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윤리학 부터 행복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까지

1.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윤리학

1.1.초기 그리스철학자들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 중에는 도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 많다. 예컨대, 탈레스는 ‘네가 대우받기를 바라는 대로 너도 행하라’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며, 어떻게 해야 최선의 삶을 살수 있는냐는 질문을 받고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했을 때 비난받을 만한 일을 우리 자신이 하지 않으면 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신비적이고 애매한 언급을 하곤 했는데 예컨대 ‘인간이 원하는 바를 모두 얻는다해도 이는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 ‘어떤 사람의 성격은 그의 운명이다’고 말했다.  그 외 다른 철학자들도 특정한 도덕적 문제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드러냈지만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름대로 도덕적 체계를 갖춘 철학자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2.도덕철학자 데모크리토스

2.1. 데모크리토스는 윤리적 주제에 대한 많은 언급을 남겼다. 그의 단편들 중 60여 쪽이 도덕적 충고인데 대부분은 일상의 삶에 관한 소박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자산의 능력을 넘어서는 임무를 맡지 말라, 부와 명성을 부러워하지 말라, 자신보다 처지가 나쁜 모든 사람을 생각하라 등 충고가 등장한다. 그의 조언은 자주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는데 ‘아이를 낫지 않는 편이 낫다’라는 말과 함께 그는 스스로 아이를 낳기 보다는 친구의 양자를 들이는게 낫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다른 말 ‘일상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아이를 낳는다면 어떤 아이가 태어나든 만족해야만 한다’라는 말과 상충한다.

2.2. 플라톤 이래로 많은 도덕철학자들이 육체를 영혼을 타락시키는 존재로 보는 반면 그는 정반대의 견해를 보였다. 만약 영혼이 육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영혼에 있는 것이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육체가 영혼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해도 도구가 나쁜 상태를 보이는 것은 도구 자체가 아니라 그 소유자에게 비난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2.3. 데모크리토스의 도덕적 견해는 일련의 경구나 격언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지만 그가 체계적인 윤리학을 전개하였다는 몇몇 증거들도 있다. 하지만 그의 도덕적 견해가 그의 원자론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호하다.  그는 삶의 목적에 관한 저술을 쓰면서 행복(eudaimonia)의 본성을 탐구하였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부유함이 아니라 영혼의 선함에서 발견되며. 우리는 유한한 것들에서 쾌락을 찾아서는 안된다.  또한 그는 교육받은 자들의 희망이 무지한 자들의 부유함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러나 행복안에서 발견되는 영혼의 선함은 고귀하고 신비한 종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이상은 오히려 즐거운 삶과 조용한 만족에 가까웠으며 이런 이유로 그는 후대에 웃는 철학자로 알려졌다.

2.4. 그는 뒤이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일종의 모범을 제공했다. 예컨대 ‘죄의 원인은 더 선한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조언은 소크라테스의 도덕 사상의 핵심을 이미 드러낸 것을 보여준다. 또한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보다 나쁜 일을 당학는 편이 훨씬 낫다’라는 말에서 후에 소크라테스가 일종의 원리로 발전시킨 생각을 이미 제시했다. 하지만 이 원리는 행위를 결과로 판단해야하고  행위자가 누구인지 확인해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공리주의와 같은 도덕체계와는 양립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2.5. 하지만 데모크리토스는 고대 그리스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아르테(arete) 또는 덕에 관하여 탐구하지 않앗다. 이 단어는 영어의 어떤 단어와도 일치하는게 없기 때문에 최근에는 이 덕을 ‘virtue’ 대신에 탁월성이라는 뜻의 ‘excellence’를 자주 사용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말이나 칼에 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치게 고풍스러워 어색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들 둘이 지닌 개념적 구조상 차이는 고대의 도덕철학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난점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3.덕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견해

3.1. 덕의 본성에 관한 체계적인 탐구를 시작한 인물은 소크라테스인데 그는 덕을 도덕철학의 핵심에, 더 나아가 철학 전체의 핵심에 놓았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는 특히 여러 덕목들이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에우티프론»에서는 경건함(hosiotes)이,  «카르미데스»에서는 절제(sophrosyne),  «라케스»에서는 용기(andreia),   «국가» 1권에서는 정의가 논의된다.

3.2이들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문답(elenchus)을 통하여 그 안의 인물들이 만족스러운 정의를 제시할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각 대화편은 결론 없이 끝난다. 하지만 위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무지를 고백한다고해서 소크라테스가 도덕적 덕들에 대한 어떤 확신도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무언가를 지식으로 간주하는데는 무척 높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3.3. 소크라테스는 덕의 본성을 탐구하면서 거듭하여 덕을 목수일,항해술, 의술 등 전문적 기술이나 기예 또는 산술학과 기하학 같은 학문과 비교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고대에서 부터 현대까지 이어졍왔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로 지적될 수 잇다.

하나는 만일 우리가 지성과 의지를 뚜렷하게 구별하는 것은 수 많은 세대를 거쳐 철학적 반성의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며 이 최초의 반성에 원동력을 부여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덕들과 여려 형태의 전문적 기술에는 중요한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 둘은 모두 타고나기보다는 태어난 후에 획득되며 둘 다 가치있는 특성에 속한다.그는 둘 모두 이를 지닌 사람에게 이익을 주장한다.

3.3.1 그는 이 둘의 사이의 유비를 계속 제시하면서 비교하며 대조하려하며 이 둘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검토하려 한다.  차이점 중 하나느 예술과 학문이 전문가의 가르침을 통해서 전수 될 수 있는 반면 덕을 가르칠 수 잇는 어떤 전문가도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또한 기술의 의도적인 실수가 저지른 사람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는 반면 덕을 갖추는데 의도적인 실패를 한 경우에는 이 행위가 무의식적인 실패보다 덜 나쁘다고 말하기에 매우 이상하게 들린다.

3.3.2. 그는 기술과 덕의 차이에 대해 논하면서 이 둘이 결국 동일시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앞에 말한 고의적인 문제에 대해 고의적으로 덕과 반대되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악행은 무지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한 지식 즉, 지혜(phronesis)없기 때문이다.

3.3.3. 또한 덕을 가르치는 교사가 없는 이유는 덕이 일종의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히 습득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지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식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전제를 제시한다. «프로타고라스»라는 제목의 대화편에서는 그는 선은 쾌락과, 악은 고통과 동일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만약 쾌락과 선이 동일한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사람들은 선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악을 저지른 셈이 되는 것이고 이는 불합리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3.3.4. 하지만 위의 전제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어떤 행위가 악하다는 지식은 그 행위의 결과를 고려했을 때 쾌락보다 큰 고통을 낳는다는 지식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른 행위를 하는 사람은 이런 지식이 부족함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쾌락과 고통, 현재와 미래의 크기를 비교하고 측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식이며 이런 선택이 바로 정의,절제,용기라는 덕들 각각의 서로 동일한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4. 정의와 쾌락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

4.1. ‘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진정으로 쾌락의 계산에 대 생각했는지는 학자들간에 일치하지 않는다.그러나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정의란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조화라고 주장한다. 우리 영혼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경우에만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는 정의로운 역할이라는 것이다.  즉 절제를 가진 일반시민, 용기를 가진 수호자, 지혜를 가진 통치자들이 각 계층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정의인 것이다.

4.2. 쾌락과 덕 간의 관계에 대해 대화 초기편에서는 쾌락은 덕의 목적이 아니라 영혼의 하위 부분이 동반하는 바로 드러나며 정의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이익을 준다는 결론은 보인다.  그러나 이는 잠정적인 결론이다. 왜냐하면중반부에 이데아의 역할이 해명된 후에는 정의로운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설명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영혼을 지혜로 가득 채우는 일은 그저 정욕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보다 훨씬 더 기쁨을 준다. 그는 정욕,기개,이성 중 어떤 요소가 그의 영혼을 지배하는가에 따라 탐욕스러운 인물, 야망을 가진 인물, 학문적인 인물로 분류되는데 이들 중 학문적인 사람인 철학자의 판단을 가장 선호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경험과 통찰, 추론 등에서 다른사람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4.3.하지만 플라톤은 아직 쾌락의 계산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 군주가 사악한 참주보다 729배나 행복한 삶을 산다는 논거를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대화편 «펠레보스»에서 쾌락이 최고 선이라고 주장하는 프로타르코스와 지혜가 쾌락보다 우월하며 우리를 행복으로 더욱 잘 인도한다고 보는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쾌락도 지혜도 행복한 삶의 본질이 아니라 두 요소가 적절하고 혼합된 삶만이 진정으로 선택할 가치가 있다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최고선은 쾌락과 지혜가 적절한 비율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5.행복에 관한 아리스토테레스의 견해

5.1. «필레보스»에서 제시된 좋은 삶의 기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좋음은 다른 목적들과 비교해 볼 때 더욱 완전하여야만 한다-즉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항상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되어야한다. 또한 그것은 자기 충족적인 것, 즉 오직 그 자체만으로 삶을 가치있게 만들며 더 이상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것이어야한다. “라고 하며 이것이 바로 행복의 속성이라고 말한다.

5.2. 그에게 좋은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지혜,덕,쾌락,명예,평판, 부,교양’이라는 7가지 후보로 내세운다. 또한 어떻게 이에 도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본성을 통해서, 배움을 통해서, 훈련을 통해서, 신의 호의를 통해서, 행운을 통해서’이라는 5가지 후보를 등장시킨다. 그러나 두번째 대답에 그는 몇가지를 배제한다. 왜냐하면 본성,행운,신의 은총으로 행복이 실현된다면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5.3.그러므로 그는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으려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무언가가 존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목적 중 하나는 쾌락이며 술,음식,성행위와 같은 동물수준의 쾌락이 아닌 미학적,지적 쾌락을 추구해야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좋은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지혜와 덕,쾌락으로 압축하여 제시한다. 이들은 각각 철학적,정치적,향락적 삶으로 드러나는데 이들이 행복과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보았다. 이 세 요소가 지니는 매력을 적절하게 결합함으로써 행복이 전통적인 삶의 형태에서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5.4. 그는 행복에 이르는 결정적인 단계를 설명하면서 윤리적인 영역에 잠재성과 현실성이라는 형이상학적 분석을 도입한다. 그는 어떤 상태(hexis), 활용(chresis), 발휘(energeia)를 구별하면서 덕과 지혜는 모두 상태인 반면 행복은 일종의 활동이므로 덕이나 지혜를 바로 행복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행복을 구성하는 활동은 덕의 활용 또는 발휘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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