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의 스토아학파부터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

로마제국의 스토아학파

1. 세네카와 에픽테토스 아우렐리우스

1-1 생애: 세네카는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49세 때 네로의 개인 교사가 되었고 네로가 황제가 된 후 곁에서 최고 조언자 역할을 하였으며 기원 후 62년 네로에 대한 모든 영향력을 잃고 65년 반란의 혐의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기원 후 1세기에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여겨지며 열 개의 윤리적 대화편과 은퇴 후에 남긴 124편의 서한으로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주 관심 분야는 윤리학이었으며 자연 과학에 대하여 관심이 있어서 저술도 썼지만 이는 자연 현상에서 도덕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었다.

1-2 세네카의 철학이론: 그는 정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노력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육체적 혼란과 그릇된 판단의 분명한 구별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진정으로 벗어나야 할 본질적인 것은 그릇된 판단임을 주장하였다. 마음에 우연히 떠오르는 것 존재하는 대상을 보고 영향을 받아 생긴 것은 정념이라 할 수 없으며 이러한 것에 굴복하여 우연으로 따르는 것이 정념이라 하였다. 그렇기에 신체적 현상보다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는 유물론자로 영혼이 물질적인 세계의 일부라 생각했지만 내세에 대하여 염두를 두고 있었다. 그는 스토아학파가 제시한 덕에 이르는 길이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며 도덕적 발전을 세 단계를 구별했다. 또한 이론과 교훈 사이의 정의를 명확히 하여 구별을 용이하게 하였다.

1-3 세네카에 대한 평가 및 에픽테토스와 아우렐리우스: 세네카는 위선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스토아학파가 제시한 기준에 따르는 삶을 살았다고 평가를 받았으며 로마제국의 스토아학파 창시자이다. 에픽테토스와 아우렐리우스 모두 세네카와 유사하게 도덕철학과 연관이 있다. 에픽테토스의 저술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 중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어떤 악도 진정으로 우리를 해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보이기 위해 자아와 도덕적 의지를 동일시하였다. 아우렐리우스는 주요 철학학파들을 위한 학교를 위한 학교를 세웠으며 명상록이라는 저술을 통해 여러 격언과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자신에 철학적 의견을 보인다.

초기 기독교 철학

2. 초기 기독교 철학의 상황과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2-1 초기 기독교 철학과 상황: 에피쿠로스학파 주의와 스토아학파가 아우렐리우스로 마무리되었다. 아우렐리우스 지배 당시 기독교를 잔인하게 박해하였으며 최초의 기독교 철학자 유스티누스가 기독교를 옹호하는 변증론을 헌정하고 이후 처형되었다. 2세기 기독교인들은 최초로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예수와 바울로의 종교를 조화시키려 시도 하였다.

2-2 클레멘스: 일련의 잡기라는 저술을 출판하였으며 교양 있는 기독교인은 철학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플라톤의 사상을 이원론을 주장하는 이교도들에 대항하는 동맹으로 여기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기독교와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하였고 정념으로부터 자유를 주장하는 스토아학파의 이상을 찬미했다. 그는 구약성서의 우화적 측면을 배제하려 하며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다시 드러내었으며 여러 문헌을 편집하여 대중화하였다.

2-3 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 출신 플라톤주의자인 암모니오스 사카스의 제자로 당시 기독교인들이 이단으로 여기던 철학 사상들을 자신의 체계에 수용하려 하였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탄생 이전에 존재한다고 믿으며 자유정신인 영혼이 육체와 결합 후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자유의지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즉 모든 이성적 존재가 구원받으며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에 충성을 맹세하며 로마제국에서 추방 후 신과 자유 불멸성에 대하여 기독교적 믿음을 옹호하는 철학적 논증을 펼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부활

3. 플루타르코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의 주석 전통

3-1 플루타르코스: 그리스 영웅과 로마의 영웅을 비교한 영웅전을 쓴 역사가이다. 영웅전 이외에도 대중적인 철학적 주제에 관한 글을 모아 도덕론을 펴냈다. 플라톤주의자로서 대화편 티마이오스에 대한 주석을 달았으며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에 반대하는 수많은 논쟁적 글을 써 두 학파의 체계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3-2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에 관한 주석 전통: 플라톤주의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부활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시기인 만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 대하여 전문적인 주석 전통이 만들어졌다. 또한 이 시기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주석으로부터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로 여기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그 외에 알렉산드로스가 형이상학 감각에 관하여 기타 논리학 저술들에 대한 주석 작업도 이루어졌다.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

4.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

4-1 플로티노스: 오리게네스와 동시대 사람이며 플라톤이 생각하던 국가를 캄파니아지역에 세우려고 항상 생각하였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제자가 6가지 주제로 그의 저술을 분류하였는데 그것은 윤리학과 미학, 자연학과 우주론, 심리학, 형이상학, 논리학, 인식론의 6가지이다. 그의 사상체계에서 중요한 개념은 일자 개념으로 단일성을 존재의 핵심적인 속성으로 본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에서 플라톤으로 플라톤에서 플로티노스로 이어진 개념이다. 일자는 플라톤이 언급한 선의 이데아와 동일시되며 모든 존재의 기초이며 모든 가치의 기준이다. 그러나 일자는 존재와 선을 넘어서 있기에 모든 것은 일자로부터 이어지는 하나의 연속적인 유출과정으로 존재한다. 연속적인 유출과정이란 대략 일자->정신->영혼->자연->순전한 질료로 구성되는 과정으로 각각이 상위 단계와의 의존을 통해 현존하고 활동할 수 있다. 이러한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적 체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도출된 철학적 원리를 기초로 제시된 것이다. 그의 사상은 죽은 뒤 유지되지 못했지만 기독교들에게 전해졌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4-2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는 354년 기독교 어머니와 이교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라틴 문학과 수사학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그의 젊은 시절은 자서전 격인 고백록에 의존한다. 그는 겉핥기로 그리스어를 배웠지만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칠 수 있었다. 18세 때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플라톤의 사상에 빠지게 되었으며 10년간 마니교를 믿었다. 이후 로마로 건너가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와 친분을 나누고 그 후에 어머니와 암브로시우스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전향하였다. 387년 세례 후에도 여전히 플로티노스철학의 영향을 받았는데 몇 편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적 신플라톤주의를 분명히 드러내었다. 아카데메이아학파에 반대하여 라는 저술에서는 아카데메이아 중심의 회의주의에 반대하는 논증을 보이고 이데아에 관하여 에서는 이데아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제시하여 이데아를 신의 정신 안에서 영원불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 외에도 자유의지론과 83가지 서로 다른 질문들이라는 저술 등이 존재하며 플라톤주의의 입장을 유지한다. 이러한 저술들은 391년 사제 임명 직전에 쓴 것으로 사제가 된 후에도 신국론을 포함한 여러 저술을 썼지만 사제임명 이후 저술들에서는 플로티노스의 제자가 아닌 중세 기독교 철학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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