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

1. 홉스

1-1. 1641년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고 평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인물 중에는 당대 최고의 영국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도 포함되었다. 홉스는 영국 함대가 스페인의 무적함대(Spanish Armada)를 격파한 1588년에 태어났기에 이런 요청을 받을 때는 53세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후 캐번디시 가문의 가정교사와 베이컨의 서기로 일했다. 1629년 투키디데스(Thucydides)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데카르트 친구인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메르센 신부는 그를 ‘철학의 모든 분야에 능통한 탁월한 학자’라고 기록했다. 1640년 홉스는 《자연법과 정치적인 법의 기초》를 영어로 출판하면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이 구성한 사회에 대한 그의 핵심적인 철학 원리들을 잘 드러냈다. 그 해 그는 장기 의회(Long Parliament)의 활동으로 내전을 예상하고 파리로 도피해 10년 이상 그곳에서 후에 왕위에 오르는 찰스 2세의 개인 교사로 지냈다. 그 동안 그는 《시민론》를 출판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상당한 명성을 그에게 안겨다주었다.

1-2.데카르트에 대한 홉스의 평가를 보면 홉스가 《성찰》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음이 드러난다. 이 두 철학자는 전통적으로 서로 정반대되는 철학의 양극단에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사실상 이 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예를 들어, 이 둘은 모두 수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홉스는 데카르트의 해석 기하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에 대해 ‘정합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묘하게도 말년에 홉스는 기하학 연구에 진지하게 몰두하며 옥스퍼드 수학 교수들과 몇 년 동안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외에도 데카르트와 홉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를 경멸했고 당시의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판을 치는 현실을 비난했다. 또한 둘은 한창 때를 망명 생활로 보냈으며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둘 다 스튜어트 왕가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이들은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을 경멸하며 모국어로 글쓰는 능력이 탁월해 전문 학술서뿐만 아니라 대중을 위한 책도 썼다.

이 두 철학자가 서로 일치된 의견을 보인,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논점은 이들이 각각 물질세계는 오직 운동의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확신한 점이다. 홉스는 ‘일반적인 사물의 원인은 저절로 드러나거나 아니면 사물의 본성을 통해 알려진다. 따라서 어떤 방법도 전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물은 모두 오직 하나의 보편적인 원인, 바로 운동이라는 원인을 갖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홉스는 데카르트와 같이 색과 소리 같은 제이성질과 같은 모든 우연적 속성들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점을 부정하며 광학이 감각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데 같은 의견을 보인다.

1-3.홉스는 데카르트의 철학의 절반, 즉 물체에 관한 철학과는 상당히 유사한 견해를 보이지만 나머지 절반, 즉 정신에 관한 철학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사실 홉스는 데카르트가 생각한 의미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홉스는 연장성을 지니지 않고 운동하지 않는 비물질적인 실체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천사든 신이든 비물질적인 정신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홉스의 유물론에 대해 신의 존재를 그가 어떻게 여겼는지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인간이 정신과 물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된다는 이원론을 확실하게 거부했다는 점이다.

데카르와 홉스는 수많은 철학적 태도와 선입견들을 서로 공유했지만 홉스는 유물론을 선택함으로써 데카르트에 반대하는 대표적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유물론과 이원론이라는 형이상학적 차이에 더하여 철학사가들은 이 둘을 인식론에서 반대되는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의 창시자로 여긴다. 사실 이 두 학파의 차이는 표면상 드러나는 것만큼 크지 않다.

1-4. 홉스는 데카르트보다 거의 30년을 더 살았지만 1650년 데카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프랑스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파리에서 신교도로 사는 것과 그를 구교도로 개종시키려는 메르센의 시도에 큰 불편함을 느꼈다. 또한 큰 병을 앓으면서 영국 성공회이ㅡ 의식에 따르겠다고 고집하기도 하면서 파리 마지막 해에 철학사에 영원히 남게 될 《리바이어던 또는 교회 국가 및 시민 국가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권력》을 썼다.

어떤 국가 조직도 없는 자연 상태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이런 자연 상태는 오직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에 지나지 않음을 보임으로써 홉스는 사람들이 합리적인 자기이익의 원리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무제한의 자유를 포기하고 결국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부과되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제한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자기 이익의 원리에 따라 사람들은 자기방어의 권리를 제외한 다른 권리들을 중앙의 권력에게 양도함으로써 이 권력이 처벌을 통하여 법률을 강요할 수 있도록 만든다. 여기서 맺은 사람들이 맺은 계약을 통해 최고 통치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계약에 참가하지 않으므로 위반할 계약 자체가 없다. 이런 통치자는 법률과 재산권의 근원이 되며, 국가를 구성하기 위한 최초의 계약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서로 맺은 개별적인 계약을 지키도록 강제한다.

1-5.《리바이어던》은 1651년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이 저술에는 절대 왕정을 세련되게 지지하고 있지만 당시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찰스 2세는 이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당시 찰스 2세가 궁정에서 추방당하고 홉스의 구교도 친구들도 세상을 떠나자 그는 영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영국은 찰스 1세의 처형 이후 호국경(Protector) 크롬웰(Oliver Cromwell)의 통치 아래 있었다.

크롬웰의 통치 기간 동안 홉스는 조용히 런던에 머물면서 정치철학에 관한 어떠한 저술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홉스는 자연철학에 관한《물체론》을 1655년 라틴어, 1656년 영어로 출판하고 밀턴의 《실낙원》에 등장하는 구절에 대해 브램홀 주교(Bishop Bramhall of Derry)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658년 홉스는 《인간론》을 라틴어로 출판했는데 이 또한 《시민론》과 마찬가지로 《법의 기초》에 등장했던 몇몇 사상들을 영어권 외부의 독자를 위해 다시 쓴 것이었다.

홉스는 1660년 찰스 2세가 영국으로 돌아와 왕위에 복귀하면서 궁정의 환영과 연금을 받게되었지만 다른 신하들로부터는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리바이어던》은 심각한 의혹의 대상이 되어 몇몇 주교들이 그를 이교도의 죄를 물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다.

1660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홉스는 런던과 체츠워스(Chatsworth), 하드윅(Hardwick) 등지의 데번셔(Devonshire) 백작 가문의 저택에 주로 머물렀다. 그는 더 이상 철학에 관한 저술을 쓰지 않고 《일리아스》《오디세이》번역에 몰두하면서 《베헤못》이라는 영국 내전의 역사에 관한 저술을 출판하려했지만 왕의 만류로 포기했다. 그는 1679년 91세의 나이로 하드윅 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말년에 파킨슨병에 걸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기찬 삶을 유지했다고 한다.

1-6. 홉스가 철학사에서 명성이 높은 까닭은 주로 그가 정치철학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언어철학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언어는 우리를 야수와 구별해주며, 학문을 추구할 수 있게 한다고 역설한다. 언어의 목적은 우리의 사고 과정을 연속된 단어로 바꾸는 것인데, 언어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첫째, 과거와 현재 모든 것들의 원인, 결과를 기록하는데 사용한다. 둘째, 얻은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상의하며 가르치는데 사용된다. 셋째, 우리의 의도와 목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 서로 도울 수 있게 사용되며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데 사용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언어의 네 가지 효용과 대비되는 네 가지 악용의 사례도 있는데 이런 악용을 피하려면 대단한 수고가 필요하다. ‘언어는 마치 돈과 같다. 현명한 사람들은 오직 계산을 할 때만 이를 적절히 사용하지만 바보들은 이를 무턱대고 써버린다’

홉스는 철저한 보편명목론자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단어들은 이름뿐인데 이름은 오직 개체들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름이 어떤 형태를 취하던 간에 그것은 하나 또는 다수의 개체 이외의 어떤 것도 결코 지시할 수 없다. ‘인간’과 같은 보편적인 이름은 세계 안의 어떤 보편적인 사물이나 우리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체들을 지시할 뿐이다. ‘이 세계에서 이름을 제외하면 보편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이름은 그것에 속하는 모든 개별적인 개체들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홉스는 이름들이 한데 모여 문장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만일 ‘소크라테스는 정의롭다’라고 말하면 여기서 ‘정의롭다’와 ‘소크라테스’와의 관계는 이 단어의 관계와 동일하다. 또한 문장 안에서 두 이름이 모두 동일한 것을 지시할 경우 그 문장은 참이 되는 반면 두 이름이 동일한 것을 지시하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

홉스의 두 이름 이론은 소박한 형태의 의미론에 해당하지만 이에 대하여 이미 중세부터 등장했고 특히 19세기 프레게(Gottlob Frege)의 저술을 통해서 제기된 심각한 논리적 비판을 견디지 못했다. 홉스식의 이론은 중세의 오컴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미숙했지만 그의 이론은 영국 경험론자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그들 자신이 오컴과 홉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2.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

2-1.  17세기 중반 홉스 및 데카르트와 다른 견해를 보이는 여섯 명의 영국철학자들이 등장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커드워스(Ralph Cudworth, 1617~88)를 비롯한 다섯 명은 케임브리지의 엠마누엘 칼리지를 졸업했으며, 다른 한명인 모어(Henry More, 1614~87)는 크라이스트 칼리지를 졸업했는데 커드워스는 이 칼리지에서 30년 동안 교수생활을 하기도 했다. 추종자들은 이 들을 존경, 찬양하며 이 그룹을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케임브리지 출신이었지만 당시 영국 내전 동안 케임브리지 지역과 대학을 지배했던 청교도주의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이들은 칼뱅의 예정은총설을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이 지닌 장점을 주장했다. 하지만 무신론자에게까지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는데 특히 이들은 홉스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홉스의 유물론이 결국 무신론에 이르리라고 본 것이다. 또한 이들은 찰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 성공회를 중심으로한 계층 질서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했으며 결국 찰스 1세의 퇴위와 처형으로 이어지게 했다. 그들은 ‘주교 없이는 왕도 없다’는 정치 구호를 ‘정신 없이는 신도 없다’고 외치면서 유물론자인 동시에 유신론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데카르트 편에 서서 홉스에 반대하는 특히 정신과 물체의 구별을 강조했다. 모어의《무신론에 대한 해독제》《영혼의 불멸성》, 커드워스의《우주의 진정하한 지적 체계》 등의 저술을 통해 이들이 인간 영혼의 불멸성과 정신적인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데 얼마나 몰두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모어는 인간이 ‘감각과 이성 그리고 지상의 여러 가지를 인간에게 적합하게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정신적인 피조물’이라고 보았고 커드워스는  우리 안에 신의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현존이 증명된다고 주장한다. 신의 관념은 일관성을 지니고 실제적이거나 실재를 필요로하기 때문에 신은 반드시 현존한다는 것이다.

2-2.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본유 관념의 존재를 믿었다. 이들에 따르면 정신은 텅 빈 백지가 아니라 닫혀있는 책과 같다. 감각은 단지 이 책을 여는 역할을 할 뿐이다. 모어는 정신 안에 다양한 본유관념이 들어있다고 보았는데 이 중에는 근본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도덕원리들도 포함되어있다. 커드워스는 정의와 불의가 단지 인간이 맺은 계약의 결과로 등장한다는 홉스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의 삶과 죽음의 권한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를 통치자에게 양도할 법 따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근본적인 도덕 원리들의 근거를 설명하면서 데카르트와 의견을 달리한다. 커드워스는 도덕을 비롯한 다른 영원한 진리들이 신의 전능한 의지에 의존하기에 원리상 변화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덕과 신성함은 신이 이들을 사랑하여 선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선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오직 그 자체로 선하기 때문에 신은 이들을 사랑할 뿐이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물체의 세계에 대한 데카르트의 설명을 접한 후 그와 더욱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과학의 새로운 발전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현상을 기계론적인 운동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부했다. 이들은 데카르트와 달리 동물도 의식과 감각적 영혼을 지닌다고 믿었으며 심지어 낙하 운동을 설명할 때에도 비물질적인 원리의 작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신이 모든 것을 직접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신이 물리적 세계에 일종의 매개체로서 규칙적이고 목적론적으로 작용하는, 세계 영혼과 유사한 ‘균형 잡힌 세계를 형성하는’ 임무를 맡겼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데카르트와 같이 목적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기계론적인 유신론자’에 지나지 않고 홉스같은 유물론자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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