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와 양심

 

1-1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은 16세기 전반과 그 이후까지 계속되면서 여러 학자들이 자유의지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통해 다양한 새로운 문제들을 낳았다. 이 논쟁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루터다. 루터는 중세 말 스콜라 철학에서 강하게 등장했던 성향을 이어받아 스콜라주의를 비롯한 철학 자체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은총에 맞서는 최악의 적’ 으로 규정하며 은총을 받지 못한 이성능력을 경멸했다.

 

1-2 루터의 종교개혁은 오직 이성으로 신의 본질적인 속성 혹은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확실히 파악할 수 없다는 기존의 회의주의 흐름에 새로운 자극을 제공했다. 루터 역시 성서를 인정하고 그것이 지닌 결정적인 권위를 특히 강조했다. 루터는 성서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기독교도는 회의적으로 생각할 자유를 전혀 지니지 못하며 모든 기독교도들이 신의 은총을 통해 신앙의 문제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구별하고 판단할 능력을 지닌다고 말했다. 훈련받은 지성인들도 은총의 도움이 없다면 도덕적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비관적 생각은 동시에 훈련받지 못한 사람들도 신앙을 통해서 계몽되면 지적인 능력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는 낙관적 생각을 동반하게 되었다. 이 두 생각 틈에서 신교도들에게 철학의 역할이 크게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1-3 루터가 지녔던 문제, 즉 보편적 권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개인의 양심 문제 등을 통해서 기독교는 다양한 교파로 나뉘기 시작했다. 칼뱅이나 츠빙글리를 비롯한 프랑스와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들은 교황의 권위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루터에 동의했지만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나 구원할 사람을 선택하는 신의 섭리 등에 관해서는 루터와 의견을 달리했다.

 

1-4 신교도들은 교회의 주장이 성서에 의존하므로 교회가 궁극적인 권위를 지닐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가톨릭교도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여 성서를 받아들일 유일한 근거는 성서가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종교 개혁 시대 유럽에서 이성적인 논증이나 내부적인 계몽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나라별로 서로 정반대되는 해결책을 마련한 후 이를 무력이나 처벌 위주의 법을 통하여 강조했다.

 

1-5 16세기 중반에 이르며 여러 교파의 교리가 어느 정도 정리되어 정형화한 모습을 보이며 이후 400여 년 동안 계속 유지 되었다. 1530년 루터의 부관이었던 멜란히톤은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정통을 가리기 위한 신앙 고백의 형식을 마련했고 1555년 같은 곳에서 ‘통치자의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라는 협정이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각 나라들 사이에서 맺어졌다. 칼뱅의 저술 <기독교 강요>는 스위스, 프랑스. 스코틀랜드의 신교도들에게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졌다. 로마에서는 교황 바오로 3세가 종교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창설하고, 교회 개혁을 위하여 트렌토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서 루터와 칼뱅의 교리가 정죄되었고 자유 의지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사라지지 않았다는 교리를 채택하였고 전통적인 일곱 가지 성사의 교리를 재확인 했다. 하지만 공의회가 1563년 임무를 마치고 폐회되었을 때 루터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칼뱅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1-6 기독교가 이렇게 갈라진 것은 불필요한 비극이었다. 루터와 칼뱅을 가톨릭에서 갈라서게 만든 신학적 문제들은 중세에 이미 여러 차례 논쟁의 대상이었지만 교파들 사이의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기독교의 통합은 로마 교황의 지위를 기독교 총회 아래에 두는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일찍이 오컴도 이런 제도를 제안한 바 있으며 15세기에 실제로 이런 제도가 잠시 시행되기도 했고 심지어 모어   는 생애 대부분에 걸쳐 이런 제도가 기독교를 위한 신의 계획에 속한 다고 굳게 믿으며 이를 주장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