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학의 쇠퇴

1-1.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결합은 16세기 전반에 걸쳐 대부분의 철학 영역의 쇠퇴를 초래했다이 중 논리학 영역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학에서 논리학을 계속 가르치기는 했지만 인문주의 학자들은 논리학의 용어들이 야만적이고 비열한 협잡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논리학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라블레는 <팡타그뤼엘>에서 논리학자들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이들은 진공 안에서 신음하는 카메라가 제일 지향성을 반성하는 의식으로서의 제이 지향성에 몰두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따위를 문제랍시고 탐구하는 사람들이라고 조롱했다. 스토아학파와 중세 논리학자들이 이루었던 논리학의 성과들 대부분은 네 세기 동안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삭제되고 축약된 형태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만이 통속적인 교과서를 통해 초급 수준으로 가르쳐졌다.

1-2.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라틴어가 아닌 각 지역의 언어로 쓴 책들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영어로 쓴 최초의 철학 저술은 윌슨의 <이성의 규칙>이었다. 그는 현대 논리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용어, 예를 들면 명제와 같은 용어를 영어로 표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다른 학자들도 라틴어 사용을 거부하고, 순수한 영어 단어를 개발하려 노력했다. 그 중 논리학을 지성의 기법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던 레버는 자신이 쓴 논리학 교재에서 모순 명제란 서로 동일한 주어와 술어, 동사를 지녔지만 하나는 긍정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인 두 개의 진술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1-3. 영어로 쓰인 이런 논리학 저술들은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프랑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라무스는 논리학자로서 남긴 업적으로 상당한 명성을 누렸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친 것 모두가 거짓이라는 주장을 옹호하며,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하는 논물들을 출판하고, 왕립 대학 교수로 임하며 20권으로 구성된 아리스토텔레스 비판서를 발표했다.

 그의 저술 <변증론>1555년 프랑스어로, 1556년 라틴어로, 1574년 영어로 출판되었는데 이전의 모든 논리학 교재들을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이 최초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사고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제시했다고 주장했다그는 논리학이 논쟁을 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논리학은 발명과 판단의 두 부분으로 나뉘므로 그가 쓴 저술도 이 둘을 각각 나누어 다룬다. ‘발명을 다루면서 그는 우리가 옹호하려는 결론을 지지하는 논증을 발견하려 할 때 고려하는 요소 또는 논점으로 아홉 가지를 드는데 이들은 원인, 결과, 주어, 부가, 반대, 비교, 명명, 분할 그리고 정의이다. 그는 이런 요소들 각각을 고전 학자들로부터 인용한 방대한 내용과 더불어 예시하는데 이렇게 인용한 부분이 그의 저술 전반부의 거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예를 들면 라무스는 부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떤 주어에 덧붙여지는 바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덕과 악덕은 육체와 정신에 부가되는 속성이다. 간단히 말하면 주어의 본질 외에 주어에 변화를 일으키는 모든 것을 부가라고 부른다.’ 뒤이어 그는 키케로의 연설문 중 일부를 길게 인용하여 이를 예시하는데 인용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누군가가 머리와 눈썹을 모두 깨끗하게 밀어 깎았다면

이는 그가 심술궂고 지독한 악당이라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그를 보고 교활한 여우가 나타났다고 외치지 않겠는가?

 

라무스는 겉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난했지만 그가 논증을 위하여 제시한 주제들은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곳곳에서 인용한 것이며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한 방식으로 정의된다. 그의 논의 중 유일하게 새로운 점은, 그가 인위적이지 않은 논증이라고 부른 것인데 그는 이에 속하는 예로 신탁의 선언과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증언을 든다.

그의 저술 후반부에서는 논리학의 전통 주제와 더욱 가까운 내용들이 등장한다. 라무스는 다시 한 번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존하여 서로 다른 종류의 언명들을 분류하고 서로 다른 형식의 삼단논법을 분석한다. 여기서는 그가 고유 명사를 포함하는 논증에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더 큰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을 혁신적인 요소로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카이사르는 조국을 억압했다. 툴리우스는 조국을 억압하지 않았다. 따라서 툴리우스는 카이사르가 아니다와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1-4. 논리학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은 라무스의 저술에서 그리 큰 공적이나 독창성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하지만 라무스 사후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와 라무스주의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이들 사이의 타협을 시도한 중간적인 라무스주의자들 집단까지도 등장했다. 1561년 라무스는 칼뱅주의자가 되었는데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벌어진 신교도 대학살 때 희생되었다. 그가 순교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저술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누릴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영향력은 그 후 수 세기 동안이나 이어졌다. 예를 들면 밀턴은 <실낙원>을 완성한 5년 후에 라무스의 논리학을 다룬 책이 출판하기도 했다. 라무스의 저술이 인기를 누리면서 논리학은 오랜 침체기로 빠져 들었다. 중세 논리학자들을 사로잡았던 양상 논리와 반사실적 조건문의 영역 등에서 어떠한 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중세 학자들의 저술은 대부분 잊혀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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