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부터 베이컨까지

1.갈릴레오

1-1. 종교 재판에 넘겨져 고통받은 또 한 사람의 이탈리아 철학자 갈릴레오(Galileo Galilei)에게로 눈을 돌리면 브루노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발견한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동시대를 살고 피사(Pisa)에서 태어난 그는 1589년그 곳 대학의 수학교수가 된 뒤 1592년 파도바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18년동안 교수생활을 했다.

갈릴레오는 이미 젊은 시절에 여전히 당대를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브루노처럼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실험과 관찰 결과에 기초하여 비판했다.  그는 성당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등의 운동을 관찰한 후 추가 한번 진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오직 추가 맫라린 줄의 길이에 좌우될 뿐 무게나 진동의 크기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피사의 사탑에서 서로 무게가 다른 쇠공을 떨어뜨려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낙하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잘못임을 증명했다고 전해지는데 실제로 이 실험은 행하지 않았음이 거의 확실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기초한 ‘외부의 원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어떤 물체도 운동하지 않는다’는 원리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저항이 없을 경우 서로 다른 무게의 물체가 주어진 거리를 낙하하는 데 동일한 시간이 걸리고, 두 물체에 작용하는 가속도가 일정하다는 사실을 실제로 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또한 그는 정반대로 운동하는 물체가 마찰과 같은 정반대로 작용하는 힘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 계속 운동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후에 데카르트와 뉴턴이 주장한 관성의 원리들을 예건했다.

1-2. 역학을 다룬 저술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그는 위대한 과학자의 반열에 오르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는 또한 유체 정역학의 분야에서도 중요한 사실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에게 명성과 시련을 안겨 준 것은 천문학 연구였다. 그는 새로 발명한 망원경을 통해 목성을 네 위성을 발견하고 이 위성들을 토스카나의 코시모 2세 대공을 기리는 의미에서 ‘메디치 가문의 별들’이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그는 태양의 흑점,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천체가 투명한 5원소가 아닌 지구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을 묶어 그는 1610년 «별들의 소식»이라는 책을 출판해 코시모 대공에게 헌정한 뒤 토스카나 궁정의 종신 철학자 겸 수학자로 임명되었다.

이런 일 후 그는 금성이 가로지른 행성이 달의 위상과 유사한 위상을 보인다는 사실을 관찰한 후 금성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할 때만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의 행성으로서 자신의 궤도에 따라 운동하는 목성의 주위를 도는 위성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지지하는 강력한 근거로 제공했다.

처음에 그는 이러한 자산의 천문학적 발견을 통해 얻은 결론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데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로마 교무 위원회가 그의 관찰에 대해 공식적인 지적을 한 뒤 부터 그는 태양 중심설에 기초한 여려 견해를 폭넓게 전파했다. 마침내 1613년 그는 태양의 흑점을 다루는 책의 부록에서 자신이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한 성직자는 이를 태양 중심설을 성서에 어긋나는 것으로 비난했다. 이에 갈릴레오는 로마로 가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해명하기로 결정했다.

로마로 떠나기 전 그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예수회 출신의 추기경 벨라르미노(St. Robert Bellarmine)에게 편지를 써서 태양이 운동한다고 말한 성서 저자들의 언급은 단지 관용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벨라르미노는 이 문제를 종교 재판소에서 논의 한 후 태양 중심설이 이단이며 지동성은 오류를 범한 것이라는 의견을 내렸다. 당시 교황 바오로 5세의 훈령에 따라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그에게 어떠한 주장도 옹호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했다.

이렇게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벨라르미노는 당시 가장 위대한 과학자보다도 더욱 건전하게 과학철학을 파악했으며, 갈릴레오는 당시 가장 유명한 신학자보다도 더욱 건전하게 성서를 해석했음을 드러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둘의 대립은 수긍할만하지만 논쟁 과정에서 양측 주장이 서로에게 진정 공정하게 반영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실제로 갈릴레오가 자신의 저술이 정죄 받지 않은 그 후 몇년 동안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다.

1624년 갈릴레오는 다시 한 번 로마로 갔다. 당시 바오로 5세 와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이미 세상을 떠나씅며 우르바누스 8세가 새로 교황의 자리를 오른 뒤였다.  새 교황은 갈릴레오의 천문학적 발견을 열렬히 옹호했으며 갈릴레오는 태양 중심설을 선호하지 않고 두 우주관을 공정하게 다룬다는 조건으로 프롤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을 다룬 체계적인 저술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632년 갈릴레오는 교황청 검열관의 승인을 얻은 후 «두 가지 중요한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를 출판했다. 그러나 책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 중 전통적인 지구 중심설을 옹호하는 심플리키우스의 이름이 ‘바보'(simpleton)라고 해석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갈릴레오는 교황의 분노를 샀다. 결국 1633년 갈릴레오는 로마의 종교재판소에 회부되어 태양 중심설을 취소하지 않으면 고문을 당하리라는 위협을 받았다. 그는 종신형 판결을 받았지만 실제로 감옥에 갇히지 않고 가택 연금 상태로 지냈다.

가택 연금 상태였지만 그 동안 그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당시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 새로 세워진 하버드 대학교에서 초빙교수직을 제안받기도 했다. 그는 점점 눈이 멀어갔지만 저술 활동을 멈추지 않고 필생의 대작인 «새로운 두 과학에 관한 논의와 수학적 증명»을 완성했다. 이 책은 1638년 레이덴에서 출판되었으며 그의 저술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갈릴레오는 브루노를 비롯한 다른 많은 종교 재판소의 죄인들에 비해 훨씬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그에 대한 유죄 판결은 전 유럽에 걸쳐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우선 이탈리아에서 과학적 탐구가 쇠퇴하고 심지어 개신교가 지배한 네덜란드에서조차 데카르트가 자신의 과학적 우주론을 출판하는 것을 몇년씩 미루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교가 갈릴레오에게 잘못을 저질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으나 이미 350년이나 지난 후였다.

2. 베이컨

2-1. 갈릴레오와 같은 시대에 영국에서 활동했던 베이컨(Francis Bacon)은 갈릴레오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반감을 품었지만 과학적 방법의 실천보다는 그것에 대한 이론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1561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후 그레이스 인(Gray’s Inn)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584년 의회에 진출했으며 뒤이어 당시 영국 여황 엘리자베스의 총애를 받던 에섹스 백작(the Earl of Essex) 변호인이 되었다. 하지만 백작이 반역을 일으키자 베이컨은 그를 반역죄로 기소하는데 앞정섰으며 그후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베이컨은 법무 차관이 되었다. 그는 1606년 철학적 저술 중 최초의 것인 «학문의 진보»를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과학의 여러 분야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생애 중 전성기는 1618년 베룰람 경(Lord Verulam)이라는 호칭과 함께 대법관에 임명된 때였다. 동시에 그는 «위대한 부활»이라는 제목의 방대한 저술을 계획했는데 책의 목표는 모든 지식을 각자의 적절한 영역에 배정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직 두 부분만 완성되었는데 하나는 위의 «학문의 진보», 다른 하나는 바로 과학적 방법을 다룬것으로 유명한 «새로운 오르가논»(Novum Organum)이다.  그는 1612년 뇌물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지만 과학과 역사에 관한 저술을 멈추지 않았다. 1626년 런던 북쪽 하이게이트에서 냉동실험을 하다가 심한 감기에 걸려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과학의 순교자라는 이야기까지 듣고 있다.

2-2.베이컨은 «과학의 진보» 2권에서 인간의 학문을 세가지로  나눈다. 이 세 분야는 각각 인간의 지성의 세 부분과 관련되는데, 인간의 기억력은 역사학, 상상력은 시가, 이성은 철학과 관련된다. 그는 시가를 건성으로 다루면서 가장칭찬하는 시가는 바로 이솝 우화와 같은 도덕적 교훈을 전하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반면 역사학과 철학에 대해서는 상당히 길게 언급한다.

먼저 역사학은 자연사와 시만사로 나뉘는데 시민사는(Civil history)는 현재 우리가 역사학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자연사는 더욱 넓은 분야로 다시 세부분으로 나뉜다. ‘정상 경로에 따르는 자연을 다루는 역사학’, ‘정상 경로를 벗어난 다양한 자연을 다루는 역사학’, ‘변화하거나 변형된 자연을 다루는 역사학’으로 나뉜다. 그는 세번째 분과인 ‘만들어진 또는 가공된’ 자연의 역사를 가장 중요하고 유용한 것으로 보면서 이것의 가치가 특히 실용적인 적용과 효용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2-3. 철학을 분류하면서 베이컨은 우선 ‘신에 관한 철학’ 또는 자연 신학을 한쪽으로 제쳐 두면서 이는 무신론을 반박하기에는 충분할 지 몰라도 종교에 관한여 알려주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후에 그는 철학을 자연에 관한 철학과 인간에 관한 철학으로 나눈다. 자연에 관한 철학은 사변적이고 실용적인 영역이 있는데 사변적 영역에는 자연학과 형이상학이 포함되며 , 실천적 영역에는 역학과 마법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역학은 자연학을 현실에 적용한 것이고 마법은 형이상학을 현실에 적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철학을 이렇게 과감하고 도발적인 방법으로 분류한 시도는 겉보기 만큼 명확하지 않으며, 베이컨이 서로 다른 다양한 분야에 붙인 명치은 매우 기묘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그가 분류한 자연적 마법은 연금술이나 점성술 같은 미신적인 억지 주장과는 명백히 분류되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무슨 생각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한 물음은 자연학이 사물의 동력인과 질료인을 다루는 반면 형이상학은 목적인과 형상인을 다룬다는 대목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그는 나침반을 역학이 아니라 마법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배를 운동하게 하는 항해는 자연학이지만 배의 방향을 인도하는 나침반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형이상학’이라는 용어를 다른 학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른 학자들이 말하는 형이상학을 그는 ‘제일철학’, ‘개괄철학’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그는 이 철학이 어떤 분과에서도 배제되지 않는 보편적 원리들을 다루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설을 기초로 자연학과 형이상학을 구별한 시도는 그 자체로 이미 잘못된 것이다. 그의 도식 중 자연적 마법의 영역에서는 목적론이 차지할 공간이 전혀없다.  또한 그는 형상에 대해서 이런 것들이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하여 발견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들을 탐구하는 대신에 글자를 결합하는 형상과 같이 단순한 형상에에 주목해야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기본적 형상들은 갈릴레오가 쓴 수학적 도형이나 기호와 같은 알파벳과 비교할 때 상당히 모호하다.

철학의 또 다른 즁요 분과인 인간에 관한 철학도 자연에 관한 철학과 마찬가지로 두 영역으로 나뉜다. 베이컨은 그 중 하나는 ‘인간을 분리하여’ 고찰하는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통합하여’ 고찰하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후자는 오늘나 사회과학으로 불리는 학문들이다. 다시 이 아래에 속하는 세부분과들을 지정하면서 베이컨은 제멋대로 혼란스럽게 여러 학문들을 나열한다.

그리고 베이컨이 인간의 능력을 분류하면서 처음에 매우 중요한 지위를 부여한 상상력에 대해 그는 단지 다른 능력들의 시중을 드는 하인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상상력이 간혹 이성에 승리를 거두기도 하는데 종교적 믿음의 경우에 이런일이 일어난다,

2-4.베이컨이 인간의 정신을 마치 권력이 분리되어 각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처럼 서로 다른 능력들이 적절하게 배열된 일종의 내적인 사회로 여겼다는 점은 명백하다. 사화과학 자체를 다루면서 그는 이를 다시 우정, 사업, 정부와 관련하는 영역으로 나눈다. 정치의 경우 시민에 관한 철학의 일부인데 인간이 사회생활을 함으로써 얻는 이익을 다루는 영역이다.

베이컨은 분류 작업을 마친 후 스스로 자랑하지만 그가 제시한 방대한 목록에 포함도니 다양한 학문들이 같은 수준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어떤 학문은 완벽한 수준에 도달한 반면 다른 학문은 상당히 부족한 수준이라고 보았다. 그 중 논리학이 가장 수준이 떨어지는 학문이라고 보았는데 논리학의 문제를 과학적 발견에 관한 이론이 없다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논리학의 공백을 메우려는 작업에 착수하여 과학적 탐구를 인도하기 위한 나침반을 제공하려 한다.

탐구 방법에 관해 베이컨은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 모두를 포함한다. 탐구자의 첫번째 임무는 소극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관찰에 선입견을 도입하는 요소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다. 베이컨은 이런 선입견으로 네 가지를 지적하면서 이들을 ‘우상’이라고 불렀다. 이 우상에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있는데 종족의 우상은 경우는 사물을 표면적인 현상으로 판단하려는 성향을 말한다. 동굴의 우상은 객관성을 저해하는 개인의 기질적 특성을 의미하며 시장의 우상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숨어있는 언어의 함정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가식적인 무대 연기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그릇된 철학 체계를 의미한다.

탐구자의 적극적인 임무는 바로 귀납이다. 특수한 경우들을 체계적으로 검토함을써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귀납이 자연의 부적절한 사례에 기초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주의 깊게 체계화된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절차에 관한 규칙을 소개하면서 그는 귀납의 진정한 역할은 현상 X의 형상을 설명하는 후보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시작할 때 드러난다고 보았다. 귀납의 성공적인 후보가 되려면 X가  발생할때 나타나는 성질을 나타내야하며 동시에 X가 발생할 때 나타나지 않는 성질을 나타내지 않아야한다.

그러나 그는 목표로 삼았던 일련의 지침을 결코 완성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의 체계가 ‘귀납 논리’에 이르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연법칙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사례보다 소극적인 사례가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논점을 지적했다. 20세기 철학자들은 자연법칙이 결정적으로 검증될 수는 없지만 결정적으로 반증될 수는 있다는 점을 지적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영예를 그에게 서슴지 않고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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