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주의와 종교 개혁

1. 인문주의

1-1  이른 바 1511년부터 1520년에 이르는 10년 동안은 가히 르네상스의 정점으로 여길 만하다. 바티칸에선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가 있었고, 피렌체에선 메디치가가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또한 피렌체의 관리였던 마키아벨리는 정치철학의 고전이 된 ≪군주론≫을 써냈다.  이러한 르네상스의 예술과 사상은 북쪽으로 점차 전파되어 독일과 영국에도 이르렀다.

1-2 당대 최고의 학자중 한명인 에라스무스는 헨리8세를 가르쳤고, 영국에서 국왕 다음으로 큰 권력을 차지한 토마스 모어와 같은 집에 머무는 사이였다.  에라스무스와 모어를 중심으로 15세기 이탈리아에 뿌리를 둔 인문주의 사상이 북유럽으로 전파됐다. 하지만 당시 ‘인문주의’라는 것은 종교적 가치를 세속적인 것 인간 중심의 가치로 대체하려는 욕구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에라스무스는 널리 읽힌 종교적 서술들을 쓴 성직자였으며, 모어는 훗날 종교적 믿음 때문에 순교를 하기도 했다. 당시 인문주의들은 오히려 그리스어와 라틴어 고전들은 탐구하는 ‘인문학’이 지닌 가치를 높이 평가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고전 작가들의 문체를 탐구하고 많은 작품을 재발견 했으며, 이러한 작업들은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인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탐구가 예술과 과학을 부흥시키고 기독교의 진리를 정통적으로 파악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 믿었다.

1-3  인문주의자들은 전문적 철학 탐구보다는 문법, 문헌학, 수사학 등을 더 높이 평가했다. 에라스무스와 토마스 모어 둘 모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한 중세철학자들과 달리 플라톤으로 돌아가려 했다. 모어의 경우 플라톤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저술인 ≪유토피아≫에서 재산은 공동으로 소유되며 여성도 남성과 함께 군대에 복무한다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그는 저서에서 플라톤처럼 정치철학 이론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노력했으며,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수단으로 가공의 국가를 예로 들며 이에 관해 상세히 서술했다. 반면 에라스무스는 플라톤을 정치의 인도자로 채택하는 데 회의적이었다. 모어에게 헌정한 그의 저서 ≪우신예찬≫에서 과거 역사를 보면 ‘권력이 취미 삼아 철학을 애호한다고 자처하는 통치자의 손에 들어갔을 경우 국가가 가장 큰 곤경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M, 100). 그러나 그의 다른 저서인 ≪기독교 군주를 위한 가르침≫의 내용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미 발견된 것을 반복한 것과 다른 내용이 없었다. 때문에 그의 저술은 마키아벨리나 모어의 명성을 누리진 못했다.

2. 종교 개혁

2-1 에라스무스의 경우 철학보단 신학에 더 관심을 보였고 사변 신학보단 성서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1516년 새 라틴어 성서를 자신의 주석과 더불어 출판하면서 부록의 형태로 그리스어 성서를 덧붙였다. 그는 그리스어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서슴지 않는 수정도 행했다. ‘말(the Word)이 있었다’에서 ‘말씀(the Saying)이 계셨다’로 바꾼것이 그 예다.  이는 성서를 그리스어로 출판한 첫 사례임과 동시에 16세기에 성서가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는 계기를 제공했는데 1522년 루터(Martin Luther)가 기념비적인 독일어 번역 성서를 출판하는 게 그 시작이었다.

2-2 에라스무스는 한 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이기도 했다. 교황의 특별 허가로 수도원 생활을 그만 두었는데 루터 또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였다. 에라스무스와 마찬가지로 루터도 성서 중 로마인들에게 보낸 바울로의 편지를 깊이 연구했는데, 이를 통해 르네상스 시대 접어들어 카톨릭이 보인 정신과 윤리적 태도를 의문시 하게 된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새로 번역한 성서를 출판한 다음 해인 1517년 루터가 교황을 비난하는 글을 비텐베르크 대학에 내걸었다. 이는 유명한 면죄부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었다.

2-3 에라스무스와 모어도 고위 성직자의 부패에 대해 루터와 생각을 같이 했고 타락과 부패를 비난하는 문서도 출판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경우는, 루터가 가톨릭의 성직과 성레 체계 전반을 비난하고 구원에 필요한 오직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행적에 대한 신앙 또는 믿음이라 주장하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교황의 논쟁을 잠재우려고도 했지만 헛된 시도로 끝났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거부했고 결국 신성 로마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지가 되었다. 교황 레오10세가 죽은 뒤 하드리아노 6세가 즉위했는데 그는 에라스무스의 친구이기도 했다. 하드리아노 6세의 압박에 의해 에라스무스는 루터에 반대하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막상 하드리아노 6세가 세상을 떠난 뒤 였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