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라 철학자들: 12세기에서 르네상스까지 그로스테스트에서 아퀴나스까지

 

1. 시대적 상황

12세기에 등장한 헌신적 번역가들은 다양한 철학자들 이상으로 철학에 큰 기여를 하였다. 12세기 초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은 <<범주론>>과 <<명제론>>뿐 이었는데 다른 저술들의 번역이 발견되고 자코모가 <<분석론 후서>>를 번역하여 오르가논의 라틴어 번역이 완성되었다. 또한 12세기 중반 자코모가 <<자연학>> <<영혼에 관하여>> 등의 저술을 번역하였다. 12세기 후반 아랍어로 쓰인 철학 원전들이 번역되었고 뛰어난 이슬람과 유대 철학자들(알 킨디 알 파라비 알 가잘리 이븐 시나 등)의 저술들이 번역되었다. 번역에 관해 다른 중요한 점은 이븐 루슈드의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에 대한 주석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으로 1220년경 스콧이 시작하였다. 이러한 12세기의 번역작업을 통해 13세기 초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과 주석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라틴어로 접할 수 있었으며 12세기의 등장한 초기 번역본 뒤에 더 많은 새 번역본이 등장 할 수 있었다. 새로운 번역들 중 기욤의 번역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의 번역이 아퀴나스를 비롯한 여러 스콜라 철학자들이 표준판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13세기의 사상적 발달의 배경에는 새로 등장한 대학과 종교 교단이 있었다. 볼로냐와 살레르노에서 최초의 대학이 설립되었다 주장하지만 그 두 곳은 전문대학적 성격을 띠기에 파리와 옥스퍼드를 최초의 대학으로 봐야한다. 중세 대학은 4가지 학부로 구성되었는데 공통과목인 인문학부와 상위학부인 신학 법학 의학의 구성이다. 모든 대학이 라틴어를 공용어로 사용했으며 상위학부 학생들은 일정 나이까지 자유롭게 대학을 옮겨 다닐 수 있었다. 학부의 교과과정은 교과서 중심으로 조직되었는데 인문학부는 일반적 기준이 마련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1210년 파리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관한 모든 강의를 금지하고 저술들을 불태우라 했지만 1255년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의 많은 저술들이 강의에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 신학의 교과서로는 <<신학명제집>>과 성서 법학 교과서로는 <<로마법대전>>이나 <<교령집>>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교과서들은 각 대학마다 달랐다. 중세의 지적 분위기 형성에 도움을 준 교단으로는 프란체스코 교단과 도미니크 수도회가 있다. 각 1210년과 1216년에 정식으로 승인 받았다. 두 수도회 모두 1219년에 파리에 대학을 설립했으며 1230년에 옥스퍼드에 학교를 세웠다. 중세의 위대한 철학자 대부분이 이 두 교단의 소속 수도사들인데 대표적으로 알베르투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 둔스 스코투스 오컴 등이 있다. 그 외 위콜리프가 수도회 출신이 아닌 철학자인데 철학사가들은 그가 정말로 수도회 소속이 아니였는지에 대하여 의심스럽게 생각하기도 한다.

2. 그로스테스트와 알베르투스

2-1. 그로스테스트의 업적 및 평가

그로테스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주교로 임명되기 전 옥스퍼드에서 공부하였으며 초기 총장 중 한사람으로서 5년간 강의 하였다. 그는 많은 저술을 썼을 뿐만 아니라 <<분석론 후서>>에 대하여 최초의 라틴어 주석을 썼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새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13세기 위대한 철학자들 보다 한 세대 앞서 등장 했으며 많은 학자들이 철학사보다 과학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긴다. 그 연유는 그가 과학적 개념들이 논증의 필연적 진리 체계를 구성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진리가 조건문의 형식을 취한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조건문으로 표현된 진리의 일부는 연역이 아닌 실험으로 확립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측면과 다른 측면들로 인해 서유럽의 실험 과학의 아버지라 평가 받아왔다. 또한 그는 천문학과 기상학에 관한 독립적인 저술도 썼으며 <<분석론>>에 주석에서 드러나 인간의 과학적 노력에 대한 전반적 견해로 보아 베이컨이나 파라셀수스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에 가까운 인물로 볼 수 있다.

2-2. 그로스테스트의 사상

그로스테스트는 인간 지식의 5가지 보편이 있다고 말한다. 1. 신의 정신 안에 존재하는 영원한 근거들이다. (플라톤은 이것들은 이데아라 불렀다. 이것들이 서로 분리된 실체는 오류이다.) 2. 신이 천사들의 정신에 각인한 형상이 있는데 이것은 이데아와 마찬가지로 창조의 과정에서 전형이나 모법으로 작용한다. 3. 지상의 존재에게는 작용하는 인과적 근거가 있는데 이 인과적 근거는 천상에 존재한다. 4. 지상의 실체들에 속하는 형상들은 실체의 유와 종을 규정한다. 5. 대상의 우연적 형상은 본래 그런 형상을 지닌 실체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과학과 형이상학을 연결한 그로스테스트의 예는 광학이론에서 드러난다, 광학이론은 <<천지창조론>>과 <<빛에 관하여>>라는 저술에서 전개되는데 그는 빛이 최초로 창조된 물질형태의 것이라 주장한다. 빛은 제일 질료와 결합하여 단순하며 크기가 없는 실체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시간이 시작된 순간 삼차원에 공간을 창조하였다. 또한 이빛이 아홉 개의 천체를 차례로 창조했으며 9번째가 달이다. 이 빛은 달로부터 지구에 이르러 4원소를 창조한다. 여기서 그는 신학으로 옮겨가는데 빛을 신의 본성과 가장 유사한 자연적 본성을 지닌 것으로 보아 신과 같이 다른 것의 도움 없이 자신의 내부로 모든 것을 창조 가능한 것으로 파악했다. 빛은 순수한 형상과 작용에 가장 가까우며 신 자신이 영원한 빛이며 천사는 비물질적 빛이다. 신은 모든 것의 보편적 형상이지만 질료와 결합하는 형상이 아니라 모든 것의 전형이 되는 형상이다. 인간의 지성이 진리에 이를 수 있으면 오직 최고 진리인 신의 빛을 통해서이다.

2-3. 알베르투스

알베르투스는 최초의 독일 철학자로 1223년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가 되었으며 3년간 파리에서 신학을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 중 한명이 아퀴나스였다. 그의 저술에서도 그로스테스트와 같이 형이상학과 과학의 결합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저술에선 과학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새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을 진심으로 반긴 최초 철학자들 중 한명으로 이븐 시나의 방식으로 다양한 주석서를 썼으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작으로 여겨지는 저술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그의 사상에 여전히 신플라톤주의적 요소가 남아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자연의 경험적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3. 보나벤투라

3-1. 생애와 업적

보나벤투라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본명은 조반니인데 그의 이름을 바꾼 이유는 어려서 병의 회복을 프란체스코의 덕택으로 여겨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들어가고 이름을 변경한 것이다. 그는 헤일즈의 알렉산더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신학명제집>>에 대한 나름의 주석을 썼으며 <<개요>>라는 제목의 신학교과서를 썼다. 또한 그는 수도회의 총회장이 된 후 서로 다른 분파를 화해시키기 위해 수도회를 재결합하고 재조직하였으며 프란체스코의 생애에 대한 전기를 두 권 썼다, 그는 총회장을 하면서 신자의 관점에서 신비주의적인 저술도 썼는데 그 책은 현재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다.

3-2. 사상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플라톤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말하였는데 그는 이데아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을 간단하게 반박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이데아를 부정한 최초의 오류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수많은 오류가 포함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데아가 신의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진 않는데 이데아는 영원한 근거로서 모든 것이 이에 따라 규정되는 전형으로 이런 이데아들이 인간지식의 일차적 대상이라 주장하였다. 그의 저술에서도 빛의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빛에 4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였다. 1. 기계적 기술로 생겨난 빛으로 가장 열등하며 은유적으로 빛으로 여겨진다. 2. 감각 지각의 빛으로 은유로서의 빛이 아니며 각각의 감각은 서로 다른 강도의 빛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다. 3. 지적 진리 탐구의 길로 인도하는 빛으로 철학의 3가지 영역(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을 비춘다. 4, 성서의 빛으로 최고의 빛이며 정신이 구원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그는 철학의 세분과를 각각의 빛으로 여겨 총 6가지의 빛이 창조의 여섯 에 대응한다고 주장하며 모든 학문에 쇠퇴가 있기에 마지막 휴식의 날이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축복받은 자들이 신의 정신 안에 이데아들을 바로 인식할 수 있으며 직접 관찰보다는 반사 된 빛으로만 진리의 인식이 가능하다 주장하였다. 인간 지성에 의해서 창조된 빛은 사물에 대한 확실성에 이르기에 충분치 못 하므로 특별한 빛이 필요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류를 반박하는데 열중하였으며 세계의 창조와 세계의 지속의 양립을 불가능 하다 여겼다. 그렇기에 그는 세계가 시작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일련의 논증을 제시한다. 그의 체계에서 수동지성과 능동지성의 구분을 인정하지만 각각이 인간 개인의 능력이라 생각하며 아랍학자들이 생각하였던 능동지성의 임무가 신의 직접적 조명에 의해 수행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을 받아들였으며 인간 영혼이 육체의 형상이라는 점도 받아들여 아랍학자들의 심령일원론을 반박하는 데 사용한다. 그는 이븐 가비롤에 따라 질료형상론의 구조를 영혼자체에 적용하여 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질료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영혼도 질료를 포함한다는 점을 순응하고 개인의 영혼이 지속가능하다는 것과 질료로 개체화의 원리를 보일 수 있다는 주장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영혼이 순전한 비물질적이라는 주장의 난점을 피할 수 있었지만 정신적 질료라는 개념의 명확한 설명을 필요로 하였다.

4. 토마스 아퀴나스

4-1. 생애와 저술, 사상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 이탈리아 출생으로 5살 때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에서 베네딕트 수도사들의 손에 성장하였다. 1239년 황제와 교황사이 분쟁 발생으로 이 수도원에서 더 이상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자 나폴리 대학에서 피터의 아래서 논리학과 자연학을 처음 접했다. 1244년 그는 가족이 원했던 베네딕트회 신부가 되기를 거절하고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가 되었고 이에 그는 가족에게 납치당해 감금생활을 하였는데 이때 두 편의 논리학 논문을 썼다. 감금생활에서 풀려난 후 파리로 가 알베르투스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 스승과 함께 쾰른으로 떠났다. 1252년 그는 신학 석사학위를 위해 공부를 시작하였고 <<신학명제집>>에 대한 주석을 통해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었다. 또한 이 시기에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라는 소논문을 썼으며 이것을 통해 이븐 시나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256년 석사학위를 받은 후 3년 동안 더 머물면서 성서에 대하여 강의를 하였는데 그는 교수로서 학생들의 논박을 감독할 의무를 지녔다. 그가 감독한 논박의 내용은 <<진리에 관하여 논박한 질문들>>이라는 자료를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 책은 다양한 주제와 253가지의 개별적 논박이 등장하여 방대한 분량을 보인다. 이 시기에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에 대한 주석을 써 자연과학 수학 형이상학의 관계를 논의하면서 질료로부터의 순서를 자리 매김한다. 1259년~1260년대 초반 아퀴나스는 교황을 따라 오르비에토로 갔는데 그는 거기서 기욤을 만났으며 <<반이교도대전>>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아퀴나스의 다른 저술과 비교 하였을 때 기독교 교리가 아닌 철학적 전제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 큰 차이가 있는데 이 철학적 전제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철학자들이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는 점을 지녔다. 따라서 이 저술은 자연신학에 관한 저술로 볼 수 있다. <<반이교도대전>>은 총4권으로 이루어지고 각 권의 내용은 신의 본성, 신의 창조 및 창조된 세계 신안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법과 윤리적 문제 삼위일체나 성육신 등의 기독교 교리와 관련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아퀴나스는 1,2,3권에서 성서를 논증의 전제로 삼지 않았다. 그는 <<반이교도 대전>>을 완성한 후 로마에 도미니크 수도회의 부속학교 대리 교장을 하는 동안 또 다시 논박을 감독했는데 이때 이와 관련된 3가지 저술을 남겼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 대한 권위 있는 주석을 쓰기 시작한 것도 로마에서부터 시작하였는데 그는 <<영혼에 관하여>>에 대한 주석을 가장 먼저 썼고 이 주석은 현재까지도 학자들이 많이 참고한다. 다음으로 <<자연학>>에 대한 주석을 썼다. 하지만 그가 로마에 머물면서 쓴 가장 중요한 저술은 신학대전의 저술 시작이었다. 신학대전은 매우 방대한 저술로 총 3부로 이루어진다. <<신학대전>>이 생생한 학문적 논박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논박과 마찬가지로 질문과 항목별로 나누어 구성된다. 신학대전의 각 항목은 3단계로 구성되는데 1. 항목이 내세우려하는 주장의 난점을 제시함 2. 항목이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대 주장에 이어 다른 측면에서의 고찰이 뒤따름 3. 각 항목의 본문에서 아퀴나스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근거와 함께 제시함. 이후 난점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구성은 철학자가 무엇인가를 당연시하는 것을 막기 위한 강력한 지적훈련을 위해 도입된 것으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설득시킬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반박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끔 만든다. <<신학대전>>은 불필요한 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아퀴나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신학대전>>의 1부에서는 <<반이교도대전>>의 주제들을 거의 포함하며 가톨릭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을 주요 독자로 보고 신의 속성을 제시하고 바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다룬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이성에 의해 발견되는 진리와 계시를 통해 얻어지는 진리의 구별을 하였다. 그는 <<신학대전>> 1부를 쓰는 동안 <<군주의 통치에 관하여>>도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성직자를 군주의 위에 놓고 군주가 세속국가를 이끌어가는 원리를 제시하려 했다. 이 책은 아퀴나스가 사망하기 전까지 완성하지 못했기에 톨로메오가 완성하였다. 1268년 아퀴나스는 파리로 다시 돌아와 이븐 루슈드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랍학자들의 주석을 받아들여 정통 가톨릭 교리와 상반됨을 주장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자체를 반가톨릭적이라는 오명을 씌워지게 만들었는데 이에 대한 논쟁을 위해 아퀴나스는 두 편의 소책자를 저술하였다. 이 두 편의 소책자에서 그는 능동지성과 수동지성이 모두 개인의 능력이라는 주장과 세계가 어떠한 시작점을 지닌다는 사실을 철학적 논증에 의해 확립, 반박 불가의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주장들을 통해 그는 이븐 루슈드주의자들에 맞서고 프란체스코회의 신학자들과 맞서게 되었다. 이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방어책으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을 명확히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계속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 대한 주석 작업을 진행하여 나갔다. 그가 파리에서 두 번째로 머물었을 때 가장 주요한 것은 <<신학대전>>의 2부를 저술한 것이다. 2부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인용되고 주제상 <<반이교도대전>>의 3권에 대응하지만 그 내용이 더 방대하며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영향을 받은 점이 더 많이 등장한다. <<신학대전>> 2부 전반부는 인간 삶의 궁극적 목표 고찰로 시작한다. 그는 궁극적 목표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행복이라 주장하며 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입장을 같이한다. 하지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차이를 보이는데 그 차이점은 행복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활동이 오직 신의 본질을 관조하는 데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주장하고 현세의 일상적 상황에서 행복이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 참된 행복은 오직 천상에서 축복받은 영혼만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덕이 행위와 정서 모두에서 표현되는 심리적 성향이라 함에 따라 자신도 행위와 정서에 관한 언급과 덕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한다. 그는 성향 개념에 대한 일반적 고찰도 제시하는데 이것은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철학이 쇠퇴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큰 중요성을 유지하였다. 덕에 대한 아퀴나스의 언급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언급에 기초하지만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목록에 사랑 믿음 희망을 더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과 기독교에서 칭송하는 성격상의 특성을 연결하고 악과 죄를 연결한다. 신학대전의 전반부 마지막 주제는 은총과 법으로 법의 본성,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의 구별, 본성과 은총사이의 관계, 구약의 법과 신약의 법 사이의 대비, 죄인을 구원하는 것의 정당성 등의 주제를 다룬다. 이런 주제들에서 아퀴나스는 신교와 구교의 중간정도의 입장을 고수 한다. <<신학대전>>의 2부 전반부가 윤리학적 성격을 지닌다면 후반부는 개별적 도덕주제에 대한 상세한 가르침을 포함한 각론이다. 후반부에서는 각각의 덕이 분석되고 죄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믿음 사랑 이외 다른 덕들은 4주덕(사려 용기 정의 절제)을 상위 구조 삼아 논의되는데 그 중 정의에 관한 분야 중 하나를 경건함이라 하고 이를 신에게 돌려야하는 것을 마땅히 돌려야 한다는 덕이다. 아퀴나스의 덕 목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목록과 일치하지 않는데 이유는 그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등장하는 이교도적 특성을 보이는 몇 가지 덕을 기독교화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예로 자신의 탁월성을 관대함과 겸손의 덕과 양립할 뿐만 아니라 겸손의 일부로 만드는데 이 두 가지를 자신의 장단점에 대한 정당한 판단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신학대전>>의 2부는 활동적 삶과 관조적 삶의 비교로 마무리 되는데 여기서 아퀴나스는 관조적 삶을 바람직하게 여기긴 하지만 선교와 가르침을 포함하는 관조적 삶을 최선의 삶으로 보았다. 이 시기 <<신학대전>> 2부외에도 많은 저술을 썼는데 대표적으로 <<형이상학>>에 대한 주석이 있다. 그가 1272년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에서 머물 때 <<신학대전>> 3부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3부는 오로지 신학적 주제만 다루며 성찰하였다. 이를 통해 아퀴나스는 자아정체성 개체화 술어논리 등에 대하여 언급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며 물질적 실체의 본성과 실체의 변화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신학대전>>은 완성되지 못하였는데 그는 망연자실한 상태에 빠지는 일을 자주 겪었으며 신비한 체험을 하기도 한 후 더 이상 모든 학문적 활동을 중단하고 집필하지 않았다. 이후 그의 비서와 동료들이 아퀴나스가 죽은 후 죽음 심판 천국 지옥 부분에 대하여 이전의 저술을 참고하여 마무리하였다. 1274년 공의회를 참가하기위해 북쪽으로 갔지만 리옹에 도착하기 전에 몸이 좋지 않아 포사노바에서 머물다가 몇 주 후 시토 수도회 소속 수도원으로 옮겼고 1274년 3월 7일 세상을 떠났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