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종교 개혁의 철학

1-1. 이성을 배제하고 계시를 높이 평가한 몽테뉴의 태도가 반종교 개혁주의자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아담이 지은 죄에 의해서 완전히 타락했다는 루터의 주장에 반대하여 가톨릭 진영의 논쟁가들은 기본적인 종교적 진리가 다른 도움을 받지 않은 인간 지성의 영역 안에 속하며, 신앙 자체도 이성의 지지와 옹호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1-2. 반종교 개혁적인 공격의 선봉에 선 것은 새로 형성된 예수회(Society of Jesus)에 속한 수사들이었다. 모든 교단의 구성원들이 서약한 청빈과 정결, 순종에 더하여 예수회 사사들은 교황에 대한 절대 충성을 맹세했고 곧 세계 각지에서 교육과 선교 사업에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예수회는 새롭고, 스스로 더욱 발전된 형태로 여긴 스콜라 철학을 전개했다.

 

1-3.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이나 롬바르드(Peter Lombard)의 ≪신학명제집≫과 같은 표준적인 원전에 기초한 강의를 진행한 반면 예수회 학자들은 대학에서 독자적인 철학과 신학 강의를 시작했다. 17세기 초에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도미니크 수도회 학자들도 이런 강의 방식을 채택했고 이는 철학과 신학이 이전보다 더욱 뚜렷하게 구별되는 결과를 낳았다.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소속 학자 수아레스(Francisco Suarez)는 대학 강의에서 독자적인 교과서를 사용함으로써 철학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의 선구자로 그가 쓴 ≪형이상학 논쟁≫(Disputationes Metaphysicae, 1597)은 스콜라 철학의 형이상학을 체계적으로 다룬 최초의 저술이었다.

 

1-4. 수아레스는 1564년 예수회에 가입했으며, 평생 대학교수로 지냈다. 그는 신앙심 깊은 박학한 인물로서 순전히 지적인 능력으로만 본다면 충분히 16세기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그는 철학사에서 자신의 재능에 걸맞은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그의 저술은 대부분 중세의 주제들을 다시 언급하면서 세련되게 재구성한 수준에 그치며 어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지는 못했다. 둘째, 저술가로서 그는 무려 28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지만 그의 저술은 상당히 지루하고 장황하다.

 

1-5. 하지만 사실상 그는 형이상학과 정치철학의 두 영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아퀴나스를 진심으로 존경했지만 형이상학적 측면에서는 아퀴나스보다 이븐 시나(Avicenna)와 스코투스(Duns Scotus)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17, 18, 19세기에 걸쳐 토마스주의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퀴나스의 저술 ≪반이교도대전≫에 등장하는 내용보다는 수아레스의 형이상학에 더욱 가까웠다. 1621년에 출판된 ≪법에 관하여≫(De Legibus)는 정치철학에 크게 기여한 책이다. 여기에는 그보다 훨씬 널리 알려진 철학자들의 사상으로 전해지는 많은 사상의 원천이 등장하지만 이런 사실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았다.

 

1-6. 16세기에 구교와 신교 진영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철학적 주제는 인간의 자유 의지 문제였다. 이 문제는 트렌토 공의회에서 루터의 결정론과 칼뱅의 예정은총설에 반대한다는 선언이 이루어지면서 심화되었다. 예수회 학자들은 자신들이 인간의 자유를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선봉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수아레스와 그의 예수회 동료인 몰리나(Luis de Molina)는 자유로운 행위를 행위 과정에서 여러 대안들을 활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정의했고 이런 정의는 인간 자신의 선택과 이것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져야 하는 책임을 제대로 인정한다. 하지만 자유를 더욱 제한적인 것으로 보는 다른 설명과 비교해 보면 이런 정의는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미리 아는 신의 예지를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신의 예지는 구교와 신교가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몰리나는 널리 알려진 저술 ≪조화≫(Concordia)에서 이 문제에 대한 독창적이고 정교한 해법을 제시하지만 신교도뿐만 아니라 동료 구교도 사이에서도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학자이자 토마스주의자였던 바네스(Domingo Banez, 1528~1604)는 예수회 신학자들이 인간의 자유를 과대평가함으로써 신의 권능을 훼손한다고 생각했다. 두 교단 사이의 논쟁이 격화되자 1605년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양측 모두 침묵할 것을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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