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오컴부터 오컴에 대한 반응

윌리엄 오컴

1-1 오컴은 스코투스가 떠난 직후  옥스퍼드에 도착했다. 그의 성은 잉글랜드 작은 마을 오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280년대 후반 출생했으며 프란체스코 교단이다. 런던 회색 수도원에서 철학적 훈련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310년 전후 신학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옥스퍼드에 갔으나 스코투스주의자들과 대립했다. 수많은 논쟁을 이끌었고 논리학과 자연학 저술 및 운명예정설과 미개의 우연에 관해 상당한 영향을 끼친 저술도 썼다.  유명하게 알려진 ‘오컴의 면도날’ , 즉 실재들은 필요 이상으로 늘어나면 안된다는 주장으로 잘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가 이런 말을 하진 않았다고 한다.

1-2 그는 논리학과 형이상학과 관련해 스코투스의 것을 더 발전시킨다. 혹은 정반대 되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스코투스의 것에 비해 사유 자체도 덜 복잡하며 언어도 더 명료한 장점이 있다. 그는 존재를 한 가지 의미를 지닌 용어로 신과 피조물 모두에 적용하는 것으로 여겼다.  또한 창조된 존재 수를 줄이며,  실체와 속성을 축소했다.

1-3 스코투스와 다른점은 보편의 본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많은 개체 사이에 공통적 본성이 있다는 것을 거부했다. 보편은 오직 우리 정신 안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보편은 사물이 아니라 기호이며 단지 많은 것을 나타내는 기호란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기호는 자연적 기호와 관습적 기호가 있다. 전자는 우리 마음의 생각이며 후자는 이런 생각을 표현 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 낸 단어다.

2-1 그를 유명론 ( nominalism)자 라고 부르는 것 보단,  개념 실재론자 (conceptualist)라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또한 그의 초기 이론에선, 정신이 실재하는 사물을 닮은 정신적인 상 또는 ‘허구’를 만든다고 보았다.  실재하는 것에 대응하는 것으로 정신적 명제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제공 한다는 것이다. 훗날 이 견해에 대해 비판을 받았고 이러한 주장을 포기했다.  또한 오컴은 객관적 지식과 추상적 지식을 구별한 스코투스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오컴의 이런 주장은 스코투스의 것을 더 명확한 것으로 만들었다. 스코투스가 제시한 인식론적 가능성은, 동시에 회의주의에 이르는 길을 크게 넓혔다.

2-2-1컴은 프란체스코 수도사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그의 철학적 전환점은 교황과의 대립 문제에서 발생했다. 오컴은 교황의 포교와 명령들이 부도덕하며 이단적이라며 공개적으로 이를 비난했다. 결국 교황에게 이단으로 낙인 찍힌 후 루트비히의 아래로 도망치게 된다. 그곳에 있던 것은 루트비히의 또 다른 철학적 후원자 였던 ‘마르실리오’ 였다. 그 역시 요한네스22세를 비난했다. 또한 교황 제도 자체에 반대했다.

2-2-2 마르실리오의 책 《평화의 옹호자》(Defensor pacis , 1324) 는 정치철학의 고전적 문헌이다. 이 책은 세련된 철학적 수준을 갖췄고 당시 교황 편에서는 쉽게 반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후에는  정통파 카톨릭 학자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계기 또한 제공하게 된다.

2-3 오컴의 견해 중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연권 이론이다.( OND6. 268~71).  마르실리오의 정부 개념은 당시 이탈리아를 근거로 형성된 반면, 오컴은 신성로마제국을 바탕으로 했다. 그는 자신의 통치자를 선택할 권리는 인간의 자연권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2-4 오컴은 흑사병이 유행하던 1394년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당한 상태로 뮌헨에서 세상을 떠난다.

오컴에 대한 반응

 

1-1 중세 전성기 파리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은 가장 규모가 큰 대학이었다. 그 중 파리의 수많은 사상가들이 오컴 저술의 특정한 주제들을 추적해 발전시켰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의 그레고리오는 오컴의 자연철학을 받아들였다. 소르본의 학장이었던 뷔리당은 오컴의 유명론에 공감하며 세계를 과학저긍로 탐구함으로써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오컴보다 훨씬 더 신뢰했다.

1-2-1오컴의 인식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두 프랑스 학자로 시토 수도회 소속인 미르쿠르의 장과 세속의 수사 신부였던 오트르쿠르의 티콜라가 있다. 장의 인식론은 오컴의 개념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또한 장은 후에 데카르트가 ‘두 번째 성찰’의 첫머리에서 도달한 관점과 매우 유사한 태도를 보이며 데카르트의 관점을 예견한 듯도 하다.

1-2-2 장과 달리 니콜라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회의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기 위한 통로로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여기 지금 지성적인 사고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지성이 현존한다’는 주장조차도 확실한 논증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2 -1 옳든 그르든 간에 니콜라의 회의주의는 이후 오컴의 가르침이 낳을 수 있는 극단적이고 과도한 경우를 드러내는 예로 자주 인용되었다. 마찬가지로 20세기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니콜라를 자신들의 탁월한 선구자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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