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티우스의 위안부터 고대말기의 그리스 철학까지

1.보이티우스의 위안

1-1. 5세기에 이르러 로마제국은 주로 서쪽에서 외부의 침입을, 동쪽에서는 주로 신학적 논쟁을 함께 겪었다. 5세기를 거치면서 고트족과 반달족의 뒤를 이은 훈족의 아틸라 왕은 고트족의 왕과 연합한 로마장군인 갈리아에게 패할때까지 중국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또한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인간의 육체를 얻었다는 이른바 성육신(incarnation)의 교리에 대해 하나의 위격(person)인 그리스도가 서로 구별되는 두 본성을 가지느냐 혹은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을 모두다 가지느냐에 따라 공의회와 교황간의 논쟁이 있었다.   사상사의 측면에서 5세기 공의회 ‘위격’과 같은 전문 용어의 의미를 고심 끝에 통일함으로써 그 다음 세기에 전개된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1-2. 훈고족의 아틸라의 침략을 물리치긴 했지만 서로마제국은 그후 25년밖에 유지되지 못하고 이탈리아의 권력 대대분을 용병 지휘관에게 주고 말았다. 이 중 오도아케르(Odoacer)는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아우구스툴루스를 나폴리 근처로 추방했으며 그 후 50년 동안 이탈리아는 고트족의 지배를 받았다. 고트족의 왕은 기독교였지만 교리적 논쟁에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기독교 파들 중 아리우스파를 받아들였는데 이 교파는 오래전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이미 이단으로 판정받은 교파였다. 이 교파는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신인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 혹은 실체를 공유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고트족 왕중 테오도리쿠스는 아리우스파, 유대인, 정통 기독교 등 모두 평온을 유지하면서 관용을 베푸는 통치를 했으며 이를 통해 예술과 문화의 번영을 이루었디.

1-3. 이 테오도리쿠스의 장관 중 한 사람이 바로 보이티우스(Manlius Severinus Boethius)였는데 그는 상당한 권력을 지닌 로마 원로원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성실함과 탁월한 능력으로 행정의 최고직위인 ‘국무장관’이 되었지만 가톨릭교의 콘스탄티노플 황제 유스티누스 1세와의 편지를 주고받는 도중 반역을 의심받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유명한 저술 «철학의 위안»을 썼다.

1-3-1. 그는 이 책 첫 머리에서 철학을 위엄있고 다소 나이는 많지만 살결이 희고 금발이며, 더없이 정교하게 짜긴 했지만 무척 낡은 옷을 입은 여성을 철학으로 비유했다. 1권에서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비판에 맞서 스스로 옹호하려 한다. 그가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 까닭은 철학자라면 정치적인 일에도 적극적이어야한다는 플라톤의 명령에 따라 공직에 들어섰기 때문이라 한다.

1-3-2.  2권에서는 스토아학파적인 주제가 전개되는데 행운에 따라 좌우되는 것들이 우리 자신 안에 가치와 비교할 때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3권에서는 진정한 행복이 겉보기 좋은 것들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위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활용한다. 또한 4권에서는 ‘왜 사악한 자들이 번영을 누리는가?’라는 질문에 플라톤의 «고르기아스»를 통해 사악한 자들의 번영은 단지 외관상의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인다. 마지막 5권에서는 ‘신의 섭리가 지배하는 세계에 행운이나 우연같은 것들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신은 시간을 벗어난 존재이므로 섭리가 예지를, 즉 미리 아느 행위를 포함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방식을 취한다.

1-3-3. 그는 단지 이 저술을 통해 위안을 찾았기를 바랄뿐이었으나 극심한 고문을 당해 결국 곤봉으로 맞아 처형당했다. 그 후 많은 기독교들이 그를 순교자로 여겼으며 그를 성 세베리누스(St Severinus)라고 불렀다. 15세기 인문주의자였던 발라는 그를 ‘최후의 로마인인 동시에 최초의 스콜라철학자’라고 불렀으며 카토나 키케로가 진정한 동료라고 인정할만한 마지막 로마인이라고 말했다. 또한 «철학적 위안»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그가 높이 평가한 모든 요소를 모아놓은 일종의 자료집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 안의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와의 관계에 대한 그의 논의는 중세 기독교 시대동안 큰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스토아학파의 논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2. 고대 말기의 그리스 철학

2-1. 기독교의 관점에서 이교도 철학인 그리스철학은 보이티우스가 죽음을 맞아할 당시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의 철학 학교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 중이었다. 5세기 아테네 학교의 수장은 프로클로스(Proclus)였는데 그는 몇몇 플라톤 대화편에 주석을 쓰고 플로티누스의 «엔네아데스»에 관한 백과사전적 저술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적절한 개론서 역할을 하는 «신학원리»를 쓰는등 활발한 저술활동을 했다.

2-1-1. 그의 체계는 일자와 정신, 영혼이라는 세 요소로 이루어진 플로티노스의 사상에 기초한다. 이 세 요소의 내부에는 각각 일종의 발전 과정이 진행되는데 이는 원래의 요소가 지녔던 본성을 공유하면서도 원래의 요소와는 다르다.  자신의 근원 안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 나아가 다시 근원으로 돌아온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영혼,정신, 일 자의 세계 모두에 걸쳐있다. 인간의 영혼은 동물적 육체와 결헙해 에로스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며 인간 영혼 안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 진리에 대한 탐구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있다. 또한 영혼은 사고 능력보다 높은 능력도 지니는데 이를 사용해서 신비적이고 무아적인 경제에 도달해 일 자와의 합일을 추구하기도 한다. 이 이론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설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사실 그는 기독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다.

2-2.  5세기 알렉산드리아에는 막강한 권력을 쥔 기독교 대주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교도 철학이 아테네에 비해 번성하기 힘들었지만 신플라톤주의자이자 수학자, 천문학자 그리고 당대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철학에 우뚝 선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Hypatia)가 있었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쓰고 있을 때 광신적인 기독교 폭도들에 의해 사지가 찢겨 죽었다.그리고 플로클로스의 알렉산드리아 철학학교의 마지막 철학자인 암모니오스(Ammonius)도 있었다. 이 두 철학자는  로마법 대전을 편찬한 입법자이자 정복자인 유스티아누스 1세의 치하에서 활동했다.

2-3. 아테네 철학학교는 프로클로스의 반기독교적인 신플라톤주의를 게승했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에서 탐탁찮게 여겨졌다.  이 학교의 마지막 학자인 심플리키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의 저술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소크라테스 이전까지의 철학자의 말을 폭넓게 인용하여 이 후 철학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529년 아테네 철학 학교는 반기독교적인 경향을 이유로 유스티나아누스 황제에게 폐쇄당했다.

2-4. 플로포노스와 심플리키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박해받았지만 그 이유는 각각 달랐다. 필로포노스는 심플리키우스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를 잘 알면서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기독교도로서 세계가 영원하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세계에는 시초가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프로콜르스 주장을 뒤집으려 했다.  또한 그는 많은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들들처럼 성육신의 과정에서 그리스도가 오직 하나의 본성만을 지닌다는 단성론자였다. 이에 대해 황제는 그를 소환해 성육신에 대한 견해를 옹호하라고 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황제보다 몇 해 더 살았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이단적인 가르침을 이유로 파문당했다.

2-5. 필로포노스가 죽은 후 두 세기 동안 철학은 동면에 빠져들었으며 600년에서 800년 사이에 로마제국은 그리스나 발칸 반도의 여러나라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수준으로 떨어졌고 지적인 재능이 주로 신학적 논쟁에 소비되었다. 필로포노스가 속한 단성주의 교회는 이에 반대하는 정통교회에 의해 축출되었다.  하지만 본성이 두 가지여도 의지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하나의 현실태로 결합할 수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그는 기독교 교단을 재결합하려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흔히 고백자라고 알려진 막시무스는 ‘그리스도 단일 의지론’에 대항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의지와 현실태 개념을 상세히 분석하면서 그의 독창적인 연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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