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퀴나스 사후부터 둔스 스코투스까지

1.아퀴나스 사후

1-1. 아퀴나스가 13세기에 사망한 후 몇 해 안되서 그의 견해 중 일부는 파리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가르칠 수 없는 등 그에 대한 평판은 매우 다양하고 변화무쌍했다.   하지만 1316년 교황 요한네스 22세가 아퀴나스를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작업을 시작으로 겨우 50여 년전에 그의 저술 전반이 신학적으로 건전하다고 판정 받았다. 트렌토 공의회의 심의를 통하여 «신학대전»이 성서에 필적하는 저술이라는 영예로운 지위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1879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한 아버지’가 발표된 이후에야 비로소 아퀴나스는 이른바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의 공식 신학자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그를 추대하는 과정에는 많은 부작용도 낳았는데 우선 가톨릭교도가 아닌 철학자들이 아퀴나스를 철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길이 막혔고 철학자들이 단지 특정한 교회 조직의 대변인 정도로 생각한 인물들이 이들의 연구를 제한하고 억압한 결과를 초래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아퀴나스에게 존경을 표하지만 동시에 그의 복잡하고 세련된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그를 추종하고 미숙하게 그의 사상과 논증을 설명했다.

1-2. 현재 아퀴나스 연구는 새로운 관심 속에 놓여져있다.  이러한 관심은 그의 저술을 해석하고 받아들였던 이전의 태도에 비해 훨씬 다양한고 비판적으로 이루어져있으며 그의 저서의 라틴어를 번역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또한 그의 저서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예를 드는데 매우 인색하다. 설령 예를 든다 할 지라도 간접적이거나 진부한 수준에 그친다.  그리고 그의 천재성을 찬미하며 그의 저술을 잘 해명된 상태로 소개하고 싶어하는 학자는 그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일종의 불명료함을 지닌다는 것을 알아야한다.이는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철학적 불일치를 일으키는 근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는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조화시킨 인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저술에서는 플라톤주의적 요소도 상당 부분 발견된다. 현대 그의 많은 학자들은 그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더 많은 비중을 두려고 하지만 이에 반대하면서 플라톤적인 아퀴나스에 동조하는 학자들도 있다. 사실 아퀴나스 자신은 지상에 관련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지만 천상과 관련해서는 플라톤주의자였다.

2.브라방의 시제와 로저 베이컨

2-1. 만년에 아퀴나스는 파리대학에서 극단적 형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와 논쟁을 벌어는데 많은 정력을 소모했다. 이들 중에는 세계가 항상 존재하고 모든 인간에게 오직 하나의 지성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서 하나의 지성에 관한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권위있는 주석가인 이른 루슈드가 선호했다. 이러 학자들은 자주 ‘라틴 세계의 이븐 루슈드주의자들’이라고 불렸는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브랑방의 시제(Siger of Brabant, 1235~82)였다.

2-1-2. 이러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가르침은 시간상의 어떤 지점에서 이루어진 창조와 개별적인 인간 영혼에게 내세가 있다는 기독교 교리와 조화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1270년 파리 대주교는 ‘모든 사람의 지성은 동일하며 수적으로 하나이다’, ‘최초의 인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명제로 시작되는 13개의 교리를 정죄했다. 이 정죄는 부분적으로 아퀴나스가 시제의 특징적인 교리를 반대하기 위해 쓴 글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시 젊은 학자들은 이 둘이 같은 유형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정죄된 명제들에서는 시제와 아퀴나스로부터 도출된 주장이 함께 포함되있었고 단테가 이둘을 나란히 천국에 올리고 아퀴나스로 하여금 시제를 통해 영원한 빛을 던진 인물로 칭찬하게 만들었가 때문이다. 단테는 전문적 철학적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그의 «신곡»을 통해 스콜라철학의 이론을 절묘한 시구로 표현했으며 «제정론»을 통해 인간의 지적인 발전이 오직 평화인 상태에서 이루어지며 평화는 어떤 초자연적인 권위,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아래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직접 철학에 기여하였다.

2-2. 단테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아 바로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인데 그는 시제보다 십여 년 정도 오래살았다. 그는 1210년 경 일치스터에서 태어나고 1247년 옥스퍼드 대학 하굽에서 배우고 가르쳤다. 이 후 그는 파리로 거처를 옮기고 십년 후쯤 프란체스코 교단에 가입했다. 그는 파리를 싫어했지만 그에게 과학적 탐구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가르쳤던 마리쿠르의 피에르(Peter of Maricourt)만은 유일하게 높이 평가했다.  피에르는 철학에서 확실성에 이르는 문과 열쇠가 바로 ‘수학’이라고 믿도록 인도한 인물이다. 하지만 1257년 그가 속한 프렌체스코 교단 지도자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강의를 금지했지만 저술은 계속 허락되었다. 심지어 교황 클레멘스 4세는 그의 저술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2-2-1.그는 철학에서 실험의 역할을 강조한 17세기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등장을 예견한 선구적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대저작»에서 권위에의 복종, 맹목적인 습관, 대중의 섭입견, 우월한 지식을 지녔다는 가식적 태도 등이 오류의 근원으로 지적했으며 고대의 언어에 대한 탐구와  진정한 수학의 획득이  학문적 탐구의 필수적인 두 가지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그는 경험과 무관한 추론은 우리를 올바른 결론으로 이끌지만 오직 경험만이 우리에게 확실성을 제공한다고 말하면서 실험 과학(scientia experimentails)을 명백히 제시하였다.

3. 둔스 스코투스

3-1.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에 대한 생애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거의 추측에 의존하낟. 그에 대한 모든 설명은 문서 기록이 전하는 확실한 다음의 네 날짜에 기초한다. 먼저 1291년 3월 17일 노샘프턴(Northampton)에서 사제로 임명되었고 1300년 7월 26일 프란체스코 교단 소속의 탁발 수도사로 옥스퍼드에 머물렀는데 고해성사를 들을 자격을 얻으려 하였지만 실패했다. 1304년 2월 30일 그는 쾰른에서 신학을 강의하는 자리에 있었고 그가 사망한 날짜는 정확하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1308년 11월 8일로 알려져 있다.

3-2. 그의 저술은 많은 필사본이 전해지지만 이들의 진위와 쓰인 시기는 생애의 상세한 내용만큼이나 지극히 모호하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이들 대부분은 미완성인 단편의 형태로 남았는데 그 후 수세기를 걸쳐 여러 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편집되고 저술로 완성되었다. 20세기에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그가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에 대한 주석 대부분이 후대의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판명되었다. 여전히 그의 작품으로 인정된 것은 «범주론»,«명제론», «소피스트 식 논박»에 대한 주석과 포르피리오스에 대한 주석뿐이다. 그리고 «신학명제집»은 상당한 논란이 되었지만 저술 중 처음 두 권에 대한 강의록은 그가 직접 단 주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두 권은 «강의록»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정리집»이라고 스코투스 자신이 직접 최종적으로 손실하여 완성하지는 않았지만 비판적으로 검토한 끝에 출판되었다. 이 «강의록», «정리집»은 현재 스코투스를 연구하는 철학자와 신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헌의 역할을 하고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그의 성숙한 사상을 엿볼 수 있다.

3-3. 그의 저술을 읽기란 결코 쉽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의 언어는 이해하기 어려울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전문적이고 독자들에게 불친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철학을 탐구한 모든 학자를 통들어 가장 날카롭고 예민한 정신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많은 주제들에게 아퀴나스와 정반대되는 태도를 취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조금 앞서 활동한 강의 앙리와 다른 의견을 보인다는데 스스로 큰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앙리는 1276년부터  1292년까지 파리 대학에서 당시 인문학부의 일부 학자들이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택하는데 반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식의 신플라톤주의가 내세웠던 많은 주장들을 옹호했던 인물이다.

3-3-1. 그는 존재를 비롯하여 ‘좋음’과 같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다른 술어들을 서로 유사한 많은 것들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의미만을 지니며 피조물에 대하여 사용될 때와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로 신에게도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통과 결별하였다.  또한 그는 형이상학을 존재자체로서 존재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면서 존재 안에 기독교적인 무한한 신을 포함시킴으로써 존재의 범위를 매우 크게 넓혔다. 또한 그는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비판하면서 신의 현존을 확립하기 위한 자기 자신의 매우 정교한 형이상학적 증명을 제시한다. 그는 아퀴나스와 달리 신의 속성을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보았다.

3-3-2.  그는 ‘질료,형상,실체, 우연’등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질료형상론의 구성 요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 그러나 이런 용어들 대부분은 근본적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공간에 대해서 근느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단지 물체의 가능성만으로도 진공을 둘러싼 벽을 유지하고 공간을 확보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또한 시간에 대해서 그는 시간은 단지 운동을 위한 잠재성만을 측정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운동없이도 시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으로 그는 가능 세계에 관한 철학의 창시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3-3-3. 그는 또한 아퀴나스와 비교하여 인간 지성의 영역을 두 방향으로 확정했다. 아퀴나스와 달리 그는 각각의 존재가 자신의 내부에 개체화의 원리를 지니고 이를 파악할 수 있기에 지성은 각 개체의 단일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우리가 현세와 내세를 고려한다면 지성의 적절한 대상은 존재만큼이나 넓다고 말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지성이 보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신으로부터 특별한 조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앙리의 주장을 거부하지만 그의 인식론에서 신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모순과 함께 존재할 수 없기에 우리를 속이는 방식으로 절대적 능력을 발휘하지 않기 때문이다.

3-3-4. 그는 심리철학과 관련해서 지성과 의지 사이의 관계를 언급한다. 그는 아퀴나스가 의지를 본질적으로 실천적 추론의 유연한 본성에 기인해 자유를 얻게된 이성적 욕망으로 본 것과 달리 의지를 일종의 통제력이라고 보았다.  의지는 이성적 능력으로 다양하게 발휘될수 있지만 이 말이 의지의 발휘가 이성의 아래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인간과 신의 의지를 어떤 철학자보다도 훨씬 넓은 능력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의지는 서로 정반대의 것들도 원할 수 잇는 능력이며 신의 의지 또한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넓은 의미로써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신은 많은 사람들이 자연법이라고 믿는 것들까지도 마음대로 면제하거나 폐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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