 연구를 할 시간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1-3 이 당시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을 쓰기 시작 했다. 이 책은 지성의 개선을 주제로 지적인 전환을 상세히 설명하고 탐구의 과정을 밝히는 것이 《방법서설》과 유사하다. 그러나 완성되지 못한 채 그가 죽은 후에야 출판되었다.

1-4 1663년 한 학생에게 데카르트의 철학을 가르치고 친구였던 레이덴 대학 메이어 박사의 요청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를 ‘기하학적 형식’으로 진지하게 해설한 저술을 출판했다. 《철학의 원리》 중 처음 두 권을 완벽하게 정리한 후 여기에 자신의 주석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이 저술을 구성했다.

1-5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제시한 일련의 정의와 공리들을 이어받은 후 이를 확장하여 모두 58개의 정리를 증명했다. 데카르트의 정의와 공리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은 대체로 《철학의 원리》에 등장하는 내용을 따른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저술에 대한 서문을 쓴 메이어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견해와 데카르트의 견해가 모든면에서 일치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1-6 1670년 익명으로 《신학정치론》이라는 저술이 출판되었다. 이 저술은 사실 스피노자가 1665년 자신이 유대교를 떠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해명을 쓰기로 결정한 것이, 점점 확대되어 성서 비평과 정치 이론을 포함한 저술이 된 것이다. 스피노자는 성서 원전을 상세히 검토한 후 히브리어 성서는 그 보다 더 오래된 자료를 편집한 것이며, 아무리 올라가도 기원전 5세기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1-7 《신학정치론》은 세심한 논증과 고상한 표현을 통하여 문학의 한 유형으로서의 성서 비평을 주목하게 만든 훌륭한 저술이다. 하지만 이 저술은 구약성서에 대한 개방적인 해석으로 인해 유대교도는 물론 네덜란드의 칼뱅주의자들까지 이에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몇몇 교회 회의에서는 금서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다른 동시대인들은 이 책을 크게 칭찬했으며 스피노자가 이 책의 저자인 것이 알려지면서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67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 교수직을 제안 받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1. 사상

2-1 스피노자는 어떤 학문적인 지위도 맡지 않았고, 결혼하지도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평온한 삶을 살면서 묵묵히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논증된 에티카》를 쓰는 일을 계속했다. 1675년 이를 완성했지만 이 책을 출판하게 되면 무신론자로 몰려 처형당할지도 모른다는 친구들의 경고로 인해 출판하지 않고 다른 책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1677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티카》, 《정치론》등을 비롯한 그의 유작들은 한데 묶여 출판되었지만 채 일 년도 못되어 네덜란드에서 금서가 되었다,

2-2 《에티카》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체계를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바탕으로 설명한 저술이다.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제목은 ‘신에 관하여’, ‘정신의 기원 및 본성에 관하여’, ‘정서의 본성 및 기원에 관하여’, ‘인간의 굴레에 관하여’, ‘인간의 자유에 관하여’ 이다. 각 부는 일련의 정의와 공리로부터 출발해 다양한 정리들에 대한 형식적 증명으로 이어지고, 각각의 정리에는 정의와 공리로부터 도출되지 않은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기하학적인 방법이 스피노자의 체계를 제시하는데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증명들이 자주 결론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2-3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자신의 철학을 투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가정도 숨기지 않으며 오로지 한 정리에서 다음 정리로 나아가는 논리적 연결점만을 보이려 한다. 또한 기초적인 기하학의 개념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세계 전체를 설명하려 한다. 이 설명이 실패하더라도 이는 철학자의 잘못이기 보다는 철학 본질 자체의 잘못 때문이다.

2-4 《에티카》는 윤리학 외에도 많은 주제들을 다룬다. 1부에는 형이상학 뿐 아니라 자연신학도 등장한다. 실체의 본성을 설명하면서 신의 현존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도 제시한다. 데카르트는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 즉 두 종류의 기본적인 실체를 인정했지만 스피노자는 오직 한 종류의 실체만을 인정한다. 이는 사고라는 속성과 연장성이라는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결국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에티카》의 2부에서 설명하듯 정신은 사고라는 속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이며, 육체는 연장성이라는 속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이다. 결국 정신과 육체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를 기초로 스피노자는 세 단계의 지식, 즉 표상지, 이성지, 직관지가 존재한다는 인식론을 형성한다.

2-5 《에티카》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윤리적 논의는 3부에서부터 등장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현존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자신을 파괴하려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저항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런 충동에 대한 의식이 인간에게 욕구로 드러나는데 이 충동이 자유로울 때 쾌락을 느끼고 방해받을 때 고통을 느낀다고 보았다. 인간의 복합적인 정서들은 쾌락과 고통으로부터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도 욕구와 혐오에 의해 규정된다.

2-6 하지만 《에티카》의 마지막 두 부에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극단적인 정념에 의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정념을 지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능동적 정서와 수동적 정서 사이의 구별이다. 두려움, 분노와 같은 수동적 정서는 외부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 반면에 능동적 정서는 정신이 처한 상황을 스스로 파악함으로써 등장한다. 우리가 수동적 정서에 대한 명석, 판명함 관념을 지니면 정서는 능동적으로 바뀌는데, 수동적 정서를 능동적 정서로 대체하는 것이 바로 정서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한다.

2-7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의 필연성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도덕적 해방에 이른다. 다른 사람의 행위가 그의 본성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그들에 대한 증오를 멈추게 된다. 우리는 신과 같은 관점을 택해 모든 것들이 이루는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체계를 ‘영원한 모습에 비추어’ 바라보아야 한다.

2-8 스피노자의 독특한 체계는 철학사의 흐름에 따라 몇몇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로크의 이론과 관련되는 것으로 스피노자의 실체이론을 이해할 수 있다. 로크와 스피노자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실체 개념을 제거하려 했다. 반면에 그를 데카르트와 비교하는 관점을 택하면 데카르트의 가정이 암시하는 바를 명확하게 이끌어 냄으로써 스피노자는 신이 이 세계 안에서 유일한 행위자라는 결론에 이른 말브랑슈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이보다 더 나아가 신이 유일한 실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2-9 철학에서 17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란이 일어난 시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스콜라철학의 특징은 일종의 구별을 도입하고 인간과 물질세계를 설명할 때 이 구별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보이는 개념 쌍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는 이런 모든 규별을 무너뜨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란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 스피노자의 체계는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스피노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점에서 만나기도 한다.

2-10 스피노자의 철학은 자주 합리론을 지나치게 확장한 형태의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가 자신의 체계를 유클리드의 용어를 사용하여 기하학적으로 제시한 까닭은 다양한 주제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서 일뿐 아니라 논리적 연속성이 세계 전체에 작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극단적인 합리론의 체계는 이후 낭만주의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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